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수의 노트 3-3


2023. 12. 18. 20:21


안티 오이디푸스




1장 - 욕망 기계들

1. 욕망적 생산

분열자의 산책

그것(c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 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le ca)라고 불러 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그 나름의 짝찟기들, 그 나름의 연결들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기관-기계가 원천-기계로 가지를 뻗는다. 한 기계는 흐름을 방출하고, 이를 다른 기계가 절단한다. 젖가슴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고, 입은 이 기계에 짝지어진 기계이다. 거식증의 입은 먹는 기계, 항문 기계, 말하는 기계, 호흡 기계 사이에서 주저한다(천식의 발작). 바로 이렇게 모두는 임시변통 재주꾼이다. 각자 자신의 작은 기계들이 있다. 에너지-기계에 대해 기관-기계, 언제나 흐름들과 절단들. 법원장 슈레버는 엉덩이에 태양광선들을 지니고 있다. 태양 항문, 그리고 그것이 작동한다는 건 틀림없어라. 법원장 슈레버는 뭔가를 느끼고 뭔가를 생산하며, 또 그것을 이론으로 만들 수 있다. 뭔가 생산된다. 은유들 말고, 기계의 결과들이.
분열자의 산책. 이것은 소파에 누운 신경증자보다 나은 모델이다. 약간의 외기, 바깥과의 관계. 가령 뷔히너가 재구성한 렌츠의 산책. 이때의 렌츠는 그의 선한 목사 집에 있을 대와는 전혀 다르다. 이 목사는 종교의 신과 관련해서, 부모와 관련해서 렌츠의 사회적 위치를 억지로 지정한다. 반면 산책할 때 렌츠는 다른 신들과 함께 또는 전혀 신 없이, 가족 없이, 부모 없이, 자연과 함께 산속에, 눈 속에 있다. <아버진 뭘 바라지? 아버지가 내게 더 좋은 걸 줄 수 있을 까? 불가능해. 날 평화롭게 내버려 둬.> 모든 것은 기계를 이룬다. 별들이나 무지개 같은 천상 기계들, 알프스 기계들, 이것들은 렌츠의 몸의 기계들과 짝짓는다. 기계들의 끊임없는 소음. <온갖 형태의 깊은 삶과 접촉하는 것, 돌들, 금속들, 물, 식물들과 영혼을 교감하는 것, 달이 차고 기욺에 따라 꽃들이 공기를 빨아들이듯 꿈에 잠겨 자연의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것, 렌츠는 이런 것들이 무한한 지복의 느낌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나의 엽록소 기계 내지 광합성 기계이기, 또는 적어도 이와 유사한 기계들 속에 자기 몸을 하나의 부품으로 슬며시 밀어 넣기. 렌츠는 인간과 자연의 구별보다 앞서, 이 구별이 설정한 모든 좌표보다 앞서 자리해 있다. 그는 자연을 자연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산과정으로 산다. 더 이상 인간도 자연도 없다. 오로지 하나 속에서 다른 하나를 생산하고 기계들을 짝짓는 과정만이 있다. 도처에 생산적 즉 욕망적 기계들, 분열증적 기계들, 유적 삶 전체로다. 자아와 비-자아, 외부와 내부의 구별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자연과 산업

분열자의 산책 속편. 베케트의 인물들이 외출하기로 결심하는 때, 우선 이들의 다양한 거동 자체를 하나의 정교한 기계라고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 자전거. '자전거-경적' 기계는 '어머니-항문' 기계와 어떤 관계일까? <자전거와 경적에 대해 말하는 건 얼마나 편안한가. 불행히도, 중요한 건 이것들이 아니라, 내 기억이 옳다면, 자기 엉덩이 구멍으로 날 세상에 낳아 준 여자이다.> 사람들은 흔히 오이디푸스, 그건 다루기 쉬운 거라고, 주어져 있는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오이디푸스는 욕망 기계들의 환상적 탄압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 왜, 어떤 목적으로? 거기에 굴복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고 바람직할까? 그리고 뭘 이용해 그렇게 하는 걸까?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 무엇을 넣을 거며, 무엇으로 그걸 형성할까? 자전거 경적과 내 어머니의 엉덩이만 있으면 만사 땡일까? 더 중요한 물음들이 있지 않을까? 하나의 결과가 주어진다면, 그 결과를 잘 생산할 수 있는 건 어떤 기계일까? 또한 하나의 기계가 주어진다면, 그걸 뭐에 써먹을 수 있을까? 가령 식탁 나이프 받침에 대한 질서정연한 설명서 앞에서, 그것이 어떤 용도일지 짐작해 보라. 또는 다음과 같은 기계가 잇다. 내 외투 오른쪽 주머니에 돌 여섯 개(공급용 주머니), 내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돌 다섯 개, 내 바지 왼쪽 주머니에 돌 다섯 개(전달용 주머니들), 다른 돌들이 지나감에 따라 이미 사용된 돌들을 받아들일 외투의 마지막 주머니. 이렇게 형성된 완벽한 기계 앞에서, 입 자신도 돌들을 빨아들이는 기계로 삽입되는 이 분배 회로의 결과가 뭘까? 여기서 쾌락(volupte)의 생산이란 어떤 걸까? [말론 죽다]의 끝에서 페달 부인은 분열자들을 자연으로 데리고 나가, 산책도 시키고 유람 마차에도 태우고 배도 태우고 소풍도 시킨다. 폭탄이 마련되었도다.

