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wenty-Sixth Series of Language - 계열 26 - 언어
Events make language possible. 사건들은 언어를 가능하게 만든다. But making possible does not mean causing to begin. 그러나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은 시작을 유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We always begin in the order of speech, but not in the order of language, in which everything must be given simultaneously and in a single blow. 우리는 언제나 언어에 따라서가 아니라 모든 게 하나의 날숨에 동시에 주어져야 하는 말하기에 따라 시작한다. There is always someone who begins to speak. 언제나 먼저 말을 시작하는 사람이 있다. The one who begins to speak is the one who manifest; what one talks about is the denotatum; what one says are the significations. 말을 시작하는 사람은 현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지시에 대해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기호들이다. The event is not any of these things: it speaks no more than it is spoken of or said. 사건은 이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말해진 것이나 말하는 것 이상으로 말하지 않는다. Nevertheless, the event does belong to language, and haunts it so much that it does not exist outside of the propositions which express it.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은 언어에 속해 있으며,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밖에는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언어에 집착한다. But the event is not the same as the propositon; what is expressed is not the same as the expression. 하지만 사건은 명제와 같지않다; 따라서 표현된 것은 표현과 같지 않다. It does not preexist it, but pre-inheres in it, thus giving it a foundation and a condition. 그것은 미리 존재하지 않고 미리 귀속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에 기반과 조건을 부여한다. To render language possible thus signifies assuring that sounds are not confused with the sonorous qualities of things, with the sound effects of bodies, or with their actions and passions.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리가 사물들의 음성적 성질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고, 그것은 신체들에 영향을 미치거나, 행동,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 What renders language possible is that which seperates sounds from bodies and organizes them into propositions, freeing them for the expressive function.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리를 신체로 부터 분리시켜 명제들로 구성하고 그들의 표현적 기능으로부터 자유롭도록 하는 것이다. It is always a mouth which speaks; but the sound is no longer the noise of a body which eats -a pure orality- in order to become manifestation of a subject expressing itself. 말하는 것은 언제나 입이다; 하지만 소리는 더이상 주체가 스스로를 표현하고 나타내기 위해 먹는(순수 구강성의) 소리가 아니다. One speaks always of bodies and their mixtures, but sounds have ceased being qualities attached to these bodies in order that they may enter into a new relation with them, that of denotation, and that they may express this power of speaking and of being spoken. 그는 언제나 신체들과 그것들의 혼합물로 말을 하지만 소리는 이 몸들에 부착될 때 성질들이 되기를 그치고 그들과 새로운 관계들, 즉 지시, 그리고 이 말함과 말해짐의 힘을 표현한다. Denotation and manifestation do not found language, they are only made possible with it. 지시와 현시는 언어를 정초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것과 함께 가능해질 뿐이다. They presuppose the expression. 그들은 표현을 상정한다. The expression is founded on the event, as an entity of the expressible or the expressed. 표현은 표현 가능한것과 표현된 것의 본질인 사건에 의해 정초된다. What renders language possible is the event insofar as the event is confused neither with the proposition which expresses it, nor with the state of the one who pronounces it, nor with the state of affairs denoted by the proposition.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건인데 이 사건은 다만 그것이 표현하는 명제들과 그것을 발음하는 누군가의 상태와 명제들에 의해 지시되는 상황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And in truth, without the event all of this would be only noise -and an indistinct noise. 사실, 사건이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소음에 불과할 것이다. For not only does the event make possible and seperate that which it renders possible, it also makes distinctions within what it renders possible(see, for exampel, the triple distinction in the proposition of denotation, manifestation, and signification). 사건은 가능한 것을 만들고 그것이 가능하게 한 것을 분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능하게 한 것 안에서 구별을 만들어내기 대문이다.(이를테면 명제 안에서의 지시, 현시, 기호의 세 구분처럼)
How does the event make language possible? 어떻게 사건은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가? We have seen that its essence is that of the pure surface effect, or the impassible incorporeal entity. 우리는 그것의 본질이 순수 표면효과이거나 투과 불가능한 비물체적 본질임을 보았다. The event results from bodies, their mixtures, their actions, and their passions. 사건은 신체들로부터, 그들의 혼합물로부터, 그들의 행동/감정들로부터 결과한다. But it differs in nature from that of which it is the result. 그러나 그것의 본성은 그 결과와는 다르다. It is for example, attributed to bodies, to states of affairs, but not at all as a physical quality; rather, it is ascribed to them only as a very special attribute, dialectical or, rather, noematic an incorporeal. 이를테면 그들은 신체들과 상황들로부터 비롯되지만 신체적 성질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매우 특수한 속성으로서, 즉 변증법적으로, 혹은 비물체적이거나 노에마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에 의해 부여된다. This attribute does not exist outside of the proposition which expresses it. 이 속성은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But it differs in nature from its expression. 그러나 그것은 그것의 표현과는 다른 본성을 지닌다. It exists in the proposition, but not at all as a name of bodies or qualities, and not at all as a subject or predicate. 그것은 명제 안에 존재하나 신체나 성질들의 이름, 그리고 주체와 술어로서는 아니다. It exists rather only as that which is expressible or expressed by the proposition, enveloped in a verb. 대신 그것은 동사에 의해 감싸여진 상태로 명제에 의해 표현가능한 혹은 표현된 것으로서 존재한다. The event occuring in a state of affairs and the sense inhering in the proposition are the same entity. 상황 안에서 발생한 사건과 명제에 귀속된 의미는 같은 본성을 지닌다. Consequently, to the extent that the incorporeal event is constituted and constitutes the surface, it raises to this surface the terms of its double reference: the bodies to which it refers as a noematic attribute, and the propositons to which it refers as an expressible entity. 결과적으로, 비물체적인 사건이 표면 위에서 구성되고 구성하는 범위에서, 이는 그것의 이중 참조로서의 항들을 표면 위로 끌어올린다: 노에마적 속성으로서의 신체들과, 표현 가능한 본성으로서의 명제로서 말이다. It organizes these terms as two series which it separates, since it is by and in this separation that it distinguishes itself from the bodies from which it ensues and from the propositions it renders possible. 그것은 이 항들을 구별시키는 두 계열들로 구성하는데 이 구별에서 자신이 뒤따르는 신체들과 가능한 것을 만들어내는 명제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분한다. This separation, this line-frontier between things and propositions (to eat/to speak), enters as well into the "made possible," that is, into the propositions themselves, between nouns and verbs, or, rather, between denotations and expressions. 이 구별, 즉 사물들과 명제들 사이의 경계선은(먹다/말하다) 마찬가지로 "가능하게 만드는", 그러니까 명사와 동사들, 혹은 지시와 표현들과 같은 명제들 자체에 들어간다. Denotations refer always to bodies and, in principle, to consumable objects; expressions refer to expressible meanings. 지시는 원리적으로 언제나 신체들과 소비 가능한 대상들에 기능한다; 표현들은 표현 가능한 의미들에 기능한다. But this line-frontier would not enact the separation of series at the surface it if did not finally articulate that which it separates. 그러나 이 경계선은 그것이 분리하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는 한, 계열들의 분리가 일어나도록 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It operates on both sides by means of one and the same incorporeal power, which, on one hand, is defined as that which occurs in a state of affairs and, on the other, as that which insists in proposition(This is why language has only one power, though it may have several dimension.). 그것은 양쪽 모두에게 같은 비물체적 힘으로서 작용한다. 이 힘은 한편으로는 상황에 따라 일어나는 것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명제 안에서 주장되는 것으로 규정된다(이는 왜 언어가 여러 차원을 가지면서 하나의 힘만을 가지는지 보여준다).
The line-frontier brings about the convergence of divergent series; but it neither abolishes nor corrects their divergence. 경계선은 분기/발산하는 계열들의 수렴을 가져오지만 그들의 분기/발산 자체를 수정하거나 폐지하지는 않는다. For it makes them converge not in themselves (which would be impossible) but around a paradoxical element, a point traversing the line and circulating throughout the series. 그것은 그들을 스스로 수렴하도록(불가능한 것이다) 하지 않고 역설적인 요소로서, 계열들 도처에 순환하고 선을 횡단하는 점으로서 수렴하도록 한다. This is an always displaced center which constitutes a circle of convergence only for that which diverges as such (the power of affirming the disjunction). 이는 그 자체로 분기/발산하기(단절/선언을 긍정하는 힘) 위한 수렴의 순환을 구성하는 항구적으로 배치된 중심이다. This element of point is the quasi-cause to which the surface effects are attached, precisely insofar as they differ in nature from their corporeal causes. 이 지점의 요소는 구체적으로 그들의 물제적 원인들의 본성과는 다른 표면 효과들이 부착된 준원인이다. It is this point which is expressed in language by means of esoteric words of different kinds, guaranteeing the separation, the coordination, and the ramifications of series at once. 이 지점은 계열들의 구별과 결합과 분기를 한꺼번에 보장하는 다른 종류의 이국적 단어들에 의한 언어로 표현된 것이다. Thus the entire organization of language presents three figures: the metaphysical or transcendental surface, the incorporeaal abstract line, and the decentered point. 따라서 모든 언어의 조직은 세 형상을 제시한다: 형이상학적이거나 초월적인 표면, 비물체적인 추상적인 선, 그리고 탈중심화된 지점. These figures correspond to surface effects or events; at the surface, the line of sense immanent to the event; and on the line, the point of nonsense, surface nonsense, being co-present with sense. 이 형상들은 표면효과, 혹은 사건들과 결합한다; 표면에서 의미의 선은 사건에 내재한다; 선 위에서 무의미의 지점, 무의미의 표면은 의미와 함께 주어진다.
The two great ancient systems, Epicureanism and Stoicism, attempted to locate in things that which renders language possible. 에피쿠로스주의와 스토아주의와 같은 두 위대한 고대 체계들은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을 사물들 안에 위치시키려고 했다. But they did so in very different ways. For in order to found not only freedom but also language and its use, the Epicureans created a model based on the declension of the atom; the Stoics, on the contrary, created a model based on the conjugation of events. 그러나 그들은 매우 다르게 접근했다. 에피쿠로스 주의자들은 자유뿐만 아니라 언어와 그것의 사용을 찾기 위해 원자의 어형변화에 기반한 모델을 고안했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반대로 사건들의 활용을 기반으로 하는 모델을 고안했다. It is not surprising therefore that the Epicurean model privileges nouns and adjectives; nouns are like atomes or linguistic bodies which are coordinated through their declension, and adjectives like the qualities of these composites. 그러므로 에피쿠로스의 모델이 명사와 형용사를 특권화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명사는 원자, 혹은 어형변화에 의해 결합된 언어적 신체와 같고 형용사는 이 합성물들의 성질들과 같다. But the Stoic model comprehends language on the basis of "prouder" terms: verbs and their conjugation, in relateion to the links between incorporeal events. 그러나 스토아적 모델은 언어를 더 넓은 관점에서 이해한다: 비물체적 사건들과의 연결들과 관련하여 동사들과 그들의 활용으로서 말이다. The question of knowing whether nouns or verbs are primary in language cannot be resolved according to the general maxim "in the beginning, there is the action," however much one makes of the verb the representative of primary action and of the root the primary state of the verb. 명사나 동사중에 누가 더 언어에 있어서 근본인가를 아는 것에 대한 질문은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와 같은 일반적인 경구에 의해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동사가 유래하는 본래의 지위를 태초의 행위에 대한 표상으로 만든다. For it is not true that the verb represents an action; it expresses an event, which is totally different. Moreover, language is not developed from primary roots; it is organized around formative elements which determine it in its entirety. 동사를 행위의 표상으로 만드는 것은 적절치 않다; 그것은 사건을 표현하는데 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더 나아가 언어는 그것의 본래적인 뿌리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것의 전체성에서 그것을 규정하는 형성적인 요소들로부터 조직된다. But if language is not formed progressively following the succession of an external time, we should not believe, for this reason, that its totality is homogeneous. 그러나 만약 언어가 지속적으로 외재적인 시간의 연쇄를 따르면서 형성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때문에 그것이 등질적인 전체를 가지고 있다고 믿어서는 안된다. It is true that "phonemes" guarantee every linguistic distinction possible within "morphemes" and "semantemes"; but conversely, the signifying and morphological units determine, in the phonematic distinctions, those which are pertinent in a language under examination. "음소"가 모든 언어적 구별을 "형태소"와 "의미소" 안에서 보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기호적이고 형태적인 단위들은 음소들을 언어의 검사에 의해 적절한지를 따지는 것으로, 즉 음성적인 구별들 안에서 규정한다. The whole cannot be described by a simple movement, but by a two-way movement of linguistic action and reaction which represents the circle of the proposition. 전체는 하나의 단순한 운동으로 묘사될 수 없고 명제의 순환을 표상하는 언어적 행위와 반응적 행위, 이 두 방향의 운동으로서 표상된다. And if phonic action forms an open space for language, semantic reaction forms an internal time without which this space could not be determined in conformity with a specific language. 만약 음성적 행위가 언어를 위한 열린 공간을 만든다면, 기호적 반응은 특정 언어에 따라 이 공간이 규정될 수 없는 내부적 시간을 형성한다. Independently, therefore, of elements and only from the point of view of movements, nouns and their declension incarnate action, whereas verbs and their conjugation incarnate reaction. 그러므로 독립적으로 요소들과 운동들의 관점에서만 명사들과 그들의 어형변화는 행위를 구현한고 동사들과 그들의 활용은 반응을 구현한다. The verb is not an image of external action, but a process of reaction internal to language. 동사는 외재적 행위의 이미지가 아니며 언어에 내부적인 반응의 과정이다. This is why, in its most general notion, it envelops the internal temporality of languagge. 이것이 왜 동사가 대부분의 일반적인 관점에서 언어의 내부적 시간성을 감싸는지 보여준다. It is the verb which constitutes the ring of the proposition, bringing signification to bear upon denotation and the semanteme upon the phoneme. 동사는 기호작용이 지시작용에 기반하고 의미소가 음소에 기반하도록 하는 명제의 고리를 구성한다. But it is from the verb as well that we infer what the ring conceals or coils up, or what it reveals once it is split, unrolled, and deployed over a straight line: sens or the event as the expressed of the proposition. 그러나 고리가 숨기거나 꼬고, 혹은 그것이 드러내는 것이 쪼개지고 펴지고 직선 위에 배치되도록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 또한 동사로부터이다: 명제로부터 표현된 사건 혹은 의미.
The verb has two poles: the present, which indicates its relation to a denotable state of affairs in view of a physical time characterized by succession; and the infinitive, which indicates its relation to sense or the event in view of the internal time which it envelops. 동사는 두 개의 축을 가진다: 연쇄에 의해 특징지어진 물질적 시간의 관점에서 바라본 지시적인 상황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현재와 그것이 감싸는 내부적 시간에서 바라본 의미, 혹은 사건과의 관계를 가리키는 무한성 말이다. The entire verb oscillates between the infinitive "mood," which represents the circle once unwound from the entire proposition, and the present "time," which, on the contrary, closes the circle over the denotatum of the proposition. 모든 동사는 전체적인 명제로부터 상처입지 않은 순환을 표상하는 무한적인 분위기와 이와 반대로 명제의 지시대상/관계항을 에워싸는 울타리로서의 현재적인 시간 사이에서 진동한다. Between the two, the verb curves its conjugation in conformity with the relations of denotation, manifestation, and signification -the aggregate of times, persons, and modes. 이 둘 사이에서 동사는 자신의 활용을 지시작용과 현시작용, 그리고 기호작용과의 관계(시간, 인간, 양식의 종합)에서 순응적으로 구부린다. The pure infinity is the Aion, the straight line, the empty form, and the distance; it permits no distinction of moments, but goes on being divided formally in the double and simultaneous direction of the past and the future. 순수 무한성은 아이온, 즉 직선이며, 빈 형식이고, 거리이다; 그것은 순간들의 구별을 허용하지 않지만 존재가 형식적으로 이중으로,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동시적인 방향으로 나누어지도록 한다. The infinitive does not implicate a time internal to language without expressing the sense or the event, that is to say, the set of problems raised by language. 무한성은 시간을 사건이나 의미의 표현없이, 말하자면 언어에 의해 제기된 문제들의 다발없이 언어에 내부적인 것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It connects the interiority of language to the exteriority of being. 그것은 언어의 내재성을 존재의 외재성에 연결시킨다. It inherits therefore the communication of events among themselves.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 사이에서 사건들의 소통을 계승한다. As for univocity, it is transmitted from Being to language, from the exteriority of Being to the interiority of language. 일의성에 관해 말하자면, 그것은 존재에서 언어로, 존재의 외재성에서 언어의 내재성으로 전송된다. Equivocity is always the equivocity of nouns. 애매함은 언제나 명사들의 애매함이었다. The Verb is the univocity of language, in the form of an undetermined infinitive, without person, without present, without any diversity of voice. 동사는 무한성의 정의되지 않은 형상에서, 인간 없는, 현재 없는, 어떠한 목소리의 다양성도 없는 언어의 일의성이다. It is poetry itself. 그것은 시 그자체이다. As it expresses in language all events in one, the infinitive verb expresses the event of language -language being a unique event which merges now with that which renders it possible. 그것이 모든 사건들을 언어를 통해 하나로 표현하면서, 무한한 동사는 언어(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과 합쳐지는 독특한 사건으로서의 언어)의 사건을 표현한다.
Twenty-Seventh Series of Orality - 계열 27 - 구강성
Language is rendered possible by that which distinguishes it. 언어는 그것을 구분하는 것 때문에 가능해진다. What separates sounds from bodies makes sounds into the elements of a language. 소리를 신체와 구별하는 것은 그것을 언어의 요소로 만들어준다. What separates speaking from eating renders speech possible; what separates propositions from things renders propositions possible. 말하기를 먹기와 구분하는 것은 말하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사물들을 명제들과 구분해주는 것은 명제가 가능하게 해준다. The surface and that which takes place at th surface is what "renders possible" -in other words, the event as that which is expressd. 표면에서 발생하는 것의 표면은 가능한 것을 만든다.-다르게 말하자면, 사건은 표현됨으로써 사건이다. The expressed makes possible the expression. 표현된 것은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But in this case, we find ourselves confronted with a final task: to retrace the history which liberates sounds and makes them independent of bodies. 하지만 이 경우, 우리는 마지막 과제와 마주한 것을 발견한다: 소리가 신체들로부터 해방되고 독립되는 것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 말이다. It is no longer a question of a static genesis which would lead from the presupposed event to its actualization in states of affairs and to its expression in propositions. 그것은 더이상 정황에서의 효과화와 명제들 안에서의 표현들을 향하는 가정된 사건에서 추출된 산술적인 창조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It is a question of a dynamic genesis which leads directly from states of affares to events, from mixtures to pure lines, from depth to the production of surfaces, which must not implicate at all the other genesis. 그것은 정황에서 사건으로, 혼합물에서 순수 직선으로, 깊이에서 표면들로, 다른 모든 창조들을 적용하지 않는 역동적 창조에 대한 질문이다. For,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other genesis, we posit eating and speaking by right as two series already separated at the surface. 다른 창조들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면 우리는 먹기와 말하기를 표면에서 이미 구분된 두 계열들로 인정해야 한다. They are separated and articulated by the event which is the result of one of them, to which it relates as a noematic attribute, and renders the other series possible, to which it relates as an expressible sense. 그들은 그들 중 하나로부터의 결과인, 노에마적 속성으로 연관되는, 그리고 다른 계열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표현적인 의미로서 연관되는 사건에 의해 구별되고 절속된다. But it is an entirely different question how speaking is effectively disengaged from eating, how the surface itself is produced, or how the incorporeal event results from bodily states. When we say that the sound becomes independent, we mean to say that it ceases to be a specific quality attached to bodies, a noise or a cry, and thaat it begins to designate qualities, manifest bodies, and signify subjects or predicates. 그러나 어떻게 말하기가 먹기와 효과적으로 단절되는지, 표면이 그 자체로 어떻게 생성되는지, 혹은 비물체적 사건이 어떻게 신체적 상태인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질문이다. 우리가 소리는 독립적이 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이 신체와 결부된 특정한 성질, 혹은 소음이나 울음이기를 그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고 이는 새롭게 성질들을 지시하고 신체들을 현시하고 주체나 술어를 기호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As it happens, sound takes on a conventional value inside denotation, a customary value in manifestaton, and an artificial value in signification, only because it establishes its independence at the surface from the higher authority of expressivity. 그것이 일어나면서 소리는 단지 표현성의 더 높은 권위로부터 비롯된 표면에서 그것의 독립성을 수립하기 때문에 지시 속에서 전통적인 가치를, 현시 속에서는 관례적인 가치를, 기호 작용 속에서는 인위적인 가치를 가진다. The depth-surface distinction is, in every respect, primary in relation to the distinctions nature-convention, nature-custom, or nature-artifice. 깊이-표면 구분은 모든 관점에서 자연-전통, 자연-관례, 자연-인위 구분들과 관련하여 본래적이다.
Now, the history of depths begins with what is most terrifying: it begins with the theater of terror whose unforgetable picture Melanie Klein painted. 이제, 깊이의 역사는 가장 끔찍한 것과 시작한다: 그것은 멜라니 클라인이 그린 잊을 수 없는 그림인 테러의 극장과 함께 시작한다. In it, the nursing infant is, beginning with his or her first year, stage, actor, and drama at once. 그 안에서 유아는 그 혹은 그녀의 첫 해, 단계, 역할, 그리고 드라마를 한꺼번에 시작한다. Orality, mouth, and breast are initially bottomless depths. 구강성, 입, 그리고 가슴은 바닥이 없는 깊이이다. Not only are the breast and the entire body of the mother split apart into a good and a bad object, but they are aggressively emptied, slashed to pieces, broken into crumbs and alimentary morsels. 가슴과 어머니의 모든 신체가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대상으로 구분될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극단적으로 비워지고 조각들로 쪼개지고, 소화 가능한 식량과 부스러기로 망가진다. The introjecton of these partial objects into the body of the infant is accompanied by a projection of aggresiveness onto these internal objects, and by a re-projection of these objects into the maternal body. 이 유아의 신체를 향한 부분적 대상들의 내적 투사는 이 내부적 대상들에 대한 공격적인 투사와 이 대상들이 어머니의 신체에 재투사되는 것을 동반한다. Thus, introjected morsels are like poisonous, persecuting, explosive, and toxic substances threatening the child's body from within and being endlessly reconstituted inside the mother's body. 따라서 내투사된 작은 조각들은 어머니의 몸 안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아이의 몸을 위협하는 유독하고, 박해하고, 폭발적이고, 유해한 물질들이다. The necessity of a perpetual re-intorjection is the result of this. 재투사의 영구적인 필연성은 이에 대한 결과이다. The entire system of introjection and projection is a communication of bodies in, and through, depth. 투사와 내투사의 모든 체계는 깊이 안에서, 그리고 이를 통한 신체들의 소통이다. Orality is naturally prolonged in cannibalism and anality in the case of which partial objects are excreta, capable of exploding the mother's body, as well as the body of the infant. 구강성은 자연스럽게 부분적 대상들이 똥이 되고, 어머니의 신체를 폭파시킬 수 있고, 유아의 신체까지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식인성과 항문성에 연장된다. The bits of one are always the persecutors of the other, and, in this abnominable mixture which constitutes the Passion of the nursing infant, persecutor and persecuted are always the same. 누군가의 약간의 조각들은 언제나 타인에 대한 박해자가 되고 유아의 정념을 구성하는 이 비정상적인 혼합물 안에서 박해자와 박해받는 자는 언제나 같다. In this system of mouth-anus or aliment-excrement, bodies burst and cause other bodies to burst in a universal cesspool. 이러한 입과 항문의, 혹은 음식물과 배설물의 체계 안에서 신체들은 폭발하고 다른 신체들이 오물 안에서 폭발하도록 만든다. We call this world of introjected and projected, alimentary and excremental partial internal objects the world of simulacra. 우리는 이 세계를 내투사와 투사, 음식물과 배설물, 부분적인 내적인 사물들, 시뮬라크라의 세계라 부른다. Melanie Klein describes it as the paranoid-schizoid position of the child. 멜라니 클라인은 이를 아이의 편집증-분열증적 위치라고 묘사한다. It is succeeded by a depressive position which characterizes a dual progress, since the child strives to reconstitute a complete good object and to identify himself with this object. 그것은 아이가 완전하고 좋은 대상을 재구성하고자 투쟁하고 이 대상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이중의 과정을 특징화하는 우울증적 위치로부터 연속된다. The child strives thus to achieve a corresponding identity, even if in this new drama he has to share the threats, sufferings, and all the passions undergone by the good object. 따라서 아이는 상응하는 동일성을 얻고자 투쟁하고 이 새로운 드라마에서조차도 그는 좋은 대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위협들과 고통들과 모든 정념들을 공유해야 한다. Depressive "identification," with its confirmation of the super-ego and formation of the ego, replaces paranoid and schizoid "introjection-projection." 초자아와 자아의 형성을 보증하는 우울증적 "동일시"는 편집증과 분열증의 "내투사-투사"를 대체한다. Everything is prepared at last for the access to a sexual position marked by Oedipus, through new dangers. 모든 것은 새로운 위험들을 통해 오이디푸스로 표시된 성적인 위치로 통과하도록 준비되어 있다. In it, the libidinal impulse tend to be disengaged from destructive impulses and to invest through "symbolization" always better organized objects, interests, and activities. 그것에서 리비도적 충동은 파괴적 충동과 단절하려고 하고 "상징화"로 진입하는 것은 언제나 더 나은 대상들과 관심들과 활동들을 탐사하게 한다.
The comments we will make about certain details of the Kleinian schema are intended to sketch out "orientations" only. 우리가 클라인적 개요의 특정 세부들에 대해 만들 언급들은 단지 "방향성"을 그려보기 위함이다. For the very theme of positions implies the idea of the orientations of psychic life and of cardinal points; it also implies the idea of the organization of this life in accordance with variable or shifting coordinates and dimensions, an entire geography and geometry of living dimensions. 위치들에 대한 주제는 정신적 삶과 중요한 지점들의 방향성들에 대한 생각을 내포한다; 그것은 변수, 혹은 이동하는 좌표들과 차원들, 삶의 차원에서의 전체적인 지리학과 기하학에 따르는 이 삶의 조직에 대한 생각을 내포하기도 한다. It seems at first as if the paranoid-schizoid position merges with the development of an oral-anal depth -a bottomless depth. 그것은 먼저, 마치 편집증-분열증적 위치가 바닥없는 깊이인 구강-항문의 발전과 합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Everyting starts out in the abyss. 모든 것은 심연에서 시작한다. But in this respect, in this domain of partial objects and pieces which people the depth, we are not certain wheter or not the "good object" (the good breast) can be considered as introjected in the same way as the bad object is. 하지만 이 관점에서, 사람들이 곧 깊이인 부분적 조각들과 대상들의 영역 안에서 우리는 좋은 대상(좋은 가슴)이 나쁜 대상과 같은 방식으로 내투사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Melanie Klein herself showed that the splitting of the object into good and bad in the case of introjection is duplicated through a fragmentation which the good object is unable to resist, since one can never be sure that the good object does not conceal a bad piece. 멜라니 클라인은 스스로 내투사의 경우에 대상을 좋음과 나쁨으로 나누는 것은 좋은 대상이 나쁜 조각을 숨기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한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파편화를 통해 복제된다는 것을 보여줬다. Furthermore, every piece is bad in principle (that is, persecuting and persecutor), only what is wholesome and complete is good. 더 나아가, 모든 조각은 원리적으로 나쁘고(박해하고 박해받는 자), 완전하고 전체적인 것들만이 좋은 것으로 인식된다. But introjection, to be precise, does not allow what is wholesome to subsist. 하지만 엄밀하게 내투사는 전체성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한다. This is why equilibrium proper to the schizoid position and its relation to the subsequent depressive position do not seem capable of coming about from the introjection of a good object as such, and they must be revised. 이는 왜 평형 상태가 분열증적 위치에 알맞고 이에 따른 우울증적 위치와의 관계는 내투사로부터 좋은 대상 그 자체로 나오지 못하고 수정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What the schizoid position opposes to bad partial objects -introjected and projected, toxic and excremental, oral and anal- is not a good object, even it if were partial. 분열증적 위치가 나쁜 부분적 대상들 -내투사/투사된, 유독하고 배설적인, 구강/항문적인- 에 반하는 것은 그것이 부분적이라도 좋은 대상이 아니다. What is oppossed is rather an organism without parts, a body without organs, with neither mouth nor anus, having given up all introjection of projection, and being complete, at this price. 반하는 것은 오히려 부분 없는 생물체이며 기관들 없는 신체이고, 입도 항문도 없으며 모든 투사의 내투사를 포기하고 그렇기 때문에 완전한 것이다. At this point, the tension between id and ego is formed. 이 지점에서 이드와 자아 사이의 긴장이 만들어진다. Two depthes are opposed: a hollow depth, wherein bits whirl about and explode, and full depth. 두 깊이는 서로 반한다: 조각들이 빙빙 돌고 폭발하는 얕은 깊이, 그리고 충만한 깊이. These are two mixtures: one is made of hard and solid fragments which change; the other is liquid, fluid, and perfect, without parts or alteration because it has the property of melting and welding (all the bones in a mass of blood). 이들은 두 혼합물들이다: 하나는 변화하는 단단하고 견고한 파편들이고; 다른 것은 유동적이고 완벽한, 그리고 녹거나 용접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모든 뼈들은 피의 매스들 안에 있다.)부분들이나 변경이 없는 액체이다. It does not seem, in this sense, that the urethral theme can be set on the same plane as the anal theme. 이런 의미에서 요도적인 주제는 항문적인 주제와 같은 면에 있다고 볼 수는 없다. Excrements are always organs and morsels, sometimes dreaded as toxic substances and sometimes utilized as weapons to break apart still other morsels. 배설물들은 언제나 기관들이나 작은 음식물들인데 이들은 때때로 유독한 성분들로 기피되거나 때때로 다른 작은 음식물들을 쪼개는 무기들로서 활용된다. Urine, on the contrary, bears witness to a liquid principle capable of binding all of the morsels togeter, and of surmounting such a breaking apart in the full depth of a body (finally) without organs. 소변은 반대로 모든 음식물 조각들을 묶을 수 있는 액체 원리에 대한 간증이고, 기관들 없는 신체의 깊은 심층으로서의 균열을 극복한다. If we assume that the schizophrenic, with all the language he has acquired, regresses to this schizoid position, we should not be surprised to find again in schizophrenic language the duality and complemetarity of words-passions, splintered excremental bits, and of words-actionsm blocks fused together by a principle of water or fire. 우리가 만약 분열증자를 그가 습득한 모든 언어와 이 분열증적 위치로의 퇴행으로 간주한다면, 우리가 분열증적 언어에서 이중성과 단어-정념들의 상보성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쪼개진 배설 조각들과 단어-행동주의의 블록들은 물과 불의 원리를 통해 용해될 것이다. Henceforth, everything takes place in depth, beneath the realm of sense, between two nonsenses of pure noise -the nonsense of the body and of the splintered word, and the nonsense of the block of bodies or of inarticulate words (the "that doesn't make sense," ca n'a pas de sens, acting as the positive process of both sides). 이후로 모든 것은 깊이에서 발생한다. 의미의 범위 아래에서, 두개의 순수한 소음의 무의미들 사이에서 말이다. -신체와 조각난 단어의 무의미, 신체 조각들, 혹은 절속되지 않은 단어들의 무의미("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는 두 쪽에서 모두 긍정적인 과정으로 작용한다.). The same duality of complementary poles is found again in schizophrenia between reiterations and perseverations, between jaw-grinding and catatonia, for example. 상호보완적인 축들의 같은 이중성은 분열증 안에서 번복과 고집 사이, 이갈이와 긴장증 사이 등의 예로 나타난다. The first bears witness to internal objects and to the bodies they break to pieces -the same bodies which break them to pieces; the second manifests the body without organs. 전자는 내적인 대상들과 조각난 신체들에 대한 간증을 내포하고(그들을 조각내는 것과 같은 신체들); 후자는 기관없는 신체를 현시한다.
It seems to us that the good object is not introjected as such, because it belongs from the very start to another dimension. 좋은 대상은 또다른 차원의 가장 시작 부분에 귀속되기에 그 자체로 내투사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The good object has another "position." 좋은 대상은 다른 위치를 가진다. It belongs to the heights, it holds itself above, and does not allow itself to fall without also changing its nature. 그것은 높이에 귀속되고 스스로를 위에 고정하며 그것의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추락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We should not understand height as an inverted depth. 우리는 높이를 깊이의 역전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It is rather an original dimension distinguished by the nature of the object which occupies it, and by the instance which circulates in it. 그것은 외려 대상이 차지하는 본성과 그 안에서 순환하는 사례들에 의해 구분된 본래의 차원이다. The superego does not begin with the first introjected objects, as Melanie Klein says, but rather with this good object which holds itself aloft. 초자아는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것처럼 일차적으로 내투사된 대상들에 의해 시작하지 않고 하늘 높이 스스로를 잡아두는 좋은 대상에 의해 시작한다. Freud often insisted on the importance of this transference from depth to height, which indicates, between the id and the superego, a total change of orientation and a central reorganization of psychic life. 프로이트는 이드와 초자아, 즉 방향성의 완전한 변화와 정신적 삶의 중심적인 조직화를 가리키는 이 깊이에서 높이로의 이동의 중요성을 자주 주장했다. Depth has an internal tension determined by dynamic categories -container-contained, empty-full, massive-meager, etc. 깊이는 역동적 분과들로 정의된 내적 긴장을 가지고 있다 -담는 것과 담기는 것, 빈-찬, 뚱뚱하고-야윈, 등등. But the tension proper to height is verticality, differnce in size, the large and the small. 그러나 높이에 적절한 긴장은 수직성, 크기에 따른 차이, 크고 작음이다. In opposition to partial introjected objects, which do not express the aggressiveness of the infant without also expressing the aggresiveness directed against him or her, and which by the same token are bad and dangerous, the good objecct as such is a complete object. 그 혹은 그녀에 대항하는 공격성을 표현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아의 공격성을 표현하지 않는 것, 같은 이유로 나쁘고 위험한 부분적인 내투사된 대상들과 반대로 좋은 대상은 그 자체로 완전한 대상이다. If it manifests the most venomous creulty as well as love and protection, it is not because of its partial and divided nature, but as a good and complete object all the manifestations of which emanate from a higher and superior unity. 만약 그것이 사랑과 보호와 함께 가장 유독한 잔인함을 현시한다면 그것의 부분적이고 분열된 본성 때문이 아니라 높고 우월한 통합에서 발하는 좋고 완전한 대상의 모든 현시들 때문이다. In fact, the good object has taken upon itself the two schizoid poles -that of partial objects from which it extracts its force and that of the body without organs from which it exxtracts its form, that is, its completeness and integrity. 사실 좋은 대상은 두 분열증적 축에 의존한다 - 힘을 추출하는 부분적 대상들과 형태를 추출하는 기관없는 신체들의 완전함과 온전함처럼 말이다. It maintains therefore complex relations with the id as a reservoir of partial object(introjected and projected into a fragmented body), and with the ego(as a complete body without organs). 그것은 그러므로 부분적 대상(파편화된 신체에 투사되고 내투사된)의 저장소로서의 이드와 자아(기관없는 완전한 신체인)의 복잡한 관계를 지속한다. Insofar as it is the principle of the depressive position, the good object is not the successor of the schizoid position, but rather forms itself in the current of this position, with borrowings, blockages, and pressures which attest to a constant communication between the two. 그것이 우울증적 위치의 원리인 한에서, 좋은 대상은 분열증적 위치의 계승자가 아니고 둘 사이의 지속적인 소통을 증명하는 압력과 금지, 빌려옴들과 함께하는 이 위치의 흐름에서 스스로를 형성한다. At the limit, of course, the schizoid can reinforce the tension of his own position in order to shut himself up to the revelations of height or veticality. 한계에서 당연하게도, 분열증자는 높이, 혹은 수직성으로 상승하기 위해 스스로를 입닥치게 하면서 제 위치의 긴장을 강화할 수 있다. But in any event, the good object of the heights maintains a struggle with the partial objects in which force is at stake in the violent confrontation of two dimensions. 하지만 어떤 사건에서도 높이들의 좋은 대상은 두 차원들의 폭력적인 대치로 말미암은 힘인 부분적인 대상들과의 투쟁을 지속한다. The body of the infant is like a den full of introjected savage beasts which endeavour to snap up the good object; the good object, in turn, behaves in their presence like a pitiless bird of prey. 아기의 신체는 좋은 대상을 미친듯이 물어뜯는 내투사된 흉포한 짐승들로 가득한 소굴과 같다; 반면에 좋은 대상은 무자비한 먹이로서의 새와 같은 존재로서 작동한다. Under these circumstances, the ego identifies with the good object, patterning itself afetr it in a model of love and partaking of its power and its hatred toward the internal objects. 이러한 환경들에 아래에서 자아는 좋은 대상과 동일시하는데 사랑의 모델 안에서 스스로를 유형화하고 자신의 힘과 증오를 내적 대상들을 향해 흡수한다. But it also partakes of its wounds and it suffering under the blows of these bad objects.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상처들 또한 흡수하고 이 나쁜 대상들의 충격 아래에서 고통받는다. On the other hand, it identifies itself with these bad partial objects which endeavor to catch the good object; it offers assistance, alliance, and even pity. 다른 한편, 그것은 스스로를 좋은 대상을 미친듯이 잡으려는 나쁜 부분적 대상들과 동일시한다; 그것은 협력과 동맹 그리고 심지어는 연민을 제공한다. Such is the vortex id-ego-superego, in which every one receives as many blows as he metes out and which characterizes the manic-depressive position. 그것은 이드-자아-초자아 모두가 각자에게 광란의 우울증적 위치를 특징화하는, 최대한의 충격들을 가하고 받는 소용돌이이다. In relation to the ego, the good object as superego mobilizes all of its hatred to the extent that the ego has allied itself to the introjected objects. 자아와 관련하여, 초자아로서의 좋은 대상은 자아와 동맹하는 내투사된 대상들의 범주에 자신의 모든 증오가 작동하도록 한다. But is does grant it assistnace and love, to the extent that the ego crosses over and attempts to identify itself with it. 그러나 그것은 자아가 스스로를 넘고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한에서 사랑과 협력을 부여한다.
That love and hate do not refer to partial objects, but express the unity of the good and whole object, must be understood in terms of the "positon" of that object -its transcendence in height. 사랑과 증오는 부분적 대상들로 환원되지 않고 높이에 따른 초월성에 의해 자신의 위치가 이해되어야만 하는 좋고 전체적인 대상의 통일성을 표현한다. Beyond loving and hating, assisting or fighting, there is "escaping" and "withdrawing" in the heights. 사랑과 증오, 협력과 싸움을 넘어서 높이들에는 "탈출"과 "기권"이 있다. The good object is by nature a lost object. 좋은 대상은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대상이다. It only shows itself and appears from the start as already lost, as having been lost. 그것은 이미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는 도중인 것에서 시작하여 스스로를 드러낸다. Its eminent unity lies here. 그것의 탁월한 통일성은 이에 기반한다. Only as lost, the good object confers its love on the one who is able to find it for the first time as "found again" ("retrouve") (the ego which identifies with it); and it confers its hate on the one who approaches it aggresively as something "discovered" or "exposed," and yet already there (the ego taking the side of internal objects). 오직 잃은 것으로서 좋은 대상은 처음으로 "다시 찾은 것"(그것과 동일시하는 자아)으로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이에게 사랑을 수여한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된, 혹은 노출된 것, 그리고 이미 있는 것(내적 대상들을 취하는 자아)으로 삼아 공격적으로 접근하는 이에게 증오를 수여한다. Coming about in the course of the schizoid position, the good object posits itself as having always preexisted in this other dimension which now interferes with depth. 분열증적 위치를 따라 나오면서 좋은 대상은 이제 스스로를 깊이에 의해 방해받는 이 다른 차원 안에 언제나 미리 존재한 것으로 위치시킨다. This is why, higher than the movement through which it confers love and blows, there is the essence through which and into which it withdraws and frustrates us. 이 때문에 사랑과 타격을 주는 움직임보다 더 높은 곳에서 우리를 철수시키고 좌절시키는 본질이 있는 것이다. It withdraws covered with its wounds, but it also withdraws into its love and its hate. 그것은 상처들에 덮인채 후퇴하지만 사랑과 증오 안으로 후퇴하기도 한다. It gives its love only as a love which was given before(comme redonne), as a pardoning; it confers its hate only as a recalling of threats and warnings which did not take place. 그것은 단지 전에 주어졌던 사랑에 대해서만 용서로서 사랑을 줍니다. 그것은 오로지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위협과 경고들을 소환하면서 자신의 증오를 줍니다. It is therefore as a result of frustration that the good object, as a lost object, distributes love and hatred. If it hates, it is as a good object, and no less than it loves. 따라서 그것은 불만의 결과로서, 좋은 대상은 잃어버린 대상으로서 사랑과 증오를 분배합니다. 만약 그것이 증오한다면 그것은 좋은 대상으로서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것이다. If it loves the ego which identifies with it and hates the ego which identifies with the partial objects, it withdraws even further; it frustrates the ego which hesitates between the two and suspects it of double-dealing. 만약 그것이 그것과 동일시하는 자아를 사랑한다면 부분적인 대상들과 동일시하는 자아는 증오하는데 그것은 심지어 더 멀리 후퇴한다; 그것은 그 둘 사이에서 망설이는 자아를 분노케하고 그것을 표리부동한 것으로 의심한다. Frustration, in view of which the first time can only be a second time, is the common origin of love and hatred. 처음만이 두번째가 됨을 고려하면 분노는 사랑과 증오의 공통된 기원입니다. The good object is cruel (the cruelty of the sperego) to the extent that it ties together all these moments of love and hate conferred from on high with an instance which turns its face away and offers its gifts(dons) only as gifts offerd once before(redonnes). 좋은/선한 대상은 전에 주어졌던 선물들로만 선물을 주고 자신의 얼굴을 돌리는 높은 사례들에 의해 부여된 사랑과 증오의 모든 순간들을 모두 하나로 묶는 한에서 잔인해진다(초자아의 잔인함). Schizophrenic pre-Socratic philosophy is thus followed by depressive Platonism: the Good is reached only as the object of a reminiscence, uncovered as essentially veiled; the One gives only what it does not have, since it is superior to what it gives, withdrawn into its height; and, as Plato said of the Idea, "it flees or it perishes" -it perishes under the blows of internal objects, but it flees in relation to the ego, since the Idea precedes it; the Idea withdraws as the ego advances, leaving with it only a little love or hate. 전 소크라테스적인 분열증적 철학은 따라서 우울증적인 플라톤주의를 따른다: 선함/좋음은 잔상의 대상으로 밖에 도달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가려져 있기에 드러난다; 그것이 주는 것보다 우월하기에 오로지 그것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만을 주는 그것은 그것의 높이로 후퇴한다; 그리고 플라톤이 이데아에 대해 말한 것처럼, "그것은 달아나거나 소멸한다" -그것은 내적 대상들의 충격에 의해 소멸되지만 이데아가 그것에 선험적이기에 그것은 자아와의 관계에서는 도망간다; 이데아는 자아가 전진할수록 조금의 사랑과 증오를 남기면서 후퇴한다. These, as we have seen, are the charateristics of the depressive past perfect. 이들은 우리가 봤던 것처럼 완전한 과거의 우울증적인 성질들이다. The manic-depressive position, being determined by the good object, presents therefore all sorts of new characteristics at the same time that it inserts itself in the paranoid-schizoid position. 그러므로 선한 대상으로부터 규정되는 광적-우울증적 위치는 온갖 종류의 새로운 성격들을 나타내며 동시에 자신을 편집증-분열증적 위치에 기입한다. This is no longer the deep world of th simulacra, but rather that of the idol on high. 그것은 더이상 시뮬라크라의 깊은 세계가 아니라 높은 곳의 우상이 된다. It is no longer a matter of mechanisms of introjection and projection, but of identification. 그것은 더이상 내투사와 투사의 메커니즘의 문제가 아닌 동일시의 문제가 된다. And it is no longer the same Spaltung or division of the ego. 그것은 더이상 자아의 분열 혹은 분리와 같지 않다. The schizophrenic split is a split between the explosive, introjected and projected internal objects, or rather the body which is fragmented by these objects, and the body without organs and without mechanisms renouncing projection as well as introjecton. 분열증적 분열은 폭발적인 내투사와 투사된 내적 대상들 사이의 분열이거나 이 대상들을 통해 파편화된, 그리고 기관들 없는, 투사와 내투사를 포기하는, 메커니즘이 없는 신체이다. The depressive split is between the two poles of identification, that iis, the identification of the ego with the internal objects and its identification with the object of heights. 우울증적인 것은 동일시의 두 축에 의해 쪼개진다. 즉 내적 대상들과 자아의 동일시, 그리고 높이들의 대상들과 그것의 동일시이다. In the schizophrenic position, "partial" qualifies internal objects and is contrasted with "complete," which qualifies the body without organs reacting to these objects and the fragmentation they make it suffer. 분열증적 위치에서 "부분적"인 것은 내적 대상들을 한정하고, 그것은 이 대상들에 반응하는 기관없는 신체와 그것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파편화를 한정하는 "완전한" 것과 대비된다. In the depressive position, "complete" qualifies the object, and subsumes under it not only the qualifications "unharmed" and "wounded," but also "present" and "absent," as the double movement by means of which this highest object gives outside of itself and withdraws into itself. 우울증적 위치에서 "완전한"은 대상을 한정하고 그리고 그 아래서 "상처입지 않은", "상처입은" 뿐만 아니라 이 가장 높은 대상이 자신을 밖으로 주고 다시 안으로 철수시키는 이중 운동의 방식으로 "현재"와 "부재"를 소비한다. For this reason, the experience of frustration, that is, the experience of the good object which withdraws into itself or which is essentially lost, belongs to the depressive position. 이를 이유로, 불만의 경험은, 즉 본질적으로 결여되어 있거나 스스로를 자신 안으로 후퇴시키는 선한 대상의 경험은 우울증적 위치에 속한다. In the case of the schizoid position, everything is aggressiveness exerted or undergone in the mechanisms of introjection and projection; in the strained relation between fragmented parts and the body without organs, everything is passion and action, everything is communication of bodies in depth, attack and defense. 분열증적 위치의 경우에, 모든 것은 투사와 내투사의 매커니즘 속에서 겪거나 가해지는 공격성이다; 파편화된 부분들과 기관없는 신체 사이의 긴장된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은 정동과 행위이며, 깊이에서의 신체들의 소통이고 공격과 방어이다. There is no room for privation or for the frustrating situation, which appears in the course of the schizoid position, although it emanates from the other position. 분열증적 위치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궁핍과 불만적인 상황을 위한 공간은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다른 위치에서 발한다.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depressive position prepares us for somthing which is neither action nor passion, that is, for the impassible withdrawal or contraction. 이 때문에 우울증적 위치는 행위나 정동이 아닌, 즉 무감각한 후퇴와 축소를 위한 무언가를 우리에게 준비시킨다. It is for this reason as well that the manic-depressive position seems to have a cruelty which is different from the paranoid-schizoid aggressiveness. 이는 마찬가지로 광적-우울증적 위치가 편집증-분열증적 공격성과는 다른 잔인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Cruelty implies all these moments of love and hate bestowed from above, by a good but lost object which withdraws and which always gives what it gives for the second time. 잔인함은 언제나 자신이 주는 것을 언제나 다음 번에 주는, 스스로를 후퇴시키는 선한, 그러나 결여된 대상을 통해 위에서 부여된 사랑과 증오의 모든 순간들을 내포한다. Masochism belongs to the depressive position, not only with respect to the sufferings which it undergos, but also with respect to the sufferings that it likes to confer, through identification with the cruelty of the good object as such. 마조히즘은 우울증적 위치에 속하는데 그것이 겪는 고통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선한 대상의 잔인함 자체에 대한 동일시를 통해서 주고자 하는 고통들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Sadism, on the other hand, depends on the schizoid position, not only with respect to the sufferings it inflicts upon others, but also with respect to the sufferings it inflicts upon itself through the projection and interalization of aggressiveness. 사디즘은 반면에, 분열증적 위치에 의존하는데 타인에게 가하는 고통에서의 측면 뿐만 아니라, 공격성의 내재화와 투사를 통해. 자신에게 가하는 고통의 측면에서도 그렇다. We have seen, from another point of view, how alcoholism fits the depressive position, playing the role of the highest object, its loss and the law of this loss in the past perfect; we have seen how finally it replaces the liquid principle of schizophrenia in its tragic presents.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알코올 중독이 가장 높은 대상의 역할을 하면서, 또 잃음과 완전한 과거 안에서 이 잃음의 법칙을 통해 어떻게 우울증적 위치로 들어맞는지 봐왔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이 결과적으로 자신의 비극적 현재 안에서 분열증의 액체적 원리를 대체하는지를 봐왔다.
And then the first stage of the dynamic genesis appears. 그리고 나서 역동적 발생의 첫 단계가 나타난다. The depth is clamorous: clappings, crackings, gnashings, cracklings, explosions, the shattered sounds of internal objects, and also the inarticulate howls-breaths of the body without organs which respond to them -all of this forms a sonorous system bearing witness to the oral-anal voracity. 깊이는 시끄럽다: 박수, 균열, 이갈이, 탁탁, 폭발, 내적 대상들의 흩어진 소리들 그리고 기관없는 신체의 불분명한 울부짖음-호흡, 이 모든 것에 대응하는 구강-항문적 탐욕에 대한 간증으로서의 음향적 체계를 형성한다. This schizoid system is inseperable from the terrible prediction: speaking will be fashioned out of eating and shitting, language and its univocity will be sculpted out of shit...(Artaud speaks of the "caca of being and of its language"). 이 분열증적 체계는 끔찍한 예견과 분리될 수 없다: 말하기는 먹기와 싸기로 만들어지고 언어와 그것의 일의성은 똥으로부터 빛어질 것이다...(아르토는 존재의 똥과 그것의 언어에 관해 말했다). But, to be precise, what guarantees the first rough sketch of this sculpture, and the first stage in the formation of a language, is the good object of the depressive position up above. 그러나 엄밀하게는, 이 조각의 첫 에스키스를 보장하는 것은, 그리고 언어 형성의 첫 단계는 위에 있는 우울증적 위치의 선한 대상이다. For it is this object that, from among all the sounds of the depth, extracts a Voice. 깊이의 모든 소리들에서 목소리를 추출하는 것은 이 대상이다. If we take into considerati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good object(of being found only as lost, of appearing for the first time as already there, etc.) it seems that they are necessarily gathered into a voice which speaks and comes from on high. 만약 우리가 선한 대상의 성격들을(오로지 결핍된 것으로, 이미 있는 것으로 처음 나타난다면, 등등.) 고려한다면 그것은 높은 곳으로부터 오고 말하는 목소리로 필연적으로 모일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보인다. Freud himself stressed the acoustic origin of the sperego. 프로이트는 초자아의 청각적 기원에 대해 역설한 바 있다. For the child, the first approach to language consists in grasping it as the model of that which preexists, as referring to the entire domain of what is already there, and as the familial voice which conveys tradition, it affects the child as a bearer of a name and demands his insertion even before the child begins to understand. 어린이에게 언어에 대한 첫 접근은 선존재하는, 즉 이미 있는 것의 모든 영역에 상응하는 것을 모델로 붙잡는 것에 있다. 그리고 전통을 전달하는 친숙한 목소리로서 그것은 아이에게 이름의 담지자로서 영향을 주고 아이가 그것을 이해하기도 전에 그의 삽입을 요구한다. In a certain way, this voice has at its disposal all the dimensions of organized language: it denotes the good object as such or, on the contrary, the introjected ovjects; it signifies something, namely, all the concepts and classes which structure the domain of preexistence; and it manifests the emotional variations of the whole person (the voice that loves and reassures, attaks and scolds, that itself complains about being wounded, or withdraws and keeps quiet). 특정한 방식으로 이 목소리는 조직화된 언어의 모든 차원의 사용에 있다: 그것은 선한 대상을 그 자체로 지시하거나 반대로, 내투사된 대상들을 지시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선존재의 영역을 구조화하는 모든 개념들과 계층들을 이름으로써 기호화한다; 그리고 그것은 한 인간의 모든 감정의 변형들(사랑하고 확신하는, 공격하고 꾸짖는, 상처받은 것에 대해 불평하거나 후퇴해서 조용히 있는 목소리로서)을 현시한다. The voice, though, presents the dimensions of an organized language, without yet being able to grasp the organizing principle according to which the voice itself would be a language. 그러나 목소리는 목소리 그 자체가 언어이기 마련인 조직화의 원리를 포착하지 못한 채, 한 조직된 언어의 차원을 제시한다. And so we are left outside sense, far from it, this time in a pre-sense of heights: the voice does not yet have at its disposal the univocity which would make it a language, and, having unity only in virtue of its eminence, rests entangled in the equivocity of its denotations, the analogy of its significations, and the ambivalence of its manifestations. 따라서 우리는 의미 바깥에 멀리, 이번에는 높이들의 선-의미에 남게된다: 목소리는 아직 자신을 언어로 만들어주는 일의성의 사용에 있지 않으며 오직 자신의 현저함의 가치에서만 통일성을 가지고, 지시작용의 모호함에, 기호작용의 유비에, 그리고 현시작용의 양가성에 얽혀있는 상태로 남는다. Truth to tell, to the extent that it denotes the lost object, one does not know what it manifests since it manifests withdrawal into its principle, or silence. 사실상, 그것이 결여된 대상을 지시하는 한에서, 그것이 자신의 원리, 혹은 침묵으로 후퇴하는 것을 현시하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것이 무엇을 현시하는지 모른다. It is once the object, the law of the loss, and the loss itself. 그것은 대상이자 소멸의 법칙이며 소멸 그 자체이다. Indeed, as the superego, it is the voice of God, that which forbids without our knowing what is forbidden, since we will learn it only through the sanction. 사실 초자아로서, 그것은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우리가 모르게 숨기는, 우리가 단지 금지를 통해서 배울 수 밖에 없는 신의 목소리이다. This is the paradox of the voice which at the same time marks the insufficiency of all theories of analogy and equivocity: it has the dimensions of a language without having its condition; it awaits the event that will make it a language. 이것은 유비와 모호함의 모든 이론들이 가지는 불충분함을 동시에 지적하는 목소리의 역설이다: 그것은 그것의 조건없이 언어의 차원을 가진다; 그것은 그것을 언어로 만들어줄 사건을 기다린다. It is no longer a noise, but is not yet language. 그것은 더이상 소음이 아니지만 아직 언어도 아니다. We can, at least, measures the progress of the vocal with respect to the oral, or the originality of this depressive voice in relation to the sonorous schizoid system. 우리는 적어도 구강성의 관점에서 목소리로의 이행을 가늠할 수 있고, 혹은 이 우울증적 목소리의 시원을 낭랑한 분열증적 체계와 연관시켜서 가늠할 수 있다. The voice is no less opposed to noises when it silences them than when it itself groans under their aggression, or keeps the silence. 목소리는 소음들을 침묵시킬 때와 마찬가지로 소음들의 공격 아래에서 신음하거나 침묵을 지킬 때에도 그것들에 맞선다. We constantly relive in our dreams the passage from noise to voice; observers have correctly noted how sounds reaching the sleeper were organized in the voice ready to awaken him. 우리는 꿈에서 지속적으로 소음에서 목소리로의 통로를 다시 체험한다; 관찰자들은 어떻게 소리들이 잠자는 이에게 그를 깨우기 위한 목소리로 조직화되는지를 정확하게 언급한다. We are schizophrenic while sleeping, but manic-depressive when nearing the point of awakening. 우리는 자는 동안 분열증적이다. 그러나 깨어나는 시점에서는 광적-우울증적이 된다. When the schizoid puts up a defense against the depressive position, when the schizophrenic regresses beyond this position, it is because the voice threatens the whole body, thanks to which it acts, no less than it threatens the internal objects through which it suffers. 분열증자가 우울증적 위치에 대항해 방어할 때, 분열증자가 이 위치 너머로 퇴행할 때, 이것은 목소리가 모든 신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작동하는 것에 감사하며, 그것은 그것의 고통을 통해 마찬가지로 내적 대상들을 위협한다. As in the case of the schizophrenic language student, the maternal voice must be decomposed, without delay, into literal phonetic sounds and recomposed into inarticulate blocks. 분열증적 언어를 연구하는 학생의 경우처럼, 어머니의 목소리는 지체없이 직접적인 음성적 소리로 분해되어야 하고 절속되지 않은 덩어리들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The thefts of the body, thought and speech experienced by the schizophrenic in his confrontation with the depressive position are but one. 신체에 대한 절도로서, 우울증적 위치와의 마주침 안에 분열증자에게 경험된 사유와 말하기는 하나일 뿐이다. It is not necessary to wonder wheter echoes, constraints, and thefts are primary or secondary in relation to automatic phenomena. 이 자동적인 현상에 대해 메아리들이, 제약들이, 그리고 절도들이 본래적인가 이차적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This is a false problem since what is stolen from the schizophrenic is not the voice; what is stolen by the voice from the high is, rather, the entire sonorous, prevocal system that he was able to make into his "spiritual automaton." 분열증 환자에게 도둑맞은 것은 목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문제이다; 그보다는, 높은 곳에서 온 목소리로부터 도둑맞은 것은 그의 "정신적인 자동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음향적, 전음성적 체계이다.
Twenty-Eighth Series of Sexuality - 계열 28 - 성
The word "partial" has two senses. First, it designates the state of introjected objects and the corresponding state of the drives attached to these objects. "부분적인"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들을 지닌다. 먼저, 그것은 내투사된 대상들의 상태를, 그리고 이 대상들에 결부되는 충동들에 상응하는 상태를 지정한다. It also designates elective bodily zones and the state of the drives which find in them a "source." 그것은 또한 선별된 신체적 구역들과 그들에서 원천을 찾는 충동들의 상태를 지정한다. These are objects which may themselves be partial: the breast or finger for the oral zone, excrements for the anal zone. 이들은 아마 그들 스스로 부분적인 대상들일 것이다: 구강적인 구역을 위한 가슴이나 손가락, 항문적인 구역을 위한 배설물들. The two senses should not, however, be confused. 그러나 두 의미들은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It has often been noted that the two psychoanalytic notions of stage and zone do not coincide. 단계와 구역에 대한 두 가지 정신분석학적 견해들은 합쳐지지 않는다는 것이 종종 언급되어 왔다. A stage is characterized by a type of activity which assimilates other activities and realizes in a certain mode a mixture of drives -absorption, for example, in the first oral stage, which also assimilates the anus, or excretion during the anal stage, which prolongs it, and which also takes over the mouth. 단계는 다른 행위들과 동화되는 행위의 유형으로 묘사되어 왔고 충동들의 혼합물의 특정 양식(흡수)으로 인식되는데, 이를테면 항문에 동화되는 첫 구강 단계에서, 혹은 이를 연장하는 항문기에서의 배설물, 그리고 이는 입을 지배하는 단계처럼 말이다. Zones, on the contrary, represent the isolation of a territory, activities which "invest" this territory, and drives which now find in it a distinct source. 구역들은 반대로, 영토의 고립을 표상하는데, 이 영토에 "투자" 하는 활동들과 그곳에서 자신의 구별된 원천을 찾는 충동들처럼 말이다. The partial object of a stage is fragmented by the activities to which it has been submitted; the partial object of a zone, on the other hand, is separated from the whole by the territory which it occupies and which limits it. 단계의 부분적 대상은 그것이 굴복한 행위들에 의해 파편화된다; 다른 한편, 구역의 부분적 대상은 점령하면서 제한하는 영토에 의해 전체에서 떨어져나온다. The organization of zones and the organization of stages occur, of course, almost simultaneously, since all positions are elaborated during the first year of life, each one encroaching on the preceding position and intervening in its course. 구역들의 조직과 단계들의 조직은 각각이 먼저의 위치들을 잠식하고 그것의 방향에 개입하면서 모든 위치들이 첫 해의 삶에 정교해지기 때문에 거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But the essential difference is that zones are facts of the surface, and that thier organization implies the constitution, the discovery, and the investment of a third dimension which is no longer either depth or height. 그러나 본질적인 차이는 구역들이 표면의 사실들이며, 따라서 그들의 조직은 구성과 발견, 그리고 깊이도 높이도 아닌 제 3의 차원의 투자를 내포한다. One could say that the object of a zone is "projected," but projection no longer signifies a mechanism of depth. 누군가는 한 구역의 대상이 투사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투사는 더이상 깊이의 메커니즘을 기호화하지 못한다. It now indicates a surface operation -an operation occurring on the surface. 그것은 이제 표면의 생성운동을 가리킨다. -표면에서 발생하는 생성.
In conformity with the Freudian theory of erogenous zones and their relation to perversion, a third position, the sexual-pervers, can thus be defined. 프로이트의 성감대에 대한 이론과 그것과 도착의 관계, 즉 제 3의 위치인 성적 도착은 따라서 정의될 수 있다. Its autonomy is based on the dimension which is proper to it: sexual perversion is distinct from the depressive ascent or conversion and from the schizophrenic subversion. 그것의 자율성은 그것에 적합한 차원에 정초한다: 성적 도착은 우울증적 상승이나 전환과 분열증적 전복과는 구분된다. The erogenous zones are cut up to the surface of the body, around orifices marked by the presence of mucous membranes. 성감대는 점막의 존재로 특징지어진 구멍들의 주변에서 신체의 표면으로 튀어나온다. When people note that internal organs are also able to become a erogenous zones, it appears that this is conditional upon the spontaneous topology of the body. 사람들이 내부의 장기들 또한 성감대가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신체의 즉흥적인 위상학에 의존함을 조건으로 나타난다. In accordance with the latter, as Simondon said of membranes, "the entire content of internal space is topologically in contact with the content of external space on the limits of the living." 후자에 따른다면, 시몽동이 막들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삶의 경계/한계들 위에서 내적 공간의 내용 모두는 외부 공간의 내용과 위상학적으로 접촉한다." It does not even suffice to say that the erogenous zones are cut up on the surface, since the surface does not preexist them. 표면은 성감대들에 선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이 표면으로 치고 올라온다고 말하는 것조차 충분치 않다. In fact, each zone is the dynamic formation of a surface space around a singularity constituted by the orifice. 사실, 각각의 구역은 구멍에 의해 구성된 특이점 주변에서 표면 공간의 역동적인 형성이다. It is able to prolonged in all directions up to the vicinity of another zone depending on another singularity. 그것은 다른 특이성들에 의존하는 다른 구역들의 부근까지 모든 방향들로 연장될 수 있다. Our sexual body is initially a Harlequin's clock. 우리의 성적인 신체는 처음에는 어릿광대의 망토이다. Each erogenous zone is inseperable from one or several singular points, from a serial development articulated around the singularity and from a drive investing its territory. 각각의 성감대는 하나 혹은 몇 개의 지점들에서(지시), 특이점들 주위에서 절속된 연쇄적 발달에서(현시), 그리고 그것의 영토에 투자하는 충동에 의해서 분리될 수 없다(기호). It is inseparable from a partial object "projected" onto the territory as an object of satisfaction (image), from an observer or an ego bound to the territory and experiencing satisfaction, and from a mode of joining up with other zones. 그것은 만족의 대상(이미지)으로서 영토에 투사되는 부분적 대상으로서, 영토에 묶여 있고 만족을 경험하는 관찰자 혹은 자아로서, 그리고 다른 구역들과 연합하는 방식으로서 분리될 수 없다. The entire surface is the product of this connection, and, as we will see, this poses specific problems. 모든 표면은 이 연결들의 산물이다. 그리고 우리가 볼 것처럼, 이들은 특정 문제들을 제기한다. Precisely because the entire surface does not preexist, sexuality in its first(pregenital) aspect must be defined as a veritable production of partial surfaces. 엄밀하게 모든 표면이 선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첫번째(전성기적) 관점에 있는 성/성생활은 부분적 표면들의 진정한 생성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The auto-eroticism which corresponds to it must be characterized by the object of satisfaction projected onto the surface and by the little narcissistic ego which contemplates it and indulges in it. 그것에 상응하는 자기성애는 표면 위에 투사된 만족의 대상으로, 그것을 숙고하고 그것 안에서 욕구를 채우는 작은 나르시시스적 자아로 묘사되어야 할 것이다.
How does this production come about? 이 생성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How is this sexual position formed? 이 성적인 위치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It is clearly necessary to seek the principle in the preceding positions, and especially in the reaction of the depressive position to the schizoid position. 선재하는 위치들에서 원리를 찾는 것이 필연적임은 분명하다. 특히나 분열증적 위치에 대한 우울증적 위치의 반응으로서 말이다. Height, in fact, has a strange power of reaction to depth. 사실 높이는 깊이에 대해 반응으로서의 묘한 힘을 가진다. It seems, from the point of view of height, that depth turns, orients itself in a new manner, and spreads itself out: from a bird's eye view, it is but a fold more or less easily undone, or rather a local orifice surrounded or hemmed in at the surface. 높이의 관점에서 보면 깊이가 방향을 바꾸고, 새로운 방식으로 방향을 잡고, 스스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조감도에서 보면 그것은 다소 쉽게 풀리는 접힌 주름이거나 오히려 표면에서 둘러싸이거나 둘러싸인 국소적인 구멍에 불과하다. Of course, the fixation or the regression to the schizoid position implies a resistance to the depressive position, such that the surface would not be able to be formed. 물론 분열증적 위치에 대한 집착이나 퇴행은 우울증적 위치에 대한 저항을 내포하기 때문에 그러한 표면은 형성되지 못한다. In this case, each zone is pierced by a thousand orifices which annul it; or, on the contrary, the body without organs is closed on a full depth without limits and without exteriority. 이 경우, 각 지대는 수천 개의 구멍들로 무효화되며; 반대로 기관없는 신체는 충만한 깊이에서 제한들과 외재성 없이 닫히게 된다. Moreover, the depressive position does not itself constitute a surface; rather, it hurls into the orifice anyone who might be careless enough to venture there -as in the case of Nietzsche, who discovered the surface from a height of six thousand feet, only to be engulfed by the subsisting orifice (see the apparently manic-depressive episodes preceding the onset of Nietzsche's madness). 더 나아가 우울증적 위치는 그 자체로 표면을 구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조심스럽지 않게 그곳을 모험하는 이를 구멍 속으로 던져버린다 -6000피트 위에서 표면을 발견하고 존속하는 구멍에 사로잡히기만 한 니체의 경우처럼 말이다(니체의 광기가 시작하기 이전에 두드러지는 집착적-우울증적 에피소드들을 봐라). The fact is though that height renders possivle a constitution of partial surface, like many-colored fields unfolding beneath the wings of an airplane. 높이는 부분적 표면의 구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색의 땅들이 비행기의 날개 아래로 펼쳐지는 것처럼 말이다. As for the superego, despite all its cruelty, it is not without kindness with respect to the sexual organization of superficial zones, to the extent that it can assume that the libidinal drives are there separated from the destructive drives of the depths. 초자아에서처럼, 그것의 모든 잔인성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인 지대들의 성적 조직에서처럼 친절함이 없지는 않다. 리비도적 충동이 깊이의 해체적인 충동들과 분리되는 것을 고려하는 한에서 말이다.
Of course, the sexual or libidinal drives were already at work in the depths. 물론 성적인, 혹은 리비도적인 충동은 이미 깊이들 안에서 작용한다. But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state of their mixture with the drives of preservation, on one hand, and drives of death, on the other. 하지만 보존의 충동과 죽음 충동이 혼합되어 있는 상태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In depth, the drives of preservation which constitute the alimentrary system(absorption and even excretion) do indeed have real objects and aims, but thanks to the powerlessness of the nursing child, they do not have at their disposal the means to be satisfied or to possess the real object. 깊이 안에서 소화 쳬계를 구성하는 보존 충동들은(흡수와 심지어는 배설과 같이) 실재의 대상들과 목적들을 가진다. 그러나 유아의 무력함 덕분에, 혹은 그와 같이 그들은 마음대로 실재의 대상을 소유하거나 만족할 수는 없다. This is why the so-called sexual drives are fashioned very much after the drives of conservation, being born together with them and substituting introjected and projected partial objects for objects that are out of reach. 그렇기 때문에 소위 성적 욕구는 보존 욕구와 함께 태어나고, 손이 닿지 않는 대상에 대해 주입되고 투사된 부분 대상을 대체하는 욕구를 매우 따라하면서 만들어졌다. A strict complementarity exists between sexual drives and simulacra. 성적 충동들과 시뮬라크라 사이의 강력한 상호보완성이 존재한다. Destruction, then does not designate a certan character of the relation to the formed real object; it qualifies rather the entire mode of the formation of the internal partial objects(pieces) and the entire relation to it, since the same thing is destroyed and destroyer, and surves to destroy the ego as much as the other, to the point that destroying/ being destroyed covers all internal sensibility. 해체는 형태를 가진 실재 대상과 관련된 성질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내적 부분 대상(조각들)들의 전체적인 형성 양식과 관계를 규정하는데 같은 것이 파괴되고 파괴하기에, 그리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에고를 파괴하는 데에도 봉사하기에, 파괴하는 것과 파괴되는 것은 모든 내적 감수성을 총괄한다. In this sense, all three drives merge together in depth, under such conditions that preservation provides the drive, sexuality provides the substitutive object, and destruction provides the whole reversible relation. 이런 의미에서 세 개의 충동들은 모두 깊이에서 합쳐진다. 보존은 충동을 생성하고 성적인 것은 대체적인 대상을 생성하고, 해체는 이 모두를 역전시키는 관계를 생성한다. But precisely because the preservation is, at its foundation, threatened by this system in which it has become involved (wherein to eat becomes to be eaten), we see the whole system being displaced; death is recovered as a drive inside the body without organs at the same time that this dead body is eternally conserved and nourished while it is sexually born of itself. 하지만 엄밀하게 하자면, 근본적으로 보존은 그것이 엮이게 되는 체계(먹는 것이 먹히는)에서는 위협받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체계가 추방된 것을 본다; 죽음은 기관없는 신체 안에서의 충동으로 회복되지만 동시에 이 죽은 신체는 그것이 스스로 성적으로 태어나기에 영원히 보존되고 양육된다. The world of oral-anal-urethal depth is the world of a revolving mixture which can truly be called bottomless, as it bears witness to a perpetual subversion. 구강, 항문, 요도적 깊이의 세계는 바닥없는, 항구적인 전복에 대한 증거로서, 순환하는 혼합물의 세계이다.
When we link sexuality to the constitution of surfaces or zones, what we mean to say is that the libidinal drives find the occasion for an at least apparent double liberation, which is expressed precisely in auto-eroticism. 우리가 성을 표면들이나 지대들의 구성에 연결시키면, 그리니까 정확히 자기-성애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리비도적 충동은 적어도 분명해보이는 이중의 해방에서 자신의 기회를 잡는다. On one hand, they free themselves from the alimentary model of the drives of preservation, since they find new sources in the erogenous zones and new objects in the images projected onto these zones: thus, for example, sucking which is distinguished from suction. 한편으로, 그들은 성적인 지대들에서 새로운 원천들과 이 지대들 위에 투사되는 새로운 대상들의 이미지들로 말미암아 보존 충동의 소화기적 모델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따라서 빠는 것은 흡입과는 구별된다. On the other hand, they free themselves from the constraint of the destructive drives to the extent that they get involved in the productive labor of surfaces and in new relations with these new pellicular objects.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표면들의 생성적인 노동에 참여하면서, 그리고 이 표피적인 대상들과의 새로운 관계들을 안에서 파괴적인 충동의 긴장중으로부터 벗어난다. It is important, once again, to distinguish, form example, between the oral stage of depths and the oral zone of the surface; between the introjected and projected internal partial object(simulacrum) and the object of the surface, projected over a zone in accordance with an entirely different mechanism(image); or finally between subversion, which depends on depths, and perversion, which is inseparable from surfaces. 깊이의 구강 단계와 표면의 구강 지대를 구분하는 것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중요하다; 투입된, 그리고 투사된 내적 부분 대상(시뮬라크럼)과 완전히 다른 메커니즘(이미지들)에 따라 지대 위로 투사된 표면의 대상처럼 말이다; 혹은 마지막으로 깊이에 의한 전복과 표면들과 분리불가능한 도착처럼 말이다. We mus then consider the twice liberated libido as a veritable superficial energy. 우리는 그렇다면 이중의 해방된 리비도를 진정한 피상적 에너지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We should not believe, however, that the other drives have disappeared, that they do not continue their work in depth, or especially that they do not find an original position in the new system. 그러나 우리는 다른 충동들이 사라졌거나, 깊이에서 그들의 일을 지속하지 않는다거나, 특히나 이 새로운 체계에서 그들의 원래 위치를 찾지 않는다고 믿지는 말아야 한다.
We must again turn to the entire sexual position, with its successive elements which encroach so much upon on another that the element which precedes is determined only through its confrontation with the one which follows, or with the prefiguration of the one which follows. 성적인 위치에 따르는 세부요소들은 서로를 너무나도 잠식해서 그에 앞서는 요소들은 오직 그것과의 대면에서만 정의되거나 그것을 원형으로 다루기에 우리는 다시 그것으로 다시 선회해야 한다. The pre-genital erogenous zones or surfaces cannot be separated from the problem of their coordination. 전-성기적 성감대들, 혹은 표면들은 그들의 연합에 대한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 It is certain, though, that this coordination is enacted in several ways: by contiguity, to the degree that the series which is developed over one zone is extended in another series; at a distance, to the degree that a zone can be turned inward or projected onto another, furnishing the image by which the other is satisfied; and above all, indirectly, as in Lacan's mirror stage. 그러나 이러한 연합들이 몇 가지 방식들로 일어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의 지대에서 발달된 계열들이 다른 계열들로 확장하는 정도의 인접성을 통해; 하나의 지대가 안으로 안쪽으로 방향을 바꾸거나 다른 것 위에 투사되면서 다른 것이 만족되는 것에 의하여 제공하는 정도의 거리; 그리고 이 모든 것들 위에 간접적으로 라캉의 거울 단계와 같이. It is nevertheless true that the direct and global function of integration, or of general coordination, is normally vested in the genital zone.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접적이고 전세계적인 통합의, 혹은 일반적인 연합으로서의 기능은 이 생식기적인 지대에 부여된다. It is this zone which must bind all the other partial zones, thanks to the phallus. 남근에게 고맙게도 그것은 다른 부분 지대들을 모두 하나로 묶는 지대이다. And the phallus, in this respect, does not play the role of an organ, but rather that of a particular image of projected, in the case of the little girl as well as the little boy, onto this privileged(genital) zone. 이러한 관점에서 남근은 기관의 역할을 하지 않고 오히려 어린 소녀나 소녀에게 이 특권화된(성기적인) 지대에 투사된 것의 특수한 이미지의 역할을 한다. The organ penis already has a long history tied to the schizoid and depressive positions. 음경이라는 기관은 이미 분열증적이고 우울증적 위치에 귀속되어 온 오랜 역사를 지닌다. As is the case with all organs, the penis has known the adventure of the depths in which it is fragmented, placed inside the mother's and the child's body, being victim and aggressor, and identified with a poisonous bit of food or with an explosive excrement. 모든 장기가 그렇듯이 음경은 분열된 깊은 곳의 모험으로 알려져 있고, 어머니와 아이의 몸 안에 배치되면서 희생자이자 공격자가 되고 음식이나 폭발성 배설물의 유독한 부스러기와 동일시된다. But it is no less acquainted with the adventure of height in which, as a wholesome and good organ, it confers love and punishment, while at the same time withdrawing in order to form the whole person or the organ corresponding to the voice, that is, the combined idol of both parents. 그러나 그것은 마찬가지로, 전체적이고 좋은 기관으로서 높이에 대한 모험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데 그것은 사랑과 벌을 부여하고, 동시에 전체적인 인간, 혹은 양부모의 결합된 우상인 목소리에 대응하는 기관을 형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후퇴시키다. (In a parallel manner, the parental coitus, which is at first interpreted as pure noise, fury, and aggression, becomes an organized voice, even in its power to be silent and to frustrate the child.) (이와 평행한 방식으로, 먼저 순수한 소음, 분노, 공격성으로 해석되는 부모의 성교는 심지어 침묵을 시킬 때와 아이에게 화를 낼때 조차도 조직화된 목소리가 된다.) It is from all these points of view that Melanie Klein shows that the schizoid and depressive positions supply the early elements of the Oediaus complex; that is, that the transition from the bad penis to the good is the indispensable condition for the arrival of the Oediaus complex in its strict sense, to genital organization and to the corresponding new problems. 이는 멜라니 클라인이 보여준 분열증적이고 우울증적인 위치들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초기 요소들을 제공한다는 모든 관점들로부터 비롯된다; 나쁜 음경에서 좋은 음경으로의 전환은 엄격한 의미에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도착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다. 즉 성기적인 조직과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문제들을 향해서. We know what these new problems consist of: it is a matter of organizing surfaces and bringing about their coordination. 우리는 이 문제들이 무엇은 구성하는지 안다: 그것은 표면들을 조직화하고 그들의 결합을 불러오는 것이다. In fact, as surfaces imply the disengagement of sexual drives from alimentary and destructive drives, the child may come to think that he abandons nourishment and power to his parents, and in return may hope that the penis, as complete and good organ, will come to be posed and projected on his own genital zone. 사실, 표면들이 파괴적이고 소화기적인 충동으로부터 단절된 성적 충동들을 내포하기에, 아이는 자신의 영양분과 힘을 부모에게 내버려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완전하고 좋은 기관인 음경이 자신의 생식기적 지대에 투사될 것이라는 기대를 한다. If so, the penis would become the phallus which "doubles" the child's own organ and permits him to have sexual relations with the mother without offending the father. 만약 그렇다면 음경은 아이의 고유한 기관을 이중화시키는 남근이 될 것이고 그가 아버지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어머니와 성적인 관계들을 맺을 수 있도록 허용한다.
