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수의 노트 3


2023. 06. 21. 22:29


의미의 논리


루이스 캐럴에서 스토아 학파로 - 머리말

루이스 캐럴의 책은 독자들, 특히 어린 소녀들을 즐겁게 해줄 갖가지 것들을 담고 있다. 기묘하고 이국적이지만 동시에 찬란하기도 한 단어들, 재미있는 구성,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그림들과 사진들. 게다가 우리는 상당한 수준의 정신분석학, 뛰어난 논리학-언어학적 공식들까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던져주는 가장 심층적인 즐거움은 의미와 무의미의 놀이,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얽힘[카오스모스]일 것이다. 언어와 무의식의 만남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종류의 분석들이 나왔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루이스 캐럴에서 이러한 만남이 어떤 특이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이 칙은 의미 이론을 형성하는 역설들의 계열들을 제시한다. 의미 이론을 역설로부터 분리하기 힘들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의미는 실존하지 않는 무엇이며, 나아가 무의미와 매우 특수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 캐럴을 중요하게 다룬 것은 그가 처음으로 의미의 역설들을 모으고 새롭게 바꾸고 발명하고 마련함으로써 부각시켰기 때문이다. 스토아 학파의 경우는 이들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제시한 것과는 전혀 다른 철학자 상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철학자의 이 새로운 모습은 의미 이론의 역설적인 구성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그래서 각각의 계열에는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논리학적이고 심급론적이기도(topiques) 한 형상들(figuers)이 대응한다. 마치 맑은 표면에서처럼, 한 계열 내의 일정한 형태를 구성하는 점들은 다른 형태를 구성하는 점들과 대응한다. 문제들의 별자리는 그에 대응하는 주사위놀이들, 이야기들과 장소들, 하나의 복잡한 장소, '얽힌 이야기'를 형성한다. 이 책은 논리학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소설이 되고자 한다.
뒤에 실린 다섯 편의 보론은 다른 지면에 이미 발표되었던 것들이며, 이 책의 맥락을 고려해 조금씩 수정하여 수록했다.



제 1부 - 계열



역설들의 계열 1 - 순수 생성

플라톤적 이분법
[거울의 이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매우 특수한 존재들, 즉 사건들, 순수 사건들이라는 범주이다. 내가 "앨리스는 자란다"고 말할 때, 나는 [이 말로] 그녀가 이전보다 더 커짐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는 곧 그녀가 지금보다 더 작아짐을 뜻한다. 분명 그녀는 보다 크면서 동시에 보다 작을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보다 커지고 [시간을 거꾸로 보았을 때] 보다 작아지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다. 그녀는 지금 더 크고, 그 전에는 더 작았다. 그러나 그녀가 이전보다 더 커지는 것과 이후보다 더 작아지는 것은 동시적이다. 이것이 생성의 동시성이며, 그 고유한 점은 현재를 비켜가는(esquiver)데 있다.
현재를 피해가는 한에서 생성은 이전과 이후, 과거와 미래의 [일정한] 분리도 구분도 용인하지 않는다. 두 방향으로 동시에 가는 것은 생성의 본질에 속한다. 그래서 앨리스는 작아지지 않고는 커지지 않으며, 또 커지지 않고는 작아지지 않는다. 양식/일방향(bon sens)은 모든 사물이 일정한 방향성(sens)을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역설[para-doxa=contre-sens]은 두 방향을 동시에 긍정한다.
플라톤은 다음 두 차원의 구분을 제안한다. 1. 한계지어지고(limitees)*여기에서 '한계지어졌다'는 것은 아페이론 상태, 즉 아무런 극한도 없는 무규정 상태가 아니라 양끝을 부여받음으로써 일정하게 규정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무한히 연속되어 있는 소리들의 연속체에 일정한 한계들이 주어졌을 때 화음이 성립한다.* 측정된 사물들, 고정된 질들의 차원. 이 사물들과 질들은 항구적일 수도 있고 일시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휴지들(repos)로서의 정지들(arrets), 현재의 수립, 그리고 특정한 주체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이 경우 특정한 주체는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크기, 작기를 가진다. 2. 측정되지 않은 순수 생성, 미친듯이 움직이는 생성(devenir-fou). 이러한 생성은 양 방향으로 결코 멈추지 않으며, 늘 현재를 비켜가며, 길들여지지 않는 물질의 동시성 속에서 미래와 과거, 최대와 최소, 지나침과 모자람을 일치시킨다("보다 덥고 보다 추운 것은 어떻게든 움직일 뿐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반대로, 일정하게 제한된 양은 정지하며 존재하기를 그치지 않는 한 나아가지/변화하지 않는다." "보다 젊은 사람이 보다 늙은 사람보다 더 늙게 되고, 보다 늙은 사람이 보다 젊은 사람보다 더 젊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생성을 끝마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성하기를 그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생성하지 못할 것이요, 단지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플라톤적 이원론을 잘 알고 있다. 이 이원론의 참모습은 가지적인[이성적인] 것과 가시적인[감각적인] 것, 질료와 형성, 가시적 사물들과 형상들의 이분법에 있지 않다. 플라톤 철학의 참모습은 보다 심층적이고 보다 비밀스러운 이분법,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사물들 자체 내에 깃들여 있는 이분법이다. 이는 곧 형상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과 비켜가는 것 사이의 이분법이다. 그것은 원본과 복사본의 구분이 아니라 복사본들과 시뮬라크르들*'시뮬라크르'라는 현대어는 그리스어 'phantasma'에 해당한다. 플라톤에게 이 세계는 형상계의 그림자이다. 즉 세계는 'eidolon'이다. 이 말은 '그림자', '이마주', '복사물' 등을 뜻했다. 플라톤은 [소피스트]에서 두 종류의 'eidolon'을 구분한다. 하나는 형상(모델)을 받아들이는 'eikones'이며, 다른 하나는 형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phantasmata'이다. 'eikones'는 형상 자체는 아니지만 형상을 모방하며 형상과 비슷하게 되려고 노력한다('eikon'은 '비슷하다'를 뜻하는 'eoika'에서 나왔으며, 현대어 'icone'의 어원이다). 반면 'phantasmata'는 형상을 전적으로 거부한다. 현대에 이르러 'eidolon'은 'phantasie', 'phantasme', 'fantome'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최근에 이르러 'simulacre'와 'simulation'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되었다. 현대 철학의 반플라톤주의를 함축하고 있는 말이다.*의 구분이다. 순수 생성, 즉 무규정적인 것은 그것이 형상의 작용을 비켜가는 한에서, 그리고 원본과 복사본에 동시에 저항하는 한에서 시뮬라크르의 질료이다. 측정된 사물들은 형상들 아래에 있다[형상들을 모방한다]. 그러나 이 사물들 아래에는 그러한 질서 -형상들이 부과하고 사물들이 받아들이는 질서- 를 벗어나는 요소가 늘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플라톤 자신, 이 순수한 생성이 언어와 매우 특수한 관련을 맺고 있지 않는가라고 묻고 있다. 이것이 [크라틸로스]의 주요 내용들 중 하나이다. 이 관련은 파롤들의 '흐름(flux)', 자신이 가리키는 것 윙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는**'늙다'라는 말은 6살의 경우 5살에 대해 성립하지만 7살에 대해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7살로 높여잡을 경우, 이때에도 역시 6살에 대해서는 성립하지만 8살에 대해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일정한 기준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늙음/젊음'이라는 말은 정도(degre)를 구성하는 연속체 안에서 계속 움직인다. 이것을 '미끄러지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길 잃은 담론에서처럼 아마도 언어에 본질적인 무엇이 아닐까? 두 언어, '이름들'의 두 종류가 있어, 그 하나는 형상의 작용을 받아 들이는 정지와 고정을 가리키고, 다른 하나는 [형상의 작용에] 저항하는 운동들과 생성들을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언어 일반 자체 내에 별개의 두 차원이 존재해, 한 차원은 늘 다른 차원 아래에 은폐되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전복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무한한 동일성
현재를 비켜갈 수 있는 이 순수 생성의 역설은 다름아닌 무한한 동일성이다. 과거와 미래, 어제와 내일, 더와 덜, 너무와 아직, 능동과 수동, 원인과 결과 등, 두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무한한 동일성. 한계(예컨대 '너무'가 시작되는 순간)를 고정시키는 것은 언어이다. 그러나 한계들(limites)을 벗어나서 한계지어지지 않은(illimite) 생성의 무한한 등가성을 통해 그것들[한계들]을 복구시키는 것도 언어이다("[불에 달아] 벌겋게 된 부지깽이를 너무 오래 쥐고 있지 말라. 화상을 입을 것이다. 너무 깊게 칼질하지 말라. 손을 베일 것이다"). 이로부터 앨리스의 모험을 구성하는 뒤바뀜[전복]들, 즉 커지는 것과 작아지는 것의 뒤바뀜이 유래한다. "어느 방향, 어느 방향이에요?" 한번의 예외는 있었지만 움직임은 늘 두 방향으로 발생한 것이다. 어제와 내일의 뒤바뀜으로 인해 현재는 늘 지워진다. "어제와 내일의 복잡한 배합은 있지만, 오늘은 결코 없다." 더와 덜의 뒤바뀜, 다섯 밤은 한 밤보다 다섯 배 덥지만, "똑같은 이유로 그들[다섯 밤]은 또한 다섯 배 추워야 한다." 능동과 수동의 뒤바뀜. "고양이가 박쥐를 먹는가?"는 "박쥐가 고양이를 먹는가?"와 동등하다. 원인과 결과의 뒤바뀜. 죄를 범하기 전에 벌받고, 상처를 입기 전에 소리지르고, 참여하기 전에 역할을 행하는 것.

앨리스의 모험(=사건들)
무한한 동일성 속에서 등장하는 이 모든 뒤바꿈들은 앨리스의 인칭적 동일성의 흔들림, 고유 명사의 전락이라는 같은 결과를 낳는다. 고유병사의 전락은 앨리스의 모든 모험들을 관통해 반복되는 모험이다. 왜냐하면 고유 명사 또는 단 수 명사는 한 지식[정보]의 항구성에 의해 [그 동일성을] 보장받으며, 이 지식은 일정한 고정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정지와 휴지(명사적인 경우든 형용사적인 경우든)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들 속에 구현되기 때문이다.*철수라는 고유 명사는 '......의 아들', '......학교에 다니는 학생', '성격이 좋은 아이' 등과 같은 지식/정보를 통해 그 동일성을 확인받는다(identifie). 그리고 이 지식/정보들은 일반 명사(예컨대 '학생') 속에 구현된다.* 그래서 인칭적인 자아(le moi personnel)는 신과 세계 일반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명사와 형용사가 무너지기 시작할 때, 정지와 휴지의 명사들이 순수 생성의 동사들에 연결되고 사건들의 언어로 미끄러져 들어갈 때 자아, 세계, 신 등의 모든 동일성은 상실된다. 이러한 상황을 통해 우리는 말들이 동사들의 경사면을 미끄러져 등장하게 되고 또 앨리스가 자신의 동일성을 상실하게 되는 [찰나적인] 지식과 외침을 겪게 된다. 마치 사건들이 언어[여기에서는 동사]를 통해 지식 및 인물들과 소통하는 일종의 비실재성(irrealite)을 즐기고 있는 것처럼.**철수가 순간적으로 어두운 표정을 지은 것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존재론적으로 순간적일 뿐 지속하지 못한다(이 점에서 '어두운 표정을 짓다'라는 사건은 'irrealite'이다). 그것은 다만 "철수가 그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라는 언어 속에 보존될 수 있을 뿐이다. 이 언어를 통해 사건은 '철수', '그때', '표정' 같은 보다 안정적인 지식 및 인물들과 소통한다. 이 책 전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시사적인 구절이다.** 왜냐하면 인칭적 [동일성의] 불확실성은 그것이 늘 양 방향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한, 그리고 이 양 방향을 따라 주체를 분할해버리는 한 발생하는/지나가버리는 것에 대한 외재적인 회의가 아니라 사건 자체의 객관적인 구조이기 때문이다. 역설은 양식[일방향/좋은 의미 bon sens]***'sens'는 방향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bon sens'는 제대로 된 방향, 일방향을 뜻하기도 한다. 양식은 똫나 한 사회를 지배하는 통념, 즉 'doxa'이다. 통념은 한 방향으로 간다. 이와 달리 양쪽 방향으로 가는 것은 역설, 즉 'para-doxa'이다. 들뢰즈는 독사에 대립하는 파라독사를, 양식과 상식에 대립하는 복수성(multiplicite)을, 코드/권력에 대립하는 욕망/욕구를 사유한다.***을 우선은 그것이 유일한 의미/방향이라는 점에서, 다음으로는 그것이 고정된 동일성의 고착이라는 점에서 파괴하는 것이다.

역설들의 계열 2 - 표면 효과들

스토아적 이분법
스토아 학파 역시 두 종류의 사물을 구분했다.
1. 응집력, 물리적 성질, 서로간의 관계, 능동과 수동[능동적 운동과 수동적 운동], 그리고 그때그때의 '사태/상태'를 지닌 물체들.*'물체들'의 원어는 'somata'이다. 이는 맥락에 따라 '물질', '실체', '원자' 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유물론의 입장에 서는 스토아 학파에서는 'ousia'와 'hypokeimenon'이 구분되지 않는다. 스토아 학파에게는 'hypokeimenon'이 곧 'substantia'이다). 물체들이란 한마디로 물질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다. 우주 안에서 개별화된 물질(원자들의 집합)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것, 예컨대 시간, '언어로[만] 표현할 수 있는 것(lekton)'(47쪽 역주 **를 상기), 공허와 장소 등은 '비물체적인 것들'(astomata)이다. 물체적인 것들은 자체의 응집력(개별화되어 있으므로), 물리적 성질, [물체들 간의] 관계, 능동태와 수동태(모든 물체들은 다른 물체들과 작용을 가하고 받는다) 등을 동반한다. 그때그때의 '사태/상태'란 한 물체의 존재 방식(말 그대로etatas des choses)을 말한다. 스토아 학파는 모든 물체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pos echei)고 말하며, 때로 모든 물체들은 "언제나 상황에 처한다"라고도 말한다. 상식적으로 물체와 그 응집력, 성질, ......등은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에게는 이 모든 것이 다 'somata'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이 '물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 말을 매우 넓게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사태, 능동태와 수동태는 물체들의 혼합에 의해 결정된다. 결국 우주적 불*스토아 학파에게는 우주란 하나의 거대한 질서를 형성하는 물체들의 집합체(systema ex ouranou kai ges kai ton en toutois physeon)일 뿐 그외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우주는 죽은 물체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 타오르는 에네르기의 집합체이다. 우주는 한번 거대하게 불타오른 뒤(expurosis) 다시 오그라든다. 우주가 팽창하기 위해서는 우주 바깥에 공허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에게는 '전체'(to pan)(=우주+공허)와 '우주'(to holon)는 구분된다.*에 의해 지배되는 모든 물체들의 통일성이 있게 되며, 물체들은 각각의[또 서로간의] 응집력에 따라 이 불로부터 팽창해나가며 또 이 불로 돌아간다. 물체들과 사태들의 유일한 시간은 현재이다.**스토아 학파에게는 공허가 무한하듯이 시간도 무한하다. 과거와 미래는 끝없이 움직이며, 한계지어지지 않는(현재라는 분기점을 끊임없이 소멸시키는) 동시에 무한하다(이 무한한 시간을 '영원' 또는 '아이온'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주와 장소가 유한하듯이, 현실 속의 사물들과 그들의 운동을 조건짓는 현재는 유한하다(이 유한한 시간을 '크로노스'라 한다). 시간의 일정한 간격을 잡아 끊었을 때 현재가 성립한다. 모든 물체들과 사태들은 이 현재 안에서 움직인다. 그래서 현재는 실존하지만 과거와 미래는 존속한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현재는 행위를 동반할 뿐만 아니라 능동태와 수동태를 표현, 측정하는 시간적 외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체들 사이의 통일성에 따라, 그리고 능동적 원리와 수동적 원리의 통일성에 따라 우주적 현재는 전우주를 포괄한다. 오직 물체들만이 공간 안에 실존하며, 현재만이 시간 안에 실존한다. 물체들 사이에 인과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물체들은 서로와의 관련하에서 또 서로를 위해서 원인이다. 그리고 이 원인들의 통일성은 우주적 현재의 외연 안에서 운명(Destin)이라고 불린다.
2. 모든 물체는 원인이다. 그러나 무엇의 원인인가? 그들은 자신들과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진 어떤 것[=효과들]의 원인이다. 이 효과들은 물체들이 아니다. 적절하게 말한다면 '비물체적인 것들'이다. 이들은 물리적 성질들이나 속성들이 아니라 논리학적인 또는 변증법적인[언어를 통해서만 실존하는] 빈위들(attributs)이다.*비물체적인 것들을 자연학적으로는 물체에 수반되는 부대물(attribut)이며, 논리학적으로는 한 주어[물체]에 붙는 빈위 또는 술어(predicat)가 된다. 철수의 얼굴에 잠깐 나타난 어두운 표정은 하나의 비물체적인 것이며, "철수가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라는 언표에서 술어의 자리에 놓인다.* 이들은 사물들이나 사태들이 아니라 사건들이다. 우리는 이들이 실존한다고(existent)는 말할 수 없으며, 차라리 존속한다/내속한다고(subsistent ou insistent) 말해야 한다. 이들은 사물이라기보다는 실존하지 않는 어떤 것이며, 따라서 존재함의 최소치만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명사나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들에 관련된다. 또 작용하는 것이나 작용받는 것이 아니라 능동과 수동의 결과들, '되돌릴 수 없는 것들'(impassibles)**내 입에서 나와 허공으로 사라진 말이나 내 얼굴에서 나타났던 표정들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되돌릴 수가 없다. 원어 'impassibles'은 '겪음/수동passion'에서 나왔다. 겪음이란 어떤 작용을 받아들임을 말하며, 이미 사라진 말이나 표정은 내가 어떤 작용을 통해 변형하고 싶어도 더 이상 작용을 가할 수가 없는(작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다.**, 요컨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들이다. 이들은 살아 있는 현재가 아니라 부정법들에 관련된다.***'사랑한다', '사랑할 수 있다', '사랑했다', '사랑할 것이다' 등등은 잠재적으로 존속하는 '사랑하다'(부정법)의 현실화이다. 야구장에서 타자가 공을 칠 때 '딱' 하고 나는 소리는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러나 다시 야구가 시작되고 타자가 공을 치면 이 소리는 다시 나타난다. 이 점에서 '딱' 하는 소리는 지속하지는 않지만 잠재적으로 존속한다. 이 잠재적 존재는 "딱 하는 소리가 나다"라는 부정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즉, 이들은 한계지어지지 않은 아이온,****그리스의 신, 과거와 미래에 관련되는 '영원'을 뜻한다. 뒤에서 보겠지만, 들뢰즈는 시간론을 전개하면서 크로노스와 아이온을 구별해 사용한다.****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나뉘며 현재를 끊임없이 지워버리는 생성이다. 그래서 결국 시간은 서로를 배제하면서도 상보적인 두 방식으로 파악된다. 그 한 방식은 작용을 가하고 받는 물체들 속에서 살아 있는 전적인 현재이며, 다른 한 방식은 물체들 및 그들의 작용을 가함/받음에서 유래하는 비물체적인 효과들 속에서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나뉠 수 있는 심급이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 속에서 실존하며, 과거와 미래를 모으고 흡수한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는 시간 속에서 단지 내속할 수 있을 뿐이며 각각의 현재를 무한히 나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계기하는 세 차원들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동시적인 두 독해[물체에 기반한 독해와 사건에 기반한 독해]인 것이다.
에밀 브레이어는 스토아 학파에 대한 그의 뛰어난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칼이 살을 벨 때 칼이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성질이 아니라 새로운 부대물이다. 즉, 베어진다는 부대물이다. 부대물은 어떤 실질적 성질[물체적인 것들 중 하나]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언제나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즉, 그것은 존재[물체 또는 사태/성질]가 아니라 존재 방식[사건/부대물]이다. ......이 존재 방식은 말하자면 존재의 극한, 표면에서 등장하며,*대관식에서 왕의 머리에 왕관이 얹힌다. 왕의 머리와 왕관은 물체적인 것들이고 머리에 왕관이 얹히는 순간 발생하는 표면 효과는 사건이다. 사건은 물체적인 것들이 운동할 때 그 표면에서 발생하는 효과/결과이다.* 그존재를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작용을 가하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작용을 받는 것은 작용을 받는 물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하나의 결과이며, 존재들 중의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효과이다. ......스토아 학파는 처음으로 존재함의 두 수준을 단호히 구분했다. 하나는 심층적이고 실재하는 존재함의 수준이고, 다른 하나는 표면에서 발생하는 비물체적인 무한한 복수성의 수준이다."
그렇지만 물체에 있어 자라고 줄어들고 나뉘는 사건들보다 더 친숙하고 본질적인 것이 어디 있겠는가? 스토아 학파가 이 비물체적 사건들을 물체의 두께에 대비시킴으로써 의도한 것은 무엇인가? 이 사건들은 표면에서 발생하며 안개보다도 더 일시적인 것이다(스토아 학파에게는 안개도 일종의 물체이다).
물체들 속에, 물체들의 심층에 존재하는 것은 혼합물들이다. 하나의 물체[원자들의 집합]는 다른 물체에 스며들며, 이들은 바닷물 속의 포도주 한 방울 도는 쇠 속의 불[열]처럼 그 모든 부분들에서 공존한다. 하나의 물체는 병 안의 액체처럼 다른 물체 안에 숨기도 한다. 혼합물 일반은 사물들의 양적이고 질적인 상태들을 결정한다. 한 사물의 외연, 불의 밝기, 나무가 녹색이 된 정도 등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우리가 '커지다', '작아지다', '붉어지다', '푸르러지다', '나뉘다', '자르다' 등등으로 의미하는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들은 사물들의 상태가 아니며 심층에서의 혼합물도 아니다. 이들은 이 혼합물들로부터 유래하는, [물체의] 표면에서의 비물체적 사건들이다. 나무는 푸르러지고...... .
한 철학의 빼어남은 우선 그것이 존재들과 개념들에 부여한 새로운 분배[존재론적 절속]를 통해 가늠된다. 스토아 학파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하나의 경계선을 긋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토아 학파는 사유의 혁명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인과 관계의 새로운 배치
그들이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인과 관계에서의 완전히 새로운 배치였다. 그들은 원인-결과 관계를 해체시켰으며, 그들을 각자 따로 모았다. 그들은 원인들을 원인들에 연결시켰으며 원인들 사이의 연계(운명)를 생각해냈다.*스토아 학파에서 물체들은 내부적 응집력(tonos)을 지니고 있으며 자연발생적으로(spontanement) 움직인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그들은 작용을 가하고 받는다. 이러한 가함과 받음은 물체들 사이에서 상호 작용(conspiration/co-extension)을 형성한다. 이 상호 작용의 총체가 운명이다. 그래서 스토아 학파는 운명을 '원인들의 그물망'(nexus causarum), '물체들을 묶고 있는 총체적 끈'(nexus totalis natura/noeud total), '원인들의 영원 불멸하고 무한한 합언'(connexion) 또는 '연언'(conjonction)(conexio, conjunctio rerum)으로 정의한다. 키케로는 운명을 그리스어 'heimarmene', 즉 원인들의 질서 및 계열과 상응시킨다. 이 운명은 '맹목적이다'. 즉 그리스인들처럼 형상의 차원과 아낭케(ananche)의 차원을 구분할 필요가 없이 우주는 근원적으로 우발적이며 기계론적이다.* 도 결과들과 결과들의 연계를 제시했다.
그러나 두 작업은 전혀 다른 방식을 통해서였다. 비물체적 효과들/결과들은 서로간에 원인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경우 물체들의 상대적인 통일성이나 혼합-효과들/결과들은 그들의 실제 원인들인 이들에 의존한다-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을 법칙에 따라 '준원인들'(quasi-cause)로서 작용할 뿐이다. 그 결과 자유는 두 가지 상보적인 방식으로, 즉 원인들의 연계인 운명의 내재성, 그리고 효과들의 연계로서의 사건들의 외재성을 통해서 확보되었다. 스토아 학파가 운명과 필연을 대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인과 관계에서의 다른 배치, 자유에 대한 다른 종류의 긍정을 제시했다. 그들은 원인과 결과의 등질성[일정함]은 보존했지만 [원자들 사이에 원인-결과 관계가 성립하도록 했지만] 클리나멘에 의해 그 상호 의존성을 보장받는 원자들의 계열에 따라 인과 관계를 마름질한다. 이 경우에 성립하는 것은 이제 필연 없는 운명이 아니라 운명 없는 인과 관계이다.*에피쿠로스 학파 역시 사건에 대해 스토아 학파와 매우 유사한 개념을 지니고 있었다. 다음을 보라. Epicure, lettre a Herodote, 39~40, 68~73; et Lucrece, I, 449sq. 루크레티우스는 "틴다로스의 딸이 납치당했다......"와 같은 예를 통해 사건을 분석한다. 그는 사건들(eventa), 예컨대 노예 상태-자유 상태, 가난-풍요로움, 전쟁-화합 등을 결합물들(conjuncta), 즉 물체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실제 성질들과 대립시킨다. [에피쿠로스의] 사건들이 정확히 [스토아적인] 비물체적인 것들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독립적으로 실존할 수 없는 것, 물질 운동의 순수한 결과, 물체의 능동태와 수동태로서 제시된다. 그렇지만 에피쿠로스 학파가 이 사건론을 충분히 전개시킨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들은 그것[사건론]을 등질적 인과 관계의 요청에 귀속시켰고 또 시뮬라크르에 대한 그들 고유의 개념화에 귀속시켰기 때문이리라. 이 책 [보론 2]를 보라.* 두 경우 모두 아리스토텔레스나 훗날의 칸트처럼 인과 관계의 유형들을 구분함으로써가 아니라 [두 차원의] 인과 관계를 갈라냄으로써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갈라냄은 원인들의 어미 변화에 관련해서든, 아니면 뒤에서 분석하겠지만, 결과들/효과들의 동사 변화에 관련해서든 언제나 언어에 관련된다.*원인들은 명사난 형용사의 어미 변화(철수가, 철수를, ......)에 관련되며, 사건들은 동사의 어미 변화(뛰었다, 뛸 것이다, ......)에 관련된다.*
물체 및 그들의 상태와 효과들(또는 비물체적 사건들 사이의 이 새로운 이분법은 철학의 혁명을 가져왔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모든 범주는 존재(l'Etre)에 의거해 언표된다. 그리고 중요한 구분이 있다면 그것은 제1실체[주어의 자리에 오는 실체들]와 그에 부수하는 [술어의 자리에 오는] 다른 범주들 사이에 그어진다. 반면 스토아 학파에게는 사물들의 상태들, 양들과 질들은 실체와 동등한 의미에서의 존재들(또는 물체들)이다. 그들은 실체의 여러 종류들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그들은 실존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비물체적인 것인 열외 존재(extra-etre)와 대조된다. 최상위의 항[가장 보편적인 개념]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와 비존재를 그리고 실존하는 것들과 내속하는 것들을 아우르는 한에서의 무엇(aliquid)이다.**아리스토텔레스는 비물체적인 것들은 존재 자체에서 배제하고, 존재를 실체(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와 그 실체에 붙는 다른 9개의 범주들로 구분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실체와 그외의 범주들은 오히려 같은 '물체들'에 포함시켜 동일시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아예배제했던 비물체적인 것들을 이 물체들에 대립시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를 가리키기 위해 'ti esti'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스토아 학파는 'esti'를 떼어버리고, 'ti/aliquid'만을 사용한다(이렇게 함으로써 비물체적인 것들이 어떻게 "존재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논박의 부담을 벗어던지고 있다).**
나아가 스토아 학파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처음으로 시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물체들과 그들의 상태들, 양들, 질들은 실체와 원인으로서의 모든 특성들을 지니게 되지만, 역으로 플라톤적 형상(l'Idee)이 지닌 특성들은 이 되돌릴 수 없고 무능력한 열외 존재로, 사물들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이차적인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형상적인/비물체적인 것(l'ideel), 물질적 차원에 속하지 않는 것은 이제 단지 '효과'에 지나지 않게 된다.*서구 철학사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구절이다. 하나의 사과를 생각해 보자. 이 사과를 설명하는 데는 위로부터의 설명과 아래로부터의 설명이 있다. 위로부터의/초월적인 설명은 사과 바깥에 어떤 초월적인 설명 원리를 상정한다. 서구 철학에서 초월적 역할을 한 것은 형상과 신이었다. 물질/질료는 형상이 구현되는 바탕이다. 즉, 사과는 자신의 바깥에 있는 형상을 본떠 만들어진 것이며, 따라서 본떠 만드는 존재(데미우르고스, 신)와 그 목적이라는 'aitia'를 요청한다. 아래로부터의/내재적인 설명은 사과의 사과됨을 사과보다 더 하위 차원의 존재들(예컨대 원자. 들뢰즈의 경우는 '발생적 요소들/elements genetiques')의 조합/배열(들뢰즈의 경우는 '미분적 관계/relation differentiel')을 가지고 설명된다. 위로부터의 설명에서는 형상이 주가 되며 질료는 형상의 상관자 역할만을 한다(또 인간의 경우 영혼이 주가 되며 신체는 영혼의 껍데기가 된다).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설명에서는 물질이 주가 되며 형상은 물질이 일정하게 배열된/조합된 결과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형상을 본떠서 철수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세포들이 일정하게 배열된/조합된 결과가 철수의 형상일 뿐이다(엄밀히 말해, 스토아학파에게서는 형상(상태)이 있을 뿐 형상(생김새)은 없다.) 플라톤주의와 스토아 학파에게서 형상은 전혀 반대의 존재론적 위상을 지닌다. 그런데 스토아 학파에게서 형상은 하나의 결과일 뿐이므로 물체에 속하지 못하며 따라서 비물체적인 것에 속한다. 비물체적인 것은 언어적으로만 보존된다. 그래서 '형상적인'을 뜻하던 'ideel'의 의미도 이제 '비물질적인'의 뜻으로 바뀐다('철수'는 철수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아니라, 다만 철수라는 물질적 실체를 부르는 관념일 뿐이다). 현대인이 물질적인 것을 실체적/객관적인 것으로 보고, 정신까지도 포함해 그 파생물들을 관념적인 것으로 볼 때, 그는 스토아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표면으로 올리기
이러한 전복의 결과는 엄청나다. 플라톤에게서는 사물들의 심층, 땅의 심층 안에서 늘 형상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것과 이 작용을 피하는 것(복사물들과 시뮬라크르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의 메아리는 소크라테스가 다음과 같이 물을 때 울려나온다. "털이나 때, 진흙 같은 것들에까지 형상이 존재할까? 아니면 끝내 형상을 거부하는 무엇이 존재하는 것일까?" 다만, 플라톤에게는 이 무엇이 완벽하게 심층에 파묻혀 있고 바다 밑바닥에 유폐되어 있었던 것만은 아니다.
이제 모든 것이 표면으로 올라온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의 작업이 가져온 결과이다. 무규정적인 것이 올라온다. 미친 듯한 생성, 무규정적인 생성은 더 이상 바닥에서 으르릉거리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표면으로 올라와 되돌릴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이제 시뮬라크르들은 지하에서 형상을 피해 은신하기를 그치고 자기 자리로 올라와 노는 효과들이 된다. 효과는 인과에 의해 발생한 것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소리, 빛, 말 등으로도 존재한다. 나아가 그들은 이제 물체적인 것과는 상관 없이 모두 비물체적인 것(l'idee)이 된다. 형상을 비켜갔던 것이 표면, 즉 즉 비물체적인 극한으로 올라오고, 이제 모든 가능한 탈물질성(l'idealite)을 나타낸다(이 탈물질성은 그 인과적이고 정신적인 유효성[사물들의 'atia'로서의 성격]을 박탈당한 상태이다).
스토아 학파는 표면 효과들을 발견했다. 시뮬라크르들은 지하에서 반항하기를 그치고 그들의 효과들을 작동시킨다(우리는 시뮬라크르들의 이 효과를 스토아 학파의 용어법과는 무관하게 '환각'(phantasme)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깊숙이 은폐되었던 것이 가장 밝은 곳으로 올라오고, 생성의 모든 오래된 역설들이 새로운 청춘 속에서 모양새를 갖춘다. 근원적인 변이가 일어난 것이다.
한계지어지지 않은 생성(devenir-illimite)은 그에 고유한 전복, 즉 미래와 과거, 능동과 수동, 원인과 결과에서의 전복들과 더불어 비물체적인 사건 자체가 된다. 미래와 과거, 더와 덜, 너무와 아직, 이미와 아직의 경우, 무한히 나뉠 수 있는 사건은 영원히 이제 막 이행한 것이자 이제 막 이행할 것의 동시적인 둘일 수는 있어도 이행하고 있는 것일 수는 없기 때문에(너무 깊이 자름과 불충분하게 자름). 능동과 수동의 경우, 사건은 작용을 받지 않는다는 [되돌릴 수 없다는] 점에서 교환[상호 작용]에서의 이것도 저것도 아니며[능동도 수동도 아니며], 그들의 공통의 결과[표면 효과]일 뿐이기 때문에(자름과 잘림). 원인과 결과의 경우, 사건들은 결국 효과들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서로 준원인들로서 기능하거나 언제나 가역적인 준인관의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에(상처와 흉터).
스토아 학파는 역설들의 애호가이자 발명가이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인상 깊게 묘사한, 크뤼시포스에 대한 몇 쪽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스토아 학파는 역설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역설을] 언어 분석의 도구로 그리고 동시에 사건들의 종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변증법[논리학/언어철학]은 바로 명제들 속에 표현된 대로의 이 비물체적인 사건들의 과학이며, 명제들 사이의 관계들 속에 표현된 대로의 사건들의 연결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동사 변화/연결(conjugaison)의 기법이다(서로 의존하는 사건들의 계열들인 'confatalia'와 비교해보라). 그러나 이 기법은 특정한 언어에, 즉 한계들을 설정하는 동시에 설정된 한계들을 벗어나는 언어에 속한다. 나아가 그것은 그들[한계들]의 외연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해당 계열 내에서 연결(liaison)의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항들 또한 포함한다(너무와 아직, 너무 많이와 너무 조금). 사건은 생성과 동외연적이며(coextensif), 생성 자체는 언어와 동외연적이다. 그래서 역설은 본래 '연쇄 추리' 즉 계속되는 덧붙임과 잘라냄의 과정을 따라 진행하는 의문 명제들의 계열이다.
모든 일이 사물들과 명제들의 경계에서 발생한다. 크리쉬포스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그 무엇은 입을 지나간다. 예컨대 당신이 '짐수레'라고 말하면, 짐수레가 당신 입을 지나간다." 여기에서 사용된 역설과 상응하는 것은 선불교의 역설과 영미 철학에서의 '무의미(non-sense)뿐이다. 한편으로 가장 깊은/심오한 것은 직접적인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직접적은 것은 언어 안에 존재한다. 역설은 깊이의 추방, 표면에서의 사건들의 펼쳐짐, 이 극한을 따라 발생하는 언어의 전개로서 나타난다. 익살(유머)은 깊이나 높이의 기법인 전통적인 얄궂음(아이러니)에 대항하는 표면의 기법이다. 소피스트들과 퀴니코스 학파는 이미 소크라테스적인 아이러니에 대항해 익살을 철학적 무기로 사용한 바 있다. 그러나 익살은 스토아 학파와 더불어 비로소 그의 변증법을, 변증법적 원리와 그 자연적 장소를, 그 순수한 철학적 개념을 획득한다.

루이스 캐럴과 표면의 발견
스토아 학파가 던져준 이 생각을 루이스 캐럴은 나름대로 다시 형상화한다. 루이스 캐럴의 전저작에서 사건들은 존재들, 사물들, 사태들과 변별화되어 등장한다. 그러나 [앨리스]의 초반부는 여전히 끊임없이 함몰하는 지하 깊은 곳에서 사건들의 비밀을 그리고 상호 관통하면서 공존하는 혼합물을 찾는다. 그렇지만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땅을 파고 덮는 이 운동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왼쪽에서 오른족으로 미끄러지는 횡단 운동에 자리를 내준다. 심층의 동물들은 이차적인 존재로 전락하며, 두께가 없는 종이-사람들[트럼프에 그려진 인물들]로 대체된다. 이전의 깊이는 납작하게 눌려 넓이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한계지어지지 않은 생성은 이제 이 넓이 안에 완전히 수용된다. 심층에서의 주름잡힘은 사라진다. 단지 동물들만이 심층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역시 가장 고급한 동물들 즉 평평하게 펴진 동물들을 볼 수 있다.
사건들은 결정체의 경우와도 같다. 사건들은 가장자리에 의해서만, 가장자리에서만 생성하고 증식된다. 그래서 말더듬이와 왼손잡이의 첮째 비밀은 이것이다. 이전의 심층이 표면의 반대 방향으로 물러가게 함으로써 깊이 들어가는 대신 옆으로 미끄러지는 것, [심층으로 파들어감이 아니라] 이 미끄러짐 덕분에 다른 편/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커튼 뒤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모든 가시적인 것, 아니면 차라리 가능한 모든 지식이 커튼의 측면을 따라서 펼쳐졌기 때문이며, 또 표면으로 나아가거나 오른쪽과 왼쪽이 서로 뒤바뀌기 위해서는 충분히 멀리, 충분히 밀접하게 표면을 따라서 가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앨리스의 여러 모험들이 있다기보다는 하나의 모험이, 즉 표면으로 거슬러올라감, 그릇된 심층의 거부, 모든 것이 가장자리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의 깨달음만이 있게 된다. 캐럴이 처음에 생각했던 제목인 '땅 밑에서의 앨리스의 모험들'을 버린 것은 이 때문이다.
[거울의 이면]의 경우는 더욱 더 그렇다. 여기에서 사건들은 사물들과의 첨예한 차이를 드러내며, 심층을 포기한 채 표면에서, 물체들을 비켜가는 이 비물체적인 얇은 수증기, 그들을 둘러싼 부피 없는 막, 반사하는 거울, 조직하는 바둑판 속에서만 발견된다. 앨리스는 더 이상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그녀의 이중적인 비물체적인 것을 이끌어낸다. 물체들로부터 비물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경계선을 따라감으로써, 표면을 따라감으로써 이루어진다. 발레리의 심오한 말처럼 가장 심오한 것은 피부이다.
스토아 학파의 이러한 발견은 많은 지혜를 밑받침했고 윤리를 이끌어냈다. 그것은 붉어지기 위해, 푸르러지기 위해 가장자리에서만 커지고 작아지는 어린 소녀의 발견이기도 하다. 그녀는 사건들이 그만큼의 물체들에 관련되고, 그들을 자르며, 표면만을 가로지르면서 그들을 소멸시킨다는 것을 안다. 훗날 위대한 인물들이 심층에 사로잡혔으며, 너무 심층적이었던 바람에 더 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스토아 학파의 예들은 왜 루이스 캐럴을 계속 자극했을까? 나무는 녹색으로 화하고, 해부도는 자르며, ......전투는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앨리스가 그녀의 이름을 잃어버리는 것은 나무들 앞에서이고, 험프티 덤프티가 앨리스를 보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은 나무에게이다. 그리고 큰 목소리들이 전투가 임박했음을 알린다. 그리고 도처에서 칼에 벤 자국들이, 갈라짐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은 몇몇 예들일 뿐인가? 아니면 모든 사건들이 이런 식인가? 숲, 전투, 상처, 이 모든 것, 이드(id)만큼이나 심층적인 이 모든 것이 표면(물체들을 잡아늘임으로써 비물체적이 되는 표면으로 이행하는가? 역사는 우리에게 좋은 길들은 출발점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주며, 지리는 대지가 얇은 층 위에서만 비옥하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스토아적 지혜가 재발견한 이러한 사실이 어린 소녀들에게만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루이스 캐럴이 일반적으로 사내아이들을 싫어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너무 많은 심층을, 따라서 너무 많은 그릇된 심층, 그릇된 지혜와 동물성을 가지고 있다. [앨리스]에서 사내아이는 돼지새끼로 변한다. 일반적으로 어린 소녀들만이 스토아주의를 이해하며, 사건의 의미를 소유하며, 이중의 비물체적인 것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작은 사내 아이가 말더듬이에다 왼손잡이임이 판명되고 표면의 이중적인 의미로서 의미를 정복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사내아이들에 대한 캐럴의 혐오감은 심층적인 양가성에 의해서는 정당화되지 못하며, 차라리 그에게 고유한 개념인 표면적인 전복이라는 개념을 요구한다.
[실비와 브루노]에서는 안팎에서 위아래에서 여러 방식으로 배움을 얻는, 그러나 '심층'만은 비켜가는 사내아이가 창조적인 역할을 맡는다. [실비와 브루노]는 [앨리스]에서 소묘된 변화를 극단으로 밀고나가며, 이는 다시 [거울의 이면]에서 확대된다. 1부의 경탄할 만한 결론은 동쪽에의 찬양이다. 모든 좋은 것, '희망의 대상들, 보이지 않는 사물들'이 동쪽에서 온다. 기압계마저도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고 측면을 따라가며 수평적인 시간을 제시한다. 신장기는 노래들마저도 길게 잡아당긴다. 그리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생긴 포르투나투스의 주머니는 엉둥하게 꿰메어진 수건들로 만들어져, 그 안과 바깥이 이어져 있다. 그래서 그 주머니는 세계를 감싸고 있는 셈이며, 안의 것이 바깥의 것이 되고 바깥의 것이 안의 것이 되게 만들고 있다(캐럴이 쓴 가장 뛰어난 페이지들 중 하나, [실비와 브루노: 완결편], 7장). [실비와 브루노]에 이르러 현실로부터 꿈으로, 물체들로부터 비물체적인 것으로의 이행은 복수화되고, 완전히 개선되며, 그 완전한 경지에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행은 언제나 표면을, 가장자리를 늘임으로써 이루어진며,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의 힘에 의해 [표면/가장자리의] 다른 쪽을 따라간다. 안과 바깥의 연속성은 심층의 모든 층위를 대체한다. 그리고 모든 사건들에 관련해 유효한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Evenement)에서의 표면 효과들은 모든 생성과 [그 생성의] 역설들을 언어로 기어오르게 만든다.*이와 같은 표면의 발견, 심층의 비판은 현대 문학과 공명한다. 이 발견과 비판은 로브-그리예의 작품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또한 클로소프스키를 특히 그가 묘사한 로베르트의 피부와 장갑의 관계에서 재발견한다([호의의 법칙], [후기]를 참조). 또 투르니에의 다음 구절을 참조하라. "표면을 희생시키면서 맹목적으로 심층에 가치를 부여하는, 또 동시에 표면적인 것을 광활한 차원으로보다는 불충분한 심층으로 이해하는가 하면 심층적인 것을 불충분한 표면으로보다는 거대한 심층으로 이해하는 이상한 집단, 그럼에도, 내가 보기에 심층과 표층이 동등하게 파악된다면, 사랑과 같은 감정은 보다 잘 이해된다." 이 책의 [보론 3]과 [보론 4]를 볼 것.* 캐럴이 [입-자(parti-cle)의 동력학]이라는 논문에서 말했듯이, "평평한 표면은 한 담론의 특성이며......"

계열 3 - 명제

지시, 현시, 기호 작용
이 사건-효과들과 언어(나아가서는 언어의 가능성) 사이에는 핵심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즉,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표현된 또는 표현 가능한 사건들, 그리고 언표들 또는 적어도 가능한 명제들에 의해 언표 가능한 것들이다. 그러나 명제에는 많은 관계들이 포함된다. [그 관계들 중에서] 표면 효과들, 사건들에 부합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많은 저자들이 명제가 세 가지 상이한 관계를 내포한다는 점에 동의한다. 첫번째 관계는 지시[지시 작용](designation) 또는 지칭[지칭 작용](indication)이다. 이것은 명제와 하나의 사태(datum) 사이의 관계이다. 사태는 개별화된다.*세계는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이고 총체이다. 인간은 이 세계를 갖가지 존재들로 나누고 그들에 이름을 붙인다. 즉, 존재론적 분절과 명명의 행위를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 인간은 존재론적 분절을 통해 특정한 존재나 사태를 개별화한다.* 즉 그것은 이러저러한 사물들, 사물들의 혼합물들, 질들, 양들, 관계들을 포함한다. 지시는 말들 자체를 이마주들, 즉 사태를 '표상한다'고 할 수 있는 특수한 이마주들에 연합시킴으로써 작동한다. 말에, 명제 안의 이러저러한 말에 연합되는 모든 이마주들 중에서 주어진 복합체[혼합체]에 상응하는 것들을 선택하고 선별해야 한다. 그래서 지시적인 직관은 "그것은 이것이다", "그것은 이것이 아니다" 같은 형태로 표현된다.
말들과 이마주들의 연합이 본래적인 것인가 파생된 것인가, 필연적인 것인가 자의적인 것인가를 아는 문제는 여기에서 다룰 필요가 없다. 현재로서 중요한 것은 명제 속의 어떤 말들, 언어적 소사들이 이마주들의 선별을 위한, 그래서 결국 각각의 사태를 지시하기 위한 빈 형식들[수학으로 말하면 변수]로서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들을 보편적 개념들로서 다루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이들은 형식적인 단일한 것들로서 순수한 '지시자'의 역할을 한다(벤베니스트의 용어로는 '지칭자'이다).*빈 형식들이 여러 경우들에 동시에 적용되는 보편자는 아니다. 단지 경우에 따라 단일한 다른 값을 가질 수 있는 빈 자리일 분이다. 즉 x²+1에서의 x는 각 경우에서의 개별자들을 대변하는 것이지 x에 들어가는 모든 존재들의 집합체는 아니다. "나는 x를 먹는다"고 말할 때 x는 매 경우의 단일한 존재들(닭, 사과, 사탕 등)을 대변하는 것이지, 먹을 수 있는 것들의 집합/보편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형식적 지시자들이란 예컨대 '이것', '저것', '그', '여기', '저기', '어제', '지금' 등이다. 고유 명사 또한 지시자이지만, 이들은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왜냐하면 이들만이 적절하게 실질적이라고**여기에서 '실질적인'(materielles)이란 '형식적인'의 반대말로서, 논리학적인 맥락에서 사용된 것이다. 고유 명사도 지시자이지만, 그것은 이미 특정한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에서 '실질적'이다.** 부를 수 있는 단일성들을 이루기 때문이다.
논리학적으로 말해, 지시는 그 규준으로서 그리고 요소로서 진위를 내포한다. 진이란 하나의 지시 작용이 사태에 의해 유효하게 수행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시자들이 유효하게 사용되었다는 것, 또는 적절한 이마주가 선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진'은 선별할 필요 없이 만들에 연합할 수 있는 무한의 특수한 이마주들이 빈 형식들을 채움을 의미한다. 위는 지시 작용이, 선별된 이마주들의 결함에 의해서건 말들에 연합할 수 있는 이마주를 아예 생산할 수 없음에 기인하건,*전자는 변항의 이마주를 잘못 채운 경우이고("나는 쇠를 먹는다"), 후자는 이마주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일정하지 않을 때이다(도깨비, 둥근 사각형 등).* 수행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명제의 두번째 관계는 종종 현시[현시 작용](manifestation)이라고 일컬어진다. 현시는 명제와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주체를 연결한다. 그래서 현시는 명제와 상응하는 욕구와 신념의 언표들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낸다. 욕구와 신념은 [지시에서처럼 명제와 사태의] 연합이 아니라 인과적 추론이다.**여기에서의 인과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인과가 아니라 의식을 언어의 원인으로 보고 언어를 의식이 작용한 결과로 보는 관점을 말한다.** 욕구란 대상의 실존이나 상응하는 사태와 관련해 이마주의 내적인 인과율이다. 이와 상관적으로, 신념은 이 대상이나 사태를 이들의 실존이 외적 인과율에 의해 생산되어야 하는 한에서 기대하는 것이다.***욕구는 내면에서 발생하는 것이지만, 신념은 내면 바깥의 존재가 어떠어떠 하리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즉 신념이나 기대는 내면 바깥의 사태를 전제한다.***
우리는 이로부터 현시가 지시보다 부차적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현시가 지시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현시의] 추론들은 체계적 통일성을 형성하며, 이 [현시 작용의] 통일성으로부터 [지시의/지시 대상들의] 연합이 도출되는 것이다. 흄은 이 사실을 날카롭게 통찰했다. 그에 따르면, 원인과 결과의 결합에서 관계 자체를 앞서는 것은 '관계에 따른[관계를 상정하는] 추론'인 것이다.
현시의 이 우선성은 언어적 분석을 통해 확립된다. 명제 속에서 특수한 소사들로서 '현시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 너, 그리고 내일, 여전히, 그리고 다른 곳에서, 도처에서 등등. 그리고 고유 명사가 특권적인 지시자이듯이, '나'는 가장 기본적인 현시자이다. 그러나 '나'에게 의존하는 것이 다른 현시자들인 것만은 아니다. 지시자들 전체가 '나'에 의존한다.1) 벤베니스트가 ⌜일반 언어학의 문제들⌟(갈리마르) 20장에서 제시한 '연결자들'(embrayeurs)의 이론을 보라. 우리는 '내일'을 언제나 오늘과 구분한다. 왜냐하면 '내일'은 우선 신념의 표현이며[주체 상관적이며] 부차적으로만 지칭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다./ 지칭이나 지시는 개별적인 사태들, 특수한 이마주들, 그리고 단일한 지시자들을 포함한다. 그러나 현시자들은, '나'에서 출발해, 가능한 모든 지시의 원리로서 작동하는 인칭적인 것의 영역을 구성한다.
마지막으로, 지시 작용으로부터 현시 작용으로 나아가면서 코기토에 의해 대변되는 논리적 가치들의 위치 이동이 발생한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진위(le vrai et le faux)가 아니라 참[진실]과 거짓(la veracite et la tromperie)이다. 데카르트가 밀랍 조각에 대한 유명한 분석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밀랍 속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가 아니다. 그런 문제는 텍스트에서 제기되지도 않았다. 그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코기토 속에서 현시된 '나'가 밀랍의 동일성을 확인해주는 지시의 판단을 정초한다는 사실이었다.
명제의 세번째 차원에는 기호 작용(signification)*'conception'이라는 말이 개념 작용을 뜻하고, 'perception'이 지각 작용, 'imagination'이 이마주의 작용, 'symbolization'이 상징 작용을 뜻하듯이, 'signification'은 기호의 작용을 뜻한다. 많은 경우 이 말은, 기호의 작용이란 곧 이마주 및 지시 대상과의 관련 하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므로 '의미 작용'이라고 번역된다. 이 말을 그렇게 번역하는 것은 구조주의의 관점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signification'을 의미 작용의 한 종류라고 본다. 때문에 이 말을 '기호 작용'으로 번역했다.*이라는 이름을 할당해야 하겠다. 기호 작용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말이 보편적인 또는 일반적인 개념들과 가지는 관계이며, 개념의 논리적 함축들**논리적 함축(implication)이란 한 개념이 다른 개념으로부터 "만일 ......면, ......이다 라는 형식을 통해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라는 문장은 "만일 갑이 총각이라면, 그는 결혼하지 않은 남자이다"로 고쳐 쓸 수 있으며, '총각'이라는 개념이 '결혼하지 않은 남자'라는 개념을 그 논리적 결과로서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이때의 함축이란 일상 생활에서의 내용적인 '함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p이면 q이다"라는 논리적 구조에서의 함축, 또는 '책상'이라는 말이 '가구의 일종'을 뜻하게 되는 집합론적 함축 등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뜻이 강하며, 구조주의적-기호학적 함축 작용을 가리킨다. 이 말은 함축으로, 또는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논리적 함축으로 번역했다.**과 맺는 통사론적 연결들이다. 기호 작용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늘 명제의 요소들을 개념적 함축들의 '기표'로 간주한다(이 함축들은 그들의 전제들로서 역할하는 다른 함축들과 연결될 수 있다). 기호 작용은 이 개념적인 함축의 질서에 의해 정의되며, 이때 명제는 전제로서든 결론으로서든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논증'의 요소로서만 개입한다. 그래서 언어학적 기표들은 본질적으로 '함축하다'[논리적 결과를 가져오다]와 '그러므로'이다. 논리적 함축은 전제들과 결론들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기호이다. '그러므로'는 주장의 기호로서, 함축들의 연쇄 끝에서 결론을 긍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정의한다.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논증에 관해 말한다면, 명제의 기호작용은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간접적 과정 안에서, 즉 그에 대해 전제나 결론의 역할을 하는 다른 명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견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지시 작용은 [대상과의] 직접적인 과정에 관련된다. 논증이라는 말을 좁은 뜻으로, 즉 삼단 논법이나 수학적 논증이라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되며, 또 물리적인 확률 법칙이나 약속과 참여라는 도덕적 의미에서 이해해서도 안 된다. 약속이나 참여에 있어 결론의 주장은 결국 약속이 잘 지켜진 순간을 통해 성립하기 때문이다.2) 예컨대 브리스 파랭이 지칭(지시)과 논증(기호 작용)을 대립시킬 때, 그는 논증을 '사랑의 고백'이나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에서처럼 수행되어야 할 프로그램, 지켜야 할 약속, 실현되어야 할 가능성이라는 도덕적 의미를 포함하는 방식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이해된 기호 작용 또는 논증의 논리학적 가치는 더 이상 함축들의 가언적 양식이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 조건, 즉 한 명제를 진 '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조건들의 집합이다. 조건지어진 또는 결론내려진 명제가, 조건지어진 도는 결론내려진 명제가,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 또는 직접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사태를 지시하는 한에서 위일 수도 있다. 기호 작용이 진리를 정초할 때면 동시에 가능한 오류도 정초하는 것이다. 때문에 진의 조건은 위에 대립하기보다는 부조리에 대립한다. 부조리란 곧 기호 작용이 부재하는 상황, 진도 위도 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세 작용의 순환
이제 다시 "기호 작용은 현시 작용이나 지시 작용에 선행하는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 물음은 복잡한 대답을 요청한다. 앞에서 현시 작용이 지시 작용에 앞선다고, 그 정초의 기능을 한다고 말했지만, 이는 하나의 특수한 관점에서 그랬었다. 고전적인 구분을 다시 취해 말한다면, 그것은 파롤의 관점이다. 비록 말없는 파롤일지라도. 파롤의 질서에서 시작하는 것, 절대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나'이다. 여기에서는 '나'가 그것이 정초해주는 가능한 모든 지시 작용에 관련해서만이 아니라, 그것이 포함하는(enveloppe) 모든 기호 작용에 관련해서도 우선적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개념적인 기호 작용들은 유효성을 상실하며 또 그 자체로서 전개되기를 그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직접적으로 포함된(comprise) 하나의 기호 작용을 지니는 것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며, 그 자신의 현시 작용과 동일한 '나'에 의해 함축되는(sous-entendues) 것들로 머문다. 데카르트가 [기호 작용을 통해 연역되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정의를 [나의 직관을 통해서 얻어지는] 코기토라는 규정과 대립시킨 것은 이 때문이다.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정의에 사용된 개념들의 명시적인 풀이(동물이란 무엇인가? 이성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데 반해, 코기토라는 규정은 언표되는 순간 이해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시 작용과 기호 작용을 모두 앞서는 현시 작용의 이 우선성은 기호 작용들을 자연스럽게 함축하고 있는 '파롤'의 질서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자아가 개념들에 관련해, 나아가 세계와 신에 관련해 앞서는 것은 오직 이때뿐이다.
그러나 기호 작용들이 유효할 뿐 아니라 스스로를 펼칠 수 있게 하는 어떤 다른 질서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이 질서 안에서는] 일차적일 것이며 또 현시 작용을 정초할 것이다. 이 질서는 다름아닌 랑그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명제는 전제나 결론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으며, 하나의 주체를 드러내기 이전에, 더 나아가 하나의 사태를 지시하기 이전에 개념들의 기표들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신이나 세계처럼 기호화된 개념들이 현시하는 인칭적 존재로서의 자아 그리고 지시된 대상으로서의 사물들과 관련해 일차적인 것이 되는 것은 바로 이 관점에서이다.*신, 세계, 자아는 중세 형이상학에서 특수 존재론-합리적 신학(ontologia rationalis), 합리적 자연학(physica rationalis), 합리적 영혼론(psychologia rationalis)-의 세 항이다. 데카르트가 [성찰]에서 증명하고자 했던 것도 코기토(영혼), 신, 세계(자연)였으며, 칸트가 선험적 변증론에서 사변 이성의 대상으로 설정했던 것도 영혼 불멸, 세게의 본성, 신의 존재였다. 들뢰즈는 현시 작용을 우선시할 경우 자아가 세계와 신에 앞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데카르트 이래 후설 등에게까지 내려온 현상학의 입장이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입장을 취할 경우, 세계나 신은 자아에 앞선다.*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벤베니스트는 말(또는 말의 고유한 청각적 이마주)과 개념의 관계는 필연적인 것이지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오직 말과 개념의 관계만이 다른 관계들이 가지지 못하는 필연성을 지닌다(다른 관계들은 그들을 직접적으로 고려하는 한 자의적인 것으로 머물며, 이 첫번째 관계와 관련맺는 한에서만 자의성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말에 연합된 특수한 이마주들을 변이시킬 가능성, 하나의 이마주를 "그것은 이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것이다"라는 형태에 입각해 다른 이마주로 치환할 가능성은 기호화된 개념의 일정함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욕구와 신념을 드러내는 말들이 그들을 유의미하게 만들어주는 개념들 및 개념들의 함축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욕구들은 단순한 필요의 닦달과 구분되는 요구나 의무의 질서를 형성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현시 작용이 지시 작용을 앞선다고 했으며, 방금 기호 작용이 현시 작용을 앞선다고 했다. 그렇다면 기호 작용이 지시 작용을 앞설 것이다. 그러나] 지시 작용에 대한 기호 작용의 우선성이라는 생각 또한 미묘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러므로'라고 말할 때, 즉 하나의 명제를 결론지어진 것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그것[그 명제]을 한 확언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즉, 우리는 전개들을 한편으로 제쳐놓고 그 명제를 자체로서 독립적으로 긍정한다. 우리는 그 명제를, 그것의 기호 작용을 구성하는 논리적 함축들과 독립적으로, 그것이 지시하는 사태에 관련짓는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전제들이 실질상 참인 것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이 경우 우리는 이들[전제들] 자체를 하나의 사태에 관련시키기 위해 순수 함축의 질서에서 우선 벗어나야 한다.*결론의 진위 여부를 전제들에 떠넘기는 경우에도 또한 조건들 자체의 진위 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기호 작용만 가지고서는 진리 생성의 필요 조건이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또한 전제들 A와 B가 참되다고 가정할 때에도 우리는 그로부터 문제의 명제 Z를 결론으로 제시할 수가 없다. 즉, 우리는 이 명제 [명제 Z]를 그 전제들로부터 떼어내 논리적 함축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서 긍정할 수 없다. 그것[명제 Z]을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것은 A와 B가 진일 때 Z도 진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다. 이는 곧 함축의 질서 안에 머무는 명제 C["A와 B가 진이라면 Z도 진이다"라는 명제]를 구성하며, C 또한 "A, B, C가 참이라면 Z는 참이다"라고 말하는 명제 D를 요청하기 때문에 이러한 연쇄를 끝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논리학의 심장부에 있으며 논리적 함축과 기호 작용에 관한 모든 이론을 위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니는 이 역설은 루이스 캐럴이 [거북이가 아킬레우스에게 말한 것]이라는 유명한 텍스트에서 사용한 역설이다. 요컨대 우리는 한 손으로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떼어내지만, 그것은 언제나 다른 손으로는 결론과 분리되지 않는 다른 전제들을 덧붙인다는 조건 아래에서이다. 다시 말해 기호 작용은 결코 등질적이지 않다. '함축하다'와 '그러므로'라는 두 기호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함축 작용은, 한 번은 전제들 안에서 또 한 번은 결론 안에서, 완수된 지시 작용을 포함함으로써만 그것[지시 작용]을 정초할 수 있는 것이다.

명제의 네번째 차원은 존재하는가
지시에서 현시로 또 기호 작용으로, 그러나 또한 기호작용에서 현시로 또 지시로 가면서, 우리는 명제의 원환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의 원환 속으로 끌려들어간다. 우리가 이 세 차원에 만족해야 하는가, 아니면 거기에 네번째의 차원(이는 아마도 의미일 것이다)을 덧붙여야 하는가를 아는 문제는 경제적인 또는 전략적인 문제이다. 이는 우리가 앞의 세 차원들에 상응하는 경험 의존적인 모델을 구성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라리 모델 자체가 내부로부터 경험 독립적으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물론 이는 하나의 보완적인 차원, 즉 순간적이기 때문에 경험에 의해 바깥에서 다시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한 차원[사건의 차원]을 도입해야 한다는 조건하에서이다). 그래서 이것은 단순한 사실만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이다.*의미는 지속적으로 존재해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요청된다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실의 문제가 하나 존재하며, 우리는 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문제는, 의미는 지시, 현시, 기호 작용의 세 차원 중 하나 안에 놓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선 지시의 경우에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지시 작용은 일정하게 채워짐으로써 명제를 진으로 만들며, 채워지지 않을 경우 명제는 위가 된다. 그렇지만 의미의 역할은 분명 명제를 진이나 위로 만드는 것에 있지 않으며, 또 이 값들이 효과화되는 차원에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지시 작용은 말들과 사물들 사이의 상응을 보여줄 수 있는 한에서만 명제를 명제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브리스 파랭은 하나의 가설이 그리스 철학에서 드러내는 역설들의 수를 센 바 있다. 그리고 하나의 짐수레가 입 위를 지나가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루이스 캐럴은 보다 직접적으로 묻는다. 이름들은 어떻게 하나의 '대답하는 자'[이름이 지시하는 존재]를 가질 수 있는가? 그리고 무엇인가가 그의 이름에 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또 사물들이 그들의 이름에 답하지 못할 경우에도 그들의 이름을 보존해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경우 아무것도 응하지[대답하지] 않는 지시들의 자의성과 '이'[분명 실존하는] 유형의 형식적 지칭자들/지시자들의 공허성(이들은 모두 의미를 박탈당하고 있다) 외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모든 지시 작용이 의미를 전제한다는 것, 그리고 지시 작용을 시행하기 위해 우리가 의미 안에 단번에 들어간다는 것은 분명하다.*지시 작용이 제대로 발생하지 않을 경우에도, 우리는 지시 작용의 비유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의미에 대한 암묵적 이해를 전제해야 한다.*
의미를 현시 작용과 동일시하는 것은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 왜냐하면 지시자들 자체가 명제 속에서 현시되는 '나'의 기능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나'는 우선적이다. 이것이 파롤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앨리스의 말처럼, "사람들이 당신에게 말할 때에만 당신도 말한다면, 아무도 결코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로부터 의미는 스스로를 현시하는 존재의 신념(또는 욕구) 안에 있다고 결론내릴 수 있으리라. 험프티 덤프티 역시 말한다. "내가 하나의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내가 그것이 의미하도록 원한 것을 의미하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 ......문제는 누가 주인[주체]인가를 아는 것이지. 그게 전부야."
그러나 우리는 신념과 욕구의 질서가 기호 작용의 개념적인 함축들의 질서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 나아가 말하는 자아 또는 '나'라고 말하는 자아의 동일성이 어떤 기표들(신, 세계...... 등의 개념들)의 항구성에 의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랑그의 질서 안에서 자체적으로 전개되는(developpees) 기호 작용들을 포함하는(enveloppe) 한에서만 파롤의 질서 안에서 일차적이고 또 충분하다. 이 기호 작용들이 무너진다면(s'effondrent) 또는 자체로서 수립되지 못한다면, 앨리스가 고통스럽게 경험했듯이 인칭적 동일성은 신, 세계, 자아가 잘못 규정된 누군가의 꿈이 만들어낸 몽상적인 존재들이 되는 한에서[자아 이전의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자아가 만들어낸 주관적 상상의 산물인 한에서] 상실된다. 그렇다면 의미와 기호 작용을 동일시하는 것이 마지막 해결책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원환 속으로 끌려들어가며 또 루이스 캐럴의 역설과 만나게 된다. 기호 작용은 최후의 근거라는 그의 역할을 실행할 수 없으며, 또 환원 불가능한 지시 작용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기호 작용을 좌초시킬 뿐만 아니라 근거와 근거지어진 것이 원환을 형성하게 만드는 매우 일반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호 작용을 참의 조건으로서 정의할 때, 우리는 이 기호 작용에 그것과 의미가 서로 공유하는, 이미 의미의 그것이기도 한 하나의 특징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기호 작용은 어떻게 이 특징을 가정하며 또 사용하는가? 참(verite)의 조건을 말함으로써 우리는 진위(duvrai et du faux) 위로 상승한다. 위인 명제도 의미 또는 기호 작용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 상위의 조건을 오직 그 명제가 진이 될 가능성으로서만 정의한다.7) Russell, op.cit., p.198. "우리는 의미를 지닌 한 연표에 의해 긍정된 모든 것은 일정한 종류의 가능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명제가 진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명제 자체의 가능성의 형식 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 형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논리적 가능성, 기하학적 가능성, 대수적 가능성, 물리적 가능성, 통사론적 가능성 등등.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적 가능성의 형식을 명제의 항들이 성질, 속성, 유 또는 정의와 연관되는 '심급들'[topos]과 가지는 관계에 의해 정의했다. 칸트는 두 가지 새로운 가능성의 형식, 즉 선험적 가능성과 도덕적 가능성을 발명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형식을 정의하는 방식은 기묘한 데가 있다. 조건을 조건지어진 것의 단순한 가능성으로 간주함으로써 조건지어진 것을 조건으로 승격시키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근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지만, 근거지어진 것은 그것을 근거지은 방식에 독립적으로 이전의 상태를 유지한다. 그래서 지시 작용은 그것을 조건짓는 질서에 외재적인 것으로 남으며, 진과 위는 하나를 다른 하나와의 오래된 관계 내에 존속하게 만듦으로써만 그것의 가능성을 결정하는 원리에 무관한 것으로 머문다. 결국 우리는 조건지어진 것을 조건에, 그리고 조건을 조건지어진 것에 끊임없이 귀속시켜야 하는 것이다.
참의 조건이 이 결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건지어진 것의 형식과는 구분되는 하나의 고유한 요소를 사용해야 할 것이며, 또 그 조건은 지시작용 및 명제의 다른 차원들의 실질적인/물질적인(reelle) 생성을 확보해줄 무조건적인 어떤 것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이제 참의 조건은 개념적 가능성의 형식[기호 작용적 구조]으로서가 아니라 내용으로서 또는 비물체적(ideelle) '자리'(couche)로서, 다시 말해 기호 작용이 아니라 의미로서 정의될 것이다.