피부 아래 몸은 과열된 공장이다,
그리고 바깥에서,
환자는 빛을 내고,
반짝인다,
터져 나온,
피부의 모든 구멍으로부터.

과정

우리는 자연을 분열증의 한 극으로 고정할 마음은 없다. 분열자가 특유하게 그리고 유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결코 자연이라는 특유한 극이 아니라 생산과정으로서의 자연이다. 여기서 과정이란 무슨 뜻일까? 어떤 층위에서, 자연이 산업과 구별되는 일은 있을 법하다. 한편으로 산업은 자연과 대립되며, 다른 한편 산업은 자연에서 원료를 퍼 오며, 또 다른 한편 산업은 자연에 폐기물을 반환한다 등. '인간과 자연', '산업과 자연', '사회와 자연'이라는 이런 구별 관계는, 심지어 사회 안에서 <생산>, <분배>, <소비>라 불리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영역들을 구별하는 조건을 이룬다. 하지만 일번적으로 이 층위에서의 구별들은, 그 발전된 형식적 구조 속에서 고찰하자면, (맑스가 지적했듯이) 자본과 분업을 전제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존재가 자신에 대해 그리고 경과 전반의 응고된 요소들에 대해 필연적으로 갖는 허위의식 또한 전제한다. 왜냐하면 진실로 -망상 속에 있는, 터져 나오는 검은 진실이라는 점에서, 진실로- 상대적으로 독립된 영역들 내지 회로들이란 없기 때문이다. 생산은 즉각 소비이며 등록이고, 등록과 소비는 직접 생산을 규정하며, 그것도 생산 자체의 한가운데서 생산을 규정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생산이다. 생산의 생산, 즉 능동들과 수동들의 생산들, 등록의 생산, 즉 분배들과 좌표들의 생산들, 소비의 생산, 즉 쾌감들, 불안들, 고통들의 생산들, 모든 것은 생산이기에, 등록들은 즉각 완수되고 소비되며, 소비들은 직접 재생산된다.3) 조르주 바타유는 자연의 에너지와 관련해 사치스러운 비생산적 낭비 내지 소비에 대해 말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용함>으로 규정되는 한에서의 인간의 생산과 독립해 있다고 여겨지는 영역에 기입되지 않는 낭비 내지 소비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소비의 생산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과정의 첫째 의미는 이렇다. 등록과 소비를 생산 자체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등록과 소비를 단 하나의 동일한 경과의 생산들로 만드는 것.
둘째로, 더군다나 '인간'과 '자연'의 구별은 없다. 자연의 인간적 본질과 인간의 자연적 본질은, 말하자면 인간의 유적 삶 안에서 일치하듯, 생산 내지 산업으로서의 자연 안에서 일치한다. 산업은 이제 효용이라는 외면적 관계 속에서 파악되지 않고, 자연과의 근본적 동일성 속에서 파악되는데, 이때의 자연은 인간의 생산 및 인간에 의한 생산으로서의 자연을 가리킨다. 인간은 만물의 왕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온갖 형태 또는 온갖 종류의 깊은 삶과 접촉해 있으며, 별들 및 동물들도 짊어지고 있고, 기관-기계를 에너지-기계로, 나무를 자기 몸으로, 젖가슴을 입으로, 태양을 엉덩이로 끊임없이 가지 뻗는 자, 즉 우주의 기계들의 영원한 담당자이다. 이것이 과정의 둘 째 의미이다. 인과나 이해나 표현 등의 관계(원인-결과, 주관-객체 등)에서 파악되는 때조차도, 인간과 자연은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항과 같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산자 및 생산물의 하나의 동일한 본질적 현실이다. 과정으로서의 생산은 모든 관념적 범주를 넘어서 있으며, 내재적 원리로서의 욕망과 관계된 하나의 순환을 형성한다. 바로 이런 까닭에 욕망적 생산은 유물론적 정신의학의 실효적 범주인데, 유물론적 정신의학은 부녈자를 호모 나투라(Homo natura)로 설정하며 다룬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조건이 붙는데, 이 조건이 과정의 셋째 의미를 구성한다. 즉 과정은 목표나 끝으로 파악되면 안 되며, 과정 자체의 무한한 계속과 혼동돼서도 안 된다. 과정의 끝 또는 과정의 무한한 계속은 -양자는 엄밀히 말해 과정의 난폭하고 미숙한 정지와 같은 것인데- 병원에서 보게 되는 것 같은 인공적 분열자, 즉 임상 존재로서 생산된 자폐증 환자가 생겨나는 원인이다. 로렌스는 사랑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과정을 목표로 밀어붙였다. 모든 과정의 목적은 그 과정의 영속화가 아니라 그 과정의 완성이다. (......) 과정은 완성으로 치달아야 하며, 영혼과 육체가 궁극적으로 사멸해 버릴 어떤 끔찍한 강화와 극단으로 치달아서는 안된다.> 분열증도 사랑과 마찬가지이다. 분열증적 특유성도 분열증적 임상 존재도 없다. 분열증은 생산과 재생산을 행하는 욕망 기계들의 우주요, <인간과 자연의 본질적 현실>로서의 1차적인 보편적[우주적] 생산이다.