What is essential is the precaution and modesty, at the beginning, of the Oedipal demands. 오이디푸스적 요구들에서 본질적인 것은 처음에 예방과 겸손이다. The phallus, as the image projected on the genital zone, is not at all an aggressive instrument o penetration and eventration. 생식기적 구역에 투사된 이미지로서 남근은 삽입과 적출의 공격적인 도구가 전혀 아니다. On the contrary, it is an instrument of the surface, meant to mend the wounds that the destructive drives, bad internal objects, and the penis of depths have inflicted on the maternal body, and to reassure the good object, to convince it not to turn its face away. (The processes of "reparation" on which Melanie Klein insists seem in this sense to belong to the constitution of a surface which is itself restorative.) 반대로, 그것은 표면의 도구이다. 파괴적 충동들과 나쁜 내부 대상들을 꿰메기 위한, 그리고 어머니의 몸 위에 가해진 깊이들의 음경이며, 좋은 대상을 안심시키기 위해, 얼굴을 돌리지 않기를 설득하기 위해서 말이다. (멜라니 클라인이 주장한 "배상"의 과정은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 자체로 회복적인, 재생적인 표면의 구성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Anxiety and guilt are not derived from th Oedipal desire of incest; they are formed well in advance, the former during the schizoid aggressiveness, the latter during the depressive frustration. 불안과 죄는 근친상간의 오이디푸스적 욕망에서 유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형성되어 있으며, 전에는 분열증적 공격성에서, 후에는 우울증적 분노에서 그렇다. Oedipal desire would rather invoke them. 오이디푸스적 욕망은 오히려 그들을 들먹인다. Oedipus is a pacifying hero of the Herculean type. 오이디푸스는 헤라클라스 타입의 평화적인 영웅이다. We are confronted with the Theban cycle. Oediqus dispelled the infernal power of depths and the celestial power of heights, and now claims only a third empire, the surface, nothing but the surface. 우리는 테베 사이클과 마주한다. 오이디푸스는 깊이의 지옥같은 힘과 높이의 천상의 힘을 떨쳐버리고 오로지 3번째 제국을 주장한다, 표면, 단지 표면 말이다. His conviction that he is free of fault and his assurance that he had arranged everything to evade the prediction come from this. 그가 그의 잘못으로부터 자유롭다는 확신과 이로부터 오는 예견들을 밀어버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배치해놓았다는 확언과 같이 말이다. This point, which would have to be developed through the interpretation of the entire myth, finds a confirmation in the original nature of the phallus. 모든 신화의 해석을 통해 발달되어야 하는 이 지점은 남근의 원래 본성을 학인한다. The phallus should not penetrate, but rather, like a plowshare applied to the thin fertile layer of th earth, it should trace a line at the surface. 남근은 삽입하기보다 지구의 얇고 비옥한 층에 적용되는 쟁기날과 같이 표면의 선들을 따라야 한다. This line, emanating from the genital zone, is the line which ties together all the eroginous zones, thus ensuring their connectio of "interfaceing"(doublure), and bringing all the partial surfaces together into one and the same surface on the body of the child. 생식기적 지대에서 발산하는 이 선은 모든 성감대들을 묶는 선이다. 따라서 "각자의 면을 마주하는" 그들의 연결을 보장해주며, 모든 부분적 표면들을 하나로, 그리고 아이의 신체 위 같은 표면으로 가져온다. Moreover, it is supposed to reestablish a surface on the body of the mother herself and bring about the return of the withdrawn father. 더 나아가 이는 어머니 지신의 신체 위에 표면을 재건하고 후퇴한 아버지의 복귀를 가져온다. It is in this oedipal phallic phase that a sharp distinction of the two parents occurs, the mother taking on the aspect of an injured body to be mended, and the father taking on the aspect of a good object to be made to return. 이 오디푸스적 남근 서사에서 두 부모 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이 발생한다. 엄마는 꿰매져야 할 부상당한 신체로,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돌아와야 할 좋은 대상으로 말이다. Above all, it is here that the child pursues on his own body the constitution of a surface and th integration of the zones, thanks to the well-founded privilege of the genital zone. 특권화된 생식기적 지대 덕분에 아이가 자신의 몸에 대한 표면의 구성과 지대들의 연합을 추구하는 곳은 이곳이다.
Twenty-Ninth Series - Good Intentions Are Inevitably Punished
It is necessary therefore to imagine Oedipus not only as innocent, but as full of zeal and good intentions. - a second Hercules who will experience a similarly painful experience. 따라서 오이디푸스가 결백할 뿐만아니라 열의와 좋은 의도들로 가득차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두번째 헤라클레스이다. But why do good intentions seem to turn against him? 그러나 이 좋은 의도들이 그에 맞서게 되는가? It is first because of the fragility of the enterprise -the fragility characteristic of surfaces. 이는 먼저 사업의 취약성 때문이다. -표면들의 취약한 특성들. One is never certain that the destructive drives, which continue to act under the sexual drives, are not directing the work of the latter. 누군가는 절대로 성적인 충동들 아래에서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파괴적인 충동들이 성적인 충동 자체로 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고는 확신하지 않는다. The phallus as an image at the surface risks constantly being recuperated by the penis of the depths or the penis of the heights 표면에 있는 이미지로서의 남근은 지속적으로 위험에 노출되기에 깊이로서의 음경, 혹은 높이로서의 음경에 의해 회복된다. Thus, it risks being castrated as phallus, since the penis of the depths devours and castrates, and the penis of the heights frustrates. 따라서 깊이에서의 음경은 잡아먹거나 거세하고 높이에서의 음경은 분노하기 때문에 그것은 남근으로 거세될 위험에 처한다. There is therefore a double menace of castration through preoedipal regression (castration-devouring, castration-deprivation). 따라서 전오이디푸스적 퇴행(거세-잡아먹기, 거세-박탈)을 통해 거세의 이중 위협이 있게 된다. The line traced by the phallus risks being swallowed up inside the deep Spaltung. 남근에 의해 추적되는 선은 깊은 균열에 의해 삼켜질 위협을 지닌다. Incest risks also returning to the state of eventration of the mother and of the child, or to a cannibalistic mixture where the one who eats is also eaten. 근친상간은 또한 어머니나 아이의 적출 상태로 돌아갈 위험에 빠지도록 하거나 먹는자가 또한 먹히는 식인적인 혼합물이 될 위험을 가진다. In short, the schizoid and even the depressive position -the anxiety of one and the culpability of the other- threaten endlessly the Oedipal complex. 짧게는 분열증적, 심지어는 우울증적 위치도(즉자의 불안과 타자의 책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끝없이 위협한다. As Melanie Klein says, anxiety and culpability are not born of the incestuous affair.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것처럼 불안과 책임은 근친상간적 상황에서 나오지 않는다. They would, rather, prevent its formation and compromise it constantly. 그들은 오히려 그것의 형성을 방해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절충하려고 한다.
This first response, however, will not suffice. 그러나 이 첫 대답은 만족스럽지 않다. The constitution of surfaces has also as a principle and intention the separation of sexual drives from destructive drives from the depths, and, in this respect, it encounters a certain complacency on the part of the superego or of the good object of the heights. 표면들의 구성도 성적 충동들이 깊이의 파괴적인 충동들과 구분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리와 의도를 지니는데 이에 따르면 그것은 초자아나 높이의 선한 대상의 부분에 대한 특수한 안주를 마주하게 된다. Thus, the dangers of the oedipal affair must also derive from an internal evolution. 따라서 오이디푸스적 일의 위험성은 내적 진화에서 또한 비롯되어야 한다. Moreover, the risks of confusion or of corporeal mixture, invoked by the first response, take on their full meaning only in relation to these new dangers generated by the oedipal enterprise itself. 더 나아가, 처음의 반응이 적용된 혼돈과 물체적 혼합물의 위험성은 오이디푸스 사업 스스로에 의해 발생된 새로운 위험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전체적인 의미를 가진다. In short, this affair necessarily creates a new anxiety which is proper to it, a new culpability or a new castration which is not reduced to either of the preceding cases -and to which alone the name "castration complex" corresponds in relation to Oediqus. 단순하게, 이 일은 필연적으로 그에 맞는 새로운 불안을 만든다. 새로운 책임 혹은 불안은 이전의 것들로 환원될 수 없고 오직 오이디푸스와의 관계에 상응하는 "거세 복합체"처럼 말이다. The constitution of surfaces is the most innocent, but "innocent" does not signify "without perversity." 표면들의 구성은 가장 결백하지만 "결백함"은 "도착이 없는"을 기호화하지 않는다. We must realize that the superego abandons its original benevolence -at the oedipal moment, for example- when we go from the organization of pregenital partial surfaces to their genital integration or coordination under the sign of the phallus. 우리는 전성기적 부분 표면들의 기관에서 남근의 기호 아래에서 성기적 연합과 상응으로 나아갈 때 초자아가 그것의 본래 자비심을 버린다는 (이를테면, 오이디푸스적 순간에서) 것을 알아야 한다. But why is this so?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가?
The surface has a decisive importance in the development of the ego, as Freud clearly demonstrated when he said that the perception-consciousness system is localized on the membrane formed at the surface of the protoplasmic vesicle. 표면은 자아의 발달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지각-의식 체계가 원형질 소낭의 표면에서 형성되는 막 위에 자리잡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The ego, as factor of the "primary narcissism," is initially lodged in the depths, in the vesicle itself or the body without organs. "최초의 나르시시즘"의 요소인 자아는 소낭에서든 기관없는 신체에서든 원래 깊이에 의해 제기된다. But it is able to attain independence only in the "auto-eroticism" of partial surfaces and all the small egos which haunt them. 그러나 그것은 오직 부분 표면들과 그들을 괴롭히는 작은 자아들의 "자동 성애" 안에서만 그것의 독립성을 획득할 수 있다. The real test of the ego then lies in the problem of coordination, and thus of its own coordination, when the libido as superficial energy invests it in a "secondary narcissism." 그렇다면 자아의 진정한 시험은 조화의 문제에 놓여있다. 그것의 고유한 조화에 따라서 피상적 에너지로서의 리비도는 스스로를 "이차적 나르시시즘"에 투입시킨다. And, as we earlier suggested, this phallic coordination of surfaces, and of the ego itself on the surface, is accompanied by operations which are qualified as oedipal. 그리고 우리가 미리 제시했듯이, 표면들의 남근적 연합, 그리고 표면 위의 자아 그 자신은 오이디푸스에 의해 성질화된 생성들을 수반한다. This is what we must analyze. 이것이 우리가 분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The child receives the phallus as an image that the good ideal penis projects over the genital zone of his body. 아이는 좋은 이상적인 음경을 자신의 신체의 생식기적 지대에 투사함으로서 남근을 하나의 이미지로서 받는다. He receives this gift (narcissistic overinvestment of an organ) as the condition by which he would be able to bring about the integration of all his other zones. 그는 이 선물(한 기관의 나르시시스적 과잉투자)을 그의 모든 다른 지대들을 통합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받는다. But the fact is that he cannot accomplish the production of the surface without introducing elsewhere some very important changes. 하지만 사실 그는 몇몇 굉장히 중효한 변화들을 다른 곳에 소개하지 않는 한 이 표면의 생성을 달성할 수 없다. In the first place, he splits the gift-making idol or good object of the heights. 가장 먼저, 그는 선물주는 우상이나 높이의 좋은 대상을 쪼갠다. Both parents were combined earlier, in accordance with formulas clearly analyzed be Melanie Klein: 멜라니 클라인에 의해 명확하게 분석된 수식에 의하면 양 부모들은 더 일찍 결합된다: the maternal body of the depths comprised a multiplicity of penises as partial internal objects; and especially, the good object of the heights was, as a complete organ, both penis and breast -mother provided with a penis, father provided with a breast. 깊이의 어머니적 신체는 음경의 다양성을 부분적 내부 대상들로 구성한다; 그리고 특히, 높이의 좋은 대상은 완전환 기관으로서 음경과 가슴 둘 다이다. -어머니는 음경과 만들어지고, 아버지는 가슴과 만들어진다. We believe now that the cleavage is achieved as follow: from the two disjunctions subsumed under the good object (unharmed-wounded, present-absent) the child begins by extracting the negative and makes use of it in order to qualify a mother image and a father image. 우리는 이제 가슴골이 다음과 같다고 믿는다: 두 단절들이 좋은 대상에 의해 포괄되고 (완전한-부상당한, 현재-부재) 아이는 그것에서 부정적인 것을 추출하면서 그것을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미지로 활용하기 시작한다. On one hand, the child identifies the mother with the wounded body, being the primary dimension of the complete, good object (the wounded body must not be confused with the shattered or fragmented body of the depths); and on the other hand, the child identifies the father with the last dimension, that is, with the good object retired into its height. 한편으로 아이는 좋은 대상과 완전한 원래의 차원에서 엄마를 부상당한 신체와 동일시하고 (부상당한 신체는 깊이에서의 흩어지고 조각난 신체와 혼동되면 안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는 마지막 차원, 즉 높이로 후퇴한 좋은 대상과 아버지를 동일시한다. As for the wounded body of the mother, the child wishes to repair it, with his restorative phallus and make it unharmed. 어머니의 신체가 부상당했기에 아이는 그것을 자신의 회복적인 남근으로 회복하고 완전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He wishes to recreate a surface to this body at the same time that he creates a surface for his own body. 그는 자신의 고유한 신체에 표면을 만들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신체에도 새로운 표면을 만들기를 원한다. As for the withdrawn object, he wishes to bring about its return, to render it present with his evocative phallus. 후퇴한 대상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그것의 돌아옴을 원하고 자신의 긍정적인 남근과 함께 현재화하기를 원한다.
In the unconcious, everyone is the offspring of divorced parents, dreaming of restoring the mother and bringing about the return of the father, pulling him back from his retreat: it seems to us that this is the basis of what Freud called the "familial romance" and its linkage with the Oedipus complex. 무의식에서 모든 이는 그의 어머니를 치유하고 아버지를 그의 후퇴에서 다시 불러들이기를 꿈꾸는 이혼 부모의 자식이다: 그것은 프로이트가 "가족적 낭만"의 근저에, 그리고 그것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Never has the child, in his narcissistic confidence, had better intentions, never again will he feel as good. 나르시시스적 자신감으로 더 나은 의도를 가지고 있던 아이는 다시는 이처럼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것이다. Far from casting himself into an agonizing and guilt-ridden venture, never, in this position, had he believed himself so close to dispelling the anxiety and culpability of the previous positions. 고통스럽고 죄책감에 휩싸인 모험에 자신을 던지기는커녕, 이 위치에서 이전 위치들에서 느꼈던 불안과 책임감을 떨쳐버릴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믿었던 적은 없다. It is true that he assumes the father's place and takes the mother as the object of his incestuous desire. 그가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어머니를 자신의 근친상간적 욕망의 대상으로 취하려하는 것은 사실이다. But the incest relationship, almost by proxy, does not imply here violence: neither evntration nor usurpation, but rather a surface relation, a process of restoration and evocation in which the phallus brings about a lining at the surface. 그러나 근친상간 관계는 이곳에서 마치 그것의 대리물처럼 폭력을 내포하지 않는다: 적출이나 강탈이 아닌, 그러나 표면적인 관계로서, 남근이 표면에 있어 안감을 가져오며 발생하는 회복과 환기의 과정처럼 말이다. We darken and harden the Oedipus complex if we neglect the horror of the preceding stages where the worst has already happened, and we forget that the Oedipal situation is attained only to the extent that the libidinal drives are liberated from the destructive drives. 우리가 만약 이미 가장 나쁜 것들이 일어난 이전 단계들의 공포를 무시한다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어둡고 단단하게 만들것이며 오이디푸스적 상황이 리비도적 충동들이 파괴적인 충동들로부터 자유로워진 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게 만들 것이다. When Freud remarks that the normal person is not only more immoral than he thinks, but more moral than he suspects, this remark is true above all with respect to the Oedipus complex. 프로이트가 일반인이 자신이 생각한 것 보다 훨씬 부도덕하다고 한 것 뿐만 아니라 그의 예상보다 훨씬 도덕적이라고 한 지적은 오이디푸스 컴플레스에 대한 어떤 관점보다도 사실이다. Oedipus is tragedy, but we must be able to imagine the tragic hero as gay and innocent, and as starting off on the right foot. 오이디푸스는 비극이지만 우리는 비극적 영웅을 오른발을 첫걸음으로 내딛으며 명랑하고 결백하게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Incest with the mother through restoration and the replacement of the father through evocation are not only good intentions (for it is with the Oedipus complex that the intention -the moral notion par excellence- is born). 회복으로서의 어머니와의 근친상간과 환기로서 아버지를 대체하는 것만이 좋은 의도들은 아니다(의도 -완벽함에 대한 도덕적 관념으로서- 자체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 의해 태어난다). As intentions, they are inseparable extensions of what is apparently the most innocent activity, which,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child, consists of creating a total surface from all his partial surfaces, making use of the phallus projected by the good penis from above, and causing the parental images to benefit from this projection. 의도로서, 그들은 아이의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부분 표면들에서 전체 표면을 만들고, 좋은 음경에 의해 위에서 투사된 남근을 사용하고, 부모의 이미지가 이 투사의 혜택을 받도록하는 것으로 구성된 가장 순진한 활동으로부터 분리 할 수없는 연장선입니다. Oedipus is Herculean because, as peace-maker, he too wishes to form a kingdom of surfaces and of the earth to fit his size. 오이디푸스는 헤라클레스적인데 평화 생산자로서 그 또한 표면들, 혹은 지구의 왕국을 자신의 크기에 맞게 형성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He believed that he had warded off the monsters of the depth and allied himself with the powers from on high. 그는 깊이의 괴물들을 떨쳐내고 높은 곳의 힘들과 스스로를 연합한다. And in his endeavour, the restoration of the mother and the summoning of the father are the targets: this is the true Oedipus complex. 그의 열정에서, 어머니의 회복과 아버지의 소환은 표적들이 된다: 이것이 진실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But why does it all turn out so badly?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나쁘게 바뀌는가? Why is the product of this affair a new anguish and a new culpability? 왜 이 일은 새로운 괴로움과 책임이라는 결과물을 낳는가? Why does Hercules find in Juno a step mother filled with hatred, resisting every offer of reparation, and in Zeus a father ever more withdrawn, turning away from his son after having favored him? 왜 헤라클레스는 주노에게서 모든 보상에 맞서서 증오로 가득찬 새엄마를, 그리고 제우스에게서 언제나 가장 후퇴하는, 그의 아들을 예뻐하고 돌아서는 아버지를 발견하는가? One could say that the affair of the surfaces(good intentions, the kingdom of the earth) encounters not only an expected enemy from the infernal depths, whose defeat was the question at hand, but an unexpected enemy as well -that of the heights which, however, rendered the affair possible and can no longer bail it out. 누군가는 표면들의 일(좋은 의도들, 지구의 왕국)들은 그들의 패베가 당면한 문제인 지옥의 깊이에서 적들을 마주할 뿐만 아니라 일을 가능하게 만들고 더 이상 구제해주지 않는 높이에서의 예상치 못한 적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The superego as the good object begins to condemn the libidinal drives themselves. 좋은 대상으로서의 초자아는 그들 스스로인 리비도적 충동들을 규탄하기 시작한다. In fact, in his desire for incest-restoration, Oedipus saw. 사실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서 봤다. What he saw(once the cleavage has been made), but should not have seen, is that the wounded body of the mother is not only wounded by the internal penises it contains; insofar as its surface is lacking a penis, it is wounded like a castrated body. 그가 본 것은(가슴골이 만들어진 이후), 지금껏 본적없는, 상처받은 어머니의 신체가 그것이 가지고 있는 내적 음경에 의해 상처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표면이 음경을 결여하고 있기에 마치 거세된 신체처럼 상처받았다는 것이다. The phallus as a projected image, which bestowed a new force on the child's penis, designates, on the contrary, a lack in the mother. 투사된 이미지로서 팔루스는 아이의 음경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는데 이와는 반대로 어머니를 그것의 결여로 지정한다. This discovery threatens the child in an essential manner, for it signifies (on the other side of the cleavage) that the penis is the property of the father. 이 발견은 본질적인 방식으로 아이를 위협하는데 그것이 가슴골의 다른 면으로서 음경이 아버지의 소유인 것으로서 기호화하는 것이다. Wishing to summon the father back and to make him present, the child betrays the paternal essence of withdrawal. This essence could not be found but only as if recovered -recovered in absence and in forgetfulness- but never given in a simple presence of the "thing" which would eliminate forgetting. 아버지를 다시 소환하고 현재화하기 위해, 아이는 후퇴로서의 아버지적 본질을 배신한다. 이 본질은 발견되지 못하고 오로지 복구될 뿐이고(부재와 망각에 의해 복구된다) 결코 망각을 없애는 단순한 사물의 현존에 주어지지 않는다. It becomes therefore true, at this moment, that by wishing to restore the mother, the child has in fact castrated and eventrated her; and that by wishing to bring back the father, the child has betrayed and killed him, transformed him into a cadaver. 이 순간에 어머니를 복구하기를 원하는 것을 통해 아이가 그녀를 거세하고 적출하는 것은 사실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를 되돌아오게끔 하기 위해 아이는 그를 배신하고 죽이면서 시체로 만든다. Castration, death by castration, becomes the child's destiny, reflected by the mother in this anguish he now experiences, and inflicted by the father in this culpability he now submits to as a sign of vengeance. 거세, 혹은 거세에 의한 죽음은 아이의 운명이 된다. 이 어머니에 의해 반성된 괴로움 안에서 그는 이제 경험한다, 그리고 이 아버지에 의해서 가해진 책임에 의해 그는 이제 복수의 기호를 받아들인다.
All this story began with the phallus as an image projected over the genital zone, which gave to the child's penis the force of embarking on the venture. 이 모든 이야기는 남근이 생식기적 지대에 투사됨으로서 시작하는데 이는 아이의 음경에 모험에 승선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 But everything seems to terminate with the image which is dissipated and which carries along with it the disappearance of the child's penis. 하지만 모든 것은 아이의 음경의 사라짐이 가지고 오는 소멸되는 이미지에 의해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Perversity" is the traversal of surfaces, and here, in this traversal, something new and changed is revealed. "삐뚤어짐"은 표면들을 가로지르는데 이 횡단에서 무언가 새롭고 변화된 것이 드러난다. The line that the phallus traced at the surface, across every partial surface, is now the trace of castration where the phallus is itself disspated -and the penis along with it. 남근이 표면에서 따르는, 즉 모든 부분 표면들을 가로지르는 선은, 이제 남근이 스스로 소멸되는 거세의 길이 된다(음경도 마찬가지로). This castration, which alone merits the name "complex," is distinguished in principle from the two other castrations: that of depth, through devouring-absorption; and that of height, through privation-frustration. 이제 "컴플렉스"로 명명되는 거세는 두 가지 다른 거세들의 원리에 의해 구분된다: 흡입-흡수하기를 통한 깊이; 그리고 궁핍과 분노를 통한 높이. It is a castration through "adsorption," a surface phenomenon: like, for example, the surface poisons, those of the tunic and the skin which burn Hercules; or the poisons on images which might only have been contemplated, such as the venomous coatings on a mirror or on a painting which so inspired the Elizabethan theater. 그것은 "흡착"을 통한 거세, 즉 표면 효과이다: 이를테면 표면의 독들, 헤라클레스를 불태우는 튜닉과 피부; 혹은 엘리자베스식 극장에서 영감을 받은 독성의 코팅이 된 거울이나 그림과 같은 방식으로만 숙고된 이미지들 위의 독들처럼 말이다. But, as it happens, it is in virtue of its specificity that this castration recovers the other two. 하지만 그것이 일어남에 따라 그것은 이 거세가 다른 둘을 복구시킨다는 특정성의 가치 안에 있게 된다. As a surface phenomenon, it marks the failure or illness, the premature mold, the way in which the surface prematurely rots, and the surface line rejoins the deep Spaltung or incest rejoins the cannibalistic mixture of the depths -all of this, in conformity with the first reason which we invoked earlier. 표면효과로서 그것은 실패나 질병, 조숙한 곰팡이를 표식하는데 표면이 조숙하게 썩는 방식은 표면의 선이 깊은 균열과 다시 만나게끔하거나 근친상간이 깊이의 식인적인 혼합물과 다시 만나도록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제기했던 첫번째 이유에 순응한다.
The matter, however, does not end here. The release, in the case of Oedipus, of intention as an ethical category, has a considerable positive importance. 그렇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적 사건안에서 윤리적 분과로서의 의도의 방출은 눈여겨볼만한 긍정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At first sight only the negative is present in the case of the good intention that has gone awry: the willed action has been denied almost, and suppressed by what is really done; and what is really done is negated as well by the one who did it and who rejects responsibility for it (it's not me, I didn't want that -"I have killed unwittingly"). 첫눈에는 좋은 의도가 빗나갔을 때는 오직 부정적인 것만이 보이는 것 같다: 의지된 행위는 거의 거부되었고 실제 이루어진 것에 의해 억압되었다; 그리고 실제 이루어진 것 또한 그것을 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는 이에 의해 부정당한다(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그것은 내가 아니다 - "나는 나도 모르게 죽였다"). It would be a mistake, however, to think of good intention, and its essential perversity, in the framework of a simple opposition between two determined actions -an intended action and an accomplished action. 그러나 의도된 행위와 성취된 행위, 즉 두 결정된 행위들 사이의 단순한 반대급부의 도식에서 좋은 의도와 그것의 본질적인 삐뚤어짐을 생각하는 것은 실수일 것이다. Indeed, on the one hand, the willed action is an image of action, a projected action; and we do not speak of a psychological project of the will, but of that which renders it possible, that is, of a mechanism of projection tied to physical surfaces. 사실 한편으로 의지된 행위는 행위의 이미지, 즉 투사된 행위이다; 그리고 우리는 의지의 심리적 투사를 이야기하지 않고, 대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물리적 표면들에 얽혀 있는 투사들의 메커니즘을 말하고자 한다. It is in this sense that Oedipus can be understood as the tragedy of Semblance (Apparence).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는 외관(식별)의 비극으로 이해될 수 있다. Far from being an agency of the depths, intention is the phenomenon of the entire surface, or the phenomenon which adequately corresponds to the coordination of the physical surfaces. 깊이의 대행자가 되는 것과는 멀게, 의도는 전체 표면의 효과이거나 물리적 효과들의 조화에 알맞게 상응하는 효과이다. The very notion of Image, after having designated the superficial object of a partial zone, and then the phallus projected on the genital zone, and the pellicular parental images born of a cleavage, comes finally to designate action in general. 부분 지대의 피상적 대상을 지정 후에, 그리고 남근이 생식기적 지대 위에 투사되고, 가슴골에서 부모의 막과 같은 이미지가 생성될 때 이미지의 그 생각은 일반적인 범위에서 행위를 지정한다. The latter concerns the surface -not at all a particular action, but any action which spreads itself out at the surface and is able to stay there(to restore and to evoke, to restore the surface and to summon to the surface). 후자는 표면에 집중한다 -특정 행위가 아닌, 표면 위에서 스스로 펼쳐지는, 그리고 스스로 그곳에 있을 수 있는 어떤 행위들도 말이다(복구하고 불러일으키며, 표면을 복구하고 표면으로 소환하기 위해서). But, on the other hand, the action effectively accomplished is no more a determined action which would oppose the other, nor a passion which would be the repercussion of the projected action.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효율적으로 달성된 행위는 더 이상 다른 것에 반대하는 결정된 행위가 아니며 마찬가지로 투사된 행위의 간접적인 영향인 열정도 아니다. Rather it is something that happens, or something which represents all that can happen; better still, it is the necessary result of actions and passions, although of an entirely different nature, and itself neither action nor passion: event, pure event, Eventum tantum(to kill the father and castrate the mother, to be castrated and to die). 그보다 그것은 일어나는 무언가 이거나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효과화한다; 더욱 좋은 것은, 전체적으로 다른 본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행위들과 열정/감정들의 필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자체는 행위나 감정이 아니다: 사건, 순수 사건, Eventum tantum(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어머니를 거세하는 것, 거세되는 것과 죽는것). But this amounts to saying that the accomplised action is projected on a surface no less that the other action. 그러나 이것은 달성된 행위가 다른 행위와 마찬가지로 표면에 투사된다는 말에 다다른다. This surface, though, is entirely differnet; it is metaphysical or transcendental. 이 표면은 그러므로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초월적이다. One might say that the entire action is projected on a double screen -one screen constituted by the sexual and physical surface, the other by and already methaphysical or "cerebral" surface. 누군가는 모든 행위는 이중 스크린 위에 투사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적이고 물리적인 표면으로 구성된 하나의 스크린과 이미 형이상학적이고 "뇌적인" 다른 표면으로 말이다. In short, intention as an Oedipal category does not at all oppose a determined action to another, as, for example, a particular willed action to a particular accomplished action. 단순하게, 오이티푸스적 분과로서의 의도는 결정된 행위를 그 다른 것에 대립시키지 않는데 이를테면, 특정한 달성된 행위에 대한 특정한 의지된 행위처럼 말이다. On the contrary, it takes the totality of every possible action and divides it in two, projects it on two screens, as it determines each side according to the necessary exigencies of each screen. 반대로 그것은 모든 가능 행위들을 가지고 둘로 나눈 후, 그것이 각 스크린의 필연적인 긴급성에 따라 양쪽을 결정하는 두 스크린으로 투사한다. On one hand, the entire image of action is projected on a physical surface, where the action itself appears as willed and is found determined in the forms of restoration and evocation; on the other, the entire result of the action is projected on a metaphysical surface, where the action itself appears as produced and not willed, determined by the forms of murder and castration. 한편으로 행위들의 모든 이미지는 행위 그 자체가 의지되는 것으로, 그리고 복구와 환기의 형상에서 결정된 것으로 발견되는 물리적인 표면 위에 투사된다; 다른 한편으로, 행위의 전체적인 결과는 행위가 의지된 것이 아닌 생성된 것으로, 살해와 거세의 형상으로 결정된 것으로 발견되는 형이상학적 표면 위에 투사된다. The famous mechanism of "denegation"(that's not what I wanted...), with all its importance with respect to the formation of thought, must be interpreted as expressing the passage from one surface to another. "부정"의 유명한 메커니즘은(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그것의 사고의 형성에 관한 모든 중요성들과 함꼐 하나의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 가는 이행을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Perhaps we are moving too fast. It is obvious that the murdur and the castration which result from the action concern bodies, that they do not by themselves constitute a metaphysical surface and that they do not even belong to it. 우리는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지도 모른다. 살해와 거세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 표면이나 그것에 속하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이 신체를 염두에 둔 행위의 결과라는 것은 명백하다. But nonetheless they are on the way, provided that we acknowledge that this is a long road marked by stages. 하지만 그렇다더라도 그들은 단계들에 의해 표식된 기나긴 길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만드는 길 위에 있다. In fact, along with the "narcissistic wound," that is, when the phallic line is transformed into the trace of castration, the libido, which invested the ego of secondary narcissism at the surface, undergoes a particularly important transmutation -that which Freud called "desexualization." 사실, "나르시시스적 상처", 즉 남근적 선이 거세의 자취로 바뀔 때 표면에 이차적 나르시시즘의 자아를 투입시키는 리비도는 특별하게 중요한 변화를 겪는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성화"처럼 말이다. Desexualized energy appeared to Freud as nourishing the death instinct and as conditioning the mechanism of thought. 무성화된 에너지는 프로이트에게 죽음 본능을 양육하고 사고의 메커니즘을 조건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We must therefore grant a dual value to the themes of death and castration. 우리는 그러므로 죽음과 거세의 주제에 이중의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We must grant the value they have with respect to the preservation or liquidation of the Oedipus complex and in the organization of the definitive genital sexuality, upon its own surface and in its relations to the previous dimensions (the schizoid and depressive positions). 우리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보존 혹은 유동화와 자신의 고유한 표면과 이전 차원들(분열증적이고 우울증적인 위치들)로부터 관련하는 확정적인 생식기적 성의 조직에 대해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 But we must also grant the value which they take on as the origin of desexualized energy and the original manner by which this energy reinvests them on its new metaphysical surface, or surface of pure thought.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무성화된 에너지의 원천과 이 에너지가 새로운 형이상학적 표면, 혹은 순수 사유의 표면에 그들을 재투입하는 본래의 방식에 대해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 The second process -which, to a certain extent, is independent of the others, since it is not directly proportional to the success or failure of the liquidation of Oedipus- corresponds in its first aspect to what is called "sublimation," and in its second aspect to what is called "symbolization." 이차적 과정(특정 범위에서 그것이 오이디푸스의 유동성의 실패와 성공에 직접적으로 비례하지 않기에 타자들로부터 독립된)은 자신의 첫번째 양상을 "승화"와, 그리고 두번째 양상을 "기호화"와 상응시킨다. We must therefore concede that metamorphoses do not end with the transformation of the phallic line into a trace of castration on the physical or corporeal surface. 우리는 따라서 이 변형이 물리적, 혹은 물체적 표면에서 거세의 자취로 향하는 남근적 선의 변형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We must also concede that the trace of castration corresponds to a crack marking an entirely different incorporeal and metaphysical surface which brings about transmutation. 우리는 거세의 자취가 변형을 불러오는 완전히 다른 비물체적, 그리고 형이상학적인 표면들을 표식하는 균열과 상응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This change raises all sorts of problems with respect to the desexualied energy which forms the new surface, to the very mechanisms of sublimation and symbolization, to the destiny of the ego on this new plane, and finally to the double belonging of murdeer and castration in the old and new systems. 이 변화는 새로운 표면을 형성하는 무성화된 에너지에, 승화와 기호화의 특정 메커니즘에 대해, 이 새로운 면에서 자아의 운명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옛 것과 새 체계들 안에서 살해와 거세의 이중 귀속에 관하여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제기한다. In this crack of thought, at the incorporeal surface, we recognize the pure line of the Aion and the death instinct in its speculative form. 이 사유의 균열에서, 비물체적 표면에서, 우리는 아이온의 순수한 선을, 죽음본능의 추측적인 형상을 알아차린다. But then the Freudian idea that the death instinct is an affair of speculation must, with good reason, be taken literally. 죽음 본능이 추측의 사태라는 프로이트의 생각은 좋은 이유로,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At the same time, we must keep in mind that this last metamorphosis runs the same dangers as the others, and perhaps in a more acute manner: the crack, in a singular fasion, risks breaking up the surface from which it is nevertheless inseparable. 동시에, 우리는 이 마지막 변형이 다른 이들과 같은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더 정확한 방식으로: 균열은, 독특한 방식에서, 그것이 분리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표면을 파괴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It runs the risk of encountering again on the other surface the simple trace of castration. 그것은 거세의 단순한 자취로서의 다른 표면을 다시 마주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Or even worse, it runs the risk of being swallowed up in the Spaltung of depths and heights -carrying with it all the debris of the surface in this generalized debacle where the end finds again the point of departure and the death instinct, the bottomless destructive drives. 혹은 더 나쁘게, 그것은 깊이와 높이의 분열에 의해 삼켜질 위험을 안고 있다 - 떠남과 죽음 본능, 즉 바닥없는 파괴적인 충동들의 지점에서 다시 끝이 발견되는 이 일반화된 실패 안에서 표면의 모든 부스러기들을 그것과 가지고 가면서 말이다. All this would follow from the confusion we previously noted between the two figures of death: this is the central point of obscurity which raises endlessly the problem of the relations of thought to schizophrenia and depression, to the psychotic Spaltung in general as well as to neurotic castration.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이전에 언급한 두 죽음의 형상 사이에서의 혼란으로부터 따라올 것이다: 이것은 분열증과 우울증 사이의 관계, 그리고 정신병 환자의 분열 일반과 마찬가지로 신경계적인 거세에 대한 사유와의 관계들의 문제들을 끊임없이 제기하는 모호함의 중심적인 지점이다. "For, of course all life is a process of demolition...," including speculative life. "물론 모든 삶은 허물어짐의 과정이다..." 추측하는 삶을 포함하여서 말이다.
Thirtieth Series of the Phantasm
The phantasm has three main characteristics. 환상은 세 개의 주요한 성격들을 지닌다. 1) It represents neither an action nor passion, but a result of action and passion, that is , a pure event. 1) 그것은 행위/능동나 감정/수동을 표상하기보다 행위/능동나 감정/수동의 결과, 즉 순수 사건이다. The question of whether particular events are real or imaginary is poorly posed. 특정 사건들이 실재이냐 상상적이냐 하는 질문들은 맥을 잘못 짚은 것이다. The distinction is not between the imaginary and the real, but between the event as such and the corporeal state of affairs which incites it about or in which it is actualized. 구분은 상상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 사이에 있지 않고 사건 그 자체와 그것을 암시하는, 혹은 효과화/현실화하는 물체적 사태 사이에 있다. Events are effects(thus, for example, the castration "effect," and the parricide "effect"...). 사건들은 효과들이다(그러므로, 이를 테면 거세 "효과", 존속 살인 "효과" 등등...). But insofar as they are effects, they must be tied not only with endogenous causes, but with exogenous causes as well, effective states of affairs, actions really undertaken, and passions or contemplations effectively actualized. 그러나 그들이 효과들인 한에서 그들은 내인적인 원인들에 포괄되어야 할 뿐 아니라 효과적인 사태들인, 행위들이 실제로 겪는, 그리고 감정/수동 혹은 숙고가 효과화/현실화되는 외인적인 원인들에도 마찬가지이다. Freud was then right to maintain the rights of reality in the production of phantasms, even when he recognized them as products transcending reality. 프로이트는 환상의 생성에서 실재들의 권리들 지속하려하는데 심지어 그가 그것들이 실재를 초월하는 산물이라고 알아차렸을 때도 그렇다. It would be unfortunate if we were to forget or feign to forget that children do observe their parents' bodies and parental coitus; that they really become the object of seduction on the part of adults; that they are subjected to precise and detailed threats of castration, etc. 아이들이 부모들의 신체들과 그들의 성관계를 관찰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런 척 가장하는 것은 불행할 것이다; 그들은 어른들의 부분들로서 실제로 유혹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상세하고 세부적인 거세의 위협을 받는다, 등등. Moreover, parricide, incest, poisoning, and eventration are not exactly absent from public and private histories. 더 나아가, 존속살인, 근친상간, 독살, 그리고 적출은 공공의 그리고 사적인 역사들에서 부재하지 않는다. The fact is, though, that phantasms, even when they are effects and because they are effects, differ in nature from their real causes. 그러나 사실 환상들은 그들이 효과일 때나, 그리고 효과이기 때문에, 실재의 원인으로 부터 다른 본성을 지닌다. We speak of endogenous causes (hereditary constitution, phylogenetic heritage, internal evolution of sexuality, introjected actions and passions) no less than we speak of exogenous causes. 우리는 외인성 원인들과 마찬가지로 내인성 원인들(유전 구성, 계통발생학적 유산, 성의 내적 진화, 내투사된 행위들/능동들과 감정들/수동들)을 말하고 있다. The phantasm, like the event which it represents, is a "noematic attribute" distinguished not only from states of affairs and their qualities, but from the psychological lives and from logical concepts as well. 환상은 그것이 표상/재현하는 사건과 마찬가지로, 사태와 성질들과 분리될 뿐만 아니라 정신적 삶들과 논리적인 개념들과도 분리되는 "노에마적 속성"이다. It belongs as such to an ideational surface over which it is produced as an effect. 그것은 자신이 생성된 효과 위의 이데아적 표면에 속한다. It transcends inside and outside, since its topological property is to bring "its" internal and external sides into contact, in order for them to unfold onto a single side. 그것의 위상학적 속성은 "그것의" 안과 바깥 양쪽을 만나게 해서 한 쪽으로 펼쳐지게끔 하는 것이기에 안과 밖을 초월한다. This is why the phantasm-event is submitted to a double causality, referring to the external and internal causes whose result in depth it is, and also to a quasi-cause which "enacts" it at the surface and brings it into communication with all the other event-phantasms. 이것이 왜 환상-사건이 깊이들의 원인인 안쪽과 바깥쪽과 양쪽의 원인들에 이중의 인과관계를 지니는지를 보여주고 그것을 표면에서 작동하게 만들고 다른 모든 사건-환상들과의 커뮤니케이션 안으로 소환하는 준원인에 따르는지 보여준다. We have already twice seen how the place was prepared for such effects, differing in nature from that whose result they are: the first time, in the case of the depressive position, when the cause withdrew into the heights and left the field free from the development of a surface yet to come; later on, in the case of the Oedipal situation, when intention left the field free for a result of an entirely different nature, where the phallus plays the role of a quasi-cause. 우리는 이미 이러한 효과들을 결과들로서와는 다른 본성을 위한 장소가 준비되었는지를 확인했다: 먼저, 우울증적 위치에서 원인이 높이로 물러나고 아직 오지 않은 표면의 발달을 위해 땅을 비워놓는다; 그러고 나서 오이디푸스 상황에서는 완전히 다른 본성의 결과로 의도가 땅을 비웠을 때, 팔루스는 준원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Neither active nor passive, neither internal nor external, neither imaginary nor real -phantasms have indeed the impassibility and ideality of the event.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내적이지도 외적이지도, 상상적이지도 실재적이지도 않은 환상들은 정말 사건의 이상성과 불가능성을 가진다. In light of this impassibility, they inspire in us an unbearable waiting -the waiting of that which is going to come about as a result, and also of that which is already in the process of coming about and never stops coming about. 이러한 불가능성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은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기다림을 불러일으킨다(결과로 다가올 기다림, 그리고 이미 오는 과정 중에 있고 오기를 멈추지 않는). What is psychoanalysis talking about with its grand trinity of murder-incest-castration, or of devouring-eventuration-adsorption, if not about pure events? 정신분석학이 과연 순수 사건이 아니라면, 살인-근친상간-거세, 혹은 흡입-적출-흡착의 위대한 삼위일체를 구성한 것은 무엇이겠는가? Isn't this the case of all events in One, as in the wound? 이것은 상처로서 모든 사건들의 하나이지 않은가? Totem and Taboo is the great theory of the event, and psychoanalysis in general is the science of events, on the condition that the event should not be treated as something whose sense is to be sought and disentangled. 토템과 터부는 사건에 대한 위대한 이론이다, 그리고 정신분석학 일반은 의미를 찾아지거나 빠져나오는 무언가처럼 다루지 않는 사건이라는 조건에서 사건들의 과학이다. The event is sense itself, insofar as it is disengaged or distinguished from the states of affairs which produce it and in which it is actualized. 사건은 의미 그 자체이며 그것이 그것을 생성하고 효과화/현실화하는 사태와 분리되거나 구분되기에 그렇다. Over states of affairs and their depth, their mixtures and their actions and passions, psychoanalysis casts the most intense light in order to reach the point of emergence of that which results, that is, the event of another type, as a surface effect. 사태와 깊이, 혼합물과 능동, 수동을 넘어 정신분석학은 표면 효과의 결과로서 다른 타입의 사건의 출현을 위해 가장 강력한 빛을 던진다. Therefore, whatever may be the importance of the earlier positions, or the necessity of always connecting the event to its causes, psychoanalysis is correct to recall the role of Oedipus as a "nuclear complex" -a formulas which has the same importance as Husserl's "noematic core." 그러므로 이전 위치들의 중요성, 혹은 사건을 항상 그것에 원인들로 연결시키는 필연성이 무엇이던지 간에 정신분석학이 "원자 컴플렉스"로서 오이디푸스의 역할을 소환한 것은 적절하다(마치 후설의 "노에마적 중심"이 중요한 것처럼 말이다.) For it is with Oedipus that the event is disengaged from its causes in depth, spreads itself at the surface and connects itself with its quasi-cause from the point of view of a dynamic genesis. 사건이 깊이에서의 원인들과 분리되고 표면으로 펼쳐져 역동적 창조의 관점에서 준원인과 연결되는 것은 오이디푸스를 통해서이다. It is the perfect crime, the eternal truth, the royal splendor of the event -each one of which communicates with all the others in the variants of one and the same phantasm. 그것은 완벽한 범죄이자 영원한 진실이며 사건의 성대한 영광이다 -각각은 하나의 변수들과 같은 환상의 다른 모든 것들과 소통한다. It is a distinct from its actualization as from the causes which produce it, using to its advantage the eternal part of excess over these causes and the part which is left unaccomplished in its actualizations, skimming over its own field, making us its own offspring. 그것은 원인들과 그것의 효과화/현실화에서 달성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초과로서의 영원한 부분임의 이점을 이용하여 그것의 원인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현실화/효과화로부터 분리된 것이고 자신의 고유한 영토를 훓어보며, 그것의 고유한 자식을 만든다. And if it is indeed at the point where the actualization cannot accomplish or the cause produce that the entire event resides, it is at the same point also that it offers itself to counter-actualization; it is here that our greatest freedom lies -the freedom by which we develop and lead the event to its completion and transmutation, and finally become masters of actualizations and causes. 만약 이 지점에서 효과화/현실화가 될 수 없거나 원인이 모든 사건이 있는 곳에서 생성되는 것이 사실이라면, 반-효과화/현실화를 그것에게 제공하는 것도 이 지점이다; 우리의 가장 큰 자유가 놓인 곳은 이곳이다(우리가 사건을 완성과 변형으로 발전시키고 이끈, 그리고 마침내 효과화/현실화와 원인들의 마스터가 되는 자유). As the science of pure events, psychoanalysis is also an art of counter-actualizations, sublimations, and symbolizations. 순수 사건의 과학으로서 정신분석학은 반-효과화(지시), 승화(현시), 기호화의 기술이다.
2) The second characteristic of the phantasm is its position in relation to the ego, or rather the situation of the ego in the phantasm itself. 환상의 두번째 성격은 자아와 관련된 그것의 위치, 혹은 환상 자체 안에서의 에고의 상황에 있다. It is indeed true that the phantasm finds its point of departure(or its author) in the phallic ego of secondary narcissism. 환상이 이차적 나르시시즘의 팔루스적 자아에서 자신의 누출(혹은 저자)의 지점을 찾는 것은 사실이다. But if the phantasm has the property of turning back on its author, what is the place of the ego in the phantasm, taking account of the unfolding or the development which is inseparable from it? 그러나 만약 환상이 자신의 저자로부터 등을 돌리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과 분리 불가능한 펼침과 발전을 고려했을 때 환상 안에서 자아의 위치는 무엇인가? Laplanche and Pontalis in particular have raised this problem, under conditions which caution us about any easy response. 특히 라플랑슈와 폰탈리스는 이 문제를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하는 조건들에서 제기한다. Although the ego may appear occasionally in the phantasm as acting, as undergoing an action, or as a third observing party, it is neither active nor passive and does not allow itself at any moment to be fixed in a place, even if this place were reversible. 자아가 행위로서, 겪어지는 행위로서, 혹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환상 안에서 이따금 나타날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능동이나 수동도 아니고 심지어 뒤집을 수 있는 장소라도 어떤 순간에도 한 장소에서 고정되어 있기를 거부한다. The originary phantasm "would be characterized by an absence of subjectiviation accompanying the presence of the subject in the scene"; "any distribution of subject and object finds itself abolished"; "the subject does not aim at the object or its sign, it is included in the sequence of images..., it is represented as participating in the setting, without, in the forms closer to the originary phantasm, a place being assigned to it." 근원적인 환상은 "현장에서 주체의 현존을 동반하는 주체화의 부재로 특징화될 것이다"; "어떤 주체와 대상의 분포도 버려질 것이다"; "주체는 대상이나 그것의 기호를 겨냥하지 않고, 이미지들의 연속에 포함된다..., 그것은 근원적인 환상에 가까운 형상들을 위한 장소없이 배경 안에 참여하는 것으로서 재현/표상된다." These remarks have two advantages: on one hand, they emphasize that the phantasm is not a representation of either action or passion, but rather that it pertains to an entirely different domain; on the other hand, they show that if the ego is dissipated in it, it is not perhaps because of an identity of contraries, or a reversal whereby the active would become passive -like that occuring in the becoming of depths and the infinite identity which it implies. 이 발언들은 두가지 유리함을 지닌다: 한편으로, 그들은 환상이 능동 혹은 수동의 표상/재현이 아니며 완전히 다른 영역에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만약 자아가 그것에서 소멸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반대항들의 동일성이나 능동이 수동이 되는 역전이 아님을 보여준다.(깊이가 되는 것과 그것이 내포하는 무한한 동일성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We cannot, however, follow these authors when they search for this beyond the active and the passive in a pronominal model, which would still make an appeal to the ego and would even refer explicitly to an auto-erotic "this-side." 그러나 우리는 이 저자들이 자아에 호소하고 심지어는 명쾌하게 자동-성애적 "이쪽"에 회부하는 대명사적 모델에서 능동과 수동 너머를 찾을 때 그들을 따를 수 없다. The value of pronominal -to punish oneself, to punish, or to be punished, or better yet, to see oneself, rather than to see or to be seen- is well attested to in Freud's writing. 대명사의 가치(누군가를 벌하고, 벌하려하거나 벌받기 위해, 혹은 보거나 보이기보다 누군가를 보고)는 프로이트의 글에서 잘 증명되었다. But it does not seem to go beyond the point of view of an identity of contraries, either by means of a deeper appreciation of one, or by a synthesis of both.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깊은 공감의 방식으로도, 혹은 둘의 종합으로도 반대들의 동일성의 관점을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That freud remained attached to such a "Hegelian" position is beyound doubt, as we cans see, in the realm of language, from a thesis on primitive words, endowed with contradictory sense. 우리가 본 것처럼 모순적인 의미에 결부되는 원시적 단어들에 관한 생각들로부터 언어의 영역에서 프로이트가 이 헤겔적인 위치에 붙어있는다는 것은 의심을 넘어선다. In fact, the transcendence of the active and the passive and the dissolution of an ego which corresponds to it do not occur along the lines of an infinite or reflected subjectivity. 사실 능동과 수동의 초월과 그것에 상응하는 자아의 소멸은 무한한, 혹은 반영된 주체성의 선을 따라 발생하지 않는다. That which is beyond the active and the passive is not the pronominal, but the result -the result of actions and passions, the surface effect or the event. 능동과 수동을 넘어서는 것은 대명사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과 수동의 결과에 따른 결과물이자 표면효과, 혹은 사건이다. What appears in the phantasm is the movement by which the ego opens itself to the surface and liberates the a-cosmic, impersonal, and pre-individual singularities which it had imprisoned. 환상에서 나타나는 것은 자아가 스스로를 표면으로 개방하고 갇혀있던 우주적이고 비인격적인, 그리고 전 개체적인 특이성들을 해방시키는 운동이다. It literally releases them like spores and bursts as it gets unburdened. 그것은 문자그대로 그들을 홀씨처럼 방출하고 짐지워지지 않았기에 폭발시킨다. We must interpret the expression "neutral energy" in the following manner: "neutral" means pre-individual and impersonal, but does not qualify the state of an energy which would come to join a bottomless abyss. 우리는 "중성적 에너지"라는 표현을 다음의 방식대로 해석해야 한다: "중성적"은 전 개체적이고 비인칭적이나 바닥없는 심연과 합쳐질 에너지를 성질화하지 않는다. On the contrary, it refers to the singularities liberated from the ego through the narcissistic wound. 반대로 그것은 나르시시스적 상처를 통해 자아로부터 해방된 특이점들에 회부된다. This neutrality, that is to say, this movement by which singularities are emitted, or rather restored by an ego which is dissolved or adsorbed at the surface, belongs essentially to the phantasm. 이 중성, 즉 특이점들이 방출되는, 혹은 오히려 표면에 소멸되거나 흡착되는 자아에 의해 복구되는 이 운동은 본질적으로 환상에 속한다. This is the case in A Child Is Being Beaten (or better, "A Father Is Seducing His Daughter," following the example invoked by Laplanche and Pontalis). Thus, the individuality of the ego merges with the event of the phantasm itself, even if that which the event represents in the phantasm is understood as another individual, or rather as a series of other individuals through which the dissolved ego passes. 이것은 '아이가 맞는 중이다(혹은, "아버지가 딸을 유혹하는 중이다", 라플랑슈와 폰탈리스에 의해 제기된)'의 경우이다. 따라서 자아의 개체성은 환상의 사건 자체와 합쳐진다. 환상에서 표상/재현되는 사건이 또다른 개체, 혹은 소멸된 자아가 지나가는 다른 개체들의 계열들로서 이해되더라도 말이다. The phantasm is inseperable therefore from the toss of the dice or from the fortuitous instances which it enacts. 환상은 그러므로 주사위 던지기나 그것이 발하는 우연적인 사건들과 분리할 수 없다. And the famous grammatical transformations(such as those of President Schreber or those of sadism or voyeurism) register each time the rising up of singularities distributed in disjunctions, all of them, in each case, communicating in the event and all events communicating in one event, as for example in the case of the throws of the dice in the same cast. 그리고 유명한 문법적 변환(대통령 슈뢰버들 혹은 사디즘들 혹은 관음증과 같은)은 매번 단절에 의해 유통되는 특이성들의 일어남을 등록하는데 그들 모두, 그리고 각각의 경우 사건 안에서 소통하며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사건 안에서 소통한다. 마치 같은 던짐 안에서의 주사위의 던짐처럼 말이다. We find once again here an illustration of the principle of positive distnace, with the singularities which stake it out, and of an affirmative usage of the disjunctive synthesis (and not a synthesis of contradiction). 우리는 이곳에서 다시 한번 긍정적인 거리의 원리에 대한 묘사를 발견하는데 그것을 주장하는 특이성들과 함께, 그리고 단절/선언적 종합의 긍정적인 사용(모순의 종합이 아닌)과 함께 말이다.
3) It is not an accident that the development inherent in the phantasm is expressed in a play of grammatical transformations. 환상에 내재하는 발달이 문법적인 전환의 놀이에 내재해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The phantasm-event is distinguished from the corresponding state of affairs, whether it is real or possible; the phantasm represents the event according to its essence, that is, as a noematic attribute distinct from the actions, passions, and qualities of the state of affairs. 환상-사건은 그것이 실재적이거나 가능적인 것에 상관없이 그에 상응하는 사태들과 구별된다; 환상은 그것의 본질에 따라 사건을 표상/재현하는데 그것은 능동, 수동과 구분되는 노에마적 속성이며 사태들의 성질들이다. But the phantasm represents another and no less essential aspect as well, according to which the event is that which may be expressed by the proposition (Freud pointed this out in saying that the phantasmatic material, in the representation of the parental coitus for example, has an affinity to "verbal images"). 그러나 환상은 다른 것을 사건이 명제들에 의해 표현되는 것으로서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속성들로서 표상/재현한다.(프로이트는 환상적인 물질에 대해 말하면서 이를 지적하는데, 이를테면 부모의 성관계에 관한 표상/재현은 "음성적 이미지들"과 관련성이 있다). It is not the case that the phantasm is said or signified; the event presents as many differences from the propositions which express it as from the state of affairs in which it occurs. 환상이 말해진 것이냐 기호화된 것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사건은 그것을 발생시킨 사태들에서 표현하는 명제들로부터 가능한한 많은 차이들을 현시한다. The fact is, though, that it does not exist outside of a proposition which is at least possible, even if this proposition has all of the characteristics of a paradox or nonsense; it also inheres in a particular element of the proposition. 그러나 사실은 만약 명제가 적어도 가능한, 혹은 모든 역설이나 무의미의 성격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명제 바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명제의 특정 요소에 내속되어 있다. This element is the verb -the infinitive form of the verb. 이 요소는 동사이다 -동상의 무한한 형태로서. The phantasm is inseperable from the infinitive mode of the verb and bears witness thereby to the pure event. 환상은 동사의 무한한 양식과 분리불가능하며 그러므로 순수 사건의 증거를 가진다. But in light of the relations and complex connections between the expression and the expressed, between the interiority of the expressor(l'exprimant) and the exteriority of the expressed, between the verb as it appears in language and the verb as it subsists in Being, we must conceive of an infinitive which is not yet caught up in the play of grammatical determinations -and infinitive independent not only of all persons but of all time, of every mood and every voice (active, passive, or reflective). 그러나 표현과 표현된 것, 표현자의 내재성과 표현된 것의 외재성, 언어에 나타나는 동사와 존재에 존속하는 동사 사이의 복잡한 연결과 관계들에 비추어 봤을 때 우리는 문법적 규정들의 놀이에 잡히지 않은 무한성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독립적인 무한성은 모든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모든 분위기와 목소리들(능동적인, 수동적인, 반성적인)의 모든 시간들이다. This would be a neutral infinitive for the pure event, Distance, Aion, representing the extra-propositional aspect of all possible positions, or the aggregate of ontological problems and questions which correspond to language. 이것은 순수 사건, 거리, 아이온, 등등 모든 가능한 위치들의 초과 명제적인 속성들을 표상/재현하는, 혹은 언어에 상응하는 존재론적 문제들과 질문들을 위한 중성적인 무한성일 것이다. From this pure and undetermined infinitive, voices, moods, tenses, and persons will be engendered. 이 순수하고 무규정적인 무한성에서 목소리들, 분위기들, 시제들, 그리고 사람들이 초래될 것이다. Each one of them will be engendered within disjunctions representing in the phantasm a variable combination of singular points, and constructing around these singularities an instance of solution to the specific problem -the problem of birth, of the difference of the sexes, or the problem of death. 이들 각각은 환상 안에서 특이점들의 다양한 조합들로 표상/재현되고, 이 특이점들 주위에서 특정 문제들에 대한 답들의 사례(태어남의 문제, 성의 차이, 혹은 죽음의 문제)를 구성하면서 단절/선언들 안에서 초래될 것이다. Luce Irigaray, in a short article, after having noted the essential relation between the phantasm and the infinitive verb, analyzes several examples of such a genesis. 뤼스 이리가레이는 환상과 무한한 동사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언급한 후에, 한 짧은 글에서 이러한 발생에 대한 몇몇 예들을 분석한다. Once an infinitive has been determined in a phantasm (for example, "to live," "to absorb," or "to give"), she investicates several types of connection: the subject-object connection, the active-passive conjunction, the affirmation-negation disjunction, or the type of temporalization of which each one of these verbs is capable("to live," for example, has a subject, but one that is not an agent and that has no differentiated object). 무한성이 환상안에서 규정되면서(이를테면, "사는", "흡입하는", 혹은 "주는"), 그녀는 몇몇 연결의 유형들을 조사한다: 주체-대상 연결, 능동-수동 접속, 긍정-부정 단절, 혹은 이 동사들이 시간화할 수 있는 유형(이를테면 "사는"은 주체를 가지지만 그것은 대리인이 아니며 선별된 대상도 없다). She is therefore able to classify these verbs in an order which runs from the least to the most determined, as if a general infinitive which is taken to be pure were progressively specified according to the differntiation of formal grammatical relations. 그러므로 그녀는 마치 순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일반적인 무한성이 형식 문법적인 관계들의 구별에 따라 점진적으로 구체화되는 것처럼 이 동사들을 덜 규정된 것에서 더 규정된 것으로 계층화할 수 있다. This is how Aion is peopled by events at the level of singularities which are distributed over its infinitive line. 이는 어떻게 아이온이 무한한 선 위로 분배되는 특이성들의 층위의 사건들에 의해 사는 것으로 되는지를 보여준다. We have attempted to show in a similar way that the verb goes from a pure infinitive, opened onto a question as such, to a present indicative closed onto a designation of a state of affairs or a solution case. 우리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동사가 순수 무한성에서 질문들, 즉 사태, 혹은 답의 지정에서 닫히는 현재 지시체들을 여는지 보여주고자 시도했다. The former opens and unfolds the ring of the proposition, the latter closes it up, and between the two, all the vocalizations, modalizations, temporalizations, and personalizations are deployed, together with the transformations proper to each case according to a generalized grammatical "perspectivism." 전자는 명제의 순환을 열고 펼치며 후자는 그것을 닫는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서 모든 목소리화, 양상화, 시간화, 인격화들이 일반화된 문법의 "관점주의"에 따라 각각의 경우에 맞는 변형과 함께 배치된다.
But then a simpler task is imposed, namely, to determine the phantasm's point of birth and, through this, its real relation to language. 그러나 언어와의 실재적 관계를 통해 환상의 탄생 지점을 규정하는 더 단순한 과제가 부과된다. This question is nominal or terminological to the extent that it is about the use of the word "phantasm." 이 질문은 "환상"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관한 한에서 명목적이거나 술어적이다. But it engages other things as well, since it fixes this use in relation to a particular moment, allegedly making it necessary in the course of the dynamic genesis. 그러나 그것은 역동적 발생에 따라 추정적으로 그것을 필연적으로 만드는 다른 특정 순간과의 관련하에서 이 사용을 고정시키면서 다른 것들도 끌어들인다. For example, Susan Isaacs, following Melanie Klein, already employs the word "phantasm" in order to indicate the relation of introjected and projected objects in the schizoid position, at a moment in which the sexual drives are in league with the alimentary drives. 이를테면, 수잔 아이삭은 멜라니 클라인을 따라 이미 "환상"이라는 용어를 성적 충동이 소화적 충동과 결합하는 순간인 분열증적 위치 안에서 내투사되고 투사된 대상들의 관계를 지정하기 위해 사용한다. It is therfore inevitable that phantasms have only an indirect and tardive relation to language and that, when they are verbalized afterward, the verbalization occurs in accordance with ready-made grammatical forms. 따라서 환상이 언어와 오직 간접적이고 사후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것은 불가피해보이는데 그들이 후에 동사화되었을 때, 이 동사화는 레디메이드 문법적 형식에 따라 발생한다. Laplanche and Pontalis establish the phantasm along with auto-eroticism, and link it to the moment in which the sexual drives disengage themselves from the alimentary model and abandon "every natural object" (hence the importance they attach to the pronominal and the sense they give to the grammatical transformations as such in the non-localizable position of the subject). 라플랑슈와 폰탈리스는 자기성애와 함께 환상을 수립하고 성적 충동이 소화적 모델과 "모든 자연적인 대상"(그들이 대명사적인 것에 부여한 중요성과 주체의 비장소적인 위치들과 마찬가지로 문법적인 변환들에 부여한 의미와 같은 이유로)으로부터 분리되는 순간과 이를 연결시킨다. Finally, Melanie Klein does make an important remark, despite her very extensive use of the word "phantasm." 마지막으로 멜라니 클라인은 "환상"이라는 단어에 대한 매우 광범위한 사용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언급을 한다. She often says that symbolism is the foundation of every phantasm, and that the development of the phantasmatic life is hindered by the persistence of the schizoid and depressive positions. 그녀는 상징주의가 모든 환상의 기반이라고 자주 이야기하는데 환상적인 삶의 발달이 분열증적이고 우울증적인 위치들의 고집에 의해 저해되기에 그렇다고 한다. It seems to us, precisely, that the phantasm, properly speaking, finds its origin only in the ego of the secondary narcissism, along with the narcissistic wound, the neutralization, the symbolization, and the sublimation which ensue. 정확하게 환상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나르시시스적 상처, 중성화, 상징화, 그리고 뒤따르는 승화와 함께 그것의 원천을 이차적 나르시시즘의 자아 안에서 찾는 것처럼 보인다. In this sense, it is inseparable not only from grammatical transformations, but also from the neutral infinitive as the ideational material of these transformations.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문법적 전환들과 분리불가능할뿐 아니라 이 전환들의 이데아적 물질들로서의 중성적인 무한성으로부터도 그렇다. The phantasm is a surface phenomenon and, moreover, a phenomenon which is formed at a certain moment in the development of surfaces. 환상은 표면 현상이고 더 나아가 표면들의 발달에 있어 특정 순간에 형성되는 현상이다. For this reason, we have opted for the word "simulacrum" in order to designate the objects of depth (which are already no longer "natural objects"), as well as the becoming which corresponds to them and the reversals by which they are characterized.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우리는 "시뮬라크럼"이라는 단어를 깊이의 대상들(이미 더 이상 "자연적인 대상들"이 아닌)을 지정하기 위해 선택했다. 그들과 그들이 묘사되는 역전들에 상응하는 되기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We choose "idol" in order to designate the object of the heights and its adventures. 우리는 높이와 그것의 모험의 대상을 지정하기 위해 "우상"을 선택했다. We choose "image" in order to designate that which pertains to partial, corporeal surfaces, including the initial problem of their phallic coordination (good intention). 우리는 팔루스적 연합의 초기 문제(좋은 의도)들을 포함하여 부분적이고 물체적인 표면들에 존재하는 것을 지정하기 위해 "이미지"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Thirty-First Series of Thought - 계열 31 - 사고
The extreme mobility of the phantasm and its capacity for "passage" have oftne been stressed. 환영의 극단적인 움직임과 통로로서의 능력은 자주 주장되어왔다. It is a little like the Epicurean envelopes and emanations which travel in the atmosphere with agility. 그것은 에피쿠로스적인 봉투나 민첩하게 대기를 여행하는 발산과 같다. Two fundamental traits are tied to this capacity. 두 가지 근본적이 특성이 이 능력에 연결된다. First, the phantasm covers the distance between psychic systems with ease, going from consciousness to the unconscious and vice versa, from the nocturnal to the diurnal dream, from the inner to the outer and conversely, as if it itself belonged to a surface dominating and articulating both the unconscious and the conscious, or to a line connecting and arranging the inner and the outer over two sides. 먼저 첫번째로, 환영은 의식에서 무의식,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밤의 꿈에서 대낮의 몽상으로,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뒤집어서 마찬가지로 무의식과 의식을 지배하고 조절하는 표면에 속하는 것처럼, 혹은 안과 밖 양쪽을 배치하고 연결하는 선처럼 정신적 체계들 사이의 거리를 용이하게 아우른다. Second, the phantasm returns easily to its own origin and, as an "originary phantasm," it integrates effortlessly the origin of the phantasm (that is, a question, the origin of birth, of sexuality, of the difference of the sexes, or of death...). 두번쨰로, 환영은 "원환영"으로서 자신의 원천으로 쉽게 돌아가며 그것은 환영의 원천을 쉽게 통합한다(탄생, 성, 성의 차이들, 죽음 등등의 원천에 대한 질문들). This is because it is inseperable from a displacement, an unfolding, and a development within which it carries along its own origin. 이것은 그것의 원천을 따라 그 안에서 이동과 펼침, 그리고 전개를 옮기는 것과 불가분하기 때문이다. Our earlier problem, "where does the phantasm begin, properly speaking?" implies another problem: "where does the phantasm go, in what direction does it carry its beginning?" Nothing is finalized like the phantasm; nothing finalizes itself to such an extent. 우리의 이전 문제인 "적절히 말해 어디서 환영이 시작하는가?"는 또다른 문제를 내포한다: "환영은 어디로가고 어떤 방향으로 자신의 시작을 가지고 가는가?" 어느것도 환영처럼 귀결되지 않는다; 어느것도 그러한 범주 안에 자신을 귀결시키지 않는다.
We attempted to determine the beginning of the phantasm as the narcissistic wound or the trace of castration. 우리는 환영의 시작을 나르시시스적 상처나 거세의 자취로 규정하려고 했다. In fact, in confromity with the nature of the event, a result of the action appears at this point, which is quite different from the action itself. 사실 사건의 본성에 따르면, 행위/능동의 결과는 이 지점에서 행위/능동 그 자체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The (oedipal) intention was to restore, to bring about, and to coordinate its own physical surfaces; but all of this was still located within the domain of Images -with the narcissistic libido and the phallus as a surface projection. (오이디푸스적)의도는 그것의 물리적 표현을 복구, 유발, 조직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미지의 영역 안에 위치한다 -나르시시스적 리비도와 표면 투사로서의 팔루스와 함께 말이다. The result is to castrate the mother and to be castrated, to kill the father and to be killed, along with the transformation of the phallic line in the trace of castration and the corresponding dissipation of all the images(mother-world, father-god, ego-phallus). 결과는 거세의 자취와 그에 상응하는 모든 이미지들의 소멸 안에서 팔루스적 선의 변형을 따라 어머니를 거세하는 것과 거세당하는 것이고 아버지를 죽이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어머니-세계, 아버지-신, 자아-팔루스). But if we make the phantasm begin on the basis of such a result, it is clear that this result would require for its development a different surface from the corporeal surface, where images were developed according to their own law(partial zones with genital coordination). 그러나 우리가 만약 환영을 그러한 결과들을 기반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만든다면, 이 결과가 이미지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법칙(생식기적 연합을 수반하는 부분적인 지대)에 따라 전개되는 물체적인 표면과는 다른 표면에서의 전개를 요구할 것은 명백해보인다. The result will develop on a second screen, and thus the beginning of the phantasm will find its sequence elsewhere. 결과는 이차적 스크린 위에서 전개될 것이다, 그러므로 환영의 시작은 그것의 순서를 다른 곳에서 찾을 것이다. The trace of castration does not by itself constitute or outline this elsewhere or this other surface: it concerns always the physical surface of the body and seems to disqualify it to the advantage of the depths and heights that it itself had conjured up. 거세의 자취는 그 자체로 이 다른 곳, 혹은 다른 표면을 구성하거나 윤곽을 잡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신체의 물리적인 표면을 고려하고 그것이 상기시켰던 것을 깊이들과 높이들의 이점에서 박탈하는 것처럼 보인다. Thus, the beginning is truly in the void; it is suspended in the void. It is with-out. 따라서 시작은 진실로 공허 안에 있다; 그것은 공허 안에서 유예되었다. 그것은 없는/바깥과 함께 이다. The paradoxical situation of the beginning, here, is that it is itself a result, and that it remains external to that which it causes to begin. 시작의 역설적 상황은 그것 자체로 결과라는 데에, 그리고 그것이 그것을 시작하게 만든 것에 외재적인 채로 머무른다는 것에 있다. This situation would afford no "way out," had not castration transformed the narcissistic libido into desexualized energy. 거세가 자기애적 리비도를 탈성욕 에너지로 바꾸지 않았다면 이러한 상황은 "탈출구"를 제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This neutral or desexualized energy constitutes the second screen, the cerebral or metaphysical surface on which the phantasm is going to develop, begin anew with a beginning which now accompanies it at each step, run to its own finality, represent pure events which are like one and the same Result of the second degree. 이 중성적인, 혹은 탈성애화된 에너지는 두번째 스크린을 구성하는데 이제 각 단계마다 자신의 고유한 종결점을 향하여 새롭게 시작하는 시작과 함께 환영이 전개되는 뇌적인, 혹은 형이상학적 표면은 하나와 이차적 단계의 동일한 결과와 같은 순수사건들을 재현/표상한다.
There is thus a leap. The trace of castration as a deadly furrow becomes this crack of thought, which marks the powerlessness to think, but also the line and the point from which thought invests its new surface. 따라서 도약이 있다. 죽음의 고랑과 같은 거세의 자취는 생각할 수 없는 무력감을 표식하고 사고의 균열이 되지만 또한 사고가 자신의 새로운 표면들을 투자할 수 있는 선과 점들이 된다. And precisely because castration is somehow between two surfaces, it does not submit to this transmutation without carrying along its share of appurtenance, without folding in a certain manner and projecting the entire corporeal surface of sexuality over the metaphysical surface of thought. 그리고 정확히 거세가 두 표면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특정 방식으로 접히거나 성의 모든 물체적 표면을 사고의 형이상학적 표면 위로 투사하지 않고는, 그리고 그것의 부속물들을 공유하지 않고는 이 변형에 받아들여질 수 없다. The phantasm's formula is this: from the sexual pair to thought via castration. 환영의 공식은 이렇다: 거세를 통한 성적 쌍에서 사고로. If it is true that the thinker of depths is a bachelor, and that the depressive thinker dreams of lost betrothals, the thinker of surfaces is married or thinks about the "problem" of the couple. 만약 깊이의 사유자가 총각이라면, 그리고 우울증적 사유자는 잃어버린 약혼을 꿈꾼다면 표면들의 사유자는 결혼을 했거나 커플의 "문제"에 대해 사유한다. No one better than Klossowski has been able to disentangle this slow advance (cheminement) of the phantasm, for it is the process of this entire work. 이 전체 작업의 과정인 환영의 느린 진전(화학)을 클로소스키보다 잘 풀어낸 사람은 없다. In words which are seemingly odd, Klossowski says that his problem is that of knowing how a couple may "project itself," independently of children, the way we could go from the couple to the thought constructed in the mode of the couple, in a mental comedy, or from sexual difference to the difference of intensity constitutive of thought -the primary intensity which marks the zero point of thought's energy, but also from which thought invests its new surface.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클로소스키는 아이들과는 독립적으로 어떻게 커플이 커플에서 커플의 양식으로 구축되는 사고로(정신적 희극 속에서), 혹은 성의 차이에서 사고를 구성하는 강도의 차이(사고의 에너지에 대한 영점을 표식할 뿐만 아니라 사고가 투입하는 새로운 표면의 원초적인 강도)로 갈 수 있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투사하는지에 관한 문제를 말한다. His problem is always to extract, by means of castration, thought from a couple, in order to bring about, through this crack, a sort of coupling of thought. 그의 문제는 언제나 거세의 방법으로서, 커플로 말미암은 사고로서, 이 균열을 통해 초래하는 사고의 커플링을 추출하는 것이었다. Klossowski's couple, Robert-Octave, have in a certain respect their correspondence in Lowry's couple, and also in Fitzgerald's ultimate couple of schizophrenia and alccoholism. 클로소스키의 커플인 로버트-옥타브는 로리의 커플과 특정 관점에서 상응한다, 그리고 피츠제럴드의 분열증과 알코올중독의 궁극적인 커플도 그렇다. For not only is the entirety of the sexual surface (parts and whole) involved in projecting itself over the metaphysical surface of thought, but depth and its objects or height and its phenomena as well. 사고의 형이상학적 표면 위에 스스로를 투사하는 것은 성적 표면의 전체성(부분들과 전체) 뿐만아니라 깊이와 그것의 대상들 혹은 높이와 그것의 현상들까지 포함한다. The phantasm returns to its beginning which remained external to it(castraton); but to the extent that beginning itself was a result, the phantasm also returns to that from which the beginning had resulted (the sexuality of corporeal surfaces); and finally, little by little, it returns to the absolute origin from which everything proceeds (the depths). 환영은 그것(거세)에 외재적인 것으로 머무르는 자신의 시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시작 그 자체가 결과이고 환영은 마찬가지로 시작이 도출된(물체적 표면의 성) 것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점진적으로, 그것은 모든 것이 진행되는(깊이들) 완전한 원천으로 돌아간다. One could now say that everything -sexuality, orality, anality- receives a new form on the new surface, which recovers and integrates not only images but even idols and simulacra. 누군가는 모든 것(성, 구강성, 항문성)이 새로운 표면, 즉 이미지들 뿐만 아니라 우상과 시뮬라크라까지도 되찾고 연합하는 이 새로운 표면에서 새로운 형상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But what does it mean to recover and to integrate? 그러나 되찾고 연합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We gave the name "sublimation" to the operation through which the trace of castration becomes the line of thought, and thus to the operation through which the sexual surface and the rest are projected at the surface of thought. 우리는 "승화"라는 이름을 거세의 자취가 사고의 선이 되는 생성에 부여했고, 따라서 성적인 표면과 나머지들을 통한 생성은 사고의 표면에 투사된다. We gave the name "symbolization" to the operation through which thought reinvests with its own energy all that which occurs and is projected over the surface. 우리는 사고가 발생하고 표면에 투영되는 모든 것을 그것의 고유한 에너지로 재투자하는 생성에 "상징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Obviously, the symbol is no less irreducible than the symbolized, sublimation no less irreducible than the sublimated. 명백하게, 상징은 상징화됨에 못지않게 환원 불가능하고, 승화는 승화됨에 못지않게 환원 불가능하다. It has been quite a while since there has been anything comical in supposing a relation between the wound of castration and the crack constitutive of thought, or between sexuality and thought as such. 거세의 상처와 사고의 구성적 균열 사이, 혹은 성과 사고 사이의 관계를 추정하는 것은 더이상 희극적이지 않은지는 꽤 되었다.