명제, 표현, 사건
의미는 명제의 네번째 차원이다. 스토아 학파는 사건과 더불어 의미를 발견했다. 의미는 명제에 있어 표현된 것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표면에 존재하는 비물체적인 것이며, 환원 불가능한 복합적 존재이며, 명제 속에 내속하거나 존속하는 순수한 사건이다.*들뢰즈에게 의미란 사물 저편에 놓여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물체적인 것들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표면 효과(=사건) 이외의 것이 아니다. 왕의 머리와 왕관은 물체들이지만, 왕의 머리에 왕관이 얹히는 운동 자체는 사건이다. 그 사건이 탈물질적인 층위에서 곧 "......가 왕이 되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 의미는 하나의 명제로 표현되어 존속하게 된다.* 다음으로 14세기에, 이 발견은 오컴 학파에 의해, 특히 그레고르 드 리미니와 니콜라 도트르쿠르에 의해 이루어졌다. 세번째로는 19세기의 대철학자이자 논리학자인 마이농에 의해 이루어졌다.8) 위베르 엘리(Hubert Elie)는 그의 뛰어난 저작인 Le Complexe significabile(Vrin, 1936)에서 리미니와 도트르쿠르의 이론들을 분석했다. 그는 이들의 이론과 마이농의 그것이 얼마나 유사한가를 보여주었으며, 어떻게 똑같은 논쟁이 14세기와 19세기에 발생했는가를 밝혔다. 그러나 그는 스토아 학파는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반복에는 이유가 있다. 이미 보았듯이, 스토아 학파의 발견은 플라톤 철학의 전복을 전제했다. 마찬가지로 오컴적인 논리학은 보편들의 문제와 부딪쳤다. 그리고 마이농은 헤겔과 그의 후계자들과 투쟁했다.
문제는 이것이다. 명제 또는 명제의 항들과도, 또 명제가 지시하는 대상 또는 사태와도, 또 체험된 것, 표상, 또는 명제 속에 표현된 것의 정신적 행위와도, 나아가 개념들 또는 기호화된 본질들과도 혼동되지 않는 어떤 것(aliquid)이 존재하는가? 바로 의미, 즉 명제에 있어 표현된 것은 개별적 사태로도 특수한 이마주들로도 개인적인 믿음들로도 또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개념들로도 환원될 수 없다.
스토아 학파는 이를 통찰했다. 그들에 따르면, [의미는] 말도 물체도 감각적 표상도 나아가 합리적인 표상도 아니다.9)비물체적인 것들과 합리적 표상들(물체들이 남기는 흔적들의 복합체들) 사이의 스토아적 구분에 관해서는 브레이어의 앞의 책, 16~18쪽을 보라./ 나아가 아마도 의미는 특수와 일반, 단일과 보편, 인칭과 비인칭에 무관하게 '중성적'일 것이다. 그것은 전혀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급[네번째 차원]을 덧붙여 인정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가 이미 제시했던 지시 작용, 현시 작용, 기호 작용과 더불어 만족해야 할까? 여러 차례 이 논쟁은 반복되었다(리미니를 논박했던 앙드레 드 뇌프샤토와 피에르 델리, 마이농을 논박했던 브렌타노와 러셀), 사실, 이 네번째 차원을 드러내려는 시도는 루이스 캐럴의 스나크 사냥과 좀 비슷하다. 아마도 그것은 사냥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의미는 스나크일 것이다.*의미는 명제 안에 존속한다. 따라서 실존하는 양태로 포착할 수 없다. 또 의미는 사물에서 발생하지만, 그것을 확인하려는 순간 사라진다. 이 점에서 의미는 스나크와도 같다.*
말들, 사물들, 이마주들, 그리고 관념들에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답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의미와 관련해 우리는 그것이 존재한다고(existe) 말할 수 조차 없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사물들 속에 존재하는 것도 정신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물리적 존재인 것도 정신적 존재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의미는 이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그것[의미]이 유용하다는 것,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다. 의미는 무효하고(inefficace) 되돌릴 수 없고 비생산적인 광휘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는 명제의 일상적인 차원들[지시, 현시, 기호 작용]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원환에서 출발해 간접적으로만 의미를 추론해낼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의미의 차원이 그 자체로서, 그 환원 불가능한 모습으로, 나아가 명제의 경험 독립적이고 내적인 모델을 활성화시키는 생성의 힘과 더불어 등장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뫼비우스의 띠에서처럼 그 원환을 찢을 때, 그것을 길게 펼칠 때, 그것을 쭉 펼 때뿐이다.10) 뫼비우스의 띠에 대한 알베르 로트만의 언급을 참조하라. 그에 따르면, 뫼비우스의 띠는 "하나의 면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외재적인 성질이다. 왜냐하면 그것[띠]을 설명하려면, 띠를 찢어야 하고 비틀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띠의 표면에 대해 외부에 있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한 회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논리학은 경험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이 경험주의는 플라톤적 형상들에 떨어지지 않고서 가시적인 것의 실험적 차원들을 넘어설 수 있는, 그리고 길게 펼쳐진 경험의 극한에서 하나의 환영을 추적하고 자극하고 아마도 생산하기까지 할 그러한 경험주의이다./
이 궁극적인 차원을 후설은 표현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지시, 현시, 논증과 구분된다. 의미란 표현된 것이다. 후설은 스토아적 영감의 생생한 원천들을 재발견하는 데 마이농에 뒤지지 않는다. 예컨대 후설이 '지각적 노에마' 즉 '지각 작용의 의미'를 탐구할 때, 그는 그것을 물리적 대상과는 물론이고, 심리적 체험, 정신적 표상, 나아가 논리적 개념들과도 구분한다. 그는 그것을 되돌릴 수 없는 것, 비물체적인 것, 물리적 존재도 심리적 존재도 아닌 것, 작용르 받지도 가하지도 않는 것, 결국 순수한 결과, 순수한 '외관'인 것으로 제시한다. 실제 나무(지시된 것)는 불탈 수 있고 목수의 작업을 위한 재료가 될 수 있고 다른 것과 뒤섞일 수 있지만, 나무의 노에마는 그럴 수 없다. 하나의 동일한 지시 대상에 여러 개의 노에마들 또는 의미가 상응할 수 있다. 아침의 별과 저녁의 별은 두 노에마들, 즉 하나의 동일한 지시 대상이 표현들 속에 나타나는 두 방식이다.
그런데 후설이 노에마는 하나의 드러남 속에서 등장하는 지각 결과, '지각된 것 자체' 또는 외관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를 하나의 감각적인 소여, 성질로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지각 행위의 지향적 상관자인 객관적이고 비물체적인 통일체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노에마는 지각 작용 속에 주어지지 않는다(그렇다고 회상이나 이마주 속에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하나의 지위, 즉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지각 작용적, 상상 작용적 명제, 회상이나 재현의 명제 밖ㅌ에서는 실존할 수 없는 존재의 지위를 지닌다. 우리는 감각적인 색 또는 성질로서의 녹색과 노에마적 색 또는 부대물(attribut)로서의 '푸르러지다'를 구분한다. "나무는 푸르러진다", 이것이 결국 나무의 색의 의미이고, "나무는 나무가 된다"는 그 거시적 의미가 아닌가? 노에마는 순수한 사건, 나무의 사건이 아닌가? 그리고 외관이라고 불린 것은 다름아닌 표면 효과가 아닌가? 동일한 한 대상의, 나아가서는 상이한 대상들의 노에마들 사이에서, 스토아 학파가 사건들 사이에 수립했던 것들과 유비적인 복잡한 연결선들이 구성된다. 현상학은 표면 효과들에 대한 이러한 엄밀한 과학인가?

의미의 이중적 본성
의미 또는 표현된 것의 복잡한 지위를 검토해 보자. 한편으로 그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표현된 것은 그것의 표현의 바깥에 있지 않다. 그래서 의미가 실존한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다만 내속한다 도는 존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의미/표현된 것이 면제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명제와] 분명하게 구분되는 '객체성'(objectite)[물질적 차원에서 유래함]을 지닌다. 표현된 것은 표현과 전혀 비슷하지 않다. 의미는 술어로서 부과되지만, 그것은 결코 명제의 빈위가 아니다. 그것은 사물 또는 사태의 부대물이다. 명제의 술어는 'predicat', 예컨대 '푸르다' 같은 술어이다. 그것은 명제의 주어에 서술된다.*본래 'predicat' 즉 술어는 주어 뒤에 붙는 모든 것을 말하며, 'attribut' 즉 빈사는 계사, 즉 'etre' 동사 뒤에 붙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attribut'라는 말에 "물질에서 발생하는 사건이자 명제에 있어 표현되는 의미"라는 그 자신의 독특한 뜻을 부여해 사용한다. 이 뜻을 살리기 위해 '부대물'이라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물의 부대물은 동사, 예컨대 '푸르러지다'이다. 아니면 차라리 이 동사에 의해 표현된 사건이다. 그리고 그것은 주어에 의해 지시된 사물의, 또는 명제 전체가 지시하는 사태의 부대물로 부대한다(s'attribue).
역으로 이 논리적 부대 자체는 결코 물리적 사태와도 또 하나의 성질 도는 이 사태의 관계와도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부대물은 존재(etre)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의 존재를 수식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열외-존재(extra-etre)이다. '푸르다[라는 형용사]'는 하나의 성질, 사물들의 혼합체, 엽록소가 잎사귀의 다른 모든 부분들과 공존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나무-공기의 혼합체를 지시한다. 반면 '푸르러지다[라는 동사]'는 사물의 한 성질이 아니라 사물에 관련해 언표되는, 또 사물을 지시함으로써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바깥에는 실존하지 않는 하나의 부대물-술어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출발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온 셈이다. 즉, 의미는 명제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등등.
그러나 이것이 우리가 하나의 원환에 부딪쳤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이는 차라리 두께 없는 두 얼굴의 공존일 뿐이다. 우리는 길이를 따라가면서 한 얼굴에서 다른 얼굴로 이행한다. 의미는 면제로 표현된 것 도는 표현 가능한 것이며, 동시에 사태의 부대물이다. 그것은 한쪽 얼굴은 사물들로 향하며, 다른 쪽 얼굴은 명제들로 향한다. 그러나 의미를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와 혼동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명제가 지시하는 사태나 성질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의미는 정확히 면제들과 사물들의 경계선이다. 그것은 이 무엇(aliquid)이며, 열외-존재이자 내속이며, 내속들에 부합하는 이 최소 존재이다.11) 마이농과 스토아 학파도 이 '내속'과 '열외-존재'에 상응하는 표현을 사용했다./ 사건을 한 사태에서의 그것의 시공간적 현실화[즉 사고事故]와 혼동하지 않는 한에서 의미가 '사건'이 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이라는 개념의 뜻이 무엇인가는 묻지 않을 것이다. 사건은 곧 의미 자체이다. 사건은 본질적으로 언어에 속한다. 그것은 언어와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언어는 사물들에 관련해 언표되는 것이다.
장 가테뇨는 캐럴의 이야기들과 고전적인 요정 이야기들의 차이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캐럴의 경우 발생하는 모든 일은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에 의해 발생한다. "그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은 하나의 담론, 조각난 담론이다." 루이스 캐럴이 그의 저작들을 위치시키는 것은 바로 의미-사건의 이 두께 없는 세계[표면], 표현 가능한 것-부대물의 세계이다. 캐럴이 창작한 환상적인 작품들과 도지슨[캐럴의 본명]이 저술한 수학적-논리학적 저작들의 관계는 바로 이 점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환상적인 작품들이 단지 논리적 저작들의 관계는 바로 이 점에서 유래한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환상적인 작품들이 단지 논리적 저작들이 제시한 규칙들과 법칙들을 파악하지 못했을 대 우리가 떨어질 함정들과 어려움들을 모아놓은 것일 뿐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많은 함정들이 논리학적 저작 자체 안에 존속하기 때문에도 그렇고, 또 배분이 다른 종류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도 그렇다. 캐럴의 모든 논리학적 저작들이 직접적으로 기호 작용, 그리고 논리적 함축들과 결론들에 관련되며, 단지 간접적으로만(기호 작용이 해결하지 못하는, 나아가 그것이 유발하는 역설들의 매개에 의해) 의미에 관련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반면, 그의 환상적인 작품들은 즉각적으로 의미에 관련되며, 그것을 직접적으로 역설의 잠재력에 연결시킨다. 이는 의미의 두 상태 -사실상과 권리상, 경험 독립성과 경험 의존성- 에 제대로 상응한다. 전자에 의해 우리는 명제의 원환으로부터 의미를 간접적으로 추론하며, 후자에 의해 명제들과 사실들 사이의 경계선을 따라 원환을 펼침으로써 의미를 그 자체로서 드러나게 만든다.

계열 4 - 이원성

신체-언어, 먹기-말하기
우리의 논의에서, 일차적인 거대 이원성은 원인들과 결과들, 물체적인 사물들과 비물체적인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사건-효과들이 그들을 표현하는 명제들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 이 이원성은 사물들과 명제들, 물체들과 언어의 이원성으로 확장된다.*사건과 의미가 발생하는 것은 물체들의 표면에서이지만, 이들이 내속의 양태로 보존되는 것은 명제 안이다. 그래서 물체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것이라는 존재론적 이원성이 물체와 명제, 사물과 언어라는 이원성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루이스 캐럴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는 대안-먹기인가 말하기인가-이 등장했다. [실비와 브루노]에서 대안은 '약간의 먹을 것들'인가 '셰익스피어의 몇 쪽'인가로 나타난다. 저녁에 베풀어진 앨리스의 향연에서는 당신 앞에 나온 것들을 먹을 것인가 아니면 먹는 자의 식탁에 올라갈 것인가로 나타난다. 먹는 것, 먹히는 것은 물체적 작용의 모델이며, 그들의 심층적 혼합의 유형, 능동과 수동, 상호 공존의 양상이다. 말하는 것은 표면에, 또는 비물체적인 부대물들, 사건들의 운동이다. 우리는 음식을 말하는 것과 말을 먹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대한가를 물을 수 있다. 음식에 집착할 때의 앨리스는 삼켜버리기, 삼켜지기라는 악몽에 사로잡힌다. 그녀는 자신이 들었던 시들이 식용 물고기들에 새겨지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음식물을 말한다면, 어떻게 먹을 것으로서 식탁에 올려진 존재 앞에서 그것을 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앨리스가 생쥐 앞에서 실언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 앞에 놓인(presente) 푸딩을 어떻게 먹지 않을 수 있는가? 나아가 낭송의 언어가 빗나가버린다. 마치 언어적 환상과 더불어 물체의 깊이 속으로 빨려들어가듯이. 마치 우리가 언어상의 말썽거리가 부수어진 구강적 행동들(모든 것을 입으로 가져가기, 무엇이든 먹기, 이를 갈기)을 유발시키는 이 병 안에서 그것[낭송의 언어]을 보듯이. "나는 이들이 참된 말들(paroles)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해." 앨리스는 음식에 대해 말하는 자의 운명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러나 말들을 먹는 것은 바로 그 반대이다. 이는 물체들의 작용을 언어의 표면으로 상승시키는 것이며, 이 도발의 위험에 모든 언어를 내던지더라도 물체들을 그들의 오래된 심층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상승시키는 것이다. 이번에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측면을 따라 펼쳐진 표면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말더듬기가 실언을 대체하고, 표면의 환각들(phantasmes=시뮬라크르들)이 심층의 환상들(hallucinations)을 대체하며, 가속화된 미끄러짐에 대한 꿈들이 매장과 까다로운 흡수/삼킴에 대한 두려움들을 대체한다. 그래서 비물체적이고 식욕 부진에 걸린 어린 소녀, 말더듬이이고 왼손잡이인 사내아이는 그들의 물체적이고 탐욕스러운, 게걸스러우면서도 실언을 남발하는 이마주로부터 벗어나야만 했다.

두 종류의 말
그러나 이 두번째의 이원성, 즉 물체-언어, 먹기-말하기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미 보았듯이, 의미가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바깥에서는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사태의 부대물이지 명제의 부대물은 아니다. 사건이 언어 안에 존속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사물과 더불어 발생한다. 사물들과 명제들은 근본적인 이원성을 형성하기보다는 의미를 경계선으로 해서 맞붙어 있다. 이 경계선이 그들을 혼합하는 것은 아니며, 그들을 다시 통합하는 것도 아니다(여기에는 이원론과 마찬가지로 일원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경계선]은 차라리 그들의 차이의 절속-물체/언어-과도 같다.*절속(articulation)은 '다'(多)가 하나로 완전히 통합되는 것(1+1+1=3)도 또 불연속을 이루는 것(1,1,1)도 아니다. 그것은 '다'가 구분되면서도 이어져 있는 것이다(1+1+1). 끊어짐과 이어짐을 동시에 표현하기 위해 '절속'이라고 번역했다.*
좀 무리가 있지만 사건을 들판의 수증기에 비유한다면, 이 수증기는 정확히 사물들과 명제들의 경계선까지, 돌쩌귀까지 상승한다. 그래서 이원성은 두 측면으로부터, 두 항 각자 안에서 반영된다. 사물들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한편으로 사물들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성질들과 객체적(reelle) 관계들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비물체적인 사건들을 나타내는 탈물질적이고(ideaux) 논리적인 부대물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명제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편으로 사태를 지시하는 명사들과 형용사들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사건들이나 논리적 부대물들을 표현하는 동사들이 존재한다. 한편으로 단수 고유 명사들과 척도, 멈춤과 정지, 현존들을 표식하는 주어들/명사들과 일반 형용사들이 존재하며, 다른 한편으로 생성과 [이 생성의] 가역적 사건들의 연쇄를 동반하는 동시에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쪼개지는 현재를 가진 동사들이 존재한다.
험프티 덤프티는 두 종류의 말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어떤 말들은 분명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제멋대로인 동사가 그들이야. 우리는 형용사를 가지고 원하는 바를 할 수 있지만, 동사는 그렇지 못하지. 그렇지만 나는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단 말이야. 투과 불가능성! 내가 말하려는게 바로 이거야." 그리고 험프티 덤프티는 '투과 불가능성' 이라는 기묘한 말을 설명하면서 매우 적절한 이유를 대고 있다("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이 주제에 대해 충분히 떠들었다는 거야". 사실상 투과 불가능성은 다른 적을 의미한다. 험프티 덤프티는 사건드르이 되돌릴 수 없음을 물체의 능동적, 수동적 운동과 대비시키고, 두께 없는 비물체적 투과 불가능성을 실체들의 상호 투과 및 혼합과, 표면의 저항[되돌릴 수 없음]을 심층의 고분고분함[조작할 수 있음]과, 요컨대 동사들의 '제멋대로임'을 명사와 형용사의 얌전함과 대비시킨다. 그리고 투과 불가능성은 또한 둘 사이의 경계선 그리고 정확히 그 경계선 위에 앉은 자를 뜻한다. 험프티 덤프티가 그의 좁은 벽 위에 앉은 것과 꼭같이. 그리고 그가 그 둘의 차이를 절속하고 있는 투과 불가능한 지배자로서 그 둘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과 꼭같이("그렇지만 나는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어").

명제의 두 차원: 지시와 표현
이것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다. 이원성에 관한 우리의 결론은 [크라틸로스]의 가설로 돌아가는 데 있지 않다. 명제에서의 이원성은 두 종류의 명사, 즉 멈춤의 명사와 생성의 명사, 실체들이나 성질들을 가리키는 명사와 사건들을 가리키는 명사 사이에 있지 않다. 그것은 명제 자체의 두 차원,*여기에서의 두 차원이란 명제가 사물과 맺을 수 있는 두 관계를 뜻한다. 현시 작용은 명제와 주체의 관계이고, 기호 작용은 기표들 자체의 구조를 뜻하기 때문에 제외한 것이다. 들뢰즈는 명제의 지시 작용은 물체적인 것과 상응하는 데 반해, 표현은 사건-의미에 상응함을 말하고 있다.* 즉 지시와 표현, 사물들을 지시하는 작용과 의미를 표현하는 작용 사이에 있다. 여기에 거울의 두 면과도 같은 관계가 있다. 그러나 그 두 면은 유사하지 않다("나머지 모든 것은 다를 수 있는 만큼 달랐어"). 거울의 저편으로 이행하는 것, 그것은 지시 작용의 관계에서 표현의 관계로 중간 매개 없이, 즉 현시 작용과 기호 작용 없이 이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언어가 지시된 것들과 더 이상 관계 맺지 않고 다만 표현된 것들 즉 의미와 관계맺을 뿐인 영역에 다다랐음을 말한다. 이원성의 마지막 자리옮김은 이런 것이다. 그것[이원성]은 이제 명제의 내부로 이행한다.

두 계열
생쥐는 여주들이 정복자 기욤에게 왕관을 얹어주려고 계획했을 때 "대주교는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한다. 오리는 묻는다. "뭘 알았다는 거지?" "그것을 알았다니까." 생쥐는 화가 나서 대답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것이 뭔지 너는 알고 있잖아." 오리는 말했다. "내가 뭔가를 찾을 때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 대개 너구리나 벌레 그런 것들이지. 문제는 대주교가 뭘 알았느냐는 거야." 오리가 '그것'이라는 말을 [영주들이 ......하는 사건 자체로 생각하지 않고] 모든 사물들, 사태들, 가능한 성질들을 가리키는 용어(지시자)로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나아가 오리는 지시 대상을 명확히 가리키고 있는데, 그것은 분명 먹히는 것 또는 먹힐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지시 가능한 것 또는 지시된 것은 원칙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며 투과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앨리스는 자신이 음식밖에는 '상상할 수 '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생쥐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한다. 즉 명제의 의미로서, 명제에 의해 표현된 사건(기욤에게 왕관을 얹어주러 가는 것)으로서 사용한다.
그래서 '그것'을 둘러싼 애매성은 지시와 표현의 이원성을 다라 분배된다. 명제의 두 차원은 '그것' 같은 애매한 용어에서 무한히 접근하는 두 계열을 조직한다. 그들[두 차원]은 오직 그들을 가르는 경계선 위에서만 만난다(그들은 이 경계선을 따라 끊임없이 늘어진다). 그리고 한 계열이 다시 '먹으려고' 한다면, 다른 계열은 '말하려고' 한다. 그래서 캐럴이 쓴 많은 시들에서 두 차원은 자동적으로 동시에 전개된다. 두 차원은 오직 하나의 기이한 말, 규정 불가능한 무엇 안에서만 수렴한다. 그래서 스나크*스나크는 캐럴의 저작에 나오는 동물이다. 이 동물은 사람들이 그것을 잡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곳에 있지 않고, 놓쳤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거기에 와 있는 역설적 존재이다. 들뢰즈가 [특별 보론]에서 말하는 '빈 칸'은 이 스나크를 추상한 것이다.*라는 반복구가 등장한다. "너는 그것을 골무를 가지고 추적할 수도 있고 조심성을 가지고 추적할 수도 있어. 너는 그것을 포크를 가지고 추적할 수도 있고 희망을 가지고 추적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골무와 포크는 지시된 도구들과 관련되며, 희망과 조심성은 의미와 사건의 고려와 관련된다(루이스 캐럴에서 의미는 종종 우리가 '보호해야 할' 것, 근본적인 '조심성'의 대상으로서 등장한다). 스나크라고 하는 이 기묘한 말은 두 계열에 의해 그어지면서 끊임없이 늘어난다. 더 전형적인 것은 [실비와 브루노]에 등장하는 정원사의 노래이다. 각각의 절은 두 종류의 전혀 다른 단어들을 포함하며, 이들은 두 가지 상이한 관점을 허락한다. "그는 자신이 ......을 보았다고 생각했네...... .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인 것을 깨달았다네." 절들 전체는 이렇게 두 이질적인 계열을 펼친다. 그 한 계열은 시청각적이고 물리적인 성질들에 따라 묘사된, 먹을 수 있는 또는 먹는 동식물이나 대상들로 이루어지며, 다른 한 계열은 논리적인 속성 그리고 때로는 부모의 외침, 사건들, 소식들, 전언들이나 의미의 운반자들에 의해 정의되는, 뛰어나게 상징적인 인물들이나 대상들로 이루어진다. 각 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원사는 두 계열에 의해 늘어나는 우울한 선율을 늘어뜨린다. 그것은 이 노래가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는 피리소리에 맞춰 춤추는
한 마리의 코끼리를 보았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아내의 편지라는 것을 깨달았지.
그는 말했네, 마침내 나는 삶의
고통을 깨달았노라고.

그는 호롱불 주위로 날갯짓하면서
날아가는 알바트로스를 보았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한 잎의 페니로 살 수 있는 엽서인 것을 깨달았지.
그는 말했네,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겠어. 밤이 너무 차니까.

그는 자신을 로마 교황으로 묘사한
하나의 논증을 보았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글이 새겨져 있는 비누 조각인 것을 깨달았지.
그는 말했네, 낮은 목소리로. 정말 소름끼치는
사건이야, 모든 희망을 접어버리자.

계열 5 - 의미

무한증식
그러나 의미가 사물들과 명제들, 주어들과 동사들, 지시와 표현을 대립시키는 이원성의 두 항들 중 하나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둘 사이의 차이를 절속시키는 경계선이기도 하며, 그의 고유한 특성인 투과 불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의미는 일련의 역설들, 이번에는 내부적인 역설들 속에서 스스로 전개되어야 한다.
무한 소급 또는 증식의 역설. 내가 한 사물을 지시할 때, 나는 언제나 의미가 거기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우리는 소리에서 이마주로, 이마주에서 의미로 이행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번에' 의미 안에 자리잡는다. 의미란 내가 가능한 지시 작용을 행하고자 할 때, 나아가 그 작용의 조건들을 생각하고자 할 때 이미 들어가 있는 원과도 같다. 의미는 내가 말하기 시작할 때 늘 전제되어 있다. 나는 이 전제 없이는 [말하기] 시작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역으로 나는 언제라도 내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다른 명제의 대상으로서 취할 수 있다.*"내가 말한 바의 의미는......"이라고 다시 명제화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번째 명제의 의미를 나는 또한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전제된 것의 무한 소급에 맞닥뜨린다. 이 소급은 한편으로 말하는 자의 무능력을 다른 한편으로 언어의 큰 힘을 증명해준다. 다시 말해 내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말할 수 없으며 도 어떤 사물과 그것의 의미를 동시에 말할 수 없는 나의 무능력과 말들에 대해 말하는 언어의 무한한 능력을 증명해준다. 요컨대, 하나의 사태를 지시하는 하나의 명제가 주어졌을 때, 우리는 언제나 그 명제의 의미를 [그 명제를 논의 대상/지시 대상으로 삼는] 다른 명제에 의해 지시되는 것으로만 파악할 수 잇다.
명제를 하나의 이름으로 생각하나다면, 하나의 대상을 지시하는 모든 이름은 그 자체 그 이름의 의미를 지시하는 새로운 이름의 대상이 될 것이다. n1은 그것의 의미를 지시하는 n2를 필요로 하며, n2는 n3를, ......등등이 될 것이다. 각각의 이름에 있어, 언어는 이 이름의 의미를 위해 하나의 이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이 언어적 존재의 무한 증식은 프레게의 역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1) G. Frege, Uber Sinn und Bedueutung," Zeitschrift f. Ph. und ph. Kr. 1892. 존재의 무한증식이라는 이 원리는 현대 논리학자들의 많은 근거 없는 반론들을 낳았다. 다음을 보라. Carnap, Meaning and Necessity, Chicago, 1947, pp. 130~138./
그러나 이는 또한 루이스 캐럴의 역설이기도 하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거울의 이면에서, 앨리스와 기사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기사는 그가 부르는 노래의 제목을 말한다. "노래의 제목은 '대구의 눈'이란다." "아니, 그게 노래의 이름이란 말이에요?" 하고 앨리스는 되묻는다. 기사는 다시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는군. 그것은 그 이름이 불리는 바야. 진짜 이름은 '늙은이'야." "그러면 그것이 그 이름이 불리는 바일까라고 말해야겠군요" 라고 앨리스는 수정한다. "아니 그러면 안되지. 그건 전혀 다른 거야. 그 노래는 '길과 방법'이야. 그러나 그것은 단지 그 노래가 불리는 바일 뿐이지, 알겠니?" "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지요?" "다시 말하지만, 그 노래는 사실상 '울타리에 앉아'야."
루이스 캐럴의 용어법에 충실하기 위해 다소 둔탁하게 번역한 이 텍스트는 일련의 이름들을 구분하고 있다. 이로부터 무한 소급이 결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제한이 가해지기 위해서는 규약에 의해 일정하게 정해진 과정을 따라야 한다. 우리는 끝에서 출발해 원래의 소급을 복구시켜야 한다. 1. 캐럴은 말한다. 그 노래는 사실상 '울타리에 앉아'이다. 즉, 그 노래는 그 자체 하나의 명제, 하나의 이름이다(이를 n1이라고 하자). '울타리에 앉아'는 바로 그 노래를 가리키며, 첫절에서부터 등장하는 이 이름이다. 2. 그러나 그것은 그 노래의 이름이 아니다. 그 노래는 자체가 하나의 이름이며, 다른 하나의 이름에 의해 지시된다. 이 두번째 이름(그것을 n2라고 하자)은 '길과 방법'이며, 2, 3, 4, 5절의 주제를 형성한다. 그래서 '길과 방법'은 노래를 지시하는 이름, 즉 그 노래가 불리는 바이다. 3. 그러나 캐럴은 덧붙이기를, 그 실제 이름은 '늙은이'로서 이는 결국 노래 전체에 등장한다. 그래서 지시하는 이름 자체가 하나의 이름을 가지게 되며, 이 이름은 새로운 이름을 형성하게 된다(이를 n3라고 하자). 4. 그러나 이 세번째 이름 자체도 네번째 이름에 의해 지시되어야 한다. 즉 n2의 의미(n3)는 n4에 의해 지시되어야 한다. 이 네번째 이름은 곧 그 노래의 이름이 불리는 바이다. 그래서 '대구의 눈'은 6절에서 등장한다.
그래서 캐럴의 분류에는 네 가지 이름이 존재한다. 노래의 실재로서의 이름, 이 실재를 지시하는, 따라서 노래를 지시하거나 그 노래가 불리는 바를 나타내는 이름, 이 이름의 의미(이것은 새로운 이름 또는 새로운 실재를 형성한다), 이 새로운 실재를 지시하는, 따라서 노래의 이름의 의미를 지시하거나 그 노래의 이름이 불리는 바를 나타내는 이름.
몇 가지 언급할 것이 있다. 우선 루이스 캐럴은 의도적으로 [이름들을] 제한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각각의 절들을 별도로 고려하지 않고 있으며, 계열을 점진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출발점 -'대구의 눈'- 을 임의로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급적인 의미에서 이해된 계열이 실제 이름과 이 실재를 지시하는 이름의 변경을 통해 무한히 연장될 수 있음은 분명하다. 나아가 우리는 캐럴의 계열이 우리가 좀전에 언급한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도 지적해야 하낟. 결국 문제가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이름은 그것의 의미를 지시하는 다른 이름으로 이어지며,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캐럴의 분류에서, 이러한 상황은 오직 n2와 n4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n4는 n2의 의미를 가리키는 이름인 것이다. 그런데 캐럴은 여기에 두 개의 다른 이름을 덧붙인다. 최초의 것[n1]은 그가 지시한 최초의 것을 그 자체 하나의 이름(노래)인 것으로 다루기 때문이고, 세번째의 것[n3]은 그가 지시자인 이름의 의미를 다시 그것을 지시할 이름[n4]과 독립적으로 그 자체 하나의 이름인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이스 캐럴은 하나가 무한히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네 이름들을 가지고 소급을 꾸민다. 다시 말해, 그는 각각의 짝을 그로부터 하나의 보조적인 짝을 이끌어내기 위해 분해하고 융해시킨다. 우리는 뒤에서 그 이유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뒤바뀌는 두 개의 항 -어떤 것을 지시하는 이름과 이 첫번째 이름의 의미를 지시하는 이름- 에 있어서의 소급에 만족하도록 하자. 이 두 항목에서의 소급은 무제한적인 증식의 최소 조건이다.
이보다 간단한 표현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등장한다. 여기에서 공작 부인은 언제나 적어도 명제인 한에서의 모든 것들에서 뽑아내야 할 도덕/도덕성을 찾는다. 왜냐하면 앨리스가 말하지 않을 때면 공작 부인은 빈털터리가 되기 때문이다. "네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면, 너는 말할 수가 없게 된단다. 지금은 네게 이들 중 어느 것이 도덕인지 말해줄 수가 없어." 그러나 앨리스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공작 부인은 도덕을 발견한다. "사정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아요"라고 앨리스는 말한다. "맞아, 바로 그것이 도덕이야. 오! 사랑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사랑이야." 앨리스는 중얼거린다. "누군가가 말했죠. 각자 자기 일에 몰두하면 세상은 둥글게 될 거라고 말예요." 공작 부인은 말한다. "그건 거의 같은 뜻이지. 그리고 그것의 도덕은 바로 의미를 돌보면 소리는 알아서 조심한다는 거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관념들이나 문장들의 연합이 아니다. 각 명제의 도덕은 그 각각의 것의 의미를 지시하는 다른 명제에 있기 때문이다. 의미를 새로운 명제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명제들이 증식하고 "소리들이 알아서 조심하는" 한에서 "의미를 보호하는 것"이다. 의미의 논리학과 윤리학, 도덕 또는 도덕성이 서로 심층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확립된다.

무익한 이중화 또는 얇은 반복의 역설
이 무한 소급을 벗어날 방법은 있다. 그것은 하나의 명제로부터 사물과 말의 경계선에서의 얇은 막인 의미를 추출해내어 고정시키는 것이다(캐럴이 소급의 각 단계마다 반복적 증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차원이 필요 불가결하다는 것, 그것에 도달하자마자 그것을 가지고 작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의미의 운명일까? 명제의 중성화된 이중체, 얇은 환영, 두께 없는 환각*'phantasme'는 '환각'으로, 'fantome'는 '환영'으로, 'hallucination'은 '환상'으로 번역했다.*을 이끌어내는 것 외에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 그래서 의미가 명제 안의 동사에 의해 표현되었을 때 우리는 이 동사를 부정법의 형태 또는 분사의 형태나 의문의 형태로 표현한다.**의미/사건은 아이온의 시간 속에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그것은 일정한 시제로 표현되지 않고 부정의 시제로 표현된다. 즉, '먹었다', '먹을 것이다', '먹고 있다'가 아니라 '먹다', '먹음/먹기', '먹는가?'(의문법은 긍정과 부정을 유보하고 있으므로)로 표현된다.** 신-임(Dieu-etre), 하늘의 푸름(l'etant-bleu du ciel), 하늘은 푸른가?(le ciel est-il bleu?) 의미는 부정과 긍정을 유보 상태에 놓는다. "신은 존재한다, 하늘은 푸르다" 같은 명제들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인가?
의미는 사태들의 부대물로서 열외 존재이다. 그것은 존재에 속하기보다 비존재에 속하는 무엇(aliquid)이다. 명제에 있어 표현된 것인 의미는 실존하지는 않지만 그 명제 안에 존속한다. 이 의미-사건의 얇음이야말로 스토아 논리학의 가장 괄목할 만한 점들 중 하나이다. 물체들만이 작용을 가하고 받는다. 비물체적인 것들은 그럴 수 없다. 이들은 작용 가함과 작용 받음으로부터 파생한 결과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역설을 스토아 학파의 역설이라고 부를 수 있다. 표현된 것의 빛나는 얇음이라는 생각은 노에마의 지위를 확립하려고 했던 후설에까지 이어진다. "표현의 층위는, 만일 그것이 다른 모든 지향성들에 정확히 표현을 부여하는 유일한 것이라면 생산적이지 못하다. 달리 말해, 그것[표현의 층위]의 생산성, 노에마적 활동은 표현한다는 것(l'exprimer) 안에서 소진된다."
의미는 명제로부터의 추출물이다. 그러나 의미는 명제의 긍정과 부정을 유보시킨다는 점에서, 또 그러면서도 명제의 소멸하는[순간적인] 이중체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것과 구분된다. 사람 없는 미소, 촛대 없는 불꽃이 그 예이다.*미소나 불꽃은 사람이나 촛대 같은 실체의 부대물들이다. 이들을 실체로부터 추출해낼 경우, 사람 없는 미소나 촛대 없는 불꽃이 성립한다.* 그리고 무한 소급과 얇은 이중화라는 두 역설은 양자 택일의 대안(......아니면......)을 형성한다. 그리고 전자가 우리에게 최고의 능력과 최대의 무능력을 결합시키게 만든다면, 후자는 우리가 나중에 채워야 할 유비적인 과제를 부과한다(전자에서의 결합은 곧 우리가 그 의미를 추출했던 명제에 관련해서의 의미의 비생산성을 명제의 차원들에 관련해서의 그 [의미의] 생성의 힘과 결합시킴이다).
어쨌든 캐럴은 이 두 역설이 대안을 이루고 있음을 분명하게 의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앨리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을 삼킨 눈물의 바다에서 벗어날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진다. 그 하나는 생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고(이 이야기는 환영 같은 이것 안에서 명제의 의미를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인식 가능한 가장 '얇은' 이야기이다), 다른 하나는 코쿠스(Caucus)에서의 경주에 참가하는 것이다(이 경주에서 사람들은 명제와 명제 사이를 빙빙 돎으로써 무한한 증식의 원환 속에서 정복자도 피정복자도 없이 원할 때 멈춘다). 결국 얇음이란 뒤에 가서 투과 불가능성이라고 불린 것이다. 그리고 두 역설은 더듬거림의 본질적인 형식들, 빙빙 도는 증식의 무도병적인 또는 경련적인 형식과 단속적인 정지의 파상풍적인 또는 강직성의 형식을 나타낸다. 그가 'Poeta fit non nascitur'[시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라고 말했듯이, 경련과 휘파람이 시의 두 규칙이다.

중성 또는 본질의 제3상태의 역설
두번째 역설은 다시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세번재의 역설을 던진다. 왜냐하면 명제의 이중체로서의 의미가 긍정과 부정에 모두 무관하다면, 능동도 수동도 아니라면 명제의 어떤 양태도 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의미는 질, 양, 관계, 양상의 측면에서 서로 대립하는 명제들에 있어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 이 네 측면들이 모두 지시 작용에 그리고 그 적용*하나의 명제가 포함하는 변수가 일정한 함수값으로 채워지는 것이다.*의 다양한 측면에 관련된는 것이지 의미나 표현에 관련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질(긍정과 부정)의 경우를 보자. "신은 존재한다"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지시 대상의 실존에 무관하다는 점 때문에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이는 14세기 니콜라 도트르쿠르가 질책한 환각적인 역설이자 탄핵의 대상이다. "contradictoria ad invicem idem significant."[모순된 것들이 서로 같은 것에 서술된다.] 다음으로 양의 경우를 보자. 모든 인간은 하얗다, 어떤 인간도 하얗지 않다, 어떤 인간은 하얗지 않다...... .
그리고 관계의 경우, 의미는 역전된 관계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의미에 관련해서의 관계는, 그것[의미]이 미친 듯한 생성의 모든 역설들을 표면으로 올려보내는 한에서, 언제나 동시에 두 방향으로 수립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언제나 이중의 의미이며, 관계에 있어 올바른 방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사건들은 결코 원인-결과의 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두 방향으로 반전되는 준인과율, 비실질적이고 환영적인 인과율을 형성한다. 내가 보다 젊고 보다 늙은 것은 동시적인 것도 아니며 또 같은 것에 관련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가 젊어지거나 늙어지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며 동일한 관계에 의한 것이다. 캐럴의 저작들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예들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고양이들이 박쥐들을 먹는다"와 "박쥐들이 고양이들을 먹는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와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주는 것을 사랑한다"와 "사람들은 내가 사랑하는 것을 나에게 준다", "나는 잠자면서 숨을 쉰다"와 "나는 숨쉬면서 잠을 잔다" 등은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실비와 브루노]에서 또다른 예를 볼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실비를 사랑할 것이다"라는 명제를 담은 붉은 보석과 "실비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것이다"라는 명제를 담은 푸른 보석은 유일하고 동일한 보석의 두 면이다. 우리는 생성의 법칙에 입각할 경우 이 두 면 중 어느 한 면을 그 자체에 있어/단독으로 선호할(to choose a thing from itself)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양상의 경우를 보자. 지시 대상의 가능성, 현실성, 필연성은 어떻게 의미에 영향을 주는가? 이 문제는 사건 역시 미래와 과거 속에서 이들을 따라 현재를 무한히 쪼갬으로써 유일하고 동일한 양상을 가져야한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만일 사건이 미래 안에서 가능하고 과거 안에서 현실적이라면['actuel'이 아니라 'reel'임]. 그것은 동시에 미래이고 과거여야 한다. 사건은 미래와 과거에서 동시에 분할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건을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우발적 미래들의 역설을, 그리고 이 역설이 스토아 학파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상기할 수 있다. 그런데 필연성의 가설은 미래를 언표하는 명제에 모순율을 적용하는 것에 근거한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 스토아 학파는 필연성을 비켜가기 위해 그리고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운명적인 것'을 긍정하기 위해 놀라운 사유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지평에서 스토아 학파의 테제를 되찾기를 기약하면서, 차라리 그 관점을 벗어나야 한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한편으로 지시 작용의 현실화/적용 불가능성과, 다른 한편으로 기호 작용의 최소한의 조건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의미와 관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가능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필연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운명적'이다. 동시에 사건은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안에 존속하며, 사물들의 표면에서, 존재의 외곽에서 다시 살아난다. 바로 이것이 '운명적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명제에 의해 미래로서 언표되는 사건에,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과거로서 사건을 언표하는 명제에 속한다.
바로 모든 것이 언어를 경유하며 언어 안에서 초월되기 때문에, 캐럴의 일반적인 기법은 사건을 두 번 -한 번은 그것의 존속의 터전이 되는 명제 안에서 또 한 번은 표면에서의 터전이 되는 사태 안에서, 한 번은 그것을 명제에 관련시키는 노래의 짝 안에서 또 한 번은 그것을 존재들에, 사물들과 사태들에 관련시키는 표면 효과 안에서- 제시하는 데 있다(그래서 트위들둠과 트위들디의 싸움, 또는 사자와 일각수의 싸움이 나온다. 그리고 [실비와 브루노]에서 캐럴은 그가 사건들 후에 정원사의 노래를 구성했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를 맞춰보라고 독자들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두 번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언제나 동시에 발생하며, 또 이들은 그 내부와 외부, '내속'과 '열외 존재', 과거와 미래가 늘 가역적인 연속성 안에 있는 동일한 한 표면의 동시적인 두 얼굴이기 때문이다.
명제의 양상들로부터 독립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이 중성의 역설들은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인가? 이비첸나는 본질의 세 가지 상태를 구분했다. 그들 중 둘은 일반적인 사유하는 지성에 관련해서의 보편적인 상태와 구체적 사물들에 관련해서의 단일한 상태이다. 그러나 이 둘 모두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동물은 동물 자체 이외의 것이 아니다(animal non est nisi animal tantum). 그것은 보편적인 것과도 단일한 것과도 무관하며, 특수한 것과도 일반적인 것과도 무관하다.
본질의 첫번째 상태는 개념 및 개념적 함축의 질서 안에서 명제에 의해 기호화된 것으로서의 본질이다. 두번째 상태는 특수하게 구현된 사물들 안에서 명제에 의해 기호화된 것으로서의 본질이다. 그러나 세번째 것은 의미로서의 본질, 표현된 것으로서의 본질이다. 언제나 얇음의 상태에 있는 -동물일 뿐(animal tatum)- 이 불모성 또는 이 빛나는 중성. 보편적인 것과 단일한 것에,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에, 개인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에, 나아가 긍정과 부정에 무관한 상태. 요컨대 모든 대립물들에 무관한 상태. 왜냐하면 이 모든 대립물들은 단지 지시 작용과 기호 작용의 관계에 있어 고려된 명제의 양태들일 뿐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의미의 특성에 관련해서의 양태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대립을 뛰어넘는다는 바로 이 점이 순수 사건, 그리고 그것이 동반하는 [스토아적] 운명의 지위가 아닌가? 사적인 것도 공적인 것도 아닌, 집단적인 것도 개인적인 것도 아닌, 동시적이라는 점에서 이 중성 안에서 그만큼 무섭고 능력 있는 지위.

부조리한 것 도는 불가능한 대상들
이 역설로부터 또 하나의 역설이 따라나온다. 모순적 대상들을 지시하는 명제들은 그들 자체 의미를 가진다. 그렇지만 이들의 지시 작용은 결코 현실화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화 가능성의 유형을 정의해줄 기호 작용도 물론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기호 작용을 수행하지 못하며, 따라서 부조리하다. 물론 그들은 의미를 가진다. 부조리와 무의미라는 두 개념이 혼동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불가능한 대상들 -둥근 사각형, 외연이 없는 물질, '운동하는 영원'(perpetuum mobile), 골짜기 없는 산 등- 은 '조국이 없는' 대상들이며, 존재 바깥에 있는 대상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한 그 바깥에서 정확하고 분명한 위치를 가진다. 다시 말해 그들은 '열외 존재' 이자 또 구체적인 사태로 현실화되지 못하는 관념적인 순수 사건들이다.
우리는 이 역설을 마이농의 역설이라고 불러야 한다. 마이농이야말로 이 역설로부터 가장 인상적이고 빼어난 결과들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두 종류의 존재를, 즉 지시 작용의 질료로서의 현실 존재와 기호 작용의 형식으로서의 가능 존재를 구분할 때, 우리는 또한 현실, 가능, 그리고 불가능에 공통적인 최소치를 정의하는 이 열외 존재를 덧붙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순율은 가능과 현실에 적용되지만 불가능에는 적용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존재들은 이 최소치로 환원되는,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명제 안에 존속하는 열외 존재들이다.

계열 6 - 계열화

계열 형성과 이절적 계열들
무한 소급의 역설로부터 다른 모든 역설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소급은 필연적으로 계열의 형식을 띤다. 다시 말해, 지시자인 각각의 이름/명사는 다른 이름에 의해 지시되어야 할 의미를 가진다(n1->n2->n3->n4......). 만약 우리가 명사들의 단순한 이어짐만을 고려한다면 계열은 등질적인 종합을 행하고 있는 것이며, [이 종합에서] 각각의 명사는 그것의 순서, 들급[차원], 유형에 있어서만 앞선 명사와 구분된다. 그런데 [러셀의] '유형'의 이론에 따른다면, 앞선 이름의 의미를 지시하는 명사들 각각은 그 [앞선] 이름 및 그것이 지시하는 것보다 등급상 상위의 이름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름들의 단순한 이어짐이 아니라 이 이어짐 안에서 발생하는 변화까지도 고려한다면, 우리는 각각의 이름이 우선은 그것이 행하는 지시 작용을 통해서, 다음으로는 그것이 표현하는 의미를 통해서 드러남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의미가 다른 이름에게는 지시 대상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예컨대 n3의 의미는 n4의 지시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지시 작용과 의미가 계열 형성의 두 필수 요소가 된다.*
루이스 캐럴의 저작이 지니고 있는 이점은 바로 이 본성상의 차이를, 이질적인 종합을 드러내준다는 점에 있다. 달리 말한다면, 계열 구조는 적어도 두 계열의 동시성 내에서만 필연적으로 현실화된다.*즉 nk의 계열에서 n은 3보다 크거나 같아야 한다.* 오직 유형이나 등급에 있어서만 구분되는 등질적인 항들로 형성된 모든 단일한 계열은 반드시 두 이질적인 계열을 포함하게 된다. 그 각각의 계열은 [한 계열의 부분 집합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유형이나 등급의 항들로 구성되지만, 각 계열의 항들은 본성상 다르다(물론 이 계열들은 도한 등급에 있어 다를 수도 있다[한 계열 안에서 다시 여러 등급이 나뉠 수도 있다]). 그래서 계열 구조는 결국 복계열적일(multi-serielle) 수밖에 없다.
우리는 수학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수학에서] 한 점의 이웃에서 구성된 계열은 다른 점의 이웃에서 구성되어 앞의 계열과 수렴하거나 발산하는 다른 계열과의 관계하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앨리스]는 구강적 소급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소급'은 우선은 논리학적인 의미에서, 이름들의 종합이라는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종합의 등질적 구조는 먹기와 말하기, 먹을 수 있는 음식들과 표현할 수 있는 의미라는 구강성(oralite)의 이질적 계열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를 앞에서 서술한 이원성의 역설들로 인도하는 것, 우리로 하여금 이 새로운 관점에서 그것들[역설들]을 다시 취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계열적 구조 자체이다.

이들의 구성
결국 두 이질적인 계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규정될 수 있다. 우리는 사건들의 계열 하나와 이 사건들이 그 안에서 현실화되거나 되지 못하는 사물들의 계열 하나를 생각할 수 있다. 또는 지시자인 명제들의 계열 하나와 지시된 사물들의 계열 하나, 동사들의 계열 하나와 형용사들과 명사, 대명사들의 계열 하나, 표현과 의미의 계열 하나와 지시 작용과 지시된 것들의 계열 하나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변양태들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은 단지 이런 계열들의 조직화를 위한 자유도들을 나타낼 뿐이다. 이미 보았듯이, 사건들과 사태들 사이에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 명제들과 지시된 대상들 사이에서 표면으로 이행하는 것, 표현과 지시 작용 사이에서 명제의 내부로 이행하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이원성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외관상 등질적인 한 계열[예컨대 구강의 계열] 아래에서 두 계열[먹기의 계열과 말하기의 계열]을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물들과 사태들의 두 계열을 생각할 수도 있고, 사건들의 두 계열 또는 명제들과 지시 작용들의 두 계열 또는 의미나 표현의 두 계열을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이 계열들의 구성은 자의적이라는 것을 뜻할까?

이 계열들은 어디로 수렴하는가
동시적인 두 계열을 지배하는 법칙은 그들이 결코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는 기표를 나타내고 다른 하나는 기의를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의 맥락에서 이 두 용어는 특수한 뜻을 부여받는다. 우리는 그 자체로 의미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는 모든 기호를 '기표'라고 부르고, 반대로 의미의 이 측면에 상관자로 기능하는 것, 즉 이 측면에 상대적으로 이원적으로 정의되는 것을 '기의'라고 부른다. 그래서 결국 기의가 의미 자체는 아니다. 우리가 규정한 뜻에서의 기의는 바로 개념이다. 그리고 보다 넓은 뜻에서, 그것은 의미와 이러저러한 측면에서 구분됨으로써 정의될 수 있는 각각의 것이다.
그래서 우선 기표는 한 사태의 논리적이고 관념적인 부대물로서의 사건이며, 기의란 성질들을 그리고 실질적 관계들을 지닌 사태이다. 다음으로 기표는 지시작용, 현시 작용, 기호 작용을 포함하는 한에서 전체로서의 명제이며, 기의는 이 차원들[작용들]에 상응하는 독립적인 항, 즉 개념이며 나아가 지시된 사물 또는 현시된 주체이다. 마지막으로 기표는 유일한 표현의 차원이며 하나의 독립적인 항에 상대적이지 않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왜냐하면 표현된 것으로서의 의미는 표현 바깥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기의는 이제 지시, 현시, 기호 작용이다. 즉, 의미나 표현과는 구분되는 한에서의 명제이다. 그래서 두 계열의 사건을(아니면 두 계열의 사물 또는 두 계열의 명제 또는 두 계열의 표현을)고려함으로써 계열적 방법을 확장하고자 할 때, 등질성의 모양새는 외관적으로만 그럴 뿐이다. 다시 말해, 한 계열은 언제나 기표의 역할을 하며 다른 한 계열은 언제나 기의의 역할을 한다. 물론 우리가 관점을 바꾸면 이들의 역할도 뒤바뀐다.

라캉의 역설: 이상한 요소(빈 칸)
자크 라캉은 포(Edgar Poe)의 이야기에 두 계열이 존재함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첫번째 계열. 왕비가 받은 위험한 편지를 보지 못하는 왕, 그것[편지]을 드러내야만 했던 만큼이나 잘 숨김으로서 짐을 던 왕비, 모든 것을 보고서 편지를 가로챈 대신, 두번째 계열. 대신에게서 아무 것도 발견해내지 못하는 경찰, 편지를 보다 잘 숨기기 위해서 오히려 그것을 드러내놓으려고 생각했던 대신, 모든 것을 보고서 다시 편지를 가로챈 뒤팽(Dupin).
계열들 사이의 차이가 크기를 달리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저자들에게는 무척 클 것이지만, 어떤 저자들 -무한소적이면서도 유효한 변이들만을 도입하는 저자들- 에게는 작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계열들 사이의 관계, 기표를 기의에 연결시키는 관계, 기의를 기표와 이어주는 관계는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이야기의 계속, 상황들의 유사함, 인물들의 동일성에 의해 확립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 중 그 어느 것도 본질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본질적인 것은 작거나 큰 차이들이 그 계열들을 유사하게 만들 때, 그들이 일차적일 때, 서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야기들이 동시적으로 전개될 때, 인물들이 불완전하고 잘못 규정된 동일성을 가질 때이다.
우리는 인상 깊은 구조를 통해 계열적 기법을 창조해낸 여러 저자들을 예시할 수 있다. 조이스(James Joyce)는 이야기 양태들의 고고학, 수들 사이의 상응 체계, 신조어들의 기발한 사용, 물음과 대답이라는 방법, 새로운 사조들 및 복수적인 사유 연쇄(캐럴의 'double thinking'?)의 제시를 포함하는 여러 형태들에 힘입어, '블룸'이라는 기표 계열을 [율리시즈]라는 기의 계열에 관련시켰다. 루셀은 음성학적인 관계에 입각해 계열들 간의 소통을 제시했으며("les bandes du vieux pillard", "les bandes du vieux billard"=b/p), 기표 계열 p가 기의 계열 b와 결합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통해 모든 차이를 메웠다. 이야말로 이 일반적인 과정에서 기의 계열이 계속 은폐될 수 있다는 사실 못지않게 신기한 것이다. 로브-그리예는 사태들의 서술 및 약간의 차이를 띤 엄밀한 지시 작용의 계열들로 하여금 고착되어 있긴 하지만 특이하게 미세한 방식의 각 계열 안에서 서로 수정되고 자리를 바꾸는 테마들 주위를 돌게 함으로써 분명하게 제시한다. 클로소프스키는 로베르트라는 이름/고유 명사에 기대를 걸었다. 한 인물을 지시하고 그의 동일성을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하나의 '일차적인 강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것의 차이를 분배하고 두 계열 -그 하나는 기표로서, 아내가 자신[아내]도 모르게 자신[남편]을 배신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남편을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기의로서,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게 했던 단초들이 배우자의 생각을 견고하게 만들리라는 것을 깨닫고서 그들[단초들]에 몸을 던지는 아내를 가리킨다- 에 따라 그것의 갈라짐/증식을 생산하기 위해서. 곰브로비츠는 매달린 짐승들이라는 기표 계열(그러나 어떤 기표인가?)과 암컷들의 입이라는 기의 계열(그러나 어디에 있는 기의인가?)을 수립했다. 그리고 그가 제시한 각 계열은 과잉에 의해서든 결핍에 의해서든 기호들의 체계를 전개했으며, 중간중간 개입하는 낯선 대상들을 통해 그리고 레옹이 발하는 이국적인 말들을 통해 상대 계열과 소통했다.
그런데 세 가지 특징이 계열들 일반의 관계와 배분을 분명히 할 수 잇도록 해준다. 우선, 각 계열의 항들은 상대 계열의 항들에 상대적으로 계속적인 자리옮김*원어는 'deplacement'이며, 맥락에 따라 '자리옮김'과 '자리바꿈'으로 번역했다.*을 한다.(포의 두 계열들에서 대신의 자리를 생각하라). 본질적인 탈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탈구, 이 자리옮김은 계열들에 부차적인 변이를 도입함으로써 그것들의 유사성을 재발견하거나 숨기는 속임수가 아니다. 반대로 이 상대적인 자리옮김은 각각의 계열이 상대 계열 안에서 이중화되고 또 이 이중화 안에서 형성됨으로써 이 변이를 통해서만 상대 계열과 관계 맺도록 해주는 필수적인 일차적인 변이이다. 그래서 한 계열이 다른 계열의 위로/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이중적인 운동이 존재하게 되며, 이 운동은 두 계열 모두를 서로서로 영구한 비평형의 관계에 놓는다.
다음으로, 이 비평형 자체도 일정한 정향을 취해야 한다. 다시 말해, 두 계열 중의 하나 즉 기표로서 정의되는 계열은 상대 계열에 비해 과잉된 것으로서 드러난다. 넘쳐 흐르는/혼란스러운 기표의 과잉이 늘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특징, 두 계열의 상대적인 자리옮김과 둘 사이의 불균형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계열들의 어떤 항으로도, 이 항들 사이의 어떤 관계로도 환원되지 않는 극히 특수하고 역설적인 한 심급이다. 예컨대 라캉으로 하여금 포의 이야기를 주석할 수 있도록 해준 편지를 들 수 있다. 또 라캉은 무의식 안에 계열들(기의인 아버지 계열과 기표인 아들 계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두 계열에서 한 특수한 요소 -빚- 의 특별한 역할을 지적함으로써, 프로이트가 제시한 늑대 인간의 경우를 주석했다. [피네간의 경야]에서도 혼돈-우주(chaos-cosmos) 내의 세계의 모든 계열들을 소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의 편지이다. 로브-그리예의 경우, 지시 작용의 계열들은 고무, 노끈, 곤충의 얼룩 같은 무규정적인 또는 중층 결정된 대상들의 표현으로 수렴할 만큼 충분히 엄밀하며 또 엄밀하게 서술되어 있다. 클로소프스키에 따르면 로베르트라는 이름은 인물'들을'('des' personnes) 지시하거나 현시하기 이전에 하나의 '강도'를, 즉 강도의 차이를 표현한다.
이 역설적인 심급의 특징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이 심급은 두 계열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놀랍게도 이 순환이 [두 계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역설적인 심급, 이하 심급-X라 함]은 기표 계열과 기의 계열 양자 모두에게서 나타나는 두 얼굴의 심급이다. 그것은 거울이다. 또한 그것은 동시에 말이자 사물이며, 이름이자 대상이며, 의미이자 지시된 것이며, 표현이자 지시 작용이다. 그래서 그것은 그것이 돌아다니는 두 계열의 수렴을 보장한다(몰론 이는 그들을 끊임없이 발산하게 만든다는 조건하에서이다).
다시 말해, 심급-X의 고유한 성질은 스스로에 관련해[각 현재의 자리로부터] 늘 자리를 옮기는 것이다. 각 계열의 항들이 서로에 관련해서 상대적으로 자리바꿈한다면, 이는 그들이 우선 스스로 하나의 절대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절대적인 자리는 두 계열 안에서 스스로에 관련하여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는 이 요소와 떨어진 거리에 의해 결정된다. 심급-X에 관하여, 그것이 우리가 찾는 곳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으며 역으로 그것이 있는 것에서는 찾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야 한다. 라캉의 말대로, 그것은 자신의 자리가 없다.6) Ecrits, p.25. 여기에서 우리가 서술하고 있는 역설은 라캉의 역설이라고 불릴 만하다. 이를 밑받침해 주듯이, 라캉의 선집에는 캐럴적인 통찰이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그것은 고유한 정체성을 결하고 있으며, 그 고유한 유사성도 도 평형도, 시원도 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심급이 활성화하는 두 계열들 중 어느 것이 일차적이고 어느 것이 파생적인지 말할 수 없다. 분명 그들은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일차적일/파생적일 수 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계열들은 그들의 소통의 장인 심급-X에 관련해서 엄밀하게 동시적이다. 그들은 동등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적이다. 왜냐하면 심급-X는 두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이들은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심급-X]이 기표로서 구성하는 계열 안에 과잉이 존재하게 되며, 기의로서 구성하는 계열 안에 결핍이 존재하게 된다. 이 심급-X는 본성상 또는 스스로에 관련해 외톨박이이자 외짝이 된다. 그것의 과잉은 언제나 그 고유한 결핍을 야기시키며 또 그 역도 성립한다. 그래서 결국 이 규정들[과잉, 결핍]은 여전히 상대적이다. 왜냐하니, 한편으로 과잉적인 것은 극단적으로 운동하는 빈 자리이고, 다른 한편으로 결핍은 곧 자리 없음이 존재함으로써 언제나 여분을 형성하고 언제나 옮겨다니는 극히 동적인 대상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암양 시장
사실상 두 얼굴을 가진, 불균형하거나 외짝인 두 '절반들'을 가진 이 심급처럼 낯선 요소는 없을 것이다. 놀이를 즐길 때처럼, 우리는 빈 칸과 움직이는 방의 조합을 주목하게 된다. 아니면 차라리 암양 시장 안에서의 놀이와도 같다. 거기에서 앨리스는 '떨어져나간 지붕'과 '언제나 위에서 등장하는 발광체'의, 또 임자 없는 자리와 자리 없는 임자의 상보성을 체험하게 된다. "앨리스가 그녀가 가져가는 것을 잘 보호하려고 [마차의] 지붕을 고정시키고자 할 때마다, 가장 낯선(oddest) -가장 외토리고 외짝인- 사실은 특히 이 지붕이 언제나 뻥 뚫려 있었다는 것, 그래서 주위의 다른 것들이 가득 들어차 웅성거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앨리스는 어떨 때는 인형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바느질 상자 같기도 한, 그리고 그녀가 바라보는 지붕보다 늘 한 칸 위의 지붕에서 등장하는 큰 발광체를 얼마 동안 헛되이 쫓은 뒤, 결국 애처로운 목소리로 "사물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 저 높은 이상한 곳가지 따라가야지"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녀는 구름 위까지 둟고 나가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계획까지도 좌절되어 버린다. 그 사물은 극히 조용히 구름 위로 둟고서 나가버린다. 마치 오랫동안 그렇게 해왔다는 듯이."

계열 7 - 신조어들

합언
루이스 캐럴은 문학에서의 계열적 방법을 탐구하고 수립한 작가이다. 우리는 그의 저작들에서 계열적으로 전개되는 많은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잇다. 첫째로, 작은 내적 차이들을 동반하는ㅇ, 이상한 대상에 의해 규제되는 사건들의 두 계열이 있다. 예컨대 [실비와 브루노]에서 한 젊은 자전거 선수가 당한 사고는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자리바꿈한 채로 발견된다(23장).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이 두 계열은 서로 연속적이면서도 또한 이상한 대상에 대해서는 동시적이다. 여기에서는 여덟 개의 바늘과 거꾸로 뒤집힌 궤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아 시간과 더불어 운동하는 대신 오히려 시간이 그것과 더불어 운동하는 시계가 등장한다. 그 시계는 사건들을, 미친 듯한 생성 내에서의 전복에 의해서든 스토아적 운명 내에서의 작은 변이들과 더불어서든, 되돌아오게 만든다. 첫번째 계열 내의 한 상자 위에 떨어진 젊은 자전거 선수는 이제 무사히 통과한다. 그러나 바늘들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마차 위에서 상처 입고 누운 채로 실려가게 된다. 마치 그 시계가 사고(즉 사건의 시간적 현실화)를 면하게 할 수는 있었지만 대사건 자체를,*대문자로 시작하는 경우(예컨대 Evenement)에는 '대......'로, 'grand......'의 경우는 '큰/거대한......'로 번역했다. 대사건이란 순수 사건들의 총체를 말한다.* 그 결과 영원한 진리로서의 부상을 면하게 할 수는 없었던 듯이. 또 [실비와 브루노] 2부 2장에 등장하는, 1부와 거의 같은 장면을 들 수도 있다('주머니'에 의해 결정되는 늙은이의 가변적인 자리. 이 주머니는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이상한 대상이다. 여주인공은 이 주머니를 돌려주기 위해 놀라운 속도로 달려야 했다.)
다음으로, 점점 커지는 내적 차이들을 동반하는, 명제들에 의해 아니면 적어도 잡음, 의성어/의태어에 의해 규제되는 사건들의 두 계열이 있다. 이것이 루이스 캐럴이 서술한 대로의 거울의 법칙이다. 이 법칙은 이렇다. "옛날 방에서 등장하는 모든 것은 극히 일상적이고 흥미없는 것들이었지만, 나머지 모든 것들은 매우 특이한 것들이었다." [실비와 브루노]의 꿈-현실 계열들은 이 발산의 법칙에 따라, 또 한 계열로부터 다른 계열로의 인물들의 이중화/분열 및 각 계열 내에서의 인물들의 이중화/분열과 더불어 구성된다. 2부의 머리말에서, 캐럴은 인간들과 요정들의 상태들을 상세히 그린 그림을 제시한다. 이 그림이 책의 각 구절을 따라 두 계열의 상응을 보장해준다. 계열들간의 이행, 그들의 소통은 일반적으로 한 계열에서 시작해 다른 계열에서 끝나는 한 명제에 의해, 또는 다른 두 계열 모두에 들어 있는 의성어/의태어, 잡음에 의해 가능하게 된다(프랑스의 뛰어난 캐럴 주석가들이 왜 [앨리스]와 [거울의 이면]에 비해 매우 참신한 기법들을 담고 있는 [실비와 브루노]를 별로 논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세번째로, 두드러진 부조화를 이루는, 하나의 신조어에 의해 규제되는 두 계열의 명제(또는 한 계열의 명제들과 한 계열의 '음식물들', 또는 한 계열의 순수한 표현들과 한 계열의 지시 작용들)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선 캐럴의 신조어들이 매우 상이한 유형들을 내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첫번째 유형은 한 명제 또는 그 명제를 뒤따르는 여러 명제들의 음절적 요소들을 축약하는 것에 그친다. 예컨대 [실비와 브루노](1장)에서 'y'reince'는 'Your royal Highness'를 대신한다. 이러한 축약은 명제 전체로부터 거시적 의미를, 이 의미를 하나의 단음절로(캐럴이 말하듯이 '발음할 수 없는 단음절로') 만들기 위해 추출해내고자 한다. 다른 방식들은 이미 라블레와 스위프트에서 등장한다. 자음 중복에 의한 음절 길이의 증폭, 또는 자음들만을 보존함으로써(마치 이들이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는 듯이, 그리고 모음들은 단지 지시 작용을 위한 요소들일 뿐인 듯이) 이루어지는 단순한 무성음화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어쨌든 이 첫번째 유형의 신조어들은 하나의 유일한 계열에 뿌리를 두는 일련의 합언(connexion), 종합을 형성한다.