욕망 기계, 부분대상들, 흐름 -그리고...... 그다음에......

욕망 기계ㄸ르은 이항 규칙 또는 연합 체제에 따르는 이항 기계이다. 하나의 기계는 언제나 다른 기계와 짝지어 있다. 생산적 종합, 생산의 생산은 <그리고>, <그다음에>......라는 연결 형식을 갖고 있다. 흐름을 생산하는 어떤 기계와 이 기계에 연결되는, 절단을, 흐름의 채취를 수행하는 또 다른 기계가 늘 있으니 말이다(젖가슴-입). 그리고 저 처음 기계는 그 나름으로는 절단 내지 채취 같은 작동을 통해 관계를 맺는 또 다른 기계에 연결되기 때문에, 이항 계열은 모든 방향에서 선형이다. 연속된 흐름들과 본질적으로 파편적이면서도 파편화된 부분대상들의 짝짓기를 욕망은 끊임없이 실행한다. 욕망은 흐르게 하고 흐르고 절단한다. 헨리 밀러는 욕망의 찬가에서 말한다. <나는 흐르는 모든 걸 사랑해, 심지어 수정되지 않은 난자를 나르는 월경의 흐름마저도......> 한편에는 양수 주머니와 신장 결석. 다른 한편에는 머리칼의 흐름, 침의 흐름, 정액과 똥오줌의 흐름, 이 흐름들은 부분대상들에 의해 생산되며, 다른 흐름들을 생산하는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부단히 절단되고, 또 다른 부분대상들에 의해 재절단된다. 모든 <대상>은 흐름의 연속성을 전제하며, 모든 흐름은 대상의 파편화를 전제한다. 물론 각각의 기관-기계는 자기 고유의 흐름에 따라, 이 기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에 따라 전 세계를 해석한다. 가령 눈은 모든 것을, 즉 말하기, 듣기, 똥 싸기, 씹하기 등을 보기의 견지에서 해석한다. 하지만 하나의 횡단선 속에서, 어떤 다른 기계와 늘 하나의 연결이 설립된다. 이 횡단선 속에서, 저 처음 기계는 다른 기계의 흐름을 절단하거나, 다른 기계에 의해 자신의 흐름이 절단되는 것을 <본다.>

첫째 종합 - 연결 종합 또는 생산의 생산

따라서 연결 종합의 짝짓기, 즉 '부분대상-흐름'은 '생산물-생산하기'라는 또 다른 형식도 갖고 있다. 생산물에는 언제나 생산하기가 접붙으며, 바로 이런 까닭에, 모든 기계가 기계의 기계이듯, 욕망적 생산은 생산의 생산이다. 표현이라는 관념론적 범주는 만족스러울 수 없다. 생산과정에 결부하지 않으면서 분열증적 대상을 기술하려고 꿈꿀 수도 없고, 꿈도 꾸지 말지어다. <아르 브뤼> 잡지들은 그 생생한 증명이다(또한 이를 통해 임상 존재인 분열자가 있었다는 게 부정된다). 다른 예로, 앙리 미쇼는 욕망의 경과인 생산의 경과와 관련하여 분열증적 탁자를 묘사한다. <그걸 처음 본 후로 그게 계속 내 머리를 사로잡았다. 그게 뭔지 나도 모르는 그 자신의 일을 그 탁자는 분명 계속해 왔다. (......) 놀라운 건, 그 탁자는 단순하지도 않았지만 또한 진정으로 복잡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건 단번에 복잡한 것도, 의도적으로 복잡한 것도, 또는 까다로운 계획에 의해 복잡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건 작업이 더해짐에 따라 단순함을 잃어버렸다. (......) 그건 덧붙은 것들로 꽉 찬 탁자였는데, 마치 분열자의 이른바 덕지덕지한 그림들이 만들어지는 듯했다. 탁자가 종결된다면, 더 덧붙일 방도가 없어서일 텐데, 이 탁자는 점점 더 많이 쌓여, 점점 더 탁자가 아니게 되어 버렸다. (......) 그건 아무 쓸모도 없었고, 탁자에 기대할 만한 쓸모도 전혀 없었다. 그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운반하기도 어려웠다. 그걸 (머리로건 손으로건)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기 힘들었다. 탁자의 유용한 부분인 윗면은 점차 축소되고 사라졌으며, 거추장스러운 틀과는 거의 상관없어져, 더 이상 그 전체가 탁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고, 별개의 가구로, 용도 모를 미지의 도구로 생각하게 되었다. 탈인간화된 탁자, 그건 아무 편안함도 없었고, 저속하지도 투박하지도 않았고, 시골풍도, 요리용도, 작업용도 아니었다. 그건 아무 데도 적합하지 않았으며, 용도와 소통을 거절하고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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