There is nothing comical (or sad) in the obsessional paths by which a thinker passes. 사유자들이 통과하는 강박적인 경로에 대한 희극적이거나 슬픈 것은 없다. It is not a question of causality, but rather of geography and topology. 그것은 인과성에 대한 질문이기보다 지질학가 위상학에 대한 문제이다. This does not mean that thought thinks about sexuality, nor that the thinker thinks about marriage. 이것은 성에 대해 생각하는 사유도 아니고 결혼에 대해 생각하는 사유자도 아니다. It is thought which is the metamorphosis of sex and the thinker who is the metamorphosis of the couple. 이것은 성의 변신으로서의 사유이고 커플에 대한 변신으로서의 사유자이다. From the couple to thought -although thought reinvests the couple as a dyad and coupling. 커플에서 사유로 -사유가 커플을 한 쌍과 커플링으로서 재 투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From castration to thought -although thought reinvests castration as the cerebral crack and the abstract line. 거세에서 사고로 -사고가 거세를 뇌적인 균열과 추상적인 선으로 재투입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To be precise, the phantasm goes from the figurative to the abstract; it begins with the figurative, but must be continued in the abstract. 엄밀하게는, 환영이 형상적인 것에서 추상적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형상적인 것에서 시작하지만 추상적인 것에서 계속되어야만 한다. The phantasm is the process of the constitution of the incorporeal. 환영은 비물체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의 과정이다. It is a machine for the extraction of a little thought, for the distribution of a difference of potential at the edges of the crack, and for the polarization of the cerebral field. 그것은 작은 사유의 추출을 위한, 균열의 가장자리에 있는 잠재적인 차이의 분배를 위한, 뇌적인 장의 분극화를 위한 기계이다. As it returns to its external beginning (deadly castration), it is always beginning again its internal beginning (the movement of desexualization). 그것이 자신의 외재적 시작으로 돌아가면서(죽음의 거세), 그것은 언제나 자신의 내적 시작을 다시 시작한다(탈성화의 운동). In this way, the phantasm has the property of bringing in contact with each other the inner and the outer and uniting them on a single side. 이런 식으로 환영은 내부와 외부가 서로 접촉하여 한쪽으로 통합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This is why it is the site of the eternal return. 이는 그것이 왜 영원회귀의 장소인지에 대한 이유이다. It mimics endlessly the birth of a thought, it begins a new desexualization, sublimation, and symbolization, caught in the act of bringing about this birth. 그것은 끊임없이 사고의 탄생을 모방하며 이 탄생을 가져오는 행위에 의해 포착된 새로운 탈성화, 승화, 상징화를 시작한다. Without this intrinsic repetition of beginnings, the phantasm could not integrate its other, extrinsic beginning. 환영은 이 시작들의 내적인 반복들 없이 다른 것들, 즉 외재적 시작과 연합할 수 없다. The risk is obviously that the phantasm falls back on the poorest thought, on a pueril and redundant diurnal reverie "about" sexuality, each time that it misses its mark and falls short, that is, each time it falls back in the "in-between" of the two surfaces. 환영이 매번 그것의 표식을 잃고 낮게 추락하여, 즉 매번 두 표면의 "사이"로 추락하면서 성에 "대한" 유치하고 불필요한 주간의 몽상과 같은 가장 질낮은 사고로 추락하는 위험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But the phantasm's path of glory is that which was indicated by Proust. 그러나 환영의 영광의 길은 프루스트가 지적한 것에 있다. From the question "shall I marry Albertine?" to the problem of the work of art yet to be made -this is the path of enacting the speculative coupling, beginning with a sexual pair, and retracing the path of the divine creation. "내가 알베르틴과 결혼해도 될까요?"라는 질문에서부터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작품의 문제 까지 말이다. -이는 추측되는 커플링이 일어나는, 성적 쌍과 함께 시작하는 경로이며 신성한 창조의 경로를 되짚어가는 것이다. Why glory? 왜 영광일까? What kind of metamorphosis is it, when thought invests (or reinvests) that which is projected over its surface with its own desexualized energy? 사고가 자신의 고유한 탈성애화된 에너지와 함께 투사된 것을 자신의 표면 위에 부여할(혹은 재부여) 때 이는 어떤 종류의 변신인가? The answer is that thought does it in the guise of the Event. 답은 사고가 사건을 가장하여 그런다는 것이다. It does it with the part of the event that we should call non-actualizable, precisely because it belongs to thought and can be accomplished only by thought and in thought. 그것은 사건의 현실/효과화할 수 없는 것의 부분, 엄밀하게 사고에 내속하고 사고 안에서 사고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것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There arise then aggressions and voracities which transcend what was happening in the depths of bodies; desires, loves, pairings, copulations, and intentions which transcend everything happening at the surface of bodies; and finally, powerlessnesses and deaths which transcend all that could have happened. 그러면 신체들의 깊이 안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초월하는 공격성과 집착/탐욕들이 일어난다; 욕망, 사랑, 짝, 성교, 그리고 신체들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초월하는 의도들 처럼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일어날 수 있는 것들을 초월하는 무력감과 죽음처럼 말이다. This is the incorporeal splendor of the event as that entity which addresses itself to thought, and which alone may invest it -extra-Being. 이는 사고에 자신을 대면시키는 실체로서, 그리고 혼자서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건의 비물체적인 찬란함이다. -과잉 존재.
We argued as if it were possible to speak of the event as soon as a result was disengaged, distinguished from the actions and passions from which it resulted, or from the bodies in which it was actualized. 우리는 결과를 초래한 능동과 수동, 또는 그 결과가 현실화/효과화된 신체와 구분하여 결과를 분리하자마자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This is not accurate; we must wait for the second screen, namely, the metaphysical surface. 이는 정확하지 않다; 우리는 두번째 스크린, 즉 형이상학적 표면을 기다려야만 한다. Earlier, there have been only simulacra, idols and images, but not phantasms, to represent events. 전에는 사건을 표상/재현하기 위해서는 환영이 없이 오직 시뮬라크라와 우상, 그리고 이미지만이 있었다. Pure events are results, but results of the second degree. 순수 사건은 결과였지만 이차적인 의미에서의 결과였다. It is true that the phantasm reintegrates and retrieves everything in the retrieval of its own movement, but everything is changed. 환영이 자신의 고유한 운동의 회수에서 모든 것을 되찾아오고 재규합하는 것은 진실이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It is not that nourishment has become spiritual nourishment, and copulations gestures of the spirit. 그것은 영혼적인 자양분과 영혼의 성교 행위가 되는 자양분이 아니다. But each time a proud and shiny verb has been disengaged, distinct from things and bodies, states of affairs and their qualities, their actions and passions: like th verb "to green," distinct from the tree and its greenness, the verb "to eat" (or "to be eaten") distinct from food and its consumable qualities, or the verb "to mate" distinct from bodies and their sexes -eternal truths. 그러내 매번 자신감 넘치고 빛나는 동사는 사물들과 신체들, 사태들과 그들의 성질들, 그들의 능동들과 수동들로부터 분리되고 분절된다: 나무와 그것의 초록과 구분되는 "초록이 되다"라는 동사처럼, 음식과 그것의 소비 가능한 성질들과 구분되는 "먹다"(혹은 "먹히다")라는 동사처럼, 혹은 신체들과 그들의 성들과 분리되는 "짝을 짓다"라는 동사처럼 말이다. -영원한 진실들. In short, metamorphosis is the liberation of the non-existent entity for each state of affairs, and of the infinitive for each body and quality, each subject and predicate, each action and passion. 짧게는, 변신은 각각의 사태들을 위한 존재하지 않는 실체의, 그리고 각각의 신체와 성질, 주어와 술어, 능동과 수동을 위한 부정법/무한성의 해방이다. Metamorphosis (sublimation and symbolization) consists, for each thing, in the liberation of an aliquid which is the noematic attribute and that which can noetically be expressed, eternal truth, and sense which hovers over bodies. 변신(승화 혹은 상징화)은 각 사물에 대해 무아적 속성과 무아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것, 영원한 진리, 그리고 신체들 위를 떠다니는 의미인 유동체의 해방으로 구성된다. Only here to die and to kill, to castrate and to be castrated, to restore and to bring about, to wound and to withdraw, to devour and to be devoured, to introject and to project, become pure events on the metaphysical surface which transforms them, and where their infinitive is drowned out. 오직 이곳에서만 죽다와 죽이다, 거세하다와 거세당하다, 복원하다와 유발하다, 상처주다와 후퇴하다, 흡입하다와 잡아먹히다, 받아들이다와 투사하다, 는 그들을 전환하고 무한성/부정법이 끄집어져 나오는 형이상학적 표면 위에서 순수 사건이 된다. For the sake of one single language which expresses them, and under a single "Being" in which they are thought, all the events, verbs, and expressible-attributes communicate as one inside this extraction. 그들을 표현하는 단 하나의 언어를 위하여, 그리고 그들이 사유되는 하나의 "존재" 아래에서 모든 사건들과 동사들 그리고 표현가능한 속성들은 이 추출 안에서 하나로 소통한다. The phantasm recovers everything on this new plane of the pure event, and in this symbolic and sublimated part of that which cannot be actualized; similarly, it draws from this part the strength to orient its actualization, to duplicate it, and to conduct its concrete counter-actualization. 환영은 이 순수 사건의 새로운 면 위에서, 그리고 이 현실/효과화될 수 없는 상징화되고 승화된 부분 안에서 모든 것을 되찾는다; 비슷하게, 그것은 이 부분에서 그것의 현실화/효과화를 향하는, 그것을 복제하는,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인 반-현실화/효과화를 수행하는 힘을 이끌어낸다. For the event is properly inscribed in the flesh and in the body, with the will and the freedom which befit the patient thinker, only in virtue of the incorporeal part containing their secret, that is, the principle, truth, finality, and quasi-cause. 사건이 참을성 있는 사유자에 걸맞는 의지와 자유와 함께 살과 그것의 신체에 적절하게 기입되기 위해서 오직 비물체적인 부분의 가치만이 그들의 비밀, 즉 원리, 진실, 종결, 그리고 준원인을 간직한다.
Castration, then, has a very special situation between that of which it is the result and that which it causes to begin. 거세는 그것이 결과이면서 시작을 일으키는 것 사이에서 매우 특별한 상황을 가진다. But it is not castration alone which is in the void, caught between the corporeal surface of sexuality and the metaphysical surface of thought. 그러나 성의 물체적인 표면과 사유의 형이상학적 표면 사이에서 포착되는 공허 속에는 거세만 있는 것이 아니다. It is, in fact, the entire sexual surface which is intermediary between physical depth and metaphysical surface. 사실 물리적인 깊이와 형이상학적 표면 사이의 중재자는 모든 성적 표면이다. Oriented in one direction, sexuality may pull everything down: castration reacts on the sexual surface from which it comes, and to which it still belongs in virtue of its trace; it shatters this surface, causing it to rejoin the fragments of the depth. 한 방향으로 정향하면서 성은 모든 것을 허물어뜨린다: 거세는 그것이 비롯된, 그리고 그것이 그것의 자취 덕분에 내속하는 성적 표면 위에서 반응한다; 그것은 이 표면을 흩뜨러트리고 그것이 깊이의 파편들과 합쳐질 수 있도록 만든다. Further still, it prevents any successful sublimation, any development of the metaphysical surface, and causes the incorporeal crack to be actualized at the most profound depths of the body, to be confused with the Spaltung of the depths; it also causes thought to collapse into its point of impotence, or into its line of erosion. 더 나아가 아직도, 그것은 어떠한 성공적인 승화, 어떠한 형이상학적 표면의 전개도 막는다, 그리고 비물체적인 균열이 깊이의 심연과 혼동되도록 신체의 가장 풍부한 깊이에서 현실화/효과화 되도록 한다; 그것은 또한 사유가 무력함의 지점, 혹은 침식의 선까지 무너지도록 한다. But oriented in another direction, sexuality may project everything: castration prefigures the metaphysical surface the beginning of which it brings about and to which it already belongs in virtue of the desexualized energy which it releases; it projects not only the sexual dimension, but the other dimensions of depth and height as well, over this new surface on which the forms of their metamorphosis are inscribed. 그러나 다른 방향에서 정향된다면, 성은 모든 것을 투사한다: 거세는 형이상학적 표면을 그것이 유발하는 것과 그것이 방출하는 탈성화된 에너지 덕분에 속할 수 있는 시작으로 예시한다; 그것은 성적 차원을 투사할 뿐 아니라 그들의 변신의 형상들이 기입되는 이 새로운 표면 위에 깊이와 높이의 다른 차원들도 투사하면서 말이다. The first orientation must be determined as the orientation of psychosis, the second as that of the successful sublimation; between the two, one finds all the neuroses, in the ambiguous character of Oedipus and of castration. 첫번째 정향은 정신병의 정향으로 규정되어야만 할 것이며, 두번째는 성공적인 승화로서 규정되어야 할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누군가는 모든 신경들을 찾을 것이다, 오이디푸스와 거세의 모호한 성격 안에서 말이다. And it is the same thing with death: the narcissistic self regards it from two sides, according to the two figures described by Blanchot -the personal and present death, which shatters and "contradicts" the ego, as it abandons it to the destructive drives of the depths and to blows of the outside; but also the impersonal and infinitive death, which "distances" the ego, causing it to release the singularities which it contains and raising it to the death instinct on the other surface, where "one" dies, where one never succeeds in, or finishes, dying. 죽음에 관해서도 같다: 나르시시스적 자신은 그것을 두 면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여기는데, 블랑쇼에 의해 묘사된 두 형상들에 따르면 -자아가 깊이의 파괴적 충동에 그리고 바깥의 폭발들에 자신을 버리면서 그것을 흩어버리고 부정하는, 그리고 그것이 특이점들을 방출하도록 하는 인칭적인 것과 현재적인 죽음; 그러나 또한 자아를 "거리화"하는, 그러면서 그것이 담지하는 특이점들을 방출하고 "하나"가 죽는, 하나가 죽기를 절대로 성공하지 못하거나 끝내지 못하는 다른 표면에서, 그것을 죽음 본능으로 끌어올리는 비인칭적인 것과 무한성/부정법의 죽음. The entire biopsychic life is a question of dimensions, projections, axes, rotations, and foldings. 모든 생체 심리학적 삶은 차원들의, 투사들의, 축들의, 회전들의, 그리고 접힘들의 질문들이다. Which way should one take? 어느 길을 가야할 것인가? On which side is everything going to tumble down, to fold or unfold? 어느 쪽이 모든 것이 허물어질 쪽인가? 접히는 것 혹은 펼쳐지는 것? The erogenous zones are already engaged in combat upon the sexual surface -a combat that the genital zone is supposed to arbitrate and pacify. 성감대들은 이미 성적 표면 위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연루되어 있다. -생식기적 지대가 중재하고 진정시키도록 되어 있는 전투말이다. But the genital zone is itself the arena of a larger context, on the level of species and of the entire humanity: the contest of the mouth and the brain. 그러나 생식기적 지대는 그 자신이 더 큰 맥락에서의 경기장이다. 종들과 모든 인간성의 층위에서: 뇌와 입 사이의 경쟁. The mouth is not only a superficial oral zone but also the organ of depths, the mouth-anus, the cesspool introjecting and projecting every morsels. 입은 피상적인 구강적 지대일 뿐만 아니라 깊이의 기관, 입-항문, 모든 조각들을 받아들이고 투사하는 오수 구덩이이기도 하다. The brain is not only a corporeal organ but also the inductor of another invisible, incorporeal, and metaphysical surface on which all events are inscribed and symbolized. 뇌는 물체적 기관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보이지 않는 것, 비물체적인 것, 그리고 모든 사건들이 기입되고 상징화되는 형이상학적 표면의 유도자이다. Between this mouth and this brain everything occurs, hesitates, and gets its orientation. 이 입과 뇌 사이에서 모든 것이 발생하고 머뭇거리며 그것의 방향을 가진다. Only the victory of the brain, if it takes place, frees the mouth to speak, frees it from excremental food and withdrawn voices, and nourishes it with every possible word. 오직 뇌의 승리만이, 만약 그것이 발생한다면, 입이 말하도록 하고 그것이 배설적인 음식과 후퇴한 목소리들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모든 가능한 말들과 함께 자양분을 제공한다.
Thirty-Second Series on the Different Kinds of Series - 계열 32 - 다른 종류의 계열들
Melanie klein remarks that between symptoms and sublimations there must be an intermediary series corresponding to cases of less successful sublimation. 멜라니 클라인은 징후와 승화 사이에는 덜 성공적인 승화에 상응하기 위해 이를 중재하는 계열들이 있어야만 한다고 지적한다. But the whole of sexuality, in its own right, is a "less successful" sublimation: it is intermediary between the symptoms of corporeal depth and the sublimations of the incorporeal surface; and in this intermediary state it is organized in series on its own intermediary surface. 하지만 성 전체는, 그것의 논리에 따르면, "덜 성공적인" 승화이다: 그것은 물체적 깊이의 징후와 비물체적 표면의 승화 사이의 중재이다: 그리고 이 중재적 상태에서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중재적 표면에서 계열들을 조직한다. Depth is not organized in series. 깊이는 계열들에서 조직되지 않는다. The fragmentation of its objects and the undifferentiated plentitude of the body that it contrasts to the fragmented objects prevent it from happening in the void. 대상들의 파편과 파편화된 대상들에 대조되는 신체의 미분되지 않은 풍부함은 그것이 공허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방지한다. On one hand, it presents blocks of coexistence, bodies without organs or words without articulation; on the other hand, it presents sequences of partial objects bound only by the common property of being detachable and fragmentable, introjectable and projectable, bursting and causing to burst (thus the renowned sequence breast-food-excrement-penis-infant). 한편으로, 그것은 공존하는 블록들,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절속되지 않은 단어들을 나타내고;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오직 떼어낼 수 있고 파편화할 수 있는, 내투사(받아들일)할 수 있고 투사할 수 있는, 폭발하고 폭발시키는 공통의 속성들로 묶일 수 있는 부분적 대상들의 연쇄를 나타낸다(잘 알려진 연쇄인 가슴-음식-배설물-음경-아이 처럼). These two aspects -sequence and block- represent the forms taken on respectively be displacement and condensation in depth, within the schizoid position. 이 두 속성(연쇄와 블록)은 분열증적 위치 안에서 배치되고 응축되는 형상들을 표상/재현/나타낸다. It is with sexuality, that is to say, with the release of the sexual drives, that the series begins -because the serial form is a surface organization. 이것은 성과 함께, 즉 성적 충동들의 방출과 함께 시작되는 계열들이다(계열적 형상이 표면의 조직이기 때문에).
We must therefore distinguish, in the different moments of sexuality previously considered, very different kinds of series. 우리는 그러므로 성이 이전에 간주되던 것과는 다른 순간들에서 매우 다른 종류의 계열들을 구분해야만 한다. There are, first, the erogenous zones of pregenital sexuality: each one of them is organized in a series which converges around a singularity represented most often by an orifice surrounded by a mucous membrane. 먼저 전생식기적 성의 성감대가 있다: 각각은 주로 점막으로 둘러싸인 구멍으로 표상/재현되는 특이점들 주위에서 수렴하는 계열들로 조직된다. The serial form is founded in the erogenous zone of the surface, insofar as the latter is defined by the extension of a singularity or, what amounts to the same thing, by distribution of a difference of potential or intensity, having a maximum and a minimum (the series ends around points which depend upon another series). 계열적인 형상은 표면의 성감대 안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후자가 특이점의 확장으로 규정되거나 마찬가지로 최대와 최소를 갖는 잠재적, 혹은 강도적인 차이들의 분배에서 규정되는 한에서 그러하다.(계열들은 또 다른 계열 위에 의존하는 지점들 주위에서 끝난다.) The serial form on the erogenous zones, therefore, is founded on a mathmatics of singular points and on a physics of intensive quantities. 그러므로 성감대 위의 계열적인 형상은 단수적인 점들의 수학과 강도적 양들의 물리학에 기초한다. But it is in yet another manner that each erogenous zone supports a series: this time, a series of images is projected over the zone, that is, a series of objects capable of assuring for the zone an auto-erotic satisfaction. 그러나 각각의 성감대들이 계열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또 다른 방식에서이다: 이번에는 이미지들의 계열이 지대 위에 투사되며 이는 자기 성애적 만족을 위한 지대를 보증할 수 있는 대상들의 계열이다. Consider, for example, objects of sucking or images of the oral zone. 이를테면 빠는 대상이나 구강적 지대의 이미지들을 고려해봐라. Each one becomes coextensive to the entire range of the partial surface and traverses it, as it explores its orifice and field of intensity, from the maximum to the minimum and vice versa. 각각은 부분 표면의 모든 범위에 함께 존재하게 되며 마치 그것이 최대에서 최소까지, 혹은 그 반대로 자신의 구멍과 강도의 장을 탐사하는 것처럼 그것을 가로지른다. They are organized into series according to the way in which they are made coextensive (a piece of candy, for example, or chewing gum, the surface of which is multiplied by its being crunched, by being stretched respectively); but they are also organized according to their origin, that is, according to the whole from which they are extracted(another region of the body, another person, external object or reproduction of an object, a plaything, etc.), and according to the degree of their distance from the primitive objects of alimentary and destructive drives from which the sexual drives were just released. 그들은 함께 존재하게 되는 방식에 따라 계열들을 조직한다(이를테면 각각의 씹기, 혹은 당겨지기로 복수화되는 표면으로서의 사탕 한 조각, 혹은 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추출된 것 전체에 따르는 그들의 원천(몸의 또 다른 지역, 또 다른 사람, 외재적 대상 혹은 대상의 재생산, 장난감, 등등)에 따라서, 그리고 소화적이고 성적 충동이 막 방출된 파괴적 충동의 원시적 대상들과 그들의 거리의 정도에 따라서 조직된다. In each of these senses, a series linked to an erogenous zone appears to have a simple form, to be homogeneous, to give rise to a synthesis of succession which may be contracted as such, and which in any case constitutes a simple connection. 이 각각의 의미들에서 성감대에 연결된 계열들은 단순한 형상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는데, 동질적으로 되면서, 그러하게 수축되고 어떤 경우에도 단순한 연결들을 구성하면서 연쇄의 종합을 이끌어낸다. But second, it is clear that the problem of the phallic coordination of the erogenous zones comes to complicate the serial form: without doubt, the series prolong one another and converge around the phallus as the image imposed on the genital zone. 그러나 두번째로, 성감대의 팔루스적 연합의 문제가 계열적 형상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명백해보인다: 의심의 여지없이, 계열들은 이미지가 생식기적 지대에 부과되면서 팔루스 주위에서 서로를 연장하고 수렴한다. The genital zone has its own series. 생식기적 지대는 자신의 고유한 계열들을 가진다. It is inseparable, however, from a complex form which subsumes under it heterogeneous series, now that a condition of continuity or convergence has replaced homogeneity; it gives rise to a synthesis of coexistence and coordination and constitutes a conjunction of the subsumed series. 그러나 연속성 혹은 수렴의 조건이 동질성을 대체했다고 해서 그것을 이질적인 계열들에 포함시키는 복잡한 형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는 없다; 그것은 공존성과 연합의 종합을 이끌어내고 포함된 계열들의 연결을 구성한다.
Third, we know that the phallic coordination of surfaces is necessarily accompanied by oedipal affairs which in turn emphasize parental images. 세번째로, 우리는 표면들의 팔루스적 연합이 필연적으로 결국 부모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오이디푸스적 사태를 수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In the development proper to Oedipus, therefore, these images enter into one or several series -a heterogeneous series with alternating terms, father and mother, or two coexisting series, maternal and paternal: for example, wounded, restored, castrated, and castrating mother; withdrawn, evoked, killed, and killing father. 그러므로 오이디푸스에 적합한 전개에서 이 이미지들은 하나 혹은 몇몇의 계열들을 통과한다. -교차적인 항들의 이질적인 계열들, 아버지와 어머니, 혹은 두 개의 공존하는 계열들, 모계와 부계: 이를테면 상처받은, 복원된, 거세된, 그리고 어머니 거세하기; 물러나는, 환기된, 죽은, 아버지 죽이기. Moreover, this or these Oedipal series enter into relation with the pregenital series, with the images which corresponded to them, and even with the groups and persons wherefrom these images were extracted. 더 나아가, 이, 혹은 이들 오이디푸스적 계열들은 그들에 상응하는 이미지들과 함께, 그리고 심지어는 이 이미지들이 추출된 그룹들, 사람들과 함께 전생식기적 계열들을 통과한다. It is even in this relation between images of different origin, oedipal and pregenital, that the conditions of a "choice of an external object" are elaborated. "외재적 대상의 선택"의 조건들이 정교화되는 것 또한 이러한 오이디푸스적인 것과 전생식기적인 것, 다른 원천들의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이다. The importance of this new moment or relation could not be too greatly stressed, since it animates the Freudian theory of the event, or rather of the two series of events. 이 새로운 순간, 혹은 관계들의 중요성은 그것이 프로이트적 이론의 사건, 혹은 그보다 사건의 두 계열들을 활성화 시키는 한에서는 너무 크게 강조되지 않는다. This theory consists first in showing that the traumatism presupposes the existence of at least two independent events, separated in time, one of them infantile and the other post-pubescent, between which a sort of resonance is produced. 이론은 먼저 유아기와 사춘기 사이에서 발생하는 공명처럼 트라우마가 시간 속에서 분리되는 적어도 두 독립적인 사건들의 존재를 가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Under a different aspect the two events are presented as two series, one pregenital and the other oedipal, with their resonance being the process of the phantasm. 각기 다른 관점에서 두 사건들은 두 계열들로 나타나는데, 전생식기적인 것과 오이디푸스적인 것, 이들의 공명이 환영의 과정이 된다. In our terminology, it is therefore not a question of events properly speaking, but rather of two series of independent images, whereby the Event is disengaged only through resonance of the series in the phantasm. 우리의 용어들에서, 그러므로 이것은 적절히 말해 사건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사건이 오직 환영 안 계열들의 공명을 통해서만 분리되는 독립적인 이미지들의 두 계열들이다. The first series does not imply a "comprehension" of the event in question, because it is constructed according to the law of partial pregenital zones, and because only the phantasm, to the extent that it makes both series resonate, attains such a comprehension. 첫번째 계열은 사건의 "이해/포괄"을 질문에 내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전생식기적 부분 지대들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고 오직 환영만이 양 계열들을 공명시키는 한에서 이해/포괄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The event to be comprehended is no different from the resonance itself (in this capacity it is not confused with either of the two series). 이해/포괄되기 위한 사건은 공명 그 자체와 다르지 않다(이 역량에서 그것은 두 계열들 모두와 혼동되지 않는다). In any case, it is the resonance of the two independent and temporally disjointed series that is essential. 어떤 경우에도 두 독립적이고 일시적인 단절된 계열들의 공명만이 본질적이다.
Here we find ourselves before a third figure of the serial form. 우리는 이곳에서 계열적 형태의 세번째 형상 이전을 발견했다. For the series now under consideration are indeed heterogeneous, but they no longer respond at all to the conditions of continuity and convergence which had ensured their conjunction. 이제 고려중인 계열은 정말 이질적이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연결을 보장하는 지속과 수렴의 조건에 응하지 않는다. On one hand, they diverge and resonate only on this condition; on the other, they constitute ramified disjunctions and give rise to a disjunctive synthesis. 한편으로 그들은 오직 이 조건에서만 발산/분기하고 공명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분기된 단절/선언들을 구성하고 단절/선언적인 종합을 이끌어낸다. The reason for this must be sought at the two extremities of the serial form. 이에 대한 이유는 계열적 형태의 두 가지 극한들에서 찾아야만 한다. The fact is that the serial form puts images into play; but, whatever the heterogeneity of images might be, whether pregenital images of partial zones or parental images of Oedipus, we have seen that their common origin is in the idol, or in the good object lost and withdrawn in the heights. 사실은 계열적 형태가 이미지들을 놀이에 참여시킨다; 그러나 이미지들의 이질성이 무엇이던지 간에, 즉 부분지대의 전-성기적 이미지들 혹은 오이디푸스의 부모 이미지들이던지 간에, 우리는 그들의 공통적인 원천이 우상, 혹은 높이 속으로 잃어버리고 물러난 좋은 대상에 있다는 것을 보았다. It is this object, first of all, that renders possible a conversion of depth into partial surfaces and a release of these surfaces and of the images haunting them. 가장 먼저 심층이 부분적 표면들, 그리고 이 표면들의 방출로, 그리고 그들을 쫒는 이미지들로 전환될 수 있게끔 하는 것은 이 대상이다. But it is also the same object which, in the guise of the good penis, projects the phallus as an image over the genital zone. 그러나 좋은 음경의 형태로 팔루스를 이미지로서 생식기적 지대 위에 투사하는 것 또한 이 동일한 대상이다. And finally, it is the same object which provides the subject matter or the quality of parental Oedipal images.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모의 오이디푸스적 이미지의 성질, 혹은 주된 질료를 생상하는 것 또한 같은 대상이다. One could therefore say at least that the series under consideration converge toward the good object of the heights. 따라서 적어도 고려되고 있는 계열은 높이의 좋은 대상으로 수렴한다. This, however, is not at all the case: the good object(the idol) functions only insofar as it is lost and withdrawn into this height which constitues its proper dimension. 그러나 이것은 그럴 수 없다: 좋은 대상(우상)은 오직 그것의 적절한 차원을 구성하는 높이에서 잃어버리고 후퇴함으로서 기능한다. And, in this capacity, it always acts only as the source of disjunctions, the source of the emission or liberation of alternatives, as it has carried off in its retirement the secret of an eminent, superior unity. 그리고 이 역량 안에서 그것은 오직 단절/선언의 원천으로만 작동한다, 대안들의 해방, 혹은 배출의 원천으로서, 그것의 후퇴 속에서 저명함의 비밀을 가져감으로서, 우월한 통일성. It was defined earlier in this manner: wounded-unharmed, present-absent. 그것은 이전에 상처받은-상처받지 않은, 현재-부재의 방식으로 규정되었다. Ever since the manic-depressive position, it is in the same vein that it imposes an alternative on the ego -to model itself after the good object or to identify itself with bad objects. 그리고 이미 편집증-우울증적 위치에서부터, 그것은 같은 맥락에서 에고에게 대안을 부과한다 -좋은 대상을 본받거나 나쁜 대상들과 동일시하거나. Moreover, when it renders possible the spreading out of partial zones, it establishes them only as disjointed and separate -to the point that they will find their convergence only with the phallus. 더 나아가 그것이 부분 지대들을 펼쳐 나갈 때, 그것은 그것들을 오직 탈구되고 분리된 상태로 수립한다. -그들이 팔루스와 더불어서만 그들의 수렴을 발견하게 되는 지점까지. And when it determines parental images, it is again by dissociating its own aspects, by distributing them in alternatives which supply the alternating terms of the Oedipal series, and by arranging them around the image of the mother (wounded and to be healed), and the image of the father (withdrawn and to be made present). 그리고 그것이 부모의 이미지를 규정할 때, 그것은 다시 그것의 고유한 양상들을 분리하면서, 그들을 오이디푸스적 계열의 변형적인 항들을 공급하는 대안들로 분배하면서, 그리고 그들을 어머니의 이미지(상처받은, 그리고 회복되어야 할), 아버지의 이미지(후퇴된, 그리고 현시되어야 할) 주위로 배열하면서 그러하다. Only the phallus would then be left as an agent of convergence and coordination; the problem is that it itself gets involved in Oedipal dissociations. 오직 팔루스만이 수렴과 연합의 대리자로 남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 자체가 스스로 오이디푸스적인 분리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We can clearly see, above all, that it evades its role, if we refer to the other end of the chain, no longer to the origin of images but rather to their common dissipation during the evolution of Oedipus. 우리가 만약 사슬의 다른 쪽, 즉 더 이상 이미지의 원천이 아니라 오히려 오이디푸스의 진화 안에서 그들의 공통적인 소멸에 주목한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역할을 벗어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볼 수 있다.
This is because, in its evolution and in the line which it traces, the phallus marks always an excess and a lack, oscillating between one and the other and even being both at once. 이는 그것의 진화와 그것이 따르는 선에는 팔루스가 언제나 과잉이거나 결핍이고 이 둘 사이에서 진동하거나 심지어는 동시에 둘 다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It is essentially an excess, as it projects itself over the genital zone of the child, duplicating its penis, and inspiring it with the Oedipal affair. 그것은 자신을 아이의 생식기적 지대 위에 투사함으로서, 자신의 음경을 복제함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오이디푸스적 사태와 함깨 촉진함으로서 본질적으로 과잉이다. But it is essentially lack and deficiency when it designates, at the heart of the affair, the absence of the penis in the case of the mother. 그러나 그것은 사태의 중심에서 어머니의 경우와 같이 음경의 부재를 지정할 때 본질적으로 결핍과 결여이다. It is in relation to itself that the phallus is both a defect and an excess, when the phallic line merges with the trace of castration, and the excessive image no longer designates anything other than its own lack, as it takes away the child's penis. 그것은 팔루스적 선이 거세의 자취와 합쳐질 때, 그리고 과잉적인 이미지가 아이의 음경을 가져가면서 자신의 결핍 이외에는 어느것도 지정하지 않을 때, 결핍과 과잉 둘 다인 팔루스와 스스로를 관련시킨다. We are not going to repe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phallus that Lacan has analyzed in several well-known texts. 우리는 라캉이 잘 알려진 몇몇 글들에서 분석했던 팔루스의 성격들을 다시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It is paradoxical element or object = x, missing always its own equilibrium, at once excess and deficiency, never equal, missing its own resemblance, its own identity, its own origin, its own place, and always displaced in relation to itself. 그것은 역설적인 요소 혹은 대상인 x이다, 자신의 고유한 평형을 언제나 잃는, 동시에 과잉과 결핍인, 절대로 평형적이지 않은, 자신의 고유한 유사성, 동일성, 원천, 장소를 잃고 언제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추방되는. It is floating signifier and floated signified, place without occupant and occupant without place, the empty square (which can also create an excess through this void) and a supernumerary object (which can also create a lack by being this excess number). 그것은 거주자 없는 장소와 장소없는 거주자, 빈 광장(이 공허를 통해 과잉을 생성할 수 있는)과 과잉 대상(또 이 과잉 숫자가 됨으로서 결핍을 생성할 수 있는) 떠다니는 기표와 띄워진 기의이다. It is the phallus which brings about the resonance of the two series that we earlier called pregenital and oedipal, and which can also receive different qualifications, provided that, through all possible qualifications, the one is determined as signified and the other as signifying. 우리가 전에 전생식기적인 것과 오이디푸스적인 것이라고 불렀던 두 계열들의 공명을 유발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모든 가능한 조건들을 통해 다른 조건들을 받아들이면서 나타난 것과 나타내는 것으로 생성하는 것은 팔루스이다. It is the phallus which is surface nonsense, twice nonsense, as we have seen, and which distributes sense to the two series, as something happening to the one and as something insisting in the other (it is thus inevitable that the first series does not yet imply a comprehension of what is in question). 우리가 봤던 것처럼 넌센스의 표면이자 이중의 넌센스이고 의미를 그것에 일어나는 무언가이자 다른 것에 내속하는 무언가인(따라서 첫번쨰 계열이 질문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내포하지 않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두 계열들로 분배하는 것은 팔루스이다.
But the whole problem is this: how does the phallus, as the object = x, that is, as the agent of castration, cause the series to resonate? 그러나 모든 문제는 이것이다: 팔루스는 대상 x로서, 즉 거세의 대리자로서 계열들이 공명할 수 있도록 유발하는가? It is no longer a question of a convergence and a continuity at all, as it was when we were considering the pregenital serie for themselves, insofar as the still intact phallus was coordinating them around the genital zone. 우리가 전생식기적 계열들을 그 자체로 간주하더라도 거기에서도 온전한 팔루스는 그들을 생식기적 지대 주위로 연합시키기 때문에, 그것은 더이상 수렴과 지속의 문제가 아니다. Now, the pregenital forms one series, with a pre-comprehension of infantile parental images; and the oedipal forms another series, with other and otherwise formed parental images. 이제 전생식기적인 것은 유아기 부모의 이미지들을 미리 포괄함으로써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 그리고 오이디푸스적인 것은 타자와 그렇지 않으면 형성된 부모의 이미지들로 또 다른 계열을 형성한다. The two series are discontinuous and divergent. 이 두 계열들은 불연속적이고 분기/발산적이다. The phallus no longer ensures a role of resonance for series which diverge, but on the contrary, being excess and lack, it ensures a role of resonance for series which diverge. 팔루스는 더이상 분기/발산하는 계열들에 대해 공명의 역할을 보증할 수 없다, 그러나 반대로 과잉이면서 결핍이기에 그것은 발산/분기하는 계열들의 공명의 역할을 보증한다. For, however much the two series may resemble one another, they do not resonate by their resemblance, but rather by their difference. 두 계열은 서로 상당히 닮았지만 그들은 유사성보다는 차이에 의해 공명한다. This difference is regulated each time by the relative displacement of terms, and this displacement is itself regulated by the absolute displacement of the object = x in the two series. 이 차이는 매번 항들의 상대적인 이동에 따라 조절되며 이 이동 자체도 대상의 절대적인 이동에 따라 조절된다. At least in its beginning, the phantasm is nothing else but the internal resonance of two independent sexual series, insofar as this resonance prepares the emergence of the event and signals its comprehension. 적어도 그것의 시작에서 환영은 두 독립적인 성적 계열들의 내적 공명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공명이 사건의 출현을 준비하고 그것의 이해/포괄을 표시하는 한에서 말이다. This is why, in its third species, the serial form is presented in a form irreducible to the previous ones, that is, as a disjunctive synthesis of the heterogeneous series, since these heterogeneous series now diverge. 이는 왜 이 세번째 종에서의 계열적 형상이 이전으로 환원될 수 없는 형상을 나타내는지 보여준다, 즉 이는 이질적 계열들의 단절/선언적 종합이고 이들은 이제 분기/발산한다. This is also a positive and affirmative use (no longer negative and limitative) of the disjunction, since the divergent series resonate as such; it is a continuous ramification of these series, relatve to the object = x which does not cease to be displaced and to traverse them. 발산/분기하는 계열들이 그러한 방식으로 공명하기 때문에 이는 단절/선언의 긍정적인 사용(더이상 부정적이거나 제한적이지 않은)이며, 그것은 이동되거나 그들을 횡단하기를 멈추지 않는 대상=x와 관계하는 이 계열들의 지속적인 확산이다. If we consider all three serial kinds -the connective synthesis on a single series, the conjunctive synthesis of convergence, and the disjunctive synthesis of resonance, we see that the third proves to be the truth and the destination of the others, to the degree that the disjunction attains its positive and affirmative use. 우리가 이 세 계열들 모두를 고려한다면 -하나의 계열에서의 연결적인 종합, 수렴에서의 결절적인 종함, 그리고 공명의 단절/선언적인 종합- 우리는 단절/선언이 그것의 긍정적인 사용을 달성하는 한에서 세번째가 진실이자 타자들의 목적지임을 증명하는 것을 보게 된다. The conjunction of the zones makes visible therefore the divergence already present in the series which it coordinated globally, and the connection of a zone makes visible the wealth of details already contained in the series which it apparently homogenizes. 따라서 지대들의 결합은 전 세계적으로 연합된 계열에 이미 존재하는 발산/분기를 가시화하고 지대들의 연결은 동질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계열들에 이미 담겨있는 풍부한 세부들을 가시화시킨다.
The theory of a sexual origin of language (Sperber) is well known. 언어의 성적 원천에 대한 이론은 잘 알려져 있다. But more precisely, we must consider the sexual position as intermediary, insofar as it produces under its different aspects (erogenous zones, phallic stage, castration complex) different types series. 그러나 더 엄밀하게, 우리는 성적 위치가 다른 양상들(성적인 지대, 팔루스적 단계, 거세 컴플렉스) 하에서 다른 유형들의 계열들을 생성함에 따라 그것을 중재적인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What is its incidence, or what is their incidence in the dynamic genesis and the evolution of sounds? 소리들의 진화와 역동적인 탄생에서 그것의 발생률, 혹은 그들의 발생률는 무엇인가? Further, is it not the case that the serial organization presupposes a certain state of language? 더 나아가, 계열적인 조직이 언어의 특정 상태를 예시하는 것은 아닌가? We have seen that the first step of the genesis, from the schizoid to the depressive position, went from noises to the voice: from noises as qualities, actions, and passions of bodies in depth, to the voice as an entity of the heights, withdrawn into heights, expressing itself in the name of that which preexists, or rather posing itself as preexisting. 우리는 분열증에서 우울증적 위치로 가는, 소음들에서 목소리로 가는 발생의 첫번째 단계를 보았다: 질들, 그리고 심층적 신체들의 능동과 수동으로서의 소리들로부터 높이들로 후퇴하는, 높이들의 실체로서의 목소리는 전존재적인 것들의 이름아래서 자신을 표현하고 혹은 그보다 자신을 전존재적인 것으로 위치시킨다. The child, of course, comes to a language that she cannot yet understand as language, but only as a voice, or as a familial hum of voices which already speaks of her. 아이는 물론 자신이 언어로서 이해하지 못한채로 언어로 도달하는데 오직 목소리로만, 혹은 이미 자신의 것인 친숙한 목소리들의 흥얼거림으로만 그러하다. This factor is of considerable importance for the evaluation of the following fact: that, in the series of sexuality, something begins by being grasped as a premonition before being understood. 이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의 평가에 대한 괄목할 만한 중요성이다: 성의 계열에서 무언가는 이해되기 이전에 예감으로 포착되면서 시작한다. This pre-understanding relates to what is already there. We ask, therefore, about that which, in language, corresponds to the second stage of the dynamic genesis, about that which founds the different aspects of the sexual position -and which is also founded by them. 이 전-이해는 이미 그곳에 있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그러므로 언어에서 역동적인 발생의 두번째 단계에 상응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적 위치의 다른 양상들을 발견하는 것은 무엇인지(그리고 마찬가지로 그들에 의해 발견되는) 물어본다. Although Lacan's work has a much more extensive import, and has completely renewed the general problem of the relations between sexuality and language, it also includes suggestions which are applicavle to the complexity of this second stage -indications pursued and developed in an original manner by certain of his disciples. 라캉의 작업이 훨씬 넓은 폭을 가지고 성과 언어 사이의 일반적인 문제를 완전히 갱신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또한 이 두번째 단계의 복잡성에 대해 적용할 수 있는 제안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의 특정 제자들이 독창적인 방식으로 추구하고 발전시켰던 암시들과 같이. If the child comes to preexisting language which she cannot yet understand, perhaps conversely; she grasps that which we no longer know how to grasp in our own language, namely, the phonemic relations, the differential relations of phonemes. 만약 아이가 자신이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선존재하는 언어에 도달했을 때, 아마도 반대로; 그녀는 이를테면, 음소적 관계들, 음소들의 미분적 관계들과 같이 우리가 우리의 고유한 언어로 더이상 포착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한다. The child's extreme sesitivity to phonemic distninctions of the mother tongue and her indifference to sometimes more pronounced variations belonging to another system have often been noted. 모국어의 음소적 구분에 대한 아이의 첨예한 감각과 다른 체계에 속해있는 때때로 더 뚜렷한 구분들에 대한 그녀의 무관심은 자주 언급되어 왔다. This is, indeed, what the child extricates from the voice upon leaving the depressive position: an apprenticeship of formative elements before any understanding of formed linguistic units. 이는 실제로 아이가 우울증적 위치에서 떠날 때 목소리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모든 형태적 언어 단위들에 대한 이해 이전의 형태적인 요소들의 수습기간. In the continuous flow of the voice which comes from above, the child cuts out elements of different orders, free to give them a function which is still prelinguistic in relation to the whole and to the different aspects of the sexual position. 위로부터 오는 목소리의 연속적인 흐름에서 아이는 다른 질서의 요소들을 잘라내어 전체와 성적 위치의 다른 양상들과 관련하여 여전히 전언어적 기능을 자유롭게 부여한다.
Although the three elements may playfully circulate, it is tempting to make each one correspond to an aspect of the sexual position, as if the wheel were to stop three times in different fashions. 세 가지 요소가 놀이처럼 순환할 수 있지만, 마치 바퀴가 다른 방식으로 세 번 멈추는 것처럼 각 요소가 성적 위치의 한 양상에 상응하도록 만들고 싶은 유혹이 있다. But to what extent can we link phonemes to the erogenous zones, morphemes to the phallic stage, and semantemes to the evolution of Oedipus and the castration complex? 그러나 우리는 어떤 범위에서 음소들을 성적 지대들에, 형태소들을 팔루스적 단계에, 의미소들을 오이디푸스의 진화와 거세 컴플렉스에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인가? As to the first point, Serge Leclaire's recent book, Psychoanalyser, proposes an extremely interesting thesis: an erogenous zone(that is, a libidinal movement of the body insofar as it happens at the surface, distinguishing itself from drives of conservation and destruction) would be marked essentially by a "letter" which, at the same time, would trace its limit and subsume under it images or objects of satisfaction. 첫번째 지점에서 세르주 르클레어의 최근 저서인 '정신분석학자'는 매우 흥미로운 논지를 제안한다: 성적인 지대(즉, 파괴적, 보존적 충동과 구분되고 표면에서 일어나는 한에서의 신체의 리비도적 움직임)는 "문자"에 의해 본질적으로 표식될 것인데 이는 동시에 그것을 만족의 이미지나 대상들 아래에서 소비할 것이고 그것의 한계를 쫓을 것이다. "Letter" at this point assumes no mastery of language and still less a possession of writing. "문자"는 이 지점에서 언어의 전문성을 간주하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쓰기의 소유이지도 않다. It is rather a question of a phonemic difference in relation to the difference of intensity which characterizes the erogenous zone. 그것은 그보다 성적 지대를 특징화하는 강도적 차이들과 관련된 음소적 차이의 질문이다. The precise example invoked by Leclaire, however, that of the letter V in the case of the Wolf Man, does not seem to go in this direction: in fact, the letter V in this example marks rather a very general movement of openness, common to several zones(to open one's eyes, one's ears, one's mouth), and connotes several dramatic scenes rather than objects of satisfaction. 그러나 르클레어에 의해 제기된 더 구체적인 예에 따르면, 늑대 인간의 경우에 문자 V는 이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실 이 사례의 문자 V는 그보다는 몇몇 지대들에 공통적인 개방성의 매우 일반적인 움직임을 표식한다.(귀를 열고, 눈을 뜨고, 입을 여는 것), 그리고 만족의 대상들이기보다 몇몇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함축한다. Should we rather think, to the extent that the phoneme itself is a cluster of distinctive traits or differential relations, that each zone would rather be analogous to one of these traits and determined by them in relation to another zone? 오히려 우리는 음소 자체가 구분가능한 특성들, 혹은 미분적 관계들의 군집인 범위에서 각각의 지대는 이 특성들 중 하나에 유비적이고 다른 지대들과 관련해서 이들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해야 할까? In this case, there would be reason for a new heraling of the body founded on phonology; the oral zone would necessarily enjoy an essential privilege, insofar as the child would make an active apprenticeship of phonemes at the same time that she would extract them from the voice. 이 경우에 음운론에 기반한 신체의 새로운 예고를 위한 근거가 있을 것이다; 구강적 지대는 아이가 음소의 능동적인 수습기간을 거치는 동시에 그들을 목소리로부터 추출하면서 필연적으로 본질적인 특권을 누릴 것이다.
The fact is now that the oral zone would pursue its liberation and its progress in the acquisition of language only to the extent that a global integraton of zones could be produced, or even an alignment of clusters and an entry of phonemes into more complex elements -what linguistics sometimes call a "concentration of successive entities." 사실은 이제 구강적 지대는 오직 지대들의 글로벌한 연합이 생성되거나 혹은 심지어 군집들의 정렬과 음소들의 진입이 더 복잡한 요인들로 생성되는(언어학자들이 종종 말하는 "연속적인 실체들의 집중") 한에서의 이 언어의 습득을 통해서 자신의 해방과 진전을 추구할 것이다. Here we encounter the second point, and with it the problem of the phallic coordination as the second aspect of the sexual position. 우리는 여기서 두번째 지점을 마주하는데 성적 위치의 두번째 양상으로서의 팔루스적 조직의 문제와 함께 말이다. It is in this sense that Leclaire defines the surface of the entire body as an aggregate or sequence of letters, while the image of the phallus assures their convergence and continuity. 이런 의미에서 르클레어는 신체 전체의 표면을 문자들의 연쇄 혹은 합계로 규정한다. 팔루스의 이미지는 그들의 수렴과 지속을 보장하고 말이다. We thus find ourselves inside a new domain.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새로운 영역 안에서 찾게 된다. It is no longer at all a question of a simple addition of the preceding phonemes, but rather of the construction of the first esoteric words, which integrate phonemes into a conjunctive synthesis of heterogeneous, convergent, and continuous series -thus, in an example analyxed by Leclaire, the secret name "Poord'jeli," that a child creates. 그것은 더이상 앞선 음소들의 단순한 추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음소들을 이질적이고, 수렴하고, 지속적인 계열의 접속적인 종합으로 음소들을 연합하는 첫 은어의 구축이다(따라서 르클레어에 의해 분석된 바, 아이가 창조한 "Poord'jeli"라는 이름의 비밀). It seems to us at this level that the esoteric word in its entirety plays not the role of a phoneme or of an element of articulation but that of a morpheme or of an element of grammatical construction represented by the conjunctive character. 이 층위에서 은어의 총체성은 우리에게 음소나 절속의 요소로서의 역할이 아닌 형태소나 접속사적 문자로 표상되는 문법적 구축의 요소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It refers to the phallus as an agent of coordination. 그것은 조직의 대리물로서 팔루스로 회부된다. Only afterward, such an esoteric word takes on another value, or another function: as the conjunction forms an entire series, this series enters into a relation of resonance with another divergent and independent series -"joli corps de Lili"(Lili's beautiful body). 오직 이 이후에만 은어들은 다른 가치나 기능을 가진: 접속사가 모든 계열을 형성하고 이 계열이 또다른 발산/분기적이고 독립적인 계열들과의 공명의 관계에 진입함으로서 말이다. -"릴리의 아름다운 몸". The new series corresponds to the third aspect of the sexual position,, that is, to the development of Oedipus, the castration complex and the concomitant transformation of the phallus which has now become object = x. 새로운 계열은 오이디푸스의 전개에서 거세 컴플렉스와 이에 수반되는 팔루스의 대상=x로의 전환이라는 성적 위치의 세번째 양상에 상응한다. Then, and only then, the esoteric word becomes a portman-teau word insofar as it enacts a disjunctive synthesis of the two series (the pregenital and the oedipal, that of the proper name of the subject and that of Lili), causes two divergent series to resonate as such and ramifies them. 오직 이를 통해 은어는 그것이 두 계열(주체와 릴리에 적절한 이름인 전생식기적인 것과 오이디푸스적인 것)의 단절/선언적인 종합을 개시하고, 두 발산/분기하는 계열들을 공명시키고 그들을 분기시키는 한에서 혼성어가 된다. The entire esoteric word, in line with Lacan's thesis, plays now the role of a semnateme. 모든 은어는 라캉의 논지를 따라 이제 의미소의 역할을 한다.
In the transition from schizoid position of depth to the depressive position of the height, we went from noises to the voices. 심층의 분열증적 위치에서 높이의 우울증적 위치로 전환할 때 우리는 소음들에서 목소리들로 나아갔다. But in the surface sexual position, we go from voice to speech. 그러나 성적 위치의 표면에서 우리는 목소리에서 말하기로 나아갔다. The organization of the physical sexual surface has three moments which produce three types of syntheses or series: the erogenous zones and connective syntheses bearing on a homogeneous series; the phallic coordination of zones and the conjunctive synthesis bearing on hetero geneous, yet convergent and continuous series; and the evolution of Oedipus, the transformation of the phallic line into the trace of castration, and the disjunctive synthesis, bearing on divergent and resonating series. 물리적이고 성적인 표면의 조직은 세 유형의 종합이나 계열들을 생산하는 세 가지 순간들을 가지는데: 동질적인 계열과 관련하는 성적인 지대들과 연결적인 종합; 이질적인, 그러나 여전히 수렴적이고 지속적인 계열과 관련하는 지대들의 팔루스적 조직과 결절적 종합; 그리고 오이디푸스의 진화, 즉 발산/분기하고 공명하는 계열과 관련하는 팔루스적 선의 거세의 자취로의 전환과 단절/선언적인 종합. Now, these series or moments condition the three formative elements of language -phonemes, morphemes, and semantemes -as much as they are conditioned by them in a circular reaction. 이제 이 계열들, 혹은 순간들은 언어의 세가지 형상적인 요소를 조건짓는다 -음소, 형태소, 의미소 -그들이 순환적인 반응 안에서 그들에 의해 조건지어지는 만큼. Nevertheless, there is still no language; we are still in a prelinguistic domain.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언어는 없다; 우리는 아직 전언어적 영역에 있다. These elements are not organized into formed linguistic units which would be able to denote things, manifest persons, and signify concepts. 이 요소들은 사물들을 지시하고 사람들을 현시하고 개념들을 기호화할 수 있는 형태적인 언어적 단위들로 조직되지 않았다. This is why these elements have not yet a reference other than a sexual one, as if the child was learning to speak on his own body -with phonemes referring to the erogenous zones, morphemes to the phallus of coordination, and semantemes to the phallus of castration. 이는 아이가 자신의 고유한 몸에 대해 말하기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왜 이 요소들이 여전히 성적인 것 외의 참조 대상이 아닌지에 대한 이유이다 -음소들은 성적인 지대들로 회부되고, 형태소들은 팔루스적 조직으로 회부되고, 의미소는 거세의 팔루스로 회부되면서. This reference must not be interpreted as a denotation(phonemes do not "denote" erogenous zones), as a manifestation, nor even as a signification. 이 참조 대상은 지시(음소들은 성적인 지대들을 "지시"하지 않는다), 현시, 심지어는 기호작용으로도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It is rather a question of a "conditioning-conditioned" structure, of a surface effect, under its double sonorous and sexual aspect or, if one prefers, under the aspects of resonance and mirror. 그것은 오히려 이중의 음향적이고 성적인 양상, 혹은 누군가 이것이 더 편하다면, 공명과 거울의 양상들 아래에서 "조건짓고-조건화되는" 구조와 표면 효과에 대한 질문이다. At this level, speech begins: it begins when the formative elements of language are extracted at the surface, from the current of voice which comes from above. 이 층위에서 말하기를 시작한다: 그것은 언어의 형상적인 요소들이 표면에서 위로부터 오는 목소리의 흐름으로부터 추출될 때 시작한다. This is the paradox of speech. 이것은 말하기의 역설이다. On one hand, it refers to language as to something withdrawn which preexists in the voice from above; on the other hand, it refers to language as to something which must result, but which shall come to pass only with formed units. 한편으로 그것은 위로부터의 목소리에 선재하는 후퇴한 무언가로서의 언어에 회부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반드시 결과가 발생해야 하는 무언가이지만 형성된 단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언어에 회부된다. Speech is never equal to language. 말하기는 절대로 언어와 등치될 수 없다. It still awaits the result, that is the event which will make the formation effective. 그것은 여전히 형식을 효과적으로 만들 사건으로서의 결과를 기다린다. It masters the formative elements but without purpose, and the history which it relates, the sexual history, is nothing other than itself, or its own double. 그것은 형태적인 요소들을 무목적적으로 숙달하고 그것이 연관된 역사, 즉 성적인 역사는 그것 자체와 다름이 아니며, 혹은 그것의 이중체이다. We are not yet therefore in the realm of sense.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의미의 영토에 들어가 있지 않다. The noise of the depths was an infra-sens, an under-sense, Untersinn; the voice from the heights was a pre-sense. 심층의 소음은 아래-의미였다; 높이로부터의 목소리는 전-의미이다. One could now come believe, with the organization of the surface, that nonsense has reached that point at which it becomes sense, or takes on sense: is not precisely the phallus as object = x, this surface nonsense which distributes sense to the series which it traverses, ramifies, and makes them resonate, determining one as signifying and the other as signified? 이제 누군가는 믿게된다, 표면의 조직과 함께 넌센스는 의미(센스)가 되는, 혹은 의미를 떠맡는 지점에 다다른다: 그것은 엄밀하게 대상=x로서의 팔루스가 아니며, 의미를 그것이 횡단하고 분기하고 공명시키게끔 분배하는 이 넌센스 표면은 누군가를 의미하는 것과 다른 것을 의미되는 것으로 규정하는가? In us, though, the advice and the rule of method resound: do not hasten to eliminate nonsense and to give it a sense.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방법의 제안과 규칙이 울려퍼진다: 넌센스를 제거하고 그것에 의미(센스)를 주는 것을 서두르지 마라. Nonsense would keep its secret of the real manner by which it creates sense. 넌센스는 자신의 실재적인 방식의 비밀을 의미를 생산함으로서 지킬 것이다. The organizaition of the physical surface is not yet sens; it is, or rather will be, a co-sense. 물리적 표면의 조직은 여전히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그보다 공-의미가 될 것이다. That is to say, when sense is produced over another surface, there will also be this sense. 말하자면, 의미가 또 다른 표면 위에서 생성될 때, 그곳에도 이 의미가 있을 것이다. Sexuality, according to the Freudian dualism, is that which also is -everywhere and always. 프로이트적 이원론에 따르면 성은 또한 어디에나, 그리고 언제나 있는 것이다. There is nothing the sense of which is not also sexual, in accordance with the law of the double surface. 이중 표면의 법칙에 따른다면 성적이지 않은 의미 또한 없다. But it is still necessary to await this result which never ends, this other surface, for sexuality to be made the concomitant, and the co-sense of sense, so that one might say "everywhere," "for all times," and "eternal truth." 그러나 성이 수반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이 끝이 없는 결과와 다른 표면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필요하고 "모든 곳," "모든 시간에서," 그리고 "영원한 진리"를 위해서는 의미의 공-의미가 필요하다.
Thirty-Third Series of Alice's Adventures 계열 33 - 앨리스의 모험
The three types of esoteric words that we encountered in Lewis Carroll's works correspond to the three kinds of series: the "unpronounceable monosyllable" brings about the connective synthesis of a series; "phlizz" or "snark" guarantees the convergence of two series and brings about the conjunctive series; and finally, the portmanteau word, the "Jabberwock," the word = x whose presence we discover already at work in the two others, brings about the disjunctive synthesis of divergent series, as it makes them resonate and ramify. 루이스 캐롤의 작품들에서 우리가 마주했던 은어들의 세 가지 유형은 세 가지 종류의 계열들에 상응한다: "발음하기 힘든 단음절어"는 계열의 연결적 종합을 구성한다; "phlizz" 혹은 "스나크"는 두 계열들의 수렴을 보장하고 접속하는 계열을 유발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버워크", 단어 = x와 같이 혼성어는 우리가 다른 두 작업들에서 그 존재를 이미 발견한 것 처럼 그들을 공명하고 분기시키는 발산/분기하는 계열의 분절적인 종합을 유발한다. But how many adventures can we find under this organization? 그러나 얼마나 많은 모험들을 우리는 이 이 조직 아래에서 찾을 수 있을까?
Alice has three parts, which are marked by changes of location. 앨리스는 3개의 부분들을 가지는데 장소의 변화에 따라 표식된다. The first part (chapters 1-3), starting with Alice's interminable fall, is completely immersed in the schizoid element of depth. 앨리스의 끝없는 추락과 함께 시작하는 첫번쨰 부분은 심층의 분열증적 요소에 완전히 동화된다. Everything is food, excrement, simulacrum, partial internal object, and poisnous mixture. 모든 것은 음식이며 배설물이고 모조품이며, 부분적, 내적 대상이고 유독한 혼합체이다. Alice herself is one of these objects when she is little; when large, she is identified with their receptacle. 앨리스는 작아졌을 때, 이 대상들 중 하나이고 커졌을 때, 그들을 담는 통과 동일시된다. The oral, anal, and urethal character of this part has often been stressed. 이 부분의 구강적이고 항문적이며 요도적인 특징은 자주 강조되어왔다. But the second part (chapters 4-7) seems to display a change of orientation. 그러나 두번째 부분은 방향의 전환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To be sure, there is still, and with renewed force, the theme of the house filled by Alice, her preventing the rabbit from entering and her expelling violently the lizard from it (the schizoid sequence child-penis-excrement). 확실하게 하기 위해, 그곳에는 여전히, 새로운 힘과 함꼐 앨리스로 가득 찬 집의 주제는 토끼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도마뱀을 그곳에서 거칠게 추방한다(아이-음경-배설의 분열증적 연쇄). But we notice considerable modifications. 그러나 우리는 괄목할만한 변경을 알아차린다. First, it is in being too large that Alice now plays the role of the internal object. 먼저, 앨리스는 너무 커졌기 때문에 이제 내적 대상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Moreover, to grow and to shrink no longer occur only in relation to a third term of depth (the key to be reached or the door to pass through in the first part), but rather act of their own accord in a free style, one in relation to the other -that is, they act on high. 더 나아가 자라는 것과 줄어드는 것은 더이상 심층의 세번째 항(첫번째 파트에서 열쇠에 닿기 위해, 혹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과의 관계만에서 일어나지 않고 그들의 고유한 합의에 따라 자유로운 형식으로 작동하는데, 다른 것들과 관계하고 이에 따라 그들은 높이에서 작동한다. Carroll has taken pains to indicate that there has been a change, since now it is drinking which brings about growth and eating which causes one to shrink (the reverse was the case in the first part). 이제 성장을 유발하는 것은 마시는 것이 되었고 먹는 것은 줄어드는 것을 유발하기에(반대는 첫번째 파트다) 캐롤은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했다. In particular, causing to grow and causing to shrink are linked to a single object, namely, the mushroom which founds the alternative on its own circularity (chapter 5). 특히, 성장과 수축을 유발하는 것은 하나의 대상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름하여 버섯은 자신의 고유한 순환에서 이러한 변이를 발견했다. (챕터 5) Obviously, this impression would be confirmed only if the ambiguous mushroom gives way to a good object, presented explicitly as an object of the heights. 분명하게, 이 인상은 모호한 버섯이 좋은 대상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높이의 대상으로 나타나게끔 했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The caterpillar, though he sits on top of te mushroom, is insufficient in this regard. 이 관점에서 애벌레는 버섯 위에 앉아있다고 해도 충분하지 않다. It is rather the Cheshire Cat who plays this role: he is the good object, the good penis, the idol or voice of the heights. 그보다는 체셔캣이 이러한 역할을 한다: 그는 좋은 대상, 좋은 음경, 우상 혹은 높이의 목소리이다. He incarnates the disjunctions of this new position: unharmed or wounded, since he sometimes presents his entire body, sometimes only his cut off head; present or absent, since he disappears, leaving only his smile, or forms itself from the smile of the good object (provisional complacency with respect to the liberation of sexual drives). 그는 이 새로운 위치의 단절/선언을 구현한다: 그가 때때로 자신의 모든 몸을 보여주고, 때때로 잘려진 머리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상처받지 않거나 상처받은; 그가 사라지고 자신의 단지 자신의 미소만을 남기기에, 혹은 자신을 좋은 대상의 미소로서 형성하기에 현재 혹은 부재로(성적 충동의 해방의 관점에서 잠정적인 안주). In his essence, the cat is he who withdraws and diverts himself. 그의 본질에서 고양이는 자신으로 후퇴하고 우회하는 자이다. The new alternative or disjunction which he imposes on Alice, in conformity with this essence, appears twice: first, a question of being a baby or a pig, as in the Duchess' kitchen; and then as the sleeping Dormouse seated between the Hare and the Hatter, that is, between an animal who lives in burrows and an artisan who deals with the head, a matter of either taking the side of internal objects or of identifying with the good objects of heights. 그가 앨리스에게 부과하는 새로운 변이 혹은 단절/선언은 이 본질에 순응하면서 두 번 나타난다: 먼저, 공작부인의 주방에서 아이가 될 것인가 혹은 돼지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 그리고 굴과 도자기 속에서 살고 자신의 머리를 내적 대상들의 물질로 혹은 높이의 좋은 대상과 동일시하는 토끼와 모자장수 사이에 앉은 잠든 도마우스. In short, it is a question of choosing between depth and height. 짧게, 그것은 심층과 높이 사이에서의 선택에 대한 질문이다. In the third part (chapters 8-12), there is again a change of element. 3번째 파트에서 다시 요소의 변화가 있다. Having found again briefly the first location, Alice enters a garden which is inhabited by playing cards without thickness and by flat figures. 첫 장소에서 짧게 발견된 것처럼, 앨리스는 두께없이 평평한 형상들인 플레잉 카드들에 의해 점유된 정원에 들어선다. It is as if Alice, having sufficiently identified herself with the Cheshire Cat, whom she declares to be her friend, sees the old depth spread out in front of her, and the animals which occupied it becomes slaves or inoffensive instruments. 자신을 그녀의 친구로 선언한 체셔캣과 그녀 스스로를 충분히 동일시한 앨리스는 자신 앞에 펼쳐진 낡은 심층들을 보고 그것들을 점유한 짐승들은 노예들이나 공격적이지 않은 도구들이 된다. It is on this surface that she distributes her images of the father -the image of the father in the course of a trial: "They told me you had been to her,/And mentioned me to him. ..." 그녀가 자신의 아버지의 이미지들을 분배하는 것은 이 표면 위에서이다 -재판 중의 아버지의 이미지: "그들은 내게 너가 그녀였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에 대해 그에게 말했다. ..." But Alice has a foreboding of the dangers of this new element: the manner in which good intentions run the risk of producing abonimable results, and the phallus, represented by the Queen, risks turning into castration( " 'Off with her head!' the Queen shouted at the top of her voice"). 그러나 앨리스는 이 새로운 요소의 위험을 예감했다: 좋은 의도들이 끔찍한 결과들을 생성할 위험을 지니고 있고, 여왕으로 표상되는 팔루스는 거세로 전환될 위험을 가지고 있다(" '목을 쳐라!' 여왕은 그녀의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The surface is burst, "...the whole pack rose up into the air, and came flying down upon her. ..." 표면은 터진다, "...전체 무리는 대기중으로 증발했고 그녀 위로 다시 내려왔다. ..."
One could say that Through The Looking-Glass takes up this same story, this same undertaking, but that things here have been displaced or shifted, the first moment being suppressed and the third greatly developed. <거울을 통해서>가 이와 같은 이야기라고 누군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동일한 일에서의 사물들은 이동되거나 옮겨진다, 처음의 순간은 억제되고 세번째가 크게 발전된다. Instead of the Cheshire Cat being the good voice for Alice, it is Alice who is the good voice for her own, real cats -a scolding voice, loving and withdrawn. 체셔캣이 앨리스에게 좋은 목소리가 되는 것 대신에 앨리스 스스로가 자신의 진짜 고양이에게 좋은 목소리가 된다 -꾸짖는 목소리, 사랑스럽고 내성적인. Alice, from her height, apprehends the mirror as a pure surface, a continuity of the outside and the inside, of above and below, of reverse and right sides, where "Jabberwocky" spreads itself out in both directions at once. 앨리스는 자신의 높이에서 순수 사건으로서의 거울을, 바깥과 안쪽의, 위와 아래의, 뒤집어지고 똑바로 된 쪽들의 지속성을 파악한다. "재버워키"가 자신을 양 방향으로 동시에 펼치는 곳에서 말이다. After having behaved briefly once again as the good object or the withdrawn voice vis-a-vis the chess pieces(with all the terrifying attributes of this object or this voice), Alice herself enters the game: she belongs to the surface of the chessboard, which has replaced the mirror, and takes up the task of becoming queen. 좋은 대상, 혹은 체스 조각들과 관련된 후퇴하는 목소리로서(이 대상 혹은 목소리의 모든 끔찍한 속성들과 함께) 한번 더 짧게 행동한 뒤에, 앨리스는 자신이 스스로 게임에 참여한다: 그녀는 거울을 대체한 체스판의 표면에 속한다, 그리고 여왕이 되는 일에 착수한다. The squares of the chessboard which must be crossed clearly represent erogenous zones, and becoming-queen refers to the phallus as the agency of coordination. 가로질러져야 하는 체스판의 사각형들 명백하게 성적인 지대들을 표상하고 여왕이 되는 것은 연합의 대리물로서의 팔루스를 나타낸다. It soon appears that the corresponding problem is no longer that of the unique and withdrawn voice, and that it has rather become the problem of murtiple discourses: what must one pay, how much must one pay in order to be able to speak? 그것은 곧바로 상응하는 문제들이 더이상 독특하고 후퇴하는 목소리들이 아니라 복수의 담론들에 대한 문제라는 것을 나타낸다: 무엇을 지불해야 하며,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지불해야 하는가? This question appears in almost every chapter, with the word sometimes referring to a single series (as in the case of the proper name so contracted that it is no longer remembered); sometimes to two convergent series (as in the case of Tweedledum and Tweedledee, so much convergent and continuous as to be indistinguishable); and sometimes to divergent and ramified series (as in the case of Humpty Dumpty, the master of semantemes and pay master of words, making them ramify and resonate to such a degree as to be incomprehensible, so that their reverse and right sides are no longer distinguishable). 이 질문은 거의 모든 챕터에서 등장한다, 때에 따라 하나의 계열에(적절한 이름이 추출되었기 때문에 더이상 기억될 필요가 없는 경우); 두 개의 수렴하는 계열들에(트위들디와 트위들덤과 같이 너무 수렴적이고 지속적이어서 구별할 수가 없는 경우); 발산하고 분기하는 계열들에(험프티 덤프티와 같이 의미소들과 단어들을 내는 것에 통달해서 그들을 포괄할 수 없을 만큼 분기시키고 공명하게 하여 그들의 뒤집어지고 똑바른 면들이 더이상 구분할 수 없는 경우) 상응하는 단어처럼 말이다. But in this simultaneous organization of words and surfaces, the danger already indicated in Alice is specified and developed. 그러나 이 동시적인 단어들과 표면들의 조직에서, 위험은 이미 앨리스가 구체화하고 전개한 것을 지시하고 있다. Again, Alice has distributed her parental images on the surface: the White Queen, the plaintive and wounded mother; the Red king, the withdrawn father, asleep from the fourth chapter onward. 다시 한번 앨리스는 부모의 이미지들을 표면 위에 분배한다: 백색 여왕, 애처롭고 상처받은 어머니; 붉은 왕, 후퇴한 아버지는 네번째 챕터의 전개에서 잠재하고 있다. But traversing all depth and height, it is the Red Queen who arrives -the phallus become the agent of castration. 그러나 모든 깊이와 높이를 횡단하는 붉은 여왕이 도래한다 -팔루스는 거세의 대리자가 된다. It is the final debacle again, this time finished off voluntarily by Alice herself. 그것은 다시 마지막 대실패인데, 이번에는 앨리스 스스로에 의해 자발적으로 끝맺어진다. Something is going to happen, she declares. 그녀는 무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선언한다. But what? 그러나 무엇이? Would it be a regression to the oral-anal depths, to the point that everything would begin anew, or rather the liberation of another glorious and neutralized surface? 그것은 모든 것이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지점인 구강-항문적 심층으로의 후퇴가 될 것인가 아니면 또다른 찬란하고 중립적인 표면의 해방이 될 것인가?
The psychoanalytic diagnosis oftne formulated with respect to Lewis Carroll notes the following: the impossibility of confronting the Oedipal situation; flight before the father and renunciation of the mother; projection onto the little girl, identified with the phallus but also deprived of a penis; and the oral-anal regression which follows. 루이스 캐럴에 대한 정신 분석적 진단은 다음과 같이 공식화되었다: 오이디푸스적 상황을 마주하는 것의 불가능성; 아버지 이전의 날아다님과 어머니의 포기; 작은 소녀에 대한 투사는 팔루스와 동일시될 뿐만 아니라 음경이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구강적-항문적 후퇴가 뒤따른다. Such diagnosis, however, have very little interest, and it is well known that the encounter between psychoanalysis and the work of art (or the literary-speculative word) cannot be achieved in this manner. 그러나 이와 같은 진단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예술 작품(혹은 문학-사변적 말)과 정신분석학이 이런 방식으로 마주함에 있어서 아무것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데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It is not achieved certainly by treating authors, through their work, as possible or real patients, even if they are accorded the benefit of sublimation; it is not achieved by "psychoanalyzing" the work. 저자들의 작품들을 통해 가능적인 혹은 실제적인 환자들로 만들고 심지어 그들이 승화의 이익을 따랐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으로는 명백하게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것은 작품을 "정신분석"하는 것으로 성취될 수 없다. For authors, if they are great, are more like doctors than patients. 만약 저자들이 위대하다면 그들은 환자들이기보다는 의사들이다. We mean that they are themselves astonishing diagnosticians or symptomatologists. 그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빼어난 진단자 혹은 징후학자라는 이야기이다. There is always a great deal of art involved in the grouping of symptoms, in the organization of a table where a particular symptom is dissociated from another, juxtaposed to a third, and forms the new figure of a disorder or illness. 언제나 징후들을 그룹화하는 것에 훌륭한 역할을 하는 예술이 있다. 조직의 탁자 위에서 특정 징후가 다른 것들로부터 떨어져 나오고 세번째 것으로 병치되며 새로운 형상의 무질서와 질병을 형성한다. Clinicians who are able to renew a symptomatological table produdce a work of art; conversely, artists are clinicians, not with respect to their own case, nor even with respect to a case in general; rather, they are clinicians of civilization. 징후학적인 탁자를 갱신할 수 있는 임상의사들은 작품을 생성한다; 반대로, 예술가들은 임상의학자들이며 그들의 고유한 경우, 혹은 일반적인 경우로서가 아니라 문명에 대한 임상의학자들이다. In this regard, we cannot follow those who think that Sade has nothing essential to say on sadism, nor Masoch on masochism. 이 관점에서 우리는 사디즘을 사드에 마조히즘을 마조흐에 견주어 말할 때 아무런 본질도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을 따를 수 없다. It seems, moreover, that an evaluation of symptoms might be achieved only through a novel. 더 나아가 징후들에 대한 평가는 오직 소설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It is not by chance that the neurotic creates a "familial romance," and that the Oedipus complex must be found in the meanderings of it. 신경증이 "통속적인 신파"를 생성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며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그것의 굴곡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From the perspective of Freud's genius, it is not the complex which provides us with information about Oedipus and Hamlet, but rather Oediaus and Hamlet who provide us with information about the complex. 프로이트의 천재적인 관점에서 보면 컴플렉스가 오이디푸스와 햄릿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와 햄릿이 컴플렉스에 대한 정보를 생성한다. It will be objected that the artist is, in fact, not necessary; the patient himself provides the romance and the doctor evalutes it. 사실 예술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반대될 것이다: 그 스스로 로맨스를 만들어내는 환자이며 진단하는 의사인. But this would be to neglect the specificity of the artist both as patient and as doctor of civilization; it would be to neglect the difference between the artist's novel as a work of art and the neurotic's novel. 그러나 이는 문명에 대한 환자이면서 의사인 작가의 구체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예술 작품으로서의 작가들의 소설과 신경증적 소설의 차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The neurotic can only actualize the terms and the story of his novel: the symptoms are this actualization, and the novel has no other meaning. 신경증은 오직 문학의 항들과 이야기 밖에 현실화/효과화하지 못한다: 징후들은 이 현실화/효과화이며 문학은 다른 의미가 아니다. On the contrary, to extract the non-actualizable part of the pure event from symptoms (or, as Blanchot says, to raise the visible to the invisible), to raise everyday actions and passions (like eating, shitting, loving, speaking, or dying) to their noematic attribute and their corresponding pure Event, to go from the physical surface on which symptoms are played out and actualizations decided to the metaphysical surface on which pure event stands and is played out, to go from the cause of the symptoms to the quasi-cause of the oeuvre -this is the object of the novel as a work of art, and what distinguishes it from familial novel. 반대로, 징후들에서 순수 사건의 현실화/효과화 가능하지 않은 부분을 추출하려면 (혹은 블랑쇼가 말했듯이, 가시적인 것을 비가시적인 것으로), 일상적인 능동/행위들과 수동/감정들 (먹기, 싸기, 사랑하기, 말하기, 죽기와 같이)을 그들의 노에마적 속성과 그에 상응하는 순수 사건으로 끌어올려야 하고, 징후들이 발발하는 물리적인 표면으로부터 순수 사건이 머물고 발발하는 형이상학적 표면에서 결정된 현실화/효과화로 나아가며, 징후들의 원인에서 작품의 준-원인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예술 작품으로서 소설의 대상이며 통속적인 소설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In other words, the positive, highly affirmative character of desexualization consists in the replacement of psychic regression by speculative investment. 다른 말로, 탈성애화의 긍정적인, 매우 긍정적인 특징은 정신적인 후퇴를 대체하는 추측적인 투자에 있다. This does not prevent the speculative investment from bearing upon a sexual object -since the investment disengages the event from it and poses the object as concomitant of the corresponding event: what is a little girl? 이것은 성적 대상에 대한 추측적 투자를 막지 않는다. -추측적 투자가 사건을 성적 대상으로부터 분리하고 대상을 그에 상응하는 사건의 수반된 것으로 만든다: 작은 소녀는 무엇인가? An entire oeuvre is needed, not in order to answer this question but in order to evoke and to compose the unique event which makes it into a question. 모든 작품이 필요하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으로 만들어지는 독특한 사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The artist is not only the patient and doctor of civilization, but is also its pervert. 예술가는 문명의 환자나 의사일 뿐 아니라 그것의 도착증자/괴짜/돌연변이/일탈자이기도 하다.