연언
캐럴이 독자적으로 만들어낸 신조어들은 다른 유형에 속한다. 그것은 일종의 공존의 종합으로서, 이질적 명제들의 두 계열 또는 명제적 차원들의(이는 결국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한 계열의 명제들을, 그들이 그러한 차원을 구현하도록 함으로써, 언제라도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언(conjonction)을 행하고자한다.
이미 보았듯이 '스나크'는 좋은 예이다. 이 말은 구강성의 두 계열(음식물의 계열과 기호들의 계열) 또는 명제의 두 차원(지시적 차원과 표현적 차원)을 가로질러 순환한다. 이와 관련해 [실비와 브루노]는 맛없는 과일인 'le Phlizz' 또는 l'Azzigoom-Pooding' 같은 또다른 예들을 제공한다. 이름들의 이렇나 다양성은 쉽게 설명된다. 즉, 그 어느 것도 순환하는 이름 자체는 아니며, 차라리 그것을 지시하는 이름('그 이름이 불리는 바')이기 때문이다. 순환하는 이름 자체는 다른 본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빈 칸, 빈 지붕, [말이 채워질] 빈 자리이다. 마치 캐럴이 편지를 쓰면서 어떤 말들은 쓰지 않고 비워두기 위해 머뭇거린 듯하다. 또한 이 말[순환하는 이름]은 점차적 소멸과 자리옮김을 표식하는 말들로 '불린다', 'Snark'는 보이지 않는 것이며 또 'Phlizz'는 소멸되는 것의 의성어/의태어에 가깝다. 또 그것은 무규정적인 이름들(aliquid, it, cela, chose, truc 또는 machin)로 불린다(생쥐 이야기에 나오는 '그것/cela' 또는 암양 판매소에 등장하는 '것/chose'을 기억하라). 마지막으로, 그것은 이름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노래의] 절들을 가로질러 순환하면서 그들을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후렴들에 의해, 또는 정원사의 노래에서처럼 두 종류의 전제들을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각 절의 결론에 의해 명명된다.
마지막으로, 많은 가지들을 갖춘, 말-손가방들에 의해 규제되는, 그리고 필요하다면 앞의 유형과 같은 신조어들에 의해 구성되는 계열들이 있다. 사실 말-손가방들이 그 자체 새로운 유형의 신조어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우선 그들이 여러 말들을 축약한다고 또 여러 의미들을 한꺼번에 내포한다고 말함으로써 정의한다('frumieux'=fumant+furiieux). 그러나 핵심적인 문제는 말-손가방들이 언제 필수적인 것이 되는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라도 말-손가방들을 찾을 수가 있으며, 따라서 선의에 의해서든 자의적으로든 거의 모든 신조어들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말-손가방은 그것[말-손가방]이 지시한다고 볼 수 있는 신조어의 특수한 기능과 일치할 때 필연적으로 정초되고 형성된다. 예컨대 하나의 계열(y'reince)로만 축약되는 단순한 기능의 신조어는 말-손가방이 아니다. 또 예컨대 유명한 [제버워키](Jabberwocky)에서, 대다수의 말들이 환각적인 동물학을 묘사하지난 필연적으로 말-손가방들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toves'(찌를-잡아먹는-오소리들-도마뱀들), 'borogoves'(새-꼬리들), 'raths'(녹색의 돼지들), 또는 동사인 'outgribe'(짖다-재채기하다-휘파람 불다)등이 등장한다. 예컨대, 마지막으로 두 이질적 계열을 포함하는 신조어가 반드시 말-손가방인 것은 아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포함의 이 이중적 기능은 'Phlizz', 'chosse', 'cela' 등등과 같은 말들로 충분히 채워져 왔다.
그럼에도 이미 이러한 수준들에서 말-손가방들은 등장할 수 있다. 스나크는 하나의 말-손가방으로서, 환각적인 또는 복합적인 동물(shark+snake)만을 지시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차적 또는 부차적으로만 말-손가방이다. 왜냐하면 그것[스나크]의 내용 자체는 신조어로서의 그 기능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나크의 내용이란 곧 하나의 복합적인 동물을 말하지만, 그 기능은 두 이질적 계열을 포함한다. 그 한 계열은 오로지 하나의 동물(복합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에만 관련되지만, 다른 하나는 비물체적 의미에 관련된다. 따라서 스나크가 그 기능을 하는 것은 그 '손가방'의 측면에서가 아니다. 반대로, 제버워크는 의심할 바 없이 하나의 환각적인 동물이긴 하지만, 또한 이번에는 그 내용과 기능이 일치하는 하나의 말-손가방이다. 결국, 캐럴은 그것이 새싹, 과일, 그리고 'jabber'(수다스럽고 격렬하고 열띤 토론을 표현)를 의미하는 'wocer' 또는 'wocor'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버워크가 스나크의 것과 유비적인 두 계열(지시 가능하고 소비 가능한 대상들에 관련되는 동물적 또는 식물적 후손의 계열과 표현 가능한 의미에 관련되는 언어적 증식의 계열)을 포함한다. 그 결과, 이 두 계열은 다른 방식으로 포함될 수 있으며, 말-손가방은 거기에서 그 필연성의 근거를 찾지 못한다. 따라서 다양한 말들을 축약하고 다양한 의미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말-손가방의 정의는 하나의 명목적인 정의에 불과하다.

선언
험프티 덤프티는 [제버워키]의 첫절을 주석하면서 말-손가방들의 예로 'slithy/slictueux'(=유연한-미끄러지는-끈적끈적한), 'mimsy/chetriste'(=허약한-슬픈) 등을 제시한다. 이 예들은 우리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든다. 쉽게 알 수 있듯이, 각각의 경우에 많은 말들과 축약된 의미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하나의 유일한 계열로 용이하게 조직화되며 그 결과 하나의 거대한 의미를 구성하게 된다. 그래서 말-손가방이 단순한 축약이나 계기적인 종합과 어떻게 구분되는지 알기는 힘들다. 물론 우리는 이차적인 계열을 도입할 수 있다[그렇게 해서 단순한 축약이나 계기적인 종합과 구분되는 경우를 만들 수 있다]. 캐럴 자신 해석의 가능성들은 무한하다고 말하곤 했다. 예컨대 우리는 [제버워키]를 정원사의 노래의 그림을 가지고, 즉 지시 가능한 대상들(먹을 수 있는 동물들)과 의미를 나르는 대상들('은행 직원', '우표', '성실' 나아가 [스나크]에서처럼 '철로의 움직임' 같은 유형의 상징적 또는 기능적 존재들)로 구성된 두 계열을 가지고 분석할 수 있다. 이 경우 험프티 덤프티의 방식을 따라 첫번째 절의 마지막 부분을 한쪽 기표로서 해석할 수 있으며("우리에서 멀리 나온(mome=from home) 녹색의 돼지(raths)가 짖고-재채기하고-휘파람 불곤 했다(outgrabe)"), 또한 다른 한쪽 기표로도 해석할 수 있다("출발점에서 멀어진 'tove', 특별 과정들(rath=rate+rather)이 함정을 빠져나가곤했다(outgrab)"). 그러나 이러한 방식을 취할 경우 어떤 계열적 해석이든 모두 가능하게 되며, 그 결과 말-손가방이 어떻게 공존의 한 연언적 종합 또는 둘 이상의 이질적 계열들을 좌표화해 주는 신조어와 구분되는가를 알 수가 없다.
캐럴은 [스나크 사냥]의 서문에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이러한 물음을 제시했다. 너는 어느 비천한 왕 아래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가? 말하라 아니면 죽으라! 나는 이 왕이 윌리엄이었는지 리처드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릴키암(Rilchiam)에게 답한다." 말-손가방은 엄밀한 선언적 종합[disjonction] 내에 정초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의 특수한 경우에 처하기는 커녕, 오히려 말-손가방 일반의 법칙을 발견한다. 매번 은폐될 수도 있는 선언 명제를 이끌어낸다는 조건 하에서. 그래서 'frumieux'(furieux et fumant)에서 "당신의 생각이 약간 기울어져 이 말이 'fumant' 쪽으로 기운다면, 당신은 'fumant-furieux'라고 말한다. 생각이 바뀌면 비록 그 차이가 머리카락 두께 정도라 해도 'furieux'로 기울ㄹ 것이며, 당신은 'furieux-fumant'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마음의 평형을 유지할 수 있는 천부의 성품을 부여받았다면, 당신은 'frumieux'라고 말할 것이다." 따라서 필수적인 선언 명제는 'fumant'와 'furieux' 사이에 존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둘 모두가 선언 명제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 'fumant-et-furieux' 다른 한편으로 'furieux-fumant' 사이에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언제나 말-손가방의 기능은 그것이 삽입되는 계열을 분지화하는 데/ 가지치는 데 있다.
또 말-손가방은 단독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말-손가방은 그것을 앞서거나 뒤서는, 또 모든 계열을 이미 분지화된 것으로 또는 언제라도 분지화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다른 말-손가방들의 존재를 암시한다. 뷔토르는 이 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이 말들 각각은 마치 하나의 전철처럼 행동할 수 있으며, 우리는 다양한 궤도를 따라 하나의 말에서 다른 하나의 말로 옮겨갈 수 있다. 단지 하나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이야기들의 바다를 펼치는 책이라는 생각은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위에서 제시했던 물음에 이제 답할 수 있게 되었다. 신조어가 두 이질적인 계열을 내포하거나 좌표화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거기[두 계열]에 선언들을 도입하기 위해서 존재한다면, 말-손가방은 필연적인 것이 되며 또 필연적으로 정초된다. 다시 말해, 신조어 자체가 말-손가방에 의해 '불리거나' 지시된다. 그래서 신조어 일반은 빈 칸 및 그 빈 칸을 일시적으로 채우는 존재와 동시에 관련된다.
그러나 우리는 캐럴에게서 세 종류의 신조어를 구분해야 한다. 첫째로 축약하는 신조어들은 하나의 유일한 계열로 게기적인 종합을 수행하며, 한 명제 또는 일련의 명제들의 음절적 요소들에 근거해 이들로부터 복합적인 의미를 만들어낸다('합언'). 순환하는 신조어들은 두 이질적인 계열들 사이에서 공존과 좌표화의 종합을 수행하며, 이 계열들 각각의 의미에 직접적으로 단번에 근거한다('연언'). 선언적 신조어들 또는 말-손가방들은 공존하는 계열들의 무한한 분지화를 수행하며, 말들과 의미들, 음절적 요소들과 기호학적 요소들에 동시에 근거한다. 말-손가방을 실질적으로 정의하는 것은 분지화적 기능 또는 선언적 종합니다.

계열 8 - 구조

레비-스트로스의 역설
레비-스트로스는 라캉의 것과 유비적인 역설을 이율배반의 형태로 제시했다. 두 계열, 즉 기표 계열과 기의 계열이 주어졌을 때 하나는 과잉을, 하나는 결핍을 드러내게 되며, 그 결과 두 계열은 영원한 비평형의 관계, 항구적인 자리옮김의 관계를 맺게 된다. [우주]의 주인공이 말하듯이, 너무나 많은 기표들이 존재한다. 즉 최초의 기표는 언어의 질서에 속한다. 그런데 언어가 획득되는 특정한 방식을 통해 언어의 요소들은 단번에 전체로서 주어졌음에 틀림없다. 그것들[요소들]은 그들의 가능한 미분적/변별적 관곋르에 무관하게는 실존하지 않기 때문이다.*기표들은 차이의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한꺼번에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기의 일반은 알려진 것의 질서에 속한다. 그렇지 않다면, 알려진 것은 부분에서 부분으로 [불연속적으로] 이행하는(partes extra partes) 점진적 운동의 법칙에 복속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앎이 수행하는 총체화가 어떤 것이건, 각각의 총체화는 랑그 또는 언어의 잠재적인 총체성에 점근선적인 것으로 머무른다.
기표 계열은 선재하는 하나의 총체성을 형성하는 반면에 기의 계열은 생산된 총체성들을 조직화한다. "우주는 인류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무엇인가를 의미했었다. ......인류는 그 시초부터 아직 채 알려지지도 않은 기의에 기표가 할당되는 것을 보고 심히 놀랐을 정도로, 기표의 통합적 전체[구조]를 사용한다. 이 둘 사이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역설은 로뱅송[로빈슨]의 역설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로뱅송이 그의 고독한 섬에서 사회의 유비물을 재건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가 서로를 함축하는 규칙들과 법들[기표들의 체계]을, 아직 그 적용 대상이 존재하지 않은 상태였다 해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연의 정복은 점진적이고 부분적이었으며, 부분에서 부분으로 나아갔다. 하나의 사회는 그것이 어떤 사회이든 동시에 모든 규칙들[구조]을, 사법적,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규칙들, 사랑과 노동의 규칙들, 가계와 결혼의, 노예 제도와 해방의, 삶과 죽음의 규칙들을 가지고 있다. 반면 사회 성립의 또 하나의 필수 조건인 자연의 정복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며, 사용 에네르기 및 정복 대상의 상이한 형태에 따라 순차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법은 그 적용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기도 전에, 나아가 그것[대상]을 결코 완전히 알 수 없는 상황에 있어서까지도 막강한 무게로서 군림한다.*로뱅송이 섬에 버려졌을 때, 그의 머리 속에는 서구 문명의 구조가 이미 표상되어 있었다.*
혁명들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이 비평형이다. 혁명들은 점진적인 기술적 발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혁명들은 기술적 발전의 부분들로서 기능하는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총체성의 보수를 요구하는 두 계열[기표 계열과 기의 계열] 사이의 이 거리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래서 사실상 동일한 것인 두 가지의 오류가 존재한다. 첫째, 개량주의 또는 기술주의의 오류는 기술적 진보의 리듬에 맞추어 사회적 관계들의 부분적 정비를 증진시키거나 강요하려고 하는 점에 있다. 둘째, 전체주의의 오류는 특정한 순간의 사회적 총체의 리듬에 맞추어 기호화 가능한 것 또는 인식된 것의 총체화를 구성하고자 하는 점에 있다.*전자는 총체적 이상이 없는 상태에서 기술적 개량만을 꾀하고, 후자는 관념의 세계에서 총체성을 구성하는 데 만족한다.* 그래서 기술주의는 자연스럽게 [개발을 다그치는] 독재(자)와 컴퓨터의 친구가 되지만, 혁명가는 기술적 발전과 사회적 총체성 사이에서, 이 사이에 그의 영구 혁명의 꿈을 새기면서, 그 간격 안에서 살아간다. 그래서 이 꿈 자체는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행위, 현실, 효과적인 위협이며, 그가 꿈꾸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레비-스트로스의 역설로 돌아가보자. 그의 역설은 이것이다. 두 계열-기표 계열과 기의 계열-이 주어졌을 때, 자연스럽게 기표 계열에서의 과잉과 기의 계열에서의 결핍이 존재하게 된다. "모든 유한한 사유에 종속되는, 또 모든 예술, 시, 모든 신화적이고 미학적인 발명의 표식이기도 한 하나의 떠다니는 기표(flottant)가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에 모든 혁명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알려지지도 않은 채", 자리도 잡지 못하고 현실화되지도 않은 기표에 의해 주어진, 일종의 떠다녀지는(flotte) 기의가 존재한다. 이런 맥락에서 레비-스트로스는 'truc' 이나 'machin' 같은 말, 또 'quelque chose', 'aliquid' 등을 해석하고자 하며, 나아가 유명한 'mana'(또는 'ca')를 해석하고자 한다. 이 말은 "그 자체로서는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어떤 의미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리고 그 유일한 기능이란 기표와 기의 사이의 거리를 메우는 것일 뿐인" 하나의 값, "제로인 상징적 가치, 즉 이미 기의를 채우고 있는 값을 보완하는 상징적 내용의 필요성을 표식하는 기호이다. 그러나 이 기호는 또한 활동 가능한 여분의 일부를 이룬다는 조건하에서 일정한 값이 될 수 있다."
두 계열 중 하나는 과잉의 성격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결핍의 성격을 띤다는 것, 두 규정이 결코 평형을 이루지 못하면서도 서로 교환된다는 점을 동시에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표 계열에서 과잉인 것은 문자 그대로 빈칸, 채워지지 않은 자리, 언제나 움직이는 자리이며, 기의 계열에서 결핍인 것은 자리가 없는, 알려지지 않은, 자리 없이 채우며 또 언제나 다른 것으로 대체당하는 하나의 여분의 소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얼굴의 동일한 존재이다. 그러나 이 두 얼굴으ㅡㄴ 비대칭이며, 이 비대칭을 통해 계열들은 그들의 차이를 잃지 않으면서 소통한다. 그것은 암양 시장에서 일어나는 모험이며, 또 신조어가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구조 성립의 조건
이제 우리는 구조 일반의 최소한의 조건들을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1)적어도 두 개의 이질적인 계열들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기표'로서 규정될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의'로서 규정될 것이다(하나의 계열만으로는 구조를 형성할 수 없다).
2)이 계열들 각각은 서로간의 관계[변별적/미분적 관계]를 통해서만 실존하는 항들로 구성된다. 이 관계들, 아니면 차라리 이 관계들의 값들에 매우 특수한 사건들, 즉 구조 안에서 정확히 규정 가능한 특이성들(singularites)이 상응한다. 이는 미분법의 경우와 극히 유사하다. 미분법에서 특이점들(points singuliers)의 배분은 미분적 관계들(rapports diffeerentiels)의 함수값드레 상응하기 때문이다.2)미분법을 끌어들인 것은 자의적이고 과장된 것으로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에 과장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미분법에 대한 무한주의적 해석뿐이다. 19세기 말에 바이어슈트라스는 수학적 구조주의에 매우 가까운 유한주의적 해석, 서수적이고 동력학적인 해석을 내렸다. 그리고 특이성들에 대한 테마는 그리고 특이성들에 대한 테마는 미분방정식 이론의 본질적인 부분에 속한다. 미분법의 역사와 그 구조주의적 해석에 대한 뛰어난 연구로 다음을 보라. C.B. Boyer, The History of the Calculus and Its Conceptual Development, Dover, New York, 1959./ 예컨대, 음소들 사이의 미분적 관계는 특이성들을 한 랑그 안에 배분하며, 이 특이성들에 [위상학적인 의미에서] 이웃한 특이성들이 다른 계열의 항들을 복잡한 방식으로 결정한다. 하나의 구조는 기초 계열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의 두 가지 배분을 언제나 포함한다. 때문에 구조를 사건과 대립시키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즉, 구조는 탈질적인 사건들의 목록을, 즉 그에 내부적인 하나의 이야기를 포함한다(예컨대 계열들이 '인물들'을 포함할 경우, 하나의 이야기는 두 계열 내에서 인물들이 서로 상대적으로 차지하는 위치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을 재결합시킨다).
3)두 이질적인 계열은 하나의 역설적인 요소에 의해 수렴한다. 이 요소는 마치 그들을 '미분화/변별화시켜 주는 존재(differentiant)'와도 같다. 이것이 바로 특이성들의 방출의 원리이다. 이 요소는 어떤 계열에도 속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자체의 고유한 자리를", 고유한 동일성, 유사성, 평형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한 계열 내에서 과잉으로 나타나지만, 동시에 그 상대 계열에서는 결핍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요소는 한 계열에서 과잉일 경우 빈 칸으로서이며, 반대로 결핍일 경우에는 여분의 졸로서 또는 자리 없는 임자로서이다. 그것은 말이자 동시에 대이며, 신조어이자 동시에 일상적인 말이다.

특이성들의 역할
이 요소는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두 계열을 절속하는 것, 그들을 서로가 거울처럼 반영하도록 만드는 것, 그들을 소통하고 공존하고 가지치도록 만드는 것, '얽힌 이야기' 안에서 두 계열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을 재결합시키는 것, 특이성들의 배분을 변환시키는/재배치하는 것, 자신이 과잉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계열을 기표 계열로서 그리고 결핍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열을 기의 계열로서 규정하는 것, 그리고 특히 기표 계열과 기의 계열에서 의미의 존재를 보장하는 것, 왜냐하면 의미는 기호 작용 자체와 동이ㅣㄹ시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기표 자체와 기의 자체를 결정할 수 있도록 분배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다. ㄱ꼐열들이 없는, 각 계열의 항들 사이의 관계가 없는, 이 관계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이 없는 구조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특히 핵심적으로 기능하는 빈 칸이 없는 구조란 더더욱 존재할 수 없다.

계열 9 - 문제

특이성과 사건들
탈물질적(ideal) 사건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특이성이다.*특이성이란 탈물질적(=물질의 차원을 벗어나는 차원에서의 각 경우이다. 예컨대 아이온의 차원에는 '먹다'라는 논리적 경우가 잠재적으로 존재한다. 이 각 경우들을 특이성/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특이성이란 탈물질적 사건이다. 즉, 개별적인 구체화된 사건 이전의 순수 사건이다.* 아니면 차라리 하나의 수학적 곡선, 물리적 사태,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격을 특성화하는 특이점들, 특이성들의 집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물은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도 있고, 얼음의 상태로 또는 수증기의 상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물은 두 개의 특이성을 내포한다. 즉 기체에서 액체로(또는 반대로) 되는 특이성과 액체에서 고체로(또는 반대로) 되는 특이성이다. 현재 물이 어떤 상태건, 또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건 물은 두 개의 특이점을 가진다. 물이 액체에서 고체로 변할 때, 이 두 특이점 중의 하나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사건은 현실화된 특이성이고, 특이성은 잠재적 사건이다. 'x4-1=0'은 그 안에 네 개의 특이점(1, -1, i, -i)을 내포한다. 일정한 조건에서(예컨대 x는 실수, x>0) 특정한 특이점이, 즉 1이 현실화된다. 내가 10,000원을 가지고 있을 때, 나는 이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들을 잠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잠재적 특이성들 중 어느 하나(예컨대 책 한 권)가 현실화된다.** 특이성이란 곧 첨점, 임계점 등이다. 또 그것은 고개, 매듭, 교차로, 중심이며, 융점, 응결점, 비등점이며, 나아가 기쁨과 슬픔, 건강과 병약, 희망과 절망 같은 감성적 임계점이기도 하다. 이 특이성을 한 담론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인칭적 존재와도, 한 명제에 의해 지시된 사태의 개별성과도, 또 가시적 형태로 기호화된 개념의 일반성/보편성과도 혼동해서는 안 된다.*첫번째 경우는 앞에서 맘ㄹ했듯이 이데아적 차원을 정신적 차원과 혼동하는 경우이고(물론 이 두 차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능하다'는 것은 곧 '생각할 수 있다'와 통하기 때문에), 두번째 경우는 이데아적 차원을 물체적 차원과 혼동하는 경우이고, 마지막의 경우는 동사적 차원에서의 잠재성을 명사적 차원에서의 집합론적 관계와 혼동하는 것이다(뽀삐가 사건으로 표현될 수 있는 가능한 경우들을 개라는 집합과 뽀삐의 관계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특이성은 지시 작용, 현시 작용, 기호 작용의 차원들과는 다른 한 차원의 요소를 이룬다. 특이성은 본질적으로 전개체적이고[대상이나 사태를 개별화하는 지시 작용 이전의 것이고] 비인칭적이고[현시 작용 이전의 것이고] 비개념적이다[기호 작용 이전의 것이다]. 그것은 [지시 작용에서의] 개별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 [현시 작용에서의] 인칭적인 것과 비인칭적인 것, [기호 작용에서의] 특수한 것과 일반적인 것에, 그리고 이들의 대립에 전적으로 무관하다. 그것은 중성적이다.**사건들의 차원은 부정법의 차원이라는 것을 상기하라.** 그러나 역으로 또한 그것은 '보통의' 것과 다르다. 특이점은 보통의 것과 대립한다.1) 앞에서 '중성적인 것'으로서의 의미는 우리에게 특이한 것에 대립하는 것 못지 않게 다른 양상들에도 대립하는 것으로 보였다. 즉, 특이성은 지시 작용 및 현시 작용과의 관계하에서만 정의되었고, 특이한 것은 점괄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개체적이고 인칭적인 것으로 정의되었다. 이제 반대로 특이성은 중성적 영역의 부분을 이루게 된다./
우리는 특이성들의 집합은 한 구조의 각 계열에 상응한다고 말했다.***특이점들은 계열화되어 존재한다. 공을 친 타자가 1루로 뛰어가는 특이성, 야수가 공을 1루수에게 돈지는 특이성, 주심의 손이 올라가는 특이성, (이런 사건들이 세 번 반복되면) 이닝이 바뀌는 특이성 등등은 계열화된다. 이러한 계열들의 총체가 구조이다. 특이성은 특정한 계열에 속하게 됨으로써, 즉 다른 특이성들과 이웃 관계와 사이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특이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계열화된 특이성이 현실화될 때, 그 사건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역으로 각각의 특이성은 다른 특이성에 접하기까지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한 계열의 원천[요소]이다. 이로부터 한 구조 내에는 발산하는 여러 계열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각각의 계열은 그 자체 수렴하는 여러 하위 계열들로 구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개의 큰 기초 계열[기표 계열과 기의 계열]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의 경우, 우리는 그들이 각각의 경우 각자의 배열에 따라 구분됨을 알 수 있다.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 가면서, 어떤 특이점들은 사라지거나 분할되며, 또는 본성과 기능에 있어 변화된다. 두 계열이 공명하고 소통함과 동시에, 우리는 하나의 배열에서 다른 배열로 옮겨간다. 다시 말해 역설적인 심급이 계열들을 돌아다님에 따라 특이성들이 서로 자리바꿈하고 재분배되고 서로 다른 것으로 변형됨과 동시에 총체적으로 변화한다.
페귀는 역사와 사건이 이러한 특이점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통찰했다. "온도에서 임계점이 있듯이, 또 융점, 빙점, 비등점, 응결점이 있듯이, 응고점, 결정화의 점이 있듯이, 사건의 임계점들(points critiques)이 존재한다. 나아가 사건 속에서 미래의 사건의 한 조각이 도입됨으로써만[한 조각이 계열화될 때에만] 침전되고 결정화되고 규정되는 과융해 상태들[아직 그 의미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사건들의 공존 상태]이 존재한다. 그리고 페귀는 하나의 특이성이 어떻게 일상적인 점들의 선으로 뻗어가는가, 그러나 또한 다른 특이성 안에서 다시 등장하고 다른 집합 안에서 재분배되는가(두 반복들, 나쁨과 좋음, 사슬로 묶는 존재와 구제하는 존재)를 논하기 위해, 꿈꿀 수 있는 가장 병리학적이고 미학적인 것들 중에서, 전적으로 하나의 언어를 발명해낼 수 있었다.
사건들은 탈물질적이다. 그래서 노발리스는 사건들의 두 가지 연쇄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탈물질적인 연쇄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이고 불완전한 연쇄이다. 탈물질적인 프로테스탄트주의와 현실적인 루터주의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두 종류의 사건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탈물질적인 본성을 지닌 사건과 사태 안에서의 그 시공간적 현실화 사이의 구분이다. 그것은 곧 사건과 사고의 구분이기도 하다. 사건들은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탈물질적 사건들의 집합] 안에서 소통하는 탈물질적인 특이성들이다. 그들은 또한 영원한 진리를 소유한다. 그들의 시간은 그들을 현실화하고 실존하게 현재가 아니라 무규정적인 아이온, 부정법이다(그들은 여기에서 존속하고 내속한다). 사건들은 유일한 탈물질적 존재들이다. 그리고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것은 결국 우선은 본질들을 해체하고 그들을 특이성들의 분출로서의 사건들로 대체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건을 본질과 혼동하는 모든 독단적인 생각과 사건을 사고와 혼동하는 모든 경험주의적 생각에 동시에 저항해야 한다.*전자는 앞에서 논한 플라톤주의이며, 후자는 우리에게 나타난 가시적 현실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아이온의 차원은 인정하지 않는 경험주의를 말한다. 들뢰즈의 사유는 우리에게 경험적으로 드러나는 사건들에 기반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경험주의적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사고의 차원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는 '자료'의 차원- 이 아니라 사고 이전의 사건들의 차원, 즉 잠재적 차원을 사유함으로써 경험주의를 넘어선다. 그렇다고 들뢰즈가 본질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들뢰즈는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사건의 차원을 사유한다. 이 점에서 데콩브가 제시한 '선험적 경험론'이라는 명칭은 적절하다(이 '선험적'이 칸트적인 주관적 선험이 아닌 라이프니츠적인 객관적 선험이라는 점에 주의하기만 한다면).*

문제와 사건
사건의 양상은 문제적이다,*'개연적/문제적'(problematique)은 '잠재적으로 존재하는'이란 뜻이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Prem, Anal, 25a2), "하나의 섬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을 수도 있다. 하나의 평행사변형은 두 이등변삼각형으로 분할될 수 있다."(여기에서 주어와 술어가 모순을 이루지 않는 다는 것을 주의할 것) 현재 어떤 섬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 평행사변형이 존재하는 것은 '현실적인'(actuel) 것이지만, 사람이 살지 않을 수도 있고 분할될 수도 있는 것은 '개연적인'(problematique) 것이다. 개연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재적인'(reel) 것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잠재성'(virtualite)이다. 한 가수가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도 그는 잠재적으로 가수이다.* 문제적인 사건들이 존재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사건들은 전적으로 문제들**'문제는 그리스어 'problema'에서 유래한다. 들뢰즈는 '문제'라는 개념을 현실화되어 있는 것을 그 가능한 한 경우로 포함하는 개연성의 차원으로 규정한다. 예컨대 'x2-1=0'은 하나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두 개의 특이점, 즉 해를 가진다. 다시 말해 이 문제가 형성하는 차원에는 'x=1'과 'x=-1'이라는 두 특이점이 존재한다. 특정한 조건이 주어지면(예컨대 x>=0) x는 1로 현실화된다. 이 문제의 차원은 아이온의 차원이다. 사건들은 현실 속에서는 순간적으로 존재할 뿐이지만, 아이온의 차원에서는 특이성들로서 항상 존재한다. 이 점에서 개연적이다. 들뢰즈에게는 이 개연적 영역을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다.**에 관련되며 문제의 조건들을 정의한다는 점이다. 신플라톤주의 철학자인 프로클루스는 기하학에서 정리에 근거한 개념화와 문제에 근거한 개념화를 대비시킨 빼어난 문단에서, 문제라는 개념을 논리학적 질료(節(절)들, 切除(절제)들, 接合(접합)들 등)에 영향을 준 사건들로 정의한 반면 정리는 하나의 본질로부터 연역되는 핵심 성질들에 관련되는 것으로 정의했다. 사건 자체는 문제적이자 문제화하는 존재이다.
문제는 결국 그것의 조건들을 표현하는 특이점들에 의해서만 규정된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문제가 비로소 문제로 규정되는 것이다. 예컨대 미분 방정식의 이론에 있어, 특이점들의 분배는 방정식 자체에 의해 정의된 문제-장에 상대적이다. 또 해는 적분 곡선들과 더불어서만, 그리고 이 곡선이 벡터장 내 특이성들의 이웃 관계에서 띠는 형태와 더불어서만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의 문제는 언제나 그것을 문제인 한에서 규정하는 조건들에 따라 부과받는 해를 가진다. 그리고 결국 특이성들은 방정식 해들의 발생을 주재한다. 마찬가지로 로트만이 말했듯이, 문제라는 심급과 해라는 심급은 탈물질적인 사건과 그 시공간적 현실화의 경우가 그렇듯이 본성상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문제적인 것을 우리 인식의 한 주관적인 범주로서, 단지 사고 과정의 불완전성을 나타낼 경험적인 계기로서, 우리로서는 미리 알 수가 없으며 또 지식이 획득되었을 때는 소멸해 버릴 존재로 이해하게 만드는 오래된 습관과 결별해야 한다. [현실 안에서] 문제는 해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문제]을 그 조건들에 관련지어줄 뿐 아니라 그 [문제의] 해들 자체의 생성을 조직하는 사건-총체(l'Idee) 안에서 존속한다. 이 사건-총체 없이는 해들은 의미를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문제적임은 인식의 객관적 범주이자 동시에 완전히 객관적인 한 종류이다. 칸트야말로 처음으로 문제적인 것을 일시적인 불확정성이 아니라 사건-총체의 고유한 양상으로서, 따라서 생겨나는 모든 것들에 반드시 따라다니는 지평으로서 이해했다.

즐거운 수학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수학과 인간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중요한 것은 [현대 과학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인간의 고유한 성질들을 양화하는 것도 측정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편으로 인간적 사건들을 문제화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 문제의 [현실화의] 조건들을 그만큼의 인간적 사건들로서 전개하는 것이다. 캐럴이 꿈꾼 유쾌한 수학은 이 이중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첫번쨰 측면은 정확히 [얽힌 이야기]라는 제목의 텍스트에 나타난다. 이 이야기는 매번 하나의 문제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을 둘러싸는 매듭들에 의해 형성된다. 인물들은 이 특이성들을 체현하고 있으며, (그들의 복잡한 가계 안에서 파악되는) 열번째 매듭 안에서 발견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하나의 문제에서 다른 문제로 이동하고 재분배된다. 먹을 수 있는 대상들에 또는 표현 가능한 의미들에 연관되는 생쥐의 'cela'는 이제 때로는 식용 물품들에 또 때로는 문제들의 조건들이나 소여들에 연관되는 'data'로 대체된다. 보다 심오한 두번째 시도는 [입-자의 동력학]에서 나타난다. "하나의 평면을 가로질러 단조로운 길을 가는 두 선을 볼 수 있다. 둘 중 보다 나이든 선은 오랜 실천을 통해, 젊고 충동적인 장소들에서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기술, 즉 그 끝점들의 극한들로 동등하게 나아가는 기술을 얻었다. 그러나 그 계집애같이 맹렬한 더 젊은 선은 언제나 발산하거나 또는 쌍곡선이나 이 무제한적인 기묘한 곡선들 중 하나가 되려는 경향을 가진다...... . 운명과 매개면이 지금까지 그들을 분리시켜 왔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하나의 선이 두 내각의 합이 2직각보다 작도록 그들을 갈랐다." 이 텍스트가 드러내는 것은 하나의 단순한 할레고리도 또 수학을 희화화하는 요령도 아니다. [실비와 브루노]의 유명한 다음 텍스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한때 작은 사고와 더불어 산책하러 나가곤 했던 합동이었다." 캐럴이 외각들을 따라 탄식할 뿐 아니라 원 속에 새겨지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는 평행사변형에 대해, 그리고 사람들이 가하는 '절단과 절제'를 겪는 한 곡선에 대해 말할 때, 차라리 다음의 사실들, 즉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인칭들 역시 전인칭적인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또 그들의 감정, 느낌은 이 특이성들, 외침과 놀람과 분노를 느낄 수 있는 점들, 매듭들과 교차로들의 이웃에서 구성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예컨대 캐럴이 말하는 'plain anger' 또는 'right anger'). 캐럴의 두 선은 공명하는 두 계열을 야기한다. 그리고 이 계열들의 야기는 서로 이행하면서 뒤얽히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재분배되는 특이성의 재배열을 야기한다. 캐럴의 말처럼, "평면이란, 두 점이 주어졌을 때, 말하는 사람을 두 점의 방향으로 거짓되이 나아가게 하는 한 담론의 특성이다." 캐럴의 계열들, 등급들, 또는 이 계열들 내에 배열되는 입자들의 잠재력에 대해 소묘한 것은 [입-자 동력학]에서이다("LSD, a function of great value......").

우발점과 특이점들
우리는 사건들에 대해 문제들 안에서만 말할 수 있다(사건들은 문제의 조건들을 결정한다). 우리는 사건들에 대해 특이성들로서만 말할 수 있다.(특이성들은 문제-장 내에서 펼쳐지며 해들을 조직해 주는 중심이 된다). 때문에 문제들과 해들로 이루어지는 모든 방법이 캐럴의 저작들을 메우고 있으며, 사건들과 그 각종 현실화에 대한 과학적 언어를 구성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서 이런 문제가 생긴다. 만일 각 계열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의 배열이 문제들의 여러 장을 형성한다면, 계열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들로 하여금 공명하고 소통하고 가지칠 수 있도록 해주는, 또 동시에 모든 재파악과 변형에, 모든 재분배에 명령을 내리는 심급-X를 어떻게 특징지을 것인가? 이 요소/심급은 그 자체 한 물음의 장소로 정의되어야 한다. 문제는 계열들에 상응하는 특이점들에 의해 규정되지만, 물음(question)은 빈 칸이나 움직이는 요소에 상응하는 우발점(point aleatoire)에 의해 규정된다.
특이성들의 형태 변이나 재분배는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한다. 각각의 조합, 각각의 배열은 하나의 사건이다. 그러나 역설적 심급[심급-X]은 그 안에서 모든 사건들이 소통하고 분배되는 대사건이자 모든 다른 사건들이 그것의 조각들이나 단편이 되는 유일사건(l'Unique evenement)이다. 조이스는 이 의미 전체를 문제들의 방법을 이중화해온 물음-응답의 방법에, 대문제를 정초하는 대심문관에 줄 수 있을 것이다. 물음은 문제들 안에서 전개되며, 문제들은 근본 물음 안에 포함된다.
그리고 해들이 문제들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이 의미를 가지는 데 필수적인 존속하는 조건들을 거기에서 찾아내는 것과 같이, 응답들은 물음을 결코 억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메우지도 않는다. 오히려 물음이 모든 응답들을 가로지르면서 존속하는(persiste) 것이다. 그래서 문제들이 해 없이 머물고 물음이 응답 없이 머물게 만드는 측면이 존재한다. 문제와 물음이 그 자체로서 탈물질적인 객관성들을 가리키고 또하나의 고유한 존재, 최소 존재(minimum d'etr)를 가지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앨리스]에 등장하는 '응답 없는 수수께끼들'과 비교하라).
우리는 이미 신조어들이 어떻게 이들에 뗄 수 없이 묶여 있는가를 보았다. 한편으로, 말-손가방들은 가지쳐진 계열들 안에서 전개되지만 주관적인 불확실성을 표현하기보다는 오히려 발생하거나 등장하는 것의 지평 앞에 위치한 한 정신의 객관적인 평형을 표현하는 한 문제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리처드인가 윌리엄인가? 'fumant-furieux'인가 'furieux-fumant'인가? 각각의 경우 특이성들의 배분과 더불어. 다른 한편, 채워지지 않은 말, 아니면 차라리 이 말을 지시하는 말들은 계열들을 가로질러 포함되고 자리 옮기는 한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 그것과 더불어 자리를 옮기는 근본 물음의 대상이 되는 것(d'etre l'objet)은 언제나 제자리를 갖지 못하는, 그 고유한 유사성이나 동일성을 갖지 못하는 이 요소에 속한다. 스나크란 무엇인가? 'Phlizz'란 무엇인가? 'ca'는 무엇인가? 노래의 후렴(여기에서 절들은 그들이 가로질러 순환하는 만큼의 계열들을 형성한다), 주술적인 말(그것을 '부르는' 모든 이름들은 그 말의 빈 칸을 메우지 못한다) -역설적인 심급은 정확히 이 단일한 존재, 이 '객체성'을 가진다(이 객체성은 물음 자체에 상응하며, 그에 응답하지 않으면서도 그와 상응한다).

계열 10 - 탈물질적 놀이

놀이의 규칙들
루이스 캐럴은 놀이들을 발명하고 기존의 놀이 규칙들(테니스, 크로케)을 변형시켰을 뿐만 아니라, 일견 그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지 알기 힘든 일종의 탈물질적 놀이를 제시했다. 예컨대 [앨리스]에서는 코쿠스 경주가 등장한다. 이 경기에서 참가자들을 원할 때 출발하고 또 마음대로 멈춘다. 크로케 시합의 경우, 공으로는 고슴도치가, 타구봉으로는 홍학이, 주문으로는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 계속 옮겨 다니는 병사들이 사용된다. 이 놀이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즉, 이들은 모두 부단한 움직임을 동반하며, 어떤 정확한 규칙도 없는 듯이 보이고, 승리자와 패배자를 가지지 않는다. 이들은 우리에게 낯선 놀이들이다. 그것들은 자체 모순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놀이들/시합들은 몇 가지의 원리들을 가지며, 이 원리들은 한 이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이론은 기교를 요하는 놀이와 도박에 똑같이 적용된다. 다만 그 규칙들의 성격이 다를 뿐이다. 1) 우선 놀이가 시작되기 전에 규칙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선재해야 하며, 놀이가 시작되면 [이 규칙들은] 명령적인 힘을 가져야 한다. 2)이 규칙들은 운을 가르는 가설들, 즉 승리와 패배에 대한 가설들을 결정한다(......할 때는 이기는 것으로 한다). 3) 이 가설들은 수들, 즉 실질적으로나[내용상으로나] 수적으로나 서로 구분되는 여러 수들을 가지고 놀이를 조직화한다. 이 각 수들은 이러저러한 경우들을 지배하는 고정된 분배를 수행한다. (설사 단 한 수를 가지고 시합하는 경우라 해도, 이 수는 그것이 수행하는 고정된 분배와 그 수적 특수성을 통해서만 가치를 부여받는다). 4) 수가 낳은 결과들은 '승리'를 낳거나 '패배'를 낳는다. 결국 정상적인 놀이들/ 시합들의 특징은 명령적인 규칙들이 미리 존재한다는 것, 승리와 패배를 나누는 가설들이 존재한다는 것, 이 나눔은 수적으로 정확히 구분되어 고정되어 있다는 것, 뒤따르는 결과들[승리와 패배]이 있다는 것에 있다.
이 놀이들은 두 가지 점에서 불완전하다. 우선 그들은 사람의 활동들 중 일부분만을 차지하기 때문이며, 또 설사 그들을 절대의 차원으로까지 올린다 해도 그들은 일정한 지점들에서만 우연을 포착할(retiennent) 뿐 나머지에 대해서는 결과들의 기계적인 전개에 또는 인과 조작의 요령에 맞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놀이들은 결국 서로 뒤섞이게 되며 노동이나 도덕같은 다른 종류의 활동들을 참조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 놀이들이란 노동과 도덕의 희화화 또는 모델이며, 그들의 요소들을 새로운 질서로 통합하는 것이다. 파스칼에게서처럼 내기를 거는 사람의 경우건 아니면 라이프니츠에게서처럼 장기를 두는 신의 경우건, 놀이가 명시적으로 모델로서 사용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놀이에 관련되지 않는 함축적인 모델들 -잘 또는 더 잘이라는 도덕적 모델, 원인들과 결과들의, 수단과 목적의 경제학적 모델- 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하찮은 놀이에 '주요한' 놀이를, 나아가 신적인 놀이를 대비시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놀이를 순수하게 만드는, 외관상으로는 적용 불가능한 듯이 보이는 다른 원리들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1)미리 존재하는 규칙들이란 없다. 각 수는 자신들의 규칙들을 발명해내며, 그 고유한 규칙에 근거한다. 2) 우연을 실질적으로 구분되는 여러 수로 나누는 대신, 수들 전체가 우연을 긍정하고 각 수에다가 그것[우연]을 분배한다.
그래서 수들은 실질적으로, 수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질적으로 구분되지만, 그들 모두는 존재론적으로 하나인, 유일하고 동일한 던짐의 질적인 형태들이다. 각각의 수는 그 자체 하나의 계열이지만, 그것은 상상가능한 연속적 시간에서 최소치보다도 더 작은 시간 안에서이다. 이 계열적인 최소치에 특이성들의 한 배분이 상응한다.1) 시간 연속체의 최소치보다도 더 작은 시간이란 개념에 대해서는 이 책의 [보론 2]를 보라./ 각 수는 특이점들, 주사위 위의 점들을 표현한다. 그러나 수들 전체는 우발점, 즉 상상 가능한 시간 연속체에서 최대치보다도 더 큰 시간 안에서 모든 계열들을 가로질러 끊임없이 자리옮김하는 한번-던짐(unique lancer) 안에 포함된다.* 사건은 비물체적 차원이며 현재를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하는 순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최소치보다도 더 작은 시간이며 (현재는 물체적 시간이기 때문에 비물체적 사건보다 더 작을 수는 없다), 동시에 원환을 그리는 크로노스와는 달리 무한한 직선이 아이온의 시간에 속하기 때문에 최대치보다도 더 큰 시간 안에 존재한다.*
수들은 서로가 서로를 잇는다. 그러나 또한 각 수가 던져지는 사이에 우연을 불어넣음으로써 늘 규칙을 바꾸고 또 [각 수에] 상응하는 계열들을 정돈하고 가지치는 이점[우발점/한번-던짐]에 관련해 동시적이다. 한번-던짐은 하나의 혼돈이며, 각 수는 이 혼돈의 조각들이다. 각 수는 특이점들의 배분, 즉 별자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가설에 부합하도록 고정된 결과들 사이에서 닫힌 공간을 분할하기보다는 유일하고 미분할된 던짐의 연린 공간 안에서 배분되는 것은 가변적인 결과들이다. 이러한 배분은 곧 정주적인 배분이 아니라 유목적인/노마드적 배분이다. 이 배분에 있어 특이성들의 각 체계는 나머지 다른 체계들과 함축의 관계를 맺으며 또 그들[다른 체계들]을 가장 큰 던짐 안에 함축되도록 만듦으로써 서로 소통하고 공명한다. 이것은 더 이상 정언적인 것과 가언적인 것의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문제들과 물음의 놀이이다.

이상한 놀이
4) 이와 같이 규칙들이 없는, 또 승리자도 패배자도 없는, 책임도 없는 놀이, 기교와 우연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 무구성의 놀이와 코쿠스 경주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놀이는 아무도 즐겁게 해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파스칼에게서의 인간의 놀이도 또 라이프니츠에게서의 신의 놀이도 아니며, 그렇다고 파스칼에게서 도덕주의자의 내기에 포함되는 속임수도 또 라이프니츠에게서 경제적인 조합에 포함되는 틀린 수도 아니다. 분명 이 모든 것은 예술 작품에나 존재하는 것이지 현실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탈물질적 놀이는 한 사람이나 한 신에 의해 현실화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사고될 수 있을 뿐이며, 특히 무의미로서 사고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해, 그것은 사고 자체의 현실이다.*탈물질적 놀이는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놀이, 더 정확히 말해 현실화하기 힘든 놀이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놀이를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고가 행하는 놀이는 현실화되는 놀이보다 더 넓은 지평을 형성한다. 이는 무의식의 문제와 통한다.* 그것은 순수 사고에 있어 무의식적인 것이다.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연속체의 최소치보다 더 작은 시간 안에서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는 것은 각각의 사고이다. 특이성들의 배분을 표현하는 것은 각 사고이다. 모든 사고는 하나의 '긴'(longue) 사고[거대 사고] 안에서 소통한다. 그리고 도처에 우연을 불어넣거나 각 사고를 가지치거나 '각 수'를 '하나의 수'로 통합해 '모든 수'를 만듦으로써, 유목적 배분의 모든 형상들(les formes ou figures)을 그 자리 옮김에 대응시킨다.왜냐하면 오직 사고만이 모든 우연을 긍정하고 우연을 긍정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사고 안에서가 아닌 어떤 방식으로 이 놀이를 수행하고자 한다면 어떤 일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예술 작품이 아닌 어떤 것을 생산하고자 한다면 어떤 것도 생산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탈물질적 놀이는 사고와 예술에 한정되는 놀이이다. 여기에서는 놀이를 수행할 수 있는, 즉 우연을 긍정하고 가지칠 수 있는 사람들의 승리만이 존재하나다. 우연을 지배하기 위해, 내기 걸기 위해, 획득하기 위해 그것을 분할할 필요는 없다. 사고 안에만 존재하는 예술 작품이라는 결과만을 낳는 이 놀이는 또한 사고와 예술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고 세계의 현설성, 도덕성, 경제성을 혼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온과 크로노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놀이들에서 우연은 일정한 지점들, 독립적인 인과계열들이 합류하는 점들(예컨대 룰렛이나 당구공의 움직임)에서 고정된다. 일단 합류가 이루어지면, 합쳐진 계열들은 모든 새로운 개입으로부터 보호되어 하나의 경로를 간다. 놀이 수행자가 공을 밀거나 막기 위해 갑자기 방향을 바꾸고 있는 힘을 다해 용을 쓴다면, 그는 멈추어 서게 되고 밀려날 것이며 수는 소멸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놀이 수행자]는 약간의 우연을 다시 불어넣는 것 외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래서 보르헤스는 바빌론에서의 제비뽑기에 관해 섰다. "제비뽑기가 우연의 강화이고 혼돈과 우주의 주기적인 융합이라면, 우연은 하나의 유일한 뽑기가 아니라 모든 뽑기의 단계에 개입하는 것이 아닐까? 우연이 누군가의 죽음을 선포했는데도 이 죽음의 상황들이 우연에 복종하지 않는것 -한 시간 아니면 한 세기의 유예, 공공성, 연기- 은 명백히 부조리한 것이 아닌가? ......사실 뽑기의 수[몇 번을 뽑는가]는 무한하다. 어떤 결정도 최종적이지 않으며, 모든 결정은 분지화된다. 무지한 자들은 무한한 뽑기가 무한한 시간을 요청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상, 거북이와의 경쟁이라는 유명한 우화가 말해주듯이, 시간이 무한히 나누어질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2) '거북이와의 경쟁'은 제논의 역설만이 아니라 앞에서 본 루이스 캐럴의 역설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르헤스는 이 역설을 Enquetes 159쪽에서 요약했다./
이 글의 밑바탕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을 이끌어낼 수 있다. 무한일 필요가 없는 시간, 단지 "무한히 분할될 수만" 있으면 되는 이 시간은 어떤 시간일까? 그것은 바로 아이온이다. 이미 논했듯이, 과거, 현재, 미래는 하나의 동일한 시간성의 세 부분이 아니다. 그들은 각자가 완전하고 독자적인, 도 시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두 측면이다. 한편으로 언제나 한계지어지는, 원인들로서의 물체들의 활동과 이들의 심층에서의 혼합상태를 측정하는 현재(크로노스)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결코 한계지어지지 않으며, 효과들로서의 비물체적 사건들을 표면에 모으는 과거와 미래(아이온)가 존재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빼어남은 시간의 두 측면을 구분해서 독해하고 이 두 독해를 상호 독립적으로 만들 필요성을 보여준 점에 있다. 한편으로, 오직 현재만이 실존한다고, 현재는 그 안에 과거와 미래를 다시 흡수하고 응축한다고, 그리고 점차 두꺼워지는 응축들에 따라 우주 전체의 극한들을 얻게 됨으로써 하나의 우주적인 살아 있는 현재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우주가 다시 시작되고 모든 현재들이 복구되기 위해서는 단지 응축된 것들을 풀어주는 질서를 따라가면 그만이다. 따라서 현재의 시간은 한계지어져 있긴 하지만 유한하지는 않다(원환적이므로). 이 원환적 시간이 동일자(Meme)의 회귀로서의 물리적 영겁회귀, 그리고 근본 원인(Cause)에 대한 지혜로서의 영원한 도덕적 지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반대로 다른 한편으로, 과거와 미래만이 존속하며 이 시간들은 각 현재를, 그것이 아무리 작더라도, 무한히 분할하며 또 그들의 공허한 선 위로 그것[현재]을 늘어놓는다고 말할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상보성은 분명한 것으로 드러난다. 즉, 각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분할된다. 아니면 차라리 이러한 시간은 무한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간은 스스로에게로 다시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간은 한계지어져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양극이 과거 안에서 그리고 미래 안에서 끊임없이 멀어지는 순수한 직선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즉 아이온에 크로노스의 것과는 전혀 다른, 훨씬 놀라운, 다른 영겁회귀와 다른 윤리(대효과들[Effets]의 윤리)를 명하는 하나의 미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보르헤스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나는 하나의 유일한 직선인 그리스의 미로를 하나 안다. ......지금 이후 내가 너를 [여러 번 중에서] 처음으로 죽이게 될 때, 나는 너에게 이 미로, 하나의 유일한 직선으로 되어 있고 또 보이지 않으며 또 끝없는(incessant) 미로를 약속한다."3) Borges, Fictions, pp.187~188. [영원의 역사]에서 보르헤스는 보다 완화된 입장을 보인다. 여기에서 그는 원환적인 또는 주기적인 미로만을 제시한다. 스토아 학파에 대한 주석가들 중에서 골드슈미트는 특히 시간에 대한 이 두 개념화 -가변적인/다양한 현재와 과거-미래로의 한계지어지지 않은 분할의 개념화- 의 공존을 분석했다(Victor Goldschmidt, Le Systeme stoicien et l'idee de temps, Vrin, 1953, pp.36~40). 그는 또한 스토아 학파에는 두 가지 방법과 두 가지 도덕적 태도가 존재한다는 점을 밝혔다. 그러나 이 두 가지 태도가 두 가지 시간에 상응하는가의 문제는 불분명한 채 남아 있다. 저자의 전체적 입장에 따르면 상응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보다 분명하게, 두 가지 시간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영겁 회귀의 문제는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스토아 사유에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시 이 문제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
전자의 경우 현재가 모든 것이며, 과거와 미래는 두 현재 -더 작은 외연의 현재와 더 큰 외연에 근거해 응축되는 현재- 에 상관적인 차이만을 가리킨다. 후자의 경후 현재는 아무것도 아니며, 단지 순수한 수학적 점, 과거와 미래를 표현하는 개념적 존재일 뿐이다(현재는 과거와 미래 안에서 분할된다). 요컨대, 스토아 학파에게는 두 가지 시간이 있다. 하나는 쟁여진 현재들만으로 구성되는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펼쳐지는 과거와 미래로 분해되는 시간이다. 하나의 시간은 언제나 한정적이고, 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이며, 다른 하나의 시간은 영원한 부정법(Infinitif), 영원한 중성이다. 하나는 주기적이고 물체들의 운동을 측정하며, 그것을 한계짓고 채우는 물질에 의존하며, 다른 하나는 표면에서의 순수한 직선이고, 비물체적이고 한계지어져 있지 않으며, 모든 물질에 독립적인, 시간의 빈 형식이다.
[제버워키]에 등장하는 신조어들 중 하나인 'wabe'(파리소는 'l'alloinde'라고 번역했다)는 두 가지 시간 모두에 걸친다. 왜냐하면 일차적인 의미에서 'wabe'는 동사인 'swab'(청소하다)과 'soak'(젖다)를 통해 이해되어야 하며, 해시계를 둘러싸고 있는 비에 젖은 잔디밭을 가리키지만(이것은 바로 현재의 가변적인 생명체의 물리적이고 주기적인 크로노스이다). 다른 의미에서는 앞뒤로 멀리 펼쳐지는 움직임이기 때문이다(way-be, "a long way before, a long way behind"). 그것은 그 질료를 떨쳐버림으로써 자율적 존재가 된, 과거와 미래의 두 방향으로 동시에 퍼져가는 비물체적인 아이온이다. 여기에서는 비조차도 [실비와 브루노]의 가설을 따라 수평으로 내린다.
직선이자 빈 형식인 이 아이온은 사건-효과들의 시간이다. 현재가 사건의 시간적 효과화를, 즉 활동하는 물체적 심층에의 구현(incarnation) 및 사태에의 합체(incorporation)*사건은 비물체적 존재이지만 그 사태와 하나로 간주됨으로써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있게 된다. 즉, 현실 속의 사건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이를 '합체'라 한다.*를 측정하는 것처럼, 사건은, 즉 그 자체로서의 그리고 그 되돌이킬 수 없음, 투과 불가능성에서의 사건은 현재와 유사하기보다는 두 방향으로 동시에 물러가고 나아간다. 이 사실은 한 이중적인 물음의 항구적인 대상이 된다: "무엇이 발생할 것인가?", "무엇이 발생했는가?" 그리고 순수 사건이 일어난 것인 동시에 일어날 것일 뿐 결코 일어나고 있는 무엇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것에 현기증을 가져다준다. 우리가 그것(cela)이 이제 막 일어난 것이라고 느끼는 그 x는 '새로운 것[뉴스]'의 대상이다. 끊임없이 일어날 그 x는 '이야기'(conte)의 대상이다. 순수 사건은 이야기와 뉴스일 뿐 결코 현실성(actualite)은 아니다. 사건들이 기호들인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말라르메
스토아 학파는 결국 기호들이란 언제나 현존하며, 현존하는 사물들의 기호들도 현존한다고 말하게 된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에 대해, 우리는 그가 상처를 입었다(il a ete blesse), 그리고 그는 죽을 것이다(il mourra)라고 말할 수 없으며, 단지 그는 상처를 입고 있다(il est ayant ete blesse), 그리고 그는 죽음 앞에 있다(il est devant mourir)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현재가 아이온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동시에 두 방향으로 나아가면서 이제 막 지나간 것이자 막 지나갈 것인 어떤 것으로 무한히 분할되는 것은 포착 가능한 존재로서의 현재이다.*사건은 포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말하면 표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사건의 발생을 분명 표상한다. 현재도 마찬가지이다. 이 표상되는 한에서의 사건/현재를 '포착가능한 것으로서의 현재'라 부르고 있다. 이 책 [계열 21]을 보라.* 다른 현재, 즉 살아 있는 현재는 지나가버리며 사건을 효과화한다.
그러나 사건은 도한 그[살아 있는 현재]로부터 영원한 진리[순수 사건]를 보존하기도 한다. 사건을 막 지나간 과거와 막 임박한 미래로 끊임없이 분할하며, 또 둘[과거와 미래] 모두를 끝없이 몰아대면서 밀어냄으로써 항구적으로 다시 분할하는(subdiviser) 아이온 위에서. 사건은 그 누구도 죽지 못하게 만들며, 아이온의 빈 현재, 즉 영원 안에서 이제 막 죽었거나 막 죽을 존재로 만든다. 자살을 흉내내어야 할 것, 순수한 관념성으로 묘사하면서, 말라르메는 말한다. "여기 미래에서 앞서 가고 저기 과거에서 [기억을] 끌어오면서, 현재라는 거짓된 외관 아래에서 무언극은 이루어진다. 그 놀이는 유리를 깨뜨리지 않으면서 끝없이 암시만 할 뿐이다."
각 사건은 가장 작은 시간, 생각할 수 있는 최소의 시간 연속체보다도 더 작은 시간이다. 그것은 막 지나간 과거와 이제 임박한 미래로 분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긴 시간,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시간 연속체보다도 더 긴 시간이다. 그것은 그것을 한계지어지지 않은 선과 동등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아이온에 의해 끝없이 분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아이온 위에서의 각 사건들은 크로노스 안에서의 가장 작음 분할보다도 더 작지만, 동시에 크로노스의 가장 큰 조각, 즉 원환 전체보다도 더 크다. 각 사건은 양 방향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끝없는 분할에 의해 모든 아이온에 퍼져나가며, 두 방향으로 뻗은 직선과 동외연적이 된다. 이제, (원환과는 아무 관계 없는) 영겁 회귀로 접건하는 것을, 혹은 어떤 미로의 입구에 서 있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이것은 두께가 없는 유일한 직선의 경우에서처럼 섬뜩하지 않은가?
아이온은 우발점이 그리는 직선이다. 각 사건들의 특이점들은 언제나, 그들을 무한히 나누는, 또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소통하게 만들거나 선 전체로 펼쳐지고 늘어지게 만드는 우발점과 관련해 이 선 위에 배분된다. 각 사건들은 아이온 전체에 부합하며(adequat), 모두 서로 소통하며, 모두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 아이온의 사건, 즉 그들이 영원한 진리를 가지게 되는 사건을 형성한다. 여기에 사건의 비밀, 즉 그것이 아이온 위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채우지 못한다는 비밀이 있다. 비물체적인 것이 어떻게 비물체적인 것을 채우며, 투과 불가능한 것이 어떻게 투과 불가능한 것을 채우겠는가? 오로지 물체들만이 서로를 투과하며, 크로노스만이 사태들로 그리고 그것[크로노스]이 측정하는 대상들의 운동들로 채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빈 형식이자 시간에 의해 펼쳐지는 형식인 아이온은 그것을 늘 따라다니면서도 그것 안에 살지는 않는 것, 즉 모든 사건들을 대신하는 대사건을 무한히 분할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건들 또는 효과들 사이의 통일성은 물체적 원인들 사이의 통일성과는 전혀 다른 유형에 속하는 것이다.
아이온은 탈물질적인 놀이를 하는 존재 또는 놀이이다. 그것은 불어넣어진(insuffle) 우연이며 가지쳐진 우연이다. 모든 수들이 질적으로 구분해주는 것은 바로 이 유일한 던짐이다. 그것은 적어도 두 탁자 위에서, 두 탁자의 이음새에서 놀게 만들고 또 스스로 논다. 거기[이음새]에서 아이온은 가르는(bissectrice) 직선을 그린다. 아이온은 또한 두 탁자에 상응하는 특이성들을 그의 길이 전체 위에 모으고 다시 배분한다. 두 탁자 도는 두 계열은 하늘과 땅, 명제들과 사물들, 표현과 소비와도 같다. 캐럴은 아마도 복수화의 탁자와 식사용 탁자라고 말할 것이다. 아이온은 정확히 두 탁자의 경계선에 있으며, 그들을 가르는 직선인 동시에 또한 그들을 잇는 평평한 표면이다. 그것은 투과 불가능한 창 또는 유리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계열들을 돌아다니며, 그 결과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사건을 한 측면에서 명제들에서의 표현된 것으로 다른 측면에서 사물들의 빈위/부대물로 드러냄으로써 그 계열들을 끊임없이 반사하고 가지친다. 그것은 말라르메의 놀이, 즉 '책'이다. 그 두 탁자(동일하게 집힌 종잇장의 두 쪽), 특이성들을 포함하는 내부적 복수적 계열들(동적이고 교환 가능한 종잇장들과 문제들의 별자리들), 계열들을 가지치고 반사하는 두 얼굴의 직선('중심적인 순수성', '야누스 신 아래에서의 방정식')과 더불어, 그리고 이 선 위에서 한편으로 빈 칸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정원 초과인 대상으로서 나타남으로써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우발점과 더불어(찬가와 드라마, 또는 '약간명의 사제와 약간명의 무용수', 또는 책의 건축학적 요소들로서 칸막이 선반으로 만들어진 래커 칠을 한 대리석과 칸 바깥의 모자).
그래서, 말라르메의 책의 약간 다듬어진 네 조각들에서, 무엇인가가 말라르메적 사유 안에서 모호하게 나마 캐럴의 계열들과 부합하면서 공명한다. 하나의 조각은 이중 계열, 사물들 또는 명제들을 펼치며, 말하거나 먹으며, 또 먹혀지거나 제시되며, 또 초대하는 부인을 먹거나 초대에 응한다. 두번째 조각은 말로부터 '닫힌 관대한 중성'을 이끌어내며, 또 듣는 사람에 관련해 표현된 질서로서의 명제에 관련해 의미로부터 중성을 이끌어낸다. 다른 한 조각은 서로 얽힌 두 여성에게서 언제나 비평형 상태에 있는, 그리고 한 얼굴을 명제들의 의미로서 다른 얼굴을 사태들의 빈위/부대물로서 드러내는 하나의 대사건의 유일한 선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다른 하나의 조각은 선 위에서 자리를 옮기는 우발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이기투어]의 점이자 [주사위 놀이]의 점이다. 이 점은 노인을 통해서 굶어죽음을, 어린 아이를 통해서 말로부터 태어남을 이중으로 보여준다 -"굶어죽음은 그에게 다시 시작할 권리를 주기 때문에...... ."5) Le "Livre" de Mallarme, Gallimard. 책의 구조에 대한, 그리고 특히 네 가지 조각에 대한 자크 셰러(Jacques Scherer)의 연구를 참조. 두 작가가 많은 점에서 만나고 있고 또 공통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캐럴이 말라르메를 알지는 못했던 것 같다. 말라르메의 Nursery Rhymes은 험프티 덤프티와 많은 관련이 있지만, 다른 원천들에 관련된다./

계열 11 - 무의미

역설적 요소의 특징
'perpetuum mobile' 같은 이 역설적인 요소의 특징들을 요약해보자. 이 요소는 이질적인 계열들을 돌아다니면서, 한편으로 그 계열들을 좌표화하고, 공명하게 또 수렴하게 만들며,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가지치게 만들고, 그 각각에 복수적인 선언들(disjonctions multiples)을 도입한다. 그것은 동시에 '말=x'이자 '사물=x'이다. 이 요소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두 계열에 동시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계열은 결코 평형을 이루거나 합쳐지거나 짝을 이루지 않는다. 왜냐하면 역설적인 요소는 스스로에 관련해 늘 비평형의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관 관계와 비대칭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개념쌍을 사용했다. 이 역설적인 요소는 과잉이면서 동시에 결핍이며, 빈 칸이자 정원 초과된 대상이며, 임자 없는 자리이자 자리 없는 임자이며, '떠다니는 기표'이자 버림받은 기의이며, 신조어이자 이국적 사물이며, 하얀[채워지지 않은] 말이자 검은 대상이다. 이 요소가 언제나 두 가지 방식으로 제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스나크는 부줌(Boujoum)이었으니, 한번 상상해보시오." 이 부줌을 스나크의 특별히 기괴한 일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유와 종의 관계는 적합하지 않다. [스나크와 부줌]은 단지 한 궁극적인 심급의 비대칭적인 반쪽들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스토아 학파가 의미 없는 말인 'Blituri'를 사용했다는 것, 그러나 이 말을 그 짝인 'Skindapsos'와 같이 사용했음을 말해주고 있다.1) Sextus Empiricus, Adversus Logicos, VIII, 133. 블리투리는 리라와 비슷한 소리를 표현하는 의성어이다 스킨답소스는 기계나 도구를 뜻한다. 한 계열에서는 말=x이지만 동시에 다른 계열에서는 사물=x, 앞으로 보겠지만 아마도, 계열들이 소통하고 공명하며 하나의 '얽힌 이야기'를 형성하는 한에서 아이온에 제3의 측면, 즉 행위=x의 측면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스나크는 놀라운 이름이면서 또한 보이지 않는 괴물이며, 기묘한 행위, 즉 사냥꾼이 사라지고 그 동일성을 상실하는 그러한 사냥이다. 제버워크는 놀라운 이름이며 환각적인 짐승이지만, 또한 놀라운 행위나 위대한 자살의 대상이다.

