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에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p.19~20
수는 어떤 원소들이 특정한 차원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따라 원소들을 측정하는 보편적 개념이기를 멈추고, 해당되는 그 차원들에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었다(어떤 영역은 그 영역에 속해 있는 복소수보다 우선적이다). 우리에게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통일성(=단위)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다양체 안에서 기표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주체화 과정이 생겨날 때뿐이다. 이런 식으로 주축-통일성과 <하나>가 생겨난다. p.21~22
그러나 정확히 말해 리좀이나 다양체는 자신을 덧코드화하게 놔두지 않는다. 이들의 선들의 수, 다시 말해 선들에 갖다 붙여진 수들의 다양체 위에 존재하는 보완적 차원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고른판에 대해 말할 것이다. 비록 이 "판" 위에서 이루어지는 연결접속들의 수에 따라 판의 차원 수가 커지기는 할 테지만. 다양체들은 <바깥>, 즉 추상적인 선, 도주선(ligne de fuite)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거해 정의되며, 다양체들은 이 선에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연결접속하면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고른판(격자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도주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다양체가 실제로 채우고 있는 유한한 차원들의 수가 실재한다. 둘째, 다양체가 이 선에 따라 변형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보완적인 차원도 존재 불가능하다. 셋째, 이 차원들이 어떤 차원이건 간에 이 모든 다양체들은 단일한 고른판 또는 외부성의 판 위에서 판판하게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야 한다. 책의 이상은 이러한 외부성의 판 위에, 단 한 페이지 위에, 단일한 모래사장 위에, 체험된 사건, 역사적 결정물, 사유된 개념, 개인, 집단, 사회 구성체 등 모든 것을 펼쳐놓는 일일 것이다. 클라이스트는 이런 유형의 글쓰기, 즉 변용태20)
To learn more HTML/CSS, check out these tutoria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