Of this process of desexualization and this leap from one surface to another, we have said almost nothing. 이 탈성애화의 과정과 한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의 도약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말한 것이 없다. Only its power appears in Carroll's work: it appears in the very force with which the basic series (those that esoteric words subsume) are desexualized to the benefit of the alternative to eat/to speak; but also in the force with which the sexual object, the little girl, is maintained. 오직 그것의 힘만이 캐롤의 작업에서 나타났다: 그것은 기초적인 계열(흡입하는 은어들)들이 먹기/말하기의 변수에 의해 탈성애화된 분명한 힘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라는 성적 대상을 지속하는 힘으로도. Indeed, the mystery lies in this leap, in this passage from one surface to another, and in what the first surface becomes, skirted over by the second. 사실 이 도약에, 이 한 표면에서 다른 표면으로 가는 통로에, 그리고 첫번쨰 표면이 두번째에 의해 뒤집어지면서 되는 무언가에 수수께끼가 놓여 있다. From the physical chessboard to the logical diagram, or rather from the sensitive surface to the ultra-sensitive plate -it is in this leap that Carroll, a renowned photographer, experiences a pleasure that we might assume to be perverse, and that he innocently declares (as he says to Amelia in an "uncontrollable excitement": "Miss Amelia, I hope to do myself the honor of coming to you for a negative. ...Amelia, thou are mine!"). 물리적인 체스판에서 논리적인 다이어그램으로, 혹은 감각적 표면에서 초감각적 판으로 -이 도약에서 유명한 사진사이기도 했던 캐롤은 일탈적이라 할 만한 그리고 그가 결백하게 선언하는 쾌락을 경험한다(그가 아멜리아에게 "통제할 수 없는 흥분" 속에서 말하면서: "아멜리아 씨, 저는 당신에게 네거티브로서 도래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고자 합니다... 아멜리아, 당신은 내것입니다!").
Thirty-Fourth Series of Primary Order and Secondary Organization 계열 34 - 일차적 질서와 이차적 조직
If it is true that the phantasm is constructed upon at least two diverging sexual series and that it merges with their resonance, it is nevertheless the case that the two basic series(along with the object = x which traverses them and causes them to resonate) constitute only the extrinsic beginning of the phantasm. Let us call the resonance "intrinsic beginning." 환영이 적어도 두 발산/분기하는 성적 계열들에 따라 구축되고 그들의 공명과 더불어 어우러진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오직 환영의 외적인 시작만을 구축하는 두 기초적인 계열들(그들을 횡단하고 공명토록 유발하는 대상=x와 마찬가지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우리는 이 공명을 "내적 시작"이라고 부르자. The phantasm develops to the extnet that the resonance induces a forced movement that goes beyond and sweeps away the basic series. 환영은 공명이 기초적인 계열들을 날려버리고 더 멀리 나아가는 강제적인 움직임을 유발하는 한에서 전개된다. It has a pendular structure: the basic series traversed by the movement of the object = x, the resonance, and the forced movenment of an amplitude greater than the initial movemnent. 그것은 진자적인 구조를 가진다: 대상=x의 움직임, 즉 공명과 그리고 원래의 움직임보다 더 커진 진폭의 강제된 움직임에 의해 가로질러진 기초적인 계열들. This initial movement is, as we have seen, the movement of Eros, which operates on the intermediary physical surface, the sexual surface, or the liberated area of sexual drives. 이 기초적인 움직임은 우리가 봤던 것처럼 중재하는 물리적 표면, 성적 표면, 혹은 성적 욕망의 해방된 영역 위에서 작동하는 에로스의 움직임이다. But the forced movement which represents desexualization is Thanatos and "compulsion"; it operates between the two extremes of the original depth and the metaphysical surface, the destructive cannibalistic drives of depth and the speculative death instinct. 그러나 탈성애화를 표상하는 강제적 움직임은 타나토스의 강제된 움직임과 "충동"이다; 그것은 원래 심층의 두 극한들과 형이상학적 표면, 그리고 심층의 파괴적이고 식인적인 욕망과 추측가능한 죽음 본능 사이에서 작동한다. We know that the greatest danger associated with this forced movement is the merging of the extremes or, rather, the loss of everything in the bottomless depth, at the price of a generalized debacle of surfaces. 우리는 이 강제적 운동과 연관된 가장 큰 위험이 극단들의 병합, 혹은 표면들의 일반화된 붕괴의 대가로서 바닥없는 심층에서의 모든 것들의 소멸이라는 것을 안다. But conversely, the greatest potentiality of the forced movement lies in the constitution, beyond the physical surface, of a metaphysical surface of great range, on which even the devouring-devoured objects of the depths are projected. 그러나 반대로, 강제된 운동의 가장 큰 잠재성은 그 구성에 놓여 있다, 물리적 표면 너머, 심지어 먹고 먹히는 심층의 대상들이 투사되는 형이상학적 표면의 광대한 범위에 말이다. We can therefore name the entire forced movement "death instinct," and name its full amplitude "metaphyisical surface." 그러므로 우리는 이 전체적인 강제된 운동을 "죽음 본능"이라 칭할 수 있고 그것의 가장 큰 진폭을 "형이상학적 표면"이라 칭한다. At any rate, the forced movement is not established between the basic sexual series, but rather between the two new and infinitely larger series -eating, on the one hand, and thinking, on the other, where the second always risks disappearing into the first, and the first, on the contrary, risks being projected onto the second. 어찌됐든, 강제된 운동은 기초적인 성적 계열들 사이에서 수립되지 않고 두 개의 새롭고 무한하게 큰 계열들 사이에서 수립한다. -한편으로 먹기,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기, 후자는 언제나 전자로 소멸될 위험성을 가지고, 전자는 반대로, 후자에 투사될 위험을 가진다. Thus, the phantasm requires four series and two movements. 따라서 환영은 네 개의 계열들과 두 개의 운동들을 요구한다. The movement of resonance of the two sexual series induces a forced movement which extends beyond the base and the limits of life, plunging into the abyss of bodies. 두 성적 계열들의 공명의 운동은 삶의 기초와 한계 너머로 연장되고 신체들의 심층으로 깊이 파이는 강제된 운동을 유발한다. But it also opens onto a mental surface, giving birth thereby to the two new series between which the entire struggle that we attempted to describe is waged. 그러나 마찬가지로 그것은 신적인 표면 위로 개방되며 우리가 설명하려고 시도한 총체적인 투쟁 사이에서 두 개의 새로운 계열들을 탄생시킨다.
What happens if the mental or metaphysical surface has the upper hand in this pendular movement? In this case, the verb is inscribed on this surface -that is, the glorious event enters a symbolic relation with a state of affairs, rather than merging with it; the shining, noematic attribute, rather than being confused with a quality, sublimates it; the proud Result, rather than being confused with an action or passion, extracts an eternal truth from them. 정신적, 혹은 형이상학적 표면이 이러한 진자 운동의 우위에 있다면 무슨일이 생길까? 이 경우에, 동사는 이 표면에 기입되는데, 즉 찬란한 사건은 사태들과 합쳐지기보다 상징적인 관계에 진입한다; 성질들과 혼동되기보다 그것을 승화시키는 빛나고 노에마적인 속성; 능동 혹은 수동과 혼동되기보다는 자신있는 결과가 그들로부터 영원한 진실을 추출한다. What Carroll calls "Impenetrability," and also "Radiancy," is actualized. 캐롤이 "불관통성", 또는 "방사성"이라 부르는 것이 현실화/효과화된다. This is the verb which, in its univocity, conjugates devouring and thinking: it projects eating on the metaphysical surface and sketches out thinking on it. And because to eat is no longer an action nor to be eaten a passion, but rather the noematic attribute which corresponds to them in the verb, the mouth is somehow liberated for thought, which fills it with all possible word. 이것은 일의성 안에서 흡입하기와 생각하기를 결합하는 동사이다: 그것은 먹기를 형이상학적 표면 위에 투사하고 그것 위에서 생각하기를 도출한다. 그리고 먹다가 더 이상 능동 혹은 먹히다의 수동이 아니고 그들과 상응하는 노에마적 속성이기에 입은 어떻게든 모든 가능한 말들로 그것을 채우는 생각을 위해 해방된다. The verb is, therefore, "to speak"; it means to eat/to think, on the metaphysical surface, and causes the event, as that which can be expressed by language, to happen to consumable things, and sense, as the expression of thought, to insist in language. 동사는 그러므로 "말하다"인데; 그것은 먹다/생각하다 를 형이상학적 표면 위에서 의미하고, 소비 가능한 사물에 작용하기 위해 언어를 통해 표현될 수 있는 사건을 유발하고, 의미가 사유의 표현으로서 언어에 내속할 수 있게끔 작용하기도 한다. Thus, "to think" also means to eat/to speak -to eat as the "result," to speak as "made possible." 따라서, "생각하다"는 먹다/말하다를 의미한다. -"결과"로서의 먹다, "가능하게 만드는"으로서의 말하다. The struggle between the mouth and the brain comes to an end here. We have seen this struggle for the independence of sounds go on, ever since the excremental and alimentary noises which occupied the mouth-anus in depth; we followed it to the disengagement of a voice high above; and finally we traced it to the primary formation of surfaces and words. 입과 뇌 사이의 투쟁은 여기서 끝난다. 우리는 심층의 구강-항문을 점유하는 배설적이고 소화적인 소음들로부터의 소리의 독립에서 이 투쟁을 봤다; 우리는 위쪽의 목소리의 분리를 따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것을 표면들과 말들의 원시적인 형성으로까지 추적했다. Speaking, in the complete sense of the word, presupposes the verb and passes through the verb, which projects the mouth onto the metaphysical surface, filling it with the ideal events of this surface. 말하기는 말의 온전한 의미에서 동사를 상정하고 입을 형이상학적 표면에 투사하고 그것을 이 표면의 이상적인 사건들로 채우면서 동사를 통과한다. The verb is the "verbal representation" in its entirety, as well as the highest affirmative power of the disjunction (univocity, with respect to that which diverges). 동사는 그것의 총체성에서 분절/선언(발산/분기하는 일의성)의 가장 높은 정도의 긍정적인 힘임과 동시에 "동사적 표상/재현"이다. The verb, however, is silent; and we must take literally the idea that Eros is sonorous and that the death instinct is silence. 그러나 동사는 침묵한다; 그리고 우리는 에로스가 음향적이고 죽음본능이 침묵이라는 생각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In the verb, the secondary organization is brought about, and from this organization the entire ordering of language proceeds. Nonsense functions as the zero point of thought, the aleatory point of desexualized energy or the punctual Instinct of death; Aion or empty form and pure Infinitive is the line traced by this point, that is, a cerebral crack at the limits of which the event appears; and the even taken in the univocity of this infinitive is distirbuted in the two series of amplitude which constitute the metaphysical surface. 동사에서, 이차적인 조직화가 유발되고 이 조직으로부터 언어의 총체적인 질서가 진행된다. 넌센스는 사유의 영점으로 기능하며 탈성애화된 에너지의 우연적인 점, 혹은 죽음 본능의 방점으로 기능한다; 아이온 혹은 빈 형식, 그리고 순수한 무한성/부정사는 형이상학적 표면을 구성하는 증폭의 두 계열들로 분배된다. The event is related to one of these series as a noematic attribute, and to the other as a noetic sense, so that both series, to eat/to speak, form the disjunct for an affirmative synthesis, or the equivocity of what there is for and in univocal Being. 사건은 이 노에마적 속성으로서 이 계열들 중 하나와 연관되고 다른 하나는 지적 의미로서 연관되는데, 이에 먹다/말하다의 양 계열들은 긍정적인 종합을 위한 이접사/분절로, 혹은 일의적 존재 안의, 혹은 이를 위한 모호함으로서 기능한다. It is this whole system, point-line-surface, that represents the organization of sense and nonsense. 이것은 의미와 무의미의 조직을 표상/재현하는 점-선-면의 총체적인 시스템이다. Sense occurs to states of affairs and insists in propositions, varying its pure univocal infinitive according to the series of the states of affairs which it sublimates and from which it results, and the series of propositions which it symbolizes and makes possible. 의미는 사태들에 발생하며 명제들에 내속한다, 그것이 승화하고 결과하는 것인 사태들의 계열들에 따라, 그리고 그것이 상징화하고 가능하게 만드는 명제들의 계열에 따라 자신의 순수한 일의적 무한성/부정사를 변화시키면서 말이다. We have seen the way in which the order of language with its formed units comes about -that is, with denotations and their fulfillments in things, manifestations and their actualizations in persons, signification and their accomplishments in concepts; it was precisely the entire subject matter of the static genesis. 우리는 언어의 질서가 형태화된 단위와 함꼐 일어나는 방식을 봤다 -즉 지시들과 사물들에 있는 그들의 충족물들, 현시들과 사람들에 있는 그들의 현실화/효과화들, 기호작용과 개념들에 있는 그들의 성취들; 그것은 정확히 정적 발생의 총체적인 주제이다. But in order to get to that point, it was necessary to go through all the stages of the dynamic genesis. For the voice gave us only denotations, empty manifestations and denotations, or pure intentions suspended in tonality. 그러나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동적 발생의 모든 단계들을 통과하는 것이 필요하다. 목소리는 우리에게 오직 지시들, 빈 현시들과 지시들, 혹은 조성들을 떠도는 순수한 의도들만을 준다. The first words gave us only formative elements, without reaching formed units. 첫번째 단어들은 형성된 단위들에 도달하지 않고 우리에게 오직 형태적인 요소들만을 준다. In order that there be language, together with the full use of speech conforming to the three dimensions of language, it was necessary to pass through the verb and its silence, and through the entire organization of sense and nonsense on the metaphysical surface -the last stage of the dynamic genesis. 언어가 있기 위해서, 언어의 세 가지 차원들에 순응하는 말을 모두 사용하려면, 동사와 그것의 침묵을, 그리고 형이상학적 표면 위의 의미와 무의미의 총체적인 조직을 통과하는 것이 필요하다-동적 발생의 마지막 단계.
It is certain that sexual organization is a prefiguration of the organization of language, just as the physical surface was a preparation for the metaphysical surface. 성적 조직이 언어적 조직의 전형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리적 표면이 형이상학적 표면의 준비인 것처럼 말이다. The phallus plays an important role in the stages of th conflict between mouth and brain. 팔루스는 입과 뇌 사이의 갈등 단계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Sexuality is in between eating and speaking and, at the same time that the sexual drives are detached from the destructive alimentary drives, they inspire the first words made up of phonemes, morphemes, and semantemes. 성은 먹기와 말하기 사이에 있고 동시에 성적 욕망은 파괴적이고 소화적인 욕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그들은 음소, 형태소, 의미소들로 구성된 초기의 단어들을 촉진한다. Sexual organization already presents us with an entire point-line-surface system; and the phallus, as object = x and word = x, has the role of nonsense, distributing sense to the two basic sexual series, the pregenital and the Oedipal. 성적 조직은 이미 총체적인 점-선-면 체계와 함께 우리에게 나타난다; 대상=x, 말=x로서의 팔루스는 넌센스의 역할을 하는데, 두 개의 기초적인 성적 계열들, 즉 전생식기적인 것과 오이디푸스적인 것에 의미를 분배한다. This entire intermediary domain, however, seems to be neutralized by the movement of desexualization, just as the basic series of the phantasm have been by the series of amplitude. 그러나 이 총체적인 중재성의 영역은 탈성애화의 운동에 의해 중성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환영의 기초적인 두 계열이 증폭에 의해 그런것처럼 말이다. The reason is that phonemes, morphemes, and semantemes, in their original relation to sexuality, do not yet form units of denotation, manifestation, or signification. 그 이유는 음소, 형태소, 그리고 의미소가 성과 그들의 본래적인 관계에서 아직 지시, 현시, 혹은 기호작용의 단위들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Sexuality is neither denoted, nor manifested, nor signified by them; rather, sexuality is the surface that they double, and they themselves are the doubling up which builds the surface. 성은 그들에 의해 지시되지도, 현시되지도, 기호화되지도 않는다; 대신에, 성은 그들이 이중화되는 표면이며 그들은 그들 스스로 이중화되며 표면을 만든다. It is a question of a dual surface effect, of reverse andd right sides, which precedes all relations between states of affairs and propositions. 그것은 사태들과 명제들의 모든 관계들에 선재하는 올바른 쪽과 뒤집어진 쪽, 즉 이중 표면 효과에 대한 질문이다. This is why when another surface is developed with different effects which at last found denotations, manifestations, and significations as ordered linguistic units, elements like phonemes, morphemes, and semantemes seem to turn up on this new plane, but seem to lose their sexual resonance. 이는 왜 또다른 표면이 결국에는 언어적 질서의 단위, 즉 음소, 형태소, 의미소와 같은 요소들로서 지시, 현시, 기호작용으로 관측되는 다른 효과들과 함께 전개될 때 그들은 이 새로운 표면 위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면서 그들의 성적 공명은 잃는 것처럼 보이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This sexual resonance is repressed or neutralized, while the basic series are swept aside by the new series of amplitude. 기본적인 계열들이 증폭의 새로운 계열들에 의해 밀려났을 때, 이 성적 공명은 억압되고 중성화되어 있다. Sexuality exists only as an allusion, as vapor or dust, showing a path along which language has passed, but which it continues to jolt and to erase like so many extremely disturbing childhood memories. 성은 오직 환상으로, 수증기 혹은 먼지로 존재하며 언어가 지나간 길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매우 불쾌한 어린시절의 많은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꿈틀거리고 지워버리기를 계속한다.
The matter is, however, still more complicated. For if it is true that the phantasm is not content with ocscillating between the extreme of alimentay depth and the other extreme represented by the metaphysical surface, if it strives to project onto this metaphysical surface the event corresponding to nourishment, how would it not also release the events of sexuality? 그러나 문제는 더 복잡하다. 만약 환영이 심층의 소화적 극한과 형이상학적 표면으로 표상되는 다른 극한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형이상학적 표면 위에 자양분과 상응하는 사건들을 투사하고자 분투한다면 어떻게 그것도 마찬가지로 성의 사건을 방출하지는 못할 것인가? How would it not release them, in a very particular manner? 어떻게 그것이 특정 방식으로 그것들을 방출하지 않을 것인가? As we have seen, the phantasm does not eternally recommence its intrinsic movement of desexualization without turning back on its extrinsic sexual beginning. 우리가 봐왔던 것처럼 환영은 자신의 외재적인 성적 시작으로 돌아가지 않고서는 탈성애화적 내적 운동을 영원히 반복하지 않는다. This paradox has no equivalent in the other instances of projection on the metaphysical surface: a desexualized energy invests or reinvests an object of sexual interest as such and is thereby re-sexualized in a new way. 이 역설은 형이상학적 표면 위로의 투사라는 사례들과 등치되지 않는다: 탈성애화된 에너지는 그렇게 성적 관심의 대상을 투자하거나 재투자하고 따라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성화된다. Such is the most general mechanism of perversion, on the condition that perversion be distinguished as an art of the surface from subversion as a technique of depth. 이것이 일탈의 가장 일반적인 메커니즘이다, 일탈이 표면의 예술로서 심층의 기술인 전복과 구별되는 조건에서 말이다. According to Paula Heimann, most "sexual" crimes are wrongly said to be perverse; they should be attributed to the subversion of depths, where the sexual drives are still directly woven into the devouring and destructive drives. 폴라 하이만에 의하면, 가장 "성적인" 범죄들은 일탈적인 것으로 잘못 말해졌다; 그들은 심층의 전복으로 회부되어야 한다, 성적 욕망이 흡입과 파괴적 욕망과 여전히 직접적으로 직조되어 있는 곳으로 말이다. But perversion as a surface dimension bound to the erogenous zones, to the phallus of coordination and castration and to the relation of the physical and metaphysical surfaces, raises only the problem of the investment of a sexual object by a desexualized energy as such. 그러나 성적인 지대에, 연합과 거세의 팔루스에, 그리고 물질적 표면과 형이상학적 표면의 관계에 묶여 있는 표면적 차원에서의 일탈은 그러한 탈성애화된 에너지에 의한 성적 대상의 투자에 대한 문제만을 제기한다. Perversion is a surface structure which expresses itself as such, without being necessarily actualized in criminal behaviors of a subversive nature. 일탈은 전복적인 본성의 범죄적 행위가 필연적으로 현실화/효과화되지 않고 스스로를 그 자체로 표현하는 표면 구조이다. Crimes may undoubtedly follow, but only through a regression from perversion to subversion. 범죄는 의심할 여지 없이 따르지만, 오직 일탈에서 전복으로의 후퇴를 통해서만 그렇다. The real problem of perversion is shown correctly in the essential mechanism which correspondes to it, that of Verleugnung. 일탈의 진정한 문제는 부정에 상응하는 본질적인 메커니즘에서 정확하게 보여진다. For if Verleugnung is a question of maintaining the image of the phallus in spite of the absence of a penis, in the case of women, this operation presupposes a desexualization as consequence of castration, but also a reinvestment of the sexual object insofar as it is sexual by means of desexualized energy: Verleugnung is not an hallucination, but rather an esoteric knowledge. 만약 부정이 여성의 경우, 음경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팔루스의 이미지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라면 이 작용은 탈성애화를 거세의 결과로서 상정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어디까지나 탈성애화된 에너지라는 의미 안에서 성적이라는 한에서 성적 대상의 재투입이기도 하다: 부정은 환상이 아니라 의미없는 지식이다. Thus Carroll, perverse but without crime, perverse but nonsubversive, stuttering and left-handed, uses the desexualized energy of the photographic apparatus as a frightfully speculative eye, in order to invest the sexual object par excellence, namely, the little girl-phallus. 따라서 범죄없이 일탈적이고, 일탈적이지만 전복적이지 않고, 말을 더듬고 왼손잡이인 캐롤은 이름하여 작은 소녀-팔루스라는 탁월한 성적 대상을 투입하기 위해 대단히 추측적인 눈으로서 사진적 장치의 탈성애화된 에너지를 이용한다.
Caught up in the system of language, there is thus a co-system of sexuality which mimics sense, nonsense and their organization: a simulacrum for a phatasm. 언어의 체계로 포착됨에 따라 의미, 무의미와 그들의 조직을 모방하는 성의 공-체계가 있다: 환상을 위한 모조품. Furthermore, throughout all of that which language will designate, manifest, or signify, there will be a sexual history that will never be designated, manifested, or signified in itself, but which will coexist with all the operations of language, recalling the sexual appurtenance of the formative linguistic elements. 더 나아가, 언어가 지시하고, 현시하거나 기호화하는 모든 것을 아울러서 절대로 자기 스스로로 지시되고, 현시되고, 혹은 기호화되지 않을 성적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의 모든 작용들과 공존할 것이며, 형상적인 언어 요소들의 성적 부속물들을 재소환할 것이다. This status of sexuality accounts for repression. 성의 이 상태는 억압을 설명할 것이다. It does not suffice to say that the concept of repression in general is topical: it is topoligical. 억압의 일반적인 개념이 국부적이라 말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그것은 위상학적이다. Repression is always the repression of one dimension by another. 억압은 언제나 다른 한 차원의 억압이다. Height -that is, the superego, whose precocious formation we have seen- represses the depth where sexual and destructive drives are closely linked together. 우리가 봤듯이 조숙한 형상으로서의 높이, 즉 초자아는 성적이고 파괴적인 욕망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심층을 억압한다. It is even on this link, or on the internal objects which represent it, that the so-called primary repression comes to bear. 소위 원시적인 억압도 이 연결, 혹은 이를 표상하는/재현하는 내적 대상들 위에서 일어난다. Repression then signifies that depth is almost covered up by the new dimension, and that the drive takes on a new figure in conformity with the repressing instance -at least in the beginning(in this case, the liberation of sexual drives from the destructive drives and the pious intentions of Oedipus). 억압은 심층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 의해 뒤덮인 것으로, 그리고 욕망을 억압하는 사례를 따르는 새로운 형상을 받아들인 것으로 기호화한다. -적어도 시작에 있어서는(이 경우, 파괴적인 욕망과 오이디푸스의 경건한 의도들으로부터의 성적 욕망의 해방) 말이다. That the surface may be in turn the object of the so-called secondary repression, and that it is not therfore the least bit identical to consciousness, is explained in a complex manner: first, in accordance with Freud's hypothesis, the play of two distinct series forms an essential condition of the repression of sexuality and of the retroactive character of this repression. 그렇다면 표면은 결국 소위 이차적 억압의 대상이며 그러므로 그것은 의식과 거의 동일하지 않다는 것이 복잡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먼저 프로이트의 추론에 따르면, 두 개의 분리된 계열들은 성적 억압과 이 억압의 소급적인 특징의 본질적인 조건을 형성한다. Moreover, even when it puts into play only a partial homogeneous series, or a continuous global series, sexuality does not have the conditions which would render possible its being maintained in consciousness(namely, the possibility of being denoted, manifested, and signified by linguistic elements corresponding to it.) 더 나아가, 그것이 오직 부분적이고 동질적인 계열, 혹은 지속적인 글로벌한 계열의 역할만 하더라도 성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에서 지속시키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조건들을 가지지 못한다(이름하여, 그에 상응하는 언어적 요소들에 의해 지시되고, 현시되고, 기호화될 가능성). The third reason must be sought on the side of the metaphysical surface, in the manner in which this surface represses the sexual surface at the same time that it imposes on the energy of the drive the new figure of desexualization. 세번째 이유는 형이상학적 표면 위에서 찾아져야 하는데, 이 표면이 탈성애화된 새로운 형상의 욕망의 에너지를 내포하는 동시에 성적 표면을 억압하기 때문이다. It should not be surprising that the metaphysical surface, in turn, is not at all identical to a consciousness. 이 때문에 형이상학적 표면이 결국 의식과 전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놀랍지 않아야 한다. It should be enough to recall that the series of amplitude which characterize it essentially transcend whatever may be conscious and form an impersonal and pre-individual transcendental field. 그것을 특징화하는 증폭의 계열들이 본질적으로 의식적인 무언가를 초월하고 비인칭적이고 전 개체적인 초월적 장을 형성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Finally consciousness, or rather the preconscious, has no other field than that of possible denotations, manifestatons, and significations -that is, the order of language which arises from all that which has preceded. 마지막으로 의식, 혹은 전의식적인 것은 가능적인 지시, 현시, 기호작용들 외의 다른 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즉 그것을 앞서는 총체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질서. But the play of sense and nonsense, and surfae effects, on the metaphysical as well as on the physical surface, do not belong to consciousness any more than do actions and passions of the most deeply buried depth. 그러나 형이상학적 표면에서와 마찬가지로 물리적 표면에서의 의미와 무의미의 놀이, 그리고 표면 효과들은 가장 깊이 묻힌 심층의 능동과 수동만큼이나 의식에 속하지 않는다. The return of the repressed occurs in accordance with the general mechanism of regresson: there is regression as soon as one dimension falls back on another. 억압된 것의 귀환은 억압의 일반적인 메커니즘에 따라 일어난다: 한 차원이 다른 차원으로 물러남과 동시에 억압이 있다. Without doubt, the mechanisms of regression are very different depending on the accidents proper to particular dimensions (the drop from the heights, for example, or the holes in the surface). 명백하게 억압의 메커니즘은 특정 차원에 적절한 우연/사고들에 따라 매우 다르다(이를테면 높이에서의 떨어짐, 혹은 표면에의 구멍들). But what is essential is the threat that depth brings to bear on all other dimension; thus, it is the locus of primitive repression and of "fixations" -the ultimate terms of regressions. 그러나 본질적인 것은 심층이 모든 다른 차원들에 가하는 위협이다; 따라서, 그것은 원시적인 억압의, 그리고 "고정들"의 소재이다. -억압의 궁극적인 항들. As a general rule, there is a difference in nature between surface zones and stages of depth, and thus between a regression to the erogenous anal zone, for example, and a regression to the anal stage as a digestive-destructive stage. 일반적인 법칙으로, 표면 지대들과 심층의 단계들의 본성적인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를테면, 성적인 항문 지대를 향한 억압과 소화적-파괴적 단계로서의 항문적 단계를 향한 억압 사이처럼 말이다. But the points of fixation, which are like beacons attracting the regressive processes, always strive to assure that regression itself regresses, as it changes nature by changing dimensions, and finally returns to the depth of stages into which all dimensions descend. 그러나 억업적인 과정들을 끌어당기는 봉화와 같은 고정의 지점은 언제나 억압 스스로가 억압한다는 것을 확언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그것이 차원들을 바꾸면서 본성을 바꾸면서, 그리고 끝내 모든 차원들이 침강하는 심층의 단계들로 귀환하면서 말이다. One final distinction is left between regression as the movement by which a dimension falls back on those which preceded it and this other movement by which a dimension reinvests, in its own way, the one preceding it. 차원이 앞선 것들로 물러나는 것에 의한 움직임으로서의 억압과 차원이 자신의 방향대로, 즉 앞서는 것으로서 재투입하는 이 다른 움직임으로서의 억압 사이에 마지막 하나의 구분이 남았다. Alongside repression and the return of the repressed, we must save a place for these complex processes through which an element characteristic of a certain dimensionis invested as such with the very different energy corresponding to another dimension: for example, subversive criminal conduct is inseparable from the function of the voice from above, which reinvests the destructive process of depth as if it were an obligation that is forever fixed, and orders it in the guise of the superego or of the good object (see the story of Lord Arthur Savile). 억압과 억압된 것의 귀환과 함께, 우리는 특정 차원의 특징적인 요소가 다른 차원에 상응하는 매우 다른 에너지로 그대로 투자되는 이러한 복잡한 과정들을 위한 장소를 마련해야한다: 이를테면, 전복적인 범죄적 행동은 마치 그것이 영원히 고정된 의무인것 마냥 심층의 파괴적인 프로세스를 재투자하고 초자아 혹은 좋은 대상을 가장하여 그것에 명령하는 위로부터의 목소리의 기능과 분리불가능하다(아르투어 사빌 경의 이야기를 봐라). Perverse conduct is also inseperable from a movement of the metaphysical surface which, instead of repressing sexuality, uses desexualized energy in order to invest a sexual element as such and to fix it with unbearable attention (the second sense of fixation). 일탈적인 행동은 성을 억압하는 대신 성적 요소를 그대로 투입하고 그것을 참을 수 없는 주의력에 고정시켜(고정의 두번째 의미) 탈성애화된 에너지를 사용하는 형이상학적 표면의 운동과 분리 불가능하다.
The aggregate of surfaces constitutes the organization which is called secondary, and which is defined by "verbal representation." Verbal representation must be carefully distinguised from "object representation," because it concerns an incorporeal event and not a body, an action, a passion, or a quality of bodies. 표면들의 합계는 이차적이라 불리는, 그리고 "동사적 표상"이라 규정되는 조직을 구성한다. 동사적 표상은 "대상 표상"과 섬세하게 구분되어야만 하는데, 그것은 신체, 능동, 수동, 혹은 신체들의 성질이 아닌 비물체적 사건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Verbal representation is, as we have seen, the representation which enveloped an expression. 동사적 재현은 우리가 봤던 것처럼, 표현을 감싸는 재현이다. It is made of what expressed and what is expressing, and conforms itself to the twisting of the one into the other. 그것은 표현된 것과 표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을 다른 것에 꼬아놓는 것에 순응시킨다. It represents the event as expressed, brings it to exist in the elements of language, and, conversely, confers on these elements an expressive value and a function as "representatives" which they did not have by themselves. 그것은 사건을 표현된 것으로 표상/재현하고 그것을 언어의 요소들로 존재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반대로, 이 요소들에 표현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그들 스스로는 그렇지 않은 "대리인"으로서 기능한다. The whole order of language is the result of it, with its code of tertieary determinations founded in turn on "objectal" representations (deonotation, manifestation, signification; individual, person, concept; world, self, and God). 언어의 총체적인 질서는 그것의 결과이다, "대상적인" 표상/재현(지시, 현시, 기호작용; 개체, 인칭, 개념; 세계, 자신, 신)들에 기반하는 그것의 제 3의 규정들의 코드들과 함께 말이다. But what matters here is the preliminary, founding, or poetic organization -that is, this play of surfaces in which only an a-cosmic, impersonal, and pre-individual field is deployed, this exercise of nonsense and sense, and this deployment of series which precede the elaborate products of the static genesis.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비적이고, 주조/발견의, 혹은 시적 조직이다 -즉, 오직 우주적이고, 비인칭적이고, 그리고 전개체적인 장이 배치되는 이 표면들의 놀이, 무의미와 의미의 운동, 정적 발생의 정교한 생산물들에 앞선 계열들의 배치. From the tetiary order, we must move again up to the secondary organization, and then to the primary order, in accordance with the dynamic requirement. 이 제 3의 질서로부터 우리는 다시 이차적 조직으로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동적인 것의 요구에 따라 일차적 질서로. Take, for example, the table of categories of the dynamic genesis in relation to the moments of language: passion-action (noise); possession-privation (voice); intention-result (speech). 이를테면 언어의 순간들과 관련하여 동적 발생의 카테고리 표를 보자: 수동-능동 (소음); 소유-궁핍 (목소리); 의도-결과 (말하기). Secondary organization (the verb or verbal representation) is itself the result of this long itinerary; it emerges when the event knows how to raise the result to a second power, and when the verb knows how to grant elementary words the expressive value of which they were still deprived. (동사 혹은 동사적 표상/재현의) 이차적 조직은 이 긴 여정의 결과이다; 그것은 사건이 어떻게 결과를 두번째 힘으로 올리는지 알 때, 그리고 동사가 어떻게 요소적인 단어들에 그들이 여전히 가지고 있지 않은 표현적인 가치들을 부여하는지를 알 때 나타난다. But the entire itinerary is indicated by the primary order, where words are directly actions and passions of the body, or even withdrawn voices. 그러나 전체적인 여정은 일차적 질서에 의해 지정된다, 말들이 몸, 혹은 심지어 후퇴한 목소리들의 능동들과 수동들인 곳에서 말이다. They are demonic possessions of divine privations. 그들은 신성한 궁핍의 악마적인 소유물들이다. Obscenities and isults afford an idea, by way of regression, of this chaos in which bottomless depth and unlimited height are respectively combined. 억압의 방식으로, 바닥없는 깊이와 무한한 높이가 각기 결합된 혼돈으로, 외설들과 모욕들은 생각을 제공한다. For, however intimate their liaison may be, the obscene word illustrates the direct action of one body on another which is acted upon, whereas the insult pursues all at once the one who withdraws, dispossesses this one of all voice, and is itself a voice which withdraws. 그러나 그들이 친밀한 관계일지라도 외설적인 단어는 한 신체의 행위가 다른 신체 위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반면, 모욕은 한꺼번에 물러나는 사람을 추구하며 모든 목소리 중 하나를 빼앗고 그 자체도 물러나는 목소리이다. This strict combination of obscene and abusive words testifies to the properly satiric values of language. 외설적이고 모욕적인 단어들의 엄격한 조합은 적절하게 풍자적인 언어의 가치들을 증명한다. We call "satiric" the process by which regression regresses itself; that is, it is never a sexual regression at the surface without its also being a digestive alimentary regression in depth, stopping only at the cesspool and pursuing the withdrawn voice as it uncovers the excremental soil that this voice leaves behind. 우리는 "풍자적인"이라는 단어를 억압이 스스로를 억압하는 과정이라 부른다; 즉, 그것은 그것이 마찬가지로 심층의 소화적인 억압의 존재라는, 오직 똥구덩이에서 멈추고 목소리가 남긴 배설물적 토양을 드러내는 후퇴하는 목소리를 추구함이 없는 표면에서는 절대로 성적 억압이 될 수 없다. Making a thousand noises and withdrawing his voice, the satiric poet, or the great pre-Socratic of one and the same movement of the world, pursues God with insults and sinks into the excrement. 수천의 소음들을 만들어내고 그의 목소리를 후퇴시키면서 풍자적인 시인, 혹은 위대한 전-소크라테스적 일자이자 세계의 동일한 움직임은 모욕하는 신을 추구하고 배설물 안으로 가라앉는다. Satire is a prodigious art of regressions. 풍자는 억압들의 거대한 예술이다.
Height, however, prpares new values for language and affirms in it its independence and its radical difference from depth. 그러나 높이는 언어를 위한 새로운 가치들을 준비하고 그것 안에서 자신의 독립과 심층으로부터의 급진적인 차이를 긍정한다. Irony appears each time language deploys itself in accordance with relations of eminence, equivocity, or analogy. 아이러니는 언어가 저명성, 모호성 또는 유비의 관계에 따라 전개될 때마다 나타난다. These three great concepts of the tradition are the source from which all the figures of rhetoric proceed. 전통의 이 세 가지 위대한 개념은 수사학의 모든 수사가 진행되는 원천이다. Thus, irony will find a natural application in the tertiary order of language, in the case of the analogy of significations, the equivocity of denotations, and the eminence of the one who manifests himself -the whole comparative play of self, world, and God, in the relation of being and the individual, representation and person, which constitute the classical and romantic forms of irony. 따라서 아이러니는 기호작용의 유비, 지시의 모호성, 자신을 현시하는 사람의 저명성 등 언어의 3차 질서에서 자연스럽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아이러니의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형상들을 구성하는 존재와 개체, 표상과 인칭, 자아, 세계, 그리고 신의 모든 상대적인 놀이. But even in the primary process, the voice from high above liberates properly ironic values; it withdraws behind its eminent unity and utilizes the equivocity of its tone and the analogy of its objects. 그러나 일차적인 과정에서조차도, 높이로부터의 목소리는 아이러니한 가치들을 적절하게 해방시킨다; 그것은 자신의 저명한 실체 뒤로 후퇴하며 자신의 어조가 가진 모호성과 대상들의 유비를 활용한다. In short, it has at its disposal the dimensions of a language before having at its disposal the corresponding principle of organization. 요컨대, 그것은 언어의 차원들에 상응하는 조직 원리를 마음대로 사용하기 전에 언어의 차원들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There is, for example, a primordial form of Platonic irony, redressing height, disengaging it from depth, repressing and hemming in satire or the satirist, and employing all its "irony" in asking whether, by chance, there could be an Idea of mud, hair, filth, or excrement. 이를테면 높이를 바로잡는, 그것을 깊이와 분리하는, 풍자와 풍자가들을 억압하고 꼼짝 못하게 하는, 그리고 자신의 모든 아이러니들을 진흙, 머리카락, 배설물, 오물의 이데아가 있는지 묻는 데에 적용시키는 플라톤적 아이러니의 태고적 형상이 있다. Nevertheless, what silences irony is not a return of satiric values in the manner of an ascent from bottomless depths.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를 침묵시키는 것은 바닥없는 심층으로부터의 상승의 방식으로 풍자적인 가치들의 귀환시키는 것이 아니다. Besides, nothing ascends except to the surface -in which case a surface is still necessary. 게다가 표면을 향해서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올라가지 않는다. -표면이 여전히 필요한 경우에. Once height makes the constitution of surfaces possible, along with the corresponding release of sexual drives, we believe that something happens, something capable of vanquishing irony on its own terrain -that is, on the terrain of equivocity, eminence, and analogy. 높이가 표면들의 구성을 가능하게 만든 이래, 마찬가지로 그에 상응하는 성적 욕망들의 방출과 함께, 우리는 무언가 일어났다고 믿는다, 그것의 고유한 영토에서 아이러니를 격파할 수 있는 무언가, -즉 모호함, 자명함, 유비의 영토 위에서. It is as if there were an eminence in excess, an exaggerated equivocation, and a supernumerary analogy which, rather than being added to the others, would on the contrary ensure their closure. 그것은 마치 과잉의 자명성이, 과장된 모호함이, 무수한 유비가 다른 것들에 추가되기 보다 반대로 그들의 폐쇄성을 보증한다. An equivocation such that "afterward" there can be no other equivocation -this is the sense of the expression "there is also sexuality." It is as with Dostoevsky's characters who keep on saying: please consider, dear sir, there is still this matter, and again that matter. "이후"로서의 모호함에 의해서는 어떤 다른 모호함도 있을 수 없다 -이는 "그곳에는 성도 있다." 와 같은 의미의 표현이다. 그것은 계속 말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과 같다: 님아 제발 그곳에는 여전히 이 문제가 그리고 다시 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주세요. ...But with sexuality, one arrives at an "again" which ends every "again," one reaches an equivocation which renders the pursuit of equivocities or the continuation of ulterior analogies impossible. ...그러나 성과 함께, 누군가는 모든 "다시"를 끝내는 "다시"에 도달하고 모호함의 추구와, 혹은 숨겨진 유비들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모호함에 도달한다. This is why, at the same time that sexuality is deployed over the physical surface, it makes us go from voice to speech and gathers together every word into an esoteric whole and in a sexual history which will not be designated, manifested, or signified by these words, but which rather will be strictly coextensice and co-substantial with them. 이는 왜 성이 물리적인 표면에 배치되는 동시에, 우리를 목소리로부터 말하기로, 그리고 모든 단어들을 의미없는 전체와 이 단어들에 의해 지시, 현시, 기호화될 수 없는, 그러나 엄격하게 그들과 공존하고 공-실체적인 성적 역사로 한데 모으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This is what words represent; all the formative elements of language which exist only in relation (or in reaction) to one another -phonemes, morphemes, and semantemes- form their totality from the point of view of this immanent history with which they are identical. 이는 단어들이 표상하는 것이다; 다른 것돌과의 관계(혹은 반응)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언어의 모든 형태적인 요소들은(음소, 형태소, 의미소) 그들이 동일한 이 내재적인 역사의 관점에서 그들의 총체성을 형성한다. There is therefore an excessive equivocation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voice and in relation to voice: an equivocation which ends equivocity and makes language ripe for something else. 그러므로 목소리의 관점과 목소리와의 관계에 과도한 모호함이 있다: 모호함을 끝내고 언어를 다른 무언가를 위해 풍부하게 만드는 얼버무리기. This something else is that which comes from the other, desexualized and metaphysical surface, when we finally go from speech to the verb, or when we compose a unique verb in the pure infinitive -along with the assembled words. 이 다른 무언가는 우리가 마침내 말하기에서 동사로 갈 때, 혹은 우리가 순수한 부정사/무한성 안에서 독특한 동사를(배열된 단어들도 마찬가지로) 구성할 때 탈성애화되고 형이상학적 표면인 다른 것에서부터 온다. This something else is the revelation of the univocal, the advent of Univocity -that is, the Event which communicates the univocity of being to language. 이 다른 무언가는 일의적인 것의 드러남, 일의성의 도래이다 -즉, 일의성의 존재에서 언어로 소통하는 사건.
The univocity of sense grasps language in its complete system, as the total expresser of a unique expressed -the event. 의미의 일의성은 자신의 완전한 체계 안에서 언어를 포착한다, 독특한 표현된 것의 총체적인 표현자 -사건. The values of humor are distinguished from those of irony: humor is the art of surfaces and of the complex relation between the two surfaces. 익살의 가치는 아이러니로부터 구별된다: 익살은 표면의 예술이며 두 표면들 사이의 복잡한 관계이다. Beginning with one excessive equivocation, humor constructs all univocity; beginning with the properly sexual equivocation which ends all equivocity, humor releases a desexualized Univocity -a speculative univocity of Being and language- the entire secondary organization in one word. 하나의 과잉적인 얼버무림과 시작해, 익살은 모든 일의성을 구축한다; 모든 모호함을 끝내는 적절하게 성적인 얼버무림과 시작해, 익살은 탈성애화된 일의성의(존재와 언어의 추측적인 일의성) 모든 이차적인 조직을 하나의 단어로 방출한다. It is necessary to imagine someone, one-third Stoic, one-third Zen, and one-third Carroll: with one hand, he masturbates in an excessive gesture, with the other, he writes in the sand the magic words of the pure event open to the univocal: "Mind-I believe-is Essence-Ent-Abstract-that is-an Accident-which we-that is to say-I meant-." 누군가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3분의 1 스토아주의자, 3분의 1 선승, 3분의 1 캐롤: 한편으로 그는 과잉적인 제스처로 자위하고 다른 편으로 그는 모래 위에 일의성으로 개방된 순수 사건의 마술적인 단어들을 쓴다: "마음-내가 믿는다-본질이다-안에-추상적인-즉-사고-우리가-말하자면-내가 의미했던-." Thus, he makes the energy of sexuality pass into the pure asexual, without, however, ceasing to ask "What is a little girl?" -even if this question must be replaced with the problem of a work of art yet to come, which alone would give an answer. 따라서 그는 순수한 무성성 안으로 들어가는 성의 에너지를 만든다, 그러나 "무엇이 작은 소녀인가?"를 멈추지 않고 말이다. -심지어 이 질문이 아직 도래하지 않은 예술작품의 문제로 대체 되어야만 하더라도 그것은 답을 줄 것이다. See, for example, Bloom on the beach. ...Equivocity, analogy, an eminence will no doubt recover their rights with the tertiary order, in the denotations, significations, and manifestations of everyday language submitted to the rules of good sense and common sense. 이를 테면 해변위의 꽃들을 봐라. ...모호함, 유비, 자명함은 제 3의 질서와 함깨 그들의 권리들을 되찾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좋은 의미와 상식의 법칙에 복종하는 일상적인 언어의 지시, 기호작용, 현시 안에서 말이다. As we then consider the perpetual entwining which constitues the logic of sene, it seems that this final ordering recovers the voice of the heights of the primary process, but also that the secondary organization at the surface recovers something of the most profound noises, blocks, and elements for the Univocity of sens -a brief instant for a poem without figures. 그리고 우리는 의미의 논리를 구성하는 항구적인 얽힘을 간주하면서 이 마지막 질서는 일차적 과정의 높이의 목소리를 되찾는 것처럼 보이나 표면의 이차적 조직 역시 가장 풍부한 소음들, 블록들, 그리고 의미의 일의성을 위한 요소들을 되찾는다 -시를 위한 형상없는 짧은 순간. What can the work of art do but follow again the path which goes from noise to the voice, from voice to speech, and from speech to the verb, constructing this Musik fur ein Haus, in order always to recover the independence of sounds and to fix the thunderbolt of the univocal. This event is, of course, quickly covered over by everyday banality or, on the contrary, by the sufferings of madness. 예술 작품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소음에서 목소리로, 목소리에서 말하기로, 그리고 목소리에서 동사로의 길을 다시 따라가는 것이다. 이 하나의 집을 위한 음악 구축하면서, 언제나 소리들의 독립성을 되찾으면서, 일의성의 번개를 고정하면서. 이 사건은 물론 일상의 진부함이나 반대로 광기의 고통들로 재빠르게 뒤덮일 것이다.
Appendixes - 보론
The Simulacrum and Ancient Philosophy - 시뮬라크럼과 고대 철학
Plato and the Simulacrum - 플라톤과 시뮬라크럼
What does mean "to reverse Platonism"? 플라톤주의를 뒤집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This is how Nietzsche defined the task of his philosophy of the future. 이는 니체가 자신의 장래 철학의 과업을 어떻게 규정한 것이기도 하다. The formula seems to mean the abolition of the world of essences and of the world of appearancess. 공식은 본질들과 외양들의 세계를 폐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Such a project, however, would not be peculiar to Nietzche. 그러나 이는 니체에 특정한 작업은 아니다. The dual denunciation of essences and appearances dates back to Hegel or, better yet, to Kant. 본질과 외관에 대한 이중적 비난은 헤겔, 더 나아가서는 칸트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It is doubtful that Nietzsche menat the same thing. 니체가 같은 것을 의미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있다. Moreover, this formula of reversal has the disadvantage of being abstract; it leaves the motivation of Platonism in the shadows. 더 나아가 이 전복의 공식은 추상적이게 된다는 불리함을 가진다; 그것은 그림자로서의 플라톤주의의 동기를 남긴다. On the contrary, "to reverse Platonism" must mean to bring this motivation out into the light of the day, to "track it down" -the way Plato tracks down the Sophist. 반대로 "플라톤주의를 뒤집는 것은" 이 동기를 쫓기 위해 대낮의 빛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쫓았듯이 말이다.
In very general terms, the motive of the theory of Ideas must be sought in a will to select and to choose. 매우 일반적인 용법으로 이데아 이론의 동기는 선별하고 골라내는 의지에서 찾아져야 한다. It is a question of "making a difference," of distinguishing the "thing" itself from its images, the original from the copy, the model from the simulacrum. 그것은 "차이를 만드는 것"에 대한, "사물"을 그것의 이미지들과, 사본으로부터 원본을, 시뮬라크럼에서 모델을 구분하는 것에 대한 질문이다. But are all these expressions equivalent? 그러나 이 모든 표현들은 동등한가? The Platonic project comes to light only when we turn back to the method of division, for this method is not just on dialectical procedure among others. 플라톤의 프로젝트는 우리가 분할의 방법으로 돌아갈 때만 빛을 발하는데, 그 이유는 이 방법이 다른 무엇보다도 변증법적 절차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It assembles the whole power of dialectic in order to combine with it another power, and represents thus the entire system. 그것은 다른 힘들과 결합하기 위해 변증법의 모든 힘을 모으고 따라서 모든 시스템을 표상/재현한다. One might at first want to say that this method amounts to the division of a genus into contrary species in order to subsume the thing investigated under the appropriate species: This would explain the process of specification, in the Sophist, undertaken for the sake of a definition of the angler. 처음에는 이 방법이 조사 대상을 적절한 종에 포함시키기 위해 한 속을 반대되는 종으로 나누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수도 있다: 이는 소피스트들이 낚시꾼의 정의를 위해 수행한 종별화의 과정을 설명해줄 것이다. But this is only the superficial aspect of division, its ironic aspect. 그러난 이는 분할의 피상적인 양상, 즉 아이러니적 양상일 뿐이다. If one takes this aspect seriously, Aristotle's objection would clearly be in order: division would be a bad and illicit syllogism, since the middle term is lacking, and this would make us conclude, for example, that angling is on the side of the arts of acquisition, of acquisition by capture, etc. 이 측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론은 분명 타당할 것이다: 중간 용어가 없기 때문에 분할은 나쁘고 부당한 논리가 될 것인데, 이를테면 이는 우리가 낚시는 획득의 기술, 포획에 의한 획득 등의 측면 등등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The real purpose of division must be sought elsewhere. In the Statesman, a preliminary definition is attained according to which the statesman is the shepherd of men. But all sorts of rivals spring up, the doctor, the merchant, the laborer, and say: "I am the shepherd of men." Again, in the Phaedrus, the question is about the definition of delirium and, more precisely, about the discernment of the well-founded delir. ium or true love. Once again, many pretenders rise up to say, "I am the inspired one, the lover." The purpose of division then is not at all to divide a genus into species, but, more profoundly, to select lineages: to distinguish pretenders; to distinguish the pure from the impure, the authentic from the inauthentic. This explains the constancy of the metaphor assimilating division to the testing of gold. Platonism is the philosophical Odyssey and the Platonic dialectic is neither a dialectic of contradiction nor of contrariety, but a dialectic of rivalry (amphisbetess), a dialectic of rivals and suitors. The essence of division does not appear in its breadth, in the determination of the species of a genus, but in its depth, in the selection of the lineage. It is to screen the claims (pretensions) and to distinguish the true pretender from the false one.
분열의 진정한 목적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 정치가에서는 정치가가 인간의 목자라는 예비 적인 정의에 도달했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라이벌, 즉 의사, 상인, 노동자가 생겨나고 그들은 말합니다: "나는 인간의 목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파이드로스에서 질문은 망상의 정의와 더 정확하게는 더 그럴듯한 망상 또는 진정한 사랑의 분별력에 관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많은 척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나는 영감을 받은 사람, 연인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때 분열의 목적은 속을 종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더 심오하게는 혈통을 선택하는 것, 즉 가식들을 구별하는 것, 순수한 것과 불순한 것, 진정한 것과 비진정한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할을 연금술에 비유하는 은유의 불변성을 설명한다. 플라톤주의는 철학적 오디세이이며 플라톤 변증법은 모순의 변증법도 모순의 변증법도 아닌 경쟁의 변증법(암피스베테스), 즉 라이벌과 구혼자의 변증법이다. 분할의 본질은 속의 종을 결정하는 폭이 아니라 혈통의 선별하는 그 깊이에 나타납니다. 그것은 주장 (가식)을 가리고 진정한 척하는 사람과 거짓 척하는 사람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To achieve this end, Plato proceeds once again by means of irony. For when division gets down to the actual task of selection, it all happens as though division renounces its task, letting itself be carried along by a myth. Thus, in the Phaedrus, the myth of the circulation of the souls seems to interrupt the effort of division. The same thing happens in the Statesman with the myth of archaic ages. This flight, this appearance of flight or renunciation, is the second snare of division, its second irony. In fact, myth interrupts nothing. On the contrary, it is an integral element of division. The characteristic of division is to surmount the duality of myth and dialectic, and to reunite in itself dialectical and mythic power. Myth, with its always circular structure, is indeed the story of a foundation. It permits the construction of a model according to which the different pretenders can be judged. What needs a foundation, in fact, is always a pretension or a claim. It is the pretender who appeals to a foundation, whose claim may be judged well-founded, ill-founded, or unfounded. Thus, in the Phaedrus, the myth of circulation explains that before their incarnation souls had been able to see the Ideas. At the same time, it gives us a criterion of selection according to which the well-founded delirium or true love belongs only to souls which have seen many things, and which have within them many slumbering but revivable memories. The souls which are sensual, forgetful, and full of petty purposes, are, on the contrary, denounced as false pretenders. It is the same in the Statesman: the circular myth shows that the definition of the statesman as "shepherd of men" literally applies only to the ancient god; but a criterion of selection is extracted from the myth, according to which the different men of the city participate unequally in the mythic model. In short, an elective participation is the response to the problem of a method of selection.
이를 위해 플라톤은 아이러니를 통해 다시 한 번 논의를 진행합니다. 왜냐하면 분할이 현실적인 선별의 과업으로 내려갈 때, 모든 일은 분할이 자신의 과업을 포기하고 신화에 이끌려가는 것처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파이드로스에서는 영혼의 순환에 대한 신화는 분할의 노력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대의 신화와 함께하는 정치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 비행, 비행 또는 포기의 모습은 분할의 두 번째 올가미, 즉 그것의 두 번째 아이러니입니다. 사실 신화는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분할의 필수 요소입니다. 분할의 특징은 신화와 변증법의 이중성을 극복하고 그 자체로 변증법과 신화의 힘을 재결합하는 것입니다. 항상 순환하는 구조를 가진 신화는 정말로 근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각기 다른 척하는 사람들을 판단 할 수있는 모델의 구성을 허용합니다. 사실 근거가 필요한 것은 항상 가식이나 주장입니다. 근거에 호소하는 것은 척하는 사람이며, 그의 주장은 근거가 있거나, 근거가 부실하거나,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파이드로스 신화에서 순환의 신화는 육화하기 전에 영혼이 이데아를 볼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에게 근거가 확립된 망상이나 진정한 사랑이 많은 것을 봐왔고 그 안에 잠 들어 있지만 되살릴 수있는 많은 기억을 가진 영혼에게만 속한다는 선택의 기준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감각적이고 건망증이 있으며 사소한 목적으로 가득 찬 영혼은 거짓으로 척하는 사람으로 비난받습니다. 순환 신화는 마찬가지로 "인간의 목자"로서의 정치가의 정의가 문자 그대로 고대 신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도시의 다른 남성이 신화 모델 안에서 불평등하게 참여하게끔 하는 선별의 기준이 신화에서 추출됩니다. 요컨대, 투표적 참여는 선별 방법의 문제에 대한 응답입니다.
To participate is, at best, to rank second. The celebrated Neoplatonic triad of the "Unparticipated," the participated, and the participant follows from this. One could express it in the following manner as well: the foundation, the object aspired to, and the pretender; the father, the daughter, and the fiancé. The foundation is that which possesses something in a primary way; it relinquishes it to be participated in, giving it to the suitor, who possesses only secondarily and insofar as he has been able to pass the test of the foundation. The participated is what the unparticipated possesses primarily. The unparticipated gives it out for participation, it offers the participated to the participants: Justice, the quality of being just, and the just men. Undoubtedly, one must distinguish all sorts of degrees, an entire hierarchy, in this elective participa-tion. Is there not a possessor of the third or the fourth rank, and on to an infinity of degradation culminating in the one who possesses no more than a simulacrum, a mirage -the one who is himself a mirage and simulacrum? In fact, the Statesman distinguishes such a hierarchy in detail: the true statesman or the well-founded aspirer, then relatives, auxiliaries, and slaves, down to simulacra and counterfeits. Malediction weighs heavily on these last -they incarnate the evil power of the false pretender.
참여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2등을 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신플라톤주의 삼위일체 '참여하지 않은 자', '참여한 자', '참여하는 자'는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이를 근거, 열망하는 대상, 가장, 아버지, 딸, 약혼자 등으로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근거는 일차적으로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으로, 참여하도록 그것을 포기하고 구혼자에게 그것을 주며, 구혼자는 근거의 시험을 통과 할 수 있는 한에서만 그것을 이차적으로 소유합니다. 참여한 것은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참여를 위해 그것을 내어주고, 참여한 사람은 참여자에게 그것을 제공합니다: 정의, 정의로운 자질, 그리고 정의로운 사람들입니다. 의심 할 여지없이,이 선택적 참여에서 모든 종류의 정도들, 즉 전체 계층을 구별해야합니다.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등급의 소유자, 그리고 그 자신이 신기루이자 신기루 인 시뮬라크르와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 소유자에게서 정점에 이르는 무한한 하강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정치가는 진정한 정치가 또는 근거 있는 열망자, 그 다음 친척, 보조자, 노예, 그리고 시뮬라크르와 위조품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계층을 자세히 구분합니다. 악의는 거짓된 척하는 자의 사악한 힘을 화신하는 이 마지막 단계에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Thus myth constructs the immanent model or the foundation-test according to which the pretenders should be judged and their pretensions measured. Only on this condition does division pursue and attain its end, which is not the specification of the concept but the authentication of the Idea, not the determination of species but the selection of lineage. How are we to explain, however, that of the three important texts dealing with division -the Phaedrus, the Statesman, and the Sophist- the last one contains no founding myth? The reason for this is simple. In the Sophist, the method of division is employed paradoxically, not in order to evaluate the just pretenders, but, on the contrary, in order to track down the false pretender as such, in order to define the being (or rather the nonbeing) of the simulacrum. The Sophist himself is the being of the simulacrum, the satyr or centaur, the Proteus who meddles and insinuates himself everywhere. For this reason, it may be that the end of the Sophist contains the most extraordinary adventure of Platonism: as a consequence of searching in the direction of the simulacrum and of leaning over its abyss, Plato discovers, in the flash of an instant, that the simulacrum is not simply a false copy, but that it places in question the very notations of copy and model. The final definition of the Sophist leads us to the point where we can no longer distinguish him from Socrates himself -the ironist working in private by means of brief arguments. Was it not necessary to push irony to that extreme? Was it not Plato himself who pointed out the direction for the reversal of Platonism?
따라서 신화는 가식을 판단하고 그들의 가식을 측정해야하는 내재적 모델 또는 기초 테스트를 구성합니다. 이 조건에서만 분할은 개념의 구체화가 아니라 이데아의 인증, 종의 결정이 아니라 혈통의 선택이라는 목적을 추구하고 달성할 수 있다. 그런데 분열을 다룬 세 가지 중요한 텍스트인 『파이드로스』, 『국가』, 『소피스트』 중 마지막 텍스트에 건국 신화가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소피스트』에서 분할의 방법은 역설적으로 정의로운 척하는 자를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거짓인 척하는 자를 추적하여 시뮬라크르의 존재(또는 오히려 비존재)를 정의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소피스트 자신은 시뮬라크르의 존재, 사티르 또는 켄타우로스, 모든 곳에 참견하고 자신을 암시하는 프로테우스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소피스트의 마지막에는 플라톤주의의 가장 특별한 모험이 담겨 있을지도 모릅니다: 시뮬라크르의 방향을 탐색하고 그 심연에 기대어 본 결과, 플라톤은 시뮬라크르가 단순히 거짓된 모방이 아니라 모방과 모델이라는 표기법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것을 순식간에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소피스트에 대한 최종 정의는 그를 더 이상 소크라테스 자신과 구별할 수 없는 지점 -즉 짧은 논쟁을 통해 사적으로 활동하는 아이러니스트와 구별할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하게 합니다. 아이러니를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밀어붙일 필요는 없었을까요? 플라톤주의의 전복을 향한 방향을 지적한 것은 플라톤 자신이 아니었을까요?
We started with an initial determination of the Platonic motivation: to distinguish essence from appearance, intelligible from sensible, Idea from image, original from copy, and model from simulacrum. But we already see that these expressions are not equivalent. The distinction wavers between two sorts of images. Copies are secondary possessors. They are well-founded pretenders, guaranteed by resemblance; simulacra are like false pretenders, built upon a dissimilarity, implying an essential perversion or a deviation. It is in this sense that Plato divides in two the domain of images-idols: on one hand there are copies-icons, on the other there are simulacra-phantasms.' We are now in a better position to define the totality of the Platonic motivation: it has to do with selecting among the pretenders, distinguishing good and bad copies or, rather, copies (always well-founded) and simulacra (always engulfed in dissimilarity). It is a question of assuring the triumph of the copies over simulacra, of repressing simulacra, keeping them completely submerged, preventing them from climbing to the surface, and "insinuating them-selves" everywhere.
우리는 플라톤적 동기, 즉 본질과 외관, 이해 가능한 것과 합리적인 것, 아이디어와 이미지,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시뮬라크르를 구분하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러한 표현들이 동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이미지 사이에서 구분은 흔들린다. 사본들은 2차 소유자입니다. 모조품은 유사성에 의해 보장되는 근거가 있는 가짜이지만, 시뮬라크르는 본질적인 왜곡이나 일탈을 암시하는 유사성에 기반한 거짓 모조품과 같습니다. 플라톤이 이미지-우상의 영역을 두 가지로 나눈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입니다. 한편에는 복제물-아이콘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시뮬라크르-환상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플라톤적 동기의 총체를 정의할 수 있는 더 나은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방자들 중에서 선택하거나, 좋은 모방과 나쁜 모방을 구별하거나, 오히려 모방(항상 근거가 있는)과 시뮬라크르(항상 불일치에 휩싸인)를 구별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뮬라크르에 대한 모방의 승리를 보장하고, 시뮬라크르를 억압하고, 완전히 잠겨 있게 하고,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모든 곳에서 "스스로를 암시"하는 문제입니다.
The great manifest duality of Idea and image is present only in this goal: to assure the latent distinction between the two sorts of images and to give a concrete criterion. For if copies or icons are good images and are well-founded, it is because they are endowed with resemblance. But resemblance should not be understood as an external relation. It goes less from one thing to another than from one thing to an Idea, since it is the Idea which comprehends the relations and proportions constitutive of the internal essence. Being both internal and spiritual, resemblance is the measure of any pretension. The copy truly resembles something only to the degree that it resembles the Idea of that thing. The pretender conforms to the object only insofar as he is modeled (internally and spiritually) on the Idea. He merits the quality (the quality of being just, for example) only insofar as he has founded himself on the essence (justice). In short, it is the superior identity of the Idea which founds the good pretension of the copies, as it bases it on an internal or derived resemblance. Consider now the other species of images, namely, the simulacra. That to which they pretend (the object, the quality, etc.), they pretend to underhandedly, under cover of an aggression, an insinuation, a subversion, "against the father,» and without passing through the Idea. Theirs is an unfounded pretension, concealing a dissimilarity which is an internal unbalance.
이데아와 이미지의 명백한 이중성은 두 종류의 이미지 사이의 잠복된 구별을 보장하고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는 이 목표에만 존재합니다. 모방이나 아이콘이 좋은 이미지이고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유사성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사성을 외적인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내적 본질을 구성하는 관계와 비율을 포괄하는 것이 이데아이기 때문에 그것은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물에서 이데아로 이동합니다. 내적이면서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유사성은 모든 가식의 척도입니다. 모방은 그 사물의 이데아와 닮은 정도까지만 진정으로 닮은 것입니다. 가장하는 사람은 이데아를 (내면적으로나 영적으로) 모델로 삼는 한에서만 대상에 부합합니다. 그는 본질 (정의)에 기초한 한에서만 품질 (예를 들어 정의로운 품질)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요컨대, 이데아의 우월한 동일성은 내적 또는 파생된 유사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모방의 선한 가식의 근거가 됩니다. 이제 다른 종류의 이미지, 즉 시뮬라크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가장하는 것(대상, 질 등)은 이데아를 거치지 않고 침략, 암시, 전복, "아버지에 대한" 전복을 은밀하게 가장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것은 근거없는 가식이며 내부적 불균형인 불일치를 숨기고 있습니다.
If we say of the simulacrum that it is a copy of a copy, an infinitely degraded icon, an infinitely loose resemblance, we then miss the essential, that is, the difference in nature between simulacrum and copy, or the aspect by which they form the two halves of a single division. The copy is an image endowed with resemblance, the simulacrum is an image without resemblance. The catechism, so much inspired by Platonism, has familiarized us with this notion. God made man in his image and resemblance. Through sin, however, man lost the resemblance while maintaining the image. We have become simulacra. We have forsaken moral existence in order to enter into aesthetic existence. This remark about the catechism has the advantage of emphasizing the demonic character of the simulacrum. Without doubt, it still produces an effect of resemblance; but this is an effect of the whole, completely external and produced by totally different means than those at work within the model. The simulacrum is built upon a disparity or upon a difference. It internalizes a dissimilarity. This is why we can no longer define it in relation to a model imposed on the copies, a model of the Same from which the copies' resemblance derives. If the simulacrum still has a model, it is another model, a model of the Other (l'Autre) from which there flows an internalized dissemblance.
시뮬라크르에 대해 사본의 사본, 무한히 저하된 아이콘, 무한히 느슨한 닮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본질적인 것, 즉 시뮬라크르와 사본의 본질적 차이, 즉 두 가지가 하나의 분할의 두 반쪽을 형성하는 측면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본은 닮은꼴이 부여된 이미지이고, 시뮬라크르는 닮은꼴이 없는 이미지입니다. 플라톤주의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교리문답은 우리에게 이 개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과 닮은 모습으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인간은 형상을 유지하면서 닮은 꼴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시뮬라크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미적 존재로 들어가기 위해 도덕적 존재를 버렸습니다. 교리 문답에 대한 이 발언은 시뮬라크르의 악마적 성격을 강조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여전히 닮은 효과를 만들어 내지만, 이것은 완전히 외부의 효과이며 모델 내에서 작동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단에 의해 생성된 전체적인 효과입니다. 시뮬라크르는 격차 또는 차이 위에 구축됩니다. 시뮬라크르는 차이를 내면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모사본에 부과된 모델, 즉 모사본의 유사성이 파생되는 동일성의 모델과 관련하여 모사본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시뮬라크르에 여전히 모델이 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델, 즉 내면화된 상이함이 흘러나오는 타자(l'Autre)의 모델입니다.
Take for instance the great Platonic trinity of the user, the producer, and the imitator. If the user is placed at the top of the hierarchical ladder, it is because he evaluates ends and has at his disposal true knowledge (savoir), which is knowledge of the model or Idea. The copy can be called an imitation, to the degree that it reproduces the model; since this imitation is noetic, spiritual, and internal, however, it is a veritable production ruled by the relations and proportions constitutive of the essence. There is always a productive operation in the good copy and, corresponding to this operation, a right opinion, if not knowledge. We see, then, that imitation is destined to take on a pejorative sense to the extent that it is now only a simulation, that is applies to the simulacrum and designates only the external and nonproductive effect of resemblance, that is, an effect obtained by ruse or subversion. There is no longer even right opinion, but rather a sort of ironic encounter which takes the place of a mode of knowledge, an art of encounter that is outside knowledge and opinion.* Plato specifies how this nonproductive effect is obtained: the simulacrum implies huge dimensions, depths, and distances that the observer cannot master. It is precisely because he cannot master them that he experiences an impression of resemblance. This simulacrum includes the differential point of view; and the observer becomes a part of the simulacrum itself, which is transformed and deformed by his point of view. In short, there is in the simulacrum a becoming-mad, or a becoming unlimited, as in the Philebus where "more and less are always going a point further," a becoming always other, a becoming subversive of the depths, able to evade the equal, the limit, the Same, or the Similar: always more and less at once, but never equal. To impose a limit on this becoming, to order it according to the same, to render it similar -and, for that part which remains rebellious, to repress it as deeply as possible, to shut it up in a cavern at the bottom of the Ocean- such is the aim of Platonism in its will to bring about the triumph of icons over simulacra.
예를 들어 사용자, 생산자, 모방자라는 플라톤의 위대한 삼위일체를 생각해 보세요. 사용자가 계층적 사다리의 맨 위에 위치한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을 평가하고 모델 또는 이데아에 대한 지식인 진정한 지식(노하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방은 모델을 재현한다는 점에서 모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 모방은 무의식적이고 영적이며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에 본질을 구성하는 관계와 비율에 의해 지배되는 진정한 생산이다. 좋은 카피에는 항상 생산적인 작업이 있으며, 이 작업에 상응하는 올바른 의견은 지식은 아니더라도 올바른 의견이 있습니다. 따라서 모방은 이제 시뮬레이션에 불과하고 시뮬라크르에 적용되며 유사성의 외형적이고 비생산적인 효과, 즉 계략이나 전복에 의해 얻은 효과만을 지정하는 정도까지 경멸적인 의미를 가질 운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올바른 의견이 아니라 지식의 방식을 대신하는 일종의 아이러니한 만남, 지식과 의견 바깥에 있는 만남의 기술입니다.* 플라톤은 이 비생산적인 효과가 어떻게 얻어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시뮬라크르는 관찰자가 마스터할 수 없는 거대한 차원, 깊이, 거리를 의미합니다. 그가 그것들을 마스터 할 수 없기 때문에 닮은 인상을 경험합니다. 이 시뮬라크르에는 미분적 관점이 포함되며, 관찰자는 자신의 관점에 의해 변형되고 변형되는 시뮬라크르 자체의 일부가 됩니다. 요컨대, 시뮬라크르에는 필레버스에서처럼 "더 많고 적은 것이 항상 한 점 더 나아가는", 항상 다른 것이 되는, 깊이를 전복하는, 같음, 한계, 같음 또는 비슷함을 회피할 수 있는, 항상 한 번에 더 많고 적지만 결코 같지 않은, 광적인 되기, 또는 무한한 되기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이 되기에게 한계를 부과하고, 동일성에 따라 질서화하고, 유사하게 만들고, 반항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깊이 억압하여 바다 밑 동굴에 가두는 것, 이것이 시뮬라크르에 대한 아이콘의 승리를 가져오고자 하는 플라톤주의의 목표입니다.
Platonism thus founds the entire domain that philosophy will later recognize as its own: the domain of representation filled by copies-icons, and defined not by an extrinsic relation to an object, but by an intrinsic relation to the model or foundation. The Platonic model is the Same, in the sense that Plato says that Justice is nothing more than just, Courage nothing other than courageous, etc. -the abstract determination of the foundation as that which possesses in a primary way (en premier). The Platonic copy is the Similar: the pretender who possesses in a secondary way. To the pure identity of the model or original there corresponds an exemplary similitude; to the pure resemblance of the copy there corresponds the similitude called imitative. We should not think, however, that Platonism develops this power of representation only for itself: it is satisfied with staking out this domain, that is, founding it, selecting it, and excluding from it everything that might come to blur its limits. The deployment of representation as a well-founded, limited, and finite representation is rather Aristotle's object: representation runs through and covers over the entire domain, extending from the highest genera to the smallest species, and the method of division takes on its traditional fascination with specification which it did not yet have in Plato. We may also determine a third moment when, under the influence of Christianity, one no longer seeks only to establish a foundation for representation or to make it possible, nor to specify or determine it as finite. Now one tries to render it infinite, to endow it with a valid claim to the unlimited, to make it conquer the infinitely great as well as the infinitely small, opening it up to Being beyond the highest genera and to the singular beneath the smallest species.
따라서 플라톤주의는 훗날 철학이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게 될 전체 영역, 즉 사본-아이콘으로 채워지고 대상과의 외재적 관계가 아니라 모델 또는 근거와의 내재적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표상의 영역을 발견합니다. 플라톤이 정의는 정의로운 것, 용기는 용기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말한 것처럼 플라톤의 모델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근거에 대한 추상적 결정은 일차적으로 소유하는 것(en premier)과 동일합니다. 플라톤의 사본은 유사한 것, 즉 이차적인 방식으로 소유하는 척하는 사람입니다. 모델 또는 원본의 순수한 동일성에는 모범적 유사성이, 사본의 순수한 유사성에는 모방적 유사성이 대응합니다. 그러나 플라톤주의가 이러한 표상의 힘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발전시켰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플라톤주의는 이 영역을 확립하고, 선택하고, 그 한계를 흐리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잘 근거된 것으로서의 표상과 제한되고 유한한 표상의 배치는 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대상이다: 표상은 가장 높은 속에서부터 가장 작은 종에 이르기까지 전체 영역을 관통하고 포괄하며, 구분의 방법은 플라톤에게는 아직 없었던 명료성에 대한 전통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기독교의 영향으로 더 이상 표상을 위한 근거를 세우거나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거나 유한한 것으로 규정하거나 구체화하려고 하지 않는 세 번째 순간을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이제 사람은 그것을 무한하게 만들고, 무한한 것에 대한 타당한 주장을 부여하고, 무한히 큰 것과 무한히 작은 것을 정복하고, 가장 높은 속을 넘어서는 존재와 가장 작은 종 아래의 단수에게 개방하려고 시도합니다.