무의미의 두 형태
우선 채워지지 않은 말은 특정한 신조어들(cela, chose, Snark 등)에 의해 지시된다. 이 빈 말 또는 일차적인 능력을 지닌 신조어들은 두 이질적인 계열을 좌표화하는 기능을 한다. 다음으로 신조어들 또한 나름대로 말-손가방들에 의해 지시될 수 있으며, 이 말-손가방들은 이차적인 능력을 가지고 계열들을 가지치는 기능을 한다. 이 두 능력에 두 상이한 형태가 상응한다.
1. 일차적 형태. 역설적인 요소는 말이자 동시에 사물이다. 즉, 그것을 지시하는 빈 말 또는 이 빈 말을 지시하는 신조어는 사물을 표현하는 특성을 빈약하게 소지한다. 그것은 정확히 그것이 표현하는 것을 지시하며 또 그것이 지시하는 것을 표현하는 말이다. 그것은 그의 지시 대상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의 고유한 의미를 지시한다. 유일하고 동일한 한 경우에, 그것은 무엇인가를 말하고 그가 말하는 것의 의미를 말한다. 그것은 그의 고유한 의미를 말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완전히 비정상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의미를 부여받은 모든 이름들의 정상적인 법칙은 정확히 그들의 의미가 오로지 다른 이름에 의해서만 지시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n1-n2-n3......). 그 자신의 의미를 말하는 이름은 무의미일 수밖에 없다(Nn). 무의미는 '무의미'라는 말과 하나일 뿐이며, '무의미' 라는 말은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은 말들, 즉 우리가 그것[무의미]을 지시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관습적인 말들과 하나일 뿐이다.
2. 두번째 형태. 말-손가방 자체도 대안의 원리이며, 이 원리를 통해 또한 두 항을 만든다(frumieux=fumant-et-furieux 또는 furieux-et-fumant). 그러한 말의 각각의 잠재적 부분은 다른 부분의 의미를 지시하거나 또는 그 자체 그것을 지시하는 다른 부분을 표현한다. 이러한 형태 전체에 있어, 말은 하나의 통일체로서 그의 고유한 의미를 말하며 이 또 하나의 맥락에서 무의미이다. 의미를 부여받은 이름들의 정상적인 두번째 법칙은, 사실상 그들의 의미가 그들이 맺게 되는 대안 관계를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의미는 두 가지 형태를 가진다. 하나는 소급적인 종합에 상응하며, 다른 하나는 선언적인 종합에 상응한다.
누군가는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논박할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무의미가 그 고유한 의미를 말한다고 가정하는 그릇된 말놀이이며, 무의미는 정의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말이다. 이러한 논박은 근거가 없다. 진짜 말놀이가 있다면, 그것은 의미를 가질 수 없는 무의미가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때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설은 이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의미는 그의 고유한 의미를 말한다고 제안할 때, 우리는 반대로 의미와 무의미는 하나의 내재적 관계, 진위의 관계를 모방해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즉 단순히 상호 배제의 관계로서 간주될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미의 논리학이 가장 일반적으로 제시하는 문제이다.
진리의 영역에서 의미의 영역으로 옮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것이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서 진위의 관계와 유비적인 관계를 찾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미 조건을 조건지어진 것의 이마주를 통해 단순한 가능성의 형식으로 이해하기 위해 조건지어진 것이 조건으로 상승하는 것이 왜 소용없는가를 보았다. 조건은 그것의 부정에 대해, 조건지어진 것이 그것의 부정과 가지는 것과 같은 유형의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의미의 논리학은 의미와 무의미 사이에 내재적 관계, 즉 같이 나타남/공현존(coresence)의 양상이라는 본래적 유형을 정립할 수밖에 없다. 현재로서 우리는 이 사실을 무의미를 그 고유한 의미를 말하는 하나의 말로서 다룸으로써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부조리의 두 형태
역설적인 요소는 앞에서 말한 두 형태[소급적 종합에 상응하는 형태와 선언적 종합에 상응하는 형태] 하의 무의미이다. 그러나 정상적인 법칙들은 이 두 형태에 정확히 대립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형태들은 의미를 부여받은 정상적인 말들을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이 법칙들에 복속시킨다. 즉, 모든 정상적인 말은 다른 이름에 의해 지시되어야 할, 그리고 다른 이름들에 의해 채워진 선언들을 결정해야 할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의미를 부여받은 이 말들은 이 법칙들에 복속되는 한에서 기호 작용의 규정들을 슈용한다. 기호 작용의 규정은 법칙과 동일한 것이 아니며, 법칙으로부터 이끌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이름들을 관계 맺게 한다. 즉 이름들과 명제들을 개념들, 속성들(properietes), 또는 집합들(classes)에 관계 맺게 한다.*여기에서 '속성들'이란 기호들끼리의 논리적 연역 관계를 말하며, '집합들'이란 기호들 끼리의 집합론적인 포함 관계를 말한다. 지시 작용과 대상, 사태의 관계는 현시 작용과 주체의 관계와 유비적이고, 이들은 또한 기호 작용과 속성들, 집합들의 관계와 유비적이다.* 그래서 소급적 법칙이 한 이름의 의미는 다른 이름에 의해 지시되어야 한다고 말할 때, 상이한 등급의 이 이름들은 기호 작용의 관점에서 상이한 '유형들'의 속성들 도는 집합들에 근거한다. 모든 집합들은 그들이 근거하는 속성들이나 개체들보다 상위의 유형에 속해야 하며, 모든 집합들은 그들이 포함하는 대상들보다 상위의 유형에 속해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의 집합은 요소로서 포함될 수 없으며 상이한 유형들의 요소들을 포함할 수도 없다.
마찬가지로, 기호 작용의 한 규정은 선언적 법칙에 부합해, 집합 형성(classement)을 도와주는 속성이나 항은 그에 관련해 집합화된 동일한 유형의 어떤 군들에도 속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요소는 그것을 규정하는 부분 집합들의 부분이 될 수 없으며, 또 그것이 그 실존을 전제하는 집합의 부분이 될 수도 없다. 요소로서 포함되는 집합, 자신이 전제하는 집합을 분할하는 요소 -모든 집합들의 집합. 군대의 이발사. 따라서 부조리는 때로는 소급적 종합에서의 형식적 층위들의 혼동이고 때로는 선언적 종합에서의 악순환이다. 기호 작용의 규정들이 가지는 관심은 모순율과 배중률을 완전히 만들어진 상태에서 받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역설들 자체도 기호 작용을 박탈당한 명제들 안에서 모순의 또는 포함의 생성을 수행한다.
아마도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명제들의 결합에 대한 스토아적 개념화를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토아 학파가 "낮이 오면 밝다" 또는 "이 부인의 가슴에서 젖이 나온다면, 그녀는 아이를 낳은 것이다" 같은 유의 가언적 명제에 관심을 가질 때, 주석가들이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는 물리적인 결과나 근대적 의미에서의 인과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점은 옳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순히 동일성의 연결 아래에서의 논리적 결과만을 본다면, 그것은 틀린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가언적 명제를 구성하는 항들의 층위를 변별했다. 그래서 우리는 "낮이 되다"나 "아이를 낳았다"를 그것이 근거하는 상위 유형의 속성들("밝다", "가슴에서 젖이 나온다")의 기표로서 간주할 수 있다.
명제들의 연결은 분석적 동일성으로도 또 경험적 종합으로도 환원되지 않으며 다만 기호 작용에 속할 분이다. 모순이 한 항에 대립하는 다른 항과의 관련에서가 아니라 한 항과 다른 항 사이의 대립 관계에서 생겨나는 방식으로. 가언적인 것에서 연언적인 것으로의 변환에 따르면, "날이 밝으면 환해진다"는 날이 밝았는데도 환해지지 않는 경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아마도 이것은 "날이 밝는다"가 그것이 전제하는 한 집합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와 관련해 분류된 집단들 중의 하나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같이 나타남
무의미는 기호 작용의 한 규정일 뿐만 아니라 의미를 줌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그 방식이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의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소급적 법칙은 더 이상 상이한 등급의 이름들을 집합들이나 속성들과 관련 맺게 하지 않으며, 이제 그들을 사건들의 이질적인 계열들에 배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 이 계열들 중 하나는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는 의미되는 것으로 규정되지만, 각각에서의 의미의 배분은 기호 작용의 엄밀한 관계에 독립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보았거니와 기호 작용을 박탈당한 하나의 항도 역시 의미를 가졌던 것이며, 의미 자체 또는 사건은 (이 모든 특징들에 관련해 중성적인) 집합들과 속성들에 영향을 끼치는 모든 양상들에 독립적이다.
사건은 본성상 속성들 및 집합들과 다르다. 의미를 띠고 있는 것은 또한 기호 작용도 포함하지만, 그 이유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의미는 새로운 종류의 역설들, 즉 앞에서의 역설들이 기호 작용 내에서 무의미의 현존을 표식하듯이 의미 안에서 무의미의 현존을 표식하는 역설들과 분리될 수 없다. 이번에는, 한편으로 무한 분할의 역설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특이성들 배분의 역설들이다. 계열들 내에서 각각의 항은 다른 모든 항들과 상관적인 그의 위치에 의해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러나 이 상대적인 위치 자체도 무의미로 규정되며, 계열들을 끊임없이 가로지르며 순환하는 심급=x에 의한 각 항의 절대적 위치에 의존한다. 결국 의미는 이러한 순환에 의해 생산되며, 이 의미는 기표에 귀착하는 의미이자 또한 기의에 귀착하는 의미이다.
요컨대, 의미는 언제나 하나의 효과이다. 단지 인과적 의미에서의 효과가 아니라 '광학적 효과', '음향적 효과', 더 나아가서는 표면 효과, 위치 효과, 언어 효과이다. 이러한 효과는 결코 하나의 외관이나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표면을 따라 펼쳐지거나 늘어서는, 그리고 그 자신의 원인과 엄밀하게 같이 나타나고(copresent) 같은 외연을 지니는(coextensif), 나아가 이 원인을 (그 효과들과 분리할 수 없는) 내재적 원인, 순수 무(nihil) 또는 효과들 자체 바깥의 x로서 규정하는 하나의 생산물이다. 그러한 효과들, 그러한 생산물은 대개 하나의 고유 명사 또는 단수 명사에 의해 지시된다.
하나의 고유 명사는 그것이 이러한 유의 효과와 연관되는 한에서만 충분히 하나의 기호로서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물리학은 '켈빈(Kelvin) 효과', '제베크(Seebeck) 효과', '지만(Zeemann) 효과' 등에 대해 말하며, 의학은 병들을 그 징후들의 표를 제시한 의사들의 이름을 따서 지시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비물체적 효과로서의 의미, 언제나 요소-X가 항들의 계열들 안에서 일으키는 순환에 의해 생산되는 의미의 발견은 '크뤼시포스 효과', '캐럴 효과' 등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최근에 구조주의자들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저자들은 사실상 별다른 공통점이 없다.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들에게 의미 -결코 외관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표면과 위치의 효과로서의 의미- 란 구조의 계열들 안에서 빈 칸의 순환에 의해 생산된다는 생각이다(죽음의 자리, 왕의 자리, 맹목적인 오점, 떠다니는 기표, 제로값, 무대 측면 또는 부재하는 원인 등). 구조주의는 의식적으로든 아니든, 스토아적-캐럴적 영감과의 만남을 추구한다. 구조란 결국 비물체적 의미(스킨답소스)를 생산해내는 기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방식으로 구조주의는 의미는 무의미에 의해 그리고 무의미의 항구적인 자리옮김에 의해 생산된다는 것 그리고 또한 그 자체로서는 '의미하는 것들'이 아닌 요소들의 상호 위치로부터 태어난다는 것을 보여줄 때, 우리는 여기에서 부조리의 철학이라고 불린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유를 보게 된다.
구조주의의 문학적 짝은 카뮈가 아니라 캐럴이다. 왜냐하면 부조리의 철학에 있어 무의미란 단순히 의미와 대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부조리는 의미의 결핍, 부족함(......이 충분하지 않다)에 의해 정의된다. 반대로 구조즈의의 관점에서 볼 때 언제나 너무나 많은 의미가 존재한다. 과잉은 자체 결핍으로서의 무의미에 의해 생산되고 과잉 생산된다. 야콥슨이 정의한 제로 음소, 즉 어떤 규정된 음운학적 값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음소와 대립하기보다는 음소의 부재에 대립하는 음소처럼, 무의미는 어떤 특정한 의미도 지니고 있지 않지만, 그 생산물과 우리가 원하는 단순한 배제의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써, 그것이 과잉 생산하는 의미에보다는 의미의 보재에 대립하낟. 무의미란 의미를 지니지 않은 것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의미 줌을 수행함으로써 의미의 부재에 대립한다. 이것이 우리가 무의미(non-sense)라는 말에 의해 이해해야 할 바의 것이다.

효과로서의 의미
마지막으로, 철학, 나아가 사유 전체에 잇어 구조주의가 지니는 중요성은 그것이 경계선들을 옮긴다는 데 있다. 의미의 개념이 본질들(Essences)의 무기력해진 연맹을 대체했을 때, 철학적 경계선은 의미를 새로운 초월성, 신의 전신, 변형된 하늘에 연결하는 것들과 인간과 그의 심염, 새롭게 뚫린 심층, 지하 안에서 발견한 것들 사이에서 수립된 것으로 보였다. 안개 낀 하늘(쾨니히스베르크의 하늘)의 새로운 신학자들과 동굴 속의 새로운 인간중심주의자들이 의미의 비밀로서 신-인간(Dieu-homme) 또는 인간-신(Homme-Dieu)의 이름으로 전경을 차지했다.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때로 어렵다. 그러나 오늘날 이 구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일차적인 것은 인간을 짐지우는 것이 당나귀인지 아니면 당나귀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짐지우는 것이 인간인지를 자문하게 되는 이 끝없는 담론, 우리가 처해 있는 담론의 무기력/권태이다. 이차적으로, 우리는 의미에 각인되는 순수 반의미의 인상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하늘에 있건 지하에 있건 의미는 원리(Principe), 보관소(Reservoir), 시원(Origine)으로서 제시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천상의 원리가 근본적으로 잊혀지고 덮여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하의 원리는 심층적으로 말소되고 포기되고 소외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말소에 있어서나 덮임에 있어서나,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제야 충분히 이해되기 시작한 신 안에서건 이제야 그 심층을 이해하게 된 인간 안에서건 의미를 재발견하고 복구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소식의 울림을 듣는 것은 행복하다. 즉, 의미는 결코 원리나 시원이 아니다. 그것은 생산된다. 그것은 발견되거나 복구되거나 재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장치를 통해 생산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높이나 깊이에도 속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그 고유한 차원으로서의 표면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표면 효과일 뿐이다. 이것이 의미가 깊이나 높이를 결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의미가 깊이와 높이를 가진다면, 그것은 표면을 결하는, 의미를 결하는, 또는 의미를 전제하는 '효과'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높이와 깊이일 뿐이다. 우리는 종교의 '본래적 의미'가 인간이 배반한 신 안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신의 이마주 안에서 소외된 인간 안에 있는 것인지 더 이상 묻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니체에게서 전복의 예언자도 넘어감(depassement)의 예언자도 찾지 않는다. 만일 신의 죽음, 금욕적 이상의 높이로부터의 추락이 인간 중심적인 것의 그릇된 깊이, 허위 의식과 한탄에 의해 보상된다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 사상가가 있다면, 그것은 곧 니체이다. 그는 그의 발견들을 다른 방식으로, 격언과 시로 표현했다. 여기에서 그는 신이나 인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지 않았다. 이 격언과 시는 의미를 생산해내는 기계, 효과적인 탈물질적 놀이를 수립함으로써 표면을 뛰어다니는 기계이다. 우리는 프로이트에게서 인간 중심적 심층이나 시원적인 의미를 찾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무의식에 의해 의미를 생산하는 무의식 기계의 놀라운 발견자를 본다. 4)루이 알튀세의 주요 논의들과 일치하는 글에서, 오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제시한다. 의미를 다소간 상실된 시원(이 시원이 신적인 것이든 인간적인 것이든, 존재론적인 것이든 인간학적인 것이든) 안에서 다시 찾는 사람들과 시원을 무의미로, 인식론적으로 표면 효과로서 생산되는 의미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구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에 이 규준을 적용함으로써, 오지에는 해석의 문제란 결코 '빗나간' 것에서 '본래적인' 것으로 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두 계열에서의 의미 생산의 메커니즘을 이래하는 데 있다고 본다. 의미는 언제나 효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효과 창출(effectivite)이 자리를 잡았다고, 신적인 보편자나 인간적 인격성 안에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기보다는 우리들의 것인, 신들보다는 신적인 것들인 특이성들, 구체적인 것 안에서 시와 격언을, 영구 혁명과 부분적 활동을 고무하는 특이성들 안에서 발견했노라고 느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인민들이자 시들인 환각적인 이 기계들 안에 어떤 관료적인 것이라도 있는가? 우리 자신을 좀 흐트러뜨리는 것으로, 표면에 존재하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 우리의 피부를 북으로서 사용하고 그래서 '위대한 정치'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인간을 위한 것도 신을 위한 것도 아닌 빈 칸, 일반적인 것에 속하는 것도 또 개별적 것에 속하는 것도, 또 인칭적인 것도 보편적인 것도 아닌 특이성들. 인간이 꿈꾸고 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의미와 자유, 효과 창출들에 기반하는 순환들, 메아리들, 사건들이 이 모든 것들을 가로지른다. 빈 칸을 순환시키는 것,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특이성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것, 요컨대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인 것이다.

계열 12 - 역설

양식/일방향과 역설
역설들에 대한 우리의 논의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보다는 루이스 캐럴에 들어맞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실증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픽션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이 역설들로부터 벗어나고자 해도 소용없다. 루이스 캐럴에에 적합한 것은 논리학에 대해서도 적합하다. 군대의 이발사는 실존하지 않으며 비정상적인 집합도 마찬가지라고 말함으로써 역설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역으로 역설들은 언어 안에 내속하며, 중요한 것은 언어 자체가 그러한 존재들[역설들]의 내속을 혀용하지 않으면서도 기능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역설들은 사유의 그릇된 이마주, 엉터리 같으며 쓸데없이 비비 꼬인 이마주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다. 사유를 하나의 단순한 행위, 스스로에게 명료한 행위, 무의식 및 그 안의 무의미의 모든 잠재성을 작동시키지는 않아도 되는 행위로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단순한' 생각일 것이다. 역설들은 우리가 그것을 사유의 단초들로서 인정할 때에만 오락이 되는 것이다. 사고될 수만 있는 것, 언표될 수만 있는 것, 나아가서는 사고될 수 없고 언표될 수 없는 것, 정신적 공허, 아이온을 발견함으로써 그들[역설들]을 '사유의 열정'(la Passion)으로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다[오락이 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흡입된(insufflees) 존재들의 모순된 성격을 일깨우거나 이발사가 군대에 속할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역설들의 힘은 바로 그들이 모순되지 않으면서도 우리로 하여금 모순의 생성에 참관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모순율은 현실과 기능에 적용되지만, 그것의 원천인 불가능 즉 역설에, 아니면 차라리 역설들이 표상하는 것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기호 작용의 역설들은 본질적으로 비정상적인 집합(요소로서 포함되거나 상이한 유형들의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과 전복적인 요소(그것이 그 실존을 전제하는 집합의 부분을 이루며 도 그것이 결정하는 두 부분 집합에 속하는 것)이다. 의미의 역설들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과거-미래이며 현재는 결코 아닌) 무한 분할이며 (닫힌 공간이 아닌 열린 공간에 배분되는) 노마드적 배분이다. 그러나 어쨌든 역설들은 두 방향으로 동시에 나아가며, 이 효과들에서 어떤 때는 한 쪽 면을 다른 때는 다른 쪽 면을 도드라지게 함으로써 동일성 확인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앨리스의 이중적인 모험이며, 미친 듯한 생성, 잃어버린 이름이다.
즉, 역설은 '통념'(doxa)과 대립한다. 그런데 'bon sens'라느 일방향을 의미하기도 한다.*프랑스어 'sens'는 의미라는 뜻 외에 '방향'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bon sens'는 '일방향'이 되고, 'sens commun'은 '공통 방향'이 된다. 또 'sens'는 감각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으며, 이 경우에 'sens commun'은 '공통 감각'이 된다. 들뢰즈가 공통 감각을 논할 때 'sens'는 '감각'보다 더 넓은 외연을 띤다. 그러나 적절한 말이 없어 감각으로 번역했다.* 즉 그것은 한쪽으로만 나 있는 방향이며, 하나의 방향을 선택해 그에 만족하도록 하는 한 질서의 요구를 표현한다. 이 방향은 보다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덜 분화된 것으로, 사물들의 부분에서 불의 부분으로 이행하는 것처럼 손쉽게 결정된다. 이 방향을 취한 뒤 우리는 시간의 화살을 설치한다. 왜냐하면 보다 더 분화된 것은 그것이 개별적 체계의 시원을 정의하는 한 필연적으로 과거로서 나타나며, 보다 덜 분화된 것은 미래로서 또 목적으로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의 이 질서, 즉 과거와 미래의 질서는 현재와 관련해, 즉 고려된 개별적 체계 내에서 선택된 시간에 의해 결정된 한 위상(phase)과 관련해 수립된다. 따라서 양식/일방향은 그것이 기능(본질적으로 예견/예측하는 것)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을 가지게 된다. 보다 덜 분화된 것으로부터 더 분화된 것으로 갈 경우, 예컨대 처음에 식별 불가능했던 온도가 조금씩 분화되어 갈 경우, 다른 방향에서는 예견 불가능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양식/일방향이 열역학에서 그 심층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에 그것은 보다 고도의 모델들에 의존한다. 양식/일방향은 궁극적으로 배분자이다. 그것의 공식은 '한편으로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d'une part et d'autre part)' 이다. 그러나 그것이 시행하는 배분은 차이가 시작된다는, 그리고 그것을 메우고 동등화하고 소거하고 보상한다고 볼 수 있는 하나의 인도된 운동 안에 자리잡는다는 조건 아래에서 이루어진다. 사물들의 부분에서 불의 부분으로, 세계들(개별 체계들)의 부분에서 신의 부분으로 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양식/일방향이 함축하고 있는 이러한 배분은 정확히 고정된 또는 정주적인 배분으로 정의된다.* 이 대목이 들뢰즈의 존재론에서 사회/역사 이론으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들뢰즈에게 존재론적인 '양식'은 인식론적인 '상식'과 통하며, 양식과 상식은 한 사회를 지배하는 'doxa'이다. 이 '대중의 통념'은 곧 한 사회를 지배하는 '코드'이다. 따라서 역설 즉 'paradoxa'의 추구는 일정한 코드의 전복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 전복의 힘을 '욕구'로 파악하면서 들뢰즈의 사회/역사 이론이 시작된다.*
양식/일방향의 핵심은 하나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며, 그 결과 이 특이성을 그[특이성]에 의존하지만 도한 그것을 내쫓거나 희석시키려는 보통의 규칙적인 점들로 이루어진 모든 선 위에 뿌린다. 양식/일방향은 전적으로 가연적이고 소화 촉진적이다[불가역적이다]. 양식/일방향은 농업적이며, 토지의 문제, 울타리치기의 문제와, 또 부분들이 서로 보완하고 규제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중류 계급들의 작용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증기 기관과 울타리쳐진 목축장, 뿐만 아니라 재산과 계급은 양식/일방향의 생생한 원천들이다. 단지 그러한 시대에 등장하는 사실들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원형들로서. 또 단순한 은유로서가 아니라 '속성들'과 '집합들'이라는 말이 담고 있는 모든 의미를 모음으로써*사회철학적인 맥락에서 속성은 '재산'이 되며, 집합은 '계급'이 된다.*
그래서 양식/일방향의 체계적인 특성으로는 하나의 유일한 방향을 긍정하는 것, 이 방향을 보다 분화된 것에서 덜 분화된 것으로, 특이한 것에서 규칙적인 것으로, 특별한 것에서 보통의 것으로 이행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이 규정에 따라 시간(과거와 미래)의 화살을 수립하는 것, 현재를 이 수립 안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 이렇게 가능하게 된 예견의 기능을 하는 것, 이 모든 특성들이 서로 결합하게 되는 정주적 배분의 유형을 띠는 것 등이다.
양식/일방향은 기호 작용의 규정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이 수행이 의미 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양식/일방향이 언제나 이차적으로 도래하기 때문에, 그것이 수행하는 정주적 배분이, 마치 울타리의 문제가 우선 임자 없는, 개방되어 있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언덕이나 둔덕 옆의 공간을 전제하듯이, 어떤 다른 배분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역설은 양식/일방향의 방향관느 다른 방향을 따른다고, 어쨌든 단지 기분 전환일 뿐인 변덕에 의해,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것을 충분할까? 유명한 예들을 다시 취해보자. 온도가 분화해 나아간다면 또는 점도가 가속된다면, 더 이상 '예측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일까? 사물들이 다른 방향으로 이행하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방향 역시 하나의 유일한 방향인 것이다.
양식/일방향은 유일한 의미/방향의 특정한 방향을 규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유일한 방향 일반의 원리를 규정한다. 이 원리는 일단 주어지면 우리로 하여금 다른 방향보다는 그 방향을 선택하게 만든다는 점을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그 결과 역설의 힘은 결코 다른 방향을 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는 언제나 두 의미/방향을 동시에 취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 양식/일방향의 대립물은 다른 방향이 아니다. 다른 방향이란 단지 기분의 전환일 분이다. 그러나 열정(passion)으로서의 역설은 두 방향을 분리할 수 없음을, 하나의 유일한 의미/방향을 수립할 수 없다는 것, 사유의 염려와 노동을 위한 유일한 방향도, 기분 전환과 사소한 오락들을 위한 역전된 의미/방향도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가속되는 점도는 운동체로부터 휴식을, 그러나 예견 불가능한 의미/방향으로 제거할 것이다. "어느 방향, 어느 방향이에요?" 라고 앨리스는 묻는다. 이 물음에는 응답이 없다. 방향을 띠지 않는 것, '양식/일방향'을 띠기보다는 언제나 두 방향으로, 무한히 분할되고 늘어지는 과거-미래로 나아가는 것은 의미/방향의 고유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물리학자 볼츠만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화살은 개별적인 세계들/계들 내에서만, 그리고 이 계들 내에서 규정되는 현재에 관련해서만 유효하다고 말한다. "우주 전체에 있어, 시간의 두 방향은 공간에서처럼 구분할 수 없다. 위도 아래도 없다"(즉, 높이도 깊이도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크로노스와 아이온의 대립을 다시 발견한다. 크로노스는 유일하게 실존하는 현재이며, 현재들이 부분적인 세계들/계들 내에서 이어지는 한에서, 언제나 과거에서 미래로 흐름으로써 과거와 미래를 자신의 두 인도된 차원들로 간주하는 시간이다. 아이온은 추상적인 순간의 무한한 분할 내에서의 과거-미래이며, 언제까지나 현재를 피해가면서 끊임없이 두 방향으로 동시에 분해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계들의 계 또는 비정상적인 집합으로서 우주 내에서 어떤 현재도 고정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온의 선은 현재에 정향을 두고 있는, 하나의 개별적인 계 안에서 그것이 받아들이는 각 특이점을 '규제하는' 선과 대립한다. 아이온의 선은 이 선과는 달리 하나의 전개체적인 특이성에서 다른 특이성으로 도약하며 이들 중 어떤 것들을 다른 것들 안에서 다시 취한다. 그리고 각각의 사건이 이미 과거이며 아직 미래인, 동시에 더와 덜인, 언제나 그들을 전체적으로 소통하게 만드는 분할 안에서 전날이자 다음날이 되는 노마드적 배분의 형태들을 따라 모든 계들을 다시 취한다.

상식과 역설
상식/공통 감각에 있어, 'sens'는 더 이상 하나의 방향을 뜻하지 않으며 하나의 기관(un organe)을 뜻하게 된다. 사람들이 '공통의'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기관, 하나의 기능, 하나의 동일화 능력이며, (어떤 형태로든) 주어진 다양성을 동일자(Meme)의 형상에 관련짓기 때문이다. 상식/공통 감각은 양식/일방향이 예측하는 것 못지 않게 동일화하고 재인식한다.
주체의 측면에서, 상식/공통 감각은 영혼의 다양한 능력들을, 또는 신체의 분화된 기관들을 포함하며, 그들을 자아(Moi)라고 말할 수 있는 하나의 통일성에 관련짓는다. 지각하고 상상하고 기억하고 인식하고...... 하는 것은 유일하고 동일한 자아이다. 그리고 호흡하고 잠자고 걷고 먹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언어란 그를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드러내는, 자신이 행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그런 주체 바깥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객관의 측면에서, 상식/공통 감각은 주어진 다양성을 통일시키며 그것을 대상의 특수한 형상이나 세계의 개별화된 형상의 통일성에 관련시킨다. 내가 보는 것,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는 것은 동일한 대상이며, 내가 지각하고 상상하고 기억하는 것도 동일한 대상이다. 그리고 내가 호흡하고 걷고, 깨거나 자고, 일정한 계의 법칙에 따라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은 동일한 세계 안에서이다.*인식은 대상의 동일성과 주체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같은 대상을 보아도 주체 자신이 계속 변하면, 인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때문에 주체의 동일성을 위해 상정되는 것이 공통 감각이다. 마찬가지로 인식이 성립하려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대상이 내가 인식하려는 바로 그 유일하고 동일한 대상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나에게 드러나는 잡다한 성질들을 담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x가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도 역시 언어는 그것이 지시하는 동일성들의 바깥에서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 감각이라는 두 힘의 상보성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양식/일방향은, 만일 그것이 한 주체의 동일성이라는 형식으로 또 한 대상이나 세계의 항구성이라는 형식에(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상이나 세계가 현존한다고 전제한다) 이 다양성을 관련시킬 수 있는 심급으로 넘어가지 못한다면, 어떤 시작과 끝도, 어떤 방향도 고정시킬 수 없을 것이다. 역으로, 상식/공통 감각에서의 이 동일성의 형식은, 그것이 여기에서 시작하고 저기에서 긑나는 이러저러한 다양성을 통해 그것을 규정할 수 있으며 또 그 부분들의 동등화에 필요한 모든 시간 동안 지속한다고 볼 수 있는 심급을 향해 넘어가지 않는다면, 공허한 것으로 남을 것이다. 자아와 세계와 신(방향들 뒤에서 솟아오른는 존재이자 동일성들의 지고한 원리)이 연맹을 이루는 것은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 감각의 이 상보성에서이다.
역설은 바로 이 양식과 상식을 동시에 전복시키는 존재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동시에 미친 듯이 생성하면서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두 방향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상실된 동시에 알아보기 힘들게 된 동일성의 무의미로서 등장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동시에 미친 듯이 생성하면서 예측 불가능하게 변하는 두 방향으로서, 다른 한편으로 상실된 동시에 알아보기 힘들게 된 동일성의 무의미로서 등장한다. 앨리스는 줄곧 두 방향으로 동시에 자란다. 이상한 나라(Wonderland)는 언제나 분할되는 양 방향을 띤다. 그녀는 또한 동일성을, 그녀의 동일성, 사물들의 동일성, 세계의 동일성을 상실하는 존재이다. [실비와 브루노]에서 요정들의 나라(Fairyland)는 공통의 장소(Common-place)와 대립한다. 앨리스는 상식/공통 감각의 모든 경험들을 겪고 또 놓친다. 기관으로서의 자아 의식의 경험 -"너희들은 누구냐?"- 재인식으로서의 대상의 지각 -모든 동일성을 비켜가는 나뭇가지 -낭송으로서의 기억의 경험 - "처음부터 끝까지 그것은 틀렸다" - 세계의 통일성으로서의 꿈의 경험(이 세계에서 개별적인 각 계는 하나의 우주, 그 안에서는 언제나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의 꿈 속에서 하나의 요소로 존재하게 되는 그러한 우주를 위해 와해된다) -"나는 다른 누군가의 꿈에 귀속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양식/일방향을 가지지 못하는 앨리스가 어떻게 여전히 하나의 상식/공통 감각을 가질 수 있겠는가? 언어가 그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거나 드러내는 주체를, 또 지시할 대상을, 고정된 질서에 따라 기호화할 집합들과 속성들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 불가능하다.

의미와 무의미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즉 모든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 방향을 앞서는 이 영역에서, 의미 생성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언어는 역설의 열정과 더불어 그 가장 높은 잠재력에 도달한다. 양식/일방향을 넘어, 루이스 캐럴의 짝들은 미친 듯하 ㄴ생성의 두 방향을 동시에 나타낸다. 우선[앨리스]에서 모자 장수와 화성의 산토끼는 각자 하나의 방향에 따라 살지만, 두 방향을 분리할 수는 없으며 또 각자는 다른 것 안에서 분할된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에게서 둘 모두를 발견한다. 미치기 위해서는 둘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시간을 살해했을" 때, 즉 측정을 파괴하고 (성질을 고정된 어떤 것에 관련시키는) 정지와 휴식을 제거한 날에, 둘 모두는 미친다. 그들은 현재를 죽였다. 오로지 깊이 잠든 모습으로만, 그들의 사형당한 친구로서만 그들 사이에서 살아 남는, 그러나 또한 추상적 순간, 차 마실 시간에서만 존속하는 현재를 죽였다. 그래서 그들은 두 방향으로 동시에 언제나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끊임없이 자리를 바꾼다. 거울의 이면에서, 산토끼와 모자 장수는 아이온의 두 동시적인 방향을 따라 하나는 가고 하나는 오기 위해서, 하나는 찾고 하나는 관계시키기 위해서 두 전령 안에서 다시 취해진다. 더 나아가, 트위들둠과 트위들디는 두 방향의 구분 불가능성을, 그리고 그들의 집을 가리키는 갈라지는 길 위에서 각 방향으로 두 방향의 무한한 분할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짝들이 생성에 관련한 모든 측정, 질의 모든 멈춤, 따라서 양식/일방향의 모든 실행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과 같이, 험프티 덤프티는 왕도적인 단순성, 말들의 주인(le Maitre), 의미의 부여자(le Donateur)이다. 그는 어떤 고정된 질, 어떤 측정된 시간도 동일화할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대상에 관련되도록 차이들을 배분함으로써, 상식/공통 감각의 실행을 파괴한다. 목과 허리가, 목걸이와 허리띠가 혼동되는 그에게는 상식/공통 감각만이 아니라 (오로지 운동하면서 '불일치하는' 특이성들로 되어 있는) 분화된 기관들도 결여되어 있다.
험프티 덤프티는 앨리스를 알아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앨리스의 각 특이성들이 하나의 기관(눈, 코, 입)의 보통 집합체 안에서 취해지고, 매우 규칙적인 열굴의 공통 장소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모든 세계에서처럼 조직화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역설ㄷ르의 특이성 내에서는 아무 것도 시작하지 않거나 끝나지 않으며, 모든 것은 과거와 미래 두 방향으로 동시에 움직인다. 험프티 덤프티가 말하듯이, 언제라도 둘이서 동시에 커지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하나가 작아지지 않고서는 다른 것이 커질 수가 없다.
역설이 무의식의 능력이라 해도 놀랄 것은 없다. 그것은 언제나 두 의식 사이에서, 양식/일방향에 반하며, 또는 의식의 등 뒤에서, 상식/공통 감각에 반하여 발생한다. "우리는 어제 대머리가 되는가?" 또는 "얼마만큼이 샇여야 더미가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크뤼시포스는 차라리 계산하는 것을 그치고 잠을 자면서 그 후를 보자고 대답했다. 카르네아데스는 이 대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크뤼시포스가 깨어나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고, 같은 물음이 제기될 것이라고 논박한 것이다. 즉, 우리는 언제나 둘로 만족할 수 있으며, 기울기가 커질 때 머리카락을 늦추거나 다른 한 손을 증가시킬 때 한 손을 줄인다. 왜냐하면 "다른 순간이 아니라 왜 이 순간인가?", "물의 성질은 왜 0도에서 변하는가?" 등이 문제가 된다면, 이 물음은 0도를 온도의 연속체에서 하나의 보통점으로 간주하는 한 잘못 제기된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그것이 하나의 특이점으로 간주된다면, 그것은 그 안에서 발생하는, 보통선에서의 그 현실화와 관련해 제로로 일컬어지는, 언제나 와서는 곧 지나가버리는 사건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

무의미, 의미, 그리고 이차적 언어의 조직화
이제 우리는 표면에서의 언어의 전개와 명제들-사물들 경계선에서의 의미 생성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표를 제시할 수있다. 이 표는 이차적이고 언어에 고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화를 보여준다. 그것은 우리가 다양한 이중적 이름들을 부여했던 역설적인 요소/우발점에 의해 활성화된다. 그리고 이 요소를 두 계열을 돌아다니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것과 그 둘 사이에 아이온의 직선을 긋는 것으로서 제시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무의미이며, 무의미의 두 언어적 형태들을 정의한다.
그러나 바로 무의미는 의미와 내적이고 본래적인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각 계열의 항들에 의미를 제공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이 항들이 서로 상대적으로 가지는 위치들은 그것[무의미]과 관련해 가지는 '절대적인' 위치에 의존한다. 의미는 결국 계열들을 돌아다니는 심급에 의해 그들 안에서 생산되는 하나의 효과이다. 때문에 아이온 위에 모이는 의미는 그 자체 역설적인 요소의 비대칭적인 얼굴들에 상응하는 두 얼굴 -기표로서 규정되는 계열을 향하는 얼굴과 기의로서 규정되는 계열을 향하는 얼굴- 을 가진다. 의미는 계열들(명제들) 중 하나에 내속한다. 그것은 명제들에서의 표현 가능한 것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와 같은 것은 아니다. 의미는 다른 계열(사태들)에서 부대한다. 그것은 사태들의 부대물이지만, 그것이 부대하는 그 사태들, 그것을 현실화하는 그 사물들 및 성질들과 같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떤 계열을 기표로서, 다른 계열을 기의로서 규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의미의 두 측면, 즉 내속과 열외 존재이며, 또 그들의 원천인 두 측면, 즉 무의미 또는 역설적 요소, 빈 칸과 정원 초과된 대상 -한 계열에서의 임자 없는 자리와 다른 계열에서의 자리 없는 임자- 이다. 그래서 의미 그 자체는 무의미의 형태들을 다시 취하는 근본 역설들의 대상이다. 그러나 의미 생성은 역시 기호 작용의 조건들에 의해 규정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의미를 부여받은 계열들의 항들은 제3의 조직화 안에서 이 기호 작용에 결국 복종하며, 이 제3의 조직화가 그들을 가능한 현시들과 지시들의 법칙들(양식/일방향, 상식/공통 감각)과 연관시킨다. 표면에서의 이 총체적 펼쳐짐의 표는 이 점들 각각에서 극단적이고 항구적인 연약함에 의해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계열 13 - 분열증과 어린 소녀

아르토와 캐럴
표면만큼 연약한[되돌릴 수 없는] 것은 없다. 이차적인 조직화는 제버워키만큼이나 강력한 한 괴물에 의해, 즉 무의미에 의해, 즉 모습도 없고 바닥도 없는, 그리고 앞에서 의미에 여전히 내재하는 두 모양새들로서 보았던 것들과는 다른 무의미에 의해서 위협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위협이 처음부터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몇 발자국만 나아가면 균열이 더 커졌다는 것, 표면의 모든 조직화가 이미 사라졌으며 무서운 일차적 질서 안에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의미는 더 이상 의미를 베공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처음에 우리는 같은 요소 안에, 이웃하는 요소 안에 머물러 있다고 믿었다. 우리는 요소를 바꾸었다는 것, 폭풍우 안에 들어섰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여전히 작은 소녀들과 아이들 가운데 있다고,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광기 안에 있다고 믿었지만, 또한 문학적 탐구의 정점에 있다고, 언어와 말에서의 최고의 발명 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발작적인 삶에 대한 논쟁 안에, 신체들에 관련되는 병리학적 창조의 밤 안에 존재한다.
이 때문에 관찰자는 다음에 주목해야 한다. 예컨대 말-손가방들의 맥락에 있어, 아이들의 셈 노래, 시적인 실험들, 그리고 광기의 경험들의 뒤섞임을 보는 것은 지지할 수 없다. 한 위대한 시인은 바로 그 자신이었던 아이 그리고 그가 사랑하는 아이들과 더불어 쓸 수 있다. 광인은 바로 그 자신이었던 그리고 언제나 그였던 시인과 더불어 놀랍도록 방대한 시적 작품을 이루어낼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어린아이, 광인, 시인의 기묘한 삼위일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경탄과 숭배의 힘을 가지고, 우리는 느슨한 유사성 아래에서 심층적인 차이를 드러내는 미끄러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무의미의 전혀 다른 기능과 심연에, 말-손가방들의 이질성에 주목해야 한다. 어린 소녀는 'Pimpanicaille'를 노래할 수 있고, 예술가는 'frumieux'를 쓸 수 있고, 분열증 환자는 'perspendicace'를 말할 수 있다.1) 'Perspendicace'는 한 분열증 환자가 주체의 머리 위에 놓여 있으며(perpendiculaires) 또 매우 통찰력 있기도 한(perspicaces) 정신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하나의 말-손가방이다. 이 말은 뒤마에 의해 인용되었다./ 즉, 대체적으로 유비적인 결과들에 관련해 문제가 같다고 믿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바바르(Babar)의 노래와 아르토의 외침 -라타라 라타라 라타라 아타라 타타라 라나 오타라 오타라 카타라- 을 혼동하는 것은 심각하지 않다.
덧붙여, 논리학자들이 무의미에 대해 말하면서 범하는 잘못은, 마치 어린 소녀가 노래하고 위대한 시인이 말하고 분열증 환자가 지껄이는 것을 생전 들어보지 못한 듯이, 그 자체로서든 증명을 위해서든 면밀하게 구축된 앙상한 예들을 제시하는 점에 있다. 논리학이 드는 예들은 러셀이 루이스 캐럴에게 자극받아 제시한 예들을 제외한다면 형편없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논리학자들의 부족함이 우리에게 그들에 대립해 다시 심위일체를 구축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문제는 임상적인 것이다. 즉, 문제는 한 조직화에서 다른 조직화로의 미끄러짐, 또는 점진적이고 창조적으로 하나의 탈조직화를 형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문제는 비평적인 것이다. 즉, 무의미가 형태를 바꾸고, 말-손가방이 본성을 바꾸고, 언어가 전적으로 차원을 바꾸는 미분적인/변별적인 수준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캐럴과 아르토 사이에] 대체적인 유사성들을 설정할 경우, 우리는 함정에 빠진다. 이 유사성의 함정과 더불어 두 텍스트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우선은 험프티 덤프티를 그린 장의 옮겨쓰기를, 다음으로는 캐럴을 평가한 로데즈(Rodez)의 편지를 보자. 아르토에 의해 행해진 제버워키의 첫 절에 대한 독해를 통해, 첫 ㅈ두 행이 여전히 캐럴의 규준들에 응답하고 있으며, 파리소(Parisot)나 브루니우스(Brunius) 같은 다른 프랑스 번역가들의 번역에 충분히 유비적인 번역 규칙들에 부합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두 번째 행의 마지막에서부터 미끄러짐이, 더 나아가서는 우리를 다른 세계, 다른 언어로 초대하는 핵심적이고 창조적인 함몰(effondrement)이 생겨난다. 공포와 더불어, 우리는 이것이 분열증의 언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닫는다. 그러나 말-손가방들은 어떤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어중음 소실에 빠져 있고, 또 지나치게 많은 후음들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표면에서 방출되는 캐럴의 언어롸 신체의 심층에서 마름질되는 아르토의 언어 사이의 거리를, 그 문제들의 차이를 동시에 측정한다 그래서 로데즈의 편지에 인용되어 있는 아르토의 다음 언급을 이해하게 된다.
"나는 제버워키의 번역에 입각해 작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것의 어떤 부분을 번역하려 했지만, 그 일은 짜증스러운 일이었죠. 나는 유치하게 보이는 이 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표면의 시들이나 언어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성의 성공과 행복한 여가를 호흡하는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지성은 항문에 기대지만, 그에 영혼이나 가슴을 바치지는 않습니다. 항문은 언제나 테러이져. 그리고 나는 영혼을 상실하는 고통 없이 똥 누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제버워키에는 영혼이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랑그를 발명하고 순수 랑그로 하여금 문법을 벗어나 말하게 할 수 있지만, 이 의미는 그 자체로서 유효해야 합니다. ......제버워키는 머리를 써서 잘 차려진 음식을 포식하고 타인의 고통을 즐기고자 하는 모리배의 작품입니다. ......존재와 그 언어의 지지[더러운 것]를 파낼 때, 시인은 잘못 느끼고 있으며, 제버워키는 모든 위대한 시인이 잠기는 그리고 분만하는 고통의 자궁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작자의 작품인 것이죠. 제버워키에 쓸 만한 구절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국의 속물적인 신사가 마치 퍼머를 하듯이 살짝 끼워넣은 외설에 불과합니다. ......그것[제버워키]은 실컷 먹는 인간의 작품이죠. 그의 글에서는 이런 느낌이 전해 옵니다."
결국, 아르토는 캐럴을 한 사람의 변태로, 작은 변태로 간주한다. 그가 표면의 언어를 수립하려고 할 분, 심층에서의 언어의 진정한 문제, 고통, 죽음, 그리고 삶의 분열증적 문제를 포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캐럴의 놀이는 아르토에게 실없는 것으로 보이며, 너무 속물적이고 거짓된 것으로 보인다.

먹기-말하기와 분열증적 언어
아르토의 천재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 아름다움과 면밀함이 임상적 상태를 유지한 다른 하나의 텍스트를 생각해보자. 스스로를 "랑그들 안에서 연구하는" 병자나 분열증 환자로 일커든 사람은 구강성의 두 계열의 존재와 선언을 체험한다. 이는 곧 사물들-말들, 소비들-표현들, '소비 가능함 대상들'-'표현 가능한 명제들'의 이원성이다. 먹기와 말하기 사이의 이 이원성은 보다 난폭하게 표현해 지불하다-말하다, 똥싸다-말하다이다.
그러나 특히 이 이원성은 두 종류의 말들, 명제들, 두 종류의 언어들 -본질적으로 섭취적이고 배설적인 모어와 환자가 가지려고 하는 본질적으로 표현적인 외국어- 사이에서 이행하고 또 재발견된다. 어머니는 그를[환자를] 이 랑그들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두 가지 등가적인 방식으로 방해한다. 그 하나는 그의 눈앞에 먹음직스러운 그러나 상자에 갇혀 있어 먹을 수 없는 음식물을 흔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귀를 막기 전에 갑자기 영어로 말하는 것이다. 그는 점차 완벽해지는 방법을 통해 이 위협에 대비한다. 우선 그는 외국어를 말하면서 상자를 짓밟아 폭음폭식하며, 더 나아가서는 음운적 요소들에 따라 영어를 다른 외국어로 번역함으로써(가장 중요한 것은 자음이다) 두 계열 사이에서의 공명과 한 계열에서 다른 계열로의 전환을 확립한다. 예컨대 영어인 'tree'는 프랑스 단어(ambre)에서 다시 나타나는 R과 히브리어 단어에 다시 나타나는 T 때문에 전환된다. 그리고 러시아어 단어가 'derevo'이듯이, T가 D가 됨으로써, 'tree'를 'tere'로 바꿀 수 있다. 벌서 매우 복잡해진 이 과정은, 환자가 연합들을 개입시키고자 했을 때 일반화된 과정에 자리를 내준다. 그래서 자음들인 R과 L이 미묘한 문제를 제기하는 'early'는 'suR-Le-champ', 'de bonne heuRe', 'matina-Lement', 'a la paRole', 'devoRer L'espace'처럼 연합된 프랑스 어법으로, 더 나아가서는 'urlich'처럼 독일어 자음의 이국적이고 허구적인 말로 전환된다(우리는 레이몽 루셀이 프랑스어 내의 계열들을 구성하고 전환시키기 위해 발명함 기법들에 있어, 첫번째의 제한된 과정과 연합에 기초하는 두번째의 일반화된 과정을 구분했다). 반역적인 말들은 참을 수 없는 역설들을 활성화함으로써 모든 과정들에 저항하게 된다. 절반의 인간들에게만 적용되는, 그러나 반대로 인류 전체를 가리키는 'leutte'나 'loudi'로만 옮겨질 수 있는 'ladies'.
여기에서도 역시, 우리는 우선 캐럴의 계열들과 유사성이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루이스 캐럴에서도 역시, 먹기-말하기라는 거대한 구강적 이원성은 때로 자리를 옮겨 두 종류의 명제들 또는 명제의 두 차원 사이에서 이행하거나, 때로 굳어져 지불하기-말하기, 똥-언어가 된다(앨리스는 암양 시장에서 달걀을 사며, 험프티 덤프티는 말들을 지불한다. 아르토가 말하듯이, 똥 같음은 캐럴 저작의 도처에서 발견된다. 마찬가지로 아르토가 그 자신의 이율배반적인 계열들 -존재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 살아남는 것과 실존하는 것, 행위하는 것과 사유하는 것, 물질과 영혼, 신체와 정신- 을 전개할 때, 그는 스스로 자신이 캐럴과 가까워지고 있다고 느낀다. 험프티 덤프티 부분이나 [제버워키]의 생선 같은 경우에, 아르토는 캐럴이 자신을 표절했다고, 약탈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왜 아르토는 자신과 캐럴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덧붙인 것일까? 매우 큰 친화성이 왜 또한 극단적인 낯섦이 될까? 캐럴의 계열들이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조직되었는가를 묻는 것으로 충분하다. 캐럴의 두 계열은 표면 위에서 절속된다. 이 표면 위에서, 하나의 선은 두 계열들 -명제와 사물, 또는 명제의 차원들- 의 경계선으로서 존재한다. 이 선을 따라 명제의 표현된 것인 동시에 사물들의 부대물로서, 표현들의 '표현 가능함'과 지시 작용들의 '부대 가능함'으로서 의미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두 계열은 그들의 차이에 의해 절속되며, 의미는 그 고유한 선분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표면 위를 돌아다닌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이 비물체적 의미는 물체적 사물들의, 그리고 이들의 혼합물, 이들의 능동과 수동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 결과는 물체적 원인과는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진다 효과로서의 의미가 언제나 표면 위에서 그 자체 비물체적인 의사 원인과(즉 신조어들과) 말-손가방들 내에서 표현되며 또 의미를 동시에 두 측면에서 분배하는, 그리고 언제나 움직이는 무의미와 관련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거울 효과로서의 캐럴의 작품이 뛰노는 표면의 조직화란 바로 이런 것이다.

분열증과 표면의 좌절
아르토는 말한다. "그것은 단지 표면적인 것이다." 약간의 분열증 증세만 있어도 아르토의 천재성을 가능하게 한 계시를 알아볼 수 있으며, 그 자신 그렇게 살 수 있다. 그에게는 표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캐럴은 심층에 관련된 모든 문제로부터 보호됨으로써 더 이상 꾸민 듯한 어린 소녀처럼 보이지 않게 되는가? 최초의 분열증적 명증성은 표면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신체의 표면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물들과 명제들 사이의 경계선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분열증적 신체의 최초의 측면은 일종의 신체-여과기이다. 프로이트는 표면과 피부를 수많은 구멍들의 통로로서 파악하려는 분열증 환자의 이 태도를 강조하곤 했다.5) Freud, "L'Inconscient"(1915), in Metapsychologie, trad. M. Bonaparte et A. Berman, Gallimard, pp. 152~155. 프로이트는 두 사람의 환자에 대해 말한다. 한 사람은 그의 피부를, 다른 사람은 그의 양말을 작은 구멍들, 더욱이 점차 커지는 구멍들의 쳬계로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여기에서 히스테리 환자와도 다르며 또 강박증 환자와도 다른 분열증 환자의 뚜렷한 증상을 보았다./ 그 결과 신체 전체는 이제 심층으로만 존재하며, 근본적인 함입을 나타내는 이 캄캄한 심층 속에 모든 것을 쓸어담는다. 모든 것이 신체이고 신체적이다. 모든 것은 신체의 혼합물이며, 신체 안에서 쟁여짐과 뚫고 지나감이 성립한다. 아르토가 말하듯이 "우리는 등 위에 고통의 못이 박힌 살찐 척추동물들을 얹고 있다."
모든 것은 물리적이다. 하나의 나무, 하나의 기둥, 한 송이의 꽃, 하나의 지팡이가 신체를 관통해 돌진한다. 늘 다른 물체들이 우리의 신체를 관통하고 그 부분들과 공존한다. 모든 것은 직접적으로 상자, 상자 안의 음식물, 그리고 똥이다. 표면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내부와 외부, 용기와 내용물은 더 이상 분명한 극한을 가지지 않으며, 보편적인 심층 안에서 쟁여지거나 쟁여짐에 따라 점차 좁아지는 현재의 원환 안에서 돌아간다. 이로부터 모순을 살아가려는 분열증적 방식이 나온다. 신ㄴ체를 가로지르는 심층적인 균열 안에서든, 서로 쟁여지며 선회하는 조각난 부분들 안에서든, 신체-여과기, 조각난-신체, 그리고 분열된-신체가 분열증적 신체의 최초의 세 차원을 형성한다.

수동적 말과 능동적 말
표면의 이러한 좌절에서, 말 전체는 그 의미를 상실한다 말이 지시 작용의 능력을 지킬 수 있겠지만, 공허한 것으로서 울릴 것이다. 또, 현시 작용의 능력은 무관심한 것으로 울릴 것이고, 기호 작용의 능력은 '그릇된' 것으로 울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말]음 어떤 경우든 그 의미를, 즉 신체의 능동 및 수동과 구분되는 비물체적인 효과, 그 고유한 현실적 효과화와 구분되는 비물체적 사건을 모으거나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모든 사건은 효과화된다. 환각적인 형태 아래에서일지라도. 모든 말은 물리적이며, 신체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과정은 다음과 같은 종류에 속한다. 종종 음식물의 성격을 띠는 한 말은 그것을 고정시키고 그에 의미를 주는 일종의 콜라주 내에서처럼 대문자로 새겨져 나타난다. 그러나 압핀에 꽂힌 말이 그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은 실러블들로, 문자들로, 특히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며 신체를 관통하고 그에 상처를 입히는 자음들로 조각나 분해된다. 우리는 랑그들 안에서 연구하는 분열증 환자에게서 이를 보았다. 모어가 의미를 부여받는 것과 그 음성적 요소들이 독특하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은 동시적이다. 말은 사태의 부대물을 표현하기를 그치며, 그 조각들은 밑맏침할 수 없는 소리들과 혼동되고, 그들이 마치 그들이 그 자체 시끄러운 유해한 음식물들과 쟁여진 똥인 것처럼 하나의 혼합물 즉 새로운 사태를 형성하게 되는 신체 안에 불법침입을 행한다. 신체의 부분들(=기관들)은 그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을 공격하는 분해된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 이 열정의 과정("모든 글쓰기는 음행이다. 즉 고정된, 씌어진 모든 말은 시끄러운, 섭취의, 배설적인 조각들로 분해된다.") 안에서 언어의 효과는 순수한 언어-정동(un pur langage-affect)이 된다.
이제 분열증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의미를 복구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제거된 표면 아래의 심층에서 말을 파괴하는 것, 정동을 쫓아내는 것, 또는 신체의 고통스러운 열정을 승리의 행위로, 복종을 명령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언어 연구자는 모어 내에서의 말의 고통스러운 파열들을 낯선 언어에 상대적인 행위로 전환시켜주는 수단들 중 일례를 제공한다. 그리고 상처입히는 자가 곧 쟁여지거나 풀어놓아진 신체 기관들에 영향을 주는 음성적 요소들 내에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승리는 모든 문자적, 음절적, 음성적 가치들이 오직 강세적일(toniques) 뿐인(그리고 씌어지지 않은) 가치들로 대체되는 말-호흡들, 말-외침들의 수립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그리고 이 가치들에 분열증적 신체의 새로운 차원인 영광스러운 신체가, 즉 취입, 자극, 증발, 유체적 이동을 가지고 모든 것을 행하는 부분들 없는 유기체(아르토의 상위 신체 또는 기관들 없는 신체)가 상응한다.7) "입도 없다. 혀도 없다. 이도 없다. 목구멍도 없다. 식도도 없다. 위도 없다. 배도 없다. 항문도 없다. 나는 나라고 하는 인간을 재구성한다."(기관들 없는 신체는 오로지 뼈와 피로만 되어 있다.)/
그리고 의심할 바 없이, 수동적 과정에 대립하는 이 능동적 과정의 규정은 일단은 불충분해 보인다. 결국 흐름들은 조각난 것들 못지않게 불길해 보인다. 그러나 이는 능동-수동의 양면성 때문이다. 분열증 속에서 체험되는 모순이 그 진정한 적용점을 찾는 것은 여기에서이다. 능동과 수동이 양면성을 벗어날 수 없는 두 극이라면, 그것은 그들이 형성하는 두 언어가 신체에, 신체의 심층에 속하며 이로부터 떼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관들 없는 유기체의 비물체적인 흐름이 기생충들, 기관들의 부분들, 고체 음식들, 똥찌꺼기들을 나르지 않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나아가 우리는 불길한 잠재력들이 열정의 조각들이 신체를 통과할 수 있도록 흐름들과 취입들을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흐름은 필연적으로 붕괴되지만, 스스로 붕괴되기보다는 그것에 붙어 있는 다른 극에 의해서만 붕괴된다. 그렇지만 역시 흐름은 수동적 극(불완전한 혼합물들의 쟁여짐과 상처)에 능동적 극(완전한 혼합물의 상태)을 형성한다. 분열증 안에는 삶의 방시기이 물체적인 두 혼합 -부분적이고 가변적인 혼합과 총체적이고 유체적인(신체를 보호하는) 혼합- 사이의 스토아적 구분이 존재한다. 유체적이고 취입된 요소 안에, 쟁여진 부분들의 수동적 혼합물들과 대립해 '바다의 원리'로서 존재하는 능동적 혼합물의 씌어지지 않은 비밀이 존재한다. 아르토가 바다와 물고기들에 대한, 복종과 명령에 대한 험프티 덤프티의 시를 변형시키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이 이차적 언어, 이 행위의 과정은 실질적으로 그 자음, 후음, 유기음의 과잉에 의해, 그 내부적 강세와 아포스트로피에 의해, 그 기식과 각운 나누기에 의해,그리고 음절적인 나아가 문자적인 모든 가치들을 대체하는 그 소리 변화에 의해 정의된다. 말을 분해 불가능한 것, 와해될 수 없는 것 -절속 없는 언어- 으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행위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접착제는 젖은 비유기체적인 원리이며, 바다의 덩어리이다. 러시아어 'derevo'에 관련해, 언어 연구자는 복수인 'derev'ya'가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한다(그에게 아포스트로피/내부 생략 부호[derev'ya에서의']는 자음들의 융해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물렁한(mou) 기호-를 확립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음들을 분리시키고 그들을 발음 가능하게 만드는 대신, 사람들은 젖은(습음화된) 기호로 환원된 모음이 자음들을 적심으로써 그들을 분리 불가능하게, 독해 불가능하게, 나아가서는 발음 불가능하게 만들며, 그로부터 연속적인 기식 안에서 그만큼의 능동적 외침을 만들어낸다고 말해왔다. 총체로서의 외침은 약화시키는 기호 내의 자음들처럼, 바다의 덩어리 내의 물고기들처럼, 또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위한 피 안의 뼈들처럼 들러붙는다. 또한 불의 기호. 아르토는 "물과 수증기 사이에서 망설이는" 파동이라고 말하곤 했다. 외침들은 가식 안에서의 그만큼의 따닥거리는 소리이다.
아르토가 그의 [제버워키]에서 "Jusque la ou la rourghe est a rouarghe a rangmbde et rangmbde a rouarghambde"라고 말했을 때, 말이 조각난 유기체의 수동이 되기보다는 부분들 없는 신체의 능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활성화하고 취입하고 약화시키거나 [불에] 탈 수 있게 만들어야만 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약한 기호들과 더불어, 말을 자음들의 장기 공채로, 분해 불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언어 안에서 우리는 언제라도 말-손가방들의 등가물들을 찾을 수 있다. 'rourghe'와 'rouarghe'에 관련해 아르토 자신은 'ruee', 'roue', 'route', 'regle', 'route a regler'를 지적한다(여기에 우리는 아르토가 방문했던 로데즈의 나라인 'Rouergue'를 덧붙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그가 내부적 생략 부호와 함께 'Uk' hatis'라고 말할 때 그는 'ukhase', 'hate', 'abruti'를 지적하면서 "길을 벗어난 달의 돼지들을 뜻하는, 에카트(Hecate) 아래에서의 어두운 요철"이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말이 말-손가방으로서 나타날 때조차도, 그에 연합된 구조와 주석은 전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우리를 설득시킨다. 즉, 아르토의 'Ghore Uk'hatis'는 잃어버린 돼지들, 캐럴의 'mome raths', 파리소의 'verchons fourgus'의 등가물이 아니다. 이들은 이 평면 위에서 경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의미를 따라 이루어지는 계열들의 분지화를 확보하기보다는, 하위 의미의 영역 안에서 그리고 의미가 생산됨에 따라 그것을 흡수하고 재흡수하는, 흐르며 불타는 원리에 따라, 강세적 요소들과 자음적 요소들의 연합적 계열을 조작한다. 'Uk'hatis'(또는 길 잃은 달의 돼지)는 K'H(감옥) 'KT(야상곡) H'KT(에카트)이다.

심층의 무의미와 표면의 무의미
우리는 분열증적 말의 이중성 -상처입히는 음성적 가치들 안에서 파열하는 말-수동과 절속되지 못한 강세적 가치들을 용접하는 말-능동-을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이 두 말은 신체의 이중성 -조각난 신체와 기관 없는 신체-과 관련해 전개된다. 그들은 두 극장 -공포 또는 열정의 극장과 본질상 능동적인 잔혹극- 과 관련되며, 또 두 무의미 -수동적 무의미와 능동적 무의미, 음성적 요소들로 분해되는 의미의 사적인 말의 무의미와 의미의 분해 불가능한 그러면서도 사적인 말을 형성하는 강세적 요소들의 무의미- 와 관련된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발생하며, 의미 아래에서, 표면에서 멀리 떨어져 작용을 가하고 받는다. 표면의 무의미와는 구분해야 할 하위의미, 내의미(insens), 'Untersinn'[하위 의미], 의미 아래, "의미가 없는 하나의 기호"라는 횔덜린의 말을 따른다면, 이는 그 두 측면하에서의 언어이다(이 언어는 분명 기호이기는 하지만, 신체의 능동이나 수동과 혼합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열증적 언어가 기표 계열이 기의 계열 위로 끊임없이 맹렬하게 미끄러짐으로써 정의된다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사실상, 더 이상 계열들은 없다. 두 계열은 사라졌다. 무의미는 표면에 의미 주기를 그쳤다. 무의미는 기표의 측면에서나 가의의 측면에서나 모든 의미를 흡수하며 삼켜버린다. 아르토는 존재(l'Etre), 즉 무의미에는 이가 없다고 했다. 우리가 이차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표면 조직화 안에서, 물체와 음성은 비물체적 경계선에 의해 그리고 동시에 의미의 경계선에 의해 분리되고 절속된다(여기에서 의미의 경계선은 한편으로 말들이 순수하게 표현된 것을 다른 한편으로 물체의 논리적 부대물을 나타낸다).
그래서 의미가 물체의 능동들과 수동들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본성상 다른, 즉 그 자체로서는 능동도 수동도 아닌, 그리고 음성 언어를 물체들과 혼동하지 않도록 해주는 결과이다. 역으로, 분열증의 이 일차적인 질서 안에서, 이제 이원성은 물체의 능동들과 수동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그리고 언어는 동시에 이 둘로서, 컴컴한 심층 안으로 다시 전부 흡수된다. 더 이상 그 무엇도 명제들이 물체로 급선회하고 그 음성적 요소들을 후각적인, 미각적인, 소화 촉진적인 정동들과 혼동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더 이상 의미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법이나 통사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극단적인 경우에는 분절된 음절적, 문자적, 또는 음성적 요소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르토는 그의 시론을 [루이스 캐럴에 반하는 반문법적 시도]라고 이름붙일 수 있다. 캐럴은 보다 엄밀한, 그리고 물체들을 반영하고 그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거울으로서이긴 하지만, 물체들의 굴절과 절속으로부터 분리된 것으로서 말들의 굴절과 절속을 모으는 역할을 할 하나의 문법이 필요했다. 우리가 아르토와 캐럴의 모든 면을 대립시킬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차적인 질서와 이차적인 조직화. '먹기-말하기' 같은 유형의 표면 계열들은 실제 외관적으로 유사한 심층의 극들(pole)과 아무런 공통점을 가지지 않는다. 계열들 사이에 의미를 분배하는, 표면에서의 무의미의 두 형상은 그것을 이끌어내고 삼켜버리고 재흡수하는 무의미의 두 확장된 양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말더듬기의 두 형태 -간헐적 말더듬기와 강세적인 말더듬기- 는 두 분열증적 언어와 느슨한 유비 관계를 맺을 뿐이다. 표면의 절단은 심층적인 'Spaltung'[분열]과 아무런 공통점을 가지지 않는다. 아이온의 비물체적인 선분 위에서 이루어진 과거-미래의 무한한 분할 안에서 포착된 모순은 물체들의 물리적 현재 안에 있는 극들의 대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말-손가방들조차도 전혀 이질적인 기능을 가진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표면으로 올라오거나 그것을 정복하기도 전에 이미 분열자적 '입장'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표면에서까지도 우리는 늘 분열자적 조각들을 찾을 수 있다. 왜냐하면 심층들로부터 오는 요소들을 조직하고 펼치는 것이 바로 표면이 가지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어린이에게서의 표면의 정복, 분열증 환자에게서의 표면의 균열, 사람들이 예컨대 도착이라고 부르는 것에서의 표면의 정복, 이 모든 것을 뒤섞는 것은 역시 심하고 거북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루이스 캐럴의 저작들을 일종의 분열증적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영국의 어떤 부주의한 정신분석가는 그렇게 했다. 앨리스의 몸-망원경, 그 쟁여짐과 풀어짐, 음식에 대한 명백한 집착, 똥에 대한 잠재적인 집착, '선택된 조각들'만이 아니라 음식물의 조각들도 지시하는 조각들, 쉽게 분해하는 음식물적 말들의 콜라주와 딱지붙이기, 정체성의 몰락, 물고기와 바다 등등. 우리는 여전히 어떤 류의 광기가 모자 장수, 화성의 토끼와 쥐를 임상적으로 나타내는가를 물을 수 있다. 그리고 앨리스와 험프티 덤프티의 대립에 있어, 언제나 우리는 양가적인 두 극 -'조각난 기관들과 기관 없는 신체', 여과기 신체와 영광된 신체- 을 간파할 수 있다. 아르토가 험프티 덤프티라는 텍스트를 다룬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아르토의 경고가 튀어나온다. "나는 번역을 시도하지 않았다. ......나는 이 시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표면의 시들이나 언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릇된 정신분석학은 우리가 어디에서나 확실하게 되찾아내는 동일한 질료들이나 그릇된 차이들에서 오는 유비적 형상들을 발견한다고 믿음으로써 두 가지 방식으로 잘못을 저지른다. 이 경우 정신의학적 임상이라는 측면과 문학적 비판이라는 측면을 놓치는 것은 동시적이다. 형상과 질료가 그들을 조직해주는 시원적이고 환원 불가능한 구조들 안에서만 유효하다고 본 구조주의의 생각은 옳다. 정신분석학은 역사적 일화이기 이전에 기하학적 차원들에 속해야 한다. 왜냐하면 삶은, 나아가 성조차도 발생적 질료들과 발생한 형상들 안에 존재하기 이전에 이 차원들의 조직화와 정향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은 경우들을 지시하고, 이야기들을 드러내거나 콤플렉스들을 기표화하는 데 만족할 수 없다. 정신분석학은 의미의 정신분석학이다 정신분석학은 역사적이기 이전에 지리학적이며, 상이한 나라들을 구분한다.
아르토는 캐럴도 아니고 앨리스도 아니다. 캐럴은 아르토가 아니며, 앨리스조차도 아니다. 아르토는 어린아이를 극히 폭력적인, 심층의 두 언어 -물체적 능동과 수동- 에 부합하는 대안 -어린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것, 즉 그의 미래의 척주의 상자들로부터 나오지 않는 경우(이 척주 위에서 부모들은 육체 관계를 가진다. 반대 방향으로의 자살)와 어린아이가 기관들도 부모들도 없이 유동적이고 영광스럽고 화려한 신체가 되는 경우(아르토가 그의 태어날 '딸들'이라고 부른 아이들)- 에 집어넣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캐럴은 그의 비물체적인 의미의 언어에 부합하는 어린아이를 기다린다. 그는 엄마 몸의 심층을 떠난 장소와 시점, 그러나 아직도 그 자신의 몸의 심층을 발견하지는 못한 장소와 시점을 찾는다. 즉, 앨리스가 자신의 눈물의 바다에서 표류했듯이 어린 소녀가 물에 빠지게 되는 표면의 짧은 순간을 찾는다. 이는 다른 나라들, 관계 없는 다른 차원들이다. 우리는 표면이 그의 괴물들 -스나크와 제버워크, 그 공포와 잔혹성-을 가진다고 믿을 수 있다. 이들은 심층들이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발톱들을 가지며, 가로지르면서 포획하고, 나아가서는 이미 쫓아냈다고 믿었던 심연에 우리를 다시 떨어뜨린다. 그럼에도 캐럴과 아르토는 만나지 않는다. 주석가만이 차원을 바꿀 수 있으며, 그것은 그의 거대한 연약함, 그가 어떤 차원에서도 살지 않는다는 기호이다. 우리는 캐럴의 모든 저작들과 아르토의 한 쪽(page)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아르토는 문학에서 절대적인 깊이를 달성한, 살아 있는 신체와 이 신체의 놀라운 언어를 발견한 유일한 작가이다. 그가 말했듯이, 엄청난 고통을 대가로 치름으로써. 그는 지금까지도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하위 의미(l'infrasens)를 탐색했다. 그러나 캐럴은 표면의 구축자로서 머문다. 너무 알려져 있어 탐색할 필요가 없다고 간주되었던, 그러나 의미의 논리를 담뿍 담고 있는 표면들.