Leibniz and Hegel marked this attempt with their genius. But they too do not get beyond the element of representation, since the double exigency of the Same and the Similar is retained. Simply put, the Same had found an unconditioned principle capable of making it the ruler of the unlimited: sufficient reason; and the Similar has found a condition capable of being applied to the unlimited: convergence or continuity. In fact, a notion like the Leibnizian "compossibility" means that, with the monads being assimilated to singular points, each series which converges around one of these points is extended in other series which converge around other points; another world begins in the vicinity of points which would bring about the divergence of the obtained series. We see therefore how Leibniz excludes divergence by distributing it into "incompossibles," and by retaining maximum convergence or continuity as the criterion of the best possible world, that is, of the real world (Leibniz presents the other worlds as less well-founded "pretenders"). The same applies to Hegel. It has recently been pointed out to what extent the circles of dialectics revolve around a single center, to what extent they rely on a single center. Whether in monocentric circles or in converging series, philosophy does not free itself from the element of representation when it embarks upon the conquest of the infinite. Its intoxication is a false appearance. It always pursues the same task, Iconology, and adapts it to the speculative needs of Christianity (the infinitely small and the infinitely large). Always the selection among pretenders, the exclusion of the eccentric and the divergent, in the name of a superior finality, an essential reality, or even a meaning of history.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이 시도를 그들의 천재성으로 표식했습니다. 그러나 동일성과 유사성의 이중적 필연성이 유지되기 때문에 이들 역시 표상의 요소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같음은 무한한 것의 지배자가 될 수 있는 조건 없는 원리, 즉 충분한 이성을 발견했고, 같음은 무한한 것에 적용될 수 있는 조건, 즉 수렴 또는 연속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사실 라이프니츠의 "공가능성"과 같은 개념은 모나드들이 단일한 점으로 동화될 때, 이러한 점 중 하나를 중심으로 수렴하는 각 계열은 다른 점을 중심으로 수렴하는 다른 계열로 확장되고, 획득한 계열의 발산을 가져올 수 있는 점 근처에서 다른 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라이프니츠가 발산을 '불가능한 것들'로 분배하고 최대 수렴 또는 연속성을 가능한 최상의 세계, 즉 현실 세계의 기준으로 유지함으로써 발산을 배제하는 방법을 볼 수 있습니다(라이프니츠는 다른 세계를 근거가 부족한 '가짜'로 제시합니다). 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변증법의 원이 어느 정도까지 단일 중심을 중심으로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까지 단일 중심에 의존하는지에 대한 지적이 최근에 제기되었습니다. 단일 중심 원이든 수렴하는 계열이든, 철학은 무한의 정복에 착수 할 때 표상의 요소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것의 취함은 거짓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항상 동일한 과제인 도상학을 추구하며, 그것을 기독교의 사변적 필요(무한히 작은 것과 무한히 큰 것)에 적응시킵니다. 항상 우월한 최종성, 본질적인 실재, 심지어 역사의 의미라는 이름으로 가식적인 것들 사이에서 선택되고, 괴상한 것과 다른 것을 배제합니다.
Aesthetics suffers from a wrenching duality. On one hand, it designates the theory of sensibility as the form of possible experience; on the other hand, it designates the theory of art as the reflection of real experience. For these two meanings to be tied together, the conditions of experience in general must become conditions of real experience; in this case, the work of art would really appear as experimentation. We know, for example, that certain literary procedures (the same holds for other arts) permit several stories to be told at once. This is, without doubt, the essential characteristic of the modern work of art. It is not at all a question of different points of view on one story supposedly the same; for points of view would still be submitted to a rule of convergence. It is rather a question of different and divergent stories, as if an absolutely distinct landscape corresponded to each point of view. There is indeed a unity of divergent series insofar as they are divergent, but it is always a chaos perpetually thrown off center which becomes one only in the Great Work. This unformed chaos, the great letter of Finnegans Wake, is not just any chaos: it is the power of affirmation, the power to affirm all the heterogeneous series- it "complicates" within itself all the series (hence the interest of Joyce in Bruno as the theoretician of the complicatio). Between these basic series, a sort of internal resonance is produced; and this resonance induces a forced movement, which goes beyond the series themselves. These a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simulacrum, when it breaks its chains and rises to the surface: it then affirms its phantasmatic power, that is, its repressed power. Freud has already shown how the phantasm results from at least two series, one infantile and the other post-pubescent. The affective charge associated with the phantasm is explained by the internal resonance whose bearers are the simulacra. The impression of death, of the rupture or dismembering of life, is explained by the amplitude of the forced movement which carries them along. Thus the conditions of real experience and the structures of the work of art are reunited: divergence of series, decentering of circles, constitution of the chaos which envelops them, internal resonance and movement of amplitude, aggression of the simulacra."
미학은 지독한 이중성을 앓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감성 이론을 가능한 경험의 형태로 지정하고, 다른 편으로는 예술 이론을 실제 경험의 반영으로 지정합니다. 이 두 가지 의미가 하나로 묶이려면 일반적인 경험의 조건이 실제 경험의 조건이 되어야 하며, 이 경우 예술 작품은 정말 실험으로 보여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특정 문학적 절차(다른 예술도 마찬가지입니다)를 통해 한 번에 여러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대 예술 작품의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같은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다른 관점들에 대한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이 경우 관점은 여전히 수렴의 규칙에 복종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각 관점에 절대적으로 다른 풍경이 상응하는 것처럼 서로 다르고 다양한/발산하는 이야기의 문제입니다. 발산하는 한에서 발산하는 계열의 통일성은 실제로 존재하지만, 그것은 항상 중심에서 끊임없이 벗어난 혼돈이며, 위대한 작업에서만 하나가 됩니다. 이 형성되지 않은 혼돈, 즉 『피네건의 경야』의 위대한 문자는 단순한 혼돈이 아니라 긍정의 힘, 모든 이질적인 계열을 긍정하는 힘이며, 모든 계열을 그 자체로 '복잡하게' 만든다(따라서 조이스에게 브루노가 복잡성의 이론가로서 관심을 보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계열들 사이에서 일종의 내부 공명이 발생하고, 이 공명은 계열 자체를 뛰어넘는 강력한 움직임을 유도합니다. 이것이 시뮬라크르가 사슬을 끊고 표면으로 떠오를 때 나타나는 특징이며, 그 때 시뮬라크르는 자신의 환상적 힘, 즉 억압된 힘을 확인합니다. 프로이트는 이미 환상이 적어도 두 가지 계열, 즉 유아기와 사춘기 이후의 두 가지 계열에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환상과 관련된 정서적 감응을 시뮬라크르라고 부르는 내부 공명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인상, 생명의 파열 또는 절단은 그것들을 운반하는 강제적인 움직임의 진폭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실제 경험의 조건과 예술 작품의 구조는 계열들의 발산/다양성, 원의 탈중심화, 원을 감싸는 혼돈의 구성, 내부 공명 및 진폭의 움직임, 시뮬라크라의 공격성 등을 통해서 재결합됩니다."
Such systems, constituted by placing disparate elements or heterogeneous series in communication, are in a sense quite common. They are signal-sign systems. The signal is a structure in which differences of potential are distributed, assuring the communication of disparate components: the sign is what flashes across the boundary of two levels, between two communicating series. Indeed, it seems that all phenomena respond to these conditions inasmuch as they find their ground in a constitutive dissymmetry, difference, or inequality. All physical systems are signals; all qualities are signs. It is true, however, that the series which border them remain external. By the same token, the conditions of their reproduction remain external to phenomena. In order to speak of simulacra, it is necessary for the heterogeneous series to be really internalized in the system, comprised or complicated in the chaos. Their differences must be inclusive. There is always, no doubt, a resemblance between resonating series, but this is not the problem. The problem is rather in the status and the position of this resemblance. Let us consider the two formulas: "only that which resembles differs" and "only differences can resemble each other." These are two distinct readings of the world: one invites us to think difference from the standpoint of a previous similitude or identity; whereas the other invites us to think similitude and even identity as the product of a deep disparity. The first reading precisely defines the world of copies or representations; it posits the world as icon. The second, contrary to the first, defines the world of simulacra; it posits the world itself as phantasm. From the point of view of this second formula, therefore, it matters little whether the original disparity, upon which the simulacrum is built, it great or small; it may happen that the basic series have only a slight difference between them. It suffices that the constitutive disparity be judged in itself, not prejuding any previous identity, and that the disparate (le dispars) be the unity of measure and communication. Resemblance then can be thought only as the product of this internal difference. It matters little whether the system has great external and slight internal difference, or whether the opposite is the case, provided that resemblance be produced on a curve, and that difference, whether great or small, always occupy the center of the thus decentered system.
소통에 이질적인 요소 또는 이질적인 계열을 배치하여 구성되는 이러한 시스템은 어떤 의미에서 매우 일반적입니다. 바로 신호-기호 시스템입니다. 신호는 잠재적 차이가 분산되어 서로 다른 구성 요소의 소통을 보장하는 구조이며, 기호는 두 층위의 경계를 가로질러 두 소통 계열 사이에서 번쩍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든 현상이 구성적 비대칭, 차이 또는 불균등에서 그 토대를 찾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조건에 대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모든 물리적 시스템은 신호이며, 모든 성질은 신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경계 짓는 계열은 외부에 남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재생산 조건도 현상의 외부에 남아 있습니다. 시뮬라크르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계열이 혼돈 속에서 구성되거나 복잡해져 시스템에서 실제로 내재화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의 차이점은 포용적이어야합니다. 공명하는 계열 사이에는 의심 할 여지없이 항상 유사성이 있지만 이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오히려 이 유사성의 상태와 위치에 있습니다. 두 가지 공식을 고려해 봅시다: "닮은 것만 다르다"와 "차이점만 서로 닮을 수 있다"입니다. 하나는 이전의 유사성이나 동일성의 관점에서 차이를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반면, 다른 하나는 유사성이나 동일성까지도 깊은 불일치의 산물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두 가지 다른 세계 읽기입니다. 첫 번째 읽기는 모방 또는 표상의 세계를 정확하게 정의하고 세계를 아이콘으로 상정합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달리 시뮬라크르의 세계를 정의하며, 세계 자체를 환상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두 번째 공식의 관점에서 볼 때 시뮬라크르가 구축되는 원래의 불일치가 크든 작든, 기본 계열 사이에 약간의 차이 만있을 수 있습니다. 구성적 불일치는 이전의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고 그 자체로 판단되는 것으로 충분하며, 이질성(르 디스파르)은 측정과 의사소통의 통일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사성은 이러한 내적 차이의 산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외부적으로 큰 차이를 가지고 있든 내부적으로 약간의 차이를 가지고 있든, 또는 그 반대의 경우, 유사성을 곡선 위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따라서 차이는 그것이 크건 작건 간에 항상 탈중심화된 시스템의 중심을 차지한다.
So "to reverse Platonism" means to make the simulacra rise and to affirm their rights among icons and copies. The problem no longer has to do with the distinction Essence-Appearance or Model-Copy. This distinction operates completely within the world of representation. Rather, it has to do with undertaking the subversion of this world-the "twilight of the idols." The simulacrum is not a degraded copy. It harbors a positive power which denies the original and the copy, the mode and the reproduction. At least two divergent series are internalized in the simulacrum- neither can be assigned as the original, neither as the copy. It is not even enough to invoke a model of the Other, for no model can resist the vertigo of the simulacrum. There is no longer any privileged point of view except that of the object common to all points of view. There is no possible hierarchy, no second, no third. Resemblance subsists, but it is produced as the external effect of the simulacrum, inasmuch as it is built upon divergent series and makes them resonate. Identity subsists, but it is produced as the law which complicates all the series and makes them all return to each one in the course of the forced movement. In the reversal of Platonism, resemblance is said of internalized difference, and identity of the Different as primary power. The same and the similar no longer have an essence except as simulated, that is as expressing the functioning of the simulacrum. There is no longer any possible selection. The non-hierarchized work is a condensation of coexistences and a simultaneity of events. It is the triumph of the false pretender. It simulates at once the father, the pretender, and the fiancé in a superimposition of masks. But the false pretender cannot be called false in relation to a presupposed model of truth, no more than simulation can be called an appearance or an illusion. Simulation is the phantasm itself, that is, the effect of the functioning of the simulacrum as machinery -a Dionysian machine. It involves the false as power, Pseudos, in the sense in which Nietzsche speaks of the highest power of the false. By rising to the surface, the simulacrum makes the Same and the Similar, the model and the copy, fall under the power of the false (phantasm). It renders the order of participation, the fixity of distribution, the determination of the hierarchy impossible. It establishes the world of nomadic distributions and crowned anarchies. Far from being a new foundation, it engulfs all foundations, it assures a universal breakdown (effondrement), but as a joyful and positive event, as an un-founding (effondement): "behind each cave another that opens still more deeply, and beyond each surface a subterranean world yet more vast, more strange. Richer still . .. and under all foundations, under every ground, a subsoil still more pro-found." How would Socrates be recognized in these caverns, which are no longer his? With what thread, since the thread is lost? How would he exit from them, and how could he still distinguish himself from the Sophist?
따라서 "플라톤주의를 뒤집는다는 것"은 시뮬라크르를 등장시키고 아이콘과 사본 사이에서 그들의 권리를 확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더 이상 본질-외관 또는 모델-사본이라는 구분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 구분은 표상의 세계 내에서 완전히 작동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계를, 즉 "우상의 황혼"을, 전복하는 일에 착수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시뮬라크르는 타락한 복제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본과 사본, 양식과 재생산을 부정하는 긍정적인 힘을 품고 있습니다. 시뮬라크르에는 적어도 두 개의 서로 다른 발산하는/분기하는 계열이 내재화되어 있는데, 어느 것도 원본이나 사본으로 지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모델도 시뮬라크르의 현기증에 저항할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모델을 호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모든 관점에 공통된 대상에 대한 관점 외에는 특권적인 관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위계도,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없습니다. 유사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시뮬라크르의 외부 효과로서 생성되며, 그것은 서로 다른 계열에 구축되어 공명을 일으킵니다. 동일성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모든 계열을 복잡하게 만들고 그들 각각을 강제적 운동으로 돌아가게끔 만드는 법칙으로서 생산됩니다. 플라톤주의의 역전에서 유사성은 내면화된 차이, 동일성은 일차적 힘으로서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같은 것과 비슷한 것은 더 이상 시뮬라크르의 기능을 표현하는 시뮬라크르 외에는 본질을 갖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위계화되지 않은 작품은 공존의 응축이자 사건들의 동시성입니다. 그것은 거짓의 척하는 자의 승리입니다. 가면의 중첩으로 아버지, 가장, 약혼자를 한 번에 시뮬레이션합니다. 그러나 거짓의 척하는 사람은 전제된 진실의 모델과 관련하여 거짓이라고 할 수 없으며, 시뮬레이션을 외모나 환상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시뮬레이션은 환상 그 자체, 즉 기계로서의 시뮬라크르의 기능, 즉 디오니소스적 기계의 효과입니다. 여기에는 니체가 말한 거짓의 최고 힘에 대한 의미에서 힘으로서의 거짓, 즉 유사(Pseudos)가 포함됩니다. 시뮬라크르는 표면으로 떠오름으로써 같은 것과 비슷한 것, 모델과 모방이 거짓(허상)의 힘 아래 놓이게 합니다. 그것은 참여의 질서, 분배의 고정성, 위계의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그것은 유목적인 분배와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의 세계를 확립합니다. 새로운 토대가 아니라 모든 토대를 집어삼키고, 보편적 붕괴(에퐁드르)를 보장하지만, 비토대(에퐁드르)로서 즐겁고 긍정적인 사건입니다: "각 동굴 뒤에는 더 깊게 열리는 또 다른 동굴이 있고, 각 표면 너머에는 더 광대하고 더 기묘한 지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토대 아래, 모든 땅 아래에는 여전히 더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지층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이 동굴에서 어떻게 인식될 수 있었을까요? 실이 끊어졌으니 어떤 실로? 그는 어떻게 그들로부터 빠져 나올 것이며 어떻게 여전히 소피스트와 자신을 구별 할 수 있습니까?
That the Same and the Similar may be simulated does not mean that they are appearances or illusions. Simulation designates the power of producing an effect. But this is not intended only in a causal sense, since causality would remain completely hypothetical and indeterminate without the intervention of other meanings. It is intended rather in the sense of a "sign" issued from a process of signalization; it is in the sense of a "costume," or rather a mask, expressing a process of disguising, where, behind each mask, there is yet another. ... Simulation understood in this way is inseparable from the eternal return, for it is in the eternal return that the reversal of the icons or the subversion of the world of representation is decided. Everything happens here as if a latent content were opposed to a manifest content. The manifest content of the eternal return can be determined in conformity to Platonism in general. It represents then the manner in which chaos is organized by the action of the demiurge, and on the model of the Idea which imposes the same and the similar on him. The eternal return, in this sense, is becoming-mad, which is mastered, monocentric, and determined to copy the eternal. Indeed, this is how it appears in the founding myth. It establishes the copy in the image and subordinates the image to resemblance. Far from representing the truth of the eternal return, however, this manifest content marks rather the utilization and survival of the myth in an ideology which no longer supports it, and which has lost its secret. We would do well to recall to what extent the Greek soul in general, and Platonism in particular, loathed the eternal return in its latent signification. I Nietzsche was right when he treated the eternal return as his own vertiginous idea, an idea nourished only by esoteric Dionysian sources, ignored or repressed by Platonism. To be sure, Nietzsche a few times made statements that remained at the level of the manifest content: the eternal return as the Same which brings about the return of the Similar. But how can one not see the disproportion between this flat, natural truth, which does not go beyond a generalized order of the seasons, and Zarathustra's emotion? Furthermore, the manifest statement exists only to be refuted dryly by Zarathustra. Once to the dwarf and again to his animals, Zarathustra reproaches their transforming into a platitude what is otherwise profound, what belongs to another music into an "old refrain," and what would otherwise be tortuous into circular simplicity. In the eternal return, one must pass through the manifest content, but only in order to reach the latent content situated a thousand feet below (the cave behind every cave ...). Thus, what appeared to Plato to be only a sterile effect reveals in itself the intractability of masks and the impassibility of signs.
같음과 비슷함이 시뮬레이션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외관이나 환상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시뮬레이션은 효과를 만들어내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과관계는 다른 의미의 개입 없이는 완전히 가설적이고 불확실한 것으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인과적인 의미로만 의도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신호화 과정에서 나오는 '기호'의 의미로 의도되며, 각 가면 뒤에 또 다른 가면이 있는 변장 과정을 표현하는 '의상' 또는 오히려 가면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 이런 식으로 이해되는 시뮬레이션은 영원 회귀와 분리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콘의 반전이나 표상 세계의 전복이 결정되는 것은 영원 회귀에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마치 잠재적 내용이 명시적 내용에 반대되는 것처럼 여기서 일어납니다. 영원 회귀의 현시적인 내용은 일반적인 플라톤주의에 순응함에 따라 규정될 수 있다. 그것은 소멸자의 행동에 의해 혼돈이 조직되는 방식과 그에게 동일하고 유사한 것을 부과하는 이데아의 모델을 나타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원회귀는 미쳐가는 것, 즉 지배당하고, 단일한 중심이 되고, 영원한 것을 모방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이 건국 신화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이미지에 사본을 설정하고 이미지를 유사성에 종속시킵니다. 그러나 이 현시적인 내용은 영원회귀의 진실을 표상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이상 신화를 지지하지 않고 그것이 비밀을 잃어버린 이데올로기 속에서 신화의 활용과 생존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리스 영혼, 특히 플라톤주의가 그 잠재적 기호작용에서의 영원회귀를 얼마나 혐오했는지를 상기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플라톤주의에 의해 무시되거나 억압된, 오로지 난해한 디오니소스적 원천에 의해서만 자양분을 공급받는 자신의 고독한 사상으로 취급했을 때 니체는 옳았다. 물론 니체는 몇 번이나 현시적인 내용, 즉 유사한 것의 귀환을 가져오는 같음으로서의 영원회귀라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계절의 일반화된 질서를 넘어서지 않는 이 평면적이고 자연적인 진리와 자라투스트라의 감정 사이의 불균형을 어떻게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선언문은 자라투스트라에 의해 건조하게 반박당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자라투스트라는 난쟁이에게, 그리고 다시 그의 동물들에게, 그들이 심오할 수 있는 것을 진부한 것으로, 다른 음악에 속하는 것을 '오래된 후렴구'로, 복잡할 수 있는 것을 순환적인 단순함으로 변질시켰다고 비난한다. 영원한 회귀에서 누군가는 현시하는 내용을 통과해야만 천 피트 아래에 있는 잠재적 내용(모든 동굴 뒤에 있는 동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에게 단지 무균 효과로만 보이는 것은 그 자체로 가면의 난해함과 기호의 불가해성을 드러냅니다.
The secret of the eternal return is that it does not express an order opposed to the chaos engulfing it. On the contrary, it is nothing other than chaos itself, or the power of affirming chaos There is a point where Joyce is Nietzschean when he shows that the vicus of recirculation can not affect and cause a "chaosmos" to revolve. To the coherence of representation, the eternal return substitutes something else entirely-its own chaodyssey (chao-errance). Between the eternal return and the simulacrum, there is such a profound link that the one cannot be understood except through the other. Only the divergent series, insofar as they are divergent, return: that is, each series insofar as it displaces its difference along with all the others, and all series insofar as they complicate their difference within the chaos which is without beginning or end. The circle of the eternal return is a circle which is always ex-centric in relation to an always decentered center. Klossowski is right to say of the eternal return that it is a "simulacrum of a doctrine": it is indeed Being (Être), but only when "being" (étant) is the simulacrum." The simulacrum functions in such a way that a certain resemblance is necessarily thrown back onto its basic series and a certain identity necessarily projected on the forced movement. Thus, the eternal return is, in fact, the Same and the Similar, but only insofar as they are simulated, produced by the simulation, through the functioning of the simulacrum (will to power). It is in this sense that it reverses representation and destroys the icons. It does not presuppose the Same and the Similar; on the contrary, it constitutes the only Same -the Same of that which differs, and the only resemblance- the resemblance of the unmatched. It is the unique phantasm of all simulacra (the Being of all beings). It is the power to affirm divergence and decentering and makes this power the object of a superior affirmation. It is under the power of the false pretender causing that which is to happen again and again. And it does not make everything come back. It is still selective, it "makes a difference," but not at all in the manner of Plato. What is selected are all the procedures opposed to selection; what is excluded, what is made not to return, is that which presupposes the Same and the Similar, that which pretends to correct divergence, to recenter the circles or order the chaos, and to provide a model or make a copy. For all its long history, Platonism happened only once, and Socrates fell under the blade. For the Same and the Similar become simple illusions when they cease to be simulated.
영원회귀의 비밀은 그것이 그것을 휩쓸고있는 혼돈에 반대되는 질서를 표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혼돈 그 자체, 즉 혼돈을 긍정하는 힘에 다름 아닙니다. 재순환의 비쿠스가 '카오스모스'에 영향을 미치고 회전을 일으킬 수 없음을 보여줄 때 조이스에게 니체적인 지점이 있습니다. 표상의 일관성에서 영원회귀는 완전히 다른 것, 즉 그 자체의 카오디세이(차오-에르랑스)를 대체합니다. 영원회귀와 시뮬라크르 사이에는 한쪽을 통하지 않고는 다른 한쪽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심오한 연결고리가 있습니다. 발산하는 계열만이, 발산하는 한에서만, 즉 각 계열이 다른 모든 계열과 함께 그 차이를 변위하는 한에서만, 그리고 모든 계열이 시작도 끝도 없는 혼돈 속에서 그 차이를 복잡하게 하는 한에서만 되돌아옵니다. 영원회귀의 원은 항상 중심을 잃지 않는 중심과 관련하여 항상 중심을 벗어난 원입니다. 클로소프스키는 영원회귀에 대해 "교리의 시뮬라크르"라고 말한 것이 옳다: 그것은 참으로 존재(Être)이지만, "존재"(에탕)가 시뮬라크르일 때만 존재한다."라고 말합니다. 시뮬라크르는 어떤 유사성이 필연적으로 기본 계열에 다시 던져지고 어떤 동일성이 필연적으로 강제적인 움직임에 투영되는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사실 동일함과 유사함이지만, 시뮬라크르의 기능('힘에 대한 의지')을 통해 시뮬라크르에 의해 시뮬레이션되고, 시뮬레이션에 의해 생산되는 한에서만 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표상을 뒤집고 아이콘을 파괴합니다. 그것은 동일함과 유사함을 전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것의 유일한 동일함, 다른 것의 유일한 유사함, 비할 데 없는 것의 유사성을 구성합니다. 그것은 모든 시뮬라크르(모든 존재의 존재)의 유일한 환상입니다. 그것은 발산과 탈중심화를 긍정하는 힘이며, 이 힘을 우월한 긍정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거짓된 위장자의 힘에 의해 반복해서 일어날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되돌아오게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여전히 선별적이며 "차이를 만들지만" 플라톤의 방식은 전혀 아닙니다. 선별되는 것은 선별에 반대되는 모든 절차이며, 배제되는 것, 같은 것과 비슷한 것을 전제로 하는 돌아오지 않는 것, 발산을 교정하는 척하는 것, 원을 재중심화하거나 혼돈을 질서화하는 것, 모델을 제공하거나 복사본을 만드는 것입니다. 플라톤주의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만 발생했고, 소크라테스는 그 칼날에 쓰러졌습니다. 같은 것과 비슷한 것은 시뮬레이션을 멈추면 단순한 환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Modernity is defined by the power of the simulacrum. It behooves philosophy not to be modern at any cost, no more than to be nontemporal, but to extract from modernity something that Nietzsche designated as the untimely, which pertains to modernity, but which must also be turned against it-"in favor, I hope, of a time to come." It is not in the great forests and woodpaths that philosophy is elaborated, but rather in the towns and in the streets -even in the most artificial (factice) in them. The untimely is attained in relation to the most distant past, by the reversal of Platonism; in relation to the present, by the simulacrum conceived as the edge of critical modernity; in relation to the future, it is attained by the phantasm of the eternal return as belief in the future. The artificial and the simulacrum are not the same thing. They are even opposed to each other. The artificial is always a copy of a copy, which should be pushed to the point where it changes its nature and is reversed into the simulacrum (the moment of Pop Art). Artifice and simulacrum are opposed at the heart of modernity, at the point where modernity settles all of its accounts, as two modes of destruction: the two nihilisms. For there is a vast difference between destroying in order to conserve and perpetuate the established order of representations, models, and copies, and destroying the models and copies in order to institute the chaos which creates, making the simulacra function and raising a phantasm - the most innocent of all destructions, the destruction of Platonism.
현대성은 시뮬라크르의 힘에 의해 정의됩니다. 철학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현대적이어서는 안 되는 만큼, 비시간적이어서는 안 되며, 니체가 현대성과 관련되어 있지만 "다가올 시대를 위해" 현대성에 반대해야만 하는 것을 현대성에서 추출해야만 합니다. 철학은 거대한 숲과 숲길이 아니라 마을과 거리, 심지어 가장 인공적인 (사실적인) 공간에서도 정교하게 구현됩니다. 가장 먼 과거와 관련하여서는 플라톤주의의 반전에 의해, 현재와 관련하여서는 비판적 근대성의 가장자리로 생각되는 시뮬라크르에 의해, 미래와 관련하여서는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영원회귀의 환상에 의해 시간적이지 않은 것이 달성된다. 인공적인 것과 시뮬라크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심지어 서로 반대됩니다. 인공적인 것은 항상 사본의 사본이며, 그 본질이 시뮬라크르로 바뀌고 뒤집어지는 지점(팝아트의 순간)까지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인공적인 것과 시뮬라크르는 모더니티의 핵심, 모더니티가 모든 것을 정산하는 지점에서 두 가지 파괴 방식, 즉 두 가지 허무주의로 대립합니다. 표상, 모델, 복제물의 확립된 질서를 보존하고 영속화하기 위해 파괴하는 것과, 시뮬라크르가 기능하도록 만들고 환상을 일으키는 혼돈을 제도화하기 위해 모델과 복제물을 파괴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모든 파괴 중 가장 무고한 파괴, 즉 플라톤주의의 파괴가 그것입니다.
2. Lucretius and the simulacrum 루크레티우스와 시뮬라크르
Following Epicurus, Lucretius was able to determine as "naturalism" the speculative and practical object of philosophy. His importance in philosophy is tied to this double determination.
에피쿠로스에 이어 루크레티우스는 철학의 사변적, 실천적 대상을 "자연주의"로 규정할 수 있었습니다. 철학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중요성은 바로 이 이중적 규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The products of Nature are inseparable from a diversity which is essential to them. But to think the diverse as diverse is a difficult task on which, according to Lucretius, all previous philosophies had run aground. In our world, natural diversity appears in three intertwined aspects: the diversity of species; the diversity of individuals which are members of the same species; and the diversity of the parts which together compose an individual. Specificity, individuality, and heterogeneity. There is no world which is not manifest in the variety of its parts, places, rivers, and the species which inhabit it. There is no individual absolutely identical to another individual; no calf which is not recognizable to its mother; no two shellfish or grains of wheat which are indiscernible. There is no body composed of homogeneous parts-neither plant nor stream which does not imply a diversity of matter or a heterogeneity of elements, where each animal species, in turn, may find the nourishment appropriate to it. From these three points of view, we can deduce the diversity of worlds themselves: worlds are innumer-able, often of different species, sometimes similar, and always composed of heterogeneous elements.
자연의 산물은 그것에 필수적인 다양성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을 다양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이전의 모든 철학이 좌초했던 어려운 과제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자연의 다양성은 종의 다양성, 같은 종의 구성원인 개체의 다양성, 개체를 구성하는 부분의 다양성 등 서로 얽혀 있는 세 가지 측면으로 나타납니다. 특이성, 개성, 이질성. 이 세상에는 다양한 부분, 장소, 강, 그리고 그 안에 서식하는 종의 다양성이 현시되지 않는 세계는 없습니다. 다른 개체와 완전히 동일한 개체는 없으며, 어미를 알아볼 수 없는 송아지도 없고, 두 개의 조개나 밀알들을 구별할 수 없는 것도 없습니다. 식물이나 시냇물처럼 물질의 다양성이나 요소의 이질성을 의미하지 않는 균질한 부분으로 구성된 신체는 없으며, 각 동물 종은 차례로 자신에게 적합한 영양분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관점에서 우리는 세계의 다양성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세계는 무수히 많으며, 때로는 다른 종으로 이루어져 있고, 때로는 유사하며, 항상 이질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What right have we to make this inference? Nature must be thought of as the principle of the diverse and its production. But a principle of the production of the diverse makes sense only if it does not assemble its own elements into a whole. We should not read this demand as circular, as if Epicurus and Lucretius had meant to say that the principle of the diverse had itself to be diverse. The Epicurean thesis is entirely different: Nature as the production of the diverse can only be an infinite sum, that is, a sum which does not totalize its own elements. There is no combination capable of encompassing all the elements of Nature at once, there is no unique world or total universe. Physis is not a determination of the One, of Being, or of the Whole. Nature is not collective, but rather distributive, to the extent that the laws of Nature (foedera naturae, as opposed to the so-called foedera fati) distribute parts which cannot be totalized. Nature is not attributive, but rather conjunctive: it expresses itself through "and," and not through "is." This and that-alternations and entwinings, resemblances and differences, attractions and distractions, nuance and abruptness. Nature is Harlequin's cloak, made entirely of solid patches and empty spaces; she is made of plenitude and void, beings and nonbeings, with each one of the two posing itself as unlimited while limiting the other. Being an addition of indivisibles, sometimes similar and sometimes different, Nature is indeed a sum, but not a whole. With Epicurus and Lucretius the real noble acts of philosophical pluralism begin. We shall find no contradiction between the hymn to Venus-Nature and to the pluralism which was essential to this philosophy of Nature. Nature, to be precise, is power. In the name of this power things exist one by one, without any possibility of their being gathered together all at once. Nor is there any possibility of their being united in a combination adequate to Nature, which would express all of it at one time. Lucretius reproached Epicurus' predecessors for having believed in Being, the One and the Whole. These concepts are the obsessions of the mind, speculative forms of belief in the fatum, and the theological forms of a false philosophy.
우리가 이런 추론을 할 권리가 있을까요? 자연은 다양성과 그 생산의 원리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양성의 생산 원리는 자체 요소를 전체로 조립하지 않는 경우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가 다양성의 원리 자체가 다양해야 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처럼 이 요구를 순환적인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에피쿠로스의 논지는 완전히 다릅니다. 다양한 것의 생산으로서의 자연은 무한한 합, 즉 자신의 요소를 총화하지 않는 합일 수 있을 뿐입니다. 자연의 모든 요소를 한꺼번에 포괄할 수 있는 조합은 없으며, 독특한 세계나 전체 우주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리는 하나, 존재 또는 전체에 대한 결정이 아닙니다. 자연은 집합적이지 않고 오히려 분배적이며, 자연의 법칙 (foedera naturae, 소위 foedera fati와 대조적으로)은 총화 할 수없는 부분을 분배합니다. 자연은 속성이 아니라 접속사로서, "이다"가 아니라 "그리고"를 통해 자신을 표현합니다. 이것과 저것, 변화와 얽힘, 유사성과 차이, 끌림과 산만함, 미묘함과 갑작스러움. 자연은 단단한 부분과 빈 공간으로 이루어진 할리퀸의 망토로, 풍부함과 비어 있음, 존재와 비존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둘은 각각 무한한 것처럼 보이면서 다른 하나는 제한하는 역할을 합니다. 때로는 비슷하고 때로는 다른 분할 불가능한 것들의 더하기인 자연은 실제로 합이기는 하지만 전체는 아닙니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와 함께 철학적 다원주의의 진정한 고귀한 행위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비너스-자연에 대한 찬가와 이 자연 철학에 필수적인 다원주의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연은 정확히 말하면 힘입니다. 이 힘의 이름으로 사물은 한꺼번에 모일 가능성 없이 하나씩 존재합니다. 또한 그것들이 자연에 적합한 조합으로 결합되어 한 번에 모든 것을 표현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의 선배들이 존재, 하나, 전체를 믿었다고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마음의 집착, 운명에 대한 사변적 형태의 믿음, 거짓 철학의 신학적 형태입니다.
Epicurus' predecessors identified the principle with the One or the Whole. But what is the one if not a particular perishable and corruptible object which we consider arbitrarily in isolation from every other object? And what forms a whole if not a particular finite combination, filled with holes, which we arbitrarily believe to join all the elements of the sum? In both cases, we do not understand diversity and its production. We may generate the diverse out of the One only if we presuppose that anything may be born out of anything, and thus that something may arise from nothing. We may generate the diverse out of the whole, only if we presuppose that the elements which form this whole are contraries capable of being transformed into one another. This is but another way of saying that one thing produces another by changing its nature, and that something is born out of nothing. Because antinaturalist philosophers did not want to consider the void, the void encompassed everything. Their Being, their One and their Whole are artificial and unnatural, always corruptible, fleeting, porous, friable, or brittle. They would rather say that "being is nothing" than recognize that there are beings and there is void -that there are simple beings within the void and that there is void within compound beings. For the diversity of the diverse, philosophers have substituted the identical or the contradictory, and often both at once. However, the Nature of things is coordination and disjunction. Neither identity nor contradiction, it is a matter of resemblances and differences, compositions and decompositions, "everything is formed out of connections, densities, shocks, encounters, concurrences, and motions.“
에피쿠로스의 선배들은 이 원리를 하나 또는 전체와 동일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모든 물체와 분리하여 임의로 생각하는 부패하고 부패하기 쉬운 특정 물체가 아니라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우리가 합계의 모든 요소를 자의적으로 결합한다고 믿는 구멍으로 가득 찬 특정한 유한한 조합이 아니라면 전체를 형성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두 경우 모두 우리는 다양성과 그 생산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태어날 수 있고, 따라서 무에서 무언가가 생겨날 수 있다고 전제할 때만 하나에서 다양한 것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체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상반되게 변형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에만 전체에서 다양성을 생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물이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킴으로써 다른 사물을 생산하고, 이에 따라 무에서 유가 탄생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반자연주의 철학자들은 공허를 고려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공허는 모든 것을 포괄했습니다. 그들의 존재, 하나, 전체는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우며 항상 부패하기 쉽고 덧없으며 다공성, 부서지기 쉽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그들은 존재가 있고 공이 있다는 것, 즉 공 안에 단순한 존재가 있고 복합적인 존재 안에 공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자 합니다.철학자들은 다양성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동일한 것과 반대되는 것, 그리고 종종 두 가지를 한꺼번에 대체했습니다. 철학자들은 다양성의 다양성을 설명하기 위해 동일하거나 모순적인 것, 그리고 종종 두 가지를 동시에 대체해 왔습니다.그러나 사물의 본질은 조화와 분절-선언입니다. 동일성도 모순도 아닌 유사성과 차이, 구성과 분해의 문제이며, "모든 것은 연결, 밀도, 충격, 만남, 동시성, 움직임으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Naturalism requires a highly structured principle of causality to account for the production of the diverse inside different and non-totalizable compositions and combinations of the elements of Nature.
자연주의는 자연 요소의 다양한 내부의 서로 다른, 그리고 총계화할 수 없는 구성과 조합의 생성을 설명하기 위해 고도로 구조화된 인과관계 원칙을 필요로 합니다.
1) The atom is that which must be thought, and that which can only be thought. The atom is to thought what the sensible object is to the senses: it is the object which is essentially addressed to thought, the object which gives food to thought, just as the sensible object is that which is given to the senses. The atom is the absolute reality of what is perceived. That the atom is not, and cannot be perceived, that it is essentially hidden, is the effect of its own nature and not the imperfection of our sensibility. In the first place, the Epicurean method is a method of analogy: the sensible object is endowed with sensible parts, but there is a minimum sensible which represents the smallest part of the object; similarly, the atom is endowed with parts that are thought, but there is a minimum thought which represents the smallest part of the atom. The indivisible atom is formed of thought minima, as the divisible object is composed of sensible minima.* In the second place, the Epicurean method is a method of passage or transition: guided by analogy, and, as the sensible is composed and decomposed, we go from the sensible to the thought and from the thought to the sensible by means of transitions. We go from the noetic to the sensible analogue, and conversely, through a series of steps conceived and established according to a process of exhaustion.
1) 원자는 생각해야만 하는 존재이며, 생각될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원자는 감각적 대상이 감각에 주어진 대상인 것처럼, 원자는 본질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대상이며, 생각에 양식을 주는 대상이다. 원자는 지각되는 것의 절대적인 실체입니다. 원자가 지각되지 않고 지각될 수 없다는 것, 본질적으로 숨겨져 있다는 것은 우리 감성의 불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원자 자체의 본성에서 비롯된 효과입니다. 애초에 에피쿠로스적 방법은 유추의 방법인데, 감각적인 물체에는 감각적인 부분이 부여되지만 물체의 가장 작은 부분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감각적인 부분이 존재하고, 마찬가지로 원자에도 생각되는 부분이 부여되지만 원자의 가장 작은 부분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생각이 존재합니다. 나눌 수 있는 물체가 감각적인 최소로 구성되어 있듯이, 나눌 수 없는 원자는 생각의 최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에피쿠로스적 방법은 통과 또는 전이의 방법입니다: 유추에 의해 안내되고, 감각적인 것이 구성되고 분해됨에 따라, 우리는 전이를 통해 감각적인 것에서 생각으로, 생각에서 감각적인 것으로 이동합니다. 우리는 무의미한 것에서 감각적인 아날로그로, 반대로 소진 과정에 따라 구상되고 확립된 일련의 단계를 거쳐 감각적인 아날로그로 나아갑니다.
2) The sum of atoms is infinite, precisely because atomes are elements which do not form a totality. But this sum would not be infinite if the void were not also infinite. The void and the plenum are interlaced and distributed in such a manner that the sum of the void and the atoms is itself infinite. This third infinity expresses the fundamental correlation between the atoms and the void. Up and down in the void result from the correlation between the void itself and the atoms; the weight of atoms (movement from top to bottom) results from the correlation of the atoms with the void.
2) 원자는 전체를 형성하지 않는 원소이기 때문에 원자의 합은 무한합니다. 그러나 공백도 무한하지 않다면 이 합은 무한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허와 충만은 공허와 원자의 합이 그 자체로 무한한 방식으로 교차하고 분포되어 있습니다. 이 세 번째 무한은 원자와 공허 사이의 근본적인 상관관계를 표현합니다. 공허의 위아래는 공허 자체와 원자 사이의 상관관계에서 비롯되며, 원자의 무게(위에서 아래로 이동)는 원자와 공허의 상관관계에서 비롯됩니다.
3) In their fall the atoms collide, not because of their differing weights, but because of the clinamen. The clinamen is the reason for the collision, it relates one atom to another. It is tied in a fundamental manner to the Epicurean theory of time and is an essential part of the system. In the void, all atoms fall with equal velocity: an atom is no more or less rapid with respect to its weight than other atoms which more or less hinder its fall. In the void, the velocity of the atom is equal to its movement in a unique direction in a minimum of continuous time. This minimum expresses the smallest possible term during which an atom moves in a given direction, before being able to take another direction as the result of a collision with another atom. There is therefore a minimum of time, no less than a minimum of matter or a minimum of the atom. In agreement with the nature of the atom, this minimum of continuous time refers to the apprehension of thought. It expresses the most rapid or briefest thought: the atom moves "as swiftly as thought." But, as a result, we must conceive of an originary direction for each atom, as a synthesis which would give to the movement of the atom its initial direction, without which there would be no collision. This synthesis is necessarily accomplished in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of continuous time. This is the clinamen. The clinamen or swerve has nothing to do with an oblique movement which would come accidentally to modify a vertical fall. It has always been present: it is not a secondary movement, nor a secondary determination of the movement, which would be produced at any time, at any place. The clinamen is the original determination of the direction of the movement of the atom. It is a kind of conatus -a differential of matter and, by the same token, a differential of thought, based on the method of exhaustion. The meanings of the terms which qualify it have in fact this origin: "incertus" does not mean indeterminate, but rather unassignable; "paulum," "incerto tempore," "intervallo minimo" mean "in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of continuous, thinkable time."
3) 원자가 낙하할 때 충돌하는 이유는 원자의 무게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클리나멘/기울어짐 때문입니다. 기울어짐은 충돌의 원인이며, 한 원자와 다른 원자를 연결합니다. 이는 에피쿠로스 시간 이론과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스템의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허공에서는 모든 원자가 동일한 속도로 낙하합니다. 원자는 낙하를 방해하는 다른 원자보다 무게에 비해 더 빠르지도 덜 빠르지도 않습니다. 허공에서 원자의 속도는 최소 지속 시간 동안 원자가 고유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 최소값은 원자가 다른 원자와의 충돌로 인해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기 전에 원자가 주어진 방향으로 이동하는 가능한 가장 작은 기간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물질의 최소 시간이나 원자의 최소 시간보다 더 작은 최소 시간이 존재합니다. 원자의 본질과 일치하는 이 최소한의 연속 시간은 생각의 불안감을 의미합니다. 원자는 "생각만큼 빠르게" 움직인다는 가장 빠른 또는 가장 짧은 생각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는 원자의 움직임에 초기 방향을 부여하는 합성으로서 각 원자에 대한 원래 방향을 생각해야하며, 그렇지 않으면 충돌 또한 없을 것입니다. 이 합성은 반드시 최소 연속 시간보다 작은 시간 내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클리나멘/기울어짐입니다. 클리너멘/기울어짐 또는 선회는 수직 낙하를 수정하기 위해 우연히 발생하는 비스듬한 움직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은 항상 존재해 왔습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생성 될 수있는 이차적 인 움직임이나 움직임의 이차적 인 결정이 아닙니다. 클리나멘/기울어짐은 원자의 운동 방향에 대한 원래의 결정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코나투스, 즉 물질의 미분이며, 마찬가지로 소진 방법에 기초한 사고의 미분입니다. "인서투스"는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할당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며, "파울룸/근소", "인서토 템포레/불확실한 시간", "인터벌로 미니모/최서의 거리"는 "연속적이고 생각할 수 있는 최소 시간보다 작은 시간"이라는 뜻으로, 사실 이러한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4) This is why the clinamen manifests neither contingency nor indetermination. It manifests something entirely different, the lex atomi, that is, the irreducible plurality of causes or of causal series, and the impossibility of bringing causes together into a whole. In fact, the clinamen is the determination of the meaning of causal series, where each causal series is constituted by the movement of an atom and conserves in the encounter its full independence. In the well-known discussion which set the Epicureans and Stoics against each other, the problem was not directly relating to contingency and necessity, but rather to causality and destiny. Epicureans and Stoics alike affirm causality (no motion without a cause); but the Stoics wish also to affirm destiny, that is, the unity of causes "among themselves." To this, the Epicureans object that one cannot affirm destiny without also introducing necessity, that is, the absolute linking up of effects with one another. It is true that the Stoics retort that they are not at all introducing necessity, but that the Epicureans, for their part, cannot refuse the unity of causes without falling into contingency and chance." Thus, the true problem is whether there is a unity of causes among themselves. Must the thought of Nature bring causes together into a whole? The big difference between the Epicureans and the Stoics is that they do not enact the same cleavage of the causal relation. The Stoics affirm a difference of nature between corporal causes and their incorporeal effects. As a result, effects refer to effects and form a conjugation, whereas causes refer to causes and form a unity. The Epicureans, on the contrary, affirm the independence of the plurality of the material causal series, in virtue of a swerve which affects each; and it is only in this objective sense that the clinamen may be called "chance."
4) 이것이 클리나멘/기울어짐이 우연성이나 불확정성을 나타내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것, 즉 환원 불가능한 복수의 원인 또는 인과 계열, 그리고 원인을 전체로 통합 할 수 없음을 현시합니다. 사실, 클리나멘/기울어짐은 인과 계열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으로, 각 인과 계열은 원자의 움직임에 의해 구성되며 마주침에서 완전한 독립성을 보존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를 대립시킨 유명한 토론에서 문제는 우연과 필연이 아니라 인과율과 운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학파는 모두 인과관계(원인 없는 운동은 없다)를 긍정하지만, 스토아학파는 운명, 즉 "그들 사이의" 원인들의 통일성을 긍정하고자 했습니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필연성, 즉 효과들이 서로 절대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도입하지 않고는 운명을 긍정할 수 없다고 반대합니다. 스토아학파는 필연성을 전혀 도입하지 않는다고 반박하지만, 에피쿠로스학파는 우연과 우연에 빠지지 않고는 원인의 통일성을 거부할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문제는 원인들 사이에 통일성이 있는지 여부입니다. 자연에 대한 생각은 반드시 원인들을 하나로 통합해야 할까요?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인과 관계의 분열을 동일하게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토아학파는 물체적 원인과 그 비물체적 효과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긍정합니다. 결과적으로 효과는 효과를 지칭하고 접합체를 형성하는 반면, 원인은 원인을 지칭하고 통일체를 형성합니다.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 학파는 각각에 영향을 미치는 굴절에 의해 복수의 물질적 인과 계열의 독립성을 긍정하며, 이러한 객관적인 의미에서만 클리나멘/가로지름을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5) Atoms have various sizes and shapes. But the atom cannot have just any size whatsoever, since it would in this case reach and overtake the sensible minimum. Nor can it have an infinity of shapes, since every diversity in shape implies either a permutation of the minima of atoms or a multiplication of these minima which could not be pursued to infinity without the atom, again, becoming sensible. The sizes and shapes of atoms are not infinite in number, there is however an infinity of atoms of the same size and shape.
5) 원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자는 아무 크기나 가질 수 없는데, 어떤 경우에는 감각 가능한 최소값에 도달하거나 추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원자는 무한한 모양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형태의 모든 다양성은 원자의 최소값의 순열 또는 원자가 다시 감각적이지 않고는 무한대로 추구할 수 없는 최소값의 복수화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원자의 크기와 모양은 무한하지 않으므로 같은 크기와 모양을 가진 원자는 무한히 존재합니다.
6) Not every atom combines with another as they meet; otherwise atoms would form an infinite combination. The shock, in fact, repels as much as it combines. Atoms combine as long as their shapes allow it. Battered by other atoms which break apart their hold, their combinations come undone, losing their elements which go on to join other compounds. If atoms are said to be "specific seeds" or sperms, it is because atoms cannot be joined together in every possible manner.
6) 모든 원자가 만날 때마다 다른 원자와 결합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원자는 무한한 결합을 형성할 것입니다. 사실 충격은 원자가 결합하는 만큼 반발합니다. 원자는 그들의 형태가 허용하는 한 결합합니다. 다른 원자에 부딪혀 결합이 깨지면 원자의 결합은 해체되고 원소를 잃어버리고 다른 화합물과 결합하게 됩니다. 만약 원자를 " 특정한 씨앗" 또는 정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원자가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결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7) Every combination being finite, there is an infinity of combina-tions, but no combination is formed of a single species of atoms. Thus, atoms are specific seeds in a second sense -they constitute the heterogeneity of the diverse in a single body. Nevertheless, different atoms in the body tend, in virtue of their weight, to be distributed in accordance with their shapes. In our world, atoms with the same shape group together, forming thereby vast compounds. Our world distributes its elements in a way which allows the earth to occupy the center, "expressing" those elements which go on to form the sea, the air, and the ether (magnae res). The philosophy of Nature presents to us the heterogeneity of the diverse with itself, and also the resemblance of the diverse with itself.
7) 모든 조합은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한 조합이 존재하지만, 단일 종의 원자로 구성된 조합은 없습니다. 따라서 원자는 두 번째 의미에서 특정한 씨앗이며, 하나의 몸 안에 있는 다양성의 이질성을 구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내의 서로 다른 원자는 무게에 기인하여 모양에 따라 분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세계에서는 같은 모양을 가진 원자들이 모여 거대한 화합물을 형성합니다. 우리 세계는 지구가 중심을 차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원소를 분배하여 바다, 공기, 에테르(큰 실체)를 형성하는 원소들을 "표현"합니다. 자연의 철학은 우리에게 다양한 것의 이질성과 다양한 것의 유사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8) There is the power of the diverse and its production, but there is also the power of the reproduction of the diverse: it is important to see how this second power is derived from the first. Resemblance proceeds from the diverse as such and from its diversity. There is no world or body that loses elements at every moment and then finds new of the same shape. There are no worlds or bodies which do not have their similar in space and time. The production of any composite entity presupposes that the different elements capable of forming it be themselves infinite in number. They would have no chance of coming together, if each one of them, in the void, were the only member of its kind or limited in number. But since each one of them has an infinite number of similar elements, they do not produce a composite entity, without their equivalents having the same chance of renewing their parts, and even of reproducing a similar complex entity. This argument of probability holds especially for worlds. Intra-worldly bodies have also at their disposal a principle of reproduction. They are born, in fact, into already complex settings, each one of which gathers a maximum number of elements of the same shape: earth, sea, air, ether, the magnae res or great strata which constitute our world and are connected to one another through imperceptible transitions. A determined body has its place in one of these realms." As this body loses endlessly the elements of its composition, the realm in which it is immersed offers it new ones -whether it offers these elements to it directly, or whether it transmits them to it in a determined order from the point of the other realms with which it communicates. Moreover, a body will itself have bodies similar to it in other places, or in the element which produces and nourishes it. It is for this reason that Lucretius acknowledges a final aspect of the principle of causality: a body is born not only of determined elements, which are like the seeds producing it; it is born also into a determined setting, which is like a mother suited for its reproduction. The heterogeneity of the diverse forms a sort of vitalism of seeds, but the resemblance of the diverse forms a sort of pantheism of mothers.
8) 다양성과 그 생산의 힘도 있지만 다양성을 재생산하는 힘도 있는데, 이 두 번째 힘이 첫 번째 힘에서 어떻게 파생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사성은 다양성 그 자체와 그것의 다양성에서 비롯됩니다. 매 순간 요소들을 잃어버렸다가 같은 모양의 새로운 요소들을 발견하는 세계나 신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공간과 시간 속에서 유사하지 않은 세계들이나 신체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복합 실체의 생성도 그것을 형성할 수 있는 서로 다른 요소들이 그 자체로 무한한 수임을 전제로 합니다. 만약 허공에 있는 각 원소들이 자신의 종류에서 유일한 구성원이거나 그 수가 제한되어 있다면, 그것들은 함께 모일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요소는 무한히 많은 유사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요소들이 자신의 부분을 갱신하고 심지어 유사한 복잡한 실체를 재생산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갖지 않고는 복합 실체를 생성하지 못합니다. 이 확률의 논증은 특히 세계들에 적용됩니다. 세계 내부의 신체들도 나름대로의 재생산의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지구, 바다, 공기, 에테르,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마그나 레스(거대한 실체) 또는 거대한 지층 등은 같은 모양의 원소들이 최대한 많이 모여 있는 이미 복잡한 환경에서 태어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전환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정된 신체는 이러한 영역 중 하나에 속해 있습니다." 이 신체가 자신의 구성 요소를 끝없이 잃을 때, 신체가 몰입되어있는 영역은 이러한 요소를 그것에게 직접 제공하든, 또는 그것이 소통하는 다른 영역의 지점에서 정해진 순서로 그것들을 전달하든 상관없이 새로운 요소를 제공합니다. 또한, 신체는 다른 장소에서 자신의 신체와 유사한 신체를 갖거나 혹은 자신을 생산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요소에서 유사한 신체를 갖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루크레티우스는 인과성 원리의 마지막 측면을 인정합니다. 즉, 몸은 그것을 생산하는 종자와 같은 결정된 요소에서 태어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재생산에 적합한 어머니와 같은 결정된 환경에서도 태어납니다. 다양성의 이질성은 일종의 종자의 생명주의를 형성하지만, 다양성의 유사성은 일종의 어머니의 범신론을 형성합니다.
Physics is Naturalism from the speculative point of view. What is essential to physics is to be found in the theory of the infinite, and of the spatial and temporal minima. The first two books of Lucretius conform to this fundamental object of physics: to determine what is really infinite and what is not, and to distinguish the true from the false infinite. What is truly infinite is the sum of atoms, the void, the sum of atoms and the void, the number of atoms of the same shape and size, and the number of combinations or worlds which are similar to (or different from) ours. What is not infinite are the parts of the body and of the atom, the sizes and shapes of the atom, and above all, every worldly or intra-worldly combination. We must observe that, in this determination of the true and the false infinite, physics operates in an apodeictic manner; and it is here at the same time that it discloses its subordination to practice and ethics. (When physics proceeds hypothetically, on the other hand, as in the explication of a finite phenomenon, it has little bearing on ethics).'* We must therefore ask why the apodeictic determination of the true and the false infinite is, speculatively, the necessary means of ethics and practice.
물리학은 사변적 관점에서 보면 자연주의입니다. 물리학에 본질적인 것은 무한과 공간적, 시간적 최소의 이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처음 두 권의 책은 물리학의 근본적인 목표, 즉 무엇이 진짜 무한하고 무엇이 무한하지 않은지를 결정하고 참된 무한을 거짓된 무한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에 부합합니다. 진정으로 무한한 것은 원자들의 합, 허공, 원자들과 허공의 합, 같은 모양과 크기를 가진 원자들의 수, 우리와 유사한(또는 우리와 다른) 조합 또는 세계의 수입니다. 무한하지 않은 것은 신체와 원자의 부분, 원자의 크기와 모양,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세계적 또는 세계 내적 조합입니다. 우리는 참된 무한과 거짓 무한에 대한 이러한 결정에서 물리학이 정언적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발견해야 하며, 동시에 여기에서 물리학이 실천과 윤리에 종속되어 있음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유한한 현상을 설명할 때처럼 물리학이 가설적으로 진행될 때는 윤리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과 거짓 무한에 대한 정언적 결정이 왜 사변적으로 윤리와 실천에 필요한 수단인지 질문해야 합니다.
The goal or object of practice is pleasure. Hence practice, in this sense, only recommends to us the means of suppressing and avoiding pain. But our pleasures have much more formidable obstacles than our pains: phantoms, superstitions, terrors, the fear of death- everything that tends to disturb the soul. The picture of humanity is one of a troubled humanity, more terrified than in pain (even the plague is defined not only by the pain and suffering it transmits, but by the disturbance of the spirit which it institutes). It is this disturbance of the soul which increases suffering, renders it invincible- although its origin is more profound and is to be found elsewhere. It is composed of two elements: an illusion which arises from the body of an infinite capacity for pleasure; then a second illusion, cast in the mind, of an infinite duration of the soul itself, which is given over without restraint to the idea of an infinity of possible sufferings following death. And the two illusions are linked: the fear of infinite punishment is the natural price to be paid for having unlimited desires. It is on this ground that one must seek out Sisyphus and Tityos; "the fool's life at length becomes a hell on earth. " Epicurus goes so far as to say that if injustice is an evil, if greed, ambition, and even debauchery are evils, it is because they deliver us up to the idea of a punishment which may occur at any instant. To be delivered without defense to this turmoil of the soul is, precisely, the condition of man, or the product of this double illusion. “..As it is, there is no way of resistance and no power, because everlasting punishment is to be feared after death." This is why, for Lucretius as for Spinoza later on, the religious man displays two aspects: avidity and anguish, covetousness and culpability -a strange complex that generates crimes. The spirit's disquietude is therefore brought about by the fear of dying when we are not yet dead, and also by the fear of not yet being dead once we already are. The entire problem is that of the source of this disturbance or of these two illusions.
실천의 목표 또는 목적은 쾌락입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실천은 우리에게 고통을 억제하고 피하는 수단만을 권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쾌락에는 고통보다 훨씬 더 강력한 장애물이 있습니다 : 유령, 미신, 공포,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영혼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는 모든 것. 인류의 그림은 고통보다 더 무서운 고통에 시달리는 곤경에 처한 인류의 모습입니다 (전염병조차도 그것이 전달하는 고통과 괴로움뿐만 아니라 그것이 주입하는 영혼의 혼란에 의해 정의됩니다). 비록 그 기원이 더 심오하고 다른 곳에서 찾아질 수 있더라도 고통을 증가시키고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영혼의 혼란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쾌락을 위한 무한한 능력이라는 신체에서 발생하는 환상; 그리고 두 번째 환상, 즉 영혼 자체의 무한한 지속이라는 마음 속에 드리워진 환상, 즉 죽음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무한한 고통에 대한 생각에 제한없이 주어지는 환상. 이 두 환상들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무한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무한한 욕망에 대한 자연스러운 대가입니다. 시시포스와 티토스를 찾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삶은 결국 이 땅의 지옥이 된다." 에피쿠로스는 불의가 악이라면, 탐욕과 야망, 심지어 방탕함까지 악이라면, 그것은 그것들이 우리를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형벌에 대한 생각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이러한 영혼의 혼란에 무방비 상태로 내몰리게 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상태, 또는 이 이중 환상의 산물입니다. "...이대로라면 죽음 이후의 영원한 형벌을 두려워해야하기 때문에 저항 할 방법도 없고 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루크레티우스와 스피노자에게 종교인은 열정과 번민, 탐욕과 과실이라는 두 가지 측면, 즉 범죄를 일으키는 기묘한 콤플렉스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불안은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죽는다는 두려움과 이미 죽었는데도 아직 죽지 않았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됩니다. 전체 문제는 이러한 불안의 근원 또는 이 두 가지 착각의 문제입니다.
It is at this point that we note the intervention of a brilliant, though difficult, Epicurean theory. Bodies or atomic compounds never cease to emit particularly subtle, fluid, and tenuous elements. These second-degree compounds are of two sorts: either they emanate from the depth of bodies, or they detach themselves from the surface of things (skins, tunics, or wrappings, envelopes or barks- what Lucretius calls simulacra and Epicurus calls idols). Insofar as they affect the animus and the anima, they account for sensible qualities. Sounds, smells, tastes, and temperatures refer especially to the emissions from the depths, whereas visual determinations, forms, and colors refer to the simulacra of the surface. But the situation is even more complicated than this, since each sense seems to combine information of the depth with information of the surface. Emissions arising from the depths pass through the surface, and the superficial envelopes, as they detach themselves from the object, are replaced by formerly concealed strata. Noises from the depth, for example, become voices when they find in certain perforated surfaces (the mouth) the conditions of their articulation. Conversely, the simulacra of the surface are able to provide colors and forms only if there is light, which is emitted from the depths. In any case, emissions and simulacra are obviously understood, not as atomic compounds, but as qualities apprehended at a distance on and in the object. Distance is given by the stream of air that emissions and simulacra push before them, as it passes through the sensory organ. This is why the object is perceived as it must be perceived, relative to the state of simulacra and emissions, the distance they have to cross over, the obstacles they encounter, the distortions to which they submit, or the explosions of which they are the center. At the end of a long journey, the visual envelopes do not strike us with the same vigor; shouts lose their distinction. But always, the property of being related to an object subsists. And, in the case of touch--the only sense which grasps the object without an intermediary -the surface element is related to depth, and what is apprehended when we touch the surface of the object is perceived as residing in its innermost depth.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렵지만 뛰어난 에피쿠로스 이론의 개입에 주목합니다. 신체나 원자 화합물은 특히 미묘하고 유동적이며 미약한 원소를 끊임없이 방출합니다. 이 이차 화합물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몸의 심층에서 방출되거나 사물의 표면(피부, 튜닉, 포장지, 봉투, 나무껍질 등 - 루크레티우스는 시뮬라크르라고 부르고 에피쿠로스는 우상이라고 부름)에서 분리되어 방출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정신과 영혼에 영향을 미치는 한, 그것들은 감각적 특성을 설명합니다. 소리, 냄새, 맛, 온도는 특히 심연에서 방출되는 것을 의미하며, 시각적 판단, 형태, 색은 표면의 시뮬라크라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나 각 감각은 심층의 정보와 표면의 정보를 결합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상황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심층에서 발생하는 방출은 표면을 통과하고 피상적 외피들은 대상에서 분리되면서 이전에 숨겨져 있던 지층으로 대체됩니다. 예를 들어 심층에서 발생하는 소음은 특정 구멍이 뚫린 표면(입)에서 발성 조건을 발견하면 음성이 됩니다. 반대로 표면의 시뮬라크르는 심층에서 방출되는 빛이 있는 경우에만 색상과 형태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방출과 시뮬라크르는 원자 화합물이 아니라 물체와 물체에서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파악되는 특성으로 분명히 이해됩니다. 거리는 방출과 시뮬라크라가 감각 기관을 통과하면서 앞서 그들을 밀어내는 공기의 흐름에 의해 주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상은 시뮬라크라와 방출의 상태, 그들이 건너야 하는 거리, 그들이 마주치는 장애물, 그들이 따르는 왜곡 또는 그들이 중심이 되는 폭발과 관련하여 인식되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것입니다. 긴 여정의 끝에서 시각적 외피는 우리에게 동일한 활력으로 다가오지 않으며 외침은 차별성을 잃습니다. 그러나 항상 대상과 관련되어 있다는 속성은 존재합니다. 그리고 매개체 없이 대상을 파악하는 유일한 감각인 촉각의 경우 표면 요소는 심층과 관련이 있으며, 우리가 물체의 표면을 만졌을 때 감지되는 것은 물체의 가장 심층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What is the origin of this appurtenance to the object, whose emissions and simulacra are nevertheless detached? It seems to us that their status, in the Epicurean philosophy, is inseparable from the theory of time. Their essential characteristic, in fact, is the speed with which they traverse space. It is for this reason that Epicurus uses the same formula for the simulacrum and the atom (though perhaps not in the same sense): it moves "as swiftly as thought." On the basis of the analogy, there is a minimum of sensible time no less than there is a minimum of thinkable time. Just as the swerve of the atom occurs in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thinkable time, so that it has already happened within the smallest time that can be thought, likewise the emission of simulacra occurs in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sensible time, so that they are already there in the smallest time that can be sensed and seem to be still within the object after they have reached us. "... In one moment of time perceived by us, that is, while one word is being uttered, many times are lurking which reason understands to be there, that is why in any given moment all these various images are present, ready in every place…“ The simulacrum is thus imperceptible. The image alone is sensible, which conveys quality, and which is made up of this very rapid succession, and the summation of many identical simulacra. What we have said with respect to the speed of the formation of simulacra applies also, although to a lesser degree, to emanations from the depths: simulacra are swifter than emanations, as if there were, in the case of sensible time, differentials of diverse orders. We are thus able to see on what the originality of the Epicurean method is founded, insofar as it combines the resources of analogy and gradation. The theory of time and its "exhaustive" character assure the unity of the two aspects of the method. For there is a minimum of sensible time as well as a minimum of thinkable time, and in both cases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But, finally, the analogous times, or their analogous determinations, are organized in a gradation, a gradation, which causes us to pass from the thinkable to the sensible, and vice versa: 1)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of thinkable time (an incertum tempus brought about by the clinamen); 2) a minimum of continuous thinkable time (the speed of the atom traveling in a single direction); 3)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of sensible time (punctum temporis, occupied by the simulacrum); and 4) a minimum of continuous sensible time (to which the image corresponds, which assures the perception of the object).
그것의 방출과 시뮬라크라가 분리되었음에도 이 대상의 부속물의 기원은 무엇일까요?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그들의 지위는 시간 이론과 분리 될 수없는 것 같습니다. 사실 시뮬라크르의 본질적인 특성은 공간을 가로지르는 속도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에피쿠로스는 시뮬라크르와 원자에 대해 (같은 의미는 아니지만) "생각만큼 재빠르게 움직인다"는 동일한 공식을 사용했습니다. 이 비유에 따르면,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만큼이나 감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도 존재합니다. 원자의 선회가 생각할 수 있는 최소 시간보다 작은 시간에 발생하여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시간 내에 이미 일어난 것처럼, 시뮬라크르의 방출도 최소 감각 시간보다 작은 시간에 발생하여 감지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시간 내에 이미 존재하며 우리에게 도달한 후에도 물체 안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 우리가 지각하는 시간의 한 순간, 즉 한 단어가 발화되는 동안 이성이 거기에 있다고 이해하는 많은 시간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주어진 순간에도 이 모든 다양한 이미지가 모든 장소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뮬라크르는 지각할 수 없다. 이미지만으로도 감각적이며, 품질을 전달하고, 매우 빠른 연속과 많은 동일한 시뮬라크르의 합산으로 구성됩니다. 시뮬라크르의 형성 속도와 관련하여 우리가 말한 것은 심층에서 나오는 발산에도 그것보다는 덜하지만 적용됩니다. 시뮬라크르는 마치 감각적 시간의 경우 다양한 순서의 미분이 있는 것처럼 방출보다 더 빠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비와 그라데이션의 리소스들을 결합하는 한 에피쿠로스 방법의 독창성이 무엇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간 이론과 그 "철저한" 특성은 이 방법의 두 가지 측면의 통일성을 보장합니다. 왜냐하면 최소한의 감각적인 시간뿐만 아니라 최소한의 사유 가능한 시간이 있으며, 두 경우 모두 최소한보다 작은 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유추 가능한 시간 또는 유추 가능한 결정은 점차적으로, 즉 점진적으로 구성되며, 이는 우리가 생각할 수있는 것에서 감각적인 것으로 또는 그 반대로 통과하게합니다: 1) 생각할 수 있는 최소 시간보다 작은 시간(클리나멘에 의해 야기된 시간, 인서툼 템푸스); 2) 생각할 수 있는 최소 연속 시간(한 방향으로 이동하는 원자의 속도); 3) 감각할 수 있는 최소 시간보다 작은 시간(시뮬라크르가 점유하는 시간, 푼크툼 템포리스/ 시간의 점/ 순간/ 시간의 단위); 4) 감각할 수 있는 최소 지속 시간(이미지가 이에 상응하는, 대상의 지각을 보장하는 시간)이 그것이다.
There is yet a third species, distinct from the emanations issued from the depth and from the simulations detached from the surface of things. These are phantasms, which enjoy a high degree of independence with respect to objects and an extreme mobility, or an extreme inconstancy in the images which they form (since they are not renewed by the constant supplies emitted by the object). It seems that here the image stands for the object itself. There are three main varieties of this new species of simulacra: theological, oneiric, and erotic. Theological phantasms are made up of simulacra which intersect spontaneously in the sky, forming immense images out of the clouds -high mountains and figures of giants." In any case, simulacra are everywhere. We do not cease to be immersed in them, and to be battered by them as if by waves. Being very far from the objects from which they emanate, and having lost with them any direct connection, they form these grand autonomous figures. Their independence makes them all the more subject to change; one might say that they dance, that they speak, that they modify ad infinitum their tones and gestures. It is true, therefore, as Hume will later recall, that at the origin of the belief in gods there is not permanence, but rather whim and the variability of passions. The second genre of phantasms is constituted by simulacra which are particularly subtle and agile, coming from different objects. They are apt to merge together, to condense and dissipate, and are too swift and too tenuous to offer themselves to sight. But they are capable of supplying the animus with visions which pertain to it in its own right: centaurs, Cerberus-like creatures, and ghosts; all of the images which correspond to desire or, again and especially, dream images. Not that desire is creative here; rather, it renders the mind attentive and makes it choose the most suitable phantasm from among all of the subtle phantasms in which we are immersed. The mind, moreover, isolated from the external world and collected or repressed when the body lies dormant, is open to these phantasms.' And as for the third genre, the erotic phantasms, they too are constituted of simulacra issuing from very diverse objects and are apt to be condensed ("what was before a woman seems to be changed into a man in our grasp"). The image constituted by these simulacra is doubtless connected with the actual love object; but, unlike what happens in the case of the other needs, the love object cannot be either absorbed or possessed. The image alone inspires and resuscitates desire, a mirage which no longer signals a consistent reality: "But from man's aspect and beautiful bloom nothing comes into the body to be enjoyed except thin images; and this poor hope is often snatched away by the wind."
심층에서 발산되는 발산과 사물들의 표면에서 분리된 시뮬레이션과는 구별되는 세 번째 종이 아직 있습니다. 이들은 대상에 대한 높은 수준의 독립성과 극도의 이동성 또는 (대상에서 방출되는 지속적인 공급에 의해 갱신되지 않기 때문에) 형성되는 이미지의 극도의 불규칙성을 누리는 환상입니다. 여기서 이미지는 대상 자체를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이 새로운 종류의 시뮬라크르에는 신학적인, 몽환적인, 에로틱한의 세 가지 주요 종류가 있습니다. 신학적인 환상은 하늘에서 저절로 교차하는 시뮬라크라로 구성되며, 구름에서 높은 산과 거인의 형상 등 거대한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어쨌든 시뮬라크르는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우리는 마치 파도에 휩쓸리듯이 그들에게 몰입하고 그들에 의해 타격을 받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이 발산하는 대상들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고, 그들과의 직접적인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이 거대한 자율적 형상을 형성합니다. 춤추고, 말하고, 음색과 몸짓을 무한히 수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독립성은 그들을 모두 더 변화의 주체가 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흄이 나중에 회상했듯이 신에 대한 믿음의 기원에는 영속성이 아니라 변덕과 정열의 가변성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두 번째 환상의 장르는 특히 미묘하고 민첩한 시뮬라크르로 구성되며 다른 대상에서 비롯됩니다. 시뮬라크르는 서로 합쳐지고 응축되고 소멸하는 경향이 있으며, 너무 빠르고 미약해서 시야에 포착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켄타우로스, 케르베로스와 같은 생물, 유령 등 욕망이나 특히 꿈의 이미지에 해당하는 모든 이미지를 정신에게 그 자체로 관련된 비전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욕망은 창조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을 주의 깊게 만들고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모든 미묘한 환상 중에서 가장 적합한 환상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또한 외재적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신체가 휴면 상태 일 때 수집되거나 억압 된 마음은 이러한 환상에 열려 있습니다.' 세 번째 장르인 에로틱 환각 역시 매우 다양한 대상에서 발산되는 시뮬라크르로 구성되며 응축되기 쉽습니다("여성 이전에 있던 것이 우리의 손아귀에서 남성으로 바뀐 것 같다"). 이러한 시뮬라크르로 구성된 이미지는 의심할 여지없이 실제 사랑의 대상과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욕구의 경우와 달리 사랑의 대상은 흡수되거나 소유 될 수 없습니다. 이미지만으로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소생시키는 신기루는 더 이상 일관된 현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모습과 아름다운 꽃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얇은 이미지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며, 이 불쌍한 희망은 종종 바람에 의해 빼앗기곤 한다."
Time itself is affirmed in relation to movement. This is why we speak of a time of thought in relation to the movement of the atom in the void, and of a sensible time in relation to the mobile image which we perceive, and which causes us to perceive the qualities of atomic compounds. And we speak of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of thinkable time, in relation to the clinamen as the determination of the movement of the atom; and of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of sensible time, in relation to simulacra as components of the image (for these components, there are even differential orders of swiftness-profound emanations being less swift than surface simulacra, and surface simulacra being less rapid than the third species). Perhaps movement, in all of these senses, is constitutive of "events" (eventa, what Epicurus calls symptoms), in contrast with attributes or properties (conjuncta), so that time must be called the event of events, and the "symptom of symptoms," which is entailed by movement. For attributes are properties which cannot be abstracted or separated from bodies: for example, the form, dimension, or weight of the atom; or the qualities of a compound which express the atomic disposition without which it would cease to be what it is (the warmth of the fire or the liquidity of water). But the event expresses rather what is happening, without destroying the nature of the thing thus, a degree of movement compatible with its order (the movement of compounds and their simulacra, or the movements and collisions of each atom). And if birth and death, composition and decomposition are events, this is so in relation to elements of an order inferior to the order of compounds, whose existence is compatible with the variation of movements in a passage at the limit of the corresponding times.
시간 자체는 움직임과 관련하여 긍정된다. 이것이 우리가 허공에서의 원자의 움직임과 관련하여 생각의 시간을 말하고, 우리가 지각하고 원자 화합물의 특성을 지각하게 하는 움직이는 이미지와 관련하여 감각적인 시간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원자의 움직임을 결정하는 클리나멘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는 최소 시간보다 작은 시간을 말하고, 이미지의 구성 요소인 시뮬라크라와 관련하여 감각 가능한 최소 시간보다 작은 시간을 말합니다(이 구성 요소들에는 심지어 신속성의 미분화된 질서가 있습니다-심층 시뮬라크르는 표면 시뮬라크라보다 덜 신속하고, 표면 시뮬라크라는 세 번째 종보다 덜 신속합니다). 아마도 이 모든 의미에서 움직임은 특성이나 속성(고유한 속성)과는 대조적으로 '사건'(사건/ 일, 에피쿠로스가 증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 것이므로, 시간을 사건들의 사건, 움직임에 수반되는 '증상들의 증상'이라고 불러야 할 것입니다. 속성은 원자의 형태, 치수 또는 무게, 혹은 불의 온기나 물의 유동성처럼 원자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원자적 성질을 표현하는 화합물의 성질과 같이 추상화하거나 신체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속성입니다. 그러나 사건은 오히려 사물의 본질을 파괴하지 않고 그 질서(화합물과 그 시뮬라크르의 움직임, 또는 각 원자의 움직임과 충돌)와 양립할 수 있는 움직임의 정도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탄생과 죽음, 구성과 분해가 사건이라면, 이는 자신의 존재가 화합물의 질서에 못미치는 질서의 요소들과 관련하여 그에 상응하는 유한한 시간의 과정 안에서 움직임의 변위들과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We are thus able to provide an answer to the question of the false infinite. Simulacra are not perceived in themselves; what is perceived is their aggregate in a minimum of sensible time (image). The movement of the atom in a minimum of continuous thinkable time bears witness to the declination, which nevertheless occurs in a time smaller than this minimum. Similarly, the image bears witness to the succession and summation of simulacra, which occur in a time smaller than the minimum of continuous sensible time. And, in the same way that the clinamen leads thought to false conceptions of freedom, the simulacra lead the sensibility to a false impression of will and desire. In virtue of their speed, which causes them to be and to act below the sensible minimum, simulacra produce the mirage of a false infinite in the images which they form. They give birth to the double illusion of an infinite capacity for pleasure and an infinite possibility of torment-this mixture of avidity and anguish, of cupidity and culpability, which is so characteristic of the man of religion. It is particularly with the third and swiftest species, the phantasms, that one witnesses the development of the illusion and the myths which accompany it. In a mixture of theology, eroticism, and oneirism, amorous desire possesses only those simulacra which lead it to know bitterness and torment, even into the pleasure which it wishes were infinite. Our belief in gods rests upon simulacra which seem to dance, to change their gestures, and to shout at us promising eternal punishment- in short, to represent the infinite.
따라서 우리는 거짓 무한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시뮬라크르는 그 자체로 지각되지 않으며, 지각되는 것은 최소한의 감각적 시간(이미지)에서 그 총합입니다.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속적인 시간에서 원자의 움직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최소 시간보다 작은 시간에서 발생하는 감소를 목격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최소 연속 가능한 시간보다 작은 시간에서 발생하는 시뮬라크르의 연속과 합산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클리나멘이 생각을 자유에 대한 잘못된 개념으로 이끄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뮬라크르는 감성을 의지와 욕망에 대한 잘못된 인상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시뮬라크르는 속도 때문에 감각 가능한 최소값 이하로 존재하고 행동하게 만들며, 그들이 형성하는 이미지에서 거짓 무한의 신기루를 만들어냅니다. 그것들은 쾌락에 대한 무한한 능력과 고통의 무한한 가능성, 즉 종교인의 특징인 열정과 고뇌, 자만심과 과실이 혼합된 이중 환상을 낳는다. 특히 세 번째이자 가장 빠른 종인 환상을 통해 환상과 그에 수반되는 신화의 전개를 목격할 수 있습니다. 신학, 에로티시즘, 유일신론/몽환증이 혼합된 사랑의 욕망은 괴로움과 고통, 심지어 무한한 쾌락을 알도록 이끄는 시뮬라크르만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춤을 추고, 몸짓을 바꾸고, 영원한 형벌을 약속하며 우리에게 소리치는, 한마디로 무한한 것을 상징하는 시뮬라크르에 달려 있습니다.
How are we to prevent illusion, if not by means of the rigorous distinction of the true infinite and the correct appreciation of times nested one within the other, and of the passages to the limit which they imply? Such is the meaning of Naturalism. Phantasms then become objects of pleasure, even in the effect which they produce, and which finally appears such as it is: an effect of swiftness or lightness which is attached to the external interference of very diverse objects -as a condensation of successions and simultaneities. The false infinite is the principle of the disturbance of spirit. The speculative object and the practical object of philosophy as Naturalism, science and pleasure, coincide on this point: it is always a matter of denouncing the illusion, the false infinite, the infinity of religion and all of the theologico-erotic-oneiric myths in which it is expressed. To the question "what is the use of philosophy?" the answer must be: what other object would have an interest in holding forth the image of a free man, and in denouncing all of the forces which need myth and troubled spirit in order to establish their power? Nature is not opposed to custom, for there are natural customs. Nature is not opposed to convention: that the law depends upon conventions does not exclude the existence of natural law, that is, a natural function of law which measures the illegitimacy of desires against the disturbance of spirit which accompanies them. Nature is not opposed to invention, inventions being discoveries of Nature itself. But Nature is opposed to myth. Describing the history of humanity, Lucretius offers us a sort of law of compensation: man's unhappiness comes not from his customs, conventions, inventions, or industry, but from the side of myth which is mixed with them, and from the false infinite which it introduces into his feelings and his works. To the origins of language, the discovery of fire, and the first metals royalty, wealth, and property are added, which are mythical in their principle; to the conventions of law and justice, the belief in gods; to the use of bronze and iron, the development of war; to the inventions of art and industry, luxury and frenzy. The events which bring about the unhappiness of humanity are inseparable from the myths which render them possible. To distinguish in men what amounts to myth and what amounts to Nature, and in Nature itself, to distinguish what is truly infinite from what is not -such is the practical and speculative object of Naturalism. The first philosopher is a naturalist: he speaks about nature, rather than speaking about the gods. His condition is that his discourse shall not introduce into philosophy new myths that would deprive Nature of all its positivity. Active gods are the myth of religion, as destiny is the myth of a false physics, and Being, the One and the Whole are the myth of a false philosophy totally impregnated by theology.
만약 진정한 무한을 엄격하게 구분하거나, 서로 중첩된 시간들과 그 시간들이 함축하는 한계로의 통로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어떻게 환상을 방지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자연주의의 의미입니다. 그런 다음 환상은 그들이 만들어내는 효과에서도 쾌락의 대상이 되며, 마침내 연속성과 동시성의 응축으로서 매우 다양한 대상의 외부 간섭에 부착된 신속성 또는 가벼움의 효과로 나타납니다. 거짓 무한은 영혼의 혼란의 원리입니다. 자연주의, 과학과 쾌락으로서의 철학의 사변적 대상과 실천적 대상은 이 점에서 일치한다: 그것은 항상 환상, 거짓 무한, 종교의 무한, 그리고 그것이 표현되는 모든 신학적-에로틱-원초적 신화를 규탄하는 문제이다. "철학의 용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유인의 이미지를 옹호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신화와 고뇌하는 정신을 필요로 하는 모든 세력을 비난하는 데 관심을 갖는 다른 대상이 무엇이겠는가?"라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연은 풍습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스러운 풍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관습에 반대하지 않는다: 법이 관습에 의존한다고 해서 자연법, 즉 욕망에 수반되는 영혼의 교란에 대항하여 욕망의 불법성을 측정하는 법의 자연적 기능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발명에 반대하지 않으며, 발명은 자연 자체의 발견입니다. 그러나 자연은 신화에 반대합니다. 인류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루크레티우스는 일종의 보상 법칙을 제시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관습, 관습, 발명품, 산업이 아니라 그것들과 섞여 있는 신화의 측면과 그것이 그의 감정과 작품에 도입하는 거짓 무한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언어의 기원, 불의 발견, 최초의 금속에 왕족, 부, 재산이 추가되는 것은 그 원리가 신화적인 것이며, 법과 정의의 관습, 신에 대한 믿음, 청동과 철의 사용, 전쟁의 발전, 예술과 산업의 발명, 사치와 광란에 대한 신화는 신화적인 것이다. 인류의 불행을 가져온 사건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신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인간에게서 신화에 해당하는 것과 자연에 해당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 그리고 자연 자체에서 진정으로 무한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것, 이것이 자연주의의 실용적이고 사변적인 대상입니다. 첫 번째 철학자는 자연주의자로서 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자연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의 조건은 그의 담론이 자연의 모든 긍정성을 박탈하는 새로운 신화를 철학에 도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운명이 거짓 물리학의 신화이고 존재, 하나, 전체가 신학에 의해 완전히 주입 된 거짓 철학의 신화 인 것처럼 활동적인 신은 종교의 신화입니다.
Never has the enterprise of "demystification" been carried further. The myth is always the expression of the false infinite and of the disturbance of spirit. One of the most profound constants of Naturalism is to denounce everything that is sadness, everything that is the cause of sadness, and everything that needs sadness to exercise its power. From Lucretius to Nietzsche, the same end is pursued and attained. Naturalism makes of thought and sensibility an affirmation. It directs its attack against the prestige of the negative; it deprives the negative of all its power; it refuses to the spirit of the negative the right to speak in the name of philosophy. The spirit of the negative made an appearance out of the sensible; and linked the intelligible to the One or the Whole. But this Whole, this One, was but a nothingness of thought, just as the appearance was a nothingness of sensation. Naturalism, according to Lucretius, is the thought of an infinite sum, all of the elements of which are not composed at once; but, conversely as well, it is the sensation of finite compounds which are not added up as such with one another. In these two ways, the multiple is affirmed. The multiple as multiple is the object of affirmation, just as the diverse as diverse is the object of joy. The infinite is the absolute intelligible determination (perfection) of a sum which does not form its elements into a whole. But the finite itself is the absolute sensible determination (perfection) of everything which is composed. The pure positivity of the finite is the object of the senses, and the positivity of the veritable infinite is the object of thought. There is no opposition between these two points of view, but rather a correlation. Lucretius established for a long time to come the implications of naturalism: the positivity of Nature; Naturalism as the philosophy of affirmation; pluralism linked with multiple affirmation; sensual-ism connected with the joy of the diverse; and the practical critique of all mystifications.
"'탈신화화"의 사업은 결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신화는 항상 거짓 무한과 정신의 교란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자연주의의 가장 심오한 상수 중 하나는 슬픔인 모든 것, 슬픔의 원인인 모든 것, 슬픔이 힘을 발휘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규탄하는 것입니다. 루크레티우스에서 니체에 이르기까지 동일한 목적을 추구하고 달성했습니다. 자연주의는 사고와 감성을 긍정으로 만듭니다. 그것은 부정의 명성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고, 부정의 모든 힘을 박탈하고, 철학의 이름으로 말할 권리를 부정의 정신에 거부합니다. 부정적인 정신은 감각적인 것에서 나타나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하나 또는 전체와 연결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전체, 이 하나라는 것은 외관이 감각의 허무인 것처럼 생각의 허무에 불과했습니다.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자연주의는 모든 요소가 한꺼번에 구성되지 않는 무한한 합에 대한 생각이지만, 반대로 그것은 서로 합산되지 않는 유한한 화합물에 대한 감각이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다중은 긍정됩니다. 다양한 것이 기쁨의 대상인 것처럼, 여러 가지가 여러 가지인 것은 긍정의 대상입니다. 무한은 그 요소들이 전체로 형성되지 않는 합계에 대한 절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결정(완전성)입니다. 그러나 유한은 그 자체로 구성된 모든 것의 절대적인 지각 가능한 결정(완전성)입니다. 유한한 것의 순수한 긍정성은 감각의 대상이고, 진정한 무한한 것의 긍정성은 사유의 대상입니다. 이 두 관점 사이에는 대립이 아니라 오히려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주의의 함의, 즉 자연의 긍정성, 긍정의 철학으로서의 자연주의, 다중적 긍정과 연결된 다원주의, 다양한 것의 기쁨과 연결된 감각주의, 모든 신비화에 대한 실천적 비판을 오랫동안 확립했습니다.
Phantasm and Modern Literature
3. Klossowski or Bodies-language
Klossowski's work is built upon an astonishing parallelism between body and language, or rather on a reflection of one in the other. Reasoning is the operation of language, but pantomime is the operation of the body. On the basis of motives yet to be determined, Klossowski thinks that reasoning has a theological essence and the form of the disjunctive syllogism. At the other extreme, the body's pantomime is essentially perverse and has the form of a disjunctive articulation. Fortunately, we have at our disposal a guiding thread in order to understand better this point of departure. Biologists, for example, teach us that the development of the body proceeds by fits and starts: a butt of a limb is determined to be a paw before it is determined to be the right paw, etc. It is possible to say that the animal body "hesitates," and that it proceeds by way of dilemmas. Similarly, reasoning proceeds by fits and starts, hesitates and bifurcates at each level. The body is a disjunctive syllogism; language is an egg on the road to differentiation. The body seals and conceals a hidden language, and language forms a glorious body. The most abstract argumentation is a mimicry, but the body's pantomime is a sequence of syllogisms. One no longer knows whether it is the pantomime which reasons, or reasoning which mimics.
클로소프스키의 작품은 몸과 언어 사이의 놀라운 평행성, 즉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추론은 언어의 작용이지만 무언극은 신체의 작용입니다. 클로소프스키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동기에 근거하여 추론에는 신학적 본질과 분절적 삼단논법의 형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극단에서 신체의 무언극은 본질적으로 일탈적이며 분절적 관절의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우리는 이 출발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가이드 스레드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물 학자들은 신체의 발달이 적응과 시작에 의해 진행된다고 가르칩니다. 팔다리의 엉덩이가 오른쪽 발로 결정되기 전에 발로 결정되는 등입니다. 동물의 신체는 "주저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딜레마를 통해 진행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추론은 각 수준에서 적응과 시작으로, 망설임과 분기를 거치며 진행됩니다. 몸은 분절적 삼단논법이고 언어는 분화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알입니다. 몸은 숨겨진 언어를 봉인하고 감추고, 언어는 영광스러운 몸을 형성합니다. 가장 추상적인 논증은 모방이지만, 몸의 무언극은 일련의 삼단논법입니다. 추론하는 것이 무언극인지, 모방하는 것이 추론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In a certain respect, it is our epoch which has discovered perversion. It does not need to describe behaviors or undertake abominable accounts. Sade needed to do so, but he is now taken for granted. We, on the other hand, look for the "structure," that is, the form which may be filled by these descriptions and accounts (since it makes them possible), but the structure does not need to be filled in order to be called perverse. What is perverse is precisely this objective power of hesitation in the body: this paw which is neither left nor right; this determination by fits and starts; this differentiation never suppressing the undifferentiated which is divided in it; this suspense which marks each moment of difference; and this immobilization which marks each moment of the fall. Gombrowicz entitles Pornographia a perverse novel which contains no obscene tales, but only shows young suspended bodies which hesitate and fall in a frozen movement. In Klossowski, who makes use of a completely different technique, sexual descriptions appear with great force, but only in order to "fulfill" the hesitation of bodies and to distribute it into the parts of the disjunctive syllogism. The presence of such descriptions assumes therefore a linguistic function: being no longer a question of speaking of bodies such as they are prior to, or outside of, language, they form, on the contrary, with words a "glorious body" for pure minds. There is no obscene in itself, says Klossowski; that is, the obscene is not the intrusion of bodies into language, but rather their mutual reflection and the act of language which fabricates a body for the mind. This is the act by which language transcends itself as it reflects a body. "There is nothing more verbal than the excesses of the flesh. ... The reiterated description of the carnal act not only reviews the transgression, it is itself a transgression of language by language."
어떤 면에서 보면 변태를 발견한 것은 바로 우리 시대입니다. 행동을 묘사하거나 끔찍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있었지만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구조', 즉 이러한 묘사와 설명으로(그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채워질 수 있는 형태를 찾지만, 변태라고 불리기 위해 구조가 채워질 필요는 없습니다. 일탈적인 것은 바로 이 몸의 망설임의 객관적인 힘, 즉 왼쪽도 오른쪽도 아닌 이 발, 적응과 시작에 의한 이 결정, 그 안에서 분할된 분화되지 않은 것을 결코 억누르지 않는 이 분화, 차이의 매 순간을 표시하는 이 긴장감, 추락의 매 순간을 표시하는 이 고정화이다. 곰브로비츠는 <포르노그라피아>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 이상한 소설에는 음란한 이야기는 없고 정지된 움직임 속에서 주저하고 넘어지는 젊은 육체들만 등장한다. 완전히 다른 기법을 사용하는 클로소프스키에서 성적 묘사는 큰 힘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신체의 주저함을 "성취/가득채우"하고 분절적 논증의 부분으로 분배하기 위해서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러한 묘사의 존재는 언어적 기능을 가정합니다. 더 이상 언어 이전이나 언어 외부에있는 것과 같은 신체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순수한 마음을 위한 "영광스러운 신체"를 말로 형성합니다. 클로소프스키에 따르면 외설은 그 자체로 외설이 아니며, 외설은 신체가 언어에 침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호 반영과 마음을 위해 신체를 조작하는 언어의 행위입니다. 이것은 언어가 신체를 반영하면서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입니다. "육체의 과잉보다 더 언어적인 것은 없다.... 육체적 행위에 대한 반복적인 묘사는 그 위반을 검토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언어에 의한 언어의 위반이다."
In another respect, it is our epoch which has discovered theology. One no longer needs to believe in God. We seek rather the "structure," that is, the form which may be filled with beliefs, but the structure has no need to be filled in order to be called "theological." Theology is now the science of nonexisting entities, the manner in which these entities -divine or anti-divine, Christ or Antichrist- animate language and make for it this glorious body which is divided into disjunctions. Nietzsche's prediction about the link between God and grammar has been realized; but this time it is a recognized link, willed, acted out, mimed, "hesitated," developed in the full sense of the disjunction, and placed in the service of the Antichrist - Dionysus crucified. If perversion is the power befitting the body, equivocity is the power of theology; they are reflected in one another. If one is the pantomime par excellence, the other is reasoning par excellence.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신학을 발견한 것은 우리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신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구조", 즉 믿음들로 채워질 수 있는 형태를 추구하지만, 오히려 그 구조는 ""신학적"이라고 불리기 위해 채워질 필요가 없습니다. 신학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 실체의 과학이며, 즉 신적이든 반신적이든, 그리스도든 적그리스도든, 이 실체들이 언어를 생동시키고 그것을 위해 분절로 나뉘어진 이 영광스러운 몸을 만드는 방식에 관한 것입니다. 신과 문법 사이의 연결고리에 대한 니체의 예측은 실현되었지만, 이번에는 그 연결고리가 분절의 완전한 의미에서 인식되고, 의지하고, 행동하고, 모방하고, "주저하고", 발전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적 그리스도인 디오니소스를 위해 배치됩니다. 일탈적인 것이 육체에 어울리는 힘이라면, 모호함은 신학의 힘이며, 이 둘은 서로에게 반영됩니다. 만약 하나가 무언극의 탁월함이라면, 다른 하나는 추론의 탁월함입니다.
That which accounts for the surprising character of Klossowski's work derives from this: the unity of theology and pornography in this very particular sense. We must call it a superior pornology. It is his own way of transcending metaphysics: mimetic argumentation and syllogistic pantomime, the dilemma in the body and the disjunction in the syllogism. The rapes of Roberte punctuate reasoning and alternatives; conversely, syllogisms and dilemmas are reflected in the postures and the ambiguities of the body. The bond of reasoning and description has always been the foremost logical problem - its most noble form. We can see it clearly in the work of logicians who cannot get rid of this problem, perhaps because they raise it in very general conditions. The difficult and decisive conditions are those in which the description concerns the perversion of bodies in pathology (the disjunctive organic cascade), and reasoning concerns the equivocity of language in theology (the disjunctive spiritual syllogism). The problem of the relation between reasoning and description had found a first solution in the work of Sade, which was of the greatest theoretical and technical, philosophical and literary importance. Klossowski opens up some very new paths, to the extent that he poses the conditions of our modern conception of perversion, theology or anti-theology. Everything begins with this blazon, and this reflection of the body and language.
클로소프스키 작품의 놀라운 특성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특별한 의미에서 신학과 포르노그래피의 일치에서 비롯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월한 포르노학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그것은 형이상학을 초월하는 그만의 방식입니다 : 모방 논쟁과 삼단 논법의 무언극, 신체의 딜레마와 삼단 논법의 분절. 로베르테의 강간은 추론과 대안을 강조하고, 반대로 몸의 자세와 애매함에는 삼단논법과 딜레마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추론과 묘사의 결합은 항상 가장 중요한 논리적 문제이자 가장 고귀한 형태였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제거 할 수 없는 논리학자들의 작업에서 그들이 매우 일반적인 조건에서 문제를 제기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어렵고 결정적인 조건은 묘사가 병리학에서 신체의 일탈 (분절적으로 유기화된 계단식)에 관한 것이고 추론은 신학에서 언어의 모호성(분절적인 영적 삼단 논법)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추론과 묘사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론적, 기술적, 철학적, 문학적 중요성이 가장 큰 사데의 연구에서 첫 번째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클로소프스키는 일탈, 신학 또는 반신학에 대한 현대적 개념의 조건을 제시하는 정도까지 매우 새로운 길을 열어줍니다. 모든 것은 이 문구와 몸과 언어의 반영에서 시작됩니다.
The parallelism presents itself in the first instance between seeing and speaking. Already in the Des Forêts' novel and its gossip-voyeur, "seeing" designated a very special operation or contemplation. It designated a pure vision of reflections which multiply that which they reflect. These reflections offer the voyeur a more intense participation than if he had himself experienced these passions, the double or the reflection of which he now surveys in the faces of others. This is the case in Klossowski's works, when Octave establishes the law of hospitality according to which he "gives" his wife Roberte to the guests. He attempts to multiply Roberte's essence, to create as many simulacra and reflections of Roberte as there are persons establishing relations with her, and to inspire Roberte to emulate somehow her own doubles, thanks to which Octave, the voyeur, possesses and is able to know her better than if he had kept her, quite simply, for himself. "It was necessary that Roberte begin to appreciate herself, that she be interested in finding herself again in the one whom I elaborated with her own elements, and that little by little she might wish, through a sort of emulation of her own double, to surpass even those aspects which drew themselves in my mind. Hence it was important that she be constantly surrounded by idle young men in quest of opportunities." Such is visual possession: we possess thoroughly only that which is already possessed; not simply possessed by another, for the other here is but an intermediary and, in the last analysis, has no existence-but rather possessed by a dead other, or by spirits. We possess thoroughly only what is expropriated, placed outside of itself, split into two, reflected in the gaze, and multiplied by possessive minds. This is why Roberte, in Le Souffleur, is the object of an important problem: can there be "one and the same deceased for two widows?" To possess is thus to give over to possession and to see the given multiplied in the gift. "Such common partaking of a dear but living being is not without analogy to the devoted gaze of an artist" (this strange theme of theft and gift, it will be recalled, appears also in Joyce's Exiles).
평행성은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의 첫 번째 사례에서 나타납니다. 이미 데 포레의 소설과 그 가십거리인 관음증자에서 '본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작업 또는 관조를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반영하는 것을 배가시키는 순수한 비전을 지정했습니다. 이러한 반영은 관음증자에게 자신이 이러한 열정을 경험했을 때보다 더 강렬한 참여를 제공하며,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의 얼굴에서 그 이중 또는 반영을 조사합니다. 이것은 옥타브가 아내 로베르타를 손님에게 "줌"으로서 환대의 법칙을 세우는 클로소프스키의 작품에서 그렇습니다. 그는 로베르테의 본질을 배가시키고, 그녀와 관계를 맺는 사람 수만큼 로베르테의 시뮬라크라와 반영을 만들고, 로베르테가 어떻게 든 자신의 고유한 이중성을 모방하도록 영감을 주려고 시도하며, 덕분에 관음증자인 옥타브가 그녀를 소유하고 단순히 그녀를 자신을 위해 지키는 것보다 그녀를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로베르트가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기 시작하고, 내가 그녀의 요소로 정교하게 만든 사람 안에서 자신을 다시 찾는 데 관심을 가져야했으며, 자신의 이중성을 모방하여 내 마음 속에 그려진 측면조차도 능가하기를 조금씩 바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기회를 찾아 떠도는 젊은이들에게 끊임없이 둘러싸여 있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시각적 소유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만을 철저하게 소유합니다. 여기서 타자는 중개자에 불과하며 마지막 분석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단순히 타자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타자 또는 영에 의해 소유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용되고, 외부에 배치되고, 둘로 나뉘고, 시선에 반영되고, 소유욕에 의해 증식된 것만을 철저하게 소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르 수플레르>에서 로베르테는 "두 과부에게 한 명의 동일한 고인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중요한 문제의 대상이 됩니다. 따라서 소유한다는 것은 소유를 넘겨주고 주어진 것이 선물로 배가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스럽지만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이러한 일반적인 참여는 예술가의 헌신적 인 시선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도난과 선물이라는 이상한 주제는 조이스 추방자에도 나타납니다).
The function of sight consists in doubling, dividing, and multiplying, whereas the function of the ear consists in resonating, in bringing about resonance. Klossowski's entire work moves toward a single goal: to assure the loss of personal identity and to dissolve the self. This is the shining trophy that Klossowski's characters bring back from a voyage to the edge of madness. But as it happens, the dissolution of the self ceases to be a pathological determination in order to become the mightiest power, rich in positive and salutary promises. The self is "corrupted" only because, in the first instance, it is dissolved. This happens, not only to the self which is observed and loses its identity under the gaze, but to the observer also, who is set outside of herself and is multiplied in her own gaze. Octave announces his perverse project with respect to Roberte: "To bring her to anticipate that she is seen . .., to encourage her to free the gestures from this sentiment of self without ever losing sight of herself . .., to attribute them to her reflection, to the point of mimicking herself in some manner." But he also knows well that, as a result of his observation, he loses his own identity, sets himself outside of himself, and is multiplied in the gaze as much as the other is multiplied under the gaze -and that this is the most profound content of the idea of Evil. The essential relation, that is, the complicity of sight with speech appears. For what can one do, vis-à-vis doubles, simulacra, or reflections, other than speak? With respect to that which can only be seen and heard, which is never confirmed by another organ and is the object of Forgetting in memory, of an Unimaginable in imagination, and of an Unthinkable in thought -what else can one do, other than speak of it? Language is itself the ultimate double which expresses all doubles -the highest of simulacra.
시각의 기능은 배가, 나누기, 곱하기로 구성되는 반면, 귀의 기능은 공명,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클로소프스키의 전체 작업은 개인의 정체성 상실과 자아의 해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클로소프스키의 캐릭터들이 광기의 끝으로 향하는 항해에서 가져온 빛나는 트로피입니다. 그러나 자아의 해체는 긍정적이고 유익한 약속이 풍부한 가장 강력한 힘이 되기위한 병리학적 결정이 아닙니다. 자아는 첫 번째 경우에만 해체되기 때문에 "타락"됩니다. 이것은 관찰되고 시선 아래에서 정체성을 잃는 자아뿐만 아니라 자신의 외부에 설정되고 자신의 시선 속에서 배가되는 관찰자에게도 발생합니다. 옥타브는 로베르테에 대한 자신의 일탈적인 프로젝트를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그녀가 자신이 보여질 것을 예상하게 하고 ..., 그녀 자신에 대한 시선을 잃지 않고 자아의 감정으로부터 몸짓을 해방시키고 ...,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모방하는 지점까지 그것들을 그녀의 반영에 귀속시키기 위해서". 그러나 그는 또한 관찰의 결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자신을 자신의 외부로 설정하고 다른 사람이 시선 아래에서 배가되는만큼 시선 속에서 배가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이것이 악의 사상의 가장 심오한 내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관계, 즉 시각과 언어의 공모가 나타납니다. 이중, 시뮬라크르 또는 반영에 대해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오직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다른 기관에 의해 결코 확인되지 않는 것, 기억에서는 망각의 대상이고 상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 사고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언어는 그 자체로 모든 이중성을 표현하는 궁극의 이중성, 즉 시뮬라크르의 최고봉입니다.
That bodies speak has been known for a long time. Klossowski, however, designates a point which is almost the center at which language is formed. Being a Latinist, he invokes Quintillian: the body is capable of gestures which prompt an understanding contrary to what they indicate. In language, the equivalents of such gestures are called "solecisms." For example, one arm may be used to hold off an aggressor while the other is held open to him, in seeming welcome. Or the same hand may be used to hold off, but is incapable of doing so without also offering an open palm. And there is also this play of the fingers, some being held open, and others, closed. Thus, Octave has a collection of secret paintings by the imaginary painter Tonnerre, who is close to Ingres, Chasseriau, and Courbet, and knows that painting is in the solecism of bodies, as, for example, in Lucrezia's ambiguous gesture. His imaginary descriptions are like shining stereotypes punctuating La Révocation. And in his own drawings -canvasses of great beauty- Klossowski willfully leaves the sexual organ indeterminate, provided that he overdetermines the hand as the organ of solecisms. But what, precisely, is the positivity of the hand, its ambiguous gesture, or its "suspended gesture"? Such a gesture is the incarnation of a power which is also internal to language: dilemma, disjunction, and disjunctive syllogism. With regard to the painting representing Lucrezia, Octave writes:
몸들이 말을 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클로소프스키는 언어가 형성되는 거의 중심이 되는 지점을 지정합니다. 라틴어 학자인 그는 퀸틸리아누스의 말을 인용하여 몸은 그것이 지시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이해를 유도하는 제스처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언어에서는 이러한 제스처에 등가되는 것을 "반어법"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한 팔은 공격자를 막는 데 사용하고 다른 팔은 그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열어 놓을 수 있습니다. 또는 같은 손으로 막는 데 사용할 수 있지만 손바닥을 벌리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손가락의 유희도 있는데, 일부는 열린 채로, 다른 손가락은 닫힌 채로 그러합니다. 따라서 옥타브는 잉그르, 샤세뤼, 쿠르베와 가까운 상상 속 화가 토네르의 비밀 그림 모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테면 루크레지아의 애매한 몸짓에서처럼 그림이 몸의 반어법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의 상상의 묘사는 <라 레보시옹(고발)>을 강조하는 빛나는 고정관념과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 즉 위대한 아름다움의 캔버스에서 클로소프스키는 고의적으로 성기를 불확실하게 남겨두는데, 그가 손을 반어법의 기관으로 과도하게 결정한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손의 긍정성, 모호한 제스처 또는 "정지된 제스처"는 정확히 무엇일까요? 이러한 제스처는 딜레마, 분절, 분절적 삼단논법이라는 언어 내부에 내재하는 힘의 육화입니다. 루크레치아를 표현한 그림에 대해 옥타브는 이렇게 썼습니다:
If she yields, she obviously betrays; if she does not yield, she will still be considered as having betrayed since, killed by her aggressor, she will be slandered on top. Do we see her yield, because she is resolved to be done away with, as soon as she makes her downfall known? Or did she first make up her mind to yield, ready to disappear, after having spoken? No doubt, she yields because she reflects; if she did not reflect, she would kill herself or would have herself killed immediately. Now, as she reflects herself in her death project, she throws herself into the arms of Tarquin and, as Saint Augustine insinuates, urged perhaps by her own covetousness, she punishes herself for this confusion and this solecism. As Ovid said, the thing amounts to succumbing to the fear of dishonor. I would say that she succumbs to her own covetousness, which splits into two: the covertousness of her own modesty abandons modesty in order to rediscover itself carnal.
만약 그녀가 넘겨준다면 그녀는 분명히 배신한 것이고, 넘겨주지 않더라도 침략자에게 죽임을 당한 후에 중상모략 당할 것이기에 여전히 배신한 것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그녀가 자신의 몰락을 알자마자 제거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그녀가 넘겨주는 것을 볼/알 수 있습니까? 아니면 말을 한 후 사라질 준비가 된 상태에서 먼저 넘겨주기로 결심했을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그녀는 성찰하기 때문에 넘겨줍니다. 만약 그녀가 성찰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자살하거나 즉시 자신을 죽일 것입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죽음 프로젝트에 자신을 비추면서 타르퀸의 품에 몸을 던지고, 성 어거스틴이 암시했듯이 아마도 자신의 탐욕에 의해 촉구 된 것처럼이 혼란과 위반에 대해 자신을 처벌합니다. 오비드가 말했듯이, 그것은 불명예에 대한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그녀가 두 가지로 나뉘는 자신의 탐욕에 굴복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정절의 탐욕스러움은 자신의 육체를 재발견하기 위해 정절을 버립니다.
Here, in their identity, the proliferating dilemma and the suspended gesture represent both the determination of the body and the movement of language. But the fact that the common element is reflection indicates something else besides.
여기서 그들의 동일성에서 확산되는 딜레마와 정지된 제스처는 몸의 결정과 언어의 움직임을 모두 나타냅니다. 그러나 공통 요소가 반영이라는 사실은 그 외에도 다른 것을 나타냅니다.
The body is language because it is essentially "flexion." In reflection, the corporeal flexion seems to be divided, split in two, opposed to itself and reflected in itself; it appears finally for itself, liberated from everything that ordinarily conceals it. In an excellent scene of La Révocation, Roberte, thrusting her hands into the tabernacle, feels them grasped by two long hands, similar to her own. ... In Le Souffleur, the two Robertes fight, clasp hands, and lock fingers while an invited guest "prompts": make her separate! And Robert ce soir ends with Roberte's gesture -her holding out "a pair of keys to Victor, which he touches though never takes." This is a suspended scene, a genuinely frozen cascade, which reflects all the dilemmas and syllogisms with which "the spirits" had assailed Roberte during her rape. But if the body is flexion, so too is language. An entire reflection of words, or a reflection in words, is necessary for the flexional character of language to appear, finally liberated of everything that covers it up and conceals it. In an admirable translation of the Aeneid, Klossowski makes this point obvious: stylistic research must bring forth the image out of a flexion reflected in two words -a flexion that would be opposed to itself and reflected on itself in words. Such is the positive power of a superior "solecism," or the force of poetry constituted in the clash and copulation of words. If language imitates bodies, it is not through onomatopoeia, but through flexion. And if bodies imitate language, it is not through organs, but through flexion. There is an entire pantomime, internal to language, as a discourse or a story within the body. If gestures speak, it is first of all because words mimic gestures: "Virgil's epic poem is, in fact, a theater where words mimic the gestures and the mental states of the characters. ... Words, not bodies, strike a pose; words, not garments, are woven; words, not armors, sparkle.” There would be a great deal to say about Klossowski's syntax, which is itself made of cascades, suspense, and reflected flexions. In flexion, according to Klossowski, there is a double "transgression" of language by the flesh and of the flesh by language. He was able to derive from this a style and a mimicry -a particular language and a particular body at once.
몸은 본질적으로 "굴절"이기 때문에 언어입니다. 재굴절/반성할 때, 신체적 굴절은 분할되고, 둘로 나뉘고, 그 자체와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며, 그 자체에 반영/재굴절되어 마침내 그것을 통상적으로 감추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 그 자체로 나타납니다. '라 레보시옹(고발)'의 명장면에서 로베르트는 막사 안으로 두 손을 밀어 넣으면서 자신의 손과 비슷한 두 개의 긴 손이 자신의 손을 움켜쥐고 있는 것을 느낍니다. ... [르 수플레르(숨)]에서 초대받은 손님이 연주하는 동안 두 로베르트는 싸우고, 손을 꽉 쥐고, 손가락을 잠급니다: 그녀를 분리 시켜! 그리고 [오늘 밤의 로베르트]에서는 "빅터에게 그가 만지지만 절대로 가져가지는 않는 한 쌍의 열쇠"를 내미는 로베르테의 제스처로 끝납니다. 이것은 정지된 장면, 진정으로 얼어붙은 폭포로, 강간당하는 동안 "영혼"이 로베르트를 괴롭혔던 모든 딜레마와 삼단논법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몸이 굴절이라면 언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어의 굴절적 특성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말들의 전체적 반영 또는 말들 안에서의 반영이 필요하며, 마침내 그것을 은폐하고 감추는 모든 것에서 해방됩니다. 클로소프스키는 아이네이드를 훌륭하게 번역하면서 이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문체 연구는 두 단어에 반영된 굴절, 즉 그 자체에 반대되는 굴절과 말 속에 반영된 굴절에서 이미지를 끌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월한 '반어법'의 긍정적 힘, 즉 단어의 충돌과 교미에서 구성되는 시의 힘입니다. 언어가 몸을 모방한다면 그것은 의성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굴절을 통해서다. 그리고 몸이 언어를 모방한다면 그것은 기관을 통해서가 아니라 굴절을 통해서입니다. 몸 안에는 담론이나 이야기로서 언어에 내제적인 무언극 전체가 존재합니다. 몸짓이 말을 한다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말이 몸짓을 모방하기 때문이다: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는 사실 말이 등장인물의 몸짓과 정신 상태를 모방하는 연극입니다. ... 몸이 아닌 말이 포즈를 취하고, 의복이 아닌 말이 짜여지고, 갑옷이 아닌 말이 반짝입니다." 그 자체로 계단식, 서스펜스, 반사된 굴절로 이루어진 클로소프스키의 통사에 대해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클로소프스키에 따르면 굴절에는 육체에 의한 언어와 언어에 의한 육체의 이중 "위반"이 존재합니다. 그는 이로부터 스타일과 모방, 즉 특정 언어와 특정 신체를 동시에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What is the role of these suspended scenes? It is less a question of grasping in them a perseveration or a continuation than of grasping them as the object of a fundamental repetition: "Life reiterating itself in order to recover its hold on itself during its fall -as if holding its breath in an instantaneous apprehension of its origin; but the reiteration of life by itself would be hopeless without the simulacrum of the artist who, by reproducing this spectacle, succeeds in delivering himself from reiteration." This is the strange theme of a saving repetition, that saves us first and foremost from repetition. Psychoanalysis, it is true, taught us that we are ill from repetition, but it also taught us that we are healed through repetition. Le Souffleur is, precisely, the account of a salvation or a "cure." This cure, however, owes less to the attention of the disturbing Doctor Ygdrasil than to theater rehearsals and to theatrical repetition. But what must theatrical repetition be for it to be capable of securing salvation? The Roberte of Le Soufleur plays Roberte ce soir and she divides herself into two Robertes. If she repeats too exactly, if she acts the role too naturally, repetition misses its mark, no less than if she played the role badly and reproduced it awkwardly. Is this a new insoluble dilemma? Or should we rather imagine two sorts of repetition, one false and the other true, one hopeless and the other salutary, one constraining and the other liberating; one which would have exactness as its contradictory criterion, and another which would respond to other criteria?
이 허공에 걸린 장면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안에서 인내나 지속을 파악하는 문제라기보다는 근본적인 반복의 대상으로 파악하는 문제입니다: " 삶은 추락하는 동안 자신을 붙잡기 위해, 마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순간적인 불안감에 숨을 참는 것처럼, 스스로를 반복하지만, 이 스펙터클을 재생산함으로써 반복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하는 데 성공하는 예술가의 시뮬라크르가 없다면 삶의 반복은 그 자체로 절망적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반복으로부터 가장 먼저 구원하는 구원의 반복이라는 기묘한 주제입니다. 정신분석학은 인간이 반복으로 인해 병에 걸린다는 것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반복을 통해 치유된다는 것도 가르쳤습니다. 르 수플레르는 정확히 말하자면 구원 또는 "치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치유는 불온한 이그드라실 박사의 관심보다는 연극 리허설과 연극적 반복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그렇다면 연극적 반복이 구원을 보장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르 수플레르]의 로베르트는 [오늘 저녁의 로베르트]를 연기하며 자신을 두 명의 로베르로 나눈다. 그녀가 너무 정확하게 반복하면, 너무 자연스럽게 역할을 연기하면 잘못 연기하고 어색하게 재현한 것만큼 반복은 그 의미를 놓친다. 이것이 새로운 풀리지 않는 딜레마인가요? 아니면 두 가지 종류의 반복, 즉 하나는 거짓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이며, 하나는 절망적이고 다른 하나는 희망적이며, 하나는 구속적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적이며, 하나는 정확성을 모순적인 기준으로 삼고 다른 하나는 다른 기준에 대응하는 반복을 상상해야 할까요?
One theme runs through the entire work of Klossowski: the opposition between exchange and true repetition. For exchange implies only resemblance, even if the resemblance is extreme. Exactness is its criterion, along with the equivalence of exchanged products. This is the false repetition which causes our illness. True repetition, on the other hand, appears as a singular behavior that we display in relation to that which cannot be exchanged, replaced, or substituted - like a poem that is repeated on the condition that no word may be changed. It is no longer a matter of an equivalence between similar things, it is not even a matter of an identity of the Same. True repetition addresses something singular, unchangeable, and different, without "identity." Instead of exchanging the similar and identifying the Same, it authenticates the different. The opposition is developed by Klossowski in the following manner: Théodore, in Le Souffleur, takes up again Octave's "laws of hospitality," which consist of multiplying Roberte by giving her to the guests. Now, in this resumption, Théodore comes up against an odd circumstance: the hôtel de Longchamp is a state institution where each spouse must be "declared," in accordance with financial rules and norms of equivalence, in order to serve as the object of exchange and contribute to the sharing of men and women.' Théodore however comes to see, in the institution of Longchamp, the caricature of, and the contrary to, the laws of hospitality. Doctor Ygdrasil tells him:
클로소프스키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는 교환과 진정한 반복 사이의 대립입니다. 교환은 그 유사성이 극단적일지라도 유사성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교환된 제품의 등가성과 함께 정확성이 그 기준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병을 일으키는 거짓 반복입니다. 반면에 참된 반복은 교환, 대체, 대체할 수 없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나타내는 하나의 행동으로 나타나는데, 마치 한 단어도 바뀌지 않는 조건에서 반복되는 시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비슷한 것들 사이의 등가성의 문제가 아니며, 심지어 같은 것의 동일성의 문제도 아닙니다. 진정한 반복은 "동일성"이 없는 단 하나뿐인, 변하지 않는, 차이나는 것을 다룹니다. 유사한 것을 교환하고 같은 것을 동일시하는 대신 차이나는 것을 인증합니다. 클로소프스키의 반대 개념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테오도르는 <르 수플레르>에서 로베르트를 손님에게 주어 번식시키는 것으로 구성된 옥타브의 '환대의 법칙'을 다시 받아들입니다. 이 재개편에서 테오도르는 특이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데, 바로 '호텔 드 롱샹'은 금전적 규칙과 등가성 규범에 따라 각 배우자를 '신고'해야만 교환의 대상이 되고 남성과 여성의 공유에 기여할 수 있는 국가 기관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롱샹의 기관에서 환대의 법칙에 반하는 풍자극을 보게 됩니다. 이그드라실 박사가 그에게 말합니다:
You insist absolutely upon giving without return and never receiving! You cannot live without submitting to the universal law of exchange. ... The practice of hospitality, such as you conceive it, cannot be unilateral. Like any hospitality, this (and especially this) requires an absolute reciprocity in order to be viable; that's the hurdle you don't want to overcome -the sharing of women by men and men by women. You have to carry it through to the end, to consent to exchange Roberte for other women, to accept being unfaithful to Roberte as you persist in desiring that she be unfaithful to you.
당신은 대가와 절대 돌려받는 것 없이 완전하게 주는 것을 고집합니다! 당신은 교환의 보편적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환대의 관행은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다른 환대와 마찬가지로, 이것(특히 이것)이 실행 가능하려면 절대적인 상호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극복하고 싶지 않은 장애물, 즉 남성에 의한 여성과 여성에 의한 남성의 공유입니다. 로베르트를 다른 여성과 교환하는 데 동의하고, 로베르트가 당신에게 불성실해지기를 계속 바라면서 로베르트에게 불성실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끝까지 수행해야 합니다.
Théodore doesn't listen. He knows that the true repetition is in the gift, in the economy of the gift which is opposed to the mercantile economy of exchange (... homage to Georges Bataille). He knows that the host and his reflection, in both senses of the word, are opposed to the hôtel; and that in the host and the gift, repetition surges forth as the highest power of the unexchangeable: "the wife, prostituted by her husband, nevertheless remains his spouse, and the husband's un-exchangeable possession."
테오도르는 듣지 않는다. 그는 진정한 반복은 선물, 교환의 상업적 경제에 반대되는 선물의 경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조르주 바타유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그는 주인과 그의 반영이 두 가지 의미에서 호텔과 반대되며, 주인과 선물에서 반복은 교환할 수 없는 것의 가장 높은 힘으로 솟아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남편에 의해 매춘 된 아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배우자로 남아 있으며 남편의 교환 할 수없는 소유물입니다."
How is it that Théodore gets better following his trip to the edge of madness? He was ill and we are now concerned with his recovery. To be precise, he was ill so long as the risk of an exchange had come to compromise and gnaw away at his attempt at a pure repetition. Were not Roberte and K's wife exchanged to the point that one could not be distinguished from the other, even in the struggle in which they clasped hands? And was not K himself exchanged with Théodore, in order to take everything from him and to divert the laws of hospitality? Théodore (or K?) gets well, when he understands that repetition is not to be found in an extreme resemblance, nor in the exactness of the ex-changed, nor even in a reproduction of the identical. Being neither the identity of the Same nor the equivalence of the similar, repetition is found in the intensity of the Different. There are no two women who look alike, and who can be taken for Roberte; there are not two beings inside Roberte-inside the same woman. But Roberte designates an "intensity" in herself; she comprises a difference in itself, an inequality, the characteristic of which is to return or to be repeated. In short, the double, the reflection, or the simulacrum opens up at last to surrender its secret: repetition does not presuppose the Same or the Similar-these are not its prerequisites. It is repetition, on the contrary, which produces the only "same" of that which differs, and the only resemblance of the different. The convalescent K (or Théodore?) echoes Nietzsche's convalescent Zarathustra. All "designations" are brought down and are "denounced" in order to make room for the rich system of intensities. The couple Octave-Roberte refers to a pure difference of intensity in thought; the names "Octave" and "Roberte" no longer designate things; they now express pure intensities, risings and falls.
테오도르가 광기의 끝자락까지 갔다가 어떻게 나아지게 되었나요? 그는 아팠고 우리는 이제 그의 회복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환의 위험이 그의 순수한 반복 시도를 타협하고 갉아먹을 정도로 그는 아팠습니다. 로베르트와 K의 아내는 서로 손을 맞잡고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도 서로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를 교환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K 자신은 테오도르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환대의 법칙을 다른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그와 교환되지 않았습니까? 테오도르 (또는 K?)는 반복이 극단적인 유사성이나 교환된 것의 정확성, 심지어 동일한 것의 재생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때 건강해집니다. 같은 것의 동일성도, 유사한 것의 등가성도 아닌 반복은 다른 것의 강렬함에서 발견됩니다. 로베르테를 닮은, 혹은 로베르트로 여겨지는 두 명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로베르테 내부에 두 개의 존재, 즉 같은 여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베르테는 스스로에게 '강도'를 지정합니다. 그녀는 그 자체로 차이, 불평등으로 구성되며, 그 특성은 되돌아오거나 반복되는 것입니다. 요컨대, 이중, 반성 또는 시뮬라크르는 마침내 그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열립니다. 반복은 동일함이나 유사함을 전제하지 않으며, 이것들은 전제 조건이 아닙니다. 반대로 반복은 다른 것의 유일한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차이의 유일한 유사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회복기 K(또는 테오도르?)는 니체의 회복기 자라투스트라를 떠올리게 합니다. 풍부한 강도의 시스템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모든 "지정"이 내려지고 "비난"됩니다. 옥타브-로베르테 커플은 사유의 순수한 강도의 차이를 의미하며, '옥타브'와 '로베르테'라는 이름은 더 이상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강도의 상승과 하강을 표현합니다.
This is the relation between frozen scenes and repetition. A "fall," a "difference," a "suspension" are reflected in the resumption, or in repetition. In this sense, the body is reflected in language: the characteristic of language is to take back into itself the frozen scene, to make a "spiritual" event out of it, or rather an advent of "spirits." In language -at the heart of language- the mind grasps the body, and the gestures of the body, as the object of a fundamental repetition. Difference gives things to be seen and multiplies bodies; but it is repetition which offers things to be spoken, authenticates the multiple, and makes of it a spiritual event. Klossowski says: "In Sade, language, intolerable to itself, does not reach exhaustion, despite being unleashed on the same victim for days on end. . .. There can be no transgression in the carnal act, if it is not lived as a spiritual event; but in order to cease the object, it is necessary to look for, and reproduce the event, in a reiterated description of the carnal act." After all, what is a Pornographer? A Pornographer is one who repeats and iterates. That an author is essentially an iterator must tell us something about the relation between language and body, of the mutual limit and transgression that each one finds in the other. In Gombrowicz's novel Pornographia, the central scenes are the frozen scenes: those which the hero (or heroes?) -voyeur-speaker-man of letters, man of the theater- impose(s) on two young people; scenes which derive their perversity from the mutual indifference only of the young people; but also scenes which culminate with a downfall or a difference of level, resumed in a repetition of language and vision; scenes of possession, properly speaking, since the young people have their minds possessed, being fated and denounced by the voyeur-speaker.
이것이 정지된 장면과 반복의 관계입니다. '추락', '차이', '지연'은 재개 또는 반복에 반영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체는 언어에 반영됩니다. 언어의 특징은 정지된 장면을 다시 그 자체로 가져와서 "영적인" 사건으로 만들거나 오히려 "영혼"의 출현을 만드는 것입니다. 언어에서 언어의 핵심인 마음은 몸과 몸의 몸짓을 근본적인 반복의 대상으로 파악합니다. 차이는 볼거리를 제공하고 신체를 다수화하지만, 말할 거리를 제공하고 그 다수성을 인증하며 영적인 사건으로 만드는 것은 반복입니다. 클로소프스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드'에서 언어는 그 자체로 참을 수 없는 것이어서, 같은 희생자에게 며칠 동안 계속 쏟아져도 소진되지 않습니다. . .. 육체적 행위가 영적 사건으로 살지 않는다면 육체적 행위에는 위반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대상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육체적 행위에 대한 거듭된 묘사에서 그 사건을 찾아서 재생산해야합니다." 그렇다면 포르노그래퍼란 무엇인가요? 포르노그래퍼는 반복하고 되풀이하는 사람입니다. 작가가 본질적으로 반복자라는 것은 언어와 몸의 관계,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하는 상호 한계와 위반에 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말해야 합니다. 곰브로비츠의 소설 『포르노그라피아』에서 중심 장면은 얼어붙은 장면입니다: 주인공(또는 주인공들?) -관음증자-화자-문자의 남자, 극장의 남자- 이 두 젊은이에게 강요하는 장면; 젊은이들의 상호 무관심에서만 그들의 일탈을 이끌어내는 장면; 또한 언어와 시각의 반복에서 재개되는 몰락 혹은 층위의 차이로 절정에 이르는 장면; 소유의 장면, 적절하게 말하자면, 젊은이들이 관음증자-화자에 의해 운명지어지고 비난을 받으며 자신들의 마음을 소유당하는 장면.
No, no, the whole scene would not have been so shocking had it not been so incompatible with their natural rhythm, so set, motionless, and alien. ... Over their heads, their hands touched "accidentally." And as they touched, they pulled them down abruptly and violently. For some time they both gazed attentively at their joined hands. Then they suddenly fell down -it was impossible to tell who had been pushed by whom- it looked as though their hands had pushed them over.
아니, 아니, 전체 장면이 그들의 자연스러운 리듬과 그렇게 양립 할 수 없었고, 너무 설정되고, 움직이지 않고, 이질적이지 않았다면 전체 장면이 그렇게 충격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 머리 위로 그들의 손이 "우연히" 닿았습니다. 그리고 손이 닿자마자 갑작스럽고 격렬하게 아래로 끌어내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합쳐진 손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밀려 넘어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은 갑자기 쓰러졌고, 마치 손이 그들을 밀쳐 넘어뜨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It is good that two authors, so new, so important, and yet so different, encounter each other on the theme of body-language, of pornography-repetition, pornographer-repeater, and writer-iterator (littérateur-itéra-teur).
이렇게 새롭고 중요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작가가 포르노그래피-반복, 포르노그래퍼-반복자, 작가-반복자(littérateur-itéra-teur)라는 바디 랭귀지라는 테마로 서로 만나게 되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What is the dilemma? How is the disjunctive syllogism, which expresses the dilemma, made up? The body is language; but it may conceal the speech that it is -it can hide it. The body may, and ordinarily does, wish for silence with respect to its works. In this case, repressed by the body but also projected, delegated, and alienated, speech becomes the discourse of a beautiful soul that speaks of laws and virtues while keeping silent over the body. It is clear, in this case, that speech itself is pure, so to speak, but that the silence on which it rests is impure. By holding its silence, at once covering up and delegating its speech, the body delivers us over to silent imaginings. In the scene of her rape by the Colossus and the Hunchback (that is, by spirits which in themselves mark a difference of levels as the ultimate reality), we hear Roberte say: "What are you going to do with us, and what are we going to do with your flesh? Shall we eat it since it is still able to speak? Or shall we treat it as if it had to maintain silence forever? ... How could (your body) be so delicious if not by virtue of the speech which it conceals?" And Octave says to Roberte: "You have a body with which to cover your speech." In fact, Roberte is the president of the censorship commission; she speaks of virtues and of laws; she is not without austerity, she has not killed the "beautiful soul" within herself. ... Her words are pure, though her silence is impure. For in this silence she imitates the spirits; thus she provokes them, she provokes their aggression. They act on her body, inside her body, having taken on the form of "undesirable thoughts," at once colossal and dwarfish. Such is the first term of the dilemma: either Roberte keeps quiet but provokes the aggression of spirits, her silence being all the more impure as her speech is ever more so. . . . Or there must be an impure, obscene, and impious language in order for silence to be pure, for language to be a pure language which resides in this silence. "Speak and we disappear," say the spirits to Roberte.
딜레마란 무엇인가요? 딜레마를 표현하는 분절적 삼단 논법은 어떻게 구성될까요? 몸은 언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말하기라는 것을 숨길 수 있습니다. 몸은 자신의 행위와 관련하여 침묵을 원할 수 있고, 보통은 그렇게 합니다. 이 경우 신체에 의해 억압될 뿐만 아니라 투사되고 위임되고 소외된 말하기는 신체에 침묵하면서 법과 미덕을 말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담론이 됩니다. 이 경우 말하자면 말하기 자체는 순수하지만 그 말의 바탕이 되는 침묵은 불순하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침묵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말하기를 은폐하고 위임함으로써 몸은 우리를 침묵의 상상으로 인도합니다. 거인과 꼽추에 의해 강간당하는 장면에서 (즉, 그 자체로 궁극적인 실재로서 수준의 차이를 나타내는 영혼에 의해) 우리는 로베르트가 말하는 것을 듣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어떻게 할 것이며 우리는 당신의 살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아직 말을 할 수 있으니 먹어야 할까요? 아니면 영원히 침묵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취급할까요? ... (당신의 몸이) 숨기고 있는 말 덕분에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맛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옥타브는 로베르테에게 "당신은 당신의 말을 감출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로베르테는 검열위원회 위원장이며, 미덕과 법에 대해 말하고, 엄격함이 없는 것도 아니며, 자신 안에 있는 '아름다운 영혼'을 죽이지 않았다. ... 그녀의 말은 순수하지만 침묵은 불순하다. 이 침묵 속에서 그녀는 영혼을 모방합니다. 따라서 그녀는 그들을 자극하고 그들의 침략을 자극합니다. 그들은 그녀의 몸, 그녀의 몸 안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의 형태를 취하여 한 번에 거대하고 왜소하게 행동합니다. 이것이 딜레마의 첫 번째 항입니다. 로베르트는 침묵을 지키지만 영혼의 공격성을 자극하고, 그녀의 침묵은 그녀의 말하기가 점점 더 불순해질수록 더욱 불순해집니다. . . . 아니면 침묵이 순수하기 위해서는 불순하고 외설적이며 불경스러운 언어가 있어야 하고, 언어가 이 침묵 속에 존재하는 순수한 언어가 되어야 한다. "말하면 우리는 사라진다." 영혼들이 로베르트에게 말한다.
Does Klossowski simply mean that speaking prevents us from thinking about nasty things? No; the pure language which produces an impure silence is a provocation of the mind by the body; similarly, the impure language which produces a pure silence is a revocation of the body by the mind. As Sade's heroes say, it is not the bodies which are present that excite the libertine, but rather the great idea of what is not there. In Sade, "pornography is a form of the battle of the mind against the flesh." More precisely, what is revoked in the body? Klossowski's answer is that it is the integrity of the body, and that because of this the identity of the person is somewhat suspended and volatilized. This answer is undoubtedly very complex. It suffices, however, to make us sense that the body-language dilemma is established between two relations of the body and language. The couple "pure language/impure silence" designates a certain relation, in which language brings the identity of a person and the integrity of a body together in a responsible self, but maintains a silence about all the forces which cause the dissolution of this self. Or language itself becomes one of these forces and takes charge of all these forces, giving thereby to the disintegrated body and the dissolved self access to a silence which is that of innocence. In this case, we have the other term of the dilemma: "impure language/pure silence." In other words, the alternative is between two purities, the false and the true, the purity of responsibility and the purity of innocence, the purity of Memory and the purity of Forgetful-ness. Posing the problem from a linguistic point of view, Le Baphomet says: either the words are recalled but their sense remains obscure; or the sense appears when the memory of the words disappears.
클로소프스키는 단순히 말을 하면 불쾌한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니요, 불순한 침묵을 만들어내는 순수한 언어는 신체에 의한 정신의 도발이며, 마찬가지로 순수한 침묵을 만들어내는 불순한 언어는 정신에 의한 신체의 철회입니다. 사드의 영웅들이 말했듯이, 자유인을 흥분시키는 것은 존재하는 신체가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위대한 생각입니다. 사데는 "포르노는 육체에 대항하는 정신의 싸움의 한 형태"라고 말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육체에서 무엇이 철회되는가? 클로소프스키의 대답은 그것이 신체의 완전성이며, 이로 인해 그 사람의 동일성이 다소 중단되고 휘발된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복잡합니다. 그러나 신체-언어 딜레마가 신체와 언어의 두 관계 사이에서 성립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순수한 언어/불순한 침묵'의 짝은 언어가 한 사람의 정체성과 신체의 완전성을 책임감 있는 자아로 통합하지만, 이 자아를 해체하는 모든 힘에 대해서는 침묵을 유지하는 특정 관계를 나타냅니다. 또는 언어 자체가 이러한 힘들 중 하나가 되어 이 모든 힘들을 담당함으로써 해체된 신체와 해체된 자아가 결백함이라는 침묵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경우, 우리는 딜레마의 다른 용어인 "불순한 언어/순수한 침묵"을 갖게 됩니다. 다시 말해, 거짓과 진실, 책임의 순수성과 결백함의 순수성, 기억의 순수성과 망각의 순수성이라는 두 가지 순수성 사이에 대안이 있는 것입니다. 르 바포메는 언어적 관점에서 문제를 제기하면서 단어는 기억되지만 그 의미는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거나, 단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질 때 의미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More profoundly still, the nature of the dilemma is theological. Octave is a professor of theology. Le Baphomet is in its entirety a theological novel, which opposes the system of God and the system of the Antichrist as the two terms of a fundamental disjunction. The order of divine creation in fact depends on bodies, is suspended from them. In the order of God, in the order of existence, bodies give to minds (or rather impose on them) two properties: identity and immortality, personality and resurrectibility, incommunicability and integrity. Says the docile nephew Antoine with regard to Octave's seductive theology: "What is incommunicability - It is the principle according to which the being of an individual would not be attributable to several individuals, and which constitutes properly the self-identical person. What is the privative function of the person? It is that of rendering our substance incapable of being assumed by a nature either inferior or superior to our own. " It is insofar as it is tied to a body and is incarnated that the mind acquires personality: separated from the body, in death, it recovers its equivocal and multiple power. And it is insofar as it is brought back to its body that the mind acquires immortality, the resurrection of bodies being the condition of the survival of the mind. Liberated from its body, declining or revoking its body, the spirit would cease to exist--rather, it would "subsist" in its disquieting power. Death and duplicity, death and multiplicity are therefore the true spiritual determinations, or the true spiritual events. We must understand that God is the enemy of spirits, that the order of God runs counter to the order of spirits; in order to establish immortality and personality, in order to impose it forcefully on spirits, God must depend upon the body. He submits the spirits to the privative function of the person and to the privative function of resurrection. The outcome of God's way is "the life of the flesh." God is essentially the Traitor: he commits treason against spirits, treason against breath itself, and, in order to thwart their riposte, doubles the treason by incarnating himself. "In the beginning was treason."
여전히 더 심오한 것은 이 딜레마의 본질이 신학적이라는 점입니다. 옥타브는 신학 교수입니다. 르 바포메트는 전체적으로 신학 소설로, 하나님의 체제와 적그리스도의 체제를 근본적인 분절/선언의 두 가지 용어로 반대합니다. 사실 신성한 창조의 질서는 육체에 달려 있으며, 육체로부터 정지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질서, 존재의 질서에서 몸은 정체성과 불멸, 인격과 부활 가능성, 소통 불가능성과 완전성이라는 두 가지 속성을 마음에 부여합니다 (또는 오히려 그들에게 부과합니다). 옥타브의 매혹적인 신학에 대해 유순한 조카 앙투안은 이렇게 말합니다: "소통 불가능성이란 무엇인가 - 그것은 개체적 존재를 여러 개체들에게 귀속시키지 않고 자기 동일적인 인물을 적절하게 구성하는 원칙입니다. 그 사람의 사적 기능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우리보다 열등하거나 우월한 본성에 의해 우리의 실체가 가정 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 정신이 육체에 묶여 있고 육화되는 한 정신은 인격을 획득합니다 : 육체와 분리 된 죽음에서 그것은 모호하고 다중적인 힘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정신이 몸으로 되돌아 오는 한 정신은 불멸을 얻으며, 몸의 부활은 정신의 생존 조건이됩니다.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육체를 쇠퇴시키거나 철회하면 정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불안한 힘으로 " 존속"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과 이중성, 죽음과 다중성은 진정한 영적 결정, 즉 진정한 영적 사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의 적이며, 하나님의 질서가 영의 질서에 반한다는 것을 이해해야합니다. 불멸과 인격을 확립하기 위해, 영에게 그것을 강력하게 강요하기 위해 하나님은 육체에 의존해야합니다. 그는 영을 사람의 사적 기능과 부활의 사적 기능에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방법의 결과는 "육체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반역자입니다. 그는 영에 대한 반역, 호흡 자체에 대한 반역을 저지르고, 그들의 반란을 막기 위해 자신을 육화함으로써 반역을 두 배로 늘리 셨습니다. "태초에 반역이 있었다."
The order of God includes the following elements: the identity of God as the ultimate foundation; the identity of the world as the ambient environment; the identity of the person as a well-founded agency; the identity of bodies as the base; and finally, the identity of language as the power of denoting everything else. But this order of God is constructed against another order, and this order subsists in God and weakens him little by little. It is at this point that the story of Baphomet begins: in the service of God, the great master of the Templars has as his mission the sorting out of spirits and the prevention of their mixing together while awaiting the day of resurrection. Thus, there is already in dead souls a certain rebellious intention, an intention to escape from God's judgment: "The most ancient souls lie in wait for the most recently arrived, and merging by means of affinities, each agrees to efface within the others his own responsibility." One day, the grand master recognizes a spirit which has wormed its way into his presence--that of Saint Theresa! Dazzled by his prestigious guest, the master complains to her about the "complication" of his task, and about the ill will of the spirits. Rather than indulge him, however, Theresa begins an extraordinary discourse: the number of the elect is closed; no longer is anyone damnable or sanctifiable; spirits are somehow liberated from God's order; they feel themselves released from resurrection; and they are prepared to penetrate up to six or seven of them in a single embryonic body in order to unburden themselves of their person and their responsibility. Theresa herself is a rebel, a prophet of rebellion. She announces the death of God, His overthrow. "I am excluded from the number of the elect." For a young theologian whom she loved, she was able to obtain a new existence in another body, then a third. ... Was this not proof that God had abandoned His order, that He had abandoned the myths of the incommunicable person and the definitive resurrection, as well as the theme of "once and for all" implied in these myths? Indeed, an order of perversity had exploded the divine order of integrity: a perversity in the lower world where an exuberant, stormy nature reigns, full of raping, shameful debauchery and travesty, since several souls enter together into the same body, and the same soul may possess several bodies; a perversity up above, since spirits are already mingled together. God can no longer guarantee any identity! This is the great "pornography," the revenge taken by spirits on both God and bodies. And Theresa announces to the grand master his destiny: he himself will no longer have the capacity to sort out spirits! Then, seized by a sort of rage and jealousy, but also by a mad temptation and a dual desire to chastise Theresa and to try her, and finally by the dizziness of the dilemmas which trouble his thoughts (for his consciousness had sunk into "disconcerting syllogisms"), the grand master "insufflated" the breath/spirit (insufle le souffle) of Theresa into the ambiguous body of a young man, a young page who had once troubled the Templars and had been hung during an initiation scene. His body, suspended and rotating, marked by hanging, miraculously conserved, and reserved for a function which is going to overthrow God's order, received Theresa's breath-an anal insufflation which elicits in the page's body a strong genital reaction.
하나님의 질서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합니다: 궁극적 기초로서의 하나님의 동일성, 주변 환경으로서의 세계의 동일성, 근거가 있는 주체로서의 사람의 동일성, 기초로서의 몸의 동일성, 마지막으로 다른 모든 것을 나타내는 힘으로서의 언어의 동일성.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질서는 또 다른 질서에 대항하여 구성되며, 이 질서는 하나님 안에 존재하면서 조금씩 그를 약화시킵니다. 이 시점에서 바포메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기사단의 위대한 스승은 부활의 날을 기다리는 동안 영혼을 분류하고 서로 섞이는 것을 방지하는 것을 그의 사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영혼에는 이미 어떤 반항적 인 의도, 즉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가장 오래된 영혼은 가장 최근에 도착한 영혼을 기다리고 있으며, 친밀감을 통해 합쳐지고, 각각은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 안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데 동의합니다." 어느 날, 위대한 스승은 자신의 존재에 들어온 영혼, 즉 성녀 테레사의 영혼을 알아차립니다! 명망 높은 손님에게 현혹된 마스터는 테레사에게 자신의 임무가 '복잡하다'는 것과 영혼의 악의에 대해 불평합니다. 그러나 테레사는 그를 탐닉하기보다는 특별한 담론을 시작합니다. 선택받은 자의 수는 닫혔습니다. 더 이상 아무도 저주받을 수 없거나 성화 될 수 없으며, 영은 어떻게 든 하나님의 질서에서 해방되고, 부활에서 해방되었다고 느끼고, 자신의 인격과 책임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하나의 배아 몸에 최대 6 ~ 7 명까지 침투 할 준비가되어 있습니다. 테레사 자신은 반역자이자 반란의 예언자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죽음과 그분의 전복을 선포합니다. "나는 선택받은 자의 수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녀가 사랑했던 젊은 신학자를 위해 그녀는 다른 몸으로, 그리고 세 번째 몸으로 새로운 존재를 얻을 수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 께서 자신의 질서를 버리 셨다는 증거가 아니 었으며, 그분이 소통 할 수없는 사람과 결정적인 부활에 대한 신화와 이러한 신화에 내포 된 "하나 그리고 모두"라는 주제를 버리 셨다는 증거가 아니 었습니까? 실제로, 여러 영혼이 한 몸에 함께 들어가고 같은 영혼이 여러 몸을 소유 할 수 있기 때문에 강간, 수치스러운 방탕 및 비극으로 가득 찬 활기차고 폭풍우 치는 자연이 지배하는 아래쪽 세계의 일탈적인 질서; 영들이 이미 함께 섞여 있기 때문에 위의 일탈적인 질서가 신성한 정결의 질서를 폭발시켰습니다. 신은 더 이상 어떤 동일성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신과 육체 모두에 대한 영혼의 복수 인 위대한 "포르노"입니다. 그리고 테레사는 위대한 스승에게 자신의 운명을 알립니다. 그 자신은 더 이상 영혼을 분류 할 능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일종의 분노와 질투뿐만 아니라 테레사를 징계하고 그녀를 시험하려는 미친 유혹과 이중적 욕망,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생각을 괴롭히는 딜레마의 현기증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의 의식이 "당황스러운 삼단 논법"에 가라 앉았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스승은 테레사의 숨결/영혼(인슈플 르 수플레)을 한때 기사단을 괴롭혔고 입문 장면에서 교수형에 처했던 젊은 페이지의 모호한 몸에 "주입"시켰다. 교수형에 걸려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신의 질서를 전복할 기능을 위해 남겨진 그의 몸은 테레사의 숨결, 즉 항문 주입을 받아 페이지의 몸에서 강한 생식기 반응을 이끌어 냈습니다.
This is the other term of the dilemma, the system of breaths/spirits, the order of the Antichrist, which is opposed point for point to the divine order. It is characterized by the death of God, the destruction of the world, the dissolution of the person, the disintegration of bodies, and the shifting function of language which now expresses only intensities. It is frequently said that philosophy throughout its history has changed its center of perspective, substituting the point of view of the finite self for that of the infinite divine substance. Kant would stand at the turning point. Is this change, however, as important as it is claimed to be? Is this where the important difference is to be found? As long as we maintain the formal identity of the self, doesn't the self remain subject to a divine order, and to a unique God who is its foundation? Klossowski insists that God is the sole guarantor of the identity of the self and of its substantive base, that is, of the integrity of the body. One cannot conserve the self without also holding on to God. The death of God essentially signifies, and essentially entails, the dissolution of the self: God's tomb is also the tomb of the self. Thus, the dilemma finds perhaps its most acute expression: the identity of the self always refers to the identity of something outside of us; therefore, "if it is God, our identity is pure grace; if it is the ambient world where everything begins and ends by denotation, our identity is but a pure grammatical joke." In his own way, Kant had foreseen this when he subjected to a common, at least speculative, death rational psychology, rational cos-mology, and rational theology alike.
이것은 딜레마의 다른 항인 호흡 / 영의 체계, 적 그리스도의 질서이며, 이는 신성한 질서와 정반대되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신의 죽음, 세계의 파괴, 인격의 해체, 육체의 해체, 그리고 이제 강도만을 표현하는 언어의 기능 전환을 특징으로합니다. 철학은 역사를 통틀어 유한한 자아의 관점을 무한한 신적 실체의 관점으로 대체하면서 관점의 중심을 바꾸어 왔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칸트는 그 전환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가 주장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일까요? 여기서 중요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자아의 형식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 자아는 여전히 신성한 질서와 그 기초가 되는 유일신에 종속되어 있지 않습니까? 클로소프스키는 자아의 정체성과 그 실체적 기반, 즉 신체의 완전성에 대한 유일한 보증인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합니다. 신을 붙잡지 않고는 자아를 보존할 수 없습니다. 신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자아의 해체를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자아의 해체를 수반합니다: 하나님의 무덤은 자아의 무덤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딜레마는 아마도 가장 첨예한 표현을 찾을 수 있는데, 자아의 동일성은 항상 우리 외부의 어떤 것의 동일성을 가리키며, 따라서 "그것이 신이라면 우리의 동일성은 순수한 은총이고, 모든 것이 표상에 의해 시작되고 끝나는 주변 세계라면 우리의 동일성은 순수한 문법적 농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칸트는 적어도 사변적인 죽음의 합리적 심리학, 합리적 우주론, 합리적 신학이 모두 공통적으로 적용될 때 이를 나름대로 예견했습니다.
As it happens, it is with regard to one of Kant's theses on theology, an odd and particularly ironic thesis, that the problem of the disjunctive syllogism takes on its full import: God is presented as the principle or master of the disjunctive syllogism. To understand this thesis, we must recall the link that Kant poses in general between Ideas and syllogism. Reason is not defined initially by special notions which one might call "Ideas." It is rather defined by a certain way of treating the concepts of the understanding: a concept being given, reason seeks another which, taken in the totality of its extension, conditions the attribution of the first to the object to which it refers. This is the nature of the syllogism. For example, "mortal" being a concept attributed to Socrates, one seeks the concept which, taken in the full range of its extension, conditions this attribution (all men). Thus, the deployment of reason would pose no particular problem if it did not run up against a difficulty -namely, that the understanding makes use of original concepts called "categories." These are already attributed to all objects of possible experience. So, when reason encounters a category, how is it going to be able to find another concept capable, in all its extension, to condition the attribution of the category to all objects of possible experience? It is at this point that reason is forced to invent supra-conditioning notions, which will be called "Ideas." It is therefore in a secondary way that reason is defined as the faculty of Ideas. We will call "Idea" a notion taken in all its extension which conditions the attribution of a category of relation (substance, causality, community) to all objects of possible experience. Kant's genius lies in his showing that the self is the Idea which corresponds to the category of substance. Indeed, the self conditions not only the attribution of this category to phenomena of inner sense, but to those of outer sense as well, in virtue of their no less great immediacy. Thus, the self is revealed as the universal prinicple of the categorical syllogism, insofar as this relates a phenomenon determined as a predicate to a subject determined as substance. Kant shows also that the world is the Idea which conditions the attribution of the category of causality to all phenomena. In this way, the world is the universal principle of the hypothetical syllogism. This extraordinary theory of the syllogism, which consists in discovering the ontological implications of the latter, will thus find itself faced with a third and final task, a task which is by far the most delicate: there is no choice, it is left for God as the third Idea to ensure the attribution of the category of community, that is, the mastery of the disjunctive syllogism. God is here, at least provisionally, deprived of his traditional claims -to have created subjects or made a world- and now has what is but an apparently humble task, namely, to enact disjunctions, or at least to found them.
공교롭게도 칸트의 신학에 관한 논문 중 하나 인 이상하고 특히 아이러니 한 논문과 관련하여 분절적 삼단 논법의 문제가 완전히 중요해졌습니다: 신은 분절적 삼단논법의 원리 또는 주인으로 제시됩니다. 이 논제를 이해하려면 칸트가 일반적으로 이데아와 삼단논법 사이에 제기한 연관성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성은 처음에 "이데아"와 같은 특별한 개념에 의해 정의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해의 개념을 다루는 특정한 방식에 의해 정의된다: 어떤 개념이 주어지면, 이성은 그 확장의 총체에서 취해져 첫 번째 개념의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에 대한 귀속을 조건으로 하는 다른 개념을 찾는다. 이것이 삼단논법의 본질입니다. 예를 들어, '유한자'가 소크라테스에게 귀속된 개념이라면, 이 속성(모든 인간)을 조건으로 하는 개념을 그 확장된 범위 전체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이성의 전개는 어려움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즉 이해가 " 카테고리들" 이라는 원래의 개념을 사용한다는 어려움에 부딪히지 않는다면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념은 이미 가능한 경험의 모든 대상에 귀속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성이 카테고리를 만났을 때, 그것의 모든 확장에서 가능한 모든 경험의 대상에 대한 카테고리의 귀속을 조건화할 수 있는 다른 개념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이 지점에서 이성은 "이데아"라고 불리는 초조건적 개념을 발명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성이 이데아의 능력으로 정의되는 것은 이차적인 방식입니다. 우리는 가능한 경험의 모든 대상에 대한 관계 카테고리(실체, 인과, 공동체)의 귀속을 조건화하는 모든 확장된 개념을 "이데아"라고 부를 것입니다. 칸트의 천재성은 자아가 실체의 카테고리에 대응하는 이데아라는 것을 보여준 데에 있습니다. 실제로 자아는 이 카테고리가 내적 의미의 현상에 귀속될 뿐만 아니라 외적 의미의 현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커다란 즉각성으로 인해 귀속될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따라서 자아는 술어로 결정된 현상과 실체로 결정된 주체를 관련시키는 한 카테고리 삼단논법의 보편적 원리로서 드러난다. 칸트는 또한 세계가 모든 현상에 대한 인과의 카테고리의 귀속을 조건 짓는 이데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런 식으로 세계는 가상적 삼단논법의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따라서 후자의 존재론적 함의를 발견하는 것으로 구성된이 특별한 삼단 논법 이론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과제 인 가장 섬세한 과제에 직면하게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공동체 범주의 귀속, 즉 분리 된 삼단 논법의 숙달을 보장하는 것은 세 번째 이데아로서 신에게 남겨져 있습니다. 신은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주체를 창조하거나 세계를 만들었다는 그의 전통적인 요구를 박탈 당하고 이제 분절을 제정하거나 적어도 분절을 발견하는 겉보기에 겸손한 임무만 가지고 있습니다.
How is this possible? At this point the irony comes through: Kant is going to show that, under the name of the philosophical Christian God, nothing but this has ever been understood. In fact, God is defined by the sum total of all possibility, insofar as this sum constitutes an "originary" material or the whole of reality. The reality of each thing "is derived" from it: it rests in effect on the limitation of this totality, "inasmuch as part of it (reality) is ascribed to the thing, and the rest is excluded -a procedure which is in agreement with the 'either-or' of the disjunctive major premise and with the determination of the object, in the minor premise, through one of the members of the division." In short, the sum total of the possible is an originary material from which the exclusive and complete determination of the concept of each thing is derived through disjunction. God has no other sense than that of founding this treatment of the disjunctive syllogism, since distributive unity does not allow us to conclude that his Idea represents a collective or singular unity of a being in itself which would be represented by the Idea.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가 드러납니다: 칸트는 철학적 기독교 신이라는 이름 아래서 지금까지 이해된 것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사실 신은 모든 가능성의 총합으로 정의되는데, 이 총합이 '본래적인' 물질 또는 현실 전체를 구성하는 한에서 그렇습니다. 각 사물의 실재는 그것으로부터 "파생"된다: 그것은 사실상 이 총체의 한계 위의 효과에 놓여 있는데, "그것의 일부(실재)가 사물에 귀속되고 나머지는 배제되는 한, - 이 절차는 분절적인 대전제의 '양자택일'과 일치하며, 분할의 구성원 중 하나를 통해 소전제에서 대상의 결정과 일치하는 것"이다. 요컨대, 가능한 것의 총합은 분절을 통해 각 사물의 개념에 대한 배타적이고 완전한 결정이 도출되는 본래의 물질입니다. 분배적 통일성은 신의 이데아가 그 자체로 이데아로 표상될 수 있는 존재의 집단적 또는 단일한 통일성을 나타낸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게 하기 때문에, 신은 분절적 삼단논법에 대한 이러한 취급을 창안한 것 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In Kant, therefore, we see that God is revealed as the master of the disjunctive syllogism only inasmuch as the disjunction is tied to exclusions in the reality which is derived from it, and thus to a negative and limitative use. Klossowski's thesis, with the new critique of reason that it implies, takes on therefore its full significance: it is not God but rather the Antichrist who is the master of the disjunctive syllogism. This is because the anti-God determines the passage of each thing through all of its possible predicates. God, as the Being of beings, is replaced by the Baphomet, the "prince of all modifications," and himself modification of all modifications. There is no longer any originary reality. The disjunction is always a disjunction; the "either-or" is always an "either-or." Rather than signifying that a certain number of predicates are excluded from a thing in virtue of the identity of the corresponding concept, the disjunction now signifies that each thing is opened up to the infinity of predicates through which it passes, on the condition that it lose its identity as concept and as self. The disjunctive syllogism accedes to a diabolical principle and use, and simultaneously the disjunction is affirmed for itself without ceasing to be a disjunction; divergence or difference becomes objects of pure affirmation, and "either-or" becomes the power of affirmation, outside the conceptual conditions of the identity of a God, a world, or a self. Dilemma and solecism acquire as such a superior positivity. We have seen, however, how often negative or exclusive disjunctions still subsist in Klossowski's work: between exchange and repetition; between language concealed by the body and the glorious body formed by language; and finally, between God's order and the order of the Antichrist. But it is precisely inside God's order, and only there, that disjunctions have the negative value of exclusion. And it is on the other side, inside the order of the Antichrist, that the disjunction (difference, divergence, decentering) becomes as such an affirmative and affirmed power.