계열 14 - 이중 인과

사건-효과들의 원인과 준원인
의미의 연약성[비물체성]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빈위는 물체적인 성질들과는 전혀 다른 본성을 가진다. 사건은 물체의 능동, 수동과는 다른 본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것[사건]은 이들로부터 유래한다(resulte). 왜냐하면 의미는 물체적인 원인들 및 이들의 조합에서 유래하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원인에게 물어뜯길(happe) 위험을 감수한다. 의미는 인과 관계가 원인과 결과의 이질성 -원인들[물체들]끼리의 연결(lien)과 [비물체적] 효과들끼리의 연합(liaison)-을 포함하는 한에서만 [원인에게 물어뜯길 위험을] 모면하며, 자신의 환원 불가능성을 보장 받는다. 즉, 물체의 능동과 수동의 결과인 비물체적 의미는 표면 위에서 그 자체 비물체적인 준 원인(quasi-cause)에 결부되는 한에서만 물체적 원인과의 차이를 보존할 수 있다.1) Clement d'Alexandre, Stromates VIII, 9. "스토아 학파는 말한다. 물체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원인이다. 그러나 비물체적인 것은 은유적인 방식으로만 그렇다."/
스토아 학파는 사건이 이중 인과에 의해 야기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 하나는 사건의 원인인 물체들의 조합이고, 다른 하나는 사건의 준 원인인 다른 사건이다.* 한 반정부 인사가 어느 건물 아래를 지나가다가 벽돌을 맞아 부상을 입었을 때, 우리는 이중의 인과에 접하게 된다. 그 하나는 벽돌이라는 물체와 이 반정부 인사의 몸에서 성립하는 물체적 인과이고, 다른 하나는 그 한달 전 이 반정부 인사가 했던 연설, 그리고 그 한달 뒤 발생한 시민 항쟁 사이에서 성립하는 비물체적 인과이다. 이 비물체적 원인은 '준원인'이다. 이 준원인은 이미 형성된 사건/의미들의 계열의 장으로 무의미/우발점으로서 솟아오르며, 그 장의 한 위치에 자리를 잡는 순간 의미로 화한다. 그렇게 되면서 단순한 물체적 운동의 부대물이 아니라 의미 차원에서의 한 요소를 형성하게 된다. 앞으로의 논의 전체가 걸려 있는 기본 구도 이다.* 반면 에피쿠로스 학파는 외관과 표면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때문에 비물체적 효과들이라는 개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시뮬라크르들'이 물체들이라는 심층적 원인에만 종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표면들에 대한 순수 물리학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중 인과의 필요성은 명백하다. 즉, 유동적 표면에서의 사건들은 한편으로 (그들이 실질적 원인으로서 의존하는) 분자적 조합에서의 변화와 관련되고, 다른 한편으로 (그들이 비물체적인 또는 '허구적인' 준원인으로서 의존하는) 말하자면 표면 장력의 변이들에 관련된다.**사건들은 물체들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표면효과들이다. 이 효과들이 서로 관련 맺으면서 형성하는 장에서의 힘을 표면 장력에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표면과 사건의 비물체적 성격에 부합하도록 이 두번째 인과 관계를 정초하려고 했다. 우리가 보기에, 사건 즉 의미는 한 요소, 즉 무의미로서 또는 우발점으로서 개입하며, 또 준원인 역할을 하면서 효과의 충분한 자율성을 확보해주는 한 역설적 요소와 관련된다(이 자율성이 앞에서 언급했던 연약성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표면 위 무의미의 두 형태는 능동과 수동이라는 두 '심층적인' 무의미로 변형될 수 있으며, 따라서 비물체적인 효과는 물체들의 심층으로 다시 흡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의미가 그 고유한 차원을 확보하는 한에서 이 연약성은 위에서 말한 자율성에 모순되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음과 발생
그래서 효과의 자율성은 우선은 [물체적] 원인과의 차이를 통해서, 다음으로는 준원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정의된다. 다만, 이 두 측면은 매우 상이한, 더 나아가 얼핏 대조적이기까지 한 특성들을 의미에 부여한다. 효과 내지 사건으로서의 의미는, 그것이 물체적 원인들, 사태들, 성질들, 물리적 혼합물들과 본성상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에서, '되돌릴 수 없음' -투과 불가능성, 비생산성(sterilite, inefficacite),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음- 으로 특성화된다. 그리고 이 되돌릴 수 없음이라는 성격은 의미와 지시된 사태들의 차이만이 아니라 의미와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들의 차이도 분명히 해준다. 후자의 경우[명제들에 관련해], 의미는 중성의 성격을 띤다(명제의 추출된 안감, 명제의 양상들적 유예). 반대로, 의미가 그것을 생산하고 또 표면에 분배하는 준원인과의 관계에 있어 파악될 때, 그것[의미]은 이 비물질적 원인[준원인]의 잠재력(puissance)을 이어받고, 그에 참여하며, 나아가 그것을 내포하고 소유한다. 우리는 이 잠재력이 오로지 그 효과에 있어서만 작동한다는 것, 이 효과를 따라다닌다는 것,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효과와 내재적인 관곌를 맺는다는 것(이 관계는 생산물을 생산자에 속하는 것으로 만든다)을 보았다.
의미로부터 생산되는 특성을 재론할 시간은 없다. 단지, 이 특성은 결코 시원적인 것이 아니며, 늘 [다른 것에 의해] 야기되고 파생된다는 것만 말해두자. 물론, 이 파생은 이중적이다. 그리고 이 파생은, 준원인의 내재성과의 관계에 있어, 그것이 긋고 또 가지치게 만드는 길들을 창조한다.* 의미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우발점에 의해 파생된다. 무의미/우발점은 이미 존재하는 사건 계열들의 어딘가에 솟아올라 그 계열들 전체를 재조직한다. 다시 말해, 하나의 사건 자체는 무의미하지만 계열들-장 내에 자리잡음으로써 의미가 성립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미의 파생은 준원인들의 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며, 이 파생은 각종 사건 계열들을 긋고 또 가지치게 만든다. 이 가지치기는 계열들 간의 수렴과 발산의 문제와 관련되며, 16계열의 주제가 된다.* 그리고 이 조건들 아래에서, 물론, 표현된 의미가 명제의 다른 차원들(지시 작용, 현시 작용, 기호 작용)을 발생시켜야 하는 한에서, 우리는 이 발생적 능력을 명제 자체에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발생적 능력을 이 차원들이 채워지는 방식에 관련해, 나아가서는 일정한 정도로 또 특정한 방식으로 이 차원들을 채우는 것과 관련해, 즉 지시된 사태들, 현시되는* 들뢰즈는 'manifestant'이 아니라 'manifeste'를 쓰고 있다. 주체의 능동성을 감소시키고 수동적 위상을 부여하기 위한 용어법이다.* 주체의 상태들, 그리고 개념들, 속성들, 기호화된 집합들과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
이 두 모순된 측면을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는가? 한편으로 사태들에 관련한 되돌릴 수 없음이나 명제들에 관련한 중성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명제들에만이 아니라 사태들 자체에도 관련된 발생(genese)의 잠재력이 있다.**사건-효과는 물체적 원인과의 관계에서 보면 되돌릴 수 없음과 중성이라는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의 효과일 뿐이다. 그러나 사건-효과는 다른 사건-효과들 사이에서 하나의 원인으로서(준원인으로서) 작용하며, 생산적 힘을 내포한다. 이 측면이 '발생'의 문제이다. 들뢰즈는 사건이 지시, 현시, 기호 작용에 관련해 지니는 발생적 작용을 '정적 발생'이라고 부른다. 이 정적 발생은 다시 사건/특이성에 의한 위의 세 작용을 채우는 상관항들, 즉 지시 대상, 현시되는 인칭, 기호 작용에 관련되는 개념들과 집합들의 발생을 다루는 존재론적 맥락과 (15계열에서 특이성이, 16계열에서 이 논리학적 정적 발생이 다루어진다) 지시, 현시, 기호 작용의 발생을 다루는 논리학적 맥락으로 나뉜다(17계열에서 이 문제가 다루어진다). 동적 발생은 27, 28, 29 계열에서 다루어진다. 이 발생의 문제는 들뢰즈를 푸코, 세르 등과 이어주는 중요한 문제로서, '후기 구조주의'의 논리적 토대를 이루는 형이상학적 표면, 객관적 선험의 문제를 형성한다.** 위인 명제가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진의 조건으로서의 의미가 위에 대해서처럼 진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것으로 머문다 해도) 논리적 원리와 하나의 명제가 언제나 참을, 참의 부분과 종류를 가질 수 있게 해주는(명제는 이 참을 가질 자격이 있으며, 참은 의미에 따라 명제에 다시 귀속된다) 선험적 원리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전자의 '논리적 원리'는 사태와 관련해 되돌릴 수 없고 명제의 차원들에 관련해 중성인 한에서의 의미를 뜻하며, 후자의 '선험적 원리'는 무의미에서 의미로 전화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는 한에서의 의미이다. 전자는 정적 발생의 상관자이고, 후자는 동적 발생의 상관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선험적'이란 칸트나 후설에서처럼 우리의 의식 구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와 명제 사이에 펼쳐져 있는 표면, 즉 '객관적 선험'이다.* 이 두 측면은 자율성의 두 형태에 의해 설명된다고,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물체적 원인과 본성상 다른 것으로서, 다른 경우에는 비물질적인 준원인에 연결된 것으로서 간주하는 것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모순을 해결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모순] 안으로 우리를 빠뜨리는 것은 자율성의 이 두 형태이기 때문이다.

후설의 이론
단순한 형식 논리학과 선험적 논리학의 이러한 대립은 모든 의미 이론을 관통한다. 후설의 [이념들]을 예로 들어보자. 후설은 의미를 한 행위의 노에마 또는 한 명제로 표현된 것으로 보았다. 스토아 학파를 이음으로써 그리고 현상학의 환원적 방법에 입각해, 후설은 표현에서의 의미의 되돌릴 수 없음이라는 성격을 재발견했다 이는 노에마가 처음부터 표현적 명제의 테제나 양상(지각된 것, 기억된 것, 상상된 것)의 중성화된 이중체를 함축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의식의 이 양상들과 명제의 이 지정적(thetiques) 특성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나아가 대상의 물리적 성질들로부터 완전히 구분되는 하나의 핵 -대상의 실재성도 우리 의식의 행위 방식도 개입하지 않는, 노에마적 색으로서의 순수 술어들- 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노에마적 의미의 이 핵에서, 보다 친숙한 어떤 것이, '지고하게' 또는 선험적으로 친숙한 하나의 '중심'이 나타난다. 이것은 다름아닌 의미 자체가 실재로서의 대상과 맺는 관계, 즉 이제 선험적 방식으로 발생되거나 구성되어야 할 관계와 실재이다. 리쾨르는 핑크(Eugen Fink)를 따라 [이념들]의 넷째 절에서 이러한 소용돌이의 존재를 지적한다. "의식이 지향된 의미(un sens vise) 안에서 스스로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이 지향된 의미가 대상 안에서 스스로를 넘어선다. 겨냥된 의미는 여전히 하나의 내용, 확실하긴 하지만 비실재적인[비사물적인] 지향적 내용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상에 대한 노에마의 관계는 그 자체 노에마의 궁극적 구조인 선험적 의식에 의해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후설적인 발생은 일종의 요술처럼 보인다. 핵이 'attribut'(속성)로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attribut'는 술어(predicat)로서 이해될 뿐 동사로서 이해되지 않는다. 즉, 개념으로서 이해될 뿐 사건으로서 이해되지 않는다(그래서 후설에서의 표현은 개념적인 것의 형식을 생산한다. 또는 의미는 일반성의 특정한 유형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일반성이 종의 일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그래서 대상에 대한 의미의 관계는 어떤 것=x에 대한 노에마적 술어들의 관계로부터 자연스럽게 파생된다(어떤 것=x는 노에마적 술어들을 밑받침해주거나 통합해주는 원리이다). 따라서 이 사물=x는 내적 무의미와 같지 않으며 의미와 공현존한다(copresent). 그것은 그것이 낳아야 할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는 제로 점이다. 그것은 차라리 칸트의 대상=x이다. 여기에서 x란 단지 '어떤 것'을 뜻하며, 의미와 초월성이라는 외적이고 합리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 대상=x는, 서술 가능한 일반성인 한에서의 의미가 이미 완성된 형태로 기호 작용의 형식을 부여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시 작용의 형식을 완성된 형태로 부여받는다.
후설은 발생을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필연적으로 '역설적'이고 '동일화 불가능한'(그 고유한 시원과 동일성을 동시에 결한) 심급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어떤 대상의 동일성을 설명해줄 상식/공통 감각(sens commun)의 시원적인 능력에서 출발해, 더 나아가 모든 대상들을 무한히 동일화하는 과정을 설명해줄 양식/일방향(bon sens)의 능력에서 출발해서 이루어진 것이다.3) Husserl, op. cit., "자기 동일적인 의식은 상이한 행위들이나 노에마들에 있어 상이한 규정의 지위를 부여받은 x에 필연적으로 도달한다."(456쪽) "원칙적으로 그리고 본질들의 무조건적인 일반성의 아프리오리에 있어, 진정으로 실존하는 모든 대상에 한 가능한 의식의 관념이 대응한다. 이 의식 안에서 대상 자체는 시원적/본원적이고(originaire) 완전히 적절한/충전적인(adequate) 방식으로 포착될 수 있다."(478쪽) "이 연속체는 모든 방향에서 무한한, 규정 가능한 동일한 x의 이 외관들의 위상들(phases)로 구성되는 것으로서 보다 정확히 규정된다."(480쪽)/ 우리는 이를 'doxa'에 대한 후설의 이론에서 확인한다. 이에 따르면, 믿음의 상이한 양식들은 'Urdoxa'에 의해 발생하며, 이 원통념은 각각의 능력들에 관련해 공통 감각의 능력으로서 기능한다.
칸트에게서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이 후설에게도 유효하다. 즉, 칸트와 후설은 상식/공통 감각의 형식을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은 'doxa'의 특수한 내용들과 양상들을 잠시라도 벗어나야만 스스로 철학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doxa'에서 본질적인 것, 즉 그 형식을 버리지 못했으며, '시원적인/본원적인' 것으로서 제시된 사유의 이마주 안에서 단지 경험적일 뿐인 실행을 선험적인 차원으로 상승시키는 데 만족했던 것이 아닐까?
여기에서, 일반적 술어로 간주된 의미 안에서 완결된 형태로 주어지는 것이 오로지 기호 작용의 차원만은 아니다. 그리고 규정 가능하고 개별화 가능한 어ㄸ너 대상과 의미 사이에 상정된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 오로지 지시 작용의 차원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인칭, 인칭적 의식, 그리고 주체적 동일성의 형태를 유지하는, 그리고 경험적인 것의 특성들 위에 선험적인 것을 투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한 선험적 주체의 위치에 있어, 모든 현시 작용의 차원이다. 심리학적 종합들에 상응하는 세 선험적 종합들을 직접적으로 추론할 때의 칸트에게서 분명했던 것이 지각적인 '봄'(vision)에서 출발해 시원적이고 선험적인 '보다'(Voir)를 추론해낼 때의 후설에게서도 분명하다.

'나'도 개체화도 없는 선험적 장
그래서 우리는 의미 개념을 가지고 연역해내야 할 모든 것은 의미 개념 안에 이미 가지고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것은, 우리가 표현과 구분하고자 했던 이 다른 차원들[지시, 현시, 기호 작용]과 그것[표현]을 혼동함으로써 모든 개념들을 뒤범벅으로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표현을 우리가 그것과 형식적으로 구분하고자 했던 이 차원들과 핵에 대한 은유들은 불만족 스럽다. 그것들은 물음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을 이미 포함하고 있다. 후설적인 의미 규정은 점진적으로 등질화되는 소급적인 곙로부터, 나아가서는 이질적 계열들 -두 얼굴을 가진 심급이 그 사이를 돌아다니는 노에시스의 계열과 노에마의 계열('Urdoxa'와 어떤 대상)- 로부터 편리한 외관을 빌려온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발생에 대한, 계열들 안에서 효과화됨으로써 이 발생을 결정해야 하는 의미 규정에 대한, 그리고 준원인으로 작용함으로써 이 의미 규정을 주도해야 하는 이중적 무의미에 대한 합리주의적인 또는 합리주의화된 희화화(caricature)일 뿐이다.
사실상, 내재적인 준원인에서 출발하는 의미 규정과 명제의 다른 차원들로부터 결과하는 정적 발생(la genese statique)은 사르트르가 1937년에 발표한 결정적인 논문에서 제기한 조건들에 응답하는 선험적 장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선험적 장은 비인칭적 장으로서, 종합 작용을 하는 인칭적 의식이라는 또는 주체적 동일성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여기에서, 주체는 언제나 구성된다.5) Sartre, "La Transcendance de l'Ego", in Recherches philosophiques, 1936~1937. '나'(Je)를 '자아'(Moi)로서 생산하는, '비인칭적인 또는 전인칭적인' 선험적 장이라는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사르트르가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까닭은 그가 이 비인칭적인 선험적 장을 여전히 의식에 의해 규정되는 것으로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의식은 '나' 없이 스스로, 그리고 지향성들 또는 순수 과거 지향들(retentions)의 놀이에 의해서 하나가 된다(s'unifer)./ 정초는 결코 그것이 정초해주는 것을 닮을 수 없다. 그리고 정초에 관련해, 그것이, 다른 세계가 아니면서도, 다른 역사학, 다른 지리학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의미의 선험적 장은 인칭적인 것의 형태만이 아니라 [기호 작용에 관련해] 일반적인 것의 형태와 [지시 작용에 관련해] 개체적인 것의 형태를 배제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칭적인 것은 단지 현시되는 주체만을 특성화할 뿐이며, 일반적인 것은 기호 체계화된 객관적 속성들(proprietes)과 집합들(classes)만을 특성화할 뿐이며, 또 개체적인 것은 (개체화시키면서 지시하는 그 자체 주관적인 관점들에 의지함으로써) 객관적인 방식으로 개체화되는 지시 가능한 체계들만을 특성화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후설이 선험적 장 안에 개별화의 중심들과 개별적 체계들, 모나드들과 관점들, 칸트적인 '나'가 아닌 라이프니츠적인 '자아'를 각인할 때에도, 사태는 더 나아지는 것 같지 않다(하지만 뒤에서 보겠지만 여기에 중요한 변화가 있다).6) [데카르트적 성찰]에서, 모나드들, 봄(vision)의 중심들, 관점들은 통각(aperception)의 종합적 통일성으로서의 '나'와 나란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후설의 주석가들 중에서, 베르제는 이 미끄러짐을 주목했다는 점에서 장점을 지닌다. 나아가 그는 전인칭적인 의식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그러나 이 의식은 관점들이나 개별화의 중심들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사르트르를 논박한다./ 선험적 장은 인칭적이지 않은 만큼 개체적이지도 않으며, 나아가 보편적이지도 않은 만큼 일반적이지도 않다. 이것이 선험적 장은 차이도 바닥도 형태도 없다는 것, 분열증적 심연이라는 것을 말하는가?*그럴 경우, 들뢰즈의 사유는 무규정적인 카오스를 선험적 차원으로 설정하는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사건-의미를 사유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이를 일정한 선험적 '장'에 위치시킨다. 이 점에 후기 구조주의자로서의 들뢰즈의 면모가 있다.* 그러한 장의 표면의 조직화가 시작되면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난다**들뢰즈가 말하는 선험적 장은 물체와 언어(지시, 현시, 기호 작용으로서의 언어) 사이에 존재하는 사건들/특이성들의 장이다. 이 장은 단순한 카오스가 아니라 일정하게 조직되는 장이다. 들뢰즈에게서는 이 장의 개념이 구조 개념에 해당하며, 특이성의 개념이 요소의 개념에 해당한다. 우리는 이 장을 푸코의 '언표장' 그리고 세르의 객관적 선험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이 장을 발견해낸 것이 후기 구조주의 사유의 핵심적인 공헌이다.** 특이성의 개념은 반일반성이며, 동시에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이다. 이 개념은 이제 우리에게 이 영역[선험적 장]과 그 발생적 잠재력을 규명할 수 있을 가설을 제공해준다.

계열 15 - 특이성

전투
의미의 두 계기 -되돌릴 수 없음과 발생, 즉 중성과 생산성- 에서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외관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사건이 중성적이며 되돌릴 수 없는 것이라는 것, 내부와 외부, 개별과 집단, 특수와 일반 등의 규정에 무관하다는 것은 일종의 상항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건은 영원한 진리를 가지지 못할 것이며,*사건은 순간적이고 우발적이지만, 또한 반복되며 영원하다. 야구장에서 타자가 공을 치는 사건은 반복된다. 때문에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 특정한 인물에 의한 "공을 쳤다", "공을 칠 것이다", "공을 치지 못했다", ......등과 같은 현실화/효과화 사건들(또는 사고들)과 "공을 치다"라는 반복적인 순수 사건을 구분해야 한다. 이 순수 사건이 특이성이다.* 또 그 시간적 현실화[사고]와 구분되지 못할 것이다. 전투가 여러 사건들 주으이 하나가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 '대사건'이라면,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전투야말로 동시에 다양한 방식으로 현실화되기 때문이며, 또 [전투에] 참여하는 각자가 그 가변적인 현재에 있어 상이한 효과화의 수준에서 그것을 포착할(saisir)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탕달, 위고, 통스통이에 대한 고전적인 비교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들은 바로 전투를 '보았으며' 그들의 주인공들로 하여금 전투를 볼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전투가 그 자신의 장 위를 미끄러져 난다(survole)는 것,*전투 중에는 '죽다', '상처 입다', '넘어지다, ......등의 사건들이 신체의 표면 여기저기에서 현실화된다. 이를 미끄러져 난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의 모든 시간적 현실화와 관련해 중성이라는 것, 승리자들과 패배자들, 비겁한 자들과 용감한 자들과 관련해 중성적이며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전투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끔찍하다. 전투는 결코 현존하지 않으며,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이며 이미 지나간 것이다. 전투는 익명적인 것에 스스로를 불어놓으려는(inspire) 의지에 의해서만, 그리고 더 이상 용감할 수도 비겁할 수도, 더 이상 승리자일 수도 패배자일 수도 없는 죽어가는 전사에게서의 '무차이/무관심'(difference)이라고 불러야 하는 의지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 전투는 바로 그렇게 대사건이 존재하는 그곳에 있으며, 그 끔찍한 되돌릴 수 없음에 참여하고 있다. 전투는 '어디에' 있는가? 전사가 도망갈 때 도망가는 것으로 발견되고 뛰어오를 때 뛰어오르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전사가 각각의 시간적 현실화를 그것 안에 또 그의 살에 구현된 사건의 영원한 참(verite)의 높이에서 보아야 하도록 결정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용기와 비겁함의 저편에, '의지적 직관'에 의한 -즉 여전히 현실화의 유형들에 상응하는 모든 경험적인 직관들과 구분되는, 사건이 그에게 만들어주는 의지에 의한- 사건의 순수한 포착에 도달하기 위해서 전사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긴 정복이 필요하다.1) 귀르비치는 그 '소여'가 활동성을 제약하지 않는 직관을 가리키기 위해 '의지적 직관(intuition volitive)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는 이 말을 둔스 스코투스와 데카르트에게, 칸트의 의지와 피히테의 순수 행위에 적용했다. 내가 보기에 이 말은 우선 스토아적 의지, 그리고 제2격의 이중적 의미에 있어 사건의 의지에 어울린다./
또한 사건에 대한 가장 위대한 저작, 스탕달이나 위고, 톨스토이의 것 보다도 위대한 저작은 스테판 크레인(Stephen Crane)의 [용기의 붉은 기장](The Red Badge of Courage)이다. 여기에서 주인공은 스스로를 익명적으로 '젊은이'나 '젊은 전사'라고 말한다. 이는 루이스 캐럴에서의 전투들과 유사하다. 여기에서는 거대한 소음, 검고 중성적인 광대한 구름, 요란한 까마귀가 전사들 위를 날면서 그들을 분리시키지 않거나, 그들[전사들]을 여전히 더 구분하기 힘들게 만들기 위해서만 분리시킨다. 이 전쟁의 신(un dieu)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신들 중에서도 가장 되돌릴 수 없는, 기도를 분명하게 거부하는 신은 바로 '투과 불가능성', 텅 빈 하늘, 아이온이다.

선험적 장은 의식의 형식을 거부한다.
명제적 양상들 일반과 관련해 의미의 중성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양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특수한 것도 일반적인 것도 아니며, 보편적인 것도 개체적인 것도 아니다. 질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긍정과 부정에 전적으로 무관하다. 양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실연적인(assertorique) 것도 절대 보편적인(apodictique) 것도 나아가 추측적인(interrogatif) 것 -주관적인 불확실성 또는 객관적 가능성의 양상- 도 아니다.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에 있어 지시 작용과도 현시 작용과도 또 기호 작용과도 같지 않다. 마지막으로 유형의 관점에서 볼 때, 의미는 어떤 직관들과도, 즉 위에서 말한 명제적 특성들의 놀이에 입각해 경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의식의 '위치들' -지각 작용, 상상 작용, 기억, 오성, 경험적 의지 등의 직관들이나 위치들- 과도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의 요구에 맞추어 이 일련의 양상들이나 관점들에 관련한 의미의 독립성을 뛰어나게 논증했다. 그러나 그가 의미를 투과 불가능한 중성으로 보지 못한 것은 그가 의미 안에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 감각이라는 합리적 양상을 붙들어두려고 했기 때문이다. 후설은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 감각을 부당하게도 일종의 모체로서, '양상화되지 않은 어머니-형식'(forme-mere non modalisee=Urdoxa)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가 선험적인 것 안에 의식의 형식을 붙들어두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의미의 투과 불가능한 중성은 의식 자체 내에서의 선언의 측면들 -이성의 합법화 하에서 실재적(reel) 코기토의 위치-어머니인가, 아니면 합리적인 합법화에 복속되는 불활성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반면', '부적절한 코기토', '그늘 또는 반사' 로서의 중성화인가- 중 하나로서만 규정된다. [후설이] 이렇게 의식으로부터 분명히 단절되는 것으로서 제시한 것은 [우리가] 의미의 두 측면 -양상들에 관련해서의 중성과 발생적 잠재력(puissance genetique)- 과 정확히 상응한다.
그러나 이 두 측면을 대안적 구조로 배치하려는 해결책이 둘 중 하나를 다른 하나의 외관으로 취급하려는 것보다 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 경우 발생이 그릇된 발생이 될 뿐만 아니라, 중성도 가짜 중성이 된다. 반대로 이미 보았듯이 똑같은 사물이, 의식의 선언에 따르기보다는 두 인과율의 분할 증식과 연언을 따름으로써, 존재의 수정과 명제의 양상들과 관련해 중성적인 표면효과로서 그리고 동시에 풍부한 생산의 원리로서 파악될 수 있다.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들
우리는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장, 즉 경험적 장들과 유사하지 않으면서도 미분화된 깊이와 혼동되지도 않는 선험적 장을 규정하고자 한다. 이 장은 의식의 장으로서 규정될 수 없다. 사르트르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인칭의 형식과 개체화의 관점을 인정함으로써 의식을 모체로서 수립하려는 시도를 거부한다. 의식은 통일화(unification)에 의한 종합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의 형식도 자아의 관점도 없다면 의식의 통일화에 의한 종합은 존재하지 않는다. 반면, 개체적이지도 인칭적이지도 않은 것은 특이성들의 방출들(les emissions)이다. 특이성들은 무의식적 표면 위에서 이루어지며,* 특이성들의 장은 거시적인 맥락에서 물질의 차원과 의미의 차원 사이에 있는 장이다. 그러나 인간의 차원에 국한해 말한다면, 특이성들의 장은 곧 신체의 차원과 정신의 차원 사이에 있는 장이며, 따라서 무의식의 장이기도 하다. 들뢰즈는 무의식 속에 의미 형성의 잠재력이 있다고 보며, 이 잠재력을 다룬 부분이 곧 '동적 발생'이다 이 문제는 27계열 이하에서 다루어진다.* 노마드적 배분에 의한 자가 통일화(auto-unification)의 내재적이고 동적인 원리를 통해 작동한다.**여기에서 자가라는 말은 특히 의식 독립적, 더 정확히는 전의식적 존재 양식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의식에 의해 특이성들(의 현실화)이 종합되는 것이 아니라, 특이성들의 장에서의 노마드적 배분에 의해 의식이 구성된다.** 그리고 이 노마드적 배분은 의식이 행하는 종합들의 조건인 고정적이고 정주적인 배분들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특이성들은 참된 선험적 사건들이다.***선험적 사건이란 곧 순수 사건이기도 하다. 특정한 시공간에 구현된 사건이 아니라 각종 시공간에 다양한 상황에서 구현되는 사건 자체이다. 이 선험적 사건들의 장이 곧 '객관적 선험'이다.***그것은 페를랭게트(Ferlinghetti)가 '4인칭 단수'라고 부른 것이다.
특이성들은 개체적이거나 인칭적인 것이 아니라, 개체들과 인칭들의 발생을 주도하는[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특이성들은 그 자체 내에 자아도 나도(ni Moi ne Je) 포함하지 않으며, 현실화됨으로써(s'actualisant), 효과화됨으로써(s'effectuant) 이들을 생산하는 한 '포텐셜' 안에서 분배된다(그리고 이 현실화의 형상들은 결코 효과화된 포텐셜과 유사하지 않다). 의식 내에 존재하는(또는 의식 내에서 주어지는) 인칭의 종합과 개체의 분석을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특이점들의 이론뿐이다. 우리는 [영혼, 세계, 신을 다루는] 심리학, 우주론, 신학을 동시에 약속하는 대안 -개체들과 인칭들에 이미 포착되어 있는 특이성들인가 아니면 미분화된 심연인가- 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다. 익명적이고 노마드적인,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들이 우글대는 세계가 열릴 때, 우리는 마침내 선험적인 것의 장에 발을 내디디게 되는 것이다. 앞서의 계열들에서 이러한 세계[특이성들의 세계]의 다섯 가지 주요 특징이 소묘되었다.

선험적 장과 표면
우선, 특이성-사건들은, 계열들 간의 차이들을 분포시키는 포텐셜 에네르기를 갖춤으로써, 안정적이지도 또 불안정적이지도 않은, 정확히 말해 '준안정적인'(metastable)한 체계 안에서 조직되는 이질적 계열들에 상응한다(에네르기 포텐셜은 순수 사건의 에네르기이다. 반면, 현실화의 형태들은 사건의 효과화들에 상응한다).
다음으로, 특이성들은 자가 통일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은 역설적 요소가, 하나의 동일한 우발점 안에서 상응하는 특이점들을, 또 동일한 하나의 던짐 안에서 모든 방출들과 모든 수들을 내포함으로써, 게열들을 주파하고 또 공명하게 만듦에 따라 계속 동적인 상태를 유지하며 자리옮김한다.
세번째로, 특이성들 또는 포텐셜들은 표면에 붙어다닌다. 모든 것이 마치 외부와의 경계선들[표면/막]에서만 발생[생물학적 의미]을 겪는 수정체의 표면에서처럼 발생한다. 물론 유기체의 경우와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유기체는 외부 공간으로 생장하고, 또 동화하고 외화하는(exterio-riser) 것 못지않게, 내부적으로도 성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역시 막들은 중요하다. 막들은 포텐셜들을 나르며 극성들을 다시 발생시킨다. 막들은 정확히 내부 공간과 외부 공간을 거리에 관계없이 접촉하게 만든다. 내부적인 것과 외부적인 것, 심층과 상층은 접촉의 이 위상학적 표면(surface topologique)에 의해서만 생물학적 가치를 가진다.
그래서 "가장 심오한 것은 피부이다"라는 말은 다시 생물학적으로도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피부는 표면에 고유한 살아 있는 포텐셜 에네르기를 사용하낟 그리고 사건들이 표면을 점유하지 못하고 그에 붙어다니느ㅡㄴ 것과 마찬가지로, 표면 에네르기는 표면 위에서 정위되기보다는(localisee) 그 형성과 재형성에 결부된다. 질베르 시몽동은 이를 빼어나게 서술한다. "생명체는 그 자신의 극한에서, 즉 그의 극한 위에서 살아간다. ......생명에 특징적인 극성은 막의 층위에 존재하낟. 생명이 그 본질적인 방식에서 실존하는 것은 이 표면(endroit)에서이다.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준안정성을 스스로 취하는 동력학적 위상학의 구조처럼. .......내부 공간의 모든 내용물은 생명체의 극한들[피부, 막] 위에서의 외부 공간의 내용물과 위상학적으로 접촉한다. 위상학에서는 거리가 무의미하다. 생명체 내부 공간을 채우는 질료의 모든 질량은 생명체의 극한 위에서 외부 세계로 활동적으로 드러난다. ......내부 환경(milieu d'interiorite)의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단지 내부적임(etre dedans)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그것은 극한의 안쪽임(etre du cote interieur de la limite)을 의미한다. ......극화된 막의 층위에서 내부적 과거와 외부적 미래가 만난다. ......"3) Gilbert Simondon, L'Individu et sa genese physico-biologique. P.U.F, 1964, pp.260~264. 시몽동의 모든 저작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시몽동이야말로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들에 대한 최초의 합리적인 이론을 제시했기 대문이다. 그는 이 특이성 개념에서 출발해 살아 있는 개체와 인식하는 주체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또한 이 작업은 선험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개념화이기도 하다. 선험적 장을 정의하기 위해 우리가 사용한 다섯 가지 특성 -장의 포텐셜 에네르기, 계열들의 내적인 공명, 막들의 위상학적 표면, 의미의 조직화, 문제적인 것으로서의 지위- 은 모두 시몽동에 의해 분석된 것이다. 우리의 모든 분석은 시몽동의 저작에 따르며, 단지 결론에서만 차이가 드러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네번째 규정으로서, 표면은 의미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기호들은 두 계열(두 이마주들-기호들, 두 사진이나 두 발자취, ......) 사이의 공명[공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표면의 조직화 내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조직화 내에 들어간 경우라 해도] 이 의미의 세계는 아직 방향의 통일성도 기관의 공동체도 포함하지 못한다. 이들은 하나의 다른 차원을 따르는 표면의 도안들(plans)의 계기적인 단계화(etagement)를 수행할 수 있는 하나의 수용적 기구(un appareil recepteur)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 의미의 세계는 그 사건-특이성들과 더불어 그에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을 중성을 드러낸다. 이는 이 세계가 그로 하여금 지시와 현시, 그리고 기호 작용을 획득함으로써 질서지어질 수 있게 해주는 차원들 위를 미끄러져 다니기(survole) 때문만은 아니다. 이 세계가 포텐셜 에네르기로서, 즉 그것의 사건들의 효과화로서 그 에네르기의 현실화들 위를 미끄러져 다니기 때문이기도 하다(이 효과화는 [위상학적이라는 점에서] 거리들을 초월하며 또 [면의] 양쪽 위에서의 연속성을 확보해주는 접촉면 또는 중성적인 표면에 따라 내부적이기도 하고 외부적이기도 하며 또 집단적이기도 하고 개체적이기도 하다).
다섯번째로 이 의미의 세계가 문제적인 것의 지위를 가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특이성들은 문제-장(un champ problematique) 안에서 분배되며, 어떤 방향도 가지지 않는 위상학적 사건들로서 이 장 안에서 발생한다. 이는 우리가 그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도 그들이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그 본성을 모르면서도 그 특이점들(목, 매듭, 교차로, 중심, ......)의 존재와 분포를 아는 그런 화학적 원소들의 경우와 어느 정도 유사하다. 이미 보았듯이, 이 사실이 '문제적인 것'과 그것이 내포하는 비결정성에 [주관적인 추측이 아니라] 충분히 객관적인 정의를 부여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인도된 특이성들의 본성, 다른 한편으로 그들의 존재와 방향 없는 배분은 객관적으로 구분되는 심급들에 의존하기 때문이다.4) Albert Lautman, Le Probleme du temps, Hermann, 1946, pp.41~42. "미분방정식 이론에 대한 기하학적 해석은 절대적으로 구분되는 다음 두 실재를 분명히 해 준다. 1. 벡터장과 이 장에 부대하는 위상학적 급변점들. 이는 예컨대 어떤 벡터도 가지지 않는 특이점ㄷ르의 면 내의 존재와도 같다. 2) 적분 곡선들. 그리고 이들이 벡터장의 특이성들에 이웃해 취하는 형태. 특이성들의 실존과 분배는 미분방정식에 의해 정의되는 벡터장에 상대적인 개념들이다. 적분 곡선들의 형태는 이 방정식의 해들에 상대적이다. 이 두 문제는 분명 상보적이다. 장의 특이성들의 본성이 그들의 이웃 관계가 그리는 곡선들의 형태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편으로 벡터들의 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적분 곡선들은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두 수학적 실재이다."/

네번째 담론*은 존재하는가
그래서 진정한 발생의 조건들이 드러난다. 분명, 의미는 선험철학의 독자적 발견이며 낡은 형이상학적 본질들을 대체해왔다(아니면 차라리 의미는 우선 그 되돌릴 수 없는 중성의 측면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부터 단절된, 명제들에 대한 경험적 논리학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다음으로는 그 발생적 생산성의 측면에 있어 형이상학으로부터 단절된 선험철학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러나 선험적 장이 어떻게 규정되어야 하는가를 아는 문제는 매우 복잡하다. 칸트의 방식에 따라 이 장에 '나'라는 인칭적 형태를, 통각의 종합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이 통일성에 ['나'라는 개인적 성격이 아니라 '의식 일반'이라는] 보편적 성격을 부여한다 할지라도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점과 관련해 사르트르의 논박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의식의 형식을 부여하는 것은 이 비인칭적 의식을 지향성과 과거 지향에 의해 정의한다 할지라도 더욱이 불가능하게 보인다. 지향성이나 과거 지향이 여전히 개체화의 중심들을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인 것을 의식으로서 규정하려는 모든 시도들의 오류는 선험적인 것을 그것이 정초하겠다고 하는 것의 이마주에 따라, 그것과의 유사성에 따라 이해하려는 데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러한 입장은 구성하는 의식에 부여되는 '시원적/본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의미 안에 자리함으로써 선험적 방법을 통해 정초하고자 했던 것 안에 미리 들어앉게 되거나, 또는 칸트에게서처럼 단순한 선험적 조건지어짐에 머물기 위해 발생이나 구성을 포기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경우 조건이 조건지어진 것에 의존하게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조건이 조건지어지는 것의 이마주를 복사하는 것이다.
선험적인 것을 시원적인 의식으로서 정의해야 한다는 이러한 요청이, 굳이 말한다면, 정당화되는 것은 사실이다. 인식의 객관적 대상들의 조건들이 인식의 조건들과 같은 것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약정 조항이 없다면, 선험철학은 대상들을 위해 자율적인 조건들 -과거의 형이상학으로부터 본질들(Essences)과 신성한 존재(Etre divin)를 이끌어낼 조건들- 을 마련해주기도 전에 모든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따라서 조건지어진 것의 이중적 계열, 즉 경험적 의식과 그 대상들의 계열은 객관성의 순수한 형태(대상=x)와 의식의 순수한 형태를 취하는, 그리고 후자[순수의식]에서 출발해 전자[순수 대상]를 구성하는 하나의 시원적인 심급 위에 기초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정당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형이상학과 선험철학에 공통적인 것은 우선 이들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이 대안 구조 -미분화된 근거, 근거-없음, 무형적인 비존재, 차이들도 성질들도 없는 심연이거나 아니면 지고하게 개별화된 존재, 강력하게 인칭화된 형상- 이다. 이 존재 또는 이 형상 바깥에 설 경우, 우리는 혼돈에 처할 수 밖에 없다. ......등등. 달리 말해, 형이상학과 선험철학은 규정가능한 특이성들을 단지 이미 지고한 자아나 상위의 나에 사로잡힌[함축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형이상학이 이 지고한 자아를 그것[자아]의 개념을 통해 무한하고 완전하게 결정되는 한 존재(un Etre)를 특성화하는 존재, 또 그렇게 함으로써 시원적 실재성을 획득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보인다. 이 존재(Etre)는 결국 필연적으로 개별화된다. 왜냐하면 이 존재는 그 어떤 실재적인 것(reel)도 결코 표현하지 않을 모든 술어나 속성을 비존재나 바닥-없음의 심연으로 던져버리며, 제한된(bornees) 실재들만을 표현하는 파생된 술어들을 수용하려는 노력을 그 피조물들에, 즉 유일한 개체들에 위임하기 때문이다.5)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뛰어난 분석은 칸트를 통해 이러한 방식으로 주어졌다. 칸트는 모든 가능성의 총체라는 관념이 어떻게 '시원적인' 술어들을 제외한 모든 술어들을 배제했는가, 그리고 그 겨로가 어떻게 한 개별적 존재(Etre)로서 완전하게 규정되는 개념을 구성하는가를 보여주었다("한 사물의 한 보편적 개념 자체가 완전하게 규정되고 한 개인의 표상으로서 알려지는 것은 바로 이 경우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것이란 이제 단지 이 지고한 개별성과 유한한 개별성들 사이에서의 사유 안에서의 소통의 형식이 될 뿐이다. 다시 말해, 사고된 보편자는 여러가지 방식에 있어 개별자에 의존한다./
다른 한 극에서, 선험철학은 개체의 무한한 분석적 본질[무한한 분석을 필요로 하는 개체라는 존재의 성격]보다는 인칭(Personne=선험적 주체)이라는 유한한 종합적 형식을 선택했다. 그래서 선험철학에 있어 이 지고한 '나'를 인간의 측면에서 슈정하는 것, 그리고 철학이 오랫동안 도취해온 인간-신의 거대한 조합체계를 실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개체가 존재(l'Etre)와 동외연적인 것과 꼭같이 '나'는 표상과 동외연적이다.
그러나 둘 중의 어느 경우든, 우리는 미분화된 근거-없음과 사로잡힌 특이성들이라는 대안적 구조에 머물게 된다. 그럴 경우 무의미와 의미는 단순한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되며, 의미 자체는 시원적인 것으로서 그리고 동시에 최초의 술어들(지고한 존재 l'Etre의 개체성의 무한한 규정들 내에서 고려되든 술어이든, 아니면 지고한 주체의 유한한 형식적 구성 내에서 고려되는 술어이든, 아니면 지고한 주체의 유한한 형식적 구성 내에서 고려되는 술어이든)과 혼동되는 것으로서 드러난다. 슈티르너(Max Stirner)의 말처럼 인간적임과 신적임은 동일한 두 술어이다. 이들이 신적인 존재에 분석적으로 속하든, 아니면 인간적인 형식에 종합적으로 결부되든, 그리고 의미가 시원적이고 서술 가능한 것으로 제기되는 한, 그것이 인간에 의해 잊혀진 신적 의미인지 아니면 신 안에서 소외된 인간적 의미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것은 언제나 예외적인 순간들이었다. 즉, 철학이 근거-없음을 말하게 했고 그 [근거-없음의] 분노, 무정형성, 맹목성의 신비한 언어를 찾았던 순간들이었다. 뵈메, 셸링, 쇼펜하우어 등. 니체는 우선 이들의 연장선상에 있으며, 쇼펜하우어의 제자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그가 근거없는 디오니소스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그를 아폴론의 신성한 개별화에만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의 인간적인 인격에도 대비시킬 때가 그렇다. 이것이 "철학에서 누가 말하는가?" 또는 철학적 담론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그러나 무형적인 바닥이나 미분화된 심연으로 하여금 그 술취한 또 분노한 목소리로 말하게 하는 위험을 무릅쓰는 경우에서조차도, 사람들은 형이상학과 선험철학이 공히 제시한 대안 구조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인칭과 개체의 바깥으로 나올 경우, 당신은 아무것도 구분해내지 못할 것이다. ......" 또한 니체의 발견 역시 다른 이유로 그렇다. 그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로부터 벗어나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들의 세계, 그가 이제 디오니소스적이라든가 또는 능력에의 의지라든가, 자유롭고 고삐 풀린 에네르기라고 부른 세계를 탐구할 때가 그렇다. 더 이상 무한한 존재의 고정된 개별성(유명한 신의 불멸성) 안에도, 또 유한한 주체의 정주적 경계선(유명한 [칸트의] 인식의 한계들) 안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노마드적 특이성들, 개체적이지도 인칭적이지도 않은, 그럼에도 특이한, 결코 미분화된 심연이 아닌 어떤 것. 한 특이성에서 다른 특이성으로 뛰어다니면서(sautant) 언제나 각 수 안에서 파편화되고 변형되는 동일한 하나의 던짐의 부분을 이루는 주사위 놀이를 실행하는 어떤 것. 의미를 생산하는 디오니소스적 기계. 그리고 의미와 무의미가 더 이상 단순한 하나의 조작 안에 있기보다는 새로운 담론 안에서 서로 같이 현존하게 되는 그러한 기계.
이 새로운 담론은 더 이상 형상의 담론이 아니며, 그렇다고 무형의 담론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순수한 무정형(l'informel pur)이다. "당신은 하나의 괴물이자 하나의 혼돈이다." 니체는 대답한다. "우리는 이런 예언을 실현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담론의 주체 -그러나 여기에 더 이상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인간이나 신이 아니며, 신의 자리에 앉은 인간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이 자유로운 특이성, 개체화의 질료들과 인칭성의 형식들에 관계없이 인간들, 식물들, 동물들에 돌아다니는 익명적이고 노마드적인 특이성이다. 즉, 초인은 다른 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보다 우월한 유형을 말하고자 할 뿐이다. 철학을 새롭게 할 그리고 마침내 의미를 술어로서, 성질로서가 아니라 사건으로서 다룰 낯선 담론.
그 독창적인 발견에 있어 니체는 마치 꿈에서처럼 대지를 짓이길, 춤출, 그리고 바닥의 괴물들과 하늘의 형상들로 남은 것을 표면으로 가져올 수단을 힐끗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보다 심오한, 보다 거대한, 또한 보다 위험한 기획에 사로잡힌 것은 사실이다. 그의 발견에 있어, 니체는 바닥을 발견할, 바닥에 있어 새로운 밝은 눈을 사용할, 바닥 안에서 수많은 목소리들을 구분해낼, 이 모든 목소리들로 하여금 말하게 할 새로운 수다능ㄹ 보았다. 그가 극한적으로 해석했고 살게 한 이 깊이에 사로잡히면서까지. 그는 연약한 표면 위에 머물고자 하지는 않았지만, 신들과 인간들을 가로질러 표면의 설계도를 만들었다. 그가 새롭게 한, 그 다시 파낸 바닥-없음을 다시 얻는 것, 니체가 나름의 방식으로 사라진 것은 여기에서였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가짜 사라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병과 죽음은 이중 인과 -물체들, 사태들, 혼합물들의 인과, 그리고 비물체적 표면의 조직화나 탈조직화의 상태를 나타내는 준원인의 인과- 를 따르는 한에서의 사건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발병했고, 아마도 매독에 의한 물체적 혼합 즉 일반 마비에 의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든 저작을 자극하고 또 삶을 함께 자극한(co-inspirant) 준원인과 관련해서, 이 사건이 따라간 길, 이 모든 것은 일반 마비, 그리고 시각적 편두통과 고통스러운 구토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들에 하나의 새로운 인과를, 즉 이들의 물체적 효과화와 무관한 영원한 진리를, 물체 내의 혼합물 대신 하나의 저작을 주기 위해서라면 몰라도, 작품과 병의 관계라는 문제는 이 이중 인과의 형태 아래에서만 주어질 수 있다.

계열 16 - 정적 발생(1): 존재론

개체의 발생: 라이프니츠
객관적(reel) 선험의 장은 이 표면의 위상학에 의해, 이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노마드적 특이성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개체는 어떻게 이 장으로부터 개별화됨으로써 발생의 첫 단계를 이루는 것일까? 개체는 [그것이 속해 있는] 한 세계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세계인가? 이미 보았듯이, 일반적인 규칙에 있어 하나의 특이성은 두 가지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 즉, 한편으로는 그 실존 또는 배분에 있어,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본성에 있어서이다(이 본성에 따라 특이성은 보통점들로 이루어진 선분 위에서 일정한 방향으로 확장된다/뻗어나간다).*첫번째 것은 특이성들의 존재와 그 종류에 대한 파악이고(가령 야구 경기에는 어떤 특이성들이 존재하는가), 두번째 것은 이 특이성들이 계열화되는 방식에 대한 파악이다. 특이점들은 보통점들(les points ordinaires)과 계열화ㅗ딘다. 가령 타자가 홈런을 치는 것은 "타자가 공을 치다", "공이 날아가다", "공이 펜스를 넘어가다"라는 세 특이점으로 이루어지며, 이 특이점들 사이를 수많은 보통점들이 메운다(연속성의 원리에 따라). 다시 말해 계열의 점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계속 뻗어가고/이어져가고(se prolongent), 일정한 점에서 특이점을 만나는 것이다.* 이 두번째 측면은 이미 일정한 고정(fixation)을 [계열화를], 특이성들의 효과화의 시작을 나타낸다. 하나의 특이점은 보통점들의 계열 위에서 해석적으로 뻗어나가*여기에서 '해석적으로'(analytiquement)는 '해석학적 방식으로'를 뜻한다. 즉, 연속성, 무한, 극한(limite), 계열, 이웃관계 등등과 같은 개념에 따라 이루어짐을 뜻한다. 고대 철학이 유클레이데스의 기하학과 나란히 가고, 근대 철학이 해석학과 나란히 가듯이, 현대 철학은 위상학과 나란히 간다. 그리고 위상학은 해석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후기 구조주의를 이해하는 데 해석학과 위상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다른 특이성과 이웃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하나의 세계는 계열들이 수렴하는 한에서 구성된다(하나의 '다른' 세계는 만들어진 계열들이 발산하게 되는 그러한 점들의 '이웃관계'로부터 시작할 것이다).**라이프니츠에서 하나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수렴/발산의 논리와 연계된다(발산의 개념은 현대에 이르러 '갈라치기/bifurcation'로 개념화된다). 가령 히브리 신화에서의 '실락원' 사건은 아담이라는 모나드의 계열과 하와라는 모나드의 계열이 수렴할 때에만 성립한다. 하와가 무화과를 따먹었다 해도 아담이 하와의 권유를 물리쳤다면 그 지점에서 이웃 관계는 달라지며 우리가 아는 이 세계가 아니라 어떤 다른 세계가 성립한다.** 하나의 세계는 이미 수렴에 의해 [논리적으로] 선별된 특이성들의 체계를 내포한다.***특이성들 하나하나는 사건들이고, 이 사건들이 라이프니츠에서는 '빈위들'(attributs)이다. 하나의 세계는 이 빈위들로 차 있고 이 차 있음을 '내포하다'(envelopper)라는 말로 개념화한다. 후에 들뢰즈가 말하는 '주름'(pli) 개념과도 상통한다.*** 그리고 이 세계 내에서, 체계의 얼마간의 특이성을 선별하고 내포하는, 이 특이성들을 그들 자신의 신체가 구현하는 특이성들과 조합하는, 또 그들[특이성들]을 보통점들의 선분들 위에 펼치는, 나아가 그들을 내부와 외부를 접촉하게 만드는 막들 위에서 다시 형성시킬 수 있는 개체들이 구성된다.****라이프니츠에서는 세계라는 것이 먼저 존재하고 그 안에 모나드들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계 자체가 모나드들의 집합이며, 그 이전에 빈위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라이프니츠의 다음 지적은 옳다. 각각의 모나드들은 다른 신체들과 자신의 신체 사이에 송립하는 관계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표현하며, 자기 신체의 부분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에 따라 이 관계 자체를 표현한다.*각각의 모나드는 그 안에 자신이 겪을 사건들/빈위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각 사건/빈위는 인과 관계에 의해 세계의 다른 모든 사건/빈위들과 연계되어 있다(물론 각 빈위는 각 모나드들 안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인과 관계는 이차적이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하나의 모나드는 세계를 '표현한다'고 말한다. 모나드가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곧 특이성들이 한 개체 내에 구현됨을 말하며, 표면 효과로서 드러남을 뜻한다.* 그래서 개체는 늘 수렴의 원환으로서의 세계 안에 존재하며, 하나의 세계는 그를 점유하거나 채우는 개체들 주위에서만 형성되고 사고될 수 있다.
세계 자체가 특이성들의 포텐셜을 다시 형성시킬 수 있는 표면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답을 받는다. 하나의 세계가 수렴의 한 질서 안에서 무한할 수는 있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유한한 에네르기를 가져야 하며 이 질서는 제한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엔트로피의 문제를 상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의 특이성이 보통점들의 한 선분 위에서 뻗어가는 것과 한 포텐셜 에네르기가 현실화되고 가장 낮은 층위로 하락하는 것[엔트로피 법칙]은 동일한 방식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재형성의 능력은 세계 내의 개체들에게만 그리고 일정한 시간대에서만 -이 개체들이 현존하는 시간대에서만- 허용된다. 이 시간에 의해 주변 세계의 과거와 미래는 역으로 고정된 불가역적인 방향을 부여받는다.
개체-세계-간개체성**'간개체성'(interindividualite)이란 모나드들 서로간의 관계를 말한다. 모나드들은 서로를 표현한다(s'entr'exprimer).**이라는 복합체가 정적 발생의 관점에서 효과화의 최초의 층위를 정의한다. 이 최초의 층위에서, 특이성들은 세계 안에서 그리고 이 세계의 부분을 형성하는 개체들 안에서 동시에 효과화된다. 스스로를 효과화한다는 것 또는 효과화된다는 것은 보통점들의 계열 위로 뻗어가는 것, 수렴의 규칙에 따라 선별되는 것, 한 신체 안에 구현되고 그 신체의 상태가 되는 것, 새로운 효과화들과 제한된 새로운 뻗어감들을 위해 국소적으로(localement) 재형성되는 것이다. 이 특성들 중 그 어느것도 특이성들 자체에 속하지는 않으며, 다만 개별화된 세계에 그리고 특이성들을 내포하는 현세계의 개체들에만 속한다. 효과화가 언제나 집단적인 동시에 개별적, 내부적인 동시에 외부적, ......인 것은 이 때문이다.

한 세계의 공가능성 또는 계열들 수렴(연속성)의 조건
효과화된다는 것은 또한 표현되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각각의 모나드는 세계를 표현한다는 유명한 테제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나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 안에 술어들이 내재해 있다는 것으로 이 태제를 이해하는 것은 충분한 이해가 아니다. 왜냐하면 표현된 세계가 그것을 표현하는 모나드들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모나드들 내에 내속하는 술어들의 계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각각의 모나드들은 그 안에 그것이 겪을 사건들, 즉 빈위들(언어로 표현될 경우에는 술어들)을 담고 있다. 이 술어들의 집합을 'notion'이라고 부르며, 이 'notion' 안에 술어들이 들어 있는 양태를 내속한다(inherent)고 말한다.* 그렇지만 신이 모나드들을 창조했다기보다는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 그리고 표현된 것[효과화되는 것, 계열화된 특이점들]이 그것의 표현[모나드들]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표현된 것[특이점들, 순수 사건들]은 존속/재속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1) 이 테마는 아르노에게 보낸 편지들에 줄곧 나타난다. 정확히 말해, 신은 아담이라는 죄인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짓게 되는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표현된 세계는 변별적 관계들 및 인접한 특이성들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정확히 각 특이성에 의존하는 계열들이 다른 특이성들에 의존하는 계열들에 수렴하는 한에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세계의 한 종합 규칙으로서 '공가능성'(compossibilite)을 정의하는 것은 바로 이 수렴이다. 계열들이 발산하는 그곳에서, 처음의 세계와 공가능하지 않은 다른 세계[가능 세계]가 시작된다. 따라서 공가능성이라고 하는 놀라운 개념은 특이성들의 연속체(continuum)로서, 또 계열들의 수렴을 비물질적인 규준으로서 가지는 연속성으로서 정의된다. 또한, 공가능성의 개념은 모순의 개념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차라리 모순이 공가능성의 개념으로부터 일정한 방식으로 파생되는 것이다.
각각의 세계에서, 개별적인 모나드들은 이 세계의 모든 특이성들 -일종의 무한- 을 표현한다. 일종의 웅얼거림 또는 일종의 소실에서처럼*특이성들 사이의 보통점들은 극히 미세한 차이들로 형성된다. 더 정확히 말해, 실수의 연속성에서 볼 수 있듯이 바로 옆의 점을 찾을 수 없는 연속성을 형성한다. 이 미세한 차이들의 연속을 웅얼거림, 또는 차이의 소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각 모나드는 일련의 특이성들만을, 즉 각 모나드 형성의 중심이 되며 또 각 모나드의신체와 조합되는 특이성들만을 '명료하게' 내포한다/표현한다.**하나의 모나드에는 무한에 가까운 특이점들과 보통점들이 내속되어 있다. 그러나 모나드가 이 모든 빈위들을 모두 명료하게 표상하지는 못한다. 마치 1, 2, 3, ......등은 우리에게 명료하게 표상되지만, 무리수들은 명료하게 표상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특이성들의 연속체는 가변적이고 상보적인 명료함의 정도에 있어 그것을 내포하는 개체들로부터 분명하게 구분된다. 다시 말해, 특이성들은 전개체적이다. 표현된 세계가 개체들 안에만 실존하며, 개체 안에서 술어로서 실존하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사실 그것[표현된 세계]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개체들의 구성을 주도하는 특이성들 안에서 사건으로서 또는 동사로서 존속한다. 더 이상 죄인 아담이 아니라 아담이 죄를 짓는 세계......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술어들의 내재성을 특권화하는 것은 자의적이다. 왜냐하면 표현하는 모나드 내의 술어들의 내재성은 우선 표현된 세계의 공가능성을 전제하며, 이 표현된 세계 또한 수렴과 발산의 규칙들에 따른 순수 특이성들의 분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규칙들은 서술 작용과 진리의 논리학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와 사건의 논리학에 속한다. 라이프니츠는 발생의 이 첫번째 단계 -내포의 중심으로서, 세계 내에서 그리고 그의 신체 위에서 특이성들을 내포하는 것으로서 형성된 개체의 발생- 를 멀리 밀고 나아갔다.
효과화의 첫번째 층위는 개별화된 세계들과 이 각각의 세계 내에서 살아가는 개별적인 자아즐들 상관적으로 생산한다. 개체들은 그들이 내포하는 특이성들의 이웃관계를 통해 구성된다. 그리고 개체들은 이 특이성들에 근거하는 계열들의 수렴의 원환들로서 세계를 표현한다. 표현된 것이 그 표현 바깥에서는, 즉 표현하는 개체들 바깥에서는 실존하지 않는 한에서, 세계는 곧 주체에 '귀속하는 것'(appartenance0이며, 사건은 곧 술어 -한 주어의 분석적[주어를 분석하면 나오는] 술어- 가 된다. '푸르러지다'(verdoyer)는 하나의 특이성-사건을 가리키며, 이 특이성-사건의 이웃 관계를 통해 나무가 구성된다. 또는, '죄를 짓다'(pecher)는 하나의 특이성-사건을 가리키며, 이 특이성-사건의 이웃 관계를 통해 아담이 구성된다. 그러나 '푸름'(etre vert), '죄인임'(etre pecheur)은 이제 구성된 주어들(나무와 아담)의 분석적 술어들이다.*특이성-사건은 곧 순수 사건이며, 분석적 술어들은 모나드 안에 내속된 사건들, 즉 빈위들이다.* 모든 개개의 모나드들이 그들의 세계의 총체를 표현하듯이(물론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은 총체의 선별된 한 부분일 뿐이지만), 그들의 신체는 명료함과 애매함의 지대와 더불어 변하는 혼합물들, 덩어리들, 연합들을 형성한다. 관계들이 혼합물들의 분석적 술어들이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아담이 무화과를 먹었다).**라이프니츠에서는 관계란 두 모나드들 간에 우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모나드들 안에 내포되어 있는 빈위(attribut)이다. 즉, 아담이라는 모나드들 안에 "무화과를 먹다"라는 특이성이, 무화과 안에는 "아담에게 먹히다"라는 특이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이 빈위가 현실화되려면 아담의 신체와 무화과의 신체가 접촉해야 한다. 때문에 이 관계는 아담과 무화과의 신체와 관련된다.**
그러나 더욱이, 라이프니츠 이론의 몇몇 측면들에 반해, 술어들의 분석적 질서는 논리적 위계도 일반성의 특성도 없는 공존이나 계기의 질서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하나의 술어가 개별적 주어에 붙을 때, 그것은 어떤 정도의 일반성도 동반하지(jouit de) 않는다. 하나의 색을 가짐은 녹색임보다 일반적이지 않으며, 동물임은 이성적임보다 일반적이지 않다.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일반성들은 하나의 술어가 명제 안에서 다른 술어에 대해 주어의 역할을 하도록 규정되는 순간부터만 등장할 것이다. 술어들이 개체들에 관련되는 한에서, 그들에게서 그들의 분석적 특성과 일치하는 동등한 직접성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색을 가지는 것이 녹색임보다 더 이상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녹색인 것이 이 색일 뿐이기 때문이며, 또 개별적 주어에 관련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의 이 녹색이기 때문이다. 이 장미는 이 장미의 붉음을 가지지 않고서는 붉지 않다. 이 붉음은 이 붉음의 색을 가지지 않고서는 색이 아니다. 우리는 술어를 결정되지 않은 것으로 놓아둘 수 있지만, 이 때문에 그것[술어]의 일반성이라는 규정을 얻는 것은 아니다.
달리 말해, 개념들과 매개항들의 어떤 질서도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공존과 계기에 있어 혼합물의 질서만이 존재할 뿐이다.*다시 말해 특이성은 기호 작용 이전의 것이다. 특이성들이 술어로 되었을 때, 비로소 기호 작용이 성립하며, 기호 작용을 통해 개별성과 일반성, 종과 유들, 속성들과 집합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동물임과 이성적임, 녹색임과 색임은 동등하게 직접적인 두 술어이며, 이 술어들은 혼합물을 개별적 주체의 신체 내로 번역해 옮긴다(이 개별적 신체에 하나의 술어는 다른 하나 못지않게 직접적으로 서술된다). 이성은, 스토아 학파가 말했듯이, 한 동물 신체 내로 확장되어 그를 관통하는 물체이다. 색은 다른 물체를 흡수하거나 반사하는 빛나는 물체이다. 분석적 술어들은 종과 유들, 속성들과 집합들에 대한 어떤 논리적 검토도 함축하지 않으며, 다만 그들을 물체의 혼합물들 안에서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현실적인 물리적 다양서오가 구조만을 함축한다. 우리가 결국 직접적 표상들로서의 직관들 및 실존의 분석적 술어들의 영역과 혼합물들이나 덩어리들에 대한 서술들의 영역을 동일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최초의 효과화의 영역 위에서, 두번째 층위가 정초되고 발전된다. 우리는 후설이 데카르트의 제5성찰에 대해 제기했던 물음 -자아(l'Ego)안에서 모나드를, 이에 귀속하는 것들과 술어들을 초월하는(depasse) 것은 무엇인가? 더 정확히는, 세계에 "구성의 질서에 있어 이차적인, 첫번째 층위의 '내재적 초월'과 구분되는,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인 초월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에 다시 맞닥뜨린다. 그러나 여기에서 현상학적 해결책은 진정한 해결ㄹ책이 아니다. 자아 역시 개별적 모나드들이 구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나드, 이 살아 있는 개체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수렴들의 연속체 또는 원환으로서 정의되었다. 그러나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자아는 공가능하지 않은 세계들 안에서, 발산하는 계열들을 가로질러 어떤 것이 동일화될 때 나타난다.*요컨대 주체는 자족적인 실체가 아니다. 주체 이전에 서로 발산하는, 불공가능한 수많은 계열들이 존재하며, 이 계열들의 일정한 특이점들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계열이 일정하게 고정되어 가면서 자기 동일성을 형성할 때, 그것이 주체이다. 들뢰즈가 주체를 '연언적 종합'을 통해 정의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안티오이디푸스]의 1장, 3절을 볼 것).* 그래서 주체는 세계 -그 말의 새로운 의미에서의 세계(Welt)- 와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살아 있는 개체는 세계 안에 그리고 그 자신 안의 세계(Umwelt)에 존재해온 것이다.**주체는 주체이기 이전에 개체이다. 그리고 개체는 객관적 선험의 장 안에서 형성된다. 개체는 객관적 선험을 구성하는 특이성들의 수렴에 의해 형성되며, 이 개체가 주체가 되는 것은 그렇게 형성된 개체들의 세계(Umwelt)를 이루는 계열들을 가로지르면서 또 다른 독자적 개체성을 형성할 때이다. 철수는 특이성들의 일정한 계열화를 통해 형성된다. 그리고 철수는 이렇게 형성된 세계를 가로지르면서, 즉 또 하나의 세계(Welt)를 형성함으로써 주체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선분들이 수렴하거나 일치하는 연속체의 요소 내에서 동일화의 가장 높은 종합을 실행한 후설을 따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첫번째 층위를 일탈하지 않는다. 하나의 대상=x가 나타나는 것은 발산하는 계열들 사이, 공가능하지 않는 세계들 사이에서 어떤 것이 동일화될 때뿐이기 때문이다(이 대상=x는 그것을 사고하는 자아가 현세계의 개체들을 초월하는 것과 동시에 개별화된 세계들을 초월하며, 스스로를 정초하는 주체라는 새로운 가치에 마주 서 세계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한다).