그러므로 칸트에서 우리는 신이 분절적 삼단논법의 주체로 드러나는 것은 분절이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실재의 배제와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부정적이고 제한적인 용도로만 사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클로소프스키의 논문은 이성에 대한 새로운 비판과 함께 그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는데, 그것은 분절적 삼단논법의 주인은 신이 아니라 오히려 적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적 그리스도는 가능한 모든 술어를 통해 각 사물의 통로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존재들의 존재로서 신은 "모든 변형의 왕자" 로서 바포메트에 의해 대체되고, 그 자신은 모든 변형의 변형입니다. 더 이상 원래의 실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분절"은 언제나 분절이고, "양자택일"은 언제나 "둘 중 하나"입니다. 이제 분절은 특정 수의 술어가 해당 개념의 동일성 때문에 한 사물에서 제외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는, 각 사물이 개념으로서의 동일성과 자아로서의 동일성을 상실하는 조건에서 그것이 통과하는 무한한 술어에 개방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분절적 삼단논법은 악마적 원리와 용법에 접근하며, 동시에 분절은 분절로 멈추지 않고 그 자체로 긍정된다; 발산이나 차이는 순수한 긍정의 대상이 되고, 신, 세계, 자아의 동일성이라는 개념적 조건 밖에서 "양자택일"은 긍정의 힘이 된다. 딜레마와 반어법은 이처럼 우월한 긍정성을 획득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클로소프스키의 작품에서 얼마나 자주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인 분리가 존재하는지 보아왔습니다. 교환과 반복 사이, 몸에 의해 은폐된 언어와 언어에 의해 형성된 영광스러운 몸 사이,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질서와 적그리스도의 질서 사이에서 말입니다. 그러나 분절이 배제의 부정적 가치를 갖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질서 내부, 그리고 거기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반대편, 즉 적그리스도의 질서 내부에서 분절(차이, 발산, 탈중심화)이 긍정적이고 확고한 힘이 되는 것은 바로 그 반대편입니다.
What is this other side, this Baphomet system of pure breaths or mortal spirits? They do not have the person's identity; they have deposed and revoked it. But they nevertheless have a singularity, or even multiple singularities; they have fluctuations forming figures on the crests of waves. We reach here the point at which the Klossowskian myth of breaths/spirits becomes also a philosophy. It seems that breaths, in themselves and in ourselves, must be conceived of as pure intensities. In this form of intensive quantities or degrees, dead spirits have "subsistence," despite the fact that they have lost the "existence" or extension of the body. In this form they are singular, though they have lost the identity of the self. Intensities comprehend in themselves the unequal or the different -each one is already difference in itself--so that all of them are comprehended in the manifestation of every one. This is a world of pure intentions, as Baphomet explains: "no self-esteem prevails"; "every intention may yet be permeated by other intentions"; "only the most senseless intention of the past hoping for the future could triumph over another intention"; "were another breath to come to encounter it, they would then presuppose each other, but each one according to a variable intensity of intention." These are pre-individual and impersonal singularities -the splendor of the indefinite pronoun-mobile, communicating, penetrating one another across an infinity of degrees and an infinity of modifications. Fascinating world where the identity of the self is lost, not to the benefit of the identity of the One or the unity of the Whole, but to the advantage of an intense multiplicity and a power of metamorphosis, where relations of force play within one another. It is the state of what must be called "complicatio," as opposed to the Christian simplificatio. Roberte ce soir had already displayed Octave's effort to work his way into Roberte, to insert his own intention (his intensive intentionality), and to give her thereby over to other intentions - even if this were by "denouncing" her to the spirits who rape her. And in Le Baphomet, Theresa is "insufflated" into the body of the young page, in order to form the androgynous or Prince of modification who is offered up to the intentions of others and gives himself to other spirits for participation: "I am not a creator who enslaves being to what he creates, his creation in a single self, and this self in a single body. ..." The system of the Antichrist is the system of simulacra opposed to the world of identities. But, as the simulacrum dismisses identity, speaks and is spoken, it takes hold at the same time of both seeing and speaking and inspires both light and sound. It opens up to its difference and to all other differences. All simulacra rise to the surface, forming this mobile figure at the crest of the waves of intensity -an intense phantasm.
이 다른 쪽, 즉 순수한 호흡 또는 필멸의 영혼으로 이루어진 바포메트 시스템은 무엇인가요? 그들은 사람의 동일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박탈하고 취소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특이점 또는 여러 개의 특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파도의 크레스트에 형상들을 만드는 변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클로소프스키의 호흡/영혼 신화가 철학이 되는 지점에 도달합니다. 호흡은 그 자체로 그리고 우리 자신 안에서 순수한 강렬함으로 생각되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형태의 강도적인 양 또는 정도에서 죽은 영혼은 "존재"또는 육체의 확장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형태에서 그들은 자아의 동일성을 잃어 버렸지만 단수적입니다. 강도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 동등하지 않은 것, 다른 것, 즉 이미 그 자체로 차이인 것을 포괄하므로 모든 것이 모두의 현시 안에서 포괄됩니다. 바포메트가 설명하듯이 이것은 순수한 의도의 세계입니다: "어떤 자존심도 우세하지 않다"; "모든 의도는 다른 의도들에 의해 스며들 수 있다"; "미래를 바라는 과거의 가장 무의미한 의도만이 다른 의도를 이길 수 있다"; "만약 다른 호흡이 그것을 만나기 위해 온다면, 그들은 서로를 전제하되, 각기 다른 의도의 강도에 따라 서로를 전제할 것이다". 이것은 전개체적이고 비인격적인 특이점, 즉 정도의 무한성과 변형의 무한성을 넘나들며 서로 소통하고 관통하는 무한한 대명사-유동성의 찬란함입니다. 자아의 동일성이 상실된 매혹적인 세계, 하나라는 동일성이나 전체의 통일성이 아니라 강도적인 다중성과 변신의 힘, 서로 간의 힘의 관계가 작용하는 세계. 이것은 기독교의 단순화(simplificatio)와는 반대로 "복잡화(complicatio)"라고 불려야 하는 상태입니다. '오늘 저녁의 로베르뜨'는 이미 옥타브가 로베르뜨에게 자신의 의도를 삽입하고(강도적인 의도), 그녀를 다른 의도에 넘겨주려는 노력(비록 그것이 그녀를 강간하는 영혼들에게 '고발'하는 것일지라도)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르 바포메트에서 테레사는 젊은 페이지의 몸에 "불어넣어져" 다른 사람들의 의도에 바쳐지고 다른 영혼들에게 참여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중성 또는 변형의 왕자를 형성합니다: "나는 하나의 자아로서의 그의 창조물, 그리고 하나의 몸 안의 이 자아, 그가 창조하는 것에 존재를 노예화시키는 창조자가 아니다. ..." 적그리스도의 체제는 동일성의 세계에 반대되는 시뮬라크르의 체제입니다. 그러나 시뮬라크르가 동일성을 기각하고, 말하고 말해지면서, 그것은 보는 것과 말하는 것을 동시에 붙잡고 빛과 소리를 모두 불러 일으킵니다. 그것은 자신의 차이와 다른 모든 차이에 열려 있습니다. 모든 시뮬라크르가 표면 위로 떠오르며 강도의 파도, 즉 강렬한 환상의 정점에서 이 움직이는 형상을 형성합니다.
One can see how Klossowski goes from one sense of the word "intentio" to another -corporal intensity and spoken intentionality. The simulacrum becomes phantasm, intensity becomes intentionality to the extent that it takes as its object another intensity which it comprehends and is itself comprehended, itself taken as its object, on to the infinity of intensities through which it passes. This is to say that there is in Klossowski an entire "phenomenology," which borrows from scholastic philosophy as much as Husserl did, but which traces its own paths. As for the passage from intensity to intentionality, it is the passage from sign to sense. In a fine analysis of Nietzsche, Klossowski interprets the "sign" as the trace of a fluctuation, of an intensity, and "sense" as the movement by which intensity aims at itself in aiming at the other, modifies itself in modifying the other, and returns finally onto its own trace. The dissolved self opens up to a series of roles, since it gives rise to an intensity which already comprehends difference in itself, the unequal in itself, and which penetrates all others, across and within multiple bodies. There is always another breath in my breath, another thought in my thought, another possession in what I possess, a thousand things and a thousand beings implicated in my complicatons: every true thought is an aggression. It is not a question of our undergoing influences, but of being "insufflations" and fluctuations, or merging with them. That everything is so "complicated," that I may be an other, that something else thinks in us in an aggression which is the aggression of thought, in a multiplication which is the multiplication of the body, or in a violence which is the violence of language - this is the joyful message. For we are so sure of living again (without resurrection) only because so many beings and things think in us: because "we still do not know exactly if it is not others who continue to think within us (but who are these others who form the outside in relation to this inside which we believe ourselves to be?)-everything is brought back to a single discourse, to fluctuations of intensity, for instance, which correspond to the thought of everyone and no one." At the same time that bodies lose their unity and the self its identity, language loses its denoting function (its distinct sort of integrity) in order to discover a value that is purely expressive or, as Klossowski says, "emotional." It discovers this value, not with respect to someone who expresses himself and who would be moved, but with respct to something that is purely expressed, pure motion or pure "spirit" -sense as a pre-individual singularity, or an intensity which comes back to itself through others. This is how the name "Roberte" did not designate a person, but rather expressed a primary intensity, or that Baphomet emits the difference of intensity that constitutes his name, B-A BA ("no proper name subsists in the hyperbolic breath of my name, any more than the elevated idea that each one has of himself is able to withstand the dizziness of my stature")." The values of expressive or expressionist language are provocation, revocation, and evocation. Evoked (expressed) are the singular and complicated spirits, which do not possess a body without multiplying it inside the system of reflections, and which do not inspire language without projecting it into the intensive system of resonances. Revoked (denounced) are corporeal unicity, personal identity, and the false simplicity of language insofar as it is supposed to denote bodies and to manifest a self. As the spirits say to Roberte, "we can be evoked; but your body can also be revoked."
클로소프스키가 "강도"라는 단어의 한 가지 의미에서 다른 의미, 즉 신체적 강도와 언어적 의도로 어떻게 이동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시뮬라크르는 환상이 되고, 강도는 그것이 포괄하고 포괄당하는 다른 강도를 대상으로 삼는 한에서 의도성이 되고, 그 강도는 그것이 통과하는 강도들의 무한성 위에서 스스로 그것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즉, 클로소프스키에는 후설과 마찬가지로 스콜라 철학을 차용하지만 그 자체의 고유한 경로를 추적하는 전체적인 "현상학"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강도에서 의도성으로의 전환은 기호에서 의미로의 전환입니다. 니체에 대한 세밀한 분석에서 클로소프스키는 '기호'를 요동의 자취, 강도의 자취로, '의미'를 강도가 타자를 겨냥하면서 자신을 겨냥하고, 타자를 변형하면서 자신을 변형하고, 마침내 자신의 자취로 되돌아가는 움직임으로 해석합니다. 해체된 자아는 이미 그 자체로서 차이를, 불균등한 것을 포괄하고, 여러 몸을 가로질러 그리고 그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을 관통하는 강도를 야기하기 때문에 역할들의 계열에 개방된다. 내 호흡 속에는 항상 또 다른 호흡이 있고, 내 생각 속에는 또 다른 생각이 있으며, 내가 소유한 것 속에는 또 다른 소유가 있고, 내 복잡성 속에는 천 가지 사물과 천 가지 존재가 얽혀 있으니, 모든 참된 생각은 곧 침략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겪고 있는 영향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불어넣어짐들"과 동요들, 또는 그것들과 합쳐지는 것에 대한 질문입니다. 모든 것이 너무 "복잡"하여 내가 타자가 될 수 있다는 것, 생각의 공격인 공격성, 몸의 증식인 증식성, 언어의 폭력인 폭력성 속에서 다른 어떤 것이 우리 안에서 생각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즐거운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수많은 존재와 사물이 우리 안에서 생각하기 때문에 (부활 없이) 다시 살아갈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서 계속 생각하는 것이 타자가 아닌지 우리는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믿는 이 내부와 관련하여 외부를 형성하는 타자는 누구입니까?) - 모든 것이 하나의 담론으로, 이를테면 모두의 생각과 아무도 생각하지 않음에 상응하는 강도의 동요로 되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신체들이 통일성을 잃고 자아가 동일성을 잃는 것과 동시에, 언어는 순전히 표현적인 가치, 즉 클로소프스키의 말대로 "감정적인"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그 지시 기능(고유한 종류의 완전성)을 상실합니다. 이 가치는 자신을 표현하고 감동받는 사람이 아니라 순수하게 표현된 것, 순수한 움직임 또는 순수한 " 영", 즉 전개체적인 특이점으로서의 의미 또는 다른 것들을 통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강도에서 발견됩니다. '로베르테'라는 이름이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인 강도를 표현한 것이나, 바포메트가 자신의 이름인 B-A BA를 구성하는 강도의 차이를 발산하는 것("내 이름의 과장된 호흡에는 적절한 이름이 깃들어 있지 않으며, 각자가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상한 생각이 내 키의 어지러움을 견딜 수 있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이 바로 이런 방식입니다. 표현적 또는 표현주의적 언어의 가치는 도발, 철회, 연상입니다. 도발(표현)은 단수적이고 복잡한 영들로, 반성의 체계 안에서 증식하지 않고는 육체를 소유하지 않으며, 공명의 강도적 체계에 그것을 투사하지 않고는 언어에 자극을 주지 않습니다. 고발(비난)된 것은 육체적 통일성, 인격적 동일성, 그리고 언어가 몸을 지시하고 자아를 현시해야 하는 한 언어의 거짓된 단순함이다. 영혼들이 로베르테에게 말하듯이 "우리는 환생할 수 있지만, 당신의 몸도 철회될 수 있습니다."
From intensity to intentionality: every intensity wills itself, intends itself, returns on its own trace, repeats and imitates itself through all the others. This is a movement of sense which must be determined as the eternal return. Le Souffleur, a novel of malady and convalescence, already ended with a revelation of the eternal return; and with Le Baphomet, Klossowski creates in his work a grandiose sequel to Zarathus-tra. The difficulty, however, lies with the interpretation of the phrase "the eternal return of the Same." For no form of identity is here entertained, since each dissolved self returns through itself only by passing into the others, and wills itself only through a series of roles which are not its own. Intensity, being already difference in itself, opens onto disjoint or divergent series. But since the series are not subject to the condition of the identity of a concept in general, no more than the entity which traverses them is subject to the identity of a self as individual, the disjunctions stay disjunctions. Their synthesis, however, is no longer exclusive or negative, and they take on, to the contrary, an affirmative sense by means of which the mobile entity passes through all the disjoint series. In short, divergence and disjunction as such become the object of affirmation. The true subiect of the eternal return is the intensity and singularity; the relation between the eternal return as actualized intentionality and the will to power as open intensity derives from this fact. As soon as the singularity is apprehended as pre-individual, outside of the identity of a self, that is, as fortuitous, it communicates with all the other singularities, without ceasing to form disjunctions with them. It does so, however, by passing through all of the disjoint terms that it simultaneously affirms, rather than by distributing them in exclusions. "Thus, all I have to do is to will myself again, no longer as the outcome of previous possibilities, not as one accomplishment out of a thousand, but as a fortuitous moment, the very fortuity of which implies the necessity of the integral return of the whole series."
강도에서 의도성으로: 모든 강도는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의도하며, 자신의 자취를 따라 돌아오고, 다른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을 반복하고 모방합니다. 이것은 영원회귀로 결정되어야 하는 의미의 움직임입니다. 질병과 회복에 관한 소설인 르 수플레르는 이미 영원회귀에 대한 계시로 끝났고, 클로소프스키는 르 바포메트를 통해 자라투스트라의 장대한 속편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동일자의 영원회귀"라는 문구를 해석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해체된 자아가 다른 자아를 통과함으로써만 자신을 통해 돌아오고, 자신의 것이 아닌 역할들의 계열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의지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동일성도 여기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자체로 차이인 강도는 탈구되거나 발산/분기하는 계열로 열립니다. 그러나 계열은 일반적으로 개념의 동일성이라는 조건에 따르지 않고, 계열을 가로지르는 실체가 개체로서의 자아의 동일성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분절은 분절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합은 더 이상 배제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으며, 반대로 유동적인 실체가 모든 탈구된 계열을 통과하는 긍정적 인 의미를 갖습니다. 요컨대, 발산과 분절은 그 자체로 긍정의 대상이 됩니다. 영원회귀의 진정한 문제는 강도와 특이점이며, 실현된 의도성으로서의 영원회귀와 열린 강도로서의 힘에의 의지 사이의 관계는 이 사실에서 파생됩니다. 특이점이 전개체적인, 자아의 동일성 바깥에 있는, 즉 우연적인 것으로 파악되는 순간, 그것은 다른 모든 특이점들과 분절/선언을 멈추지 않고 그들과 소통한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탈구된 항들을 배제하여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긍정하는 동시에 통과함으로써 그렇게 한다. "따라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이전 가능성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천 가지 중 하나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우연한 순간으로서, 바로 그 우연성이 전체 계열들의 총체적인 복귀의 필요성을 암시하는 순간으로서의 의지를 다시 다지는 것뿐입니다."
What the eternal return expresses is this new sense of the disjunctive synthesis. It follows that the eternal return is not said of the Same ("it destroys identities"). On the contrary, it is the only Same, which is said of that which differs in itself -the intense, the unequal, or the disjoint (will to power). It is indeed the Whole, which is said of that which remains unequal; it is Necessity, which is said of the fortuitous alone. It is itself univocal: univocal Being, language or silence. However, univocal Being is said of beings which are not univocal, univocal language is applied to bodies which are not univocal, "pure" silence surrounds words which are not "pure." One could thus search in vain within the eternal return for the simplicity of a circle and the convergence of series around a center. If there is a circle, it is the circulus vitiosus deus: difference here is at the center, and the circumference is the eternal passage through the divergent series. It is an always decentered circle for an ex-centric circumference. The eternal return is indeed Coherence, but it is a coherence which does not allow my coherence, the coherence of the world and the coherence of God to subsist. The Nietzschean repetition has nothing to do with the Kierkegaardian repetition; or, more generally, repetition in the eternal return has nothing to do with the Christian repetition. For what the Christian repetition brings back, it brings back once, and only once: the wealth of Job and the child of Abraham, the resurrected body and the recovered self. There is a difference in nature between what returns "once and for all" and what returns for each and every time, or for an infinite number of times. The eternal return is indeed the Whole, but it is the Whole which is said of disjoint members or divergent series: it does not bring everything back, it does not bring about the return of that which returns but once, namely, that which aspires to recenter the circle, to render the series convergent, and to restore the self, the world, and God. In the circle of Dionysus, Christ will not return; the order of the Antichrist chases the other order away. All of that which is founded on God and makes a negative or exclusive use of the disjunction is denied and excluded by the eternal return. All of that which comes once and for all is referred back to the order of God. The phantasm of Being (eternal return) brings about the return only of simulacra (will to power as simulation). Being a coherence which does not allow mine to subsist, the eternal return is the nonsense which distributes sense into divergent (series over the entire circumference of the decentered circle-for "madness is the loss of the world and of oneself in view of a knowledge with neither beginning nor end."
영원회귀가 표현하는 것은 분절적 종합에 대한 새로운 의미입니다. 따라서 영원회귀는 동일성("그것은 동일성들을 파괴한다")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그 자체로 다른 것, 즉 강도, 불균등 또는 탈구된 것 (힘에 대한 의지)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동일성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불균등하게 남아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전체이며, 오로지 우연적인 것에 대해 말하는 필연성입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일의적 존재, 언어 또는 침묵입니다. 그러나 일의적 존재는 일의적이지 않은 존재에 대해 말하고, 일의적 언어는 일의적이지 않은 신체에 적용되며, "순수한" 침묵은 "순수하지 않은" 말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회귀 안에서 원의 단순성과 중심을 둘러싼 계열의 수렴을 헛되이 찾을 수 있습니다. 만약 원이 있다면, 그것은 썩은 신의 순환입니다. 여기서 차이는 중심에 있고, 원주는 발산하는 계열을 통과하는 영원한 통로입니다. 그것은 항상 중심을 벗어난 원주에 대해 탈중심화된 원입니다. 영원한 귀환은 참으로 일관성이지만, 그것은 나의 일관성, 세계의 일관성, 신의 일관성이 존속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일관성입니다. 니체적 반복은 키에르케고르적 반복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더 일반적으로 영원회귀에서의 반복은 기독교적 반복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기독교적 반복이 되살리는 것은 욥의 부와 아브라함의 자식, 부활한 몸과 회복된 자아를 단 한 번, 단 한 번만 되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위해 단 한 번만" 돌아오는 것과 매번 또는 무한히 많은 횟수 동안 돌아오는 것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영원회귀는 참으로 전체이지만, 탈구된 구성원들이나 발산하는 계열에 대해 말해지는 전체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다시 되돌리는 것이 아니며, 한 번만 되돌아오는 것, 즉 원을 재중심화하고 계열을 수렴하게 하며 자아, 세계, 신을 회복시키려는 열망을 가진 것의 복귀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디오니소스의 원에서 그리스도는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적 그리스도의 질서는 다른 질서를 쫓아냅니다. 하나님에 근거를 두고 분절을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것은 영원회귀에 의해 부정되고 배제됩니다. 단번에 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질서로 다시 언급됩니다. 존재의 환상( 영원회귀)은 오직 시뮬라크르(시뮬라크르로서의 힘에 대한 의지)의 귀환을 초래합니다. 나의 일관성을 허용하지 않는 일관성이기 때문에, 영원회귀는 의미를 발산적(탈중심화된 원의 전체 둘레에 걸친 계열- "광기는 시작도 끝도 없는 지식의 관점에서 볼 때 세계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으로 분배하는 넌센스입니다.
4. Michel Tournier and the World without others. 4. 미셸 투르니에와 타자없는 세계
The goat abruptly stopped grazing and looked up with a stalk of grass hanging from its lips. Then it seemed to grin and reared up on its hind legs; in this position it took several steps toward Friday, waving its forefeet and nodding its immense horns as though acknowledging a throng of spectators. This astonishing performance turned Friday rigid with amazement. When it was within a few yards of him the goat dropped its forefeet to the ground and suddenly charged like a battering-ram -or a great arrow feathered with fur- its head lowered and its horns aimed at Friday's chest. Friday flung himself sideways a fraction of a second too late. A musky smell filled his nostrils….
염소는 갑자기 풀을 뜯던 것을 멈추고 풀 한 줄기를 입술에 물고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뒷다리를 들고 일어섰고, 이 자세로 프라이데이를 향해 몇 걸음을 내디디며 앞발을 흔들고 커다란 뿔을 끄덕이며 관중들에게 인사하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놀라운 퍼포먼스에 프라이데이는 놀라움에 몸을 굳혔습니다. 염소는 프라이데이와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았을 때 앞발을 땅에 내려놓더니 갑자기 털로 덮인 커다란 화살처럼 돌진하며 고개를 숙이고 뿔을 프라이데이의 가슴을 겨냥했습니다. 프라이데이는 1초도 안 돼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사향 냄새가 콧속을 가득 채웠다....
This beautiful passage relates Friday's battle with the goat, in which Friday will be wounded, but the goat will die: "The great goat is dead." Then Friday announces his mysterious project: the dead goat will fly and sing it will be a flying and musical goat. In the first stage of the project, he makes use of the skin. The hair is removed, the skin is washed, pumiced, and spread out on a wooden structure. Bound to a fishing pole, the goat amplifies the least movement of the line, assumes the role of a gigantic celestial bobber, and transcribes the waters onto the sky. As for the second stage, Friday makes use of the head and the gut and fashions from them an instrument; he places it in a dead tree in order to produce an instantaneous symphony whose sole performer must be the wind. This is how the din of the earth is in turn transported to the heavens and becomes an organized, celestial sound -pansonority- a "music that was truly of the elements." In these two ways, the great goat frees the Elements. It will be noted that the earth and air act less as particular elements than as two complete and opposed figures, each one, for its part, gathering the four elements. The earth, however, holds and subsumes them, contains them within the depth of bodies, whereas the sky, with the light and the sun, sets them in a free and pure state, delivered from their limits, in order to form cosmic surface energy -being one and yet characteristic of each element. There is therefore a terrestrial fire, water, air, and earth, but there is also an aerial or celestial earth, water, fire, and air. There is a struggle between earth and sky, with the imprisonment or liberation of all four elements at stake. The isle is the frontier or field of this struggle. This is why it is so important to know which way the struggle will swing, and whether it is capable of pouring out into the sky its fire, earth, and water- or of becoming solar. The isle is as much the hero of the novel as Robinson or Friday. It changes shape in the course of a series of divisions, no less than Robinson himself changes his form in the course of a series of metamorphoses. Robinson's subjective series is inseparable from the series of the states of the island.
이 아름다운 구절은 프라이데이와 염소의 전투에 관한 것으로, 프라이데이는 부상을 입지만 염소는 죽게 됩니다: "큰 염소가 죽었다.". 그런 다음 프라이데이는 자신의 신비한 프로젝트를 발표합니다. 죽은 염소는 날아다니고 노래를 부르며 날고 음악하는 염소가 될 것입니다. 프로젝트의 첫 번째 단계에서 그는 피부를 사용합니다. 털을 제거하고, 피부를 씻고, 경석을 뿌려 나무 구조물 위에 펼쳐 놓습니다. 낚싯대에 묶인 염소는 낚시줄의 최소한의 움직임을 증폭시키고, 거대한 천공의 찌 역할을 맡아 물을 하늘로 옮깁니다. 두 번째 무대에서 프라이데이는 머리와 내장을 악기로 만들어 죽은 나무에 넣어 바람만이 유일한 연주자가 되는 즉흥적인 교향곡을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해서 대지의 소음이 하늘로 전달되어 조직화된 천상의 소리, 즉 "진정으로 대자연의 음악"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 큰 염소는 원소들을 해방시킵니다. 대지와 공기는 특정 원소라기보다는 각각의 역할에 따라 네 가지 원소를 모으는 두 개의 완전하고 반대되는 모습으로 작용한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지는 그것들을 붙잡고 포섭하여 몸의 심층에 포함시키는 반면, 하늘은 빛과 태양과 함께 그것들을 자유롭고 순수한 상태로 설정하여 한계에서 벗어나 우주 표면 에너지를 형성하여 하나이면서도 여전히 각 요소의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지상의 불, 물, 공기, 대지가 있지만 공중 또는 천상의 대지, 물, 불, 공기도 존재합니다. 대지와 하늘 사이에는 네 가지 원소의 감금 또는 해방이 걸려 있는 투쟁이 존재합니다. 섬은 이 투쟁의 최전선 또는 현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투쟁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 불, 땅, 물을 하늘로 쏟아낼 수 있는지, 아니면 태양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섬은 로빈슨이나 프라이데이만큼이나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이 섬은 로빈슨 자신이 변신하는 계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것 못지않게 분할의 계열에서 모양을 바꿉니다. 로빈슨의 주체적인 계열은 섬의 계열과 분리 될 수 없습니다.
The end result is Robinson becoming elemental on his isle, with the isle itself rendered to the elements: a Robinson of the sun on the solar isle-a Uranian on Uranus. It is not the origin then which matters here, but on the contrary, the outcome or the final result, which is reached through all sorts of avatars. This is the first important difference with Defoe's Robinson. It has often been said that the theme of Robinson in Defoe's work was not only a story, but an "instrument of research". -a research which starts out from the desert island and aspires to reconstitute the origins and the rigorous order of works and conquests which happen with time. But it is clear that the research is twice falsified. On one hand, the image of the origins presupposes that which it tries to generate (see, for example, all that Robinson has pulled from the wreck). On the other hand, the world which is reproduced on the basis of this origin is the equivalent of the real -that is, economic-world, or of the world as it would be, as it would have to be if there were no sexuality (see the elimination of all sexuality in Defoe's Robin-son). Must we conclude that sexuality is the only fantastic principle able to bring about the deviation of the world from the rigorous economic order assigned by the origin? Defoe's work was, in short, well-intentioned: what becomes of a man who is alone, without Others, on a desert island? But the problem was poorly posed. For, instead of bringing an asexual Robinson to an origin which reproduces an economic world similar to our own, or to an archetype of our own, one should have led an asexual Robinson to ends quite different and divergent from ours, in a fantastic world which has itself deviated. By raising the problem in terms of end, and not in terms of origin, Tournier makes it impossible for him to allow Robinson to leave the island. The end, that is, Robinson's final goal, is "dehumanization," the coming together of the libido and of the free elements, the discovery of a cosmic energy or of a great elemental Health which can surge only on the isle -and only to the extent that the isle has become aerial or solar. Henry Miller spoke of the wailing of the fundamental elements helium, oxygen, silica, and iron. Undoubtedly, there is something of Miller and even Lawrence in this Robinson of helium and oxygen: the dead goat already organizes the wailings of the fundamental elements.
최종 결과는 로빈슨이 자신의 섬에서 원소가 되고, 섬 자체가 원소로 변해 태양의 섬에서 태양의 로빈슨, 천왕성의 천왕성인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원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아바타를 통해 도달하는 결과 또는 최종 결과입니다. 이것이 디포의 로빈슨과의 첫 번째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디포의 작품에서 로빈슨의 주제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연구의 도구'였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무인도에서 시작하여 기원과 노동의 엄격한 질서, 그리고 시간에 따라 일어나는 정복의 과정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연구. 그러나 그 연구가 두 번이나 조작되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편으로 기원의 이미지는 그것이 생성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전제로합니다 (예를 들어 로빈슨이 난파선에서 가져온 모든 것을 참조하십시오). 다른 한편으로, 이 기원에 기초하여 재현되는 세계는 실제 세계, 즉 경제 세계와 동일하거나 성이 없는 경우의 세계와 동일합니다(데포의 <로빈슨의 아들>에서 모든 성의 제거를 참조하세요). 성은 기원에 의해 부여된 엄격한 경제 질서로부터 세계의 일탈을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환상적인 원리라고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디포의 연구는 한마디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무인도에 타인 없이 홀로 남겨진 인간은 어떻게 될까? 그러나 문제는 제대로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무성의 로빈슨을 우리와 비슷한 경제 세계를 재생산하는 기원이나 우리의 고유한 원형으로 데려가는 대신, 그 자체로 일탈한 환상적인 세계에서 우리와 완전히 다르고 이질적인 결말로 이끌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투르니에는 기원이 아닌 결말의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로빈슨이 섬을 떠나는 것을 허용할 수 없게 만든다. 로빈슨의 최종 목표인 '비인간화'는 리비도와 자유로운 요소의 융합, 우주적 에너지 또는 그 섬에서만 솟구칠 수 있는 위대한 원소적인 건강의 발견, 그리고 그 섬이 공중 또는 태양이 된 정도까지만 가능한 '비인간화'이다. 헨리 밀러는 헬륨, 산소, 실리카, 철이라는 기본 원소의 울부짖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 헬륨과 산소의 로빈슨에는 밀러와 로렌스의 무언가가 있습니다: 죽은 염소는 이미 기본 원소들의 곡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But the reader also has the impression that this great Health of Tournier's Robinson conceals something, which is not at all like Miller or Lawrence. Could it not be that the essential deviation which this Health implies is inseparable from desert sexuality? Tournier's Robinson is opposed to Defoe's in virtue of three strictly related characteristics: he is related to ends and goals rather than to origins; he is sexual; and these ends represent a fantastic deviation from our world, under the influence of a transformed sexuality, rather than an economic reproduction of our world, under the impact of a continuous effort. This Robinson does nothing perverse, properly speaking. Yet, how are we to free ourselves from the impression that he is himself perverse, according to Freud's definition of the one who deviates with respect to aims? For Defoe it was the same thing to relate Robinson to the origin and to have him produce a world consistent with our own; it is the same thing for Tournier to relate him to aims and have him deviate or diverge with respect to the aims. Related to origins, Robinson must necessarily reproduce our world, but related to ends, he must deviate. This is an odd deviation, although it is not one of those of which Freud spoke, since it is solar and takes elements as its objects: such is the sense of Uranus. "If this [solar coition] is to be translated into human language, I must consider myself feminine and the bride of the sky. But that kind of anthropomorphism is meaningless. The truth is that at the height to which Friday and I have soared, difference of sex is left behind. Friday may be identified with Venus, just as I may be said, in human terms, to open my body to the embrace of the sun." If it is true that neurosis is the negative of perversion, would not perversion, for its part, be the elemental aspect of neurosis?
그러나 독자들은 투르니에의 로빈슨의 위대한 건강이 밀러나 로렌스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 건강함이 암시하는 본질적인 일탈이 어쩌면 황량한 섹슈얼리티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기원이 아니라 끝과 목표에 관련되어 있고, 성적이며, 이러한 끝은 지속적인 노력의 영향인 우리 세계의 경제적 재현이 아니라 변형된 섹슈얼리티의 영향을 받아 우리 세계로부터의 환상적인 일탈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데포의 엄격한 세 가지 특징과의 관계에서 반대되는 인물이다. 이 로빈슨은 제대로 말하면 일탈된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목표와 관련해 일탈하는 사람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의에 따라 그가 그 자체로 일탈적이라는 인상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데포에게 있어 로빈슨을 기원과 연관시켜 그가 우리와 일치하는 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것과 투르니에에게 있어 그를 목표와 연관시켜 그가 목표와 관련하여 일탈하거나 이탈하도록 하는 것은 같은 일이었다. 기원과 관련해서 로빈슨은 반드시 우리의 세계를 재생산해야 하지만, 끝과 관련해서 그는 일탈해야 합니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것 중 하나는 아니지만 이상한 일탈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태양적이고 그 목적으로서 원소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 천왕성의 의미와 같은 것입니다. "이 [태양의 연합]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려면 나 자신을 여성스럽고 하늘의 신부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의인화는 무의미합니다. 진실은 프라이데이와 내가 치솟은 높이에서 성별의 차이는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프라이데이는 금성과 동일시될 수 있으며, 내가 인간적인 용어로 태양의 품을 향해 내 몸을 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신경증이 일탈의 부정적 측면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일탈은 신경증의 원소적 측면이 아닐까요?
The concept of perversion is a bastard concept -half juridical, half medical. But neither medicine nor law are entirely suited to it. With regard to today's renewed interest in this concept, it seems that we seek the reason for its quite ambiguous and contingent connection with law as well as with medicine in the very structure of perversion. The point of departure is as follows: perversion is not defined by the force of a certain desire in the system of drives; the pervert is not someone who desires, but someone who introduces desire into an entirely different system and makes it play, within this system, the role of an internal limit, a virtual center or zero point (the well-known Sadean apathy). The pervert is no more a desiring self than the Other is, for him, a desired object endowed with real existence. Tournier's novel is nevertheless not a thesis on perversion. It is not a novel with a thesis (roman à thèse). It is neither a novel of characters (roman à personages), since there are no Others, nor a novel of internal analysis, since Robinson has very little interiority. It is an amazing novel of comic adventures and of cosmic avatars. Rather than being a thesis on perversion, it is a novel which develops the very thesis of Robinson: the man without Others on his island. The "thesis," however, makes that much more sense since, instead of referring to a presupposed origin, it announces adventures: what is going to happen in the insular world without Others? We will initially try to find out what the term "Others" means on the basis of the effects of the others: we will seek the effects on the island of the absence of Others, we will infer the effects of the presence of Others in our habitual world, and we will conclude what the Other is, and what it means for the Other to be absent. The effects of the absence of Others are the real adventures of the spirit: this is an experimental, inductive novel. Under the circumstances, philosophical reflection can garner what the novel reveals with so much force and life.
일탈의 개념은 절반은 법학적인, 절반은 의학적인 사생아적 개념입니다. 하지만 의학이나 법학 모두 이 개념에 완전히 적합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이 개념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관련하여 우리는 일탈의 구조에서 의학뿐만 아니라 법과의 매우 모호하고 우발적인 연결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 같습니다. 일탈은 욕망의 체계에서 특정 욕망의 힘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일탈자는 욕망하는 사람이 아니라 욕망을 완전히 다른 체계에 도입하여 이 체계 내에서 내부 한계, 가상 중심 또는 영점 (잘 알려진 사데의 무관심)의 역할이 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일탈자는 타자가 그에게 실재적 존재와 함께 욕망되는 대상으로서 부여된 것과 마찬가지로 욕망하는 자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르니에의 소설은 일탈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이론 있는 소설이 아니다('로망 아 떼세'). 타자가 없기 때문에 인물의 소설도 아니고, 로빈슨은 내면이 거의 없기 때문에 내적 분석의 소설도 아닙니다 (로마 아 페르소나). 이 소설은 코믹한 모험과 우주적 아바타의 놀라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일탈에 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로빈슨이 자신의 섬에 타자가 없는 인간이라는 바로 그 논지를 전개하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전제된 기원을 언급하는 대신, 타자 없는 고립된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험을 예고하기 때문에 훨씬 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타자들의 효과에 근거하여 '타자'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볼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부재하는 섬에서의 효과들을 찾고, 우리의 습관적 세계에서 타자의 존재가 미치는 효과를 유추하고, 타자가 무엇이며 타자가 부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론을 내릴 것이다. 타자의 부재가 가져오는 효과들은 영혼의 진정한 모험입니다: 이 소설은 실험적이고 귀납적인 소설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철학적 성찰은 소설이 그토록 힘차고 생생하게 드러내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The first effect of Others is that around each object that I perceive or each idea that I think there is the organization of a marginal world, a mantle or background, where other objects and other ideas may come forth in accordance with laws of transition which regulate the passage from one to another. I regard an object, then I divert my attention, letting it fall into the background. At the same time, there comes forth from the background a new object of my attention. If this new object does not injure me, if it does not collide with me with the violence of a projectile (as when one bumps against something unseen), it is because the first object had already at its disposal a complete margin where I had already felt the preexistence of objects yet to come, and of an entire field of virtualities and potentialities which I already knew were capable of being actualized. Now, such a knowledge or sentiment of marginal existence is possible only through other people. " .. For all of us the presence of other people is a powerful element of distraction, not only because they constantly break into our activities and interrupt our train of thought, but because the mere possibility of their doing so illumines a world of concerns situated at the edge of our consciousness but capable at any moment of becoming its center." The part of the object that I do not see I posit as visible to Others, so that when I will have walked around to reach this hidden part, I will have joined the Others behind the object, and I will have totalized it in the way that I had already anticipated. As for the objects behind my back, I sense them coming together and forming a world, precisely because they are visible to, and are seen by, Others. And what is depth, for me, in accordance with which objects encroach upon one another and hide behind one another, I also live through as being possible width for Others, a width upon which they are aligned and pacified (from the point of view of another depth). In short, the Other assures the margins and transitions in the world. He is the sweetness of contiguities and resemblances. He regulates the transformations of form and background and the variations of depth. He prevents assaults from behind. He fills the world with a benevolent murmuring. He makes things incline toward one another and find their natural complements in one another. When one complains about the meanness of Others, one forgets this other and even more frightening meanness -namely, the meanness of things were there no Other. The latter relativizes the not-known and the non-perceived, because Others, from my point of view, introduce the sign of the unseen in what I do see, making me grasp what I do not perceive as what is perceptible to an Other. In all these respects, my desire passes through Others, and through Others it receives an object. I desire nothing that cannot be seen, thought, or possessed by a possible Other. That is the basis of my desire. It is always Others who relate my desire to an object.
타자의 첫 번째 효과는 내가 지각하는 각 대상이나 내가 생각하는 각 관념의 주변에 주변적인 세계, 맨틀 또는 배경의 조직이 있으며, 여기에서 다른 대상과 다른 관념이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통과를 규제하는 전환의 법칙에 따라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떤 사물을 주시하다가 주의를 돌리면 그 사물이 배경으로 사라집니다. 동시에 배경에서 내 관심의 새로운 대상이 나옵니다. 만약 이 새로운 대상이 나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면,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부딪힐 때처럼) 발사체의 폭력으로 나와 충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첫 번째 대상이 이미 내가 아직 오지 않은 대상의 선재성과 내가 이미 실현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 가상과 잠재성의 전체 분야를 이미 느꼈던 완전한 여백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러한 주변적 존재에 대한 지식이나 감정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 우리 모두에게 타인의 존재는 강력한 산만함의 요소인데, 이는 그들이 끊임없이 우리의 활동에 침입하여 생각의 흐름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우리 의식의 가장자리에 위치하지만 언제든 그 중심이 될 수 있는 염려의 세계를 비춰주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대상의 일부는 타자에게 보이는 것으로 가정하고, 이 숨겨진 부분에 도달하기 위해 걸어 다닐 때, 나는 대상 뒤에 있는 타자와 합류하여 이미 기대했던 방식으로 그것을 총체화할 것입니다. 내 등 뒤에 있는 사물들은 타자에게 보이고 타자가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이 모여서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심층이란, 어떤 사물들이 서로를 침범하고 서로 뒤에 숨는가에 따라, 나는 또한 타자에게 가능한 폭, 즉 (다른 심층의 관점에서) 그것들이 정렬되고 평온해지는 폭으로 살아갑니다. 요컨대 타자는 세계의 여백과 전환을 보장합니다. 그는 지속들과 유사성들의 달콤함입니다. 그는 형상과 배경의 변형과 심층의 변화를 조절합니다. 그는 뒤로부터의 공격을 막는다. 그는 자비로운 중얼거림으로 세상을 채웁니다. 그는 사물이 서로를 향해 기울어지게 하고 서로에게서 자연스러운 보완을 찾게 합니다. 타인의 비열함에 대해 불평할 때, 이 다른 비열함, 더 무서운 비열함, 즉 타인이 없는 사물의 비열함을 잊어버린다. 후자는 알려지지 않은 것과 지각되지 않은 것을 상대화하는데, 왜냐하면 나의 관점에서 타자는 내가 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기호를 도입하여 내가 지각하지 않는 것을 타자가 지각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모든 면에서 나의 욕망은 타자를 통과하고 타자를 통해 대상을 얻는다. 나는 가능한 타자가 보거나 생각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욕망의 기초이다. 나의 욕망을 대상과 관련시키는 것은 언제나 타자이다.
What happens when Others are missing from the structure of the world? In that case, there reigns alone the brutal opposition of the sun and earth, of an unbearable light and an obscure abyss: the "summary law of all or nothing." The known and the unknown, the perceived and unperceived confront one another absolutely in a battle with nuances. "My vision of the island is reduced to that of my own eyes, and what I do not see of it is to me a total unknown. Everywhere I am not total darkness reigns." A harsh and black world, without potentialities or virtualities: the category of the possible has collapsed. Instead of relatively harmonious forms surging forth from, and going back to, a background in accordance with an order of space and time, only abstract lines now exist, luminous and harmful -only a groundless abyss, rebellious and devouring. Nothing but Elements. The abyss and the abstract line have replaced the relief and the background. Everything is implacable. Having ceased to stretch out and bend toward one another, objects rise threateningly; we discover then wickedness which is no longer that of man. One might say that each thing, having been rid of its relief and reduced to its harshest lines, slaps us in the face or strikes us from behind. The absence of the Other is felt when we bang against things, and when the stupefying swiftness of our actions is revealed to us. "Nakedness is a luxury in which a man may indulge himself without danger only when he is warmly surrounded by his fellow man. For Robinson, while his soul had not yet undergone any change, it was a trial of desperate temerity. Stripped of its threadbare garments -worn, tattered, and sullied, but the fruit of civilized millennia, and impregnated with human associations- his vulnerable body was at the mercy of every hostile element." There are no longer any transitions; gone is the sweetness of contiguities and resemblances which allowed us to inhabit the world. Nothing subsists but insuperable depths, absolute distances and differences or, on the contrary, unbearable repetitions, looking like precisely superimposed lengths.
세상의 구조에서 타자가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요? 이 경우 태양과 대지, 견딜 수 없는 빛과 모호한 심연의 잔인한 대립, 즉 "전부 아니면 전무의 총체적 법칙"이 홀로 군림하게 됩니다.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지각된 것과 지각되지 않은 것은 미묘한 차이들과의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서로 대립합니다. "섬에 대한 나의 시각은 내 눈의 시각으로 축소되고, 섬에서 보이지 않는 것은 나에게 완전히 미지의 세계입니다. 내가 없는 모든 곳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다." 잠재성도 가상성도 없는 거칠고 암울한 세계: 가능성의 범주가 무너졌습니다. 공간과 시간의 질서에 따라 상대적으로 조화로운 형태가 배경에서 솟아올랐다가 배경으로 되돌아가는 대신, 이제 빛나고 해로운 추상적인 선들, 즉 반항적이고 집어삼키는 근거 없는 심연만이 존재합니다. 오직 원소들만 존재합니다. 심연과 추상적인 선이 부조와 배경을 대체했습니다. 모든 것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서로를 향해 뻗고 구부러지는 것을 멈춘 사물들은 위협적으로 솟아오르고,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닌 사악함을 발견합니다. 어떤 이는 안도감을 잃고 가장 거친 선으로 축소된 사물이 우리의 얼굴을 때리거나 뒤에서 우리를 공격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타자의 부재는 우리가 사물에 부딪힐 때, 그리고 우리 행동의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빠른 속도가 우리에게 드러날 때 느껴집니다. "벌거벗음은 인간이 동료 인간에게 따뜻하게 둘러싸여 있을 때만 위험 없이 자신을 탐닉할 수 있는 사치입니다. 로빈슨에게는 아직 영혼이 변화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절망적인 시련이었습니다. 낡고 너덜너덜하고 더러워졌지만 문명화된 수천 년의 결실이자 인간적 교감이 스며든 실오라기 같은 옷을 벗은 그의 연약한 몸은 모든 적대적인 요소의 자비를 받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전환도 없으며, 우리가 세상에 살 수 있게 해준 지속성과 유사성의 달콤함도 사라졌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심층, 절대적인 거리와 차이, 반대로 정확하게 중첩된 길이들처럼 보이는 견딜 수 없는 반복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By comparing the primary effects of the Other's presence and those of his absence, we are in a position to say what the Other is. The error of philosophical theories is to reduce the Other sometimes to a particular object, and sometimes to another subject. (Even a conception like Sartre's, in Being and Nothingness, was satisfied with the union of the two determinations, making of the Other an object of my gaze, even if he in turn gazes at me and transforms me into an object.) But the Other is neither an object in the field of my perception nor a subject who perceives me: the Other is initially a structure of the perceptual field, without which the entire field could not function as it does. That this structure may be actualized by real characters, by variable subjects -me for you and you for me-does not prevent its preexistence, as the condition of organization in general, to the terms which actualize it in each organized perceptual field -yours and mine. Thus the a priori Other, as the absolute structure, establishes the relativity of others as terms actualizing the structure within each field. But what is this structure? It is the structure of the possible. A frightened countenance is the expression of a frightening possible world, or of something frightening in the world -something I do not yet see. Let it be understood that the possible is not here an abstract category designating something which does not exist: the expressed possible world certainly exists, but it does not exist (actually) outside of that which expresses it. The terrified countenance bears no resemblance to the terrifying thing. It implicates it, it envelops it as something else, in a kind of torsion which situates what is expressed in the expressing. When I, in turn and for my part, grasp the reality of what the Other was expressing, I do nothing but explicate the Other, as I develop and realize the corresponding possible world. It is true that the Other already bestows a certain reality on the possibilities which he encompasses -especially by speaking. The other is the existence of the encompassed possible. Language is the reality of the possible as such. The self is the development and the explication of what is possible, the process of its realization in the actual. Proust says of the perceived Albertine that she encompasses or expresses the beach and the breaking of the waves: "If she had seen me, what could I have represented for her? At the heart of what universe was she perceiving me?" Love and jealousy will be the attempt to develop and to unfold this possible world named "Albertine." In short, the Other, as structure, is the expression of a possible world; it is the expressed, grasped as not yet existing outside of that which expresses it.
타자의 존재와 부재의 일차적 효과를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타자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됩니다. 철학 이론의 오류는 타자를 때로는 특정한 대상으로, 때로는 다른 주체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서와 같은 개념조차도 타자가 나를 응시하고 나를 사물로 변형시키더라도 타자를 내 시선의 대상으로 삼는 두 가지 결정의 결합에 만족했다). 그러나 타자는 나의 지각 영역에 있는 객체도 아니고 나를 지각하는 주체도 아니다: 타자는 원래 지각 영역의 구조이며, 타자 없이는 전체 영역이 지금처럼 기능할 수 없다. 이 구조가 실제 인물, 즉 너를 위한 나, 나를 위한 너라는 가변적 주체에 의해 실현될 수 있다고 해서 일반적인 조직의 조건으로서, 조직화된 각각의 지각 장에서 그것을 실현하는 조건들, 즉 너의 것과 나의 것에 대한 선험적 존재를 막지는 못한다. 따라서 선험적 타자는 절대적 구조로서 각 분야 내에서 구조를 실현하는 항들로서 타자의 상대성을 확립합니다. 그런데 이 구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능한 것의 구조입니다. 겁에 질린 얼굴은 무서운 가능성의 세계, 즉 내가 아직 보지 못한 세상의 무서운 어떤 것의 표정입니다. 여기서 가능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정하는 추상적 범주가 아니라, 표현된 가능한 세계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세계 외부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겁에 질린 얼굴은 무서운 것과 아무런 유사성도 없다. 그것은 그것을 암시하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감싸고 있으며, 표현하는 것에 표현된 것을 위치시키는 일종의 비틀림이 있습니다. 내가 차례로 타자가 표현하는 것의 실체를 파악할 때, 나는 그에 상응하는 가능한 세계를 전개하고 실현하면서 타자를 설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타자가 자신이 포괄하는 가능성에 대해 이미 어떤 현실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타자는 포섭된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언어는 가능한 것의 실재입니다. 자아는 가능한 것의 발전과 설명이며, 그것이 현실에서 실현되는 과정이다. 프루스트는 지각된 알베르틴에 대해 그녀가 해변과 파도의 부서짐을 포괄하거나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나를 보았다면 나는 그녀를 위해 무엇을 표상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어떤 우주의 중심에서 나를 인식하고 있었을까?" 사랑과 질투는 "알베르틴"이라는 가능한 세계를 전개하고 펼쳐보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요컨대, 구조로서의 타자는 가능한 세계의 표현이며, 그것을 표현하는 것의 외부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는, 표현된 것입니다.
Each of these men was a possible world, having its own coherence, its values, its sources of attraction and repulsion, its center of gravity. And with all the differences between them, each of these possible worlds at that moment shared a vision, casual and superficial, of the island of Speranza, which caused them to act in common, and which incidentally contained a shipwrecked man called Robinson and his half-caste servant. For the present this picture occupied their minds, but for each of them it was purely temporary, destined very soon to be returned to the limbo from which it had been briefly plucked by the accident of the Whitebird's getting off course. And each of these possible worlds naively proclaimed itself the reality. That was what other people were: the possible obstinately passing for the real.
이 사람들은 각각 고유한 일관성, 가치관, 끌어당김과 반발의 원천, 무게 중심을 가진 가능한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모든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이 가능한 세계는 스페란자 섬에 대한 우연적이고 피상적인 비전을 공유했고, 그 때문에 공통적으로 행동하게 되었으며, 우연히도 로빈슨이라는 난파된 남자와 그의 혼혈 하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이 그림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그들 각자에게 이 그림은 순전히 일시적인 것이었고, 화이트버드의 항로 이탈 사고로 인해 잠시 떠났던 림보로 곧 되돌아갈 운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가능한 세계들 각각은 순진하게도 스스로를 현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가능한 것을 현실로 착각하고 고집스럽게 지나치는 사람들이 바로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And we can go even further in our understanding of the effects of the presence of Others. Modern psychology has elaborated a rich series of categories to account for the functioning of the perceptual field and the variations of the object within this field: form-background; depth-length; theme-potentiality; profiles-unity of the object; fringe-center; text-context; thetic-nonthetic; transitive states-substantive parts; etc. But the corresponding philosophical problem is perhaps not very well raised: one asks whether these categories belong to the perceptual field itself being immanent to it (monism), or whether they refer to subjective syntheses operating on the subject matter of perception (dualism). It would be wrong to take exception to the dualist interpretation on the pretext that perception does not occur through a judgmental intellectual synthesis; one can certainly conceive of passive sensible syntheses of an entirely different sort operating on this material (in this sense, Husserl never renounced a certain dualism). Even so, we doubt that dualism is correctly defined as long as it is established between the matter of the perceptual field and the pre-reflective syntheses of the ego. The true dualism lies elsewhere; it lies between the effects of the "structure Other" of the perceptual field and the effects of its absence (what perception would be were there no Others). We must understand that the Other is not one structure among others in the field of perception (in the sense, for example, that one would recognize in it a difference of nature from objects). It is the structure which conditions the entire field and its functioning, by rendering possible the constitution and application of the preceding categories. It is not the ego but the Other as structure which renders perception possible. Thus, the authors who interpret dualism poorly are also the authors who cannot extricate themselves from the alternative according to which the Other would be either a particular object in the field or another subject of the field. In defining the Other, together with Tournier, as the expression of a possible world, we make of it, on the contrary, the a priori principle of the organization of every perceptual field in accordance with the categories; we make of it the structure which allows this functioning as the "categorization" of this field. Real dualism then appears with the absence of the Other. But what is happening, in this case, to the perceptual field? Is it structured according to other categories? Or does it, on the contrary, open onto a very special subject matter, allowing us to penetrate into a particular informal realm? This is Robinson's adventure.
그리고 우리는 타자의 현존이 미치는 효과에 대한 이해에서 더 나아갈 수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은 지각 영역의 기능과 이 영역 내에서 대상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형태-배경, 깊이-길이, 주제-잠재성, 프로파일-대상의 통일성, 주변부-중심, 텍스트-맥락, 이론-비이론, 전이가능한 상태-실체적 부분 등 풍부한 범주들의 계열들을 정교화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범주들이 지각 영역 자체에 내재하는 것인지(일원론), 아니면 지각의 주제에 작용하는 주체적 종합을 가리키는 것인지(이원론)를 묻는 철학적 문제는 잘 제기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각이 판단적 지적 종합을 통해 일어나지 않는다는 구실로 이원론적 해석에서 예외를 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 물질에 작용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수동적 감각적 종합을 분명히 생각할 수 있다(이런 의미에서 후설은 특정 이원론을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원론이 지각 영역의 문제와 자아의 전 반성적 종합 사이에 성립하는지에 한에서만 올바르게 정의되는지 의심합니다. 진정한 이원론은 지각장의 '타자 구조'의 효과와 그 부재의 효과(타자가 없었다면 어떤 지각이 있었을까) 사이의 다른 곳에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타자가 지각 영역의 다른 구조들 가운데 하나의 구조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예를 들어, 그 안에서 대상과의 본성의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것은 앞선 범주들의 구성과 적용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전체 영역과 그 기능을 조건짓는 구조입니다.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자아가 아니라 구조로서의 타자입니다. 따라서 이원론을 잘못 해석하는 저자들은 타자가 그 영역의 특정 대상이거나 그 영역의 다른 주체가 될 것이라는 대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저자이기도 하다. 투르니에와 함께 타자를 가능한 세계의 표현으로 정의할 때, 우리는 반대로 범주에 따라 모든 지각 영역을 조직하는 선험적 원리, 즉 이 영역의 '범주화'로서의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타자로 만든다. 그러면 진정한 이원론은 타자의 부재와 함께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경우 지각 영역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다른 범주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매우 특별한 주제로 열려서 우리가 특정한 비정형적인 영역으로 침투할 수 있을까요? 이것이 로빈슨의 모험입니다.
Let us return to the effects of the presence of Others, such as they follow from the definition "Other = an expression of a possible world." The fundamental effect is the distinction of my consciousness and its object. This distinction is in fact the result of the structure-Other. Filling the world with possibilities, backgrounds, fringes, and transitions; inscribing the possibility of a frightening world when I am not yet afraid, or, on the contrary, the possibility of a reassuring world when I am really frightened by the world; encompassing in different respects the world which presents itself before me developed otherwise; constituting inside the world so many blisters which contain so many possible worlds -this is the Other." Henceforth, the Other causes my consciousness to tip necessarily into an "I was," into a past which no longer coincides with the object. Before the appearance of the Other, there was, for example, a reassuring world from which my consciousness could not be distinguished. The Other then makes its appearance, expressing the possibility of a frightening world which cannot be developed without the one preceding it passing away. For my part, I am nothing other than my past objects, and my self is made up of a past world, the passing away of which was brought about precisely by the Other. If the Other is a possible world, I am a past world. The mistake of theories of knowledge is that they postulate the contemporaneity of subject and object, whereas one is constituted only through the annihilation of the other.
"타자 = 가능한 세계의 표현"이라는 정의에 따른 타자의 존재의 효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근본적인 효과는 내 의식과 그 대상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사실 구조-타자의 결과입니다. 세계를 가능성, 배경, 변두리, 전이들로 채우는 것, 내가 아직 두려워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세계의 가능성을 새기는 것, 혹은 반대로 내가 정말 무서워할 때 안심할 수 있는 세계의 가능성을 새기는 것, 내 앞에 나타나는 세계를 다른 측면에서 다르게 전개하는 것, 세계 안에 수많은 가능한 세계를 담고 있는 수많은 물집을 구성하는 것, 이것이 타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후로 타자는 나의 의식을 필연적으로 '나였다'는 과거로, 더 이상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과거로 향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타자가 나타나기 전에는 나의 의식을 구분할 수 없는 안심할 수 있는 세계가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타자가 등장하여 이전의 세계가 사라지지 않고는 전개될 수 없는 무서운 세계의 가능성을 표현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나는 과거의 대상에 지나지 않으며, 나의 자아는 타자에 의해 정확하게 사라진 과거의 세계로 구성되어 있다. 타자가 가능한 세계라면 나는 과거의 세계입니다. 지식 이론의 오류는 주체와 객체의 동시성을 가정하는 반면, 하나는 다른 하나의 소멸을 통해서만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Then suddenly there is a click. The subject breaks away from the object, divesting it of a part of its color and substance. There is a rift in the scheme of things, and a whole range of objects crumbles in becoming me, each object transferring its quality to an appropriate subject. The light becomes the eye and as such no longer exists: it is simply the stimulation of the retina. The smell becomes the nostril -and the world declares itself odorless. The song of the wind in the trees is disavowed: it was nothing but a quivering of the timpani. ... The subject is the disqualified object. My eye is the corpse of light and color. My nose is all that remains of odors when their unreality has been demonstrated. My hand refutes the thing it holds. Thus the problem of awareness is born of anachronism. It implies the simultaneous existence of the subject with the object, whose mysterious relationship to himself he seeks to define. But subject and object cannot exist apart from one another since they are one and the same thing, at first integrated into the real world and then cast out by it.
그러다 갑자기 클릭 소리가 납니다. 주체가 대상에서 분리되어 대상의 색과 물질의 일부를 빼앗아갑니다. 사물의 체계에 균열이 생기고, 모든 대상들이 무너지면서 내가 되고, 각 대상은 그 특성을 적절한 주체에게 전달합니다. 빛은 눈이 되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단순히 망막을 자극할 뿐입니다. 냄새는 콧구멍이 되고 세상은 스스로 무취를 선언합니다. 나무에 부는 바람의 노래는 부정됩니다. 그것은 팀파니의 떨림에 지나지 않습니다. ... 주체는 탈성질화된 대상이다. 내 눈은 빛과 색의 시체다. 내 코는 냄새의 비현실성이 드러났을 때 남은 냄새의 전부이다. 내 손은 그것이 들고 있는 것을 거부한다. 따라서 자각의 문제는 시대착오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자신과의 미스터리한 관계를 정의하고자 하는 대상과 주체의 동시적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는 처음에는 실재 세계에 통합되었다가 나중에 그것에 의해 쫓겨난 하나의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서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The Other thus assures the distinction of consciousness and its object as a temporal distinction. The first effect of its presence concerned space and the distribution of categories; but the second effect, which is perhaps the more profound, concerns time and the distribution of its dimensions -what comes before and what comes after in time. How could there still be a past when the Other no longer functions?
따라서 타자는 의식과 그 대상의 시간적 구별을 보장합니다. 그것의 현존의 첫 번째 효과는 공간과 범주의 분포에 관한 것이지만, 아마도 더 심오한 두 번째 효과는 시간과 그 차원의 분포, 즉 시간의 이전에 오는 것과 이후에 오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타자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데 어떻게 과거가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요?
In the Other's absence, consciousness and its object are one. There is no longer any possibility of error, not only because the Other is no longer there to be the tribunal of all reality -to debate, falsify, or verify that which I think I see; but also because, lacking in its structure, it allows consciousness to cling to, and to coincide with, the object in an eternal present. "And it is as though, in consequence, my days had rearranged themselves. No longer do they jostle on each other's heels. Each stands separate and upright, proudly affirming its own worth. And since they are no longer to be distinguished as the stages of a plan in process of execution, they so resemble each other as to be superimposed in my memory, so that I seem to be ceaselessly reliving the same day." Consciousness ceases to be a light cast upon objects in order to become a pure phosphorescence of things in themselves. Robinson is but the consciousness of the island, but the consciousness of the island is the consciousness the island has of itself- it is the island in itself. We understand thus the paradox of the desert isle: the one who is shipwrecked, if he is alone, if he has lost the structure-Other, disturbs nothing of the desert isle; rather he consecrates it. The island is named Speranza, but who is the "I"? "The question is far from an idle one, nor is it even unanswerable. Because if it is not him then it must be Speranza." Thus Robinson progressively nears a revelation: initially he experienced the loss of Others as a fundamental disorder of the world; nothing subsisted but the opposition of light and night. Everything became harmful, and the world had lost its transitions and virtuality. But he discovers (slowly) that it is the Other who disturbs the world. The Other was the trouble. Having disappeared, it is no longer only the days which are redressed. Things are also, no longer being pulled down by Others one on top of the other. So too is desire, no longer being drawn down on top of a possible object or a possible world expressed by Others. The desert isle initiates a straightening out and a generalized erection.
타자가 부재할 때 의식과 그 대상은 하나입니다. 타자가 더 이상 내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을 논쟁하거나 위조하거나 검증하는 모든 실재의 재판소가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구조가 없기 때문에 의식이 영원한 현재에 있는 대상에 달라붙고 일치하게 되므로 더 이상 오류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 내 날들이 저절로 재배치된 것 같다. 더 이상 서로 뒤엉키지 않습니다. 각각 독립적으로 똑바로 서서 자신의 가치를 자랑스럽게 확인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계획이 실행되는 과정의 단계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 기억 속에 겹쳐질 정도로 서로 닮아 있어서 나는 같은 날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 같습니다." 의식은 대상들에 투사되는 빛이 되기를 그만두고 그 자체로 사물의 순수한 인광이 됩니다. 로빈슨은 섬의 의식에 불과하지만, 섬의 의식은 섬이 그 자체로 가지고 있는 의식, 즉 섬 그 자체의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인도의 역설을 이해한다: 난파된 사람은, 그가 혼자라면, 그가 구조-타자를 잃었다면, 무인도의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무인도에 봉헌한다. 섬의 이름은 스페란자이지만 '나'는 누구일까요? "이 질문은 한가한 질문이 아니며 대답할 수 없는 질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니라면 스페란자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로빈슨은 점차 깨달음에 가까워집니다. 처음에 그는 세상의 근본적인 무질서로서 타자의 상실을 경험했고, 빛과 밤의 대립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해롭게 변했고, 세상은 전환과 가상성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것이 타자라는 것을 (천천히) 발견합니다. 타자가 문제였습니다. 타자가 사라진 후, 더 이상 교정되는 것은 날들만이 아닙니다. 사물들도 더 이상 다른 것들의 위에 있는 타자에 의해 무너져 내리지 않습니다. 욕망도 더 이상 타자에 의해 표현된 가능한 대상이나 가능한 세계 위에서 끌어내려지지 않습니다. 무인도는 곧게 펴지고 일반화된 발기를 시작합니다.
Consciousness has become not only a phosphorescence internal to things but a fire in their heads, a light over each one, and a "soaring I." In this light, something else appears, an ethereal double of each thing. " seemed to glimpse another island. ... Now I have been transported to that other Speranza, I live perpetually in a moment of innocence." It is this extraordinary birth of the erect double that the novel excels in describing. But what exactly is the difference between the thing such as it appears in the presence of Others and the double which tends to detach itself in their absence? The Other presides over the organization of the world into objects and over the transitive relations of these objects. These objects exist only through the possibilities with which Others filled up the world; each one was closed onto itself, or opened onto other objects, only in relation to possible worlds expressed by Others. In short, it is the Other who has imprisoned the elements within the limits of bodies and, further still, within the limits of the earth. For the earth itself is but a great body which retains the elements; it is earth only to the extent that it is peopled by Others. The Other fabricates bodies out of the elements and objects out of bodies, just as it fabricates its own countenance out of the worlds it expresses. Thus, the liberated double, when the Other collapses, is not a replica of things. It is, on the contrary, the new upright image in which the elements are released and renewed, having become celestial and forming a thousand capricious elemental figures. To begin with, there is the figure of a solar and dehumanized Robinson: "Sun, are you pleased with me? Look at me. Is my transformation sufficiently in the manner of your own radiance? My beard, which pointed earthward like a cluster of earthbound roots, has vanished, and now my head carries its glowing locks like a flame reaching upward to the sky. I am an arrow aimed at your heart. .." It is as if the entire earth were trying to escape by way of the island, not only restoring the other elements which it unduly kept under the influence of Others, but also tracing by itself its own ethereal double which renders it celestial and makes it converge with the other elements in the sky for the sake of solar figures. In short, the Other, as it encompasses the possible worlds, prevents the doubles from standing erect. The Other is the grand leveler, and consequently the de-structuration of the Other is not a disorganization of the world, but an upright organization as opposed to the recumbent organization; it is the new uprightness, and the detachment of an image which is vertical at last and without thickness; it is the detachment of a pure element which at last is liberated.
의식은 사물의 내부에 있는 인광일 뿐만 아니라 머릿속의 불, 각 사물을 비추는 빛, "비상하는 나"가 되었습니다. 이 빛 속에서 또 다른 무언가, 각 사물의 미묘한 이중성이 나타납니다. " 또 다른 섬을 엿보는 것 같았다. ... 이제 나는 다른 스페란자로 옮겨져 순수의 순간에 영원히 살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묘사하는 데 탁월한 것은 직립 이중의 이 특별한 탄생입니다. 그러나 타자들이 있을 때 나타나는 것과 그들의 부재 시 스스로 분리되는 경향이 있는 이중의 차이점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타자는 세계를 대상들로 조직하고 이들 대상의 전이적 관계를 관장합니다. 이 대상들은 타자들이 세계를 채운 가능성들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각 대상은 그 자체로 닫히거나 타자들에 의해 표현된 가능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다른 대상에 의해 열립니다. 요컨대, 원소들을 육체의 한계 안에, 더 나아가 지구의 한계 안에 가둔 것은 타자이다. 지구 자체는 원소들을 품고 있는 거대한 몸체에 불과하며, 타자에 의해 채워지는 한도 내에서만 지구이다. 타자는 그것이 표현하는 세계로부터 스스로의 얼굴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원소로부터 몸을, 몸으로부터 대상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타자가 무너질 때 해방된 이중은 사물들의 복제품이 아닙니다. 그것은 반대로 원소들이 해방되고 새로워진 새로운 직립 이미지이며, 천상적인 것이 되어 천 가지의 변덕스러운 원소 형상을 형성합니다. 우선, 태양과 비인간화 된 로빈슨의 모습이 있습니다."태양, 당신은 나에게 만족하십니까? 나를 봐요. 내 변신은 당신 자신의 발광 방식에 충분히 부합합니까? 땅에 박힌 뿌리처럼 땅을 향하던 내 수염은 사라지고, 이제 내 머리에는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불꽃처럼 빛나는 자물쇠가 달려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심장을 겨냥한 화살이다. .." 이는 마치 지구 전체가 섬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는 것처럼, 타자의 영향력 아래 부당하게 유지되었던 다른 원소들을 회복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천상으로 만들고 태양의 형상을 위해 하늘의 다른 원소들과 수렴하게 하는 자신의 미묘한 이중성을 추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컨대, 타자는 가능한 모든 세계를 아우르면서 이중이 똑바로 서는 것을 방지합니다. 타자는 웅장한 평준화자이며, 따라서 타자의 탈구조화는 세계의 탈조직화가 아니라 엎드린 조직과 반대되는 직립 조직이며, 새로운 직립이며, 마침내 수직적이고 두께가 없는 이미지의 분리이며, 마침내 해방되는 순수한 요소의 분리입니다.
Catastrophes have been necessary for this production of doubles and elements: not only the rites of the great dead goat, but a formidable explosion in which the island gave up all of its fire and vomited itself out through one of its grottos. Through the catastrophes, however, the newly erected desire learns the nature of its true object. Isn't it the case that nature and the earth had already told us that the object of desire is neither the body nor the thing, but only the Image? When we desire Others, are not our desires brought to bear upon this expressed small possible world which the Other wrongly envelops, instead of allowing it to float and fly above the world, developed onto a glorious double? And when we observe a butterfly pillaging a flower that exactly resembles the abdomen of the female of the species and then leaving the flower carrying on its head two horns of pollen, we are tempted to conclude that bodies are but detours to the attainment of Images, and that sexuality reaches its goal much better and much more promptly to the extent that it economizes this detour and addresses itself directly to Images and to the Elements freed from bodies. Robinson's deviation is the conjunction of the libido and the elements; but the full story of this deviation, so far as ends are concerned, encompasses the straightening up of things, the earth, and desire.
재앙은 이 이중성과 원소들의 생산을 위해 필요했습니다: 거대한 죽은 염소의 제의뿐만 아니라 섬이 모든 불을 포기하고 그 동굴 중 하나를 통해 스스로를 토해내는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재앙을 통해 새롭게 세워진 욕망은 진정한 대상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욕망의 대상은 육체도 사물도 아닌 오직 이미지라는 것을 자연과 대지는 이미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타자를 욕망할 때, 우리의 욕망은 이 타자가 잘못 감싸고 있는 이 작은 가능한 세계에 집중된 욕망이 아니라, 이 세계 위에 떠다니고 날아다니는 영광스러운 이중성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비가 그 종의 암컷의 복부를 정확히 닮은 꽃을 약탈한 다음 꽃가루 두 뿔을 머리에 이고 꽃을 떠나는 것을 관찰할 때, 우리는 육체가 이미지에 도달하기 위한 우회에 불과하며, 성은 이 우회를 절약하고 이미지와 육체로부터 해방된 원소들에게 직접 다가갈 때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목표에 도달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게 된다. 로빈슨의 일탈은 리비도와 원소들의 결합이지만, 이 일탈의 전체 이야기는 최종 목적에 관한 한 사물, 대지, 욕망의 바로 세우기를 포함한다.
How many efforts and fabulous adventures were necessary for him to arrive at that point. For Robinson's first reaction was despair, and this reaction expresses the precise moment of neurosis at which the structure-Other is still functioning, though there is no longer anyone to fill it out or to actualize it. In a certain manner, and since it is no longer occupied by real beings, it functions all the more rigorously. The others (les autres) are no longer attached to the structure; the structure functions in a vacuum, without being any less exacting because of this. It endlessly drives Robinson back into an unrecognized personal past, into the snares of memory and the pains of hallucination. This moment of neurosis (in which Robinson is wholly "repressed") is embodied in the wallowing-place that Robinson shares with the peccaries: "Only his eyes, nose, and mouth were active, alert for edible weed and toad spawn drifting on the surface. Rid of all terrestrial bonds, his thoughts in a half stupor pursued vestiges of memory which emerged like phantoms from the past to dance in the blue gaps between motionless foliage."
그가 그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멋진 모험이 필요했을까요? 로빈슨의 첫 번째 반응은 절망이었으며, 이 반응은 더 이상 그것을 채우거나 실현할 사람이 없지만 타자라는 구조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신경증의 정확한 순간을 표현합니다. 특정한 방식으로, 그리고 더 이상 실재의 존재에 의해 점유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철저하게 기능합니다. 다른 것들(레 아뜨르)은 더 이상 구조에 붙어 있지 않으며, 구조는 진공 상태에서 기능하지만 그 때문에 덜 정확해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로빈슨을 인식할 수 없는 개인의 과거로, 기억의 올무들과 환각의 고통들 속으로 끝없이 몰아넣습니다. 이 신경증의 순간(로빈슨이 전적으로 '억압받는')은 로빈슨이 페커리들과 함께 몸을 뒹구는 장소에서 구현됩니다: "눈, 코, 입은 오직 식용 잡초와 수면 위로 떠다니는 두꺼비 산란을 위해 예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지상의 모든 유대를 끊고 반쯤 무감각해진 그의 생각은 과거의 유령처럼 떠오른 기억의 흔적을 쫓아 움직이지 않는 나뭇잎 사이의 푸른 틈새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The second moment, however, reveals that the structure-Other begins to crumble. Pulling himself from the wallowing-place, Robinson seeks a substitute for Others, something capable of maintaining, in spite of everything, the fold that Others granted to things - namely, order and work. The ordering of time by means of the clepsydra, the establishment of an overabundant production, or of a code of laws, and the multiplicity of official titles and functions that Robinson takes on -all of this bears witness to an effort to repopulate the world with Others (who would still be himself), and to maintain the effects of the presence of Others when the structure has failed. But the anomaly makes itself felt: Defoe's Robinson does not allow himself to produce beyond his need, thinking that evil begins with surplus production; Tournier's Robinson, however, throws himself into a "frenetic" production, the sole evil being that of consuming, since one always consumes alone and for oneself. In line with this work activity, and as a necessary correlate to it, a strange passion for relaxation and sexuality is developed. Sometimes stopping his clepsydra, getting used to the bottomless night of a grotto, or coating his body with milk, Robinson moves deep into the inner center of the island and finds an alveolus to curl up in, as in a larval envelope of his own body. This is a regression much more fantastic than the regression of neurosis inasmuch as it reaches back to the Earth-Mother-the primordial Mother: "He himself was that supple dough, caught in a hand of all-powerful stone. He was the bean, caught in the massive indestructible flesh of Speranza." Whereas work used to conserve the form of objects as so many accumulated vestiges, involution gives up every formed object for the sake of an inside of the Earth and a principle of burying things in it. The impression one has, however, is that these two very different behaviors are singularly complementary. In both cases, there is frenzy -a double frenzy defining the moment of psychosis- which appears clearly in the return to the Earth and the cosmic genealogy of the schizophrenic, but no less in work, in the production of nonconsumable schizophrenic objects which proceeds by way of piling up and accumulation. At this point, it is the structure-Other which tends to dissolve: the psychotic attempts to compensate for the absence of real Others by establishing an order of human vestiges, and for the dissolution of structure by organizing a superhuman filiation.