사건에서 술어로의 변환
이러한 발생은 어떻게 실행되는가? 우리는 이 물음에 관련해 후설의 무거운 조작들이 아니라 라이프니츠의 극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의 특이성이 전적으로 객관적인 미규정의 영역, 그 노마드적 분포의 열린 공간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다시 말해, 결국 문제는 이 상위적이고 적극적인[잠재적인] 미규정성을 구성하는 조건들에 관련되어야 하며, 사건은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 안에서 다시 결합하듯이 끊임없이 분할되어야 하며, 특이점들은 모든 수들을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던짐(우발점)으로, 그리고 던짐을 수들의 복수성으로 만드는 소통하는 동적 형태들(figures mobiles)에 따라 분배되어야 한다. 그런데, 설사 라이프니츠가 이 놀이의 자유로운 원리에 도달하지는 않았다 해도(왜냐하면 그는 이 원리에 충분한 우연을 불어넣을[insuffler] 수 없었고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았으며, 발산을 긍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효과화의 수준에서 그 모든 결과들을 모았다. 그는 말한다. 하나의 문제는 필연적으로 '애매한 기호들'이나 우발점들을, 즉 그에 일련의 상이한 해들이 상응하는 특이성들의 다양한 배분들을 포함하는 조건들을 가진다. 그래서 원추 단면들의 방정식은 그 애매한 기호에 의해 (문제에 상응하면서 해들의 발생을 결정하는 그만큼의 경우를 형성하는) 다양한 사건들 -원, 타원, 쌍곡선, 포물선, 직선-로 분할되는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을 표현한다. 그래서 공가능하지 않은 세계들은 그들의 불공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객관적으로 공통적인 어떤 것, 즉 발생적 요소의 애매한 기호를 나타내는 것을 포함한다고 생각해야 한다(이 발생적 요소와 관련해 다양한 세계가 하나의 동일한 문제에 대한 상이한 해들 -하나의 던짐에 의한 모든 수들, 결과들- 로서 나타난다). 그래서 이 세계들 안에는 예컨대 객관적으로 미규정적인, 즉 상이한 세계들 내에서 상이한 방식으로 조합되고 완성되는 특이성들- 최초의 인간임, 정원 안에 살고 있음, 자신의 여인을 태어나게 함 등등- 에 의해서만 적극적으로 정의되는 아담이 존재한다.4) 그래서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테마에 따라 세 종류의 선별을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수렴에 의해 세계를 정의하고, 다른 하나는 이 세계 안에서 완전한 개체들을 정의하며, 마지막의 것은 다양한 세계들과 상응하는 개체들에 공통된 불완전한, 아니면 차라리 애매한 요소들을 정의한다. 이 세번째 선멸, 또는 약간의 술어들(최초의 인간임 등)에 의해 구성된 '모호한'(vague) (상이한 세계들 내에서 상이하게 완성되는) 아담에 관해서는 다음을 보라. Leibniz, "Remarques sur la lettre de M. Arnauld," ed. par Janet, I, pp.533 sq. 이 텍스트에서, 모호한 아담이 자체로서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 그는 우리의 유한한 오성에 관련해서만 가치를 지닌다는 것, 그의 술어들은 일반성들에 불과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역으로, [변신론]의 유명한 부분(ss ss 414~416)에서, 다양한 세계 내의 상이한 섹스투스들은 특이성 개념의 애매한(ambigue) 본성에, 그리고 미분법의 관점에 있어 문제의 범주에 근거하는 매우 특수한 객관적 통일성을 지닌다. 라이프니츠는 원추 단면들의 예를 취함으로써 일찍부터 특이점들과 관련해 '애매한 기호들'의 이론을 구축했다./ 공가능하지 않은 세계들은 같은 이야기의 변양태들이 된다. 예컨대 섹스투스는 웅변을 듣는다......, 또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팡은 하나의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누군지 모를 한 사람이 그의 문을 두드린다...... 가능한 수많은 결말이 있다. 팡이 침입자를 죽일 수 있으며, 침입자가 팡을 죽일 수 있다. 둘 모두 살 수도 있고, 둘 모두 죽을 수도 있다...... 등. 모든 결말(denouements)이 생산되며, 각각은 다른 가지치기들(bifurcations)의 출발점이다."

개체에서 인칭으로
우리는 더 이상 고정된 특이점들에 의해 구성되고, 또 수렴하는 계열들로 조직된 개별화된 세계 앞에 서 있는 것도, 그렇다고 이 세계를 표현하는 규정된 개체들 앞에 서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제 특이점들의 우발점 앞에, 특이성들의 애매한 기호 앞에, 아니면 차라리 이 기호를 표상할 뿐 아니라 이 세계들 중 여러 개에 대해 그리고 결국에는 그 모두에 대해 (이들의 발산과 그들에 살고 있는 개체들을 넘어) 유효한 것 앞에 서 있다. 그래서 여러 세계에 공통된 '모호한 아담'이, 즉 방랑자, 노마드, 아담=x가 존재한다. 하나의 섹스투스=x, 팡=x. 결국, 모든 세계들에 공통된 어떤 것=x, 모든 대상=x는 '인칭들'이다. 그들은 술어들에 의해 정의되지만, 이 술어들은 더 이상 한 세계 안에서 규정되어 있으며 이 개체들의 서술을 시행하는 개체들의 분석적 술어들이 아니다. 이들은 인칭들을 종합적으로 정의하는 술어들이며, 그들에게 변수들이나 가능성들로서의 상이한 세계들과 개별성들을 여는 술어들이다. 그래서 아담에게서 "최초의 인간임과 동산에서 삶", 팡에게서 "비밀을 지니고 있음과 침입자에 의해 방해 받음"이 존재하게 된다.
절대적으로 공통된, 그리고 그 모든 세계를 변수들로 취해서 가지는 어떤 대상에 관해 말한다면, 그것은 술어들로서 최초의 가능한 것들(possibles)이나 범주들을 가진다. 각각의 세계가 계열들 안에서 서술된 개체들의 분석적 술어인 것은 아니다. 선언적 종합들에 관련해 정의된 인칭들의 종합적 술어들이 바로 공가능하지 않은 세계들인 것이다. 한 인칭의 가능성들을 효과화하는 변수들의 경우, 우리는 이들을 필연적으로 집합들과 속성들을 의미하는, 따라서 범주적 바닥(fond) 위에서의 연속된 특화(specification) 내에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일반성에 의해 본질적으로 영향 받는 개념들로서 다루어야 한다. 결국, 에덴 동산은 붉은 장미를 포함할 수 잇지만, 다른 세계들이나 다른 동산들 안에 붉지 않은 장미들, 장미가 아닌 꽃들이 존재한다. 변수들은 집합들과 속성들이다. 이들은 첫번째 층위의 개별적 복합체들(agregats)과 완전히 구분된다. 즉, 속성들과 집합들은 인칭의 질서 안에서 정초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칭들 자체는 우선 하나의 유일한 구성원만을 포함하는 집합들이며, 그들의 술어들은 하나의 상항만을 포함하는 속성들이다. 각 인칭은 그 집합의 유일한 구성원이지만, 이는 그것에 다시 귀속되는 세계들, 가능성들, 그리고 개체들로 구성되는 한 집합이다. 복수적인 것들로서의 집합들과 변항들로서의 속성들은 유일한 구성원만을 포함하는 이 집합들과 유일한 하나의 상항만을 포함하는 이 속성들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역의 총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인칭들, 2) 이들이 구성하는 유일한 구성원을 가진 집합들과 이들에게 속하는 하나의 상항을 가진 속성들, 3) 외연적(extensives) 집합들과 가변적 특성들, 즉 그로부터 유도되는 일반적 개념들, 우리가 개념과 자아(l'Ego) 사이의 근본적인 연계를 해석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이다. 보편적 자아(l'Ego)는, 다른 자아들(ego)이 다양한 세계들에 공통되는 어떤 것=x에 상응하는 인칭들이듯이, 정확히 모든 세계에 공통적인 어떤 것=x에 상응하는 인칭이다.

인칭들, 속성들, 집합들
우리는 이 연역 전체의 세부를 추적할 수는 없다. 단지 수동적 발생(la genese passive)의 두 단계를 고정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선, 의미는 그것을 구성하는 특이성-사건들에서 출발해 첫번째 복합체 -이 안에서 의미가 효과화된다- 를 낳는다. 즉, 수렴의 원환들 안에서 특이성을 조직하는 'Umwelt', 이 세계들, 물체의 상태들, 자신들의 혼합물들이나 집적체들을 표현하는 개체들, 이 상태들을 서술하는 분석적 술어들을 낳는다. 다음으로 이 첫번째 복합체와 매우 다른, 그러나 이것 위에서 구성되는 두번째 복함체가 등장한다. 즉, 여러 세계들이나 모든 세계들에 공통되는 'Welt', 이 '공통적인 어떤 것'을 정의하는 인칭들, 이 인칭들, 집합들, 그리고 이로부터 유래하는 술어들을 정의하는 종합적 술어들이 등장한다.
발생의 첫번째 단계가 의미의 연산(operation)이듯이, 두번째 단계는 의미와 늘 함께 현존하는 무의미(우발점 또는 양의적인 기호)의 연산이다. 두 단계 및 이들의 구분이 필연적으로 정초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첫번째 단계에서 '양식/일방향' 또는 차이들의 이미 고정된, 정착한 조직화의 원리가 형성되는 것을, 그리고 두번째 단계에서 동일화 기능으로서의 '상식/공통 감각'의 원리가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이 생산된 원리들을 선험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즉 이 원리들의 근원인 의미와 무의미를 그들[생산된 원리들]의 이마주에 따라 생각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이것은 다음을 잘 설명해준다. 즉, 라이프니츠가 특이점들과 놀이에 관한 이론을 그렇게 멀리 밀고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다만 양식/일방향에 의해 이미 형성된 영역들 내에서, 또 구성된 개체들에 근접해서만 진정으로 비물체적 놀이의 분배 규칙들을 제기했으며 전개체적인 것을 생각한 것이다(라이프니츠가 '이미 수립된 감정들'을 전복시키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철학에 새로운 개념들의 창조라는 역할을 부여했을 때의 초라한 모습을 상기하라).
또 후설 역시 그의 구성 이론에서 상식/공통 감각을 완성된 형태로 전제했으며, 선험적인 것을 인칭(Personne) 또는 자아(Ego)로서 생각했으며, 생산된 동일시의 형식으로서의 x와 이와 전혀 다른 심급 x(즉, 탈물질적 놀이와 비인칭적인 선험적 장을 활성화하는 생산자로서의 무의미)를 구분하지 않았다.6) 그렇지만 후설이 흥미롭게도 자아로서 규정된 선험적 장 내의 한 의지적 결단(fiat) 또는 한 시원적인 동점(point mobile)을 암시했다는 것을 기억하자./
사실, 인칭 -이는 곧 [조이스적 의미에서의] 율리시즈이다- 은 엄밀하게 말해 그 누구도 아니다(la personne, elle n'est personne). 그것은 이 비인칭적인 선험적 장으로부터 생산되는 형식이다. 그리고 개체는 언제나, 아담 몸의 한 구석에서 이브가 태어났듯이, 전개체적인 선험적 장에서 출발해 일상적인 것들의 선 위로 뻗은 특이성으로부터 태어난 무엇이다. 개체와 인칭,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 감각은 수동적 발생에 의해 생산되지만, 이는 그들과 유사하지 않은, 또 이미 위에서 그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선험적 놀이를 본 바 있는 의미와 무의미로부터 출발해서이다. 개체와 인칭, 양식/일방향과 상식/공통 감각은 수동적 발생에 의해 생산되지만, 이는 그들과 유사하지 않은, 또 이미 위에서 그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선험적 놀이를 본 바 있는 의미와 무의미로부터 출발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양식/일방향, 상식/공통 감각은 이들을 생산하는 원리에 의해 침식당하며, 역설에 의해 내부로부터 전복당한다. 루이스 캐럴의 저작에서, 앨리스는 차라리 개체와도 같다. 즉 그녀가 뛰어든 세계에서 출발해 표면으로 다시 올라옴으로써 의미를 발견하고 이미 무의미를 예감한, 그리고 그 표면 안에 내포되고(s'enveloppe) 그에 혼합물들의 단단한 법칙을 부과하는 모나드와도 같다. 실비와 브루노는 차라리 '모호한' 인칭들과도 같다. 즉 다양한 세계들 -인간의 세계들과 요정의 세계들- 에 공통되는 '무엇'에서 출발해 무의미를, 그리고 의미에서의 무의미의 현존을 발견하는 존재와도 같다.

계열 17 - 정적 발생(2): 논리학

명제 차원들로의 이행
개체들은 무한한 분석 명제들과 관련된다. 개체들은 그들이 표현하는 것 안에서 무한하지만, 그들의 명료한 표현에 있어, 그들의 물체적 표현의 지대에 있어 유한하다. 인칭들은 그들의 정의에 있어 일정하지만, 그들의 적용에 있어 일정하지 않다. 개체들과 인칭들은 그들 자체 존재론적 명제들이다. 인칭들은 개체들 위에서 정초되지만, 역으로 개체들은 인칭에 의해 정초된다.
그렇지만 존재론적 발생의 세번째 요소, 즉 이번에는 인칭들에 의존하는 여러 집합들과 가변적 속성들은 그 자체 존재론적인 세번째 명제 안에 구현되지 않는다. 역으로 이 요소는 우리를 명제의 다른 질서로 나아가게 하며, 논리적 명제 일반의 조건 도는 가능성의 형식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 조건에 관련해 그리고 그 조건과 동시에, 개체들과 인칭들은 이제 더 이상 존재론적 명제들의 역할이 아니라 가능성을 효과화하는, 또 논리적 명제 안에서, 조건지어진 것의 실존에 필수적인 관계들 -개체와의 관계인 지시 작용적 관계(세계, 사태, 복합체, 개별적 물체들), 인칭적인 것과의 관계로서의 현시 작용의 관계, 또 기호 작용의 관계를 정의하는 가능성의 형식- 을 규정하는 물질적 심급들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물음의 복잡성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논리적 명제의 질서에서 최초의 것은 무엇인가? 기호 작용이 가능성의 조건 또는 형식으로서 최초의 것이라 해도, 그것은 그것을 정의하는 복수적 집합들과 가변적 속성들이 존재론적 질서에 있어 인칭에 기반하는 한 현시 작용에 의존해야 하고, 현시 작용은 인칭이 다시 개체에 기반하는 한에서 지시 작용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의미와 명제
물론, 논리학적 발생에서 존재론적 발생으로 가는 과정에 평행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차라리 각종 탈구들과 혼신을 포함하는 관계가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 따라서 개체와 지시 작용, 인칭과 현시 작용, 복수적 집합들이나 가변적 속성들과 기호작용을 상응시키는 것은 너무 단순하다. 지시 작용에 입각한 관계가 개체화의 다양한 측면들에 따르는 세계 내에서만 수립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시 작용은 연속성을 넘어 인칭의 현시적 질서에 의존하는 하나의 동일성의 위치를 요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에서 지시 작용은 현시 작용을 전제한다고 말함으로써 번역했던 것이다. 역으로, 인칭이 명제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거나 표현한다면, 그것은 개체들, 그리고 물체/사물들의 상태들에 독립해서가 아니다. 이들은 단지 지시되는 데 그치지 않고, 인칭을 구성하는 욕구, 믿음, 또는 계획과 관련해 그만큼의 경우와 가능성들을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기호 작용은 인칭에 근거해 상식/공통 감각이 형성되듯이 개체화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양식/일방향[특정한 계열화]의 형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기호 작용은, 전제들을 긍정하는 능력에 있어서나 결론을 분리하는 능력에 있어서나, 지시 작용과 현시 작용의 놀이를 전적으로 함축한다.
따라서 이미 [계열 3에서] 보듯이 하나의 극히 복잡한 구조가 존재하며, 이 구조에 따라 논리적 명제 일반의 세 관계는 상대적인 자리를 점한다. 이 구조 전체는 언어의 제3의 배치를 형성한다. 이 구조는 존재론적이고 논리학적인 발생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에, 스스로 (매우 상이하며 전혀 달리 배분되는) 이차적 조직화를 구성하는 것에 의존하듯이 의미에 의존한다(그래서 두 x -순수 의미 안에서 그 고유한 동일성을 상실하는 무형의 역설적 요소인 x와 상시/공통 감각 내에서 생산된 동일성의 형태만을 특성화하는 어떤 대상의 x- 의 배분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제3의 배치의 복잡한 구조를 생각할 때(이 구조 내에서 명제의 각 관계는 일종의 순환 관계를 통해 다른 명제들에 의존해야 한다), 우리는 이 [구조의] 부분들 전체 또는 그 각각이, 이 상보성을 상실할 경우,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단지 논리적 명제의 회로가 (마치 고리를 자를 때처럼) 달리 조직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언제라도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의미 그 자체가 연약한 성격을 띰으로써(이 연약함은 무의미 안에서 그것[의미]를 뒤흔든다) 논리적 명제의 관계들이 모든 척도를 상실하고 기호, 현시, 지시 작용이 이제 기괴한 물체의 맥동만을 내포하는 바닥-없음(sans-fond)의 미분화된 심연 안으로 붕괴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명제의 제3의 배치, 나아가 의미의 이차적인 조직화를 넘어, 우리는 모든 언어가 퇴화하는 하나의 일차적인 공포스러운 질서를 예감한다.
우발점들과 특이점들, 문제들과 물음들, 계열들과 자리옮김의 조직화 안에서, 의미는 이중의 의미에서 발생적이다[무엇인가를 발생시킨다]. 다시 말해, 의미는 그 규정된 차원들(지시, 현시, 기호 작용)과 더불어 논리적 명제를 낳을 뿐만 아니라 우선 그들 자체 존재론적 명제들로서 생산된 이 명제의 객관적 상관항들(지시된 것, 현시된 것, 기호화된 것)을 낳는다. 발생의 두 측면 사이에서의 탈구 또는 혼신은 하나의 현상을 강조의 현상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예컨대 하나의 지시된 것은 고려된 논리적 명제에 상응하지 않는 하나의 존재론적 명제 내에 제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류란 매우 인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 개념은 완성된 것으로 그리고 고립된 것으로 전제되는 명제들의 진리에 대해서만 성립하기 때문이다.
발생적 요소는 진위 개념이 명제들로부터 이 명제들이 해결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문제로 이전되고, 또 이 이전 안에서 전적으로 의미를 바꾸는 한에서만 발견된다. 아니면 차라리 진과 위 자체가 더 이상 문제에 답하는 명제들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규정할 때, 진리의 범주를 채우는 것은 바로 의미의 범주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문제가 경험적 인식의 주관적이고 잠정적인 상태를 지시하기보다는 역으로 하나의 비물질적 객관성을, 그리고 의미를 구성하며 인식과 인식된 것, 명제와 그 상관자들을 동시에 정초하는 하나의 복합체를 지시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의미를 문제인 한에서의 진리로 정의하는 것은 문제와 그 조건들이다. 조건들이 불충분하게 규정되거나 역으로 과잉 규정될(중층 결정될) 때, 문제는 그릇된 문제일 수 있다. 조건들의 규정은 한편으로 특이성들이 분배되는 노마드적 배분의 공간(토포스)을, 다른 한편으로 이 공간을 하위 공간들로 분할하고 각 하위 공간을 (고려된 영역의 점진적이고 완전한 규정을 확립하는) 새로운 점들의 부가에 의해 정의하는 분해의 시간(아이온)을 함축한다. 특이성들을 압축하고 침전시키는[하나의 집합으로 분절하는] 한 공간이 늘 존재하며, 마찬가지로 과거와 미래의 사건 조각들을 가지고서 그 사건을 점진적으로 완성시키는 하나의 시간이 존재한다. 따라서 문제의 시공간적 자기-결정(auto-determination)이 존재하며, 이 자가 결정의 과정을 따라 문제는 결험(defaut)을 메우면서 또 그 조건들의 과잉을 경고하면서 나아간다. 진이 의미와 생산성이 되는 것은 여기에서이다.
해들은 정확히 문제가 자가 결정되는(se determine) 것과 동시에 발생한다. 사람들이 해는 문제가 존속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고, 그리고 발견되자마자 문제에 필연적으로 주관적인 순간의 지위를 추후적으로 부여한다고 그토록 자주 믿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실은 전혀 반대이다. 문제가 공간과 시간 내에서 동시에 자가 규정되고, 그 결과 그것이 그 안에 머무는(persiste) 해들을 규정하는 것은 하나의 고유한 과정에 의해서이다. 명제들, 명제의 차원들, 그리고 명제의 상관자들을 낳는 것은 문제와 조건들의 종합인 것이다.

의미의 중성
따라서 의미는 명제들 -이들이 특정한 응답들을 지칭하고, 일반적인 한 해의 경우들을 기호화하고, 해결(resolution)의 주관적인 행위들을 현시하는 한- 이 그에 상응하는 문제로서 표현된다. 이 때문에 의미를 부정법이나 분사의 형태(구름-하얗다 la neige-etre blanche, 구름의 하얌l'etant-blanc de la neige)로 표현하기보다는 의문문적 형태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부정법과 문제는 통한다. '사라지다'라는 부정법은 "사라지는가?"라는 문제-장이다.* 의문문적 형태가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또는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는 해 위로 전사되는 것, 우리가 묻는 것이(구름은 무슨 색인가? 몇 시인가?)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응답에 의해 중성화된**긍정과 부정이 예컨대 +와 -가 중화되듯이 중성화되어 있음을 말한다.** 이중체일 뿐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적어도 이 의문문의 형태는 우리를 우리가 찾는 것의 길 위로 데려다준다는 이점이 있다. 진정한 문제, 즉 그것이 포괄하는 명제들과 유사하지 않지만 자신의 고유한 조건들을 규정함으로써 그 명제들을 낳으며, 또 일반적인 기호 작용과 인칭적인 현시 작용의 틀 안에서 태어난 명제들의 순열에 개별적인 질서를 부여하는 문제. 물어봄(l'interrogation)은 경험적 명제들에서 출발해 투사된, 아니면 차라리 재구성된 문제의 그늘일 뿐이다.
문제 자체는 발생적 요소의 실재, 명제의 어떤 테제로도 환원되지 않는 복잡한 테마인 것이다.1)[정신현상학]의 머리말에서, 헤겔은 철학적/과학적 진리는 "카이사르느 언제 태어났는가?"와 같은 유형의 단순한 물음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명제에 있지 않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경험적 측면에서 문제를 그에 '응답들'로서 역할하는 명제들에 전사하는 것, 그리고 철학적/과학적 측면에서 문제를 '상응하는' 명제들의 가능성의 형식에 의해 정의하는 것은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환상이다. 가능성의 이 형식ㅇ은 논리적이거나 기하학적, 대수학적, 물리학적, 선험[철학]적, 도덕적......일 수 있다. 어느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문제를 그 '해결 가능성'에 의해 정의하는 한, 우리는 의미를 기호 작용과 혼동하는 것이며 또 조건지어진 것의 이마주에 따라서만 조건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문제의 자가 결정 과정에 상대적인 것은 해결 가능성의 영역들이다. 조건과 조건지어진 것을, 즉 해결가능성의 영역과 이 영역 안에서의 해들, 명제들의 형식과 이 형식 아래에서의 그들의 규정, 진리의 조건으로서의 기호 작용과 조건적 진리로스의 명제를 동시에 규정함으로써, 비물질적인 또는 무조건적인 무엇을 구성하는 것은 그것의 고유한 조건들을 동반하는 문제 자체의 종합이다.
문제는 결코 그것이 포섭하는(subsume) 명제들과 유사하지 않으며, 그것이 명제 안에서 낳는 관계들과도 유사하지 않다. 문제가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들 바깥에서는 실존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명제적인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는 후설이 표현은 일종의 이중체일 뿐이며 그것[표현]을 수용하는 것과 같은 '테제'를 가진다고 말할 때 그를 따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문제적인 것은 다른 테제들 중의 한 명제적 테제에 불과하게 될 것이며, '중성'은 모든 테제 일반과 대립함으로써 다른 측면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여전히 표현된 것을 상응하는 명제의 이중체로서 생각하는 또다른 방식에 불과하다. 우리는 후설에서의 의식의 양자 택일 -이중체의 두 방식을 형성하는 '모델'과 '그늘'-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반면, 문제는 그것이 표현된 테마/의미인 한에서 그에 본질적으로 속하는 중성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또한 그것은 모델도 그늘도 아니며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들의 이중체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문제]은 명제의 모든 양상들에 관련해 중성이다. 오직 동물......(Animal tantum......). 오직 원환인 한에서의 원환. 그것은 특수한 원황도 또 그렇다고 그 일반적인 항들이 계속 각 경우 특수한 값을 받아야 하는 한 방정식 안에서 표상된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특이성들의 한 방출을 상관자로 가지는 변별적/미분적 체계이다.3) 보르다-드물랭(Bordas-Demoulin)은 그의 뛰어난 저작인 [데카르트주의](1843)에서 원주에 대한 이 두 표현 -'x2+y2-R2'과 'ydy+xdx=0'-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주었다. 첫번째 식에서, 우리는 물론 각각의 항/변수에 다양한 값들을 대입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각 경우에 [각 변수에] 하나의 값만을 대입할 수 있다. 두번째 식의 경우, dy와 dx는 모든 특수한 값에 독립적이며, 이들의 관계는 곡선에의 탄젠트가 가로좌표축과 만드는 각의 삼각 탄젠트를 정의하는 특이성들(dy/dx=-y/x)에만 연관된다./ 문제가 명제들 -그것을 의미로 표현하는 명제들- 의 바깥에서는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명제들 안에 내속하며(insiste), 존속하거나(subsiste), 또는 지속하며(persiste), 우리가 앞에서 만났던 이 열외-존재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비존재는 부정적인 것의 존재가 아니라 문제적인 것의 존재이다. 우리는 그것을 '(비)-존재/(non)-etre'라고 또는 '?-존재/?-etre'라고 쓸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긍정적인 것에 의존하지 않지만 부정적인 것에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은 문제로서의 그 위치에 상응하는 하나의 실증성(positivite)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순수 사건은 긍정과 부정 모두를('일어나는 일'에 의해 그리고 그것이 '제기'하거나 '폐기'하는 특이성들에 의해 정의하는) 한 문제를 위한 해의 경우들로서 취급함으로써, 이들[긍정과 부정]을 넘어서는 이 실증성에 도달한다. ......하는 결과가 되었다.(Evenit......). "어떤 명제들은 해체(부정)적이다(abdicativae)." 그들은 어떤 것(quelque chose)에 의해 한 대상을 파면시키고 부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쾌락은 선[좋은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선의 성질에 의해 쾌락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이 명제 자체가 긍정적이라고(dedicativa) 평가한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떤 쾌락이 하나의 선이 아닐 수 있다. 이것은 이 쾌락에 일어나는 일을 제기하는 데 있다......"

표면과 안감
우리는 이중체와 중성이라는 두 개념을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의미는 중성적이다. 그러나 결코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들의 이중체는 아니며, 또 그것의 발생 장소이자 명제들의 지시 대상인 사태들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제의 회로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한, 우리는 무엇이 의미인지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뫼비우스의 띠를 잘라 펴는 작용과 유비적인 작용을 통해서만, 즉 명제의 회로를 파괴함으로써만 의미의 직접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조건지어진 것의 이마주에 따라 조건을 생각할 수 없다.
선험적 장을 그것과 비슷하게 보이는 것들로부터 명확하게 구분해 내는 것은 의식 또는 코기토의 함정들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철학의 작업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요구에 충실하려면, 하나의 자율적인 형상(figure) 안에서 조건의 이질적인 종합으로서의 무조건적인 것을 사용해야 한다(이 자율적 형상이 중성과 발생적 힘 양자를 독자적으로 재결합시킨다). 그럼에도 우리가 앞에서 의미의 중성에 대해 말했을 때, 안감으로서의 이 중성을 예감했을 때, 그것은 의미가 준원인에서 유래된 발생적 능력을 사용하는 한에서 발생의 관점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전혀 다른 관점, 즉 의미란 우선 물체적 원인들에 의해 생산된 효과 -되돌릴 수 없고 무효한 표면 효과- 라고 생각하는 관점에 따른 것이었다. 의미가 그것의 구현 장소인 사태들까지 생산한다는 것과 그것이 이 사태들, 물체들의 능동들과 수동들에 의해 생산된다(순결한 개념 작용)는 것을 어떻게 동시에 주장할 수 있을까?
정적 발생이라는 관념 자체가 모순을 일소한다. 우리가 물체들과 그들의 혼합물들이 의미를 생산한다고 말할 때, 이는 개체화 때문이 아니다(개체화는 의미를 전제한다). 물체들 내에서의 개체화, 혼합물들 내에서의 측정, 이들의 변이들 내에서의 인칭들과 개념들, 이 모든 질서 형성(ordonnance)은 그것이 펼쳐지는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인 의미와 중성적 장을 전제한다. 따라서 의미 자체가 물체에 의해 생산되는 것은 다른 방식에 의해서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 미분화된 깊이, 그 한도 없는 맥동 내에서 포착된 물체들이다. 그리고 이 깊이는 일차적인(originale) 방식으로, 즉 표면들을 조직할 수 있는, 표면들 안에서 내포될 수 있는 힘(pouvoir)에 의해 작동한다. 이 맥동은 때로 최대 물질을 위한 최소 표면의 형성에 의해(그래서 원형이 등장한다), 또 때로 다양한 과정들 -길게 늘어남, 조각남, 가루가 되기, 마름, 습성, 흡수, 거품내기, 유상액 등등- 을 따른 표면들의 증가와 그 복수화에 의해 작동한다. 우리는 앨리스의 모든 모험- 작아짐과 커짐, 음식과 오줌에 대한 강박증, 구들과의 만남- 을 이 관점에서 다시 읽어야 할 것이다.
표면은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다. 표면은 혼합된 물체들의 능동들과 수동들의 산물이다. 그 고유한 되돌릴 수 없고 분할될 수 없는 장 위를 미끄러지는(survoler) 것은 표면의 소관이다. 마치 플로티노스가 말한, 이 앏고 연속적인 판처럼(액체는 하나의 면에서 다른 면으로 젖어들며 가로지른다). 그래서 표면은 마치 단본자적인 층들(couches)의 용기와 샅으며, 두께 없는 내외 두층의 연속과 측면적 정합성을 공고히 한다. 또 표면은 순수 효과이지만, 한 준원인의 장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하나의 표면 에네르기는 표면 자체에 속하지는 않지만 표면의 모든 형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표면의 도안(plan) 위에 작용하는(이 도안에 사람들은 표면을 넓히기 위해 힘든 노동을 부과한다) 힘으로서의 상상적인(fictive) 표면 장력이 펼쳐진다. 또 표면은 갑작스러운 응축, 융해, 펼쳐진 층들의 상태 변화, 특이성들의 배분과 재배분(remaniements)을 위한 연극으로서, 두 유체가 서로 융해될 때처럼 무한정 넓혀진다. 따라서 심층적 혼합물들의 효과인 한에서의 표면들에 대한 물리학이 존재하며, 이 효과는 우주 전체의 변이와 맥동을 부지런히 모으고 이 동적인 극한들(limites) 내에 내포시킨다. 그러나 표면들의 물리학에 필연적으로 형이상학적 표면이 상응한다.
우리는 물체들(전체로서 취해진, 그리고 그들을 내포하는 극한들 내에서 취해진)과 명제들 사이에서 형성되는 경계선을 형이상학적 표면(선험적 장)이라고 부를 것이다. 앞으로 보겠지만, 이 경계선은 언어와 물체, 물체적 심층과 음향적 연속체를 구분해서 분배할 수 있게 해주는 표면과 관련해 어떤 소리의 속성들을 함축한다. 이 모든 방식에 의해 표면은 선험적 장 자체가, 그리고 의미 또는 표현의 장소가 된다. 의미는 표면에서 형성되고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계선이 분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단지 의미가 물체에서 발생하는 것인 동시에 명제들 안에서 재속하는 것으로서 드러날 수 있게 해주는 절속(articulation)의 요소이다.
또한 우리는 여전히 의미는 일종의 안감이라고, 의미의 중성은 그 이중체라는 위상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해야 한다. 다만 여기에서, 안감은 더 이상 소멸되면서 탈구현되는(desincarnee) 유사성, 고양이 없는 생쥐처럼 살이 없는 이마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표면들의 생산, 표면들의 복수화와 응집(consolidation)을 통해 정의된다. 안감은 표리의 연속성이며, 표면의 의미가 동시에 두 측면에서, 즉 명제들 안에 내속하면서 표현되는 것으로서 그리고 사태들에 있어 돌발하는 사건으로서 분배되도록 이 연속성을 수립하는 기법이다. 이 생산이 실패할 때, 표면이 파열과 흠에 의해 찢어질 때, 물체들은 그들의 심층으로 다시 떨어지며, 모든 것은 익명적 맥동 내에 다시 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들 자체는 이제 물체의 정동 작용들로 그치게 된다. 이것이 의미의 이차적 조직화 아래에서 으르렁거리는 일차적 질서이다. 역으로, 표면이 유지되는 한, 의미는 그 위에서 효과로서 펼쳐질 뿐 아니라 거기에 연결된 준원인이라는 성격을 띤다. 의미는 이제 개체화 및 물체들의 규정과 그 측정된 혼합물들의 규정 과정 내에서 뒤따르는 모든 것을, 그리고 기호 작용 및 명제들과 그 부과된 관계들의 규정 과정 내에서 뒤따르는 모든 것 -모든 제3의 배열, 또는 정적 발생의 대상- 을 생산한다.

계열 18 - 세 가지 철학자의 상

철학과 높이
한편으로 대중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학문적이기도 한 철학자의 상(l'image du philosophe)은 플라톤의 철학에 의해 고정된 듯하다. 동굴에서 나와 스스로를 고양시키고 고양된 만큼 정화되는 존재. 높이 올라가는 존재. 이 '높이 올라가는 형이상학적 삶'(psychisme), 도덕과 철학, 금욕적 이상과 사유의 관념은 밀접하게 한덩어리로 묶인다. 구름을 타고 앉은 철학자로서의 이마주, 그리고 세계의 심층을 탐구하는 과학자로서의 이마주는 이 점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두 경우 모두 모든 것은 높이와 관련된다(이것이 도덕 법칙의 하늘에 거주하는 인격체의 높이라 해도). 누군가가 "사유에 있어 무엇이 정초되어 있는가?"라고 물을 때, 사유는 그 자체 축들과 정향들(orientations)을 전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축들과 정향들에 따라 사유가 전개되며, 역사를 가지기 전에 [높이, 깊이 표면 등의] 지리를 가지며, 체계들을 구성하기 전에 차원들[높이, 깊이, 표면]을 그린다.
높이는 고유하게 플라톤적인 오리엔트이다. 그래서 철학자의 작업은 고양으로서, 형이상학적 삶으로서, 즉 저 높이에 있는 원리를 향하는 운동으로서 규정된다. 그리고 이 원리로부터/에 의해 철학자는 앞으로 나아가며, 스스로를 규정하며, 스스로를 채우며, 그러한 운동에 따라 스스로를 인식한다. 철학자들과 병자들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철학에 고유한 어떤 병들이 존재한다. 관념론은 플라톤 철학과 함께 탄생한 병이며, 플라톤적인 상승 및 하강과 더불어 철학 자체의 편집-우울증적 형식이 태어났다. 편집증이 플라톤을 촉발하고 이끌었다. 변증법은 이데아들의 도피(Ideenflucht)이다. 플라톤이 이데아에 관해 말했듯이ㅡ "이데아들은 도피하거나 소멸된다...... ."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있어서조차도, 여기에는 일종의 우울증적인 자살이 존재한다.

철학과 깊이
니체는 이 높이에 입각한 정향에 대해 회의했고, 이러한 정향은 철학의 완성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시작된 철학의 쇠퇴와 방황은 아니었는가라고 자문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니체는 사유의 정향이라는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사유한다는 행위가 사유 안에서 태어나고 사상가가 삶 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다른 차원들에 따라서가 아닌가? 니체는 그가 발명한 방법을 사용한다. 전기(biographie)에도 문헌 목록(bibliographie)에도 만족해서는 안 된다. 동일한 사물이 삶의 일화(anecdote)와 사유의 격언(aphorisme)이 되는 어떤 비밀스러운 지점에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것은 한 측면에서는 삶의 상태들에 귀속되고(s'attribue a) 다른 측면에서는 사유의 명제들 안에 내속하는 의미와도 같다. 여기에 차갑거나 뜨거운, 그러나 결코 적당하지는 않은 차원들, 시간들과 장소들, 지대들(zones)이, 또 사유의 방식(mode)만이 아니라 삶의 양식(style)까지 특성화하는 이국적 지리학[독특한 차원]이 존재한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그의 저작의 비교적 뛰어난 부분들에서 이러한 방법을 예감했던 것 같다. 즉, 사유의 일화들이기도 한 생생한 격언들을 찾아내는 것. 철학자들의 몸짓을 찾아내는 것. 예컨대 엠페도클레스와 에트나 화산은 철학적 일화를 보여준다. 소크라테스의 죽음도 이에 해당하지만, 이는 다른 차원에서 그렇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동굴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동굴 안에 충분히 들어가지 않았다고, 충분히 삼텨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가 테세우스에 대해 거부하는 것은 실타래이다. "우리에게, 거슬러 올라가는 당신의 길, 바깥으로 인도하는, 행복과 덕으로 인도하는...... 당신의 실마리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당신은 이 실마리를 가지고 우리를 구제하려 하는가? 우리는 당장 이렇게 기도한다. 이 끈에 너 자신을 묶어라!"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사유를 동굴 안에, 삶을 심층 안에 위치시켰다. 그들은 물과 불의 깊이를 쟀다. 그들은 망치로 철학을 했다. 조상을 부수는 엠페도클레서처럼. 지질학자의 망치, 동굴학자의 망치. 물과 불의 범람 안에서, 화산은 엠페도클레스의 낲으로 된 신발만을 뱉어냈다. 엠페도클레스의 신발은 플라톤적인 영혼의 날개와 대립함으로써, 엠페도클레스가 대지에 속한다는 것, 땅 아애레 있다는 것, 그리고 토착적이라는 것을 증명해 준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망치-전복(subversion)과 플라톤적 날갯짓-회심(conversion).
니체가 보기에, 쟁여진 심층들은 철학의 진정한 정향이며 미래의 철학이 다시 취해야 할, 그리스 자연철학자들의 발견이다. 사유이기도 한 삶, 또는 신체이기도 한 언어의 힘들과 더불어. "모든 동굴 뒤에는 더 심층적인 하나의 심층이 존재하며, 더 심층적이고 더 광대한, 표면 아래의 보다 낯설고 보다 풍부한 세계가, 모든 바닥 아래에, 모든 정초를 넘어서 하나의 심연이 존재함이 틀림없다."1) 바슐라르가 니체적 상상력을 특성화하고자 하면서 그것을 일종의 '높이 올라가는 형이상학적 삶'으로 제시한 것은 기묘하다(Bachelard, L'Air et les songes, ch, V). 바슐라르는 니체에서의 대지와 표면의 역할을 최소화시킬 뿐만 아니라, 니체적 '수직성'을 모든 높이와 상승에 앞서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라리 심층이자 하강이다. 맹금은 우연이라면 몰라도 날아오르지 않는다. 그는 불쑥 솟아오르며 "땅을 판다(fond)." 니체에게 심층의 개념은 높이의 관념과 상승에의 이상을 논박하기 위한 개념이다. 높이는 일종의 신비화, 일종의 표면 효과일 뿐이다. 표면 효과는 심층들의 눈을 속이지 못하며 그 시선 아래에서 부수어진다. 이 점에 관해 푸코의 언급을 보라. Foucault, "Nietzsche, Freud, Marx," in Nietzche, Cahiers de Royaumont, ed. de Minuit, 1967, pp. 186~187./ 우선 분열증이 있다. 그리스 자연철학(le presocratique)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철학적 분열증이며, 신체와 사유로 파들어간 절대적 깊이이다. 횔덜린이 니체에 앞서 엠페도클레스를 발견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엠페도클레스의 유명한 사랑과 미움의 상보성을 통한 세계 교체에서, 우리는 한편으로 미움의 신체, 조각난 여과기-신체, '목 없는 머리, 어깨 없는 판, 이마 없는 눈'을, 다른 한편으로 영광된 기관들 없는 신체, 사지도 목소리도 성도 없는 '하나-총체'(forme tout d'une piece)를 만난다. 마찬가지로 디오니소스는 우리에게 그의 두 얼굴을, 그의 열린, 찢긴 몸을, 그의 되돌릴 수 없는, 기관들 없는 머리를 구부린다. 사지가 잘린 디오니소스, 그러나 또한 투과 불가능한 디오니소스.
니체는 표면들을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심층의 재발견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표면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에게 표면은 오히려 심층들의 눈에 의해 개선된 관점에 따라 판단되어야 할 무엇으로 보인다. 니체는 플라톤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긴 쇠퇴의 과정이라고 봄으로써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의 방법 자체에 따른다면, 우리는 철학자들의 세번째 상이 드러난다는 인상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니체의 말이 특히 잘 적용되는 것은 이들에게이다. 이 그리스인들은 표면적이 됨으로써 심오하게 된 것이다! 이 세번째의 그리스인들은 더 이상 전적인 그리스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구원을 더 이상 대지나 토착성의 깊이로부터도 또 하늘과 이데아로부터도 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캐럴의 말처럼 모든 좋은 일이 발생하는 사건으로부터, 동쪽(l'Est)으로부터 측면적으로 구원을 기대했다.
메가라 학파, 퀴니코스 학파, 스토아 학파와 더불어 새로운 철학자와 새로운 유형의 일화들이 등장한다. 우리는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가 퀴니코스 학파인 디오게네스와 스토아 학파인 크뤼시포스에 대해 쓴 뛰어난 글들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도발(provocation)의 한 흥미로운 체계가 전개됨을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철학자는 폭음폭식을 하며 양껏 먹는다. 그는 공공장소에서 자위 행위를 하며 배고픔과 관련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음을 한탄한다. 그는 어머니, 누이, 딸과의 근친상간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는 식인 축제와 식인증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숙하고 검소하다. 한편으로 철학자는 사람들이 그에게 물음을 던질 때 침묵한다. 그는 한 차례의 방망이질을 하거나, 아니면 추상적이고 어려운 질문이 던져질 때면 어떤 음식물을 가리킴으로써 또는 (그가 여전히 방망이로 때려부수는) 음식물 상자를 줌으로써 응답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역설들, 가치들, 철학적인 새로운 기호 작용들에 의해 고부된 새로운 담론, 새로운 로고스를 취한다. 우리는 이 일화들이 더 이상 플라톤적이지 않으며 그렇다고 자연철학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 스토아주의자
이것은 모든 사유 그리고 사유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에 관련한 재정향이다. 더 이상 높이/상층도 깊이/심층도 없다. 플라톤에 대항하는 퀴니코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연합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데아들을 파면시키는 것이고, 비물체적인 것이 높은 곳에 있지 않고 표면에 있다는 것, 그것은 가장 높은 원인이 아니라 다름아닌 표면 효과라는 것,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사건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심층은 일종의 소화적(digestive) 환상으로서 이데아적인 광학적 환상을 완성시킨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폭식폭음, 근친상간, 식인 축제에 대한 변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테마는 크뤼시포스와 퀴니코스 학파의 디오게네스에게 공통되는 것인데도, 라에르티우스는 크뤼시포스를 위한 어떤 설명도 제시하지 않으며, 디오게네스를 위한 뛰어난 설명만을 제시한다.
"그는 야만인들처럼 사람고기를 먹는 것을 그다지 추악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는 건전한 로고스/불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도처에 있다고 말한다. 빵 안에는 살이 있고, 풀 안에는 빵이 있다. 이 물체들과 그 유사한 부류들은 보이지 않는 작용을 통해 모든 물체들 안으로 들어가며, 모두 한 덩어리가 된다. 그는 이것을 'Thyeste'라고 이름 붙인 단편에서 말하고 있다...... ."
근친상간과 관련해서도 유효한 이 테제는 물체들의 심층에서는 모든 것이 혼합물이라는 것을 확립한다. 그런데 하나의 혼합물이 다른 혼합물보다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규칙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플라톤이 믿었던 것과는 반대로, 혼합물들을 위한 저 높은 곳의 척도도, 또 좋은 혼합물과 나쁜 혼합물을 정의할 수 있게 해줄 이데아들의 조합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 자연철학자들과 대조적으로, 자연(la Physis)의 심층들 내에서 한 혼합물의 질서와 진행을 고정시킬 수 있는 내재적인 척도[자연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혼합물들이 유효하듯이 서로 관통하는 물체들과 서로 공존하는 부분들도 유효하다. 혼합물들의 세계가 어떻게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검은 심층의 세계가 아닐 수 있겠는가?

헤라클레스와 표면들
크뤼시포스는 두 종류의 혼합물을 구분했다. 물체들을 변질시키는 불완전한 혼합물들과 물체들을 보호하고 그 모든 부분들에서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완전한 혼합물들. 물론. 물체적 원인들의 통일성은 완전하고 유동적인 한 혼합물을 정의하며, 여기에서 모든 것은 바로 우주적 현재 안에 있게 된다. 그러나 한계지어진 현재들의 특수성 내에서 물체들은 그들의 인과적 질서에 따라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않는다. 이 인과율이 모든 조합들이 동시에 포함되는 전체에 있어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혼합물은 좋거나 나쁘다고 말해질 수 있다. 즉, 모든 것의 질서 안에서는 좋지만 부분적인 만남의 질서 안에서는 불완전하고 나쁘며, 나아가 최악일 수 있다. 수동들 자체가 다른 물체들을 관통하는 물체들이고 특수한 의지는 극단적인 악인 이 영역에서, 어떻게 근친상간과 식인 축제를 저주하겠는가?
세네카의 독특한 비극들을 예로 취해보자. 사람들은 스토아적 사유와 이 비극적 사유의 통일성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 세네카가 엘리자베스 시대의 연극을 그토록 명확히 선취함으로써 처음으로 악에 떨어진 존재들을 드러냈기에 말이다.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얼마간의 스토아적인 합창대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여기에서 진정 스토아적인 것은 수동-물체들(passions-corps)과 이들이 조직하거나 겪는 지옥의 혼합물들, 불타는 독약, 어린이를 제물로 바치는 축제들의 발견이다. 'Thyeste'의 비극적 식사는 단지 디오게네스의 잃어버린 주제일 뿐만 아니라 다행이도 보존된 세네카의 그것이다. 독약 묻은 옷들이 피부를 태우고 표면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옷들은 더 깊은 곳으로 침투해 관통된 신체에서 조각난 신체(membra discerpta)로 나아간다. 물체의 심층 도처에서 유독한 혼합물들이 끓고, 끔찍한 강신술, 근친상간, 인육이 만들어진다. 해독제나 역체험을 찾아보자. 모든 스토아적 사유에서 그렇듯이, 세네카의 비극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헤라클레스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스는 늘 세 영역과 관련해 등장한다. 이 세 영역이란 곧 지옥의 심연, 천상의 높은 곳, 그리고 대지의 표면이다. 심층에서 헤라클레스는 소름끼치는 혼합물들만 발견한다. 천상에서 그는 공허만을, 또는 지옥의 것들을 복제한 하늘의 괴물들만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는 대지에서 평화의 사도이자 측량사이며, 물들의 표면을 다루기까지 한다. 그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표면으로 다시 올라가거나 다시 내려간다. 그는 지옥의 개와 천상의 개, 지옥의 뱀과 천상의 뱀을 다시 가져온다. 바닥의 디오니소스도 저 높은 곳의 아폴론도 아닌 표면들의 헤라클레스는 심층과 상층에 맞서 이중의 투쟁을 벌인다. 이것이야말로 전혀 새롭게 정향된 사유이자 새로운 지리학이다.
스토아 학파는 자주 플라톤을 넘어 자연철학으로, 예컨대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로 돌아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토아 학파가 자연철학적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재평가했다는 점이다. 퀴니코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는 자연철학적 세계관을 심층적 혼합물들의 물리학으로 재해석했다. 한 측면에서, 이들은 이 세계관을 오직 거대 혼합물, 즉 원인들 서로간의 통일성하고만 양립하는 국소적(locaux) 무질서들로 개방시켰다. 그것은 폭력과 잔혹성, 근친상간과 식인축제의 세계이다. 그러나 물론 다른 한 측면도 존재한다. 헤라클레이토스적 세계로부터 표면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또 전혀 새로운 위상을 부여받을 존재. 다시 말해, 원인-물체들과 본성상 다른 사건, 갉아먹는 크로노스와 본성상 다른 아이온.
이와 유비적으로 플라톤주의는 총체적 재정향을 겪는다. 플라톤은 자연 철학적 세계관을 훨씬 더 깊이 파묻으려고 했으며, 그것을 보다 강하게 억제하고자 했으며, 높이들의 무게로 그것을 으깨고자 했으나, 결국 자신이 높은 곳에서 축출당하고, 이데아가 단순한 비물체적 효과로서 표면에 떨어지는 것을 보아야 했다. 상층과 심층에 독립적으로, 이들과 대립하여 형성된 표면의 자율성, 높은 이데아들로도 심층의 물체들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물체적 사건들, 의미 혹은 효과들의 발견, 이것이 자연철학과 플라톤에 동시에 대립해 이루어진 스토아적 발견이다.
발생하는 모든 것, 말해지는 모든 것은 표면에서 발생하고 말해진다. 표면은 무의미들의 심층과 상층보다 훨씬 더 잘 탐구될 수 있고 인식될 수 있다. 주된 경계선이 옮겨갔기 때문이다. 경계선은 더 이상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 사이의 상층으로 이행하지 않는다. 아마도 사물들과 명제들 자체 사이에, 아마도 사물들과 명제들 자체 사이에, 명제에 의해 지시된 사물 자체와 명제 바깥에는 존재하지 않는 표현된 것 사이에(실체는 이제 사물의 이차적인 규정에 불과하게 되며, 보편적인 것은 표현된 것의 이차적인 규정에 불과하게 된다) 새로운 선을 그은 사람은 안티스테네스일 것이다.
표면, 커튼, 양탄자, 외투, 바로 이들에 퀴니코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가 자리를 잡았으며, 이들에 의해 둘러싸였다. 표면의 이중적 의미, 표리의 연속성이 높이와 깊이를 대체했다. 커튼 뒤에는 이름붙일 수 없는 혼합물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양탄자 위에는 텅 빈 하늘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의미는 표면 위에서 나타나 노닌다. 적어도 사람들이 그것[의미]이 먼지의 문자들을 형성하도록, 또는 손가락이 그 위에서 쓸 수 있는 창유리 위의 수증기처럼, 이 표면을 적절하게 가공할 줄 아는 한. 퀴니코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서의 방망이 철학은 망치 철학으 대체한다. 철학자는 더 이상 동굴의 존재도 플라톤의 영혼/새도 아니다. 철학자는 표면들의 평평한 동물, 진드기, 이이다. 철학적 상징은 더 이상 플라톤의 날개도 엠페도 클레스의 납으로 된 신발도 아니다. 그것은 안티스테네스와 디오게네스의 이중 외투이다. 방망이와 외투, 마치 몽둥이와 (사자 같은) 피부를 가진 헤라클레스처럼, 이 새로운 철학적 작업이 플라톤적 회심(conversion)과 자연철학적 전복(subversion)에 동시에 대립한다면, 이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일탈(perversion)일 것이다. 만일 일탈이 표면들의 낯선 기법을 함축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이 새로운 유형의 철학자들의 도발의 체계와 일치할 것이다.

계열 19 - 익살

기호 작용에서 지시 작용으로
우선 언어는 표현되는 것의 상태들에 또 지시된 감각적 대상들에 뿌리두지 못하며, 다만 그것에 참과 거짓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이데아들에만 뿌리 두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데아들 자체가 '이름들 자체'가 아닌 한 어떤 기적을 통해 명제들이 말하는 물체들이나 말하여지는 물체들보다 더 확고한 방식으로 이데아들에 참여하는가를 알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한 극에서, 물체들은 언어를 보다 잘 정초할 수 있는가? 소리들이 물체들 이상이 되지 못하고[의미를 담지하지 못하고] 혼합된 물체들의 능동들과 수동들이 될 때, 그들은 이제 슬픈 무의미의 운반자에 그치게 된다. 사람들은 플라톤적 언어와 자연철학적 언어의 불가능성, 관념론적인 언어와 자연철학적인 언어, 편집증적 언어와 분열증적 언어의 불가능성을 확인한다. 사람들은 출구 없는 양자택일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 아니면 말하는 것을 물체화하거나(incorporer) 먹어버리기- 을 제시한다. 크뤼시포스가 말했듯이, "당신이 짐수레라는 말을 할 때, 짐수레가 당신의 입을 지나간다." 그리고 이것이 짐수레의 이데아라면, 그것은 더 좋지도 더 편리하지도 않다.
관념론적인 언어는 [플라톤에서처럼] 실체화된 기호 작용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이 우리에게 "아름다움, 정의, ......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와 같이 기의들에 관해 물을 때마다, 우리는 [플라톤에서처럼 실체화된 기호 작용들, 즉 이데아들의 놀이를 제시하는 대신] 하나의 물체를 지시함으로써, 흉내낼 수 있거나 나아가 소비할 수 있는 한 대상을 가리킴으로써, 필요하다면 방망이 -가능한 모든 지시 작용의 도구로서 간주되는 방망이- 까지 사용함으로써 응답할 것이다. 플라톤이 인간의 기의로서 제시한 '날개 없는 두발 동물'에 대해, 퀴니코스 학파의 디오게네스는 날개털 뽑은 닭을 내던짐으로써 응수했다. 그리고 "철학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사람에게는 새끼줄에 묶인 청어를 가지고 다니면서 응수했다. 물고기는 가장 구강적인 동물이다. 그것은 침묵, 소비 가능성, 습음적 요소 내의 자음의 문제, 언어의 문제를 제기한다.
플라톤은 예들을 열거하는 사람들, 본질들에 도달하기보다는 단순히 가리키고 지시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예컨대 그는 말하곤 한다. 나는 당신에게 누가 정의로운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으로 하여금 그가 우리에게 기어오르게 했던 길을 다시 내려가게 만드는 것은 쉽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하나의 기호 작용에 대해 물을 때면, 우리는 매 경우 지시 작용에 의해, 순수한 가리킴에 의해 대답한다. 그리고 구경꾼에게 이것[가리킴]은 단순한 한 '예'가 아니라는 것, 플라톤의 문제는 잘못 제기되었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우리는 지시되고 있는 것을 모방하거나 부수어 먹어버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빨리 행하는 것이다. 즉, 지시할 수 있고, 먹을 수 있거나 부술 수 있는 어떤 것을 즉각 찾는 것이다. 이 어떤 것이 플라톤이 당신에게 찾도록 권한 기호 작용(이데아)를 대체한다. 지시 대상과 [플라톤]이 요구한 대상 사이의 유사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또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그만큼 빨리 그리고 더 잘, 다만 본질-예라는 플라톤의 그릇된 이분법을 거부하는 톱니 모양의 관계가 존재할 뿐이다.
기호 작용을 지시 작용, 가리킴, 소비, 그리고 순수한 파괴로 대처하는 이 작업을 위해 하나의 낯선 영감이 필요하며 , "하강할 줄" 알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적 얄궂음/아이러니 즉 상승의 기법에 대립하는 익살/유머.
그러나 그러한 하강은 어디까지 나아가는가? 물체들의 바닥과 그 혼합물들의 바닥-없음까지. 왜냐하면 이 지점까지 내려가면 모든 지시 작용은 소비, 분쇄, 파괴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마치 방망이가 그것이 가리키는 모든 것을 부수듯이, 이 운동은 우리를 몰아간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언어가 기호 작용만이 아니라 지시 작용 위에서도 정초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호 작용들이 그들을 대체하고 파기하는 순수 지시 작용들을 통해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은 기호 작용 없음(sans-signification)만큼이나 부조리하다. 그러나 지시 작용들이 파괴적이고 분쇄적인 바닥에서 우리를 좌절시키는 것 역시 의미-아래(sous-sens), 'Untersinn'으로서의 심층들의 무의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언어를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고 파묻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운동에 의해, 우리는 표면으로 이끌려간다. 여기에는 더 이상 지시할 것도 기호화할 것도 없으며, 단지 순수 의미만이 생산된다. 즉, 세번째 요소(이번에는 표면의 무의미)와 본질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생산된다. 그리고 여기에서도 또한 더 중요한 것은 빨리 행하는 것, 속도이다.

스토아주의와 선
현자는 표면에서 무엇을 찾는가? 순수 사건들을 찾는다. 그 영원한 진리에 있어, 즉 사태 내에서의 그 시공간적 효과화(effectuation)에 독립적으로 그들을 받쳐주는 실체에 있어 포착된 순수 사건들, 또는 같은 말이 되겠지만, 순수 특이성들을, 그들을 구현하거나 효과화하는 개체들과 인칭들에 독립적으로 그 우발적 요소(element aleatoire)에 있어 포착된 특이성들의 유츌을 찾았다.
이 익살의 모험, 표면을 위한 심층과 상층의 이중적 파기, 이것은 우선 스토아적 현자의 모험이지만 그후 그리고 다른 맥락에서는 선의 모험이기도 하다. 브라만적인 깊이나 붓다적인 높이에 대립하는 선. 유명한 화두(problemes-epreuves), 선문답(question-response), '공안'(koan)은 기호 작용들의 부조리함을 증명하며(deomontrent) 지시 작용들의 무의미를 가리킨다(montrent).*기호 작용의 부조리함은 '불립문자'를 말하며, 지시 작용들의 무의미는 '일체개공'을 말한다.* 막대기는 보편적인 도구, 물음들의 스승이며, 무언극과 음식물은 응답이다. 현자는 표면에 주목해 거기에서 대상-사건들을 발견해내며, 이들은 모두 그들의 실체를 구성하는 공허 안에서, 그들이 결코 다 채우지 못하면서도 거기에서 그려지고 펼쳐지는 아이온 안에서 소통한다.1)스토아주의자들은 이미 공허(Vide)를 열외 존재이자 내속(insistance)으로 보는 매우 빼어난 이론을 구축했다. 비물체적 사건들이 존재들/물체들의 논리적 빈위들이라면, 공허는 이 부대물들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공허는 물체적 실체와는 본성상 다르다. 우리는 세계가 공허 '안에' 있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다음을 보라./
사건은 형식과 공/공허의 동일성이다. 사건은 지시된 것으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표현된 또는 표현될 수 있는 대상이다. 사건은 결코 현존하지 않으며, 언제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인 동시에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다. 이는 말라르메에 있어 사건의 부재 또는 소멸과 상응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 소멸(abdicatio)은 정확히 말해 순수 대사건(dedicatio)으로서의 공허 안에서의 위치이기 때문이다. 선은 말한다. "네가 하나의 막대기를 가지고 있다면, 나는 너에게 막대기를 하나를 줄 것이다. 네가 막대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나는 너에게서 막대기를 빼앗을 것이다."(또는 크뤼시포스가 말했듯이, "당신이 한 사물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것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머리의] 뿔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뿔을 가지고 있다"). 부정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을 표현하지 않으며, 단지 순수한 표현 가능한 것을 그 외짝인 반쪽들과 더불어 이끌어낼 뿐이다. 그리고 한쪽은 언제나 다른 한쪽을 가지지 못한다(manque). 한쪽이 그 과잉에 의해 결핍을 겪으면서까지 그 고유한 결함에 의해 과잉되기 때문이다(사물=x를 위한 말=x).
우리는 이를 선의 기법들 -받침 없는 소맷부리에 의해 이끌리는 붓이 형식과 공허에 평형을 주고 우발적인 타들과 '뿌리털로 그린 선들'(lignes chevelues)의 계열들 안에 한 순수 사건의 특이성들을 분배하는 그림 기법만이 아니라, '불의 소멸'이 경탄스러운 텅빔(vacuite)에 의해 떠오르는 정원 가꾸기, 꽃 묶기, 다도, 활 쏘기, 검술의 기법들까지- 에서 잘 볼 수 있다. 소멸된 기호 작용과 상실된 지시 작용을 가로지르면서, 공허는 오직 그 장소만을 가진 곳에서(la ou n'a plus lieu que le lieu), 그 고유한 무의미로 구성된 의미의 또는 사건의 장소이다. 공허는 그 자체 역설적 요소, 표면의 무의미, 언제나 자리옮기는(그렇게 함으로써 의미로서의 사건을 발생시키는) 우발점이다. "탈출해야 할 탄생과 죽음도, 또 도달해야 할 지고의 인식도 존재하지 않는다."
텅빈 하늘은 정신의 가장 높은 사유도 자연의 심층적인 원환도 파기한다. 중요한 것은 무매개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무매개적인 것이 도달하지-않아도-됨(non-a-atteindre)으로서 '무매개적으로' 취해지는 이 장소 -공허가, 그리고 그와 더불어 모든 사건이 이루어지는 표면, 검에 의해 날카로운 상처로서의 경계선, 또는 활의 가느다란 실- 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지 않고 그리는 것, 비-사유, 비사걱이 되는 사격, 말하지 않고 말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상층이나 심층에서의 말할 수 없는 것(l'ineffable)이 아니며, 단지 언어가 가능하게 되는,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이제 무매개적인 침묵의 소통만을 고무하게 된느 이 경계선, 이 표면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는 소멸된 매개적인 기호 작용들과 지시 작용들을 모두 살려낼 때에만 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전적 담론과 개체, 낭만적 담론과 인칭: 아이러니
우리는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해 못지않게 누가 말하는가에 대해 묻는다. 이러한 물음에 많은 다양한 대답들이 주어졌다. 말하는 자로서 개체를 제시하는 대답을 '고전적인' 대답이라고 부르자. 여기에서 이 개인이 말하는 내용은 오히려 특수성으로서 규정되며, 수단 즉 언어 자체는 관습의 일반성으로서 규정된다. 그래서 [이러한 대답에서는] 삼중의 연산을 통해, 언표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부터 순수한 이데아를 추출하는 것(필연), 그리고 언어를 원시적이고 자연적인 또는 순수하게 합리적인 것으로 상정된 하나의 이상적인 모델에 직면시키는 것(가능성), 그리고 동시에 개체로부터 보편적인 형식을 이끌어내는 것(현실)이 문제가 된다. 상승으로서의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를 활성화하고, 그에 여러 가지 과제들 -개인을 그 무매개적 실존으로부터 떼어내는 것, 감각적인 특수성을 이데아로 초월시키는 것, 모델에 부합하는 언어의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을 부과하는 것은 정확히 이 개념이다. 이것이 기억하며 말하는 한 주체성의 '변증법적인' 총체이다. 그렇지만 이 연산이 완전하기 위해서는, 개인이 출발점이나 도약대가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최종 지점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또 이데아의 보편성이 차라리 두 개체 사이의 교환 수단처럼 되어야 한다.
플라톤에게서 아이러니의 이러한 완결, 이러한 고리는 여전히 결여되어 있거나, 아니면 소크라테스와 앙ㄹ키비아데스 사이의 교환에서처럼 희극과 조롱의 유형으로만 나타난다. 반대로 고전적인 아이러니는 현실 전체만이 아니라 (시원적인 지고의 개별성으로서의) 가능한 것의 총체를 규정하게 될 때 이 완전한 상태를 획득한다. 이미 보았듯이, 칸트는 표상의 고전적인 세계를 비판에 부치고자 했고, 이 세계를 엄밀하게 서술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모든 가능성의 총체라는 관념은 완전히 아프리오리하게 결정되는 한 개념을 형성하는 데 이르러 소진되며, 결국 한 특이한 존재의 개념이 된다." 고전적인 아이러니는 표상의 세계에서 존재와 개체의 공외연성(coextensivite)을 공고히 하는 심급으로서 작용한다. 그래서 이데아의 보편성만이 아니라 최초로 가능한 것들과 관련해서의 한 합리적인 순수 언어라는 모델도 극한적으로 개별화된 한 신(un Dieu)과 그가 창조한 피조물들 사이의 자연적인 소통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개체가 보편적 형상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이 신이다.
그러나 칸트적 비판에 따르면, 아이러니의 세번째 형태가 등장한다. 이것은 낭만적 아이러니이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말하는 존재를 개체로서가 아니라 인칭으로서 규정한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라이프니츠에서와 같은] 개체의 분석적 동일성이 아니라 [칸트에서와 같은] 인칭의 유한한 종합적 통일성 위에서 정초된다. 여기에는 단순한 말의 변화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그 모든 중요성을 파악하려면, 예컨대 몽테뉴의 [수상록]과 루소의 [고백] 사이의 차이를 검토해야 할 것이다. 전자는 개체화의 극히 다양한 형태들을 탐구하는 한에서 이미 고전 세계에 속하며, 후자는 한 인칭이나 한 '나'를 처음으로 현시한 한에서 낭만주의를 언표한다). 보편적 이데아와 감각적인 특수성만이 아니라 개체성의 두 극과 개체들에 상응하는 세계들이 이제 인칭에 고유한 가능성들이 된다. 이 가능성들은 시원적인 것들과 파생적인 것들로 분배되거니와, 시원적인 것은 이제 모든 가능한 세계들(범주들)과 관련해 인칭의 항상적인 술어들을 지시할 뿐이며, 파생적인 것은 인칭이 이 상이한 세계들 안에 구현되는 곳, 즉 개별적 변수들이 된다.
이로부터, 즉 이데아의 보편성으로부터, 주체성의 형식으로부터, 가능성의 기능인 한에서의 언어라는 모델로부터 커다란 변환이 생겨난다. 한계지어지지 않은 집합, 그렇지만 단 하나의 요소(나)를 가지는 인칭의 위치는 낭만주의적 아이러니이다. 그리고 의심할 바없이 데카르트적 코기토 안에는, 그리고 특히 라이프니츠적 인칭 안에는 이미 선구적인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요소들은 한편으로 복속 관계를 전복시킴으로써 칸트 이후의 낭만주의 내에서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표현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체화의 요구들에 여전히 복속된다.
"이 한계지어지지 않은 유명한 시적 자유는 개체가 가능성의 형태 아래에서 다양한 규정들의 모든 계열을 주파하고 그들이 무로 가라앉기 전에 시적 실존을 부여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표현된다. 아이러니로 해방되는 영혼은 피타고라스의 독트린에 있어 세계를 가로지르는 영혼과 유사하다. 그 영혼은 언제나 여행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긴 지속......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돈을 주는 사람에게 끌리는 어린아이들처럼, 아이러니스트는 그의 손가락을 센다. 매혹적인 왕자 또는 거지왕자 등등. 이 모든 구현들이 그의 눈으로 보면 순수 가능성들의 가치 외에는 어떤 가치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놀고 있는 어린아이들만큼이나 빨리 전범위를 주파할 수 있다. 역으로, 아이러니스트에게 시간이 걸리는 것은 그가 그의 환상(fantaisie)을 통해 확보하는 시적 역할에 맞추어......어울리도록 분장하기 시작하려는 노력이다.

바닥 없는 담론
모든 형태의 아이러니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점은 그들이 특이성을 개체나 인칭의 테두리들 내에 가둔다는 점이다. 또한 아이러니는 외관적으로만 방랑자이다. 그러나 이는 특히 이 모든 형태들이 그들을 안으로부터 가공하는 내부의 적에 의해 위협받기 때문이다. 이 적이란 곧 미분화된 바닥, 즉 우리가 앞에서 말했던, 비극적인 사유, 비극적인 음조 -그와 더불어 아이러니가 가장 양의적인 관계들을 유지하는 사유, 음조- 를 나타내는 바닥-없음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 아래에 있는 디오니소스이지만, 또한 신과 그의 피조물들에게 보편적 개체성을 녹이는 거울을 비추는 악마이자, 또한 인칭을 파괴하는 카오스이기도 하다. 고전적인 담론은 개체를 취했고, 낭만주의 담론은 인칭을 취한다. 그러나 이 두 담론 아래에서, 이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복시키면서 으르렁거리면서 말하는 것은 이제 얼굴 없는 대바닥(le Fond)이다. 우리는 이 바닥의 언어, 물체의 심층과 얽힌 언어가 이중의 잠재력, 즉 파열된 음소적 요소들의 잠재력과 불분명한 발음의 음조적 가치들의 잠재력을 가진다는 것을 보았다. 전자가 내부로부터 고전적 담론을 전복시키고 위협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낭만적 담론을 위협하고 전복시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각 경우에, 담론의 각 유형을 위해, 세 언어를 구분해야 한다. 우선, 말하는 자(개체 또는 인칭......)의 전적으로 일상적인 수립에 상응하는 현실적(reel) 언어가 있다. 다음으로는, 담론의 모델을 그것을 취하는 것의 형식에 따라 나타내는 탈물질적인(ideal) 언어가 있다(예컨대 소크라테스적 주체성과 관련해서 [크라틸로스]의 모델, 고전적 개체성과 관련해서 라이프니츠적인 합리적 모델, 낭만주의적 인칭과 관련해서 진화론적인 모델). 마지막으로, 매 경우 비물체적 언어의 바닥으로부터의 전복, 그리고 현실적 언어를 취하는 자의 와해를 나타내는 이국적(esoterique) 언어가 있다. 게다가 매 경우 비물체적 모델과 그 이국적인 전복 사이에는, 마치 아이러니와 그 비극적 바닥에서처럼, 내적인 관계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결국 어떤 측면에서 아이러니의 최대치를 발견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결과에 이르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이국적 언어를 위한 유일한 한 정식, 유일한 한 개념을 찾는 것은 헛되다. 고전 세계를 마감하는 제블랭 법정(Court de Gebelin)의 음소적, 측선적, 음절적인 거대 종합, 그리고 낭만주의를 완성한 브리세(Jean-Pierre Brisset)의 진화론적, 음소적인 거대 종합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앞에서 우리는 마찬가지로 말-손가방들의 균일성은 존재하지 않음을 보았다).

특이성들의 담론: 익살 또는 '4인칭 단수'
"누가 말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우리는 때로 개체를, 때로 인칭을, 때로 이 둘 모두를 와해시키는 바닥을 제시했다. "서정 시인의 자아는 존재의 심연에서 바닥의 목소리를 길러내며, 그 주체성은 순수한 상상 작용이다." 그러나 다시 마지막 대답이 울려퍼진다. 이 네번째 대답은 개체와 인칭의 형태들만이 아니라 미분화된 원초적 바닥까지도, 그리고 이들의 모순과 상보성까지도 거부한다. 아니, 특이성들은 개체들과 인칭들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다고 개체와 인칭을 와해시킨다고 해서 미분화된 바닥, 바닥 없는 심층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것은 바로 자유롭고 노마드적인 특이성들이다. 모든 바닥보다 더 깊은 곳, 그곳은 표면, 피부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형태의 이국적 언어, 스스로가 자신의 모델이 되고 현실이 되는 언어, 미친 듯한 생성은 표면으로 올라가 아이온, 영원의 직선 위에 놓일 때 형태를 바꾼다. 마찬가지로 자아는 녹아버리고, '나'는 금이 가고(fele). 정체성은 상실된다. 이들이 가라앉기를 그치고 표면의 특이성들을 해방시킬 때. 무의미와 의미는 그들의 역동적 대립 관계를 끝내고, 결국 표면의 무의미와 그 위를 미끄러지는 의미로서 정적 발생의 공현존 속으로 들어간다.
비극과 알궂음/아이러니는 새로운 가치, 즉 익살/유머에 자리를 내준다. 왜냐하면 아이러니가 존재와 개체의, 또는 나와 표상의 공외연성이라면, 익살은 의미와 무의미의 공외연성이기 때문이다. 익살은 표면들과 안감들, 노마드적 특이점들의 기법이며, 언제나 자리옮기는 우발점의 기법이다. 그것은 정적 발생의 기법이며, 순수 사건의 할-줄-앎(savoir-faire)이며, 또는 '4인칭 현재'이다. 모든 지시 작용, 기호 작용, 현시 작용은 유보된다. 모든 깊이와 높이는 소멸된다.

계열 20 - 스토아 학파와 도덕의 문제

도덕의 양극: 자연철학적 예견과 논리학적 사용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우스는 스토아주의자들이 철학을 달걀에 비유했음을 전한다. "껍질은 논리학이요, 흰자위는 도덕이요, 한가운데의 노른자위는 자연철학이다." 우리는 디오게네스가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격언-일화를, 즉 '공안'을 되찾아야 한다. 기호 작용과 관련해 물음을 제기하는 한 제자를 상상해 보자. "스승이시여, 도덕이란 무엇입니까?" 그러면 스토아의 현자는 그의 옷 속에서 단단한 달걀을 꺼낸 뒤 지팡이로 그 달걀을 가리킨다(혹은 달걀을 꺼낸 뒤 현자는 제자를 지팡이로 친다. 그러면 제자는 그 스스로 이해해야 함을 깨닫는다. 이번에는 제자가 지팡이를 가지고 흰자위의 일부는 노른자위에 일부는 껍질에 묻도록 달걀을 깬다. 이 모든 것을 스승이 직접할 수도 있고, 제자가 몇 년이 지난 뒤에야 깨달을 수도 있다). 어쨌든 도덕의 상황은 표면의 논리학적 껍질과 심층의 자연철학적 노른자위 사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다.
스토아의 현자는 바로 험프티 덤프티가 아닐까? 그리고 제자의 모험은 앨리스의 모험이 아닌가? 제자/앨리스는 도덕의 양의성, 즉 물체의 도덕/말의 도덕("사람들이 ......라고 말하는 것의 도덕" -음식물의 도덕/언어의 도덕, 먹기의 도덕/말하기의 도덕, 노른자위의 도덕/껍질의 도덕, 사태들의 도덕/의미의 도덕- 과 관련해 어지러운 경험을 함으로써, 물체들의 심층에서 말들의 표면으로 거슬러올라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좀전에 말한 것으로, 적어도 거기에 변양태들을 도입하기 위해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을 심층을 탄핵하는 사람들로, 그리고 심층에서 (오직 수동들-물체들 및 악의 의지들에 상응하는) 지옥 같은 혼합물들만을 찾아내는 사람들로 묘사한 것은 성급한 일이었다. 스토아적 체계는 자연철학을 내포하고 있으며, 더불어 이 자연철학의 도덕도 내포한다. 수동들과 사악한 의지들이 물체들이라면, 선의들, 덕 있는 행위들, 참된 표상들, 정당한 동의들 역시 물체들이다. 이런저런 물체들이 끔찍하고 식인적이고 근친상간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총체에 있어 취해진 물체들의 집합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완전한 혼합물을 형성한다(이 혼합물은 원인들의 통일성 또는 우주적 현재에 다름아니며, 이 우주적 현재에 관련해 악 자체는 '결과'의 악에 다름아니다). 물체-수동들이 존재하면, 물체-능동들, 거대한 우주의 통합된 물체들도 존재한다.
스토아적 도덕은 사건과 관련된다. 스토아적 도덕은 사건을 그 자체로서 원하는 데에, 즉 발생하는 것을 그것이 발생하는 한에서 원하는 데에 있다. 우리는 아직 이 정식들의 유효 범위를 평가할 시점에 와 있지 않다. 그러나 어쨌든 어떻게 사건이 그것의 원인인 물체적 원인에, 그리고 이 원인을 가로질러 자연(Physis)으로서의 원인들의 통일성과 관련되지 않고서 포착될 수 있으며 또 원해질/의지될(voulu) 수 있겠는가? 따라서, 여기에서 도덕을 정초하는 것은 예견(divination)이다.*원인들의 통일성을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그러한 파악 이전에 사건을 포착할 필요가 있다. 이 때문에 예견(또는 점)이 필요하다.* 결국 예견적인 해석은 순수 사건(아직 효과화되지 않은 사건)과 이 사건의 유래가 되는 물체들, 물체적 능동들과 수동들 사이의 관계를 겨냥한다. 그리고 정확히 우리는 이 해석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말할 수 있다.
여전히 중요한 것은 두께를 가로질러 자르는 것, 표면들을 마름질하는 것, 그들을 정향시키는 것, 그들을 증식시키고 복수화하는 것이다. 이들 위에 그려지는 선분들과 단면들의 윤곽을 따라가기 위해서. 마찬가지로 하늘을 여러 부분들로 나누고 그 위에 새들이 날아가는 궤도를 분배하는 것, 땅 위에서 돼지의 콧잔등이 그리는 글씨를 따라가는 것, 표면으로 간을 꺼내고 거기에서 선분들과 갈라진 틈들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견은 그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 표면들 및 거기에 나타나는 선분들과 특이점들의 기법이다. 그래서 두 예언자는 익살스럽게 웃지 않고서는 서로를 쳐다볼 수 없다(물론 두 작업을, 즉 여전히 물체적인 선분들, 그리고 이마주들, 각인들, 또는 표상들을 위해 물리적 표면을 생산하는 것과 이들을 '형이상학적' 표면*여기에서의 '형이상학'은 물질 저편의 실재를 탐구하는 담론이 아니라 물질 이편의 사물들의 표면(형이상학적 표면)을 탐구하는 담론이다.* 위에서 번역하는 것을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형이상학적 표면 위에서는 다만 순수 사건의 비물체적 선분들만이 뛰놀며, 이 순수 사건이 이 이마주들의 해석된 의미를 구성한다.

표상, 선용, 표현
그러나 분명, 스토아적 도덕이 예견의 자연철학적 방법들에 의존할 수 없었고 의존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던 것, 그와는 전혀 다른 극에 바탕해 정향되고, 전혀 다른 방법 -논리학적 방법- 을 따라 전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골드슈미트는 스토아적 도덕이 그 사이에서 진동했던 양극의 이 이원성을 잘 보여주었다. 문제는 한편으로 우주적 현재의 통일성 내에서 모든 물체적 원인들을, 이들로부터 유래하는 사건들에 대한 예견을 이끌어내기 위해, 심층에서 재결합시킴으로써 신성한 전망(une vision divine)에 가능한 한 참여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 역으로, 처음부터 사건에 최소의(plus limite qui soit) 현재만을 부여함으로써 그 효과화를 동반하는 '표상들의 사용'에 힘입어, 그것[사건]을 어느 경우든 해석 없이 원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우주적 현재로부터 아직 효과화되지 않은 사건으로 가게 되며, 후자의 경우 순수 사건으로부터 그 최소(la plus limite) 현존의 효과화로 가게 된다. 그리고 특히, 전자의 경우 우리는 사건을 그 물체적 원인들과 그들의 물리적인 통일성에 결부시키게 되며, 후자의 경우 사건을 그 비물체적 준원인 -그것[사건]이 효과화됨으로써 모으고 공명시키는 인과율- 에 결부시키게 된다. 이 이중의 극은 이미 이중 인과의 역설 속에 그리고 정적 발생의 두 특성들 -되돌릴 수 없음과 생산성, 무차이와 효과성(efficacite)- 속에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스토아적 현자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무구한 개념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번째 극의 불충분성은 사건들은 비물체적 효과들이며 때문에 그들의 원인이 되는 물체적인 것들과 본성상 다르다는 점, 그들과는 다른 법칙들을 가지며 오직 비물체적 준원인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키케로는 시간의 이행이 굵은 밧줄의 풀림(explicatio)과 유사하다는 것을 정확히 지적했다. 그러나 바로, 사건들은 원인들이 감겨진 밧줄의 원주(크로노스) 안에 있는 것처럼 펼쳐진 밧줄의 직선(아이온) 위에 실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표상들*스토아 학파에서 '표상'(phantasia)이란 물체가 우리를 촉발함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표상은 '수동적 상태'이다. 스토아 학파는 소피스트들을 따라 이 표상에 기반해 논의하며, 때문에 때로 '감각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는 소피스트적인 결론에 이르지 않으며, 표상에서 출발해 로고스를 담고 있는 보다 안정적인 인식에 도달하고자 한다. 논리학에 있어, 표상과 감각에 대한 이론이 "앞에 놓여야 한다(protattein)." 그후 동의, 이해, 사고 등에 대한 이론이 구축된다.*의 논리학적 사용, 에픽테토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정점으로 끌어올려진 이 기법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한(parvenue) 바의 표상에 대한, 각인된 한에서의 물체적인 감각적 표상에 있어 수용*물체가 영혼을 촉발해 정동작용(pathos)이 발생하면, 영혼은 이 작용을 수용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상의 포착(katalepsis)을 수행한다. 이 수용은 영혼의 의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수동적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인식의 확실성을 확보한다. 즉, 표상이 영혼에 '각인되는' 것이다. 표상과 수용 사이에는 자연이 보장하는(principia naturalia) 조화가 있다. 스토아 학파는 이와 대비해 영혼의 상상이나 의지가 개입된 표상을 가리키기 위해 'phantasma'를 사용한다.*의 역할과 본성에 대한, 그 자체 물체적인 것들인 합리적[추론이 개입된] 표상들이 감각적 표상들로부터 유래하는 방식에 대한, 그러나 무엇보다도 '포착적일'**'포착적인'(comprehensive) 표상은 영혼의 개입 없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표상이다. 즉, 확실하고 객관적인 표상이다.**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표상의 특성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마지막으로 표상-물체들(또는 각인들)***근대 사유에서와 달리 스토아 학파에서는 표상된 것, 각인된 것도 어디까지나 물체적인 것이다. 영혼 자체가 물체적인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 물체적인 것이 표상이고 표상인 발생할 대 일어나는 비물체적인 것이 사건이다. 이 사건은 표상된 것이 아니라 '표현된 것'이다. 이때 표상과 표현의 관계가 문제된다.***과 비물체적인 사건-효과들 사이의 (표상들과 표현들 사이의) 차이의 범위에 대한 스토아적 이론의 애매함을 잘 알고 있다.3) 비물체적인 표현 가능한 것을 표상 -합리적 표상까지 포함해- 으로 환원시킬 수 없음에 대해서는 브레이어의 앞의 저작의 가장 뛰어난 부분을 보라./
우리의 주제에 본질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마지막의 두 어려움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표상들은 지시 작용들, 그리고 기호 작용들의 합리적인 표상들이지만, 오직 비물체적인 사건들만이 표현된 의미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표상과 표현 사이의 이 본성상의 차이를 우리는 도처에서, 즉 의미나 사건의 특수성, 기표로도 지시 대상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성격, 일반과 특수에 대한 중성, 그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을 지적할 때마다 만났다. 이 차이는 상식/공통 감각에 있어 표상의 동일화적(identitaire) 심급으로서의 대상=x와 역설에 있어 표현의 동일화 불가능한 요소로서의 무엇[사물=x]의 대립과 더불어 절정에 달한다. 그러나 의미가 결코 가능한 표상의 대상이 아니라 해도, 분명 그것은 (표상이 그 대상과 맺는 관계에 매우 특수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서) 표상에 개입한다. 그 자체로서의 표상은 유사성이나 상사성의 오직 외재적일(exrinseque) 뿐인 관계*의미를 내포하지 않은 채, 단지 대상의 등가물을 수용할 뿐인 관계이다.*로 귀착한다. 그러나 그것[표상]을 내재적으로(intrinseque) '분명한'(distincte), '적실한'(adequate), 또는 '포착적인'(comprehensive) 것으로 만드는 내적 특성은 그것이 표현을 (표상할 수는 없지만) 포착하는, 내포하는 방식에 기인한다.
표상과 본성상 다른 표현 역시 표상 안에 내포된(또는 내포되지 않은) 것으로서 작용한다. 예컨대 사태와 성질로서의[지시 작용을 통한] 죽음의 지각, 또는 기호 작용에서의 술어로서의 '죽을 운명의'라는 개념은 이들이 죽다라는 사건을 전자에게서 효과화되고 후자에게서 표현되는 것으로서 포함하지 않을 경우 외재적인(의미를 박탈당한) 것으로 머문다. 표상은 그것이 표상하지 못하는, 그러나 그것 없이는 그 자체 '포착적'이 되지 못하고 우연적으로만 또는 바깥으로부터만 진리에 속하게 되는 하나의 표현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가 죽을 운명의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은 '죽다'라는 것을 언제나 열려 있는 문제적 구조(어디에서? 언제?)를 갖춘 비인칭적 사건으로서 이해하지 않는 한 이 앎은 공허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머물며, 효과적이고(effectives) 계기적인(successives) 죽음들은 분명 그것을 적절히/충전적으로(adequatement) 채울 수가 없다.
두 유형의 지식, 즉 무차이적이고 그 대상에 외재적인 것으로 머무는 지식과 구체적이며 그 대상을 그것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찾으려 하는 지식이 종종 구분되었다. 표상은 그것이 포함하는 표현에 의해서만, 즉 그것이 내포하는 사건에 의해서만 이 심급론적인 이상(ideal topique)**심급론적인 이상이란 형이상학적 표면에 대한 탐구와 통한다.**에 도달한다. 그래서 표상이 생명과 의미를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표상의 '선용'이 존재한다. 비트겐슈타인과 그의 제자들은 정당하게도 의미를 사용에 의해 정의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사용은 표상된 것에 대한 표상의 기능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나아가 가능성의 형식으로서의 표상성(representativite)에 의해 정의되지도 않는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기능적인 것은 심급론으로 넘어가며, 선용은 표상이 표상 외적인 어떤 것 -표상되지 않은, 단지 표현되었을 뿐인 존재- 과 맺는 관계 안에 있게 된다. 표상이 다른 본성의 사건을 내포한다는 것, 그 가장자리에서 사건을 내포하기에 이르는 것,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구부러지는 것, 표상이 이 안감 도는 옷단을 성공적으로 만드는 것, 이들이 살아 있는 사용을 정의한다. 표상이 이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표상은 그 표상된 것에 직면해 죽은 문자로서만 머물며, 표상성의 한가운데에서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사건을 이해하기, 원하기, 표상하기
스토아적 현자는 '스스로를' 준원인과 '동일시한다'. 그는 표면에, 이 표면을 가로지르는 직선 위에, 이 선분을 긋거나 주파하는 우발점에 자리잡는다. 또한, 그는 사수와도 같다. 그러나 사수와의 이러한 관계가, 플루타르크가 우리에게 스토아적 현자는 목표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도달을 위해 그에 의존했던 모든 것을 행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행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처럼, 의도에 대한 도덕적 은유의 일종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합리화는 철늦은, 그리고 스토아 학파에게 적대적인 해석을 함축한다. 사수와의 관계는 선에 더 가깝다. 궁수는 겨누어진 것이 또한 겨누어지지 않은 것(즉, 궁수 자신)이 되는 지점, 화살이 그 목표 지점을 창조함으로써 직선 위로 뻗어가는 지점, 과녁의 표면이 또한 직선과 점, 궁수, 쏘기, 화살이 되는 지점까지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pro-airesis'[미리 생각하며 정함(=의도, 의지)]로서, 오리엔트적인 스토아적 의지이다. 여기에서 현자는 사건을 기다린다. 즉, 그는 순수 사건을 그 영원하 진리에 있어, 그 시공간적 효과에 독립적으로, 아이온의 선을 따라 영원히 올 것이며 동시에 언제나 이미 지나가버린 것으로서 이해한다(comprend).
그러나 또한 동시에(en meme temps, du meme coup), 스토아적 현자는 구현을, 즉 비물체적 순수 사건이 사태 안에서, 적절한 물체 안에서, 적절한 살 안에서 효과화되기를 원한다. 즉 현자는, 스스로를 준원인과 동일시함으로써, 비물체적 효과를 '물체화하기를'(corporaliser) 결과는 원인을 이어받기 때문이다(골드슈미트는 사건으로서의 산책에 대해 정확히 지적한다. "[물체=존재가 아니라] 존재 방식인 한에서의 비물체적인 산책은 그곳[산책]에서 드러나는 주요 원리의 효과 아래에서 문제화된다." 그리고 상처나 활쏘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만일 사건이 이미 물체적 원인들의 심층에 의해 그리고 이들 안에서 생산되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현자는 비물체적 사건의 준원인일 수 있으며, 또 준원인이 됨으로써 그 사건의 구현을 원할 수 있겠는가? 만일 병이 신체의 저 밑바닥에서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준원인은 창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동하며'(opere), 단지 일어나기만을(arrive) 원한다. 표상과 그것의 선용이 개입하는 것도 바로 여기이다. 그래서 물체적 원인들은 비물체적 사건을 생산하는 우주적 혼합물, 보편적 현재에 의해 작용을 가하고 받으며, 준원인은 이 물리적 인과를 이중화시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준원인은 사건을 극한적으로 제한된[최소의] 현재 -미래와 과거로 분할되는 지점에서 포착된, 그리고 더 이상 그 자체 과거와 미래를 모을[시간을 쟁여 두꺼워질] 세계의 현재가 아닌, 가장 정확하고 가장 순간적인 순수 순간- 안에 구현시킨다.
행위자는 순간 안에 머무른다. 그러나 그가 역할을 맡은 인물은 미래 안에서 희망하거나 두려워하며, 과거 안에서 회상하거나 다시 매달린다. 행위자가 표상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순간 안에서 작용하는 시간의 최소치를 아이온을 따라 사유 가능한 시간의 최대치와 상응시키는 것, 시간의 효과화를 혼합물 없는 현재에 국한시키는 것, 순간을 그만큼 더 강도 높고 긴장되게(tendu), 그것이 한계지어지지 않은 미래와 과거를 표현하는 만큼 더 순간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표상의 선용이다. 즉, 더 이상 점쟁이가 아니라 무언극 배우가 되는 것. 이제 우리는 가장 큰 현재로부터 보다 작은 현재에 의해서만 말해지는 미래와 과거로 가기를 그친다. 반대로, 한계지어지지 않은 것들로서의 미래와 과거로부터 끝없이 분할되는 순수 순간의 최소의 현재에까지 간다. 그래서 스토아적 현자는 사건을 이해하고 원할 뿐만 아니라 사건을 표상(재현)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선별한다. 그리고 무언극의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의미의 논리학을 확장시킨다. 한 순수 사건에서 출발해, 무언극은 효과화를 이끌고 이중화한다. 무언극은 혼합물 없는 한 순간의 도움으로 혼합물들을 측정하며, 그들이 넘쳐나지 못하도록 한다.

계열 21 - 사건

사건의 영원한 진리
사람들은 종종 구체적으로 또는 시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스토아적이라고 이름붙이기를 꺼려 왔다. 한 독트린의 이름이란 한 상처와의 극히 개인적인 관계를 지시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러나 독트린들이 (예시를 통한 자극에 결부되어 있는) 사변적인 일화이기도 한 상처들과 생생한 격언들이 아니라면 어지에서 생겨나겠는가? 조 부스케를 스토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그의 몸에 깊이 새겨진 상처를, 그렇지만 그리고 바로 그런 마늠 그 영원한 진리에서 순수 사건으로서 이해했다. 사건들이 우리에게서 효과화되는 그만큼, 그것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열망하며,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 사건이 우리에게 만들어주는 이 의지에 도달하는 것, 우리에게서 생산되는 것의 준원인 즉 담지자(l'Operateur)가 되는 것, 표면들과 안감들을 생산하는 것(이 표면들과 안감들에서 사건은 일반적인 것과 특수한 것, 집단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넘어 반사되며, 비물체적인 상태에 놓이며, 그것[사건]이 자체로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것으로 소유하는 빛나는 중성을 우리에게서 드러낸다), 요컨대 세계 시민이 되는 것. "내가 사건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전에, 모든 것은 내 삶의 사건들 안에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사건들을 산다는 것은, 마치 이들이 그 가장 뛰어나고 완전한 측면을 나로부터만 취해야 하는 것처럼, 나를 그들과 동일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도덕은 아무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아니라면, 도덕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곧 의미일 뿐이다. 도덕이 말하려는 것은 오로지 이것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되지 말라. 반면, 자신에게 발생하는 일을 불공정하고 부적격한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경우, 일어난 일은 언제나 누군가의 잘못이 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꺼림칙한 상처, 인칭적인 원한, 사건에 대한 원한을 가져온다. 진정으로 비도덕적인 것은 도덕적 개념들의 모든 사용 -정당한, 정당하지 않은, 자격 있는, 자격 없는- 이다.
그렇다면 사건을 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이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을 받아들이고, 상처나 죽음이 일어났을 때 이들을 받아들이는 것인가? 체념/인내가 여전히 원환의 형상(figure), 즉 사실 그만큼의 형상들을 가진 원한일 수 있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건을 원한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 그로부터 (그것에 양분을 공급하는 불로서의) 영원한 진리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이 원함은 전쟁이 전쟁에 대립하는 지점, 상처가 모든 상처들의 흉터로서 생생하게 그어지는 지점, 죽음이 모든 죽음들에 반해 바람으로(voulue) 뒤집힌 죽음이 되는 지점에까지 이른다. 의지적인(volitive) 직관 또는 변이.
부스케는 말한다. "나는 의지의 좌절인 죽음에 대한 내 취향을 의지의 신격화적인 죽음에의 바람으로 대체할 것이다." 이 취향엣서 이 바람으로 가면서, 어떤 면에서 의지의 변화를 제외하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의지 변화는 유기적 의지를 정신적 의지로 교환하는, 이제 익살스럽고 모호한 자연과의 합일(conformite)의 법칙들에 따라, 정확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발생하는 것 안의 어떤 것, 발생하는 것에 합일해 도래할 어떤 것 -대사건- 을 원하는 모든 물체의 장소 위로 도약하는 것이다. 운명애(Amor fati)가 자유로운 인간들의 전투와 하나가 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모든 사건 안에는 나의 불행이, 그러나 또한 그 불행을 말려버리는(seche), 의지의 대상으로 만들어 사건을 그 정점, 그 분절선 위에서 효과화되게 만드는 빛남과 파열이 존재한다는 것, 이것이 정적 발생 또는 무구한 개념화의 효과이다. 사건의 파열, 빛남은 바로 의미이다. 사건은 발생하는 것, 즉 사고가 아니다. 사건은 발생하는 것에 있어 우리에게 신호하고 우리를 기다리는 순수 표현된 것이다. 앞선 세 가지 규정들을 따를 때, 사건은 이해되어야 하는 것, 원해져야 하는 것, 발생하는 것 안에서 표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스케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그러한 불행의 인간이 되라. 그 완전함과 파열을 구현하는 것을 배우라." 우리는 이 이상을 말할 수 없고, 그 이상을 말한 바도 없다. 우리에게 발생하는 것을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래서 그것을 원하고 그로부터 사건을 이끌어내는 것, 그 고유한 사건들의 아들이 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것, 탄생을 다시 이룩하는 것, 그 살의 탄생과 분리되는 것, 사건들의 아들이지 그 작품들의 아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그 자체 사건의 아들에 의해 생산될 뿐이기 때문이다.

효과화와 반효과화: 행위자
행위자는 신(un dieu) 보다는 반신(contre-dieu)과 유사하다. 신과 행위자는 시간을 달리 읽음으로써 대립한다. 인간이 과거나 미래로 파악하는 것을 신은 그 영원한 현재에 있어 본다. 신은 크로노스이다. 신적인 현재는 원환 전체이지만, 과거와 미래는 그 바깥에 나머지를 놓는 이런저런 절편(segment)에 상대적인 차원들이다. 반면 행위자(actor)의 현재는 가장 조밀하고 날카롭고 순간적이고 점괄적이다. 그것은 끝없이 선분을 분할하며 또 그 자체 과거-미래로 분할되는 한 직선 위의 점이다. 행위자는 아이온에 속한다. 즉, 가장 심층적이고 충만한 현재, 즉 기름방웅ㄹ을 만드는[시간을 모으는], 미래와 과거를 포괄하는 현재 대시네, 이제 두께도 얇음도 없는 텅 빈 현재 안에 반사되는 한계지어지지 않은 과거=미래가 나타난다.
행위자는 표상한다. 그러나 그가 표상하는 것은 [사건이며 따라서] 언제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다. 반면 행위자의 표상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며, 또 부수어지지 않고 작용을 가하지도 받지도 않으면서 분할되고 분열된다(se divise et se dedouble). 희극 배우의 역설이 존재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그는 끊임없이 앞서가거나 뒤처지는, 희망하거나 회상하는 어떤 것을 연기하기 위해 순간 안에 머문다. 그가 연기하는 것은 결코 한 인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요소들, 즉 개체들과 인칭들의 극한들로부터 효과적으로 해방된 소통하는 특이성들에 의해 구성된 하나의 테마(복잡한 테마 도는 의미)이다. 행위자는 스스로를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역할로 개방하기 위해 그의 모든 인칭성(personnalite)을 여전히 좀더 분할될 수 있는 한 순간 안에 놓는다. 또한, 여전히 그는 다른 역할들을 연기하는 하나의 역할은 연기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역할과 행위자의 관계는 미래-과거와 현재 -아이온의 선분 위에서 이들과 상응하는 순간적인 현재- 의 관계와 같다. 그래서 행위자는 사건을 효과화하지만 그것은 사건이 사물들의 심층에서 효과화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통해서이다. 아니면 차라리, 그는 이 우주적, 물리적 효과화를 특이하게 표면적인, 그만큼 매끈하고 날카롭고 순수한 다른 효과화를 가지고 이중화한다. 뒤의 효과화는 앞의 효과화의 범위를 제한할 것이고, 그로부터 하나의 추상적인 선을 이끌어낼 것이고, 사건으로부터 가장자리나 빛남만을 지킬 것이다. 이것은 곧 그 고유한 사건들을 통해 희극 배우가 되는 것, 반효과화(contre-effectuation)이다.
왜냐하면 물리적 혼합물은 바로 전체의 수준, 신적인 현재의 원환 전체 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각 부분에 있어 얼마나 많은 불명예와 불공정이 있는가.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우리의 공포, 일어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원한을 자극하는 얼마나 많은 식인적이고 기생적인 과정이 존재하는가. 익살은 선별하는 힘과 분리되지 않는다. 익살은 일어나는 것에서 순수 사건을 선별한다. 예컨대 먹는 것에서 말하는 것을 선별하는 것이다. 부스케는 익살-행위자의 특성들을 제시한다. 흔적을 만들 때마다 그것을 지워버리는 것, "인물들과 작품들 가운데에서 고통 앞에 있음이라는 그들의 존재를 선별하는 것", "가장 끔찍한 페스트, 독재자, 전쟁에다가 그 무엇을 위해서도 지배하지 않은 희극적인 기회를 결부시키는 것", 요컨대 각각의 사물들을 위해 '무구한 몫', 언어와 원함(vouloir), 운명애(Amor fati)를 이끌어내는 것.

사건으로서의 죽음의 두 측면
왜 모든 사건은 페스트, 전쟁, 상처, 죽음과 같은 유형의 것들일까? 이것이 단지 행복한 사건들보다는 불행한 사건들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다. 문제는 모든 사건의 이중적 구조에 있다. 모든 사건에 있어, 효과화의 현재 순간이, 즉 사건이 사태, 개체, 인칭에 구현되는 순간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 순간을 가리키면서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건의 미래와 과거는 이 일정한 현재에 따라, 그 현재를 구현하는 존재의 관점에 따라 판단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사건의 미래와 과거가 그 자체로서 포착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사건의 미래와 과거는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중성적인, 일반적이지도 특수하지도 않은 사건 자체(eventum tantum)이기 때문에 한 사태의 제한들로부터 벗어나며, 따라서 모든 현재를 비켜간다. 아니면 차라리, 사건의 과거와 미래가 현재를 가진다면, 반효과화라고 불러야 할 것을 형성함으로써 미래와 과거를 표상하고 또 늘 과거-미래로 분할되는 동적인 순간의 현재만을 가질 것이다.
전자의 경우, 나에게 너무 연약한[비물체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 그리고 나와의 일정한 관계 안에서 현재가 된 한 점으로 도망치는 것은 바로 나의 삶이다. 후자의 경우, 삶과 관련해 너무 연약한 것은 바로 나이며, 삶은 나에게 너무나 거대하다. 이 거대한 삶은 도처에 그 특이성들을 뿌리며, 나와도 또 현재로서 규정될 수 있는 한 순관과도 관계 맺지 않는다. 단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와 이미 지나간 과거로 분할되는 비인칭적인 순간과 관계 맺을 뿐이다.
이 양의성이 본질적으로 상처와 죽음의, 치명적 상처의 양의성이라는 것을 블랑쇼만큼 잘 보여준 사람은 없다. [블랑쇼에 따르면] 죽음이란 나 그리고 내 몸과 극단적인 또는 확정적인 관계에 놓이는 것, 내 안에서 정초되는 것이며, 동시에 나와 관계 없는 것, 비물체적이고 부정법적인, 비인칭적인 것이자 그 자체 내에서만 정초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현실화되고 실행되는 사건의 부분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사건의 부분"이 있다. 그래서 두 종류의 실행이 있게 되며, 이들은 효과화와 반효과화에 상응하낟. 이런 맥락에서 죽음과 상처는 다른 사건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죽음]은 현재의 심연이며, 현재 없는 시간이다. 내가 그것과 관계 맺을 수 없는, 내가 그리로 나 자신을 던질 수 없는 시간이다. 왜냐하면 죽음 안에서 나는 죽지 않기 때문에, 나는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있어 누군가가(on) 죽는다. 누군가가 죽기를 멈추지 않으며 죽기를 끝내지 않는다."

사건을 원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누군가는 일상적인 진부함의 누군가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것은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누군가이며, 그저 비가 오듯이 죽는(il meurt comme il pleut)*여기에서 'il'은 가주어이다.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주어를 말한다.* 순수 사건의 누군가이다. 누군가의 빛남은 사건 자체의 또는 4인칭의 빛남이다. 때문에 사적인 사건들도 또 집단적인 사건들도 없다. 나아가 개별적인 것도 보편적ㅇ인 것도, 특수성들도 일반성들도 없다. 모든 것은 특이하며(singulier), 때문에 집단적인 동시에 사적이며, 특수하면서 일반적이고, 개별적이지도 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어떤 전쟁이 사적인 일이 아니겠으며, 역으로 어떤 상처가 전쟁과 사회 전체로부터 오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전쟁이 모든 세상과 관련된다고 말하는 데에는 상당한 불명예가 있다. 그렇지 않다. 전쟁은 그것을 이용하거나 그에 종사한 사람들, 즉 원한이 만들어낸 사람들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각자가 그의 전쟁, 그의 특수한 상처를 가지고 잇다고 말하는 것도 불명예스러운 것이다. 흉터를 긁는 사람들, 즉 또한 고통과 원한이 만들어낸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자유로운 인간에게만 참이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인간은 사건 자체를 포착하기 때문이며, 또 행위자로서 그것[사건]의 반효과화를 조작하지 않고서는 그렇게 효과화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자유로운 인간만이 하나의 유일한 폭력에 포함되는 모든 폭력들을, 하나의 유일한 대사건(Evenement)에 포함되는 치명적인 사건들을 포괄할 수 있다(이 사건은 더 이상 사고에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으며, 개인 내의 원한의 잠재력뿐만 아니라 사회 내에서의 억압까지도 파괴하고 복구시킨다). 독재자가 동맹군들, 즉 노예들과 하인들을 얻는 것은 원한을 퍼뜨림으로써이다. 오로지 혁명가만이 사람들을 억압적인 질서에 참여하게 만들고 그 질서로부터 이득을 취하는 존재로 만드는 원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대사건인가? 모든 것을 혼합하는 대신에 혼합물 없이 즉각적으로 추출하고 정화하고 측정하는 혼합물. 그래서 모든 폭력들과 모든 억압들은 하나의 유일한 사건 안에 모이며, 이 사건은 이들 중 하나 -물음에서 가장 가까운 또는 마지막의 상태- 를 파기함으로써 모든 것을 파기한다. "시인이 요구하는 정신병리학은 인칭적 운명(destine personnel)의 불길한 작은 사고, 개인적인 흠이 아니다. 그것은 시인의 몸에 발생한 그리고 그것[몸]을 다치게 만든 우유 배달인의 트럭이 아니다. 그것은 빌노(Vilno)의 빈민촌들 안에 그의 조상들을 몰아넣는 상 누아르(Cent Noirs)의 기사들이다. ......그의 머리에 가해진 타격들은 부랑아들의 난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경찰이 시위자들을 때려잡을 때....... 그가 귀머거리 천재처럼 울부짖는다면, 그것은 게르니카와 하노이의 폭탄들이 그를 귀먹게 했기 때문이며, ......" 변이가 이루어지는 것은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유일한 사건 안에서 그렇게 재결합되는 그 동적이고 엄밀한 [위치를 갖는] 지점, 즉 죽음이 다시 죽음에 맞서 돌아서는 지점, 죽다(mourir)가 죽음의 목적지와도 같은 지점, 죽음의 비인칭성이 이제 단지 내가 내 바깥으로 나가 상실되는 순간만이 아니라 죽음이 그 자체로서 상실되는 순간까지, 그리고 나를 대체하기 위한 가장 특이한 삶이 취하는 형태까지 표식하는 지점에서이다.5) Maurice Blanchot, op. cit., p.155. "죽음을 그 자체로서 고양시키기 위한, 죽음이 자체 안에서 상실되는 지점과 내가 내 바깥에서 상실되는 지점을 일치시키기 위한 이 노력은 단순한 내면적인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과 관련해 막중한 책임을 함축하며, 오로지 사물들의 매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

계열 22 - 자기와 화산

균열(피츠제럴드) "모든 인생은 물론 몰락의 과정이다." 이 문장처럼 우리의 머리 안에서 망치로 치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울리는 문장도 없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짧은 소설처럼 걸작의 풍모를 드러내는, 침묵을 명령하는, 끔찍한 동의를 강요하는 특성, 돌이킬 수 없는 특성을 가진 텍스트도 없을 것이다. 피츠제럴드의 모든 저작들은 이 명제의, 특히 그 '물론'(bien entendu)의 연속적인 발전이다. 여기에 남자와 여자가 있고, 저기에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의 모든 요건들 -뛰어난 외모, 매력, 부, 얄팍하지만 다양한 재능- 을 갖춘 짝들이 있다(이미 하나의 운동, 즉 이행의 과정으로서 정의된 과정의 문제가 아니라면 왜 짝이 제시되겠는가?). 그리고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 이들로 하여금 마치 접시나 병이 깨지듯이 무너지게 만든다. 그리고 분열증과 알코올 중독이 죽음이 둘 모두를 앗아갈 때까지 끔찍한 동석을 이룬다.
이것이 유명한 자기 파괴인가? 또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은 능력을 넘어서는 그 어떤 특별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들에게는 너무 큰 전투에 의한 것처럼 부수어진 몸뚱아리, 으깨진 근육, 식어버린 영혼과 더불어 깨어난다. "나는 버려진 사격장에서 총알없는 총을 들고, 떨어진 과녁을 바라보며 황혼녘에 서 있는 그런 느낌이다. 해결해야 할 어떤 문제도 없다. 단지 침묵 그리고 내 숨소리만이 있을 뿐. ......나 자신에 의한 나의 희생은 검게 그을린, 물에 젖은 총구이다." 물론,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많은 일이 일어났다. 전쟁, 파산, 노화, 절망, 병, 그리고 재능의 탈진. 그러나 이 소란스러운 사고들은 이미 그 즉각적인 효과들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이 전혀 다른 본성, 그리고 역으로 이 어떤 것 -말 없는 균열- 을 멀리에서만 그리고 뒤늦게만 파헤치고 심화시킨다면 그들은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왜 평화, 사랑, 건강을 차례로 잃어버렸는가?"
표면 위에서는 말없는, 지각할 수도 없는 균열이 스스로의 위를 활공하고 스스로의 장 위를 미끄러져 날아감으로써 자신 위에 걸린 것으로서의 유일한 대사건이 존재해왔다. 진정한 차이는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사이에 있지 않다. 균열은 내면적이지도 외면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경계선상에 있으며, 감각할 수 없고 비물체적이고 비물질적이다. 또한, 균열은 외부적,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일과 개입, 엇갈림, 불규칙적인 -한 번은 내부를 위해 또 한 번은 외부를 위해, 상이한 두 리듬으로 발생하는- 연접(jonction) 같은 복잡한 관계들을 맺는다. 소란스럽게 발생하는 모든 것은 균열의 가장자리[표면]에서 발생하며 균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역으로 균열은 일어나는 일 아래에서만 그 말 없는 길을 따라갈 것이고, 최소 저항의 선을 따라 방향을 바꿀 것이고, 그 폭을 넓힐 것이다. 이제 균열의 모든 놀이가 물체의 심층에 구현되었음을, 동시에 그것의 내부적 외부적 노동이 가장자리들을 늘렸음을 뜻하는 최후의 붕괴와 파열 안에서, 소란과 침묵이 밀접하게 연결되는 그 순간에 이르기까지.2) 우리를 다음과 같이 위로하는 친구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빌어먹을, 내가 균열된다면 나는 나와 더불어 세계를 폭발시킬 것이다. 세계는 당신이 그것을 파악하는 방식에 따라서만 실존한다. 그러니 금이 간 것은 당신이 아니라 그랜드캐넌이라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투출(projection)에 의한, 미국인에 대한 이러한 위로는 균열이 외부적인 것도 내부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 그리고 외부로의 그의 투출이 가장 순수한 투입(introjecton) 못지않게 종말에의 접근을 표식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큰 소용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균열이 그랜드캐년의, 도는 시에라 마드레에 있는 암벽의 균열이 된다 한들, 협곡, 산, 화산 같은 우주적인 이마주들이 내적이고(intime) 친숙한 자기(porcelein)를 대체한다 한들, 무엇이 변하겠으며, 또 어떻게 돌멩이들에 대한 연민을, 스스로 돌이 되는 동일화를 막을 수 있겠는가? 로리가 다른 짝의 한 사람에게 말하게 했듯이, "그가 금이 갔다고(fendu) 인정한다 해도, 총체적인 붕괴가 시작되기 전에 적어도 조각난(disjointes) 절반들을 구할 어떤 길도 없다는 말인가? ......오! 그러나 왜 우리는 일종의 지질학적인 마술에 의해 이 조각들을 붙일 수 없단 말인가? 이본(Yvonne)은 부수어진 바위를 붙이겠다고 안달해싿. 돌멩이라는 한계를 넘어서는 노력을 통해, 돌멩이는 다른 돌멩이에게 다가갔고, 기도를 통해, 뜨거운 눈물을 통해 토로했으며, 진정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래서 되돌릴 수 없는 타자가 남았다. 그는 말했다. 상관 없다고, 그러나 그것은 너의 잘못이라고, 나로 말하면 내 스스로 분열된(desintegrer) 것이라고."/

두 과정, 그리고 이들을 구분짓는 문제
여기에는 두 요소, 본성상 다른(이들 서로간의 연결이 아무리 밀접하다 해도) 두 과정이 존재한다. 그 하나는 그 비물체적이고 말없는 직선을 표면으로 확장하는 균열이고, 다른 하나는 이 균열을 일탈시키고 심화시키는, 물체의 두께 안에서 그것을 각인하거나 효과화하는 외부적 수들 또는 소란스러운 내부적 자극들이다. 이것이 위에서 블랑쇼가 구분했던 죽음의 두 측면이 아닌가. 그 하나는 사건으로서의 죽음, 즉 과거와 미래 안에서 분할될 뿐 결코 현존하지는 못하는, 그리고 이들[과거와 미래]로부터 분리되지 못하는 사건으로서의 죽음이다. 이 죽음은 "비인칭적인 죽음으로서, 파악 불가능한 죽음, 결코 오지 않을, 내가 그리로 나아가지 않을, 어떤 종류의 어떤 관계에 의해서도 나와 연계되지 않는 죽음이다."
다른 하나의 죽음은 가장 냉혹한 현재 안에서 발생하고 효과화되는, "극단의 지평으로서 죽을 자유를, 그리고 치명적으로 위험에 처하는 능력을 가지는" 인칭적 죽음이다. 우리는 두 과정의 연계를 가능케 하는 매우 다양한 여러 방식들을 인용할 수 있다. 자살, 광기, 마약 복용, 알코올 중독. 아마도 마지막의 두 방식은, 그들이 두 직선을 한 치명점(point fatal)에서 섞어버리지 않고서 취하는 시간으로 말미암아 가장 완벽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 어떤 경우든 어떤 환상적인 것이 존재한다. 블랑쇼가 자살을 죽음의 두 얼굴을 일치시키려는, 가장 인칭적인 행위에 의해 비인칭적인 죽음을 확장하려는 의지로서 생각할 때, 그는 이 접합의, 이 접합에의 시도의 불가피성을 잘 보여주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의 환상(illusion)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3) Blanchot, op.cit., pp. 104~105. "자살을 통해,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죽이고자 하며, 죽음을 지금에 잇는다. 그렇다, 지금, 지금. 그러나 그 무엇도 더 이상 환상을, 이 나는 원한다의 광기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죽음은 결코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자살은 죽음을 모으는 것이 아니다. 자살은 차라리 죽음을 미래의 것으로서 제거하고자, 그것[죽음]으로부터 (그 본질로서의) 장래(avenir)의 이 부분을 지우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죽이고자 계획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준비할 수 있고, 행해야 할 일들의 정상적인 범주에 여전히 속하는 궁극적인 몸짓을 위해서 행위하지만, 이 몸짓은 죽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죽음을 응시하지 않으며, 죽음을 그 현존에 있어 취하지 않는다...... ."/ 결국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거나 확장되는 것 사이에 모든 본성상의 차이가 존속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본성상의 차이가 추상적인 사상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누구를 위해서 존속하겠는가?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해 사상가는 어떻게 우스꽝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두 과정은 분명 본성상 다르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자연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잇지(prolonge) 않게[수렴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표면에서의 비물체적 균열의 말없는 선이 어떻게 또한 소란스러운 물체의 두께 내에서 심화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사건들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신체의 층위에 영향을 미침을 가리킨다.* 표면의 단절이 어떻게 심층의 갈라짐(Spaltung)이 되지 않을 수 있으며, 표면의 무의미가 심층들의 무의미로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원한다는 것이 사건을 원하는 것이라면, 또한 어떻게 물체적 혼합물 안에서 그리고 모든 섭취를 주재하는 이 비극적 의지 아래에서 그 충만한 효과화를 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표면의 질서 그 자체가 균열되어 있다면, 그것이 어떻게 스스로 부수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그에 연결되어 있는 모든 이득, 언어의 조직화, 나아가 삶 그 자체를 상실할 것을 무릅쓰고서라도 어떻게 그 파괴를 조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종의 분열증적 심층 안에서, 어떻게 더 이상 읽고 외칠 수 없는,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이 지점에 이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표면에 균열이 존재한다면, 심층적인 삶이 '물론' 몰락의 프로그램(enterprise)이 되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겠는가? 균열을 실존하지 못하도록, 그것이 물체의 심층에 구현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비물체적 균열의 내속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 보다 정확히 말해, 희생물 또는 진정한 환자를 특성화하는 충만한 효과화를 막음으로써, 한 사건의 반효과화를, 행위하는 자나 춤추는 자의 단순하고 평평한 표상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물음들이 [비물체적 순수 사건들에 대해서만 논하는] 사상가의 우스꽝스러움을 탄핵하고 있다. 그렇다. 늘 두 측면, 두 과정은 본성상 다르다. 그러나 부스케가 상처의 영원한 진리에 대해 말할 대, 그가 그의 신체에 가져온 것은 한 끔찍한 인칭적 상처의 이름으로서였다. 피츠제럴드나 로리가 이 비물체적인 형이상학적 균열에 대해 말하면서, 거기에서 그들 사유의 터전과 장애물, 원천과 고갈, 의미와 무의미를 동시에 찾아낸다면, 그것은 그들이 마신, 신체 내에 균열을 야기시킨 술과 더불어서이다. 아르토가 본질적인 동시에 우연적인 것으로서, 극단적인 무력인 동시에 뛰어난 능력으로서 사유의 마멸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이미 분열증의 바닥에 속한 것이었다. 각자는 무엇인가를 감행하며, 이 모험을 끝까지 ㅁ리고 나가 그로부터 불가침의 권리를 이끌어낸다. 지혜와 품위를 충고할 때, 추상적인 사상가에게 무엇이 남을 것안가? 가장자리에 머묾으로써, 언제나 부스케의 상처에 대해, 피츠제럴드와 로리의 알코올 중독에 대해, 니체와 아르토의 광기에 대해 말하는 것? 이 한담들의 전문가가 되는 것? 단지 충격 받은 사람들이 너무 추락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 의연금을 모으고 특별호를 제작하는 것?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거기에 나아가 약간을 보고, 약간 알코올 중독자가, 약간 미친 사람이, 소심한 자살 충동자가, 적당한 파르티잔 전사가 되는 것(충분히 균열로 나아가지만 결코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나아가지는 않는 것)?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은 슬퍼 보인다. 사실, 가장자리에 머물지 않고 어떻게 표면에 남겠는가? 표면을, 그리고 언어와 삶을 포함해 표면의 모든 조직화를 구함으로써, 어떻게 구제받을 것인가? 어떻게 이 정치학, 이 완전한 게릴라에 도달할 것인가(여전히 스토아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알코올 중독, 우울증적 편집증
알코올 중독은 쾌락의 추구가 아니라 어떤 효과의 추구로서 나타난다. 이 효과는 주로 현재의 극단적인 경화로 구성된다. [알코올 중독에 걸린] 사람들은 두 시간, 두 순간을 동시에 살지만, 프루스트적인 방식으로는 결코 아니다. 다른 순간은 정상적인 삶의 기억들에만이 아니라 계획들에도 근거할 수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수정된, 그것[사건]을 경화된 살 안의 부드러운 싹으로서 둘러싸고 있는 이 굳은 현재 안에서 포착된 전혀 다른 방식 또한 존재한다. 다른 순간의 이 몰랑한 중심에 있어, 알코올 중독자는 그가 사랑하는 대상들, 그가 "공포스러워하는 그리고 동정하는" 대상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지만, 현재 순간의 체험된 또는 의지된(voulue) 딱딱함은 그로 하여금 현실에 거리를 둘 수 있게 해준다.4) Fitzgerald, op.cit., pp.353-354. "나는 다만 왜 내가 슬픔 앞에서는 슬퍼지기 시작하고, 우울 앞에서는 우울해지기 시작하고, 비극 앞에서는 비극적이 되는가, 왜 나는 내가 공포스러워하거나 동정하는 대상들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기 시작하는가에 답하기 위해 절대적인 고요를 원했을 뿐이다. 노동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막는 것은 이러한 류의 어떤 것이다. 레닌은 한 마음을 다해 프롤레타리아의 고통을 생각하지 않았고, 조지 워싱턴은 그의 군대를, 디킨스는 런던의 빈민들을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그의 주목을 끄는 대상에게 진심을 다했을 때, 그는 속임수, 좌적, ......에 빠졌다." 이 문현은 편집증적-우울증적(maniaco-depressifs) 상태들에 대한 정신 분석, 특히 클라인적인 분석을 놀라울 정도로 예시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뒤에서 보겠지만, 이 분석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1) 여기에서 편집증은 대개의 경우 우울증 상태에 대한 반응으로서 제시되고 있으며, 그 결과 오히려 [편집증보다는] 우울증을 (적어도 그 알코올 중독적 구조에 있어 규정해주고 있는 듯이 보인다. 2) 동일시는 대개의 경우 대상의 추락에 대한 반응으로서ㅡ 제시되며, 그 결과 또한 이 추락을 규정하고, 그것을 이끌어내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원하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중독자는 그를 휘어잡는 이 견고함(rigidite)을 그것에 둘러싸이고 은닉되어 있는 달콤함 못지않게 사랑한다. 하나의 순간은 다른 순간 안에 있으며, 현재는 터질 준비가 되어 있는 이 부드러운 부분을 감쌀 만큼 스스로 단단해지지도 강직 경련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두 동시적인 순간은 낯선 방식으로 구성된다. 즉, 알코올 중독자는 어떤 반과거나 미래의 삶도 살지 않으며, 단지 복합과거(그러나 매우 특수한 복합과거)만을 가질 뿐이다. 자신의 취기로부터 그는 상상적인 과거를 구성해낸다. 마치 과거분사의 달콤함이 현재조동사의 딱딱함과 조합하려는 듯이. 나는-사랑했다(j'ai-aime). 나는-행했다(j'ai-fait), 나는-보았다(j'ai-vu), 바로 이들이 두 순간의 짝짓기를 표현하고 있으며, 또 중독자가 편집증적인 전능을 행함으로써 다른 하나 안에서 하나를 경험하는 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복합과거는 결코 하나의 거리 또는 하나의 완성을 표현하지 않는다. 현재 순간은 'avoir' 동사의 시간이지만, 모든 존재는 동시적인 다른 순간 내에서, 분사의 참여, 동일화의 순간에 '지나가버린다'. 그러나 이러한 현재가 다른 순간을 둘러싸고 감싸고 그러나 이러한 현재가 다른 순간을 둘러싸고 감싸고 압박하는 이러한 조름, 이러한 방식은 얼마나 낯선 긴장, 거의 제어하기 힘든 긴장인가. 현재는 몰랑한 중심, 용암, 액체 같은 유리의 주위에서 결정체나 화강암의 우너환을 만들어냈다. 그럼에도 이러한 긴장은 다시 다른 것을 위해 풀어진다. 왜냐하면 현재는 하나의 "나는 마셨다(j'ai bu)"가 되는 복합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현재 순간은 더 이상 알코올 중독적 효과의 순간이 아니라 효과의 효과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제 다른 순간은 근접과거(내가 마신(buvais) 그 순간), 이 근접과거가 숨기는 상상적인 동일시들의 체계, 다소간 먼 정상적인[술이 깬] 과거의 현실적인 요소들을 무차별적으로 포함한다.
이렇게 해서 현재의 경화가 지니는 의미는 전적으로 바뀌었다. 굳은 상태의 현재는 영향력을 상실하고 탈색되며, 더 이상 아무 것도 조이지 못하며, 다른 순간의 모든 측면들을 동등한 거리에 떨어뜨려 놓는다. 사람들은 말하리라. 근접과거, 또 이 과거 안에서 구성된 동일시들의 과거, 그리고 질료를 제공한 정상적인 관거, 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갔으며, 이 모든 것이 이 탈색된 현재의 일반화된 팽창에 의해, 넓어지는 사막에서의 이 새로운 현재의 새로운 단단함에 의해 똑같이 일정한 거리에 떨어져 있노라고. 처음 효과의 복함과거는 두번째 효과의 유일한 "나는-마셨다(j'ai-bu)"에 의해 대체되며, 이 두번째 효과에 있어 현재조동사는 이제 모든 분사와 모든 참여의 무한한 거리만을 표현한다. 현재의 경화(나는 ......했다, j'ai)는 이제 과거(마셨다, bu)의 탈주 효과(un effet de fuite)와 관계 맺는다. 모든 것은 'has been'에서 절정에 달한다. 과거의 이 탈주 효과, 대상의 이 모든 방향으로의 추락은 알코올 중독의 우울증적 측면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 탈주 효과는 아마도 피츠제럴드 작품의 가장 강렬한 힘을 이루는 것, 그가 가장 심오하게 표현했던 것일 것이다.
피츠제럴드가 술마시고 있는, 술마시려고 하고 있는 인물들을 그리지 않은 것, 그렸다 해도 극히 예외적으로만 그렸다는 것은 흥미롭다. 피츠제럴드는 알코올 중독을 결핍이나 욕구(besoin)의 형태 -아마도 수치심의 형태- 아래에서 보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마실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중독의 갖가지 형태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는 최근에 이르기까지도 이어졌다(반면 로리는...... . 그러나 알코올 중독이 욕구라는 이 날카로운 형태 아래에서 파악될 때, 그에 못지 않은 시간의 심층적인 와해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전-미래(futur-anterieur)로서 체험되는 것은 모든 장래(avenir)이며, 여기에서도 역시 이 복합미래의 끔찍한 다급함, 죽음에까지 이르는 효과의 효과가 동반된다)5) 로리에게 있어서도 알코올 중독은 그가 가능하게 한 동일시들로부터, 그리고 이 동일시들의 실패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로리의 망실된 소설(In Ballast to the White Sea)은 동일시, 그리고 동일시에 의한 구원의 기회를 주제로 삼고 있다(다음을 보라. Choix de lettres, Denoel, pp.265 sq.). 어쨌든 우리는 복합 과거에서 보았던 것과 유비적인 다급함을 전미래에서 발견한다. 귄터 슈타인은 그의 흥미로운 논문에서 전미래의 특성들을 분석했다. 복합 과거로서의 확장된 장래는 인간에게 속하기를 그친다. "이 시간에는 더 이상 시간의 방향, 긍정적인 방향조차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 시간은 결국 더 이상 미래가 아닌 어떤 것으로, 나에게 상관 없는 아이온에 귀착한다. 인간은 분명 여전히 이 아이온의 실존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지시할 수 있지만, 이는 단지 무용한 방식으로, 그것을 이해하지도 현실화하지도 못하면서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je serai'는 이제 'ce qui sera', 'je ne le serai pas'로 변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표현은 전미래이다./ 피츠제럴드의 인물들에게 알코올 중독은 그것이 과거 -그들이 벗어났던 정상적인 과거("맙소사, 10년 동안 취해 있었군")만이 아니라 그들이 막 마시게 된 최근의 과거, 그리고 처음 효과의 환상적인 과거까지도- 로부터의 탈주라는 효과를 결정하는 경우에서조차도 추락의 과정이다. 모든 것이 동등하게 멀어졌으며, 홀로 존속해 죽음을 뜻하는 이 경화되고 탈색된 현재를 이기기 위해서 다시 마셔야 할, 아니면 차라리 다시 마시게 되었던 필연성을 결정한다.
바로 이렇게 해서 알코올 중독은 대표적인 예가 된다. 왜냐하면 다른 많은 사건들이 각각의 방식으로 이 알코올 효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재정 파탄, 실연, 조국의 멸망, 인생의 실패. 이들은 알코올과 관계 없이 그리고 외부적인 방식으로 알코올 효과를 낳지만, 알코올의 유출과 유사하다. 예컨대 피츠제럴드는 돈을 "나는 부자였다"로서 보며, 이 관점이 그를 그가 부자가 아니었던 순간으로부터 분리해주지만 결국 그가 부자가 된 순간과 그가 벗어났던 '진짜 부자들'과의 동일시들로부터 분리시켜준 것은 아니다.
개츠비의 사랑이 펼쳐지는 뛰어난 부분을 보자. 그가 사랑하고 사랑받던 순간에도, 개츠비는 그 '끔찍한 감수성'에 파묻혀 취한 사람으로서 행동한다. 그는 그의 모든 힘들의 이 현재를 경화시키며, 그 현재가 가장 부드러운 동일시를, 그가 같은 여인에 의해 절대적을 배타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살아받게 될(aurait ete aime) 한 복합과거(술 취한 10년과 같은 부재의 5년)와의 동일시를 조이게 만들고자 한다. 개츠비가 유리처럼 부수어지고, 모든 것, 그의 최근의 사랑, 옛사랑, 그리고 환상적인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은 이 동일시의 정점에서이다(이에 대해 피츠제럴드는 그것은 "모든 현실화의 죽음과" 대등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럼에도 같은 종류의 이 모든 사건들 중에서도 특히 알코올 중독에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해주는 것은 알코올이 사랑인 동시에 사랑의 추락이며, 돈인 동시에 돈의 상실이며, 조국인 동시에 조국의 멸망이라는 사실이다. 알코올은 대상인 동시에 대상의 추락이며, 추락에 집중된 과정에서의('물론') 이 추락의 법칙이다.

황홀경을 위하여
균열이 이러한 형태나 또는 다른 형태로 신체 안에 구현되기를, 효과화되기를 피할 수 있는가를 아는 문제는 분명 일반적인 규칙들에 의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균열은 신체가 그에 연관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간과 뇌, 기관들이 우리로 하여금 장래를 말할 수 있게 하고 또 그들 자체를 예언하는 이 선들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말에 그친다. 왜 건강으로 만족할 수 없는가라고, 왜 균열이 필요한가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균열에 의해서만 그리고 그 가장자리들 위에서만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인류의 역사에서 선하고 위대했던 모든 것은 스스로를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균열에 의해서 나오고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우리가 제공받는 것은 건강보다는 죽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 자신의 흔적에 있어 가능한 최대한의 삶을 누리는 신체에서처럼 하나의 다른 건강이 존재한다. 로리가 뛰어난 결말을 가진 '균열'(Felure)을 다시 쓰고자 꿈꾸고, 생생한 재정복의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균열이 신체를 연루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신체의 내부에서 그것의 선분을 다른 선분과 혼동할 때 가치화된다는 것도 사실이다. 미리 말할 수는 없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가능한 한 대-건강에 대한 시각을 잃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
사건의 영원한 진리는 그것이 살 속에 각인될 때에만 포착된다. 하지만 항상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효과화를, 그것을 한계짓고 작동시키고 형태변이시키는 반효과화에 의해 이중화해야 한다. 반효과화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홀로 작용할 때, 그리고 일어날 수 있을 것(ce qui aurait pu arriver)에 대해 유효하고자 할 때의 익살광대의 반효과화이다. 그러나 결국 일어나는 것의 마이머가 되는 것은, 효과화에 반효과화를 이중화하면서, 마치 진정한 배우나 무용수처럼 동일시를 그 피할 길 없는 효과화와 혼동하지 않고 사건의 진실 부여할 유일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It is to give to the crack the chance of flying over its own incorporeal surface area, without stopping at the bursting within each body; it is, finally, to give us the chance to go further than we would have believed possivle. To the extent that the pure event is each time imprisoned forever in its actualization, counter-actualization liberates it, always for other times. 우리는 약물이나 술의 효과들(이것들의 '계시')이, 만일 이 물질들의 사용을 결정하는 사회적 소외의 기법들이 혁명적인 탐구를 통해서 전복된다면, 이 사용과는 독립적으로 세계의 표면에서 그 자체로 다시 체험되고 재평가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릴 수가 없다. 이 점과 관련해 버로(Burroughs)는 위대한 건강에 대한 이러한 추구, 우리를 경건하게 만들어줄 이런 방식을 보여주는 낯선 글 몇 쪽을 쓴 바 있다. "우리가 화학적 길들을 따라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른 길들을 통해서도 도달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라......" 몸을 찌르고 쑤시는 것이 아니라 표면에 일제 사격을 가하는 것. 오 황홀경이여!