그러나 두 번째 순간, 구조-타자가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로빈슨은 허우적대던 자리에서 벗어나 타자를 대신할 수 있는 것,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타자가 사물에 부여한 주름, 즉 질서와 노동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찾습니다. 물시계를 통한 시간의 질서, 과잉 생산 또는 법규의 확립, 로빈슨이 맡게 되는 다양한 공식 직책과 기능 등 이 모든 것은 타자(여전히 자신일 수도 있는)로 세계를 다시 채우고, 구조가 실패했을 때 타자의 존재 효과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증거가 됩니다. 물시계를 통한 시간의 질서, 과잉 생산 또는 법규의 확립, 로빈슨이 맡게 되는 다양한 공식 직책과 기능 등 이 모든 것은 타자(여전히 자신일 수도 있는)로 세계를 다시 채우고, 구조가 실패했을 때 타자의 현존 효과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증거입니다. 데포의 로빈슨은 악은 과잉 생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하여 필요 이상의 생산을 허용하지 않지만, 투르니에의 로빈슨은 항상 혼자서 자신을 위해 소비하기 때문에 유일한 악은 소비라는 '광적인' 생산에 자신을 던진다. 이 작업 활동에 따라, 그리고 그것과 필연적인 상관 관계로서 휴식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상한 열정이 개발됩니다. 때때로 물시계를 멈추거나 동굴의 끝없는 밤에 익숙해 지거나 우유로 몸을 코팅하는 로빈슨은 섬의 안쪽 중앙으로 깊숙이 이동하여 자신의 몸의 애벌레 봉투처럼 몸을 웅크 리고있는 폐포를 찾습니다. 이것은 신경증의 퇴행보다 훨씬 더 환상적인 퇴행으로, 원초적 어머니인 대지, 즉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그 자신은 전능한 돌의 손에 잡힌 유연한 반죽이었다. 그는 스페란자의 거대한 부서지지 않는 육체 속에 갇힌 콩이었습니다." 노동이 대상들의 형태를 수많은 축적된 흔적들로 보존하는 데 사용되었다면, 말아넣음은 지구의 내부와 그 안에 사물을 묻어두는 원리를 위해 모든 형성된 대상들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매우 다른 행동이 서로 보완적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두 경우 모두 정신병의 순간을 정의하는 광란, 즉 이중의 광란이 있는데, 이는 대지로의 귀환과 정신분열증의 우주적 계보에서 분명하게 나타나지만, 노동에서도 마찬가지로 쌓이고 축적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비소비적 정신분열증적 대상들의 생산에서 그다지 덜하지 않습니다. 이 시점에서 해체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구조-타자, 즉 인간의 흔적의 질서를 확립함으로써 진정한 타자의 부재를 보상하고 초인적인 계보를 조직함으로써 구조의 해체를 보상하려는 정신병적 시도이다.
Neurosis and psychosis -this is the adventure of depth. The structure-Other organizes and pacifies depth. It renders it livable. This is why the agitations of this structure imply a disorder, a disturbance of depth, as an aggressive return of the bottomless abyss that can no longer be conjured away. Everything has lost its sense, everything becomes simulacrum and vestige even the object of work, the loved one, the world in itself or the self in the world. ..; that is, unless there be some sort of salvation for Robinson; unless he invents a new dimension or a third sense for the expression "loss of Others"; unless the absence of the Other and the dissolution of its structure do not simply disorganize the world but, on the contrary, open up a possibility of salvation. Robinson must return to the surface and discover surfaces. The pure surface is perhaps what Others were hiding from us. It is perhaps at the surface, like a mist, that an unknown image of things is detached and, from the earth, a new surface energy without possible others. For the sky does not at all signify a height which would merely be the inverse image of depth. In opposition to the deep earth, air and sky describe a pure surface, and the surveying of the field of this surface. The solipsist sky has no depth: "It is a strange prejudice which sets a higher value on depth than on breadth, and which accepts 'superficial' as meaning not 'of wide extent' but 'of little depth,' whereas 'deep,' on the other hand, signifies 'of great depth' and not 'of small surface.' Yet it seems to me that a feeling such as love is better measured, if it can be measured at all, by the extent of its surface than by its degree of depth." It is at the surface that doubles and ethereal Images first rise up; then the pure and free Elements arise in the celestial surveying of the field. The generalized erection is the erection of surfaces, their rectification- the disappearance of the Others. At the surface of the isle and the overarching sky, simulacra ascend and become phantasms. Doubles without resemblance and elements without constraint- these are the two aspects of the phantasm. This restructuring of the world is Robinson's great Health -the conquest of the great Health, or the third sense of the "loss of Others."
신경증과 정신병 - 이것은 심층의 모험입니다. 구조-타자는 심층을 정리하고 진정시킵니다. 그것은 그것을 살기 좋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조의 동요는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는 바닥 없는 심연의 공격적인 귀환으로서 무질서, 심층의 교란을 암시합니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고 작업의 대상, 사랑하는 사람, 세계 그 자체 또는 세계 속의 자아조차도 시뮬라크르와 흔적이 됩니다. ... 즉, 로빈슨에게 어떤 종류의 구원이 없다면, 그가 '타자의 상실'이라는 표현에 대한 새로운 차원이나 제3의 의미를 발명하지 않는다면, 타자의 부재와 그 구조의 해체가 단순히 세계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로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로빈슨은 표면으로 돌아가 표면들을 발견해야 합니다. 순수한 표면은 어쩌면 타자가 우리에게 숨기고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안개와 같은 표면에는 미지의 사물의 이미지가 분리되어 있고, 대지로부터는 타자가 없는 새로운 표면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심층의 반대 이미지에 불과한 높이를 전혀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깊은 대지와는 반대로 공기와 하늘은 순수한 표면과 이 표면의 장을 탐사하는 것을 묘사합니다. 고독한 하늘에는 깊이가 없다: "넓이보다 깊이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피상적'을 '넓은 범위'가 아니라 '희미한 심층'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반면에 '깊은'은 '작은 표면'이 아니라 '큰 심층'를 의미하는 이상한 편견이 있다. 하지만 사랑과 같은 감정은 측정이 가능하다면 그 깊이보다는 표면의 넓이로 측정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이중적이고 미묘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은 표면이고, 그 다음에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원소가 천상의 장에 대한 탐색에서 일어납니다. 일반화된 발기는 표면들의 발기, 그들의 교정, 즉 타자의 소멸입니다. 섬의 표면과 가장 중요한 하늘에서 시뮬라크르는 상승하여 환상이됩니다. 유사성 없는 이중성과 제약 없는 요소들, 이것이 바로 환상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이러한 세계의 재구성은 로빈슨의 위대한 건강, 즉 위대한 건강의 정복, 즉 "타자의 상실"이라는 세 번째 의미입니다.
It is here that Friday intervenes. For the main character, as the title indicates, is the young boy, Friday. He alone is able to guide and complete the metamorphosis that Robinson began and to reveal to him its sense and its aim. He will accomplish all of this innocently and superficially. It is Friday who destroys the economic and moral order that Robinson had established on the island. It is he who brings Robinson to dislike the coomb, having grown for his own pleasure another species of Mandrake. It is he who blows up the island as he smokes the forbidden tobacco near a powder keg, and restores the earth, but also water and fire, to the sky. It is he who makes the dead goat (= Robinson) fly and sing. But it is he, above all, who presents to Robinson the image of the personal double as the necessary complement of the image of the island: "Robinson turned the question over in his mind. For the first time he was clearly envisaging the possibility that within the crude and brutish half-caste who so exasperated him another Friday might be concealed -just as he had once suspected, before exploring the cave or discovering the coomb, that another Speranza might be hidden beneath his cultivated island." Finally, it is he who leads Robinson to the discovery of the free Elements, which are more radical than Images or Doubles since these latter are formed by them. What is to be said of Friday, if not that he is a mischievous child, wholly at the surface? Robinson will always have ambivalent feelings about Friday, since he saved him only accidentally, having missed when he shot at him wanting to kill him.
여기에 프라이데이가 개입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주인공은 어린 소년 프라이데이입니다. 그는 혼자서 로빈슨이 시작한 변신을 안내하고 완성하고 그 의미와 목표를 그에게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순수하고 피상적으로 성취할 것입니다. 로빈슨이 섬에 세운 경제적, 도덕적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프라이데이입니다. 로빈슨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다른 종의 맨드레이크를 키우면서 벌집을 싫어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사람입니다. 화약통 근처에서 금지된 담배를 피우면서 섬을 폭파시키고 대지와 물과 불을 하늘로 복원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람입니다. 죽은 염소(=로빈슨)를 날게 하고 노래하게 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로빈슨에게 섬의 이미지에 필수적인 보완물로 개인 이중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로빈슨은 마음 속으로 질문을 뒤집었다. 동굴을 탐험하거나 소굴을 발견하기 전에, 자신이 경작하는 섬 아래에 또 다른 스페란자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던 것처럼, 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격분하게 만든 조잡하고 잔인한 혼혈인 속에 또 다른 프라이데이가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분명히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로빈슨을 자유 원소의 발견으로 이끈 것은 그였는데, 자유 원소는 이미지나 복식보다 더 급진적인 원소로, 후자는 이들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프라이데이에 대해 표면적으로 장난꾸러기 아이라는 것 말고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로빈슨은 프라이데이를 죽이려고 총을 쐈지만 빗나가고 우연히 그를 구해줬기 때문에 프라이데이에 대해 항상 양가적인 감정을 갖게 됩니다.
What is essential, however, is that Friday does not function at all like a rediscovered Other. It is too late for that, the structure has disappeared. Sometimes he functions as a bizarre object, sometimes as a strange accomplice. Robinson treats him sometimes as a slave and tries to integrate him into the economic order of the island -that is, as a poor simulacrum- and sometimes as the keeper of a new secret which threatens that order -that is, as a mysterious phantasm. Sometimes he treats him almost like an object or an animal, sometimes as if Friday were a "beyond" with respect to himself, a "beyond" Friday, his own double or image. Sometimes he treats him as if he were falling short of the Other, sometimes as if he were transcending the Other. The difference is essential. For the Other, in its normal functioning, expresses a possible world. But this possible world exists in our world, and, if it is not developed or realized without changing the quality of our world, it is at least developed in accordance with laws which constitute the order of the real in general and the succession of time. But Friday functions in an entirely different way -he indicates another, supposedly true world, an irreducible double which alone is genuine, and in this other world, a double of the Other who no longer is and cannot be. Not an Other, but something wholly other (un tout-autre) than the Other; not a replica, but a Double: one who reveals pure elements and dissolves objects, bodies, and the earth. "It seemed, indeed, that (Friday) belonged to an entirely different realm, wholly opposed to his master's order of earth and husbandry, on which he could have only a disruptive effect if anyone tried to imprison him within it." It is for this reason that he is not even an object of desire for Robinson. Though Robinson embraces his knees and looks into his eyes, it is only in order to grasp the luminous double which now barely retains the free elements which have escaped from his body. "As to my sexuality, I may note that at no time has Friday inspired me with any sodomite desire. For one thing, he came too late, when my sexuality had already become elemental and was directed toward Speranza. ...It was not a matter of turning me back to human loves but, while leaving me still an elemental, of causing me to change my element." The Other pulls down (rabat): it draws the elements into the earth, the earth into bodies, and bodies into objects. But Friday innocently makes objects and bodies stand up again. He carries the earth into the sky. He frees the elements. But to straighten up or to rectify is also to shorten. The Other is a strange detour -it brings my desires down to objects, and my love to worlds. Sexuality is linked to generation only in a detour which first channels the difference of sexes through the Other. It is initially in the Other and through the Other that the difference of the sexes is founded. To establish the world without Others, to lift the world up (as Friday does, or rather as Robinson perceives that Friday does) is to avoid the detour. It is to separate desire from its object, from its detour through the body, in order to relate it to a pure cause: the Elements. "...So also has perished the framework of institutions and myths that permits desire to become embodied, in the twofold sense of the word -that is to say, to assume a positive form and to expend itself in the body of a woman." Robinson can no longer apprehend himself, or Friday, from the point of view of a differentiated sex. Psychoanalysis may well see in this abolition of the detour, in this separation of the cause of desire from its object, and in this return to the elements, the sign of a death instinct an instinct which has become solar.
그러나 중요한 것은 프라이데이가 재발견된 타자처럼 전혀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 구조는 사라졌습니다. 때때로 그는 기괴한 물건으로, 때때로 이상한 공범으로 기능합니다. 로빈슨은 때때로 그를 노예처럼 대하며 섬의 경제 질서, 즉 형편없는 시뮬라크르에 편입시키려 하고, 때때로 그 질서를 위협하는 새로운 비밀의 수호자, 즉 신비한 환상의 존재로 취급합니다. 때때로 그는 그를 거의 물건이나 동물처럼 대하고, 때로는 프라이데이가 마치 자신과 관련하여 '저 너머', 즉 자신의 이중성 또는 이미지인 '저 너머'의 프라이데이인 것처럼 취급합니다. 때로는 그가 타자에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때로는 그가 타자를 초월하는 것처럼 그를 대합니다. 그 차이는 필수적입니다. 타자는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 가능한 세계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 가능한 세계는 우리 세계에 존재하며, 그것이 우리 세계의 특성을 바꾸지 않고 전개되거나 실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어도 일반적으로 현실의 질서와 시간의 연속을 구성하는 법칙에 따라 전개된다. 그러나 프라이데이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기능합니다. 그는 또 다른 참된 세계, 그 자체로만 참된 환원 불가능한 이중, 그리고 이 다른 세계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타자의 이중을 가리킵니다. 타자가 아니라 타자와 완전히 다른 것(un tout-autre), 복제품이 아니라 순수한 요소를 드러내고 사물, 신체, 대지를 녹여내는 이중. "실제로 (프라이데이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주인의 대지와 목축의 질서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누군가 그를 그 안에 가두려고 하면 파괴적인 영향만 미칠 수 있는 존재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로빈슨에게 욕망의 대상조차 되지 못합니다. 로빈슨이 그의 무릎을 껴안고 그의 눈을 바라보지만, 그것은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자유의 요소를 간신히 간직하고 있는 빛나는 이중성을 파악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내 성욕에 관해서는 프라이데이가 나에게 남색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킨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그는 내 성욕이 이미 원초적인 것이 되어 스페란자를 향하고 있을 때 너무 늦게 왔다. ... 그것은 나를 인간적인 사랑으로 되돌리는 문제가 아니라, 나를 여전히 원소로 남겨두면서 내 원소를 바꾸게 만드는 문제였다." 타자는 원소를 대지로, 대지를 신체로, 신체를 대상으로 끌어당긴다(라바트). 그러나 프라이데이는 순진하게도 대상과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그는 대지를 하늘로 옮깁니다. 그는 원소들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나 곧게 펴거나 바로잡는다는 것은 곧 짧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타자는 나의 욕망을 대상으로, 나의 사랑을 세계로 끌어내리는 기묘한 우회로입니다. 섹슈얼리티는 타자를 통해 성의 차이를 먼저 전달하는 우회로를 통해서만 세대와 연결됩니다. 성의 차이는 처음에 타자 안에서 그리고 타자를 통해 성립된다. 타자 없는 세계를 구축하는 것, 세계를 들어올리는 것( 프라이데이가 그러하듯, 혹은 로빈슨이 그렇게 인식하듯)은 우회로를 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욕망을 순수한 원인, 즉 원소와 연관시키기 위해 몸을 통한 우회로부터 욕망을 그 대상에서 분리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두 가지 의미, 즉 여성의 몸에서 긍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자신을 확장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와 신화의 틀도 소멸했습니다." 로빈슨은 더 이상 차별화 된 성의 관점에서 자신이나 프라이데이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이러한 우회로의 폐지, 욕망의 원인과 대상의 분리, 그리고 요소로의 회귀에서 죽음의 본능이 태양이 된 본능의 징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Everything here is fictitious (romanesque), including theory, which merges with a necessary fiction- namely, a certain theory of the Other. First, we must attach a great importance to the notion of the Other as structure: not at all a particular "form" inside a perceptual field (distinct from the form "object" or the form "animal"), but rather a system which conditions the functioning of the entire perceptual field in general. We must therefore distinguish the a priori Other, which designates this structure, and the concrete Other, which designates real terms actualizing the structure in concrete fields. If this concrete Other is always someone -I for you and you for me- that is, in each perceptual field the subject of another field -the a priori Other, on the other hand, is no one since structure is transcendent with respect to the terms which actualize it. How then is it to be defined? The expressiveness which defines the structure-Other is constituted by the category of the possible. The a priori Other is the existence of the possible in general, insofar as the possible exists only as expressed - that is, in something expressing it which does not resemble what is expressed (a torsion of the expressed in that which expresses it). When Kierkegaard's hero demands "the possible, the possible or I shall suffocate," when James longs for the "oxygen of possibility," they are only invoking the a priori Other. We have tried to show in this sense how the Other conditions the entire perceptual field, the application to this field of the categories of the perceived object and the dimensions of the perceiving subject, and finally, the distribution of concrete Others in each field. In fact, perceptual laws affecting the constitution of objects (form-background, etc.), the temporal determination of the subject, and the successive development of worlds, seemed to us to depend on the possible as the structure-Other. Even desire, whether it be desire for the object or desire for Others, depends on this structure. I desire an object only as expressed by the Other in the mode of the possible; I desire in the Other only the possible worlds the Other expresses. The Other appears as that which organizes Elements into Earth, and earth into bodies, bodies into objects, and which regulates and measures object, perception, and desire all at once.
여기서의 모든 것은 이론을 포함한 허구(로마네스크)이며, 이 이론은 필요한 허구, 즉 타자에 대한 특정 이론과 합쳐집니다. 첫째, 우리는 구조로서의 타자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타자는 지각장 내부의 특정한 '형태'('대상'이라는 형태나 '동물'이라는 형태와는 구별되는)가 아니라 전체 지각장의 기능을 일반적으로 조건짓는 체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구조를 지정하는 선험적 타자와 이 구조를 구체적인 영역에서 현실화하여 실제 용어를 지정하는 구체적 타자를 구분해야 합니다. 이 구체적인 타자가 항상 누군가-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즉 각 지각 영역에서 다른 영역의 주체라면, 반면에 선험적 타자는 구조가 그것을 현실화하는 용어들과 관련하여 초월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아니다. 그렇다면 구조는 어떻게 정의될까요? 구조-타자를 정의하는 표현은 가능한 것의 범주에 의해 구성됩니다. 선험적 타자란 일반적으로 가능한 것이 표현된 것으로만 존재하는 한, 즉 표현된 것과 닮지 않은 것을 표현하는 것(표현된 것에서 표현된 것의 비틀림)에서만 가능한 것의 존재를 말한다. 키에르케고르의 주인공이 "가능한 것, 가능한 것이 아니면 질식할 것"을 요구할 때, 제임스가 "가능성의 산소"를 갈망할 때, 그들은 선험적 타자를 호출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에서 타자가 전체 지각 영역을 어떻게 조건짓는지, 지각 대상의 범주와 지각 주체의 차원이 이 영역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마지막으로 각 영역에서 구체적인 타자가 어떻게 분포하는지를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사실 대상의 구성(형태-배경 등), 주체의 시간적 결정, 세계의 연속적 전개에 영향을 미치는 지각 법칙은 우리에게 구조-타자로서의 가능성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였다. 대상에 대한 욕망이든 타자에 대한 욕망이든 욕망조차도 이 구조에 의존합니다. 나는 타자가 가능한 것의 방식으로 표현한 대로만 대상을 욕망하고, 타자가 표현하는 가능한 세계만을 타자 안에서 욕망한다. 타자는 원소를 대지로, 대지를 몸으로, 몸을 대상으로 조직하고, 대상과 지각과 욕망을 동시에 조절하고 측정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What is the sense of the "Robinson" fiction? What is a Robinsonade? A world without Others. Tournier assumes that Robinson, through much suffering, discovers and conquers a great Health, to the extent that things end up being organized in a manner quite different than their organization in the presence of the Others. They liberate an image without resemblance, or their own double which is normally repressed. This double in turn liberates pure elements which are ordinarily held prisoner. The world is not disturbed by the absence of the Other; on the contrary, it is the glorious double of the world which is found to be hidden by its presence. This is Robinson's discovery: the discovery of the surface, of the elemental beyond, of the "otherwise-Other" (de l'Autre qu'autrui). Why then do we have the impression that this great Health is perverse, and that this "rectification" of the world and of desire is also a deviation and a perversion? Robinson exhibits no perverse behavior. But every study or every novel of perversion strives to manifest the existence of a "perverse structure" as the principle from which perverse behavior eventually proceeds. In this sense, the perverse structure may be specified as that which is opposed to the structure-Other and takes its place. And just as concrete Others are actual and variable terms actualizing this structure-Other, the pervert's behaviors, always presupposing a fundamental absence of the Others, are but variable terms actualizing the perverse structure.
"로빈슨" 소설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Robinsonade란 무엇인가요? 타인이 없는 세상. 투르니에는 로빈슨이 많은 고통을 통해 위대한 건강을 발견하고 정복하여 타자가 존재할 때의 조직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물이 조직화된다고 가정합니다. 그들은 유사성이 없는 이미지, 즉 보통 억압되어 있는 자신의 이중성을 해방시킵니다. 이 이중성은 일반적으로 포로로 잡혀 있는 순수한 요소들을 해방시킵니다. 세계는 타자의 부재로 인해 방해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존재로 인해 숨겨져 있던 세계의 영광스러운 이중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로빈슨의 발견, 즉 표면의 발견, 그 너머의 원소, '다른 타자'(드 라 오뜨루이)의 발견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 위대한 건강이 일탈적이며, 세계와 욕망의 '교정' 역시 탈선과 일탈이라는 인상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로빈슨은 일탈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탈에 관한 모든 연구나 소설은 일탈 행동이 궁극적으로 진행되는 원리로서 '일탈 구조'의 존재를 현시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일탈적인 구조는 구조-타자에 대항하여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타자가 이 구조-타자를 실현하는 실재적이고 가변적인 조건인 것처럼, 일탈자의 행동은 항상 타자의 근본적인 부재를 전제로 하며, 일탈적인 구조를 현실화하는 가변적인 조건에 불과합니다.
The fundamental misinterpretation of perversion, based on a hasty phenomenology of perverse behavior and on certain legal exigencies, consists in bringing perversion to bear upon certain offenses committed against Others. Everything persuades us, from the point of view of behavior, that perversion is nothing without the presence of the Other: voyeurism, exhibitionism, etc. Bu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structure, the contrary must be asserted: it is because the structure-Other is missing, and is replaced by a completely different structure, that the real "others" are no longer able to play the role of terms actualizing the lost primary structure. Real "others" can only play now, in the second structure, the role of bodies-victims (in the very particular sense that the pervert attributes to bodies), or the role of accomplices-doubles, and accomplices-elements (again, in the very particular sense of the pervert). The world of the pervert is a world without Others, and thus a world without the possible. The Other is that which renders possible. The perverse world is a world in which the category of the necessary has completely replaced that of the possible. This is a strange Spinozism from which "oxygen" is lacking, to the benefit of a more elementary energy and a more rarefied air (Sky-Necessity). All perversion is an "Other-cide," and an "altrucide," and therefore a murder of the possible. But altrucide is not committed through perverse behavior, it is presupposed in the perverse structure. This does not keep the pervert from being a pervert, not constitutionally, but at the end of an adventure which surely has passed through neurosis and brushed up against psychosis. This is what Tournier suggests in this extraordinary novel: we must imagine Robinson as perverse; the only Robinsonade possible is perversion itself.
일탈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는 일탈적 행동에 대한 성급한 현상학과 특정 법적 긴급성에 근거하여 일탈을 타인에게 저지른 특정 범죄에 적용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행동의 관점에서 볼 때 관음증, 노출증 등 타자의 존재 없이는 일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모든 것이 우리를 설득합니다. 그러나 구조의 관점에서 보면, 반대로 주장해야 합니다. 구조-타자가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구조로 대체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타자'는 더 이상 잃어버린 일차 구조를 현실화하는 용어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제 진정한 '타자'는 이차 구조에서 신체-피해자(일탈자가 신체에 부여하는 매우 특별한 의미에서)의 역할, 또는 공범-이중체들, 공범-요소들(다시 일탈자가 부여하는 매우 특별한 의미에서)의 역할만 할 수 있습니다. 일탈자의 세계는 타자가 없는 세계이며, 따라서 가능한 것이 없는 세계입니다. 타자는 가능성을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일탈적인 세계는 필연적인 것의 범주가 가능한 것의 범주를 완전히 대체한 세계입니다. 이것은 더 원초적인 에너지와 더 희박한 공기(하늘-필연성)의 이익을 위해 '산소'가 결여된 이상한 스피노자주의입니다. 모든 일탈은 '타자 살해'이자 '알트루사이드'이며, 따라서 가능한 것에 대한 살인입니다. 그러나 알트루사이드는 일탈적 행동을 통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일탈적 구조 속에서 전제됩니다. 일탈자는 선천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경증을 거쳐 정신병으로 치닫는 모험의 끝에서 일탈자가 되는 것이다. 투르니에는 이 특별한 소설에서 로빈슨을 일탈적인 것으로 상상해야 하며, 일탈 그 자체만이 가능한 로빈슨애드라고 제안합니다.
5. Zola and the Crack-Up 졸라와 균열
In La Bete humain the following celebrated passage can be found:
인간 짐승에서 다음과 같은 좋은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The family was really not quite normal, and many of them had some flaw. At certain times, he could clearly feel this hereditary taint, not that his health was bad, for it was only nervousness and shame about his attacks that had made him lose weight in his early days. But there were attacks of instability in his being, losses of equilibrium like cracks or holes through which his personality seemed to leak away, amid a sort of thick vapour that deformed everything....
가족은 정말 평범하지 않았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결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유전적인 결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만 건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었고, 초창기에 살이 빠지게 만든 것은 그의 공격에 대한 긴장과 수치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에 불안정성의 공격이 있었고, 모든 것을 기형화시키는 일종의 두꺼운 증기 속에서 그의 인격이 새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는 균열이나 구멍과 같은 평형 감각의 상실이있었습니다.
Here Zola launches an important theme, one that will be taken up in other forms and by other means in modern literature and one always found to have a privileged relationship with alcoholism: the theme of the crack-up (Fitzgerald, Lowry).
여기서 졸라는 현대 문학에서 다른 형태와 다른 수단으로 다루어지고 알코올 중독과 항상 특권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밝혀진 중요한 주제, 즉 균열의 주제를 시작합니다(피츠제럴드, 라우리).
It is important that Jacques Lantier, the hero of La Bête humaine, be sound, vigorous, and in good health, for the crack does not designate a route along which morbid ancestral elements will pass, marking the body. Zola in fact happens to express himself in this manner, but this is only a matter of convenience. It may even be the case for certain characters -the weak and the jittery. But to be precise, they are not the ones who carry the crack -or it is not by virtue of this alone that they carry it. Heredity is not that which passes through the crack, it is the crack itself -the imperceptible rift or the hole. In its true sense, the crack is not a crossing for morbid heredity; it alone is the hereditary and the morbid in its entirety. From one healthy Rougon-Macquart body to another it transmits nothing other than itself. Everything rests on the paradox, that is, the confusion of this heredity with its vehicle or means, or the confusion of what is transmitted with its transmission -the paradox of this transmission which transmits nothing other than itself: the cerebral crack in a vigorous body or the crevice of thought. With the exception of accidents, as we shall see, the "soma" is vigorous and healthy. But the "germen" is the crack -nothing but the crack. Under these conditions, the crack takes on the appearance of an epic destiny, going from one story or one body to another, forming the red thread of the Rougon-Macquart.
균열이 병적인 선조의 원소들이 신체를 표시하고 통과 할 경로를 지정하지 않기 때문에 La Bête humaine의 영웅 인 Jacques Lantier는 건전하고 활기차고 건강해야 합니다. 실제로 졸라는 이런 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이것은 편의상의 문제 일뿐입니다. 약하고 불안한 특정 캐릭터의 경우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균열을 가진 사람이 아니거나 이것만으로는 균열을 가지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전은 균열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균열 그 자체,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나 구멍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균열은 병적인 유전을 위한 교차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유전적인 동시에 병적인 것입니다. 건강한 루곤-마쿼트 몸에서 다른 몸으로 전염되는 것은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역설, 즉 이 유전과 그 매개체 또는 수단의 혼동, 또는 전달되는 것과 전달하는 것의 혼동, 즉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는 이 전달의 역설, 즉 활기찬 몸의 대뇌적 균열이나 생각의 틈에 놓여 있다. 사고를 제외하고는,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소마'는 활기차고 건강합니다. 그러나 "세균"은 균열 일뿐입니다. 이러한 조건에서 균열은 하나의 이야기 또는 하나의 몸에서 다른 몸으로 이동하는 서사적 운명의 모습을 띠며 루옹-마카르트의 붉은 실을 형성합니다.
What is distributed around the crack? What is it that swarms at its edges? It is what Zola calls the temperaments, the instincts, "the big appetites." But "temperament" or "instinct" does not designate a psycho-physiological entity. It is a notion far more rich and concrete-a "novelistic" notion. The instincts designate the conditions of life and survival in general -the conditions of the conservation of a kind of life determined in a historical and social milieu (here, the Second Empire). This is why Zola's bourgeois can easily name their vices, their lack of generosity and their ignominies as virtues; conversely, this is why the poor are often reduced to "instincts" like alcoholism, which express the historical conditions of their lives and their only way of putting up with a historically determined life. Zola's "naturalism" is always historical and social. Instinct, or appetite, has therefore diverse faces. Sometimes it expresses the manner by which the body conserves itself in a given favorable environment; in this sense, instinct is itself vigor and health. Sometimes it expresses the kind of life that a body invents in order to turn to its own advantage what the environment gives, even if it has to destroy other bodies. In this case, instinct is an ambiguous power. Sometimes it expresses the kind of life without which a body could not support its historically determined existence in an unfavorable environment, even if this means the destruction of itself; in this sense, alcoholism, perversions, illnesses, and even senility are instincts. Instincts tend to conserve, insofar as they always express the effort of perpetuating a way of life. But this way of life, and the instinct itself, may be no less destructive than "conservative" in the strict sense of the word. Instincts manifest degeneration, the sudden arrival of an illness -the loss of health no less than health itself. No matter what form it takes, instinct is never confused with the crack. Rather, it maintains strict though variable relations with the crack: sometimes, and thanks to the health of the body, it covers it over and mends it, as best it can, for a greater or shorter length of time; sometimes the instinct widens the crack, providing it with another orientation which causes the pieces to splinter, provoking thereby an accident in the decrepit state of the body. In L'Assomoir, for example, in the house of Gervaise, the alcoholic instinct comes to double the original defect of the crack. We leave aside for the moment the question of knowing whether there are any evolutive or ideal instincts capable of transforming the crack.
균열 주위에 무엇이 분포되어 있나요? 균열의 가장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졸라는 그것을 기질, 본능, "큰 식욕"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기질'이나 '본능'은 정신-생리학적 실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훨씬 더 풍부하고 구체적인 개념, 즉 "소설적" 개념입니다. 본능은 일반적으로 삶과 생존의 조건, 즉 역사적-사회적 환경(여기서는 제2제국)에서 결정된 일종의 삶을 보존하는 조건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바로 졸라의 부르주아들이 그들의 악덕, 관대함의 결여, 불명예를 미덕으로 쉽게 명명할 수 있는 이유이며,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종종 알코올 중독과 같은 '본능'으로 환원되어 그들의 삶의 역사적 조건과 역사적으로 결정된 삶을 견뎌내는 유일한 방법을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졸라의 '자연주의'는 언제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본능, 즉 식욕은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주어진 유리한 환경에서 신체가 스스로를 보존하는 방식을 표현하기도 하며, 이런 의미에서 본능은 그 자체로 활력과 건강입니다. 때로는 다른 신체를 파괴하더라도 환경이 제공하는 것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신체가 발명하는 삶의 유형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 본능은 모호한 힘입니다. 때때로 그것은 신체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불리한 환경에서 역사적으로 결정된 존재를 지탱할 수없는 삶의 종류를 표현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알코올 중독, 일탈, 질병, 심지어 노쇠도 본능입니다. 본능은 항상 삶의 방식을 영속화하려는 노력을 표현하는 한 보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방식과 본능 자체는 엄격한 의미에서 '보수적'이라는 단어만큼이나 파괴적일 수 있습니다. 본능은 퇴화, 갑작스러운 질병의 도래, 즉 건강 그 자체 못지않은 건강의 상실을 현시합니다. 어떤 형태로든 본능은 결코 균열과 혼동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본능은 균열과 엄격하면서도 가변적인 관계를 유지하는데, 때로는 신체의 건강 덕분에 균열을 덮고 최선을 다해 더 길거나 짧은 시간 동안 수선하고, 때로는 본능이 균열을 넓혀서 다른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조각들이 갈라지게 하여 신체의 쇠퇴한 상태에서 사고를 유발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L' Assomoir에서 Gervaise의 집에서 알코올 중독 본능은 균열의 원래 결함을 이중화합니다. 우리는 균열을 변화시킬 수있는 발전적이거나 이상적인 본능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잠시 제쳐두고 있습니다.
Through the crack, instincts seek the object which corresponds to them, in the histor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of their kind of life: wine, money, power, women. ... One of the feminine types preferred by Zola is the nervous woman, crushed under an abundance of black hair, passive, hidden to herself, someone who will unleash herself in the romantic encounter (such is the case with Thérèse in Thérèse Raquin, written before the Rougon series, and also with Séverine in La Bête humaine). A terrible encounter between nerves and blood, an encounter between nervous and sanguine temperaments reproduces the Rougon's origin. The encounter causes the crack to resonate. The characters who are not of the Rougon family (like Séverine, for example) may intervene as objects to which the instinct of a Rougon is fastened, but also as being themselves provided with instincts and temperament, and finally as accomplices or enemies who provide evidence of a secret crack affecting them and linking up with the other. The spider-like crack: in the Rougon-Macquart family, everything culminates with Nana, a healthy and nice girl basically, with a vigorous body, who makes herself into an object in order to fascinate the others and to communicate her crack or to reveal the crack of others -a foul germen. The privileged role of alcohol also belongs here: it is under cover of this "object" that the instinct brings about its most profound linkage with the crack itself.
균열을 통해 본능은 와인, 돈, 권력, 여성과 같은 종류의 삶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자신에게 해당하는 대상을 찾습니다 ... 졸라가 선호하는 여성 유형 중 하나는 신경질적인 여성으로, 검은 머리카락이 많고 수동적이며 자신에게 숨겨져 있으며 낭만적 인 만남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루곤 시리즈 이전에 쓰여진 테레즈 라캥의 테레즈와 라 베트 휴먼의 세베린의 경우와 같은 경우). 신경과 피의 끔찍한 만남, 신경질적인 기질과 낙천적인 기질의 만남은 루곤의 기원을 재현합니다. 그 만남으로 균열이 공명합니다. 예를 들어 세베린처럼 루곤 가문에 속하지 않는 인물은 루곤의 본능이 고착된 대상으로 개입하기도 하고, 그 자체로 본능과 기질을 지닌 존재로, 마지막으로 비밀스러운 균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증거를 제공하는 공범자나 적으로 개입하기도 합니다. 거미와 같은 균열: 루옹-마쿼트 가족에서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건강하고 착한 소녀이자 활기찬 몸을 가진 나나로 인해 절정에 달하는데, 나나는 다른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자신의 균열을 전달하거나 다른 사람의 균열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을 대상으로 삼는다. 술의 특권적인 역할도 여기에 속합니다. 본능이 균열 자체와 가장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은 이 '대상'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meeting of instinct and object forms a fixed idea, not a feeling. If Zola the novelist intervenes in his novels, it is primarily in order to say to his readers: look out, don't think that it is a question of feelings here. We know well the insistence with which Zola, in La Bête humaine as well as in Thérèse Raquin, explains that criminals have no remorse. And there is no love for lovers -except when the instinct is truly able "to patch over" (the crack) and to become evolutive. It is not a question of love or remorse, but of torsions and breakings or, on the contrary, of lulls and appeasements, in relations between temperaments which are always stretched out over the crack. Zola excels in the description of the brief calm coming before the grand decomposition ("it is now certain; there was a progressive disorganization, like a criminal infiltration . "). There are obviously several reasons in Zola's work for this refusal of feeling in the interest of the fixed idea. First, we must recall the style of the period and the importance of the physiological schema. "Physiology," since Balzac, had played the literary role that is today vested in psychoanalysis (the physiology of a country or region, of a profession, etc.). Moreover, it is true that, since Flaubert, feeling has been inseparable from a failure, a bankruptcy, or mystification, and that what the novel relates is the impotence of a character to constitute an inner life. In this sense, naturalism introduced into the novel three sorts of characters: the man marked by an inner bankruptcy, that is, the failure; the man living artificial lives, that is, the pervert; and the man possessed by rudimentary sensations and fixed ideas, that is, the beast. But in Zola's work, if the encounter of instinct and its object does not succeed in forming a feeling, it is always because it occurs over the crack, from one edge to the other. It is due to the existence of the crack, the great internal Void. The entire naturalism therefore acquires a new dimension.
본능과 대상의 만남은 감정이 아닌 고정된 관념을 형성합니다. 소설가 졸라가 자신의 소설에 개입하는 것은 주로 독자들에게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감정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는 졸라가 테레즈 라캥과 마찬가지로 <인간 짐승>에서 범죄자에게는 양심의 가책이 없다고 설명하는 주장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능이 진정으로 "균열을 메우고"(균열을) 진화할 수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연인에 대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랑이나 후회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균열 너머로 뻗어 있는 기질 사이의 관계에서 비틀림과 단절, 또는 반대로 소강과 회유의 문제입니다. 졸라는 거대한 붕괴 이전에 오는 짧은 평온에 대한 묘사에 탁월합니다 ("이제 확실합니다; 범죄 침입과 같은 점진적인 혼란이 있었습니다 . "). 졸라의 작품에서 고정된 관념을 위한 느낌을 거부하는 데에는 분명히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 시대의 양식과 생리적 도식의 중요성을 상기해야합니다. "발자크 이후 '생리학'은 오늘날 정신분석학에서 수행하는 문학적 역할(국가나 지역, 직업 등의 생리학)을 수행했다. 더욱이 플로베르 이래로 감정은 실패, 파산 또는 신비화와 분리될 수 없으며, 소설이 이야기하는 것은 내면의 삶을 구성하는 인물의 무력함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주의는 내적 파산으로 점철된 인간, 즉 실패자, 인위적인 삶을 사는 인간, 즉 일탈자, 미개한 감각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인간, 즉 야수라는 세 종류의 인물을 소설에 도입했다. 그러나 졸라의 작품에서 본능과 대상의 만남이 느낌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항상 한쪽 가장자리에서 다른 쪽 가장자리로 균열을 넘어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균열, 즉 내부의 거대한 공허의 존재 때문입니다. 따라서 전체적인 자연주의는 새로운 차원을 획득합니다.
In Zola, therefore, two unequal coexisting cycles interfere with each other: small heredity and grand heredity, a small historical heredity and a great epical heredity, a somatic heredity and a germinal heredity, a heredity of instincts and a heredity of the crack. No matter how strong or constant the connection between the two may be, they are not confused. The small heredity is the heredity of instincts, in the sense that the conditions or kinds of life led by the ancestors or parents may take root in the descendant-sometimes several generations later-and act in her as nature. A healthy foundation, for example, is rediscovered; alcoholic degradation is passed from one body to the other; or instinct-object syntheses are transmitted at the same time that lifestyles are reconstituted. Whatever leaps it may undertake, this heredity of instincts transmits something well-determined. It "reproduces" whatever it transmits; it is a heredity of the Same. But this is not at all the case with the other heredity -the heredity of the crack-for, as we have seen, the crack transmits nothing other than itself. It is not tied to a certain instinct, to an internal, organic determination, or to an external event that could fix an object. It transcends life-styles; it therefore runs its course in a continuous, imperceptible, and silent way, forming the complete unity of the Rougon-Macquart. The crack transmits only the crack. That which it transmits does not allow itself to be determined, being necessarily vague and diffuse. Transmitting only itself, it does not reproduce that which it transmits. It does not reproduce the "same." It reproduces nothing, being content to advance in silence and to follow the lines of least resistance. As the perpetual heredity of the Other, it always takes an oblique line, being ready to change directions and to alter its canvas.
따라서 졸라에게는 작은 유전과 큰 유전, 작은 역사적 유전과 거대한 서사적 유전, 육체적 유전과 배아적 유전, 본능의 유전과 균열의 유전이라는 두 가지 불균등한 공존의 순환이 서로 간섭합니다. 둘 사이의 연결이 아무리 강하거나 일정하더라도 혼동되지 않습니다. 작은 유전은 본능의 유전으로, 조상이나 부모가 이끈 삶의 조건이나 종류가 후손에게 뿌리를 내리고 때로는 몇 세대가 지난 후에도 본성처럼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본능의 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건강한 토대가 재발견되거나, 알코올 분해가 한 몸에서 다른 몸으로 전달되거나, 생활양식이 재구성되는 동시에 본능-객체 합성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본능의 유전은 어떤 도약이 있든 간에 잘 결정된 무언가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전달되는 모든 것을 "재생산"합니다. 그것은 동일성의 유전입니다. 그러나 다른 유전, 즉 균열의 유전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았 듯이 균열은 그 자체 외에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특정 본능, 내적, 유기적 결정 또는 대상을 고정시킬 수있는 외부 사건에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삶의 양식을 초월하여 지속적이고, 눈에 띄지 않으며, 조용한 방식으로 진행되어 루옹-마카르트의 완전한 통일성을 형성합니다. 균열은 균열만을 전달합니다. 그것이 전달하는 것은 반드시 모호하고 확산되어 그 자체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전달할 뿐, 전달되는 것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동일한 것"을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재생산하지 않으며, 침묵 속에서 전진하고 저항이 가장 적은 선을 따르는 것에 만족합니다. 타자의 영원한 유전으로서, 그것은 항상 방향을 바꾸고 캔버스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비스듬한 선을 취합니다.
Zola's scientific inspiration has often been noted. But what was the import of this inspiration which was derived from the medical research of his time? It bears precisely o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two heredities, which was elaborated in the contemporary medical thought: a homologous and well-determined heredity and a "dissimilar or transformational" heredity, with a diffuse character, which is defining a "neuropathological family." Now, this distinction is interesting because it easily replaces the dualism of the hereditary and the acquired, or even because it renders this dualism impossible. Indeed, the small homologous heredity of the instincts may very well transmit acquired characteristics. This may even be inevitable to the extent that the formation of the instinct is inseparable from historical and social conditions. As for the grand, dissimilar heredity, it has with the acquired characteristics an entirely different, though no less essential, relationship: it is a question here of a diffuse potentiality which is not actualized unless a transmissible acquired property, whether internal or external, were to give it some particular determination. In other words, if it is true that the instincts are formed and find their object only at the edge of the crack, the crack conversely pursues its course, spreads out its web, changes direction, and is actualized in each body in relation to the instincts which open a way for it, sometimes mending it a little, sometimes widening it, up to the final shattering-which is always assured by the work of the instincts. The correlation between the two orders is thus constant and reaches its highest point when the instinct has become alcoholic and the crack a definitive break. The two orders are tightly joined together, like a ring within a larger ring, but they are never confused.
졸라의 과학적 영감은 종종 언급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의학 연구로부터 얻은 이 영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현대 의학 사상에서 정교화된 두 가지 유전, 즉 상동적이고 잘 결정된 유전과 "신경 병리학적인 가족"을 정의하는 확산적 성격을 지닌 "이질적이거나 변형적인" 유전의 구별에 정확하게 부합합니다. 이러한 구분이 흥미로운 이유는 유전과 후천의 이원론을 쉽게 대체하거나 심지어 이러한 이원론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본능의 작은 상동 유전은 후천적 특성을 매우 잘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본능의 형성이 역사적, 사회적 조건과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불가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대하고 이질적인 유전에 관해서는, 그것은 후천적 특성과는 완전히 다른, 그러나 덜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여기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전이 가능한 후천적 특성이 어떤 특별한 결단을 내리지 않는 한 현실화되지 않는 확산 잠재성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본능이 형성되고 균열의 가장자리에서만 대상을 발견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균열은 반대로 그 길을 추구하고, 그물을 펼치고, 방향을 바꾸고, 길을 열어주는 본능과의 관계에서 각 신체에서 실현되며, 때로는 조금 수선하고 때로는 넓혀서 최종적으로 산산이 부서지기까지, 본능의 작용에 의해 항상 보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두 질서 사이의 상관관계는 일정하며, 본능이 알코올에 취해 균열이 결정적인 단절이 될 때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합니다. 두 질서는 큰 고리 속의 고리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결코 혼동되지 않습니다.
Now, if it is fair to note the influence of scientific and medical theories on Zola, how unfair would it be not to emphasize the transformation to which he submitted them, the way in which he recreated the notion of the two heredities, and the poetic force which he gave to this notion in order to make of it the new structure of the "familial romance." In this case, the novel integrates two basic elements which were previously foreign to it: Drama, with the historic heredity of instincts; and Epos, with the epical heredity of the crack. As they cross each other, they form the rhythm of the work, that is, they assure the distribution of sounds and silence. Zola's novels are filled with the sounds of the instincts, and the "big appetites" of the characters which form a prodigious din. As for the silence which runs from one novel to the other and beneath each novel, it essentially belongs to the crack; beneath the noise of the instincts, the crack silently extends and transmits itself.
이제 과학 및 의학 이론이 졸라에게 미친 영향에 주목하는 것이 공정하다면, 그가 그들에게 적용한 변형, 두 유전의 개념을 재창조 한 방식, "가족 로맨스"의 새로운 구조를 만들기 위해이 개념에 부여한 시적 힘을 강조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부당할까요? 이 경우 소설은 이전에는 이질적이었던 두 가지 기본 요소를 통합합니다: 본능의 역사적 유산을 지닌 드라마, 그리고 균열의 서사적 유산을 지닌 에포스가 그것입니다. 이 두 요소는 서로 교차하면서 작품의 리듬을 형성하고, 즉 소리와 침묵의 분포를 보장합니다. 졸라의 소설은 본능의 소리와 엄청난 소음을 형성하는 등장인물들의 '큰 식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 소설에서 다른 소설로, 그리고 각 소설 밑으로 흐르는 침묵은 본질적으로 균열에 속하며, 본능의 소음 아래에서 균열은 조용히 확장되고 전달됩니다.
The crack designates, and this emptiness is, Death -the death Instinct. The instincts may speak loud, make noise, or swarm, but they are unable to cover up this more profound silence, or hide that from which they come forth and into which they return: the death instinct, not merely one instinct among others, but the crack itself around which all of the instincts congregate. In his homage to Zola, at once profound and reticent, Céline finds Freudian tones to mark the universal pres-ence, beneath the noisy instincts, of the silent death instinct:
이 균열은 죽음, 즉 죽음의 본능을 가리키며, 이 공허함은 죽음입니다. 본능은 큰 소리로 말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군집을 이루지만 이보다 더 심오한 침묵을 덮을 수도 없고, 본능이 나오고 본능이 돌아가는 곳, 즉 죽음의 본능을 숨길 수도 없습니다. 죽음 본능은 단순히 하나의 본능이 아니라 모든 본능이 모이는 균열 그 자체입니다. 심오하면서도 과묵한 졸라에 대한 오마주에서 셀린느는 시끄러운 본능의 밑바닥에 조용한 죽음의 본능이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프로이트의 음색을 발견합니다:
The sadism which is today everywhere springs from a desire for nothingness which is established deep within man, especially in the mass of men--a sort of amorous, almost irresistible and unanimous impatience for death. ... Our words reach the instincts and sometimes touch them; but at the same time we learn that at this point and forever, our power comes to a halt. ... In the play of man, the death Instinct, the silent instinct, is decidedly well placed, perhaps alongside egoism.
오늘날 어디에나 존재하는 가학성은 인간 내면, 특히 남성 집단에 깊이 자리 잡은 허무에 대한 욕망, 즉 죽음에 대한 일종의 사랑스럽고 거의 거부할 수 없는 만장일치의 조급함에서 비롯됩니다. ... 우리의 말은 본능에 도달하고 때로는 본능을 건드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지점에서 우리의 힘은 영원히 멈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인간의 놀이에서 죽음의 본능, 침묵의 본능은 아마도 에고이즘과 함께 결정적으로 잘 배치되어 있습니다.
But whatever Céline thinks of it, Zola had already discovered how the big appetites gravitate around the death instinct; how they swarm through a crack which is the crack of the death instinct; how death appears beneath every fixed idea; how the death instinct comes to be recognized beneath every instinct; how it alone constitutes the grand heredity of the crack. Our words reach only as far as the instincts, but it is from the other agency, that is, from the death Instinct, that they receive their sense, nonsense, and combinations thereof. Underlying every history of the instincts is the epos of death. We could say initially that the instincts cover over death and cause it to retreat; but this is temporary, and even their noise is fed by death. La Bête humaine, with regard to Roubaud, states that "... in the troubled darkness of his flesh, in his desire that had been sullied and was bleeding, there suddenly rose up the necessity of death." Misard's fixed idea is the discovery of his wife's savings; but he is unable to pursue this idea without the murder of his wife and the demolition of the house in a silent face-to-face struggle.
그러나 셀린이 어떻게 생각하든 졸라는 이미 큰 식욕들이 어떻게 죽음 본능을 중심으로 모여드는지, 그 식욕들이 어떻게 죽음 본능의 균열인 균열을 통해 몰려드는지, 모든 고정된 관념 밑에 죽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모든 본능 밑에 죽음 본능이 어떻게 인식되는지, 그것만으로도 균열의 거대한 유전을 구성하는지를 발견했다. 우리의 말은 본능까지만 도달하지만, 다른 대리자, 즉 죽음의 본능으로부터 그들의 의미와 넌센스, 그리고 그것들의 조합을 받아들입니다. 본능의 모든 역사의 근저에는 죽음의 에포스가 깔려 있습니다. 처음에는 본능이 죽음을 덮고 죽음을 퇴각시킨다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본능의 소음조차도 죽음에 의해 공급된다. 라 베트 휴메인은 루보에 대해 "... 그의 육체의 괴로운 어둠 속에서, 더럽혀져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욕망 속에서 갑자기 죽음의 필요성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미사르의 고정된 생각은 아내의 은닉 재산을 찾아내는 것이지만, 그는 아내를 살해하고 집을 철거하는 조용한 면대면의 투쟁 없이는 이 생각을 추구할 수 없다.
In La Bête humaine, the essential is the death instinct of the main character, the cerebral crack of Jacques Lanier, the train conductor. As a young man, he has a clear premonition of the manner in which the death instinct is disguised beneath every appetite, the Idea of death beneath every fixed idea, the grand heredity beneath the small, which is held at bay -women, at first, but also wine, money- that is, ambitions which he could quite legitimately have. He has given up the instincts; his sole object is the machine. He knows that the crack brings death into every instinct, that it pursues its work in and through the instincts; he knows that at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every instinct there is a question of killing, and perhaps of being killed as well. But the silence which Lantier created within himself, in order to oppose it to the deeper silence of the crack, is suddenly interrupted: Lantier has seen in the flash of an instant a murder committed on a passing train and has seen the victim thrown onto the track; he has guessed the assassins, Roubaud and his wife, Séverine. And as he begins to love Séverine and to discover the realm of the instinct, death spreads out within him -for this love has come from death and must return to death.
라 베트 휴메인에서 핵심은 주인공의 죽음의 본능, 즉 열차 차장 자크 라니에의 대뇌 균열입니다. 젊은 시절, 그는 죽음의 본능이 모든 식욕, 모든 고정 관념 밑에 숨어 있는 죽음의 관념, 작은 것 밑에 숨어 억압되어 있는 거대한 유전, 즉 처음에는 여자, 와인, 돈, 즉 그가 정당하게 가질 수 있는 야망으로 위장하는 방식에 대해 분명한 예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본능을 포기하고 오직 기계만이 그의 유일한 대상입니다. 그는 균열이 모든 본능에 죽음을 가져오고, 본능 안에서 그리고 본능을 통해 그 일을 추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모든 본능의 시작과 끝에는 죽임에 대한, 그리고 아마도 죽임을 당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균열의 더 깊은 침묵에 대항하기 위해 랑티에가 스스로 만들어낸 침묵은 갑자기 중단됩니다: 랑티에는 지나가는 기차 안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순식간에 목격하고 희생자가 선로에 던져진 것을 보고 암살자 루보와 그의 아내 세베린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세베린을 사랑하고 본능의 영역을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죽음에서 온 사랑은 반드시 죽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죽음이 그의 내면에 퍼져나갑니다.
Beginning with the crime that the Roubauds committed, an entire system of identifications and repetitions is developed which forms the rhythm of the book. Initially, Lantier identifies immediately with the criminal: "The other, the man who held the knife in his fist, had dared! Oh to have the nerve, satisfy himself and thrust the knife in! It was he that the desire had tortured for ten years!" Roubaud killed the President out of jealousy, having understood that the latter had raped Séverine when she was a child and made him marry a tainted woman. But after the crime he identifies in a certain manner with the President. It is his turn to give Lantier his wife tainted and criminal. Lantier begins to love Séverine, because she has participated in the crime: "It was as though she were the dream which had harbored within his flesh." At this point, the triple calm makes its appearance: the calm of torpor falling over the marriage of the Roubauds; the calmness of Séverine, rediscovering her innocence in her love for Lantier; and especially, the calmness of Lantier, rediscovering with Séverine the sphere of instincts and imagining that he has filled in the crack; he believes that he will never desire to kill Séverine -the one who killed ("to possess her was to possess a powerful charm, and she had cured him ..."). But there is already a triple disorganization coming to take the place of the calm, and following unequal cadences. Roubaud, after the crime, has replaced Séverine with alcohol as the object of his instinct. Séverine has found an instinctive love which gives her innocence; but she cannot help getting it tangled up with the need for an explicit confession to her lover who has nonetheless guessed everything. And, in the scene in which Séverine had been waiting for Lantier, just as Roubaud had been waiting for her before the crime, she tells her lover the whole story; she details her confession and thrusts her desire in the remembrance of death ("the thrill of desire lost itself in another shudder, that of death which had come back to her"). Freely, she confesses the crime to Lantier, just as, under constraint, she had confessed to Roubaud her relations with the President, provoking thereby the crime. She is no longer able to conjure away and to divert the image of death which she caused to raise, except by projecting it onto Roubaud and by urging Lantier to kill him ("(Lantier) saw himself with the knife in his hand, plunging it into Roubaud's throat as Roubaud had done to the throat of the President . . .").
루보 부부가 저지른 범죄를 시작으로 책의 리듬을 형성하는 식별과 반복의 전체 시스템이 개발됩니다. 처음에 랑티에는 범죄자와 곧바로 동일시합니다: "다른 한 명, 주먹에 칼을 쥐고 있던 남자는 감히! 오, 배짱을 가지고 자신을 만족시키고 칼을 밀어 넣는 것! 10년 동안 욕망이 고통스럽게 괴롭힌 것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루보는 대통령이 어렸을 때 세베린을 강간하고 그를 오염 된 여자와 결혼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고 질투심에서 대통령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범죄 후 그는 대통령과 특정 방식으로 동일시합니다. 이제 랑티에에게 오염되고 범죄자 인 아내를 줄 차례입니다. 랑티에는 범죄에 가담한 세베린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그녀는 마치 그의 육체 속에 숨어 있던 꿈과 같았다." 이 시점에서 세 가지 평온이 나타난다 : 루보 부부의 결혼 생활에 떨어지는 무력감의 평온; 랑티에에 대한 사랑에서 그녀의 순수함을 재발견하는 세베린의 평온; 특히 세베린과 함께 본능의 영역을 재발견하고 균열을 채웠다고 상상하는 랑티에의 평온; 그는 결코 살인자 ( "그녀를 소유하는 것은 강력한 매력을 소유하는 것이었고 그녀는 그를 치료했다 ...") 세베린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믿습니다. .."). 그러나 이미 평온함을 대신하고 불균등한 완급에 따라 세 가지 무질서가 오고 있습니다. 루보는 범죄 후 세베린을 본능의 대상으로서 알코올로 대체했습니다. 세베린은 자신에게 순수함을 주는 본능적인 사랑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는 연인에게 노골적인 고백을 해야 하는 상황과 얽히게 된다. 그리고 범행 전 루보가 랑티에를 기다렸던 것처럼 세베린이 랑티에를 기다리던 장면에서 그녀는 연인에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죽음을 떠올리며 욕망을 밀어붙인다("욕망의 전율은 또 다른 전율, 그녀에게 다시 찾아온 죽음의 전율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구속 상태에서 루보에게 대통령과의 관계를 자백하고 그로 인해 범죄를 유발했던 것처럼 랑티에에게 자유롭게 범죄를 자백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이 불러 일으킨 죽음의 이미지를 루보에게 투사하고 랑티에에게 그를 죽이라고 촉구하는 것 외에는 더 이상 죽음의 이미지를 없애거나 방향을 전환 할 수 없습니다 ( "(랑티에는) 루보가 대통령의 목에 한 것처럼 칼을 손에 들고 루보의 목에 칼을 꽂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 .").
As for Lantier, Séverine's confession did not tell him anything new, yet it terrified him. She should not have spoken. The woman he loved, and who was "sacred" to him to the extent that she enveloped within herself the image of death, lost her power as she confessed, and designated another possible victim. Lantier does not succeed in killing Roubaud. He knows that he will be able to kill only the object of his instinct. This paradoxical situation in which those about him (Roubaud, Séverine, Misard, Flore) kill for reasons drawn from other in-stincts, but Lantier (who nevertheless bears the pure death instinct) cannot kill -can be resolved only through the murder of Séverine. Lantier learns that the voice of the instincts had deceived him, that his "instinctive" love for Séverine had only seemed to fill in the crack, and that the noise produced by the instincts covered over the silent Instinct of death only for a moment. He learns that it is Séverine whom he must kill in order for the small heredity to link up with the grand, and for all the instincts to enter the crack: To have her dead, like the earth!; "the same kind of stab as for President Grandmorin, in the same place, with the same savagery ... the two murders were coupled together. Was not one the logical outcome of the other?» Séverine senses a danger all around her, but she interprets it as a barrier between herself and Lantier, due to Roubaud's existence. It is, however, not a barrier between the two of them, but the spider -like crack in Lantier's brain- its silent working. After murdering Séverine, Lantier will have no remorse: always this health, this sound body -"He had never felt better, had no remorse and seemed relieved of a burden, happy and at peace"; "...ever since the murder he had felt calm and balanced and had enjoyed perfect health." But this health is even more ludicrous than if the body had fallen ill, undermined by alcohol or by another instinct. This peaceful, healthy body is no more than a terrain ripe for the crack and food for the spider. He will have to kill other women. With all of this health, "he had finished living, there was no longer anything before him except this profound night, a limitless despair in which he fled." And when his old friend, Pecqueux, attempts to throw him off the train, even his bodily protest, his reflexes, his instinct for preservation, his struggle against Pecqueux, are ludicrous reactions which offer Lantier up to the great Instinct all the more clearly than if he had committed suicide, and carry him away, along with Pecqueux, toward a common death.
랑티에에게 세베린의 고백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지만 그는 두려움에 떨었다. 그녀는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가 사랑했고, 죽음의 이미지를 자신 안에 감싸고 있을 정도로 그에게 '성스러운' 여인이 자백을 하면서 힘을 잃고 또 다른 희생자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랑티에는 루보를 죽이는 데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는 자신이 본능의 대상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변 사람들(루보, 세베린, 미사르, 플로르)은 다른 본능에서 비롯된 이유로 살인을 저지르지만, 순수한 죽음의 본능을 지닌 랑티에는 살인을 할 수 없는 이 역설적인 상황은 세베린의 살인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랑티에는 본능의 목소리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 세베린에 대한 '본능적' 사랑이 균열을 메우는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것, 본능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조용한 죽음의 본능을 아주 잠깐 동안만 덮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작은 유전이 큰 유전과 연결되고 모든 본능이 균열로 들어가기 위해 죽여야 할 사람이 세버린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지처럼 그녀를 죽이기 위해! "그랑 모린 대통령과 같은 종류의 찌르기, 같은 장소, 같은 야만성 ... 두 살인은 함께 결합되었습니다. 하나는 다른 하나의 논리적 결과가 아니었을까요?" 세베린은 사방에서 위험을 감지하지만 루보의 존재로 인해 자신과 랑티에 사이에 장벽이 생겼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사람 사이의 장벽이 아니라 랑티에의 뇌에 있는 거미줄 같은 균열이 소리 없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세베린을 살해한 후 랑티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는 이보다 더 기분이 좋았던 적이 없었고, 양심의 가책도 없었으며, 짐을 덜고 행복하고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살인 이후 그는 침착하고 균형 잡힌 느낌을 받았으며 완벽한 건강을 누리고 있었다."라고 랑티에는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건강은 술이나 다른 본능에 의해 몸이 아프거나 약해졌을 때보다 훨씬 더 우스꽝 스럽습니다. 이 평화롭고 건강한 몸은 거미의 먹이가 될 수 있고 균열을 위해 무르익은 영토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다른 여성들을 죽여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삶을 끝냈고, 이 심오한 밤, 그가 도망친 무한한 절망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그 앞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랜 친구인 페쿠가 랑티에를 기차 밖으로 던지려 할 때, 그의 몸의 저항, 반사 신경, 보존 본능, 페쿠에 대항하는 몸부림조차도 우스꽝스러운 반응이었으며, 랑티에는 자살한 것보다 더 분명하게 위대한 본능에 도달하고 페쿠와 함께 공동의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The force of Zola's work is in scenes with different partners which echo one another. But what is it that assures the distribution of scenes, the range of characters, and the logic of the Instinct? The answer is clearly the train. The novel opens with a sort of ballet of engines in the station. In particular, the fleeting sight of the President's murder is, in the case of Lantier, preceded, glimpsed at, and followed by, passing trains which assume diverse functions (ch. 2). The train appears first as that which rushes by, a mobile spectacle linking the whole earth and men of every origin or every country: yet it is already the spectacle spread out before a dying woman -an immobile crossing guard being murdered slowly by her husband. Then a second train appears, seemingly this time forming a giant body, tracing a crack on it, and communicating this crack to the earth and to the houses -and "on either side ... eternal passion and eternal crime." A third and fourth train show the elements of the track: deep trenches, embankments-barricades, and tunnels. A fifth, with its lights and headlamps, carries crime within it, since the Roubauds are committing their murder inside it. Finally, a sixth train links together the forces of the unconscious, indifference, and menace, grazing on one side the head of the murdered man and on the other the body of the voyeur -a pure death Instinct, blind and deaf. However clamorous the train may be, it is deaf -and in this way, silent.
졸라의 작품의 힘은 서로 다른 파트너가 등장하는 장면이 서로 울려 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장면의 분배, 캐릭터의 범위, 본능의 논리를 보장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답은 분명히 기차입니다. 소설은 역에서 펼쳐지는 일종의 엔진들의 춤으로 시작됩니다. 특히 랑티에의 경우, 대통령이 살해당하는 찰나의 광경은 다양한 기능을 암시하는 기차들이 앞뒤로 지나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2장). 기차는 먼저 대지 전체와 모든 출신 또는 모든 국가의 인간을 연결하는 유동적 스펙터클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이미 죽어가는 여성, 즉 남편에게 천천히 살해당하는 건널목 경비원 앞에 펼쳐진 스펙터클이다. 그런 다음 두 번째 기차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거대한 몸체를 형성하고 그 위에 균열을 만들어 이 균열을 대지와 집들, 그리고 "양쪽에서 ... 영원한 정열과 영원한 범죄"에 전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열차는 깊은 참호, 제방-바리케이드, 터널 등 철로의 구성 요소를 보여줍니다. 다섯 번째 열차는 전조등과 헤드램프가 달린 열차로, 루보 부부가 그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열차는 무의식, 무관심, 위협의 힘을 하나로 연결하여 한쪽에는 살해당한 남자의 머리가, 다른 한쪽에는 눈과 귀를 잃은 순수한 죽음의 본능인 관음증의 시체가 스쳐 지나갑니다. 기차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그것은 귀머거리이며, 따라서 침묵합니다.
The real meaning of the train appears with Lison, the locomotive driven by Lantier. Initially, it had taken the place of all the instinctual objects that Lanier had renounced. It is itself presented as having an instinct and a temperament: " ..she needed too much oiling, the cylinders in particular consumed quite unreasonable quantities of oil, an insatiable thirst, a real debauch." Now, what applies to the locomotive applies also to humanity, where the din of the instincts refers to a secret crack -the human Beast. In the chapter which tells of the trip undertaken during the snowstorm, Lison plunges headlong over the track as if into a narrow crack in which it can no longer advance. And when it finally frees itself, it is the engine that has cracked, "stricken somewhere by a mortal blow." The journey dug out the crack that the instinct -the appetite for oil- had concealed. Beyond the lost instinct, the machine is revealed more and more as the image of death or as the pure death Instinct. And when Flore provokes the derailment, it is no longer clear whether it is the machine that is assassinated or whether it is the machine that kills. And in the final scene of the novel, the new machine, without a conductor, carries its cargo of drunken, singing soldiers toward death.
기차의 진정한 의미는 라니에가 운전하는 기관차 리슨과 함께 등장합니다. 처음에 기차는 라니에가 포기한 모든 본능적 대상을 대신했습니다. 그 자체로 본능과 기질을 가진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녀는 너무 많은 기름칠이 필요했고, 특히 실린더는 상당히 불합리한 양의 기름을 소비했으며, 만족할 줄 모르는 갈증과 진정한 방탕이었습니다." 이제 기관차에 적용되는 것은 인간에게도 적용되는데, 여기서 본능의 소리는 비밀스러운 균열, 즉 인간 짐승을 가리킵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동안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는 챕터에서 리슨은 마치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좁은 틈새로 뛰어들 듯 선로 위로 뛰어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유로워졌을 때, "어딘가에서 필멸의 타격을 받아" 금이 간 것은 엔진이었습니다. 이 여정은 본능, 즉 석유에 대한 욕구가 감추고 있던 균열을 파헤쳤습니다. 잃어버린 본능을 넘어 기계는 점점 더 죽음의 이미지 또는 순수한 죽음의 본능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플로어가 탈선을 일으켰을 때, 암살당하는 것이 기계인지 죽이는 것이 기계인지 더 이상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 새로운 기계는 지휘자 없이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는 병사들을 싣고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The locomotive is not an object, but an epic symbol, a great Phantasm, like the ones which often appear in Zola's work, reflecting all of the themes and situations of the book. In all of the Rougon-Macquart novels there is an enormous fantasized object that plays the roles of place, witness, and agent. The epic character of Zola's genius has often been emphasized, visible as it is in the structure of the work and in the succession of planes, each one of which exhausts a theme. This is evident if one compares La Bête humaine with Thérèse Raquin, a novel preceding the Rougon-Macquart series. The two books share many similarities: the murder which ties the couple; the progression of death and the process of disorganization; the resemblance of Thérèse and Séverine; and the absence of remorse or the denial of interiority. But Thérèse Raquin is the tragic version, whereas La Bête Humaine is the epic version. What really takes center stage in Thérèse Raquin is instinct, temperament, and the opposition of the temperaments of Thérèse and Laurent. And if there is a transcendence, it is only that of a judge or of an inexorable witness who symbolizes the tragic destiny. This is why the role of the symbol or of the tragic god is held by Madame Raquin, the mute and paralyzed mother of the murder victim, present throughout the decomposition of the lovers. The drama, the adventure of the instincts, is reflected only in the logos represented by the muteness of the old woman and by her expressive fixity. In the care lavished upon her by Laurent and the theatrical declarations made by Thérèse on her behalf, there is a tragic intensity which has rarely been equalled. But to be precise, this is only the tragic prefiguration of La Bête humaine. In Thérèse Raquin, Zola does not yet make use of the epic method which animates the Rougon-Macquart enterprise.
기관차는 단순한 대상이 아니라 졸라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서사적 상징이자 위대한 환상으로, 작품의 모든 주제와 상황을 반영합니다. 루곤 마카르의 모든 소설에는 장소, 목격자, 대리인 역할을 하는 거대한 환상적 대상이 등장합니다. 졸라의 천재적인 서사적 캐릭터는 종종 강조되어 왔으며, 작품의 구조와 각각의 주제를 소진시키는 연속적인 플롯에서 그 자체로 가시화되었습니다. 이는 『인간 짐승』과 루옹-마카르 시리즈 이전의 소설인 『테레즈 라캥』을 비교하면 분명해집니다. 두 책은 부부를 묶는 살인 사건, 죽음의 진행과 해체 과정, 테레즈와 세베린의 닮은꼴, 양심의 가책이 없거나 내면을 부정한다는 점 등 많은 유사성을 공유합니다. 하지만 테레즈 라캥이 비극적인 버전이라면 라 베트 휴메인은 서사적인 버전입니다. 테레즈 라캥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본능과 기질, 그리고 테레즈와 로랑의 상반된 기질입니다. 그리고 초월성이 있다면 그것은 비극적 운명을 상징하는 판사 또는 냉혹한 목격자의 초월성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살인 피해자의 벙어리이자 마비된 어머니인 마담 라캥이 연인들의 해체 내내 상징 또는 비극적 인 신의 역할로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드라마, 본능들의 모험은 노파의 침묵과 그녀의 표현적인 고정성으로 대표되는 로고스에만 반영됩니다. 그녀에 대한 로랑의 아낌없는 보살핌과 테레즈가 그녀를 대신하여 한 연극적 선언에는 거의 평준화될 수 없는 비극적 강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인간 짐승>의 비극적 전조일 뿐입니다. 테레즈 라캥에서 졸라는 루옹-마콰르 사업을 움직이는 서사적 방법을 아직 사용하지 않습니다.
What is essential in the epic is a double register in which the gods actively play out, in their own way and on another plane, the adventure of men and of their instincts. The drama in this case is reflected in an epos -the small genealogy is reflected in a grand genealogy, the small heredity in a big heredity, and a small maneuver in a large maneuver. All sorts of consequences follow from this: the pagan character of the epic; the opposition between epic and tragic destiny; the open space of the epos as opposed to the closed space of tragedy; and especially, the difference of the symbol in the epic and the tragic. In La Bête humaine, it is no longer a mere witness or a judge, but rather an agent or a field of action (the train), which plays the role of the symbol with respect to the story and enacts the large maneuver. It traces therefore an open space on the scale of a nation and a civilization, in contrast to the closed space of Thérèse Raquin, which is dominated solely by the old woman's gaze. "So many men and women were rushing past in the thunder of trains ... It was a fact that all the world went by, . .. But they went by in a flash and she was never quite sure she really had seen them." The double register, in La Bête humaine, consists of noisy instincts and the crack -the silent death Instinct. As a result, everything that happens occurs on two levels: the levels of love and death, of soma and germen, of the two heredities. The story is duplicated by an epos. The instincts or temperaments no longer occupy the essential position. They swarm about and within the train, but the train itself is the epic representation of the death Instinct. Civilization is evaluated from two perspectives,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instincts which it determines and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crack which determines it.
서사시에서 필수적인 것은 신들이 자신의 방식과 다른 차원에서 인간과 본능의 모험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이중 등록입니다. 이 경우 드라마는 에포스에 반영됩니다. 작은 계보가 큰 계보에 반영되고, 작은 유전이 큰 유전에 반영되고, 작은 책략이 큰 책략에 반영됩니다. 서사시의 이교도적 성격, 서사적 운명과 비극적 운명의 대립, 비극의 닫힌 공간과 대비되는 에포스의 열린 공간, 특히 서사시와 비극의 상징의 차이 등 여러 가지 결과가 뒤따릅니다. 라 베트 휴메인」에서 기차는 더 이상 단순한 목격자나 심판자가 아니라, 이야기와 관련하여 상징의 역할을 하고 큰 작전을 실행하는 주체 또는 행동의 장(기차)입니다. 따라서 이는 노파의 시선만이 지배하는 테레즈 라캥의 폐쇄적인 공간과는 대조적으로 국가와 문명 규모의 열린 공간을 추적합니다. "수많은 남녀가 기차의 굉음 속에서 서둘러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세상이 지나간 것은 사실이었지만 ... 하지만 그들은 순식간에 지나갔고 그녀는 자신이 정말 그들을 보았는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라 베트 휴메인에서 이중 음계는 시끄러운 본능과 균열, 즉 조용한 죽음의 본능으로 구성됩니다. 결과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사랑과 죽음, 신체와 세균, 유전의 두 가지 수준, 즉 두 가지 층위에서 일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에포스에 의해 복제됩니다. 본능이나 기질은 더 이상 본질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차 안팎으로 몰려다니지만 기차 자체가 죽음의 본능을 서사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문명은 두 가지 관점, 즉 문명을 결정하는 본능의 관점과 문명을 결정짓는 균열의 관점에서 평가됩니다.
In the world of his time, Zola discovered the possibility of restoring the epic. Filth as an element of his literature -"putrid literature"- is the history of the instinct against the background of death. The crack is the epic god in the history of the instincts and the condition that renders this history possible. In response to those who accuse him of exaggeration, the writer has no logos, but only an epos, which states that one can never go too far in the description of decomposition, since it is necessary to go as far as the crack leads. Could it be the case that the death Instinct, by going as far as possible, would turn back on itself? Is it not perhaps the case that the crack, which is only apparently and for a short time filled over by the big appetites, transcends itself in the direction it itself created? Is it possible, since it absorbs every instinct, that it could also enact the transmutation of the instincts, turning death against itself? Would it not thereby create instincts which would be evolutive rather than alcoholic, erotic, or financial, that is, either conserving or destroying? Zola's final optimism, his rose-colored novels among the black, have frequently been noted. It would be a mistake, however, to interpret them by invoking some sort of alternation; in fact, Zola's optimistic literature is not anything other than his putrid literature. It is in one and the same movement -the movement of the epic- that the basest instincts are reflected in the terrible death Instinct, but also that the death Instinct is reflected inside an open space, perhaps even against itself. What Zola's socialist optimism means is that the proletariat already makes its way through the crack. The train as an epic symbol, with the instincts it transports and the death Instinct it represents, is always endowed with a future. The final sentences of La Bête humaine are also a hymn to the future -Pecqueux and Lantier are thrown off the train, as the deaf and blind machine carries the soldiers, "already silly with fatigue, drunk and bawling," toward death. It is as if the crack runs through and alienates thought in order to be also the possibility of thought, in other words, that from the vantage point of which thought is developed and recovered. It is the obstacle to thought, but also the abode and power of thought its field and agent. Le Docteur Pascal, the final novel of the series, shows this epic point of the turning back of death upon itself, of the transmutation of instincts and of the idealization of the crack, in the pure element of "scientific" and "progressivist" thought wherein the genealogical tree of the Rougon-Macquart burns.
졸라는 당시의 세계에서 서사시를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그의 문학의 요소인 오물, 즉 '썩은 문학'은 죽음이라는 배경에 대항하는 본능의 역사입니다. 균열은 본능들의 역사에서 서사시적 신이며, 이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과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에 대해 작가는 로고스가 없으며 단지 균열이 이끄는 곳까지 갈 필요가 있기 때문에 분해에 대한 설명에서 너무 멀리 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에포스(서사시)만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의 본능이 가능한 한 멀리 나아감으로써 스스로를 되돌릴 수 있는 것일까요? 큰 식욕에 의해 겉으로만, 그리고 잠시 동안만 채워진 균열이 스스로 만든 방향으로 스스로 초월하는 것은 아닐까요? 모든 본능을 흡수하기 때문에 본능의 변형을 일으켜 죽음을 스스로에게 대항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럼으로써 알코올 중독, 에로틱, 금전적 본능이 아닌 진화적 본능, 즉 보존적이거나 파괴적인 본능을 창조할 수 있지 않을까? 졸라의 마지막 낙관주의, 검은색 속의 장미빛 소설은 자주 언급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졸라의 낙관주의 문학은 사실 그의 부패한 문학과는 다른 것이 아니며, 어떤 종류의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실수입니다.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 끔찍한 죽음의 본능에 반영되는 것은 하나의 동일한 운동, 즉 서사시의 운동이며, 또한 그 죽음의 본능이 열린 공간 안에서,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해 반영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졸라의 사회주의적 낙관주의가 의미하는 바는 프롤레타리아가 이미 그 틈새를 뚫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차가 운반하는 본능과 죽음의 본능을 상징하는 서사적 상징으로서의 기차에는 항상 미래가 부여됩니다. 페퀘와 랑티에가 기차에서 내던져지고, 귀먹고 눈먼 기계가 "이미 피로에 지쳐 술에 취해 울부짖는" 병사들을 태우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장면은 미래를 향한 찬가이기도 합니다. 마치 균열이 사유의 가능성, 다시 말해 사유가 발전하고 회복되는 유리한 지점에서 사유를 관통하고 소외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사유의 장애물인 동시에 사유의 거처이자 힘이며, 그것의 장이자 대리인이기도 합니다. 이 시리즈의 마지막 소설인 『파스칼의 의사』는 루옹-마카르의 족보가 불타고 있는 '과학적', '진보주의적' 사고의 순수한 요소 속에서 죽음을 스스로 되돌리는 것, 본능의 변형, 균열의 이상화라는 이 서사적 지점을 보여줍니다.
다시 계열 27 - 구강성
동적 발생의 문제: 심층에서 표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