크로노스의 특성들, 심층들의 생성에 의한 그 전복
우리는 처음부터 시간에 대한 두 독해 -크로노스로서의 독해와 아이온으로서의 독해- 가 어떻게 대립해 왔는가를 보았다. 1) 크로노스의 관점에서 보면, 오로지 현재만이 시간 속에 실존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시간의 세 차원들인 것이 아니다. 오직 현재만이 시간을 채우며, 과거와 미래는 시간 안에서 현재에 상대적인 두 차원이다. 다시 말해, 일정한 현재(일정한 외연 또는 지속)와 관련해 미래인 것 또는 과거인 것은 보다 넓은 현재, 보다 큰 외연이나 지속의 부분을 형성한다. 과거와 미래를 흡수하는 보다 큰 현재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와 관련한 과거와 미래의 상대성은 현재들 자체[과거, 미래를 포함한, 현재인 한에서의 모든 시간들] 서로간의 상대성을 낳는다. 보다 제한된 현재에 있어 볼 수밖에 없는 내가 미래와 과거로서 보는 것을 신(dieu)은 현재로서 본다. 극한적인 원환으로서 또는 외부적 원주로서의 신(Dieu)은 현재로서 본다. 극한적인 원환으로서 또는 외부적 원주로서의 신(Dieu)과 더불어, 상대적인 현재들의 쟁여짐(emboitement), 감김(enroulement)이 바로 크로노스이다. 스토아의 영감을 받은 보에티우스는 신적인 현재가 미래와 과거를 복잡하게 만든다고*복잡하게 만드는 것(compliquer)은 곧 표면에 펼쳐져 있는 것들을 접어서 주름을 잡는 것(com-pli-quer)이다. 예컨대 한 책상의 질료와 형상이 각각 떨어져 눈 앞에 펼쳐져 있을 경우, 그 각각은 단순하다(simple). 단순하다는 것은 타자를 배척한 순수한 상태라는 것, 즉 질료는 질료대로 형상은 형상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무라는 질료와 책상임이라는 형상이 하나로 합해지면서, 즉 펼쳐져 있던 것들이 접히면서 책상이라는 복합체(com-ple-xe)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주름잡혀 있는 복합체를 하나하나 풀어서 펼치는 것이 분석(analyse)이다. 여기에서 'compliquer'라고 한 것은 'emboiter', 'enrouler'를 뜻한다.* 또는 포함한다고(comprend) 말했다.
2)크로노스 내에서의 현재는 어떤 면에서 물체적이다. 현재는 혼합물들의 또는 물체화들(incorporations)의 시간이며, 물체화 과정 자체이다. 시간이 걸리는 것, 시간화하는 것(temporaliser)은 혼합하는 것이다. 현재는 물체들이나 원인들의 능동[적 활동]을 측정한다. 미래와 과거는 차라리 물체 내에 수동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한 물체의 수동은 보다 강한(puissant) 한 물체의 능동에 연계된다. 또한 가장 큰 현재, 신적인 현재는 거대한 혼합물, 물체적 원인들 상호간의 통일성이다. 그것은 우주적 주기의 활동을 측정한다(이 기간 내에서 모든 것은 동시적이다). 제우스(Zeus)는 또한 디아, 아트라베르이며, 또는 혼합되는 것, 앵코르포라퇴르이다.**디아(Dia), 아트라베르(A-travers), 앵코르포라퇴르(Incorporateur)는 각각 '......를 통하여', '......를 가로질러', '물체화하는 존재'를 의인화해 신들로 부른 것이다.** 따라서 가장 큰 현재라고 해서 한계지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즉, 한계짓는 것, 물체들의 능동의 테두리나 척도를 이루는 것이 곧 현재이다. 물론, 현재는 가장 큰 물체이자 모든 원인들의 통일성(코스모스)이다. 그러나 그것[가장 큰 현재]은 한계지어져 있으면서도(sans etre illimite) 무한할(infini) 수 있다. 그것은 모든 현재를 감싼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 주기가 끝나면 이전의 것과 똑같은 새로운 주기를 다시 시작한다는 점에서 원환적이다. 각각의 현재가 상대적으로 더 큰 현재에 뿌리 두도록 만드는 상대적인 운동에, 우리는 가장 큰 현재에 고유한 절대적 운동을 덧붙여야 한다. 이 가장 큰 현재는 우주적 주기들의 놀이 안에서 그것이 감싸는(껴안기-불태우기, embrasser-embraser) 상대적인 현재들을 흡수하거나 복구하기 위해 심층적으로[물체적으로] 응축하고 팽창한다.
3)크로노스는 광대하고 심층적인 현재들에 의해 지배되는 운동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에서 그 척도를 이끌어내는가? 크로노스를 채우는 물체들은 현재가 내재적인 척도의 원리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통일성을 갖추고 있으며, 그들의 혼합물은 충분한 정의와 완벽함을 갖추고 있는가? 아마도 우주적인 제우스의 수준에서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우연적인 물체들과 부분적인 각 혼합물의 경우는?*우주 전체, 즉 제우스의 수준에서 물체들은 일정한 질서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부분적 차원들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즉, 우주에는 병, 지진, 해일, 가뭄, ......등등의 나쁜 혼합물들이 존재하지만, 우주 전체는 외해되지 않고 지속된다.* 현재의 근본적인 문제점이, 즉 모든 척도를 전복시키고 파괴하는 하나의 바닥이, 현재를 비켜가는 심층들의 미친-듯한-생성이 존재하지 않는가? 그리고 척도를 거부하는 이 무엇은 다만 국소적이고 부분적일 뿐인가, 아니면 점차로 도처에 그 유해하고 무시무시한 혼합물을 뿌림으로써 제우스를, 나아가 크로노스 자신을 전복시키고 우주 전체를 정복할 것인가?**현대식으로 말한다면, 엔트로피가 최대치에 달해 우주가 열사하는 경우를 뜻한다.** 스토아 학파에는 이미 세계와 관련해 두 혼합물 -팽창함으로써 보존되는 하얀 혼합물과 변질되는 검고 혼란스러운 혼합물- 에 상응하는 이 이중적인 태도, 즉 신뢰와 불신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는 "좋은 혼합물인가 나쁜 혼합물인가?"라는 대안이 자주 등장한다. 이 물음은 덕의 지위(즉 건강의 지위)가 다른 곳에서, 하나의 다른 방향, 다른 요소 -크로노스에 대립하는 아이온- 에 있어 추구되기 전에는, 두 항이 차이가 없어지는 한에서만 대답을 얻는다.
따라서 심층의 미친 듯한 생성은 좋은 크로노스의 생생한 현재에 대립하는 나쁜 크로노스이다. 사투르누스가 제우스의 밑바닥에서 으르렁댄다. 질들의 척도를 거부하는 순수 생성은 질을 갖춘(qualifies) 물체들의 질서를 내부로부터 위협한다. 물체들은 그들의 척도를 잃어버렸으며, 이제 시뮬라크르들에 불과하다. 미친듯이 날뛰는 힘들로서의 과거와 미래는 현재 및 실존하는 모든 것을 위협하는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심연 안에서 복수를 펼친다. 우리는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편의 두번째 가설 마지막 부분에서 이 생성을 "현재를 비켜갈 수 있는 잠재력"(왜냐하면 현재에 있다는[etre present] 것은 있는[etre] 것이지 더 이상 생성하는 [devenir] 것이 아니므로)으로 표현했음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현재를 비켜가는 것"은 생성이 행할 수 없는 일이다(왜냐하면 생성은 지금 생성하는 것이며, '지금'을 뛰어넘을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참이다. 즉, 시간 내에서의 현재의 내적인 전복이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은 이 전복을 표현하기 위해 현재만을 가진다. 바로 전복이 내적이고 심층적이기 때문이다. 크로노스는 또한 현재에 가해지는 과거와 미래의 복수를 현재의 항들 -그것[크로노스]이 포함하며 또 그것에 영향을 주는 유일한 항들- 로 표현해야 한다. 크로노스에게 이것은 죽음을 원하는 나름대로의 방식이다. 따라서 또한 좋은 현재를 비켜가고 전복시키는 것은 무시무시한, 척도를 무너뜨리는 현재이다. 크로노스는 물체적 혼합으로부터 심층적인 단절을 이룬 것이다. 현재의 모험들이 크로노스 안에서, 그리고 주기적인 현재의 두 얼굴 -절대적 운동과 상대적 운동, 거대한 현재와 부분적인 현재- 에 따라 드러나는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크로노스가 파열하거나 응축된느 한에서 심층 내에서의 그 자신과 관련해(분열증의 운동), 그리고 미친 듯이 날뛰는 미래와 과거에 따라 다소간 광대한 그 팽창과 관련해(우울증적 편집증의 운동), 크로노스는 움직이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시간에 대한 다른 독해에 자리를 내주는 것이 아닌가?

아이온과 표면
1) 아이온에 따르면, 오로지 과거와 미래만이 시간 안에서 내속하거나 존속한다. 과거와 미래를 흡수하는 현재 대신 두 방향으로 현재를 매순간 분할하는, 현재를 미래와 과거로 무한히 분할하는 것이 미래와 과거이다. 아니면 차라리, 미래와 과거를 각각 포함하는 광대하고 두꺼운 현재 대신, 각 현재를 과거와 미래로 분할하는 것은 두께도 없고 넓이도 없는 순간이다.
위에서 말한, 크로노스를 전복하는 심층들의 미친-듯한-생성과 이 아이온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책의 머리 부분에서, 우리는 이 둘이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했다. 미친-듯한-생성과 아이온은 모두 물체적이고 척도를 갖춘 현재에 대립하며, 현재를 비켜갈 수 있는 잠재력을 공유하고 있으며, 같은 모순들(질적, 양적, 관계적, 양상적 모순들)을 펼친다. 다만, 이들 사이에는 정향에서의 변화가 있었다. 아이온과 더불어, 심층들의 미친-듯한-생성은 표면으로 기어올라갔고, 시뮬라크르들은 환각들이 되었고, 심층에서의 단절(coupure)은 표면에서의 균열(felure)로서 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향에서의 변화, 이 표면의 정복은 모든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들을 함축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향에서의 변화, 이 표면의 정복은 모든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들을 함축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파르메니데스]의 두번째 가설과 세번째 가설 -'지금'의 가설과 '순간'의 가설- 사이의 차이와 같다. 실존하는 현재를 전복시키는 것은 더 이상 미래와 과거가 아니다. 현재를 내속하는 미래와 과거로 변질시키는 것은 순간이다.
본질적인 차이는 단지 크로노스와 아이온 사이에 있지 않다. 그것은 표면들의 아이온과 크로노스의 집합, 심층들의 미친-듯한-생성 사이에 있다. 표면의 생성과 심층의 생성 사이에서, 이제 우리는 현재를 비켜간다라는 공통 사항조차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심층이 현재를 비켜간다면, 그것은 척도의 얌전한 현재에 미치다시피된 그 현재를 대립시키는 '지금'의 모든 힘과 더불어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표면이 현재를 비켜간다면, 그것은 그 위에 분할이 끊임없이 가지는 모든 임의의(assignable) 현재로부터 그 계기(moment)를 구분하는 한 '순간'의 모든 잠재력에 의해서이다. 본성을 바꾸지 않고서는 그 무엇도 표면으로 올라가지 못한다. 아이온은 이제 제우스나 사투르누스에 속하기를 그치고 헤라클레스에 속하게 된다. 크로노스가 물체들의 활동과 물체적 성질들의 창조를 표현한다면, 아이온은 비물체적인 사건들과(성질들과는 구분되는) 부대물들의 터(lieu)이다. 크로노스가 원인들과 물질들로서 그것을 채우는 물체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아이온은 그것을 결코 채우지 않으면서도 끝없이 따라다니는 효과들로 차 있다. 크로노스가 한계지어진(limite) 동시에 무한하다면, 아이온은 미래와 과거처럼 한계가 없으면서도 또한 순간처럼 유한하다.
크로노스가 원환성(circularite), 그리고 막힘(blocages)이나 침강, 파열, 쟁여짐, 경화와 같은 이 원환성에서의 사고들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면, 아이온은 두 방향으로 한계지어지지 않은 채 직선으로 팽창한다. 언제나 이미 지나간 것이자 영원히 아직 오지 않은 아이온은 시간의 영원한 진리, 시간의 공허한 순수 형식으로서, 현재의 물체적인 내용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원환을 펼쳤으며, 하나의 직선을 따라 늘어난다. 아마도 바로 그런 이유로 그만큼 위험하게, 그만큼 미로와도 같이, 그만큼 구불구불하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듯이, 이 상이한 운동은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또 원환적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만 표면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덕'의, ......운동.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또한 죽기를-원함(vouloir-mourir)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전혀 다른 방식에서이다.

아이온으로부터 펼쳐지는 조직화
2)언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이 새로운 세계, 비물체적 효과들 또는 표면 효과들의 세계이다. 왜냐하면 앞으로 보겠지만 소리들을 물체들의 능동, 수동의 단순한 상태들 이상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언어를 구분해주는 것, 언어가 물체들의 소리와 혼동되지 않도록 해주는 것, 언어를 물체들의 구강적-항문적 규정성들로부터 추출해내는 것도 이 세계이다. 순수 사건들은 이들이 우리를 기다리는 만큼, 또 그들을 표현하는 언어 안에서만 순수하고 단일하게,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으로 실존하는 만큼 언어를 기다린다. 순수 사건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언어를 정초한다. 언어나 표현을 정초해주는 것은 (그 독립성에 있어서의) 표현된 것이다. 다시 말해, 물리적 성질들로서 물체들에 속하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의미를 가짐으로써, 이차적으로는 기호화하고 현시하고 지시함으로써, 소리들을 통해 획득되는 형이상학적 특성이다. 이것이 의미의 가장 일반적인 작용이다. 즉, 의미는 표현됨으로써 그것을 표현한 존재를 실존하게 만들며, 또 순수 내속으로서, 그것을 표현하는 존재 안에서 스스로를 실존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물들과 명제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것은 표면 효과들 즉 사건들의 터(milieu)로서의 아이온에 속한다. 아이온은 그 직선 전체를 따라 경계선을 그으며, 이 경계선이 없다면 소리들은 물체들에 그치고 명제들 자체는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언어는 그것을 사물들로부터, 물체들로부터, 나아가 말하는 자들로부터 분리해주는 경계선에 의해 가능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온에 의해 규정된 대로의 표면 조직화의 세부 사항을 다시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아이온의 선분 전체는 앵스탕[순간](l'Instant)에 의해 주파되며, 순간은 이 선분 위에서 끊임없이 자리를 옮김으로써 그 자신의 자리를 가지지 않는다(atopon). 순간은 역설적 심급 또는 우발점이다. 그것을 또한 표면의 무의미, 준원인, 추상화의 순수 계기(moment)로서, 일차적으로 모든 현재를 아이온의 선분 위에서 과거-미래의 두 방향으로 동시에 나누고 또 나눈다(diviser et subdiviser). 다음으로, 순간이 이렇게 현재로부터 마치 그 현재를 점유하고 있는 개체들과 인칭들인 듯이 추상해내는 것은 특이성들, 특이점들이다. 이들은 두 번 투사된다. 한 번은 미래로 한번은 과거로, 그리고 마치 홀씨들을 내보내는 홀씨주머니처럼, 이러한 이중의 방정식 아래에서 순수 사건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형성한다. 그러나 세번째로, 동시에 두 방향으로 뻗는 직선은 물체들과 언어, 사태들과 명제들 사이의 경계선을 그린다. 언어, 또는 명제들의 체계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 경계선이 없이는 실존하지 못할 것이다. Language therefore is endlessly born, in the future direction of the Aion where it is established and, somehow, anticipated; and although it must also say the past, it says it as the past of states of affairs which go on appearing and disappearing in the other direction. In short, the straight line is now related to its two environs; and while it separates them, it also articulates the one and the other as two series which are capable of being developed. It brings to them both the instantaneous aleatory point which traverses it and the singular points which are distributed in it. There are two faces therefore which are always unequal and in disequilibrium: one turned toward states of affairs(결합-미래) and the other tword propositions(명제-과거). But they are not allowed to be reduced to states of affairs or to propostions. The vent is brought to bear upon states of affairs, but only as the logical attribute of these states. It is entirely different from their physical qualities, despite the fact that it may happen to them, be embodied or actualized in them. Sense and event are the same thing -except that now sense is related to propositions. It is related to propositions as what is expressible or expressed by them, which is entirely different from what they signify, manifest, or denote. It is also entirely different from their sonorous qualities, even though the independence of sonorous qualities from things and bodies may be exclusively guaranteed by the entire organization of the sense-event. The entire organization, in its three abstract moments, rus from the point to the straight line, and from the straight line to the surface: the point which traces the line; the line which forms the frontier; and the surface which is developed and unfolded from both sides.
3) Many movements, with a fragile and delicate mechanism, intersect: that by means of which bodies, states of affairs, and mixtures, considered in their depth, succeed or fail in the production of ideal surfaces, and conversely, that by means of which the events of the surface are actualized in the present of bodies (in accordance with complex rules) by imprisoning first their singularities within the limits of worlds, individuals, and persons. There is also the movement wherein the event implies something excessive in relation to its actualization, something that overthrows worlds, individuals, and persons, and leaves them to the depth of the ground which works and dissolves them. The notion of the present has therefore several meanings: the measureless of dislocated present as the time of death and subversion; the variable and measured present as the time of actualization. But there is perhaps yet another present. How could there be a measurable actualization, unless a third present prevented it constantly from falling into subversion and being confused with it? It would seem, no doubt, that the Aion cannot have any present at all, since in it the instant is always dividing into future and past. But this is only an appearance. What is excessive in the event must be accomplished, even though it may not be realized or actualized without ruin. Between the two presents of Chronos -that of the subversion due to the bottom and that of the actualization in forms -there is a third, there must be a third, pertaining to the Aion. In fact, the instant as the paradoxical element or the quasi-cause which runs through the entire straight line must itself be represented. It is even in this sense that representation can envelop an expression on its edges, although the expression itself may be of another nature; and that the sage can "identify" with the quasi-cause, although the quasi-cause itself is missing from its own identity.
- 그래서 언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을 정초해주는 아이온의 미래의 방향에 있어 끝없이 태어난다. 그렇지만 그것은 도한 과거와 연관된다. 그러나 이 경우 말해진 것은 다른 방향에서 끝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사태들에 관련해 말해진 것이다. 요컨대 이제 직선은 두 주변(alentours)에 관계한다. 직선은 이 두 주변을 분리시키지만, 또한 마치 전개 가능한 두 계열에서처럼 그 둘을 절속한다(articule). 직선은 이 두 주변을 그것을 주파하는 순간적인 우발점에, 그리고 동시에 거기[직선]에 분배되는 특이점들에 관련시킨다.
그래서 언제나 비평형 상태에서 동등하지 못한 관계를 맺는 두 얼굴이 존재한다. 한 얼굴은 사태들을 향하며, 다른 얼굴은 명제들을 향한다. 그러나 이 두 얼굴이 사태들과 명제들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은 사태들과 관련 맺지만 물론, 아이온은 현재와 닮은 점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순간은 아이온에 있어 미래와 과거로 끊임없이 분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겉보기에만 그렇다. 사건에 있어 그리고 결국, 모든 직선을 주파하는 역설적 요소 또는 준원인으로서의 순간은 그 자체 표상되어야 한다. 표상이 그의 가장자리에 하나의 표현을 내포할 수 있는 것(표현 그 자체는 다른 본성에 속함에도), 나아가 현자가 준원인에 "스스로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준원인 자체는 그 고유의 동일성을 결여하고 있음에도)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순간을 표상하는 이 아이온의 현재는 결코 크로노스의 광대하고 심층적인 현재와 같지 않다. 그것은 두께가 없는 현재이며, 행위자, 무인, 무언극 배우의 현재이며, 일탈적인 순수 '계기'(moment)이다. 그것은 물체화의 현재가 아니라 순수 작용(operation)의 현재이다. 그것은 전복의 현재도 효과화의 현재도 아니다. 그것은 반효과화의 현재로서, 전복의 현재가 효과화의 현재를 뒤집지 못하도록 하며, 효과화의 현재로 하여금 전복의 시간과 뒤섞이지 못하도록 하며, 나아가 안감을 반복적으로 갈아대는(redoubler) 현재이다.
- This present of the Aion representing the instant is not at all like the vast and deep present of Chronos: it is the present without thickness, the present of the actor, danceer, or mime -the pure perverse "moment." It is the present of the pure operation, not of the incorporation. It is not the present of subversion or actualization, but that of the counter-actualization, which keeps the former from overturning the latter, and the latter from being confused with the former, and which comes to duplicate the lining(redoubler la doublure).

Twenty-Fourth Series of the Communication of Events (계열 24 - 사건들의 소통)

One of the boldest moments of the Stoic thought involves the splitting of the causal relation. Causes are referred in depth to a unity which is proper to them, and effects maintain at the surface specific relations of another sort. Destiny is primarily the unity and the link of physical causes among themselves. Incorporeal effects are obviously subject to destiny, to the extent that they are the effect of these causes. But to the extent that they differ in nature from these causes, they enter, with one another, into relations of quasi-causality. Together, they enter into a relation with a quasi-cause which is itself incorporeal and assures them a very special independence, not exactly with respect to destiny, but rather with respect to necessity, which normally would have had to follow destiny. The Stoic paradox is to affirm destiny and to deny necessity. The wise person is free in two ways which conform to the two poles of ethics: free in the first instance because one's soul can attain to the interiority of perfect physical causes; and again because one's mind may enjoy very special relations establised between effects in a situation of pure exteriority. It would then seem that incorporeal causes are inseparable from a form of interiority, but that incorporeal effects are inseparable from a form of exteriority. On one hand, events-effects maintain a relation of causality with their physical causes, without this relation being one of necessity; it is rather a relation of expression. On the one hand, they have between them, or with their ideational quasi-cause, no longer a relation of causality, but rather, once again and this time exclusively, a relation of expression.
The question becomes: what are these expressive relations of events? Between events, there seem to be formed extrinsic relations of silent compatibility or incompatibility, of conjunction or disjunction, which are very difficult to apprehend. What makes an event compatible or incompatible one another? We cannot appeal to causality, since it is a question of a relation of effects among themselves. What brings destiny about at the level of events, what makes it possible that a life is composed of one and the same Event, despite the variety of what might happen, that it be traversed by a single and same fissure, that it play one and the same air over all possible tunes and all possible words -all these are not due to relations between cause and effect; it is rather an aggregate of noncausal correspondences which form a system of echoes, of resumptions and resonances, a system of signs -in short, an expressive quasi-causality, and not at all a necessitating causality. When Chrysippus insists on the transformation of hypothetical propositions into conjunctives or disjunctives, he shows well the impossibility of events expressing their conjunctions and disjunctions in terms of brute causality.
Is it necessary, then, to invoke identity and contradiction? Would two events be incompatible because they were contradictory? Is this not a case, though, of applying rules to events, which apply only to concepts, predicates, and classes? Even with respect to hypothetical propositions (if it is day, it is light), the Stoics noted that contradiction must be defined on a single level. Rather, contradiction must be defined in the space between the principle itself and the negaton of the consequence(if it is day, it is not light). This difference of levels in the contradiction, we have seen, assures that contradiction results always from a process of a different nature. Events are not like concepts; it is their alleged contradiction (manifest in the concept) which results from their incompatibility, and not the converse. -사건은 개념과 같지 않다. 그것은 양립불가능성에서 발생하는 추정된(개념 안에 나타나는) 모순과 같다. 그리고 그 역이 아니다.- 즉슨 추정된 모순에서의 양립불가능성이 아니다. - It is held, for example, that a species of butterfly cannot be at once gray and vigorous. Either the speciemans are gray and weak, or they are vigorous and black. We can always assign a causal physical mechanism to explain this incompatibility, a hormone, for example, on which the predicate gray would depend, and which would soften or weaken the corresponding class. And we can conclude from this causal condition that there is a logical contradiction between gray and vigorous. But if we isolate the pure events, we see that to turn gray is no less positive than to turn black: it expresses an increase in security(to be hidden, to be taken for the bark of a tree), as much as the becoming black is an increase of vigor (to invigorate). Between these two determinations, each one of which has its advantage, there is initially a relation of primary, "evenmental" incompatibility. -중요함- Physical causalitiy inscribes(새기다) the incompatibility only secondarily in the depth of the body, and the logical contradiction translates it only in the content of the concept. -물리적인 인과성은 몸의 깊이에 이차적으로만 양립 불가능성을 새기고, 논리적 모순은 그것을 개념의 내용으로만 번역한다.- In short, the relations of events among themselves, from the point of view of an ideational or noematic quasi-causality, first expresses noncausel correspondence- alogical compatibilities or incompatibilities. -짧게는, 그들 사이 사건들의 관계들은 이데아적이나 노에마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먼저 비논리적인 양립 가능성, 혹은 불가능성과 같이 비인과적인 연관성을 표현한다. The Stoics' strength was in committing themselves to this line of thought: according to what criteria are events copulata, confatalia (or inconfatalia), conjuncta, or disjuncta? -스토아 철학의 강점은 그들 스스로를 이러한 사유의 선에 전념시키는 것이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건들은 커플링되고, 운명이 되고(혹은 비운명이 되고), 결합되는(해체되는) 것일까? Astrology was perhaps the first important attempt to establish a theory of alogical incompatibilites and noncausal correspondences. 점성술은 아마 최초의 비논리적인 양립 불가능성과 비인과적인 연관성을 수립하는 중요한 시도였을 것이다.- -중요함 끝-
It seems, however, if we follow the surviving partial and deceving texts, that the Stoics may not have been able to resist the double temptation of returning to the simple physical causality or to the logical contradiction. -그러나 현존하는 편파적이고 기만적인 글들을 보면 스토아주의자들은 단순한 물리적 인과성이나 논리적 모순으로 빠지는 이중의 유혹을 견디지 못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The first theoretician of alogical incompatibilities, and for this reason the first important theoretician of the event, was Leibniz. -비논리적 양립 불가능성의 최초의 이론가이면서 이로 인해 사건에 관한 최초의 중요한 이론가는 라이프니츠이다. For what Leibniz called "compossible" and "incompossible" cannot be reduced to the identical and the contradictory, which govern only the possible and impossible. -라이프니츠가 "공가능성"과 "불공가능성"이라 불렀던 것은 오직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만을 지배하는 동일한 것과 모순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Compossibility does not even presuppose the inherence of predicates in an individual subject or monad. -공가능성은 술어가 각각의 주체와 모나드에게 내속되어 있는 것조차도 상정하지 않는다. It is rather the inverse; inherent predicates are those which correspond to events from the beginning compossible(the monad of Adam the sinner includes in predicative form only future and past events which are compossible with the sin of Adam). -그것은 오히려 그 역으로; 내속하는 술어들은 초기의 공가능성으로부터 비롯된 사건들과 상응하는 것들이다.(죄인 아담의 모나드는 오로지 아담의 죄와 공가능한 미래와 과거 사건들을 서술적인 형태로 포함한다.) Leibniz was thus extremely conscious of the anteriority and originality of the event in relation to the predicate. -때문에 라이프니츠는 술어와 관계된 사건의 선재성과 독창성에 대해 굉장히 의식적이었다. Compossiblility must be defined in an original manner, at a preindividual level, by the convergence of series which singularities of events form as they stretch themselves out over lines of ordinary points. -공가능성은 본래의 방식대로, 전개체적 층위에서 사건들의 특이성들이 일상적인 점들의 선들 너머로 스스로를 펼치는 계열들의 수렴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Incompossibility must be defined by the divergence of such series: if another Sextus that the one we know is incompossible with our world, it is because he would correspond to a singularity the series of which would diverge from the series of our world, clustered about the Adam, the Judas, the Christ, and thd Leibniz that we know. -불공가능성은 이러한 계열들의 분기에 의해 규정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아는 것과 다른 섹스투스가 우리의 세계와 불공가능하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가 아는 아담, 유다, 라이프니츠 등으로 군집을 이룬 우리 세계의 계열들과 분기되는 특이성의 계열들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Two events are compossible when the series which are organized around their singularities extend in all directions; they are incompossible when the series diverge in the vicinity of constitutive singularities. -특이점들 주위로 구성된 계열들이 모든 방향으로 확대될 때 두 사건들이 공가능하다. 반면에 그들은 계열들이 구성적인 특이점들 부근에서 분기될 때 불공가능하다. Convergence and divergence are entirely original relations which cover the rich domain of alogical compatibilities and incompatibilities, and therefore form an essential component of the theory of sense. 수렴과 분기는 비논리적 공가능성과 불공가능성의 풍부한 구역을 차지하는 본래의 관계들이고, 이 때문에 의미의 이론에서 본질적인 요소를 형성한다.
Leibniz though makes use of this rule of incompossibility in order to exclude events from one another.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사건들을 서로 배제시키기 위해 이 불공가능성의 법칙을 사용한다. He made a negative use of divergence of disjunction - one of exclusion. -그는 단절이라는 분기의 부정적인 사용, 즉 배제를 고안했다. This is justified, however, only to the extent that events are already grasped under the hypothesis of a God who calculates and chooses, an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ir actualization in distinct worlds or individuals. -그러나 이는 사건들을 단지 계산하고 선택하는 신의 가정 하에서 포착된 범주로, 그리고 별개의 세계들 또는 개체들에서의 효과화라는 관점으로부터만 정당화될 수 있다. It is no longer justified, however, if we consider the pure events and the ideal play whose principle Leibniz was unable to grasp, hindered as he was by theological exigencies. -그러나 만약 우리가 라이프니츠가 신학적 조급함에 의한 방해로 포착하지 못했던 순수사건과 이상적인 놀이를 고려한다면 그것은 정당화되지 못한다. For, from this other point of view, the divrgence of series or the disjunction of members(membra disjuncta) cease to be negative rules of exclusion according to which events would be incompossibel or incompatible. -이러한 관점으로부터, 계열들의 분기(발산), 혹은 구성원들의 단절은 사건들의 불공가능함, 혹은 양립 불가능함에 따른 부정적인 배제의 방식이 되기를 그친다. Divergence and disjunction are, on the contrary, affirmed as such. -반대로, 분기(발산)와 단절은 단지 그것들 자체로 긍정된다. But what does it mean to make divergence and disjunction the objects of affirmation? -그러나 분기(발산)와 단절을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As a general rule, two things are simultaneously affirmed only to the extent that their difference is denied, suppressed from within, even if the level of this suppression is supposed to regulate the production of difference as much as its disappearance. -일반적인 규칙에서 그 두 가지의 차이는 내부적으로 억압되면서, 그 억압의 정도가 차이의 소멸만큼 그것의 생산을 규제하기 위함일지라도 그것들이 부정되는 범위에서 긍정된다. To be sure, the identity here is not that of indifference, but it is generally through identity that opposites are affirmed at the same time, whether we accentuate one of the opposites in order to find the other, or whether we create a synthesis of the two. -확실히 하자면, 이 동일성은 무차이가 아닌, 일반적으로 동일성을 통해서 배타적인 것들이 동시에 긍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 둘의 종합을 창조하던, 다른 하나를 발견하기 위해 그 중 하나를 강조하던 말이다. We speak, on the contrary, of an operation according to which two things or two determinations are affirmed through their difference, that is to say, that they are the objects of simultaneous affirmation only insofar as their difference is itself affirmative. -반대로 우리는 두 대상들, 혹은 정의들의 차이가 긍정되는 방식으로 말을 하는데,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의 차이가 긍정됨으로써만 동시적인 긍정의 대상이 된다. We are no longer faced with an identity of contraries, which would still be inseparable as such from a movement of the negative and of exclusion. -우리는 더이상 그와 같은 부정적인 것과 배제의 운동에서 분리되지 않은 반대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마주하지 않는다. We are rather faced with a positive distance of different elements: no longer to identify two contraries with the same, but to affirm their distance as that which relates on to the other insofar as they are "different" -우리는 그보다 다른 요소들의 긍정적인 거리를 마주한다: 더 이상 같은 것을 통해 두 반대항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위에서 다른 것과 관계되는 거리를 긍정하는 것이다. The idea of a positive distance as distance (and not as an annulled or overcome distance) appears to us essential, since it permits the measuring of contraries through their finite difference instead of equating difference with a measureless contrariety, contrariety with an identity which is itself infinite. -우리에게 나타나는 본질적인 거리(무효화되거나 극복된 거리가 아닌)로서의 긍정적인 거리라는 생각은 가늠할 수 없는 불일치, 즉 그 자체로 유한한 동일성과의 불일치를 통해 차이를 등질화시키기보다는 그들의 유한한 차이를 통해 반대항들을 가늠해볼 수 있게끔 한다. It is not difference which must "go as far as" contradiction, as Hegel thought in his desire to accommodate the negative; it is the contradiction which must reveal the nature of its difference as it follows the distance corresponding to it. -그것은 헤겔이 그의 욕망에 부정성을 적용하기를 생각한 것처럼 모순에 도달하기까지 "멀리 가야만 하는" 차이가 아니다. 그것은 상응하는 거리를 따르는 차이의 본성을 드러내야만 하는 모순이다. The idea of positive distance belongs to topology and to the surface. -긍정적인 거리에 대한 생각은 위상학과 표면에 속한다. It excludes all depth and all elevation, which would restore the negative and the identity. 그것은 부정적인 것과 동일성을 복원하는 모든 깊이와 상승을 배제한다. Nietzsche provides the example for such a procedure, which must not, under any circumstances, be confused with some unknown identity of contraries(as is commonplace in spiritualist and dolorist philosophy). -니체는 이러한 과정에 대한 예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어떠한 조건들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역설들의 동일성(신비주의자와 고행주의자의 흔한 지점인)들과 혼동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Nietzsche exhorts us to live health and sickness in such a manner that health be a living perspective on sickness and sickness a living perspective on health; to make of sickness an exploration of health, of health an investigation of sickness: "Looking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ick toward healthier concepts and values and, conversely, looking again from the fullness and self-assurance of a rich life down into the secret work of the instinct of decadence -in this I have had the longest training, my truest experiences; if in anything, I became master in this. Now I know how, have the know-how, to reverse perspectives. ..." -니체는 건강함이 병듦에 대한 살아있는 관점으로, 그리고 병듦이 건강함에 대한 살아있는 관점으로 건강과 병듦을 살 수 있도록 주창한다. 그리하여 병듦을 건강함에 대한 탐구로, 그리고 건강함을 병듦에 대한 조사로: "병자의 관점에서 더 건강한 개념들과 가치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반대로 풍족한 삶에서 나오는 충만함과 자신만만함에서 데카당스적 본능의 비밀스러운 작업을 내려다 봐라. 이에 나는 가장 오랜 훈련과 진실한 경험들을 했으며 이 점에서 나는 전문가이다. 이제 나는 관점을 뒤집으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노하우가 생겼다." We cannot identify contraries, nor can we affirm their entire distance, except as that which relates one to the other. -우리는 무언가와 관계된 것을 제외하면 역설들을 식별할 수 없으며 그들의 모든 거리를 긍정할 수도 없다. Health affirms sickness when it makes its distance from sickness an object of affirmation. 건강은 그것이 병듦을 긍정의 대상으로 거리를 둠으로서 병듦을 긍정한다. Distance is, at arm's length, the affirmation of that which it distances. -거리는 그것이 팔의 길이 정도로 거리를 두는 것의 긍정이다. This procedure which makes of health an evaluation of sickness and sickness an evaluation of health -is this not the Great Health (or the Gay Science)? -건강을 병듦에 대한 평가로, 그리고 병듦을 건강에 대한 평가로 만드는 절차는 위대한 건강(혹은 명랑한 과학)이 아니던가? Is it not this which permits Nietzche to experience a superior health at the very moment that he is sick? 그가 가장 아플 때 우월한 건강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던가? Conversely, Nietzsche does not lose his health when he is sick, but when he can no longer affirm the distance, when he is no longer able, by means of his health, to establish sickness as a point of view on health (then, as th Stoics say, the role is over, the play has ended). 반대로, 니체가 병들었을때 건강을 잃지는 않았지만, 그가 건강으로서의 거리를 긍정할 수 없을 때, 즉 병듦을 건강에 대한 관점으로 수립할 수 없었을 때, 그는 건강을 잃었다(스토아주의자들이 말하듯이 역할은 끝났고, 놀이도 끝났다). "Point of view" does not signify a theoretical judgment; as for "procedure," it is life itself. -"관점"은 이론적인 판단을 지시하지 않으며, 절차/혹은 시술로서 삶 그 자체이다. From Leibniz, we had already learned that there are no points of view on things, but that things, beings, are themselves points of view. -라이프니츠로부터 우리는 사물들에 관점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물들과 존재들 자체가 관점들이라는 것을 배웠다. Leibniz, however, subjected the points of view to exclusive rules such that each opened itself onto the others only insofar as they converged: the points of view on the same town. -그러나 라이프니츠는 관점들을 마치 같은 동네에 묶여있는 것처럼 배타적인 규칙들에 의한 수렴에 의해 타자들에 열려있는 것으로 투사했다. With Nietzsche, on the contrary, the point of view is opened onto a divergence which it affirms: another town corresponds to each point of view, each point of view is another town, the towns are linked only by their distance and resonate only through the divergence of their series, their houses and their streets. 반면에 니체에게 관점은 그것이 긍정하는 분기(발산)에 열려 있다: 또다른 동네는 각각의 관점에 상응하며, 각각의 관점은 또다른 동네이며, 동네들은 오로지 거리에 의해 연결되고 그들의 집들과 거리들이 만들어내는 계열들의 발산을 통해 공명한다. There is always another town within the town. -동네 안에는 언제나 또 다른 동네들이 있다. Each term becomes the means of going all the way to the end of another, by following the entire distance. -각각의 용법은 전체의 거리들을 따라서 또다른 것의 끝까지 주파하는 방법이 된다. Nietzsche's perspective -his perspectivism- is a much more profound art than Leibniz's point of view; for divergence is no longer a principle of exclusion, and disjunction no longer a means of separation. -니체의 관점(그의 관점주의)는 라이프니츠의 관점보다 훨씬 풍부한 기술이다. 분기(발산/분열)는 더이상 배타성의 원리가 아니며, 단절은 더 이상 분리의 방식이 아니다. Incompossibility is now a means of communication -불공가능성은 이제 소통의 방식이다.
It is not that the disjunction has become a simple conjunction. -그것은 단절이 단순하게 연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Three sorts of synthesis are distinguished: the connective synthesis (if..., then), which bears upon the construction of a single series; the conjunctive series (and), as a method of constructing convergent series; the conjunctive series (and), as a method of constructing convergent series; and the disjunctive series (or), which distributes the divergent series: conexa, conjuncta, disjuncta. -세 종류의 합성이 구분된다: 한 계열의 구축을 가지는 연결하는 합성(만약 그렇다면, 그럴 것이다); 수렴하는 계열들을 구축하는 방법으로서의 접속하는 계열들 (그리고); 발산하는 계열들을 분배하는 이접적인 계열들 (혹은): 연결/결합태, 접속태, 이접태. But the whole question, an rightly so, is to know under what conditions the disjunction is a veritable synthesis, instead of being a procedure of analysis which is satisfied with the exclusion of predicates from one thing in virtue of the identity of its concept (the negative, limitative, or exclusive use of disjunction). -하지만 전체적인 질문은, 정당하게도, 어떤 조건들에서 분절이 진정한 종합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 개념적 동일성의 미덕 안에 있는 하나의 무언가로부터 배제된 술어들에 의해 충족되는 분석의 절차 대신에 말이다(부정적인, 제한적인, 혹은 단절의 배타적인 사용). The answer is given insofar as the divergence or the decetering determined by the disjunction become objects of affirmation as such. -답은 분절, 혹은 단절에 의해 정의된 탈중심화가 긍정의 대상이 되는 데에 있다. The disjunction is not at all reduced to a conjunction; it is left as a disjunction, since it bears, and continues to bear, upon a divergence as such. -단절은 전혀 결합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단절로 남으며, 발산에 의지하여 지속된다. But the divergence is affirmed in such a way that the either ...or itself becomes a pure affirmation. 그러나 발산은 '이것이거나... 혹은'처럼 긍정되거나 그 자체가 순수 긍정이 된다. Instead of a certain number of predicates being excluded from a thing in virtue of the identity of its concept, each "thing" opens itself up to the infinity of predicates through which it passes, as it loses its center, that is, its identity as concept or as self. -동일성의 개념에 내재하는 미덕으로서의 무언가(주체)로부터 배제되는 특정한 수의 술어들 대신에 각각의 무언가는 술어들의 무한성을 통과하며 스스로를 개방한다. 자신, 혹은 그것의 개념으로서의 동일성을 상실하면서 말이다. The communication of events replaces the exclusion of predicates. -사건들의 소통은 술어들의 배제를 대체한다. We have already seen the procedure of this affirmative sythetic disjuction: it consists of the erection of a paradoxical instance, an aleatory point with two uneven faces, which traverses the divergent series as divergent and causes them to resonate through their distance and in their distance. -우리는 이미 이 긍정적인 종합적 단절의 절차에 대해 보았다: 그것은 역설적인 사례의 분출로 구성된다, 불균질한 두 면의 우연적인 점은 분절적인 계열들을 분절적으로 가로지르며 그들의 거리를 통해, 또 그들의 거리 안에서 공명하도록 한다. Thus, the ideational center of convergence is by nature perpetually decentered, it serves only to affirm divergence. 그래서 수렴의 이데아적 중심은 본성상 항구적으로 탈중심화 되며, 그것은 단지 발산/분절을 긍정하는 데에 봉사한다. This is why it seemed that an esoteric, ex-centeric path was opened to us, a path altogether different from the ordinary one. -이것이 일상적인 길과는 전혀 다른 모든 길이, 즉 이국적이고 전-중심적인 길이 왜 우리에게 열려있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For ordinarily the disjunction is not properly speaking a syntheses, since it seperates the nonconvergent series from one another. -일상적으로 단절/선언은 비수렴적인 계열들을 수렴적인 것과 분리했기 때문에 종합을 말하는 데에 적절하지 않다. As for the conjunctive synthesis, it tends also toward being subordinated to the synthesis of connection, since it organizes the converging series over which it bears as it prolongs them under the condition of continuity. -결합적인 종합도 연결의 종합에 종속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는 그것이 지속성의 조건 아래에서 연장되는 것으로서 수렴하는 계열들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Now, the whole sense of esoteric words was to turn this path around: a disjunction which had become a synthesis introduced its ramifications everywhere, so that the conjunction was already coordinating in a global way divergent, heterogeneous, and disparate series, and that, affecting the details, the connection already contracted a multitude of divergent series in the successive appearance of a single one. -이제, 이국적인 단어들의 모든 의미는 이 길들을 역행한다: 종합이 된 단절은 그것의 파문들을 여기저기 흩뿌렸으며, 따라서 접합은 분절적인, 이질적인, 전혀 다른 계열들을 거시적으로 조직화하고 세부들에 미치는 영향에 있어, 연결은 이미 발산하는 계열들의 다양성을 단수적인 것의 연속적인 나타남 안에서 축소시킨다.
This is a new reason for distinguishing the becoming of depths and the Aion of surfaces. -이것은 심층의 되기와 표면들의 아이온을 구분하는 새로운 이유이다. For both, at first glance, seemed, to dissolve the identity of each thing within infinite identity as the identity of contraries. -둘 모두, 얼핏 보기에는 마치 대립자들의 동일성처럼 무한한 동일성 안에서 각각의 동일성들을 해소시키는 것 같다. And from all points of view, whether of quantity, quality, relation, or modality, contraries oppeared connected at the surface as much as in depth and to have the same sense no less than the same infra-sens. 그리고 양, 질, 관계, 양식 등 모든 관점에서 볼 때, 대립자는 깊이만큼이나 표면적으로도 연결되어 있으며 동일한 하위 의미만큼이나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But, once again, everything changes nature as it climbs to the surface.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은 표면으로 기어오르면서 그것의 본성을 바꾼다. And it is necessary to distinguish two ways whose personal identity is lost, two ways by means of which the contradiction is developed. 그리고 인칭적 동일성이 상실되는 것과, 그것으로 인하여 역설이 발전되는 두 가지 방식을 구분해야만 한다. In depth, it is through infinite identity that contraries communicate and that the identity of each finds itself broken and divide. 심층에서, 무한한 동일성을 통해 대립자들이 소통하고 각각의 동일성은 깨지고 나누어진다. This makes each term at once the moment and the whole; the part, the relateion, and the whole; the self, the world, and God; the subject, the copula, and the predicate. 이것은 각 항을 순간과 전체로 만든다; 부분, 관계, 그리고 전체; 자신, 세계, 신; 주체, 문법, 그리고 술어. But the situation is altogether different at the surface where only infinitive events are deployed; each one communicates with the other through the positive characters of its distance and by the affirmative character of the disjunction. 그러나 무한한 사건들이 전개되는 표면에서의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각자는 그들의 거리가 가지는 긍정적인 성격, 그리고 단절/선언이 가지는 긍정적인/단언적인 성격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 The self merged with the very disjunction which it liberates and places outside of itself the divergent series as so many impersonal and pre-individual singularities. -자아는 단절을 통해 매우 많은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들을 가지는 발산적인 계열들에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그 외부에 자신을 위치시키며 어우러진다. Counter-actualization is already infinitive distance instead of infinite identity. -반-효과화는 무한한 동일성 대신 이미 무한한 거리이다. Everything. happens through the resonance of disparates, point of view on a point of view, displacement of perspective, differentiation of difference, and not through the identity of contraries. -모든 것은 이질적인 것들으 공명으로 일어난다. 관점의 관점, 관점의 배치, 차이의 구별, 그리고 대립자들의 동일성을 통하지 않으면서. It is true that the form of the self ordinarily guarantees the connection of a series; that the form of the world guarantees the convergence of continuous series which can be extended; and that the form of God, as kant had clearly seen, guarantees disjuntion in its exclusive or limitative sense. 자아의 형태가 일상적으로 계열들의 연결을 담보하고; 그렇기 때문에 세계의 형태가 확장 가능한 지속적인 계열들의 수렴을 담보하고; 그래서 칸트가 봤듯이 신의 형태가 배타적인, 혹은 제한적인 의미에서 단절/선언을 담보하는 것은 사실이다. But when disjunction accedes to the principle which gives to it a synthetic and affirmative value, the self, the world, and God share in a common death, to the advantage of divergent series as such, overflowing now every exclusion, every conjunction, and every connection. 그러나 단절이 그것에 종합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원리에 응했을 때, 발산/분기하는 계열들 그 자체의 이점에 자아, 세계, 신이 같은 죽음을 공유하고 모든 배타적인 것과 접합과 연결에 넘쳐흐른다. It is Klossowski's merit to have shown how the three forms had their fortunes linked, not by a dialectical transformation and the identity of contraries, but by a common dissipation at the surface of things. -어떻게 세 가지 형태가 그들의 행운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보여준 것은 클로소스키의 가치이다. 그것은 변증법적 변형과 대립자들의 동일성을 통하지 않고, 표면에서의 공통적인 소멸을 통한다. If the self is the principle of manifestation, in relation to the proposition, the world is the principle of denotation, and God the principle of signification. -만약 명제와의 관계에서 자아가 현시의 원리라면, 세계는 지시의 원리이고 신은 기호화의 원리이다. But sense expressed as an event is of an entirely different nature: it emanates from nonsense as from the always displaced paradoxical instance and from the eternally decentered ex-centric center. -그러나 사건으로서 표현된 의미는 완전히 다른 본성을 가진다: 그것은 언제나 역설적인 사례들을 배치하고 영원히 전-중심적인 중심을 탈중심화하는 넌센스에서 발한다. It is a pure sign whose coherence excludes merely, and yet supremely, the coherence of the self, world, and God. -그것은 단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아, 세계, 그리고 신의 일관성을 배제하는 일관성의 순수한 기호이다. This quasi-cause, this surface nonsense which traverses the divergent as such, this aleatory point which circulates throughout singularities, and emits them as pre-individual and impersonal, does not allow God to subsist. - 이 준원인, 분기/발산 그 자체를 가로지르는 무의미의 표면, 특이성들을 순환하는 이 우연한 지점, 그리고 이들을 전-개체적이고 비인칭적으로 발산하는 것은 신이 구성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It does not tolerate the subsistence of God as an original individuality, nor the self as a Person, nor the world as an element of the self and as God's product. 그것은 최초의 개체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자아의 구성요소로서의, 그리고 신의 작품으로서의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The divergence of the affirmed series forms a "chaosmos" and no longer a world; the aleatory point which traverses them forms a counter-self, and no longer a self; the disjunction posed as a synthesis exchanges its theological principle for a diabolic principle. 긍정된 계열들의 발산/분기는 더이상 세계가 아닌 카오스모스를 형성한다; 이들을 가로지르는 우연적인 점은 자아가 아닌 반-자아를 형성하고; 종합으로서 제기된 단절은 그것의 신학적인 원리를 악마적인 것으로 교환한다. It is the decentered center which traces between the series, and for all disjunctions, the merciless straight line of the Aion, that is, the distance whereupon the castoffs of the self, the world, and God are lined up: the Grand Canyon of the world, the "crack" of the self, and the dismembering of God. -그것은 계열들 사이를 주파하는, 그리고 모든 단절들에, 무자비한 아이온의 직선인, 즉 던져진 자아, 세계, 그리고 신의 거리가 정렬하는 탈중심화된 중심화이다: 세계의 그랜드 캐년, 자아의 균열, 그리고 신의 절단. Upon this straight line of the Aion, there is also an eternal return, as the most terrible labyrinth of which Borges spoke -one very different from the circular or monocentered return of Chronos: an eternal return which is no longer that of individuals, persons, and worlds, but only of pure events which the instant, displaced, over the line, goes on dividing into already past and yet to come. 이 아이온의 직선에 의존하여, 보르헤스가 언급한, 단중심화된, 혹은 회전하는 크로노스의 반복과는 굉장히 다른 가장 끔찍한 미로로서의 영원회귀가 있다: 개체적이지도, 인칭적이지도, 세계이지도 않은, 그러나 단지 선위의 배치, 순간들인 순수 사건으로서의 영원회귀는 이미 과거로 분할되며 아직 오지도 않는다. Nothing other than the Event subsists, the Event alone, Eventum tantum for all contraries, which communicates with itself through its own distance and resonates across all of its disjuncts. 오직 사건만이 존재한다. 그 자신의 거리를 통해 소통하고 모든 단절/도약들에 공명하는 모든 대립자들을 위한 전능 사건말이다.

Twenty-Fifth Series of Univocity 계열 25 - 일의성

It seems that our problem, in the course of our investigation, has changed altogether. -우리의 탐구에 따른 문제는 모두 바뀐 것처럼 보인다. We were inquiring into the nature of the alogical compatibilities and incompatibilities between events. 우리는 사건들 사이의 비논리적 양립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고 있었다. But, to the extent that divergence is affirmed and disjunction becomes a positive synthesis, it seems that all events, even contraries, are compatible -that they are "inter-expressive"(s'entr' expriment). 하지만 분기/발산이 긍정되고 절단이 긍정적인 종합이 되는 범위에서 모든 사건들은, 심지어 대립자들을 포함해서도 상호 표현적으로 양립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Incompatibility is born only with individuals, persons, and worlds in which events are actualized, but not between events themselves or between their a-cosmic, impersonal, and preindividual singularities. -양립불가능성은 전-우주적이고, 비인칭적이고, 전개체적인 특이성들 사이, 혹은 사건들의 사이 자체가 아니라 오직 개체적이고, 인칭적이며, 사건들이 효과화되는 세계에서 탄생한다. Incompatibility does not exist between two events, but between an event and the world or the individual which actualizes another event as divergent. -양립불가능성은 두 사건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사건과 세계, 혹은 분기/발산으로 효과화되는 또다른 사건으로서의 개체 사이에 존재한다. At this point, there is something which does not allow itself to be reduced to a logical contradiction between predicates and which is nevertheless an imcompatibility; but it is an alogicla incompatibility, an incompatibility of "humor" to which Leibniz's original criteria must be applied. -이 지점에서 양립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술어들 사이의 논리적 모순으로 축약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비논리적 양립 불가능성, 즉 라이프니츠의 본래 기준에 부합하는 유머로서의 양립불가능성이다. The person, such as we have defined it in its difference from the individual, pretends to amuse itself ironically with these incompatibilities, precisely because they are alogical. -개체적인 것과는 다르게 정의된 사람은 정확히 그들이 비논리적이기 때문에 아이러니컬하게 이 양립불가능성들을 즐기려고 한다. In another manner, we have seen how portmanteau words express,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lexicon, wholly compatible meanings, ramifiable and resonating between themselves, which nonetheless become incompatible with certain syntactical forms.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혼성어가 어휘의 관점에서 통사론적인 형태로는 양립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 분기하고 공명하는 양립 가능한 의미들을 표현하는 것을 보았다.
The problem is therfore one of knowing how the individual would be able to transcend his form and his syntactical link with a world, in order to attain to the universal communication of events, that is, to the affirmation of a disjunctive synthesis beyond logical contradictions, and even beyond alogical incompatibilities. -따라서 문제는 어떻게 논리적 모순과 비논리적 양립불가능성을 넘어서 단절/선언적 종합의 긍정, 즉 개체가 통사론적으로 세계와 연결된 형태를 초월하여 사건들의 소통이 광범위하게 도달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It would be necessary for the individual to grasp herself as event; and that she grasp the event actualized within her as another individual grafted onto her. -개체들 스스로를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녀에 또 다른 개체가 접목되어 사건이 효과화되는 것을 파악하는 것처럼 말이다. In this case, she would not understand, want, or represent this event without also understanding and wanting all other events as individuals, and without representing all other individuals as events. -이 경우에, 그녀가 다른 모든 사건들을 개체적으로 이해하거나 원하고, 또는 다른 모든 개체들을 사건들로 표상/재현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을 이해하지도, 원하지도, 혹은 재현/표상하지도 못할 것이다. Each individual would be like a mirro r for the condensation of singularities and each world a distance in the mirror. 각 개체는 특이점들의 응결에 대한 거울이며 각 세계는 이 거울 안의 거리일 것이다. This is the ultimate sense of counter-actualization.-이것은 반-효과화/현실화의 궁극적인 의미이다. This, moreover, is the Nietzschean discovery of the individual as the fortuitous case, as Klossowski takes it up and restores it, in an essential relation to the eternal return. Witness. -이것은 더 나아가 우연한 결과물로서의 개체에 대한 니체의 발견이며 클로소스키는 이를 영원회귀와의 본질적 관계 안에서 복귀시켰다. 증인

the vehement oscllation which upset the individual as long as he seeks only his own center and does not see the circle of which he himself is a part; for if these oscillation upset him, it is because each corresponds to an individuality other than that which he takes as his own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undiscoverable center. -격렬한 진동은 자신이 부분으로서 엮여있는 순환고리를 보지 않고 단순히 자신의 중심을 찾는 개체를 방해한다. 만약 이 진동이 그를 방해한다면, 그것은 그가 발견되지 못한 중심에 자신의 고유한 관점을 놓고 이를 개체성에 상응시키기 때문이다. Hence, an identity is essentially fortuitous and a series of individualities must be traversed by each, in order that the fortuity make them completely necessary." -따라서, 동일성은 본질적으로 우연적이며 개체성들의 계열들은 서로 횡단되어야 하고, 이로 인해 우연성은 그것들이 완전하게 필요하도록 만든다."

We do not raise contrary qualities to infinity in ordoer to affirm their identity; we raise each event to power of the eternal return in order that the individual, born of that which comes to pass, affirm her distance with repect to every other event. -우리는 대립적인 성질들의 동일성을 긍정하기 위해 그들을 무한성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 우리는 각 사건을, 태어나서 오고 가는 개체가 스스로의 거리를 다른 모든 사건들과의 관계에서 긍정하도록 영원회귀의 힘으로 끌어올린다. As the individual affirms the distance, she follows and joins it, passing through all the other individuals implied by the other events, and extracts from it a unique Event which is once again herself, or rather the universal freedom. 개체가 거리를 긍정하면서 그녀는 따라오고 참여하며, 다른 사건들이 적용된 다른 모든 개체들을 통과하고 그것에서 그녀 자체인 독특한 순수 사건, 혹은 보편적인 자유를 추출한다. The eternal return is not a theory of qualities and their circular transformations, but rather the theory of pure events and their linear and sperficial condensation. -영원회귀는 성질들과 그들의 순환적 변화에 관한 이론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은 순수 사건의 대한 이론이며 그들의 선적, 표면적 응결에 관한 것이다. The eternal return has a sense of selection and remains tied to an incompatibility -with the forms which hinder its constitution and its functioning. -영원회귀는 선별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양립불가능성(그것의 형성과 작동을 저해하는 형태의)에 연결되어 있다.
Counter-actualizing each event, the actor-dancer extracts the pure event which communicates with all the others and returns to itself through all the others, and with all the others. -각각의 사건을 반-효과화/현실화하면서, 배우-무용수는 다른 모든 것들과 소통하는 순수 사건을 추출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통해서, 혹은 그들과 함께 다시 자신으로 회귀한다. She makes of the disjunction a synthesis which affirms the disjunct as such and makes each series resonate inside the other. 그녀는 각각의 계열들이 다른 것들 내부에서 공명하도록 만드는 분할을 긍정하는 단절의 종합을 만든다. Each series returns to itself as the other series returns to it, and returns outside of itself as the other series returns into itself: to exlplore all distances, but over a single line; to run very fast in order to remain in the same place. 각각의 계열들은 다른 계열들이 자신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그 자신들로 회귀하며 다른 계열들이 자신 안으로 회귀하는 것처럼 바깥으로 회귀한다: 하나의 선 위이지만 이 모든 거리들을 탐사하는 것은 같은 곳에 머무르지만 굉장히 빠르게 이루어진다. The gray butterfly understands so well the event "to be hidden" that, by remain in the same place, plastered to the trunk of a tree, it covers the whole distance separating it from the "to invigorate" of the black butterfly; it also causes the other event to resonate as individual, within its own individuality as an event, and as a fortuitous case. -회색 나비는 같은 장소에 사건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무 줄기에 붙어있으며, 그것은 활력을 가지게 하는 검은 나비와 스스로를 구별함으로써 모든 거리들을 다룬다; 그것은 또한 자신의 개체성 자체를 사건으로, 우연적인 것으로 다룸으로서, 그것 안에서 다른 사건이 개체로서 공명할 수 있도록 한다. My love is an exploration of distance, a long journey which affirms my hate for the friend in another world and with another individual. -나는 내 친구들에 대한 증오를 긍정하는 또다른 세계와 또다른 개체를 향한 긴 여정, 즉 그 거리를 탐사하는 것을 사랑한다. It causes the bifurcating and ramified series to resonate within one another. -그것은 양쪽으로 갈라지는, 분기된 계열들을 서로 안에서 공명하도록 만든다. But this is the solution of humor, quite different from the romantic irony of the person still founded upon the identity of contraries. -그러나 이것은 아직까지 대립자들의 동일성에 자신을 정초하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인간과는 다른 유머로서의 해결방법이다.

You come to this house; but in other possible pasts you are my enemy, in others my friend. -너는 이 집으로 왔다; 그러나 다른 가능한 과거들에서 너는 나의 적이고 다른 것에서는 나의 친구이다. ... Time is forever dividing itself toward innumerable futures and in one of them I am your enemy. -시간은 무수한 미래들로 언제나 자신을 분할시킨다. 그리고 그 중 하나에서 나는 너의 적이다. ... For a moment his back was again turned to me. I had the revolver ready. I fired with the utmost care. -그의 등이 나에게로 다시 보이는 순간에 나는 권총을 준비했고 그것을 최대한 집중하여 발사했다.

Philosophy merges with ontology, but ontology merges with the univocity of Being (analogy has always been a theological vision, not a philosophical one, adapted to the forms of God, the world, and the self). -철학은 존재론과 합쳐진다. 그러나 존재론은 존재의 일의성과 합쳐진다.(비유는 항상 철학적이지 않고 자아, 세계, 신의 형상과 부합하는 신학적인 시각이었다.) The univocity of Being does not mean that there is one and the same Being; on the contrary, beings are multiple and different, they are always produces by a disjunctive synthesis, and they themselves are disjointed and divergent, membra disjuncta. -존재의 일의성은 하나이면서 같은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존재들은 복수적이고 다르며, 그들은 언제나 단절적인 종합에 의해 생산되고 그들 스스로도 언제나 탈구되고 발산/분기한다. The univocity of Being signifies that Being is Voice that it is said, and that it is said in one and the same "sense" of everything about which it is said. -존재의 일의성은 존재가 말하여진 목소리이며 하나이면서 같은 말하여진 모든 것들의 의미임을 지시한다. That of which it is said is not at all the same, but Being is the same for everything about which it is said. -말해진 것들이 결코 같은 것은 아니며, 다만 존재는 말해진 모든 것들에 대해 같다. It occurs, therefore, as a unique event for everything that happens to the most diverse things, Eventum tantum for all events, the ultimate form for all of the forms which remain disjointed in it, but which bring about the resonance and the ramification of their disjunction. -그래서 이것은 가장 다양한 것들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독특한 사건으로 작용한다. 모든 사건들에 대한 유일한 사건, 탈구된 상태로, 하지만 그들의 단절이 공명과 분기를 가져옴으로써 모든 형상들의 궁극적인 형상이 만들어진다. The univocity of Being merges with the positive use of the disjunctive synthesis which is the highest affirmation. -존재의 일의성은 가장 높은 긍정인 단절/선언적인 종합의 긍정적인 사용과 어우러진다. It is the eternal return itself, or -as we have seen in the case of the ideal game- the affirmation of all chance in a single moment, the unique cast for all throws, one Being and only for all forms and all times, a single instance for all that exists, a single phantom for all the living, a single voice for every hum of voices and every drop of water in the sea. -그것은 영원 회귀 그 자체이거나(우리가 이상적인 놀이의 경우에서 봤던 것처럼) 하나의 순간에서 모든 기회에 대한 긍정이다. 모든 던지기를 위한 독특한 던짐, 모든 형상과 모든 시간을 위한 하나의 존재, 모든 존재를 위한 하나의 사례, 모든 삶을 위한 하나의 유령, 모든 흥얼거림과 바다의 모든 물방울들에 대한 하나의 목소리. It would be a mistake to confuse the univocity of Being to the extent that it is said with the pseudo-univocity of everything about which it is said. -말해진 것에 대한 유사 일의성으로서의 범주와 일의성을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But at the same time, if Being cannot be said without also occurring, if Being is the unique event in which all events communicate with one another, univocity refers both to what occurs and to what is said. -하지만 동시에 존재가 발생을 제하고는 말해질 수 없고, 모든 사건들과 소통하는 독특한 사건이라면, 일의성은 발생하는 것과 말해지는 것을 동시에 지시한다. Univocity means that it is the same thing which occurs and is said: the attributable to all bodies or states of affairs and the expressible of every proposition. 일의성은 발생하는 것과 말해지는 것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신체들과 정황들, 그리고 모든 표현가능한 명제들에 기인한다. Univocity means the identity of the noematic attribute and that which is expressed linguistically -event and sense. -일의성은 사건과 의미, 즉 언어적으로 표현된 노에마적 특성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It does not allow Being to subsist in the vague state that it used to have in the perspectives of the analogy. -그것은 더이상 존재가 이제껏 비유의 관점에서 가져왔던 모호한 상태로 구성되지 않도록 한다. Univocity raises and extracts Being, in order to distinguish it better from that in which it occurs and from that of which it is said. -일의성은 존재를 그것이 발생하고 말해지는 곳에서 더 잘 구별될 수 있도록 추출하고 끌어올린다. It wrests Being from beings in order to bring it to all of them at once, and to make it fall upon them for all times. -그것은 존재들에서 모든 것을 한번에 가져오기 위해, 그리고 다시 그것 위에 항상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 존재를 비튼다. Being pure saying and pure event, univocity brings in contact the inner surface of language(insistence) with the outer surface of Being (extra-Being). -순수 말하기와 순수 사건이 됨으로써, 일의성은 언어의 안쪽 표면(주장)을 존재의 외적 표면(외-존재)과 접촉하게 한다. Univocal Being inheres in language and happens to things; it measures the relationn of language with the external relation of Being. 일의적 존재는 언어에 귀속되어 있으며 사물들에 작용한다; 그것은 언어의 관계와 존재의 외적 관계를 가늠한다. Neither active nor passive, univocal Being is neutral.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으면서 일의적 존재는 중성적이다. It is extra-Being, that is, the minimum of Being common to the real, the possible, and the impossible. 그것은 과잉존재다. 존재의 최소는 실재, 즉 가능과 불가능에 있다. A position in the void of all events in one, an expression in the nonsense of all senses in one, univocal Being is the pure form of the Aion, the form of exteriority which relates things and propositions. -모든 사건들의 공허 속의 하나의 위치, 모든 의미들의 무의미 속의 하나의 표현, 일의적 존재는 사물들과 명제들과 관련되는 외재의 형상, 즉 아이온의 순수한 형상이다. In short, the univocity of Being has three determinations: one single event for all events; one and the same aliquid for that which happens and that which is said; and one and the same Being for the impossible, the possible, and the real. -짧게, 존재의 일의성은 세 개의 정의를 가진다: 모든 사건들에 대한 하나의 사건; 일어나는 것과 말해진 것을 위한 하나의 그리고 같은 유동체; 그리고 가능, 불가능, 실재를 위한 하나의 그리고 같은 존재.


이윤수의 노트 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