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표현의 역할과 중요성
스피노자에게 "표현하다"라는 말의 중요성 - "표현하다"란 말의 세 가지 사용: 어떤 본질을 표현하다,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다, 실존을 표현하다 - 속성과 양태와 관념의 표현적 특징
표현 관념은 [윤리학] 1부 정의 6에서부터 등장한다. "나는 신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로, 즉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 속성들 각각은 영원하고 무한한 어떤 본질을 표현한다." 그 후에 이 관념은 점점 더 중요해진다. 스피노자는 이것을 다양한 맥락에서 고쳐 말한다. 때로는 각각의 속성들은 영원하고 무한한 어떤 본질, 즉 속성의 유에 대응하는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때로는 각각의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 실체의 존재 혹은 실재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 끝으로 때로는 각각의 속성은 실체적 실존의 무한성과 필연성, 즉 영원성을 표현한다고 말한다.*1[윤리학]에서 이에 대응하는 정식들은 다음과 같다. 1) [그 각각이] 어떤 영원하고 무한한 본질을 표현한다aeternam et infinitam certam essentiam exprimit 2) 신적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divinae substantieae essentiam exprimit; 실체의 실재성 혹은 존재를 표현한다realitatem sive esse substantiae exprimit; 3) 실존을 표현한다. existentiam exprimunt. 세 가지 유형의 정식들은 1)에서 통합된다. 이 구절은 그 점에서 매우 섬세한 의미 차이와 변화를 포함한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어떻게 하나의 정식에서 다른 정식으로 넘어가는지 잘 보여 준다. 각각의 속성은 본질을 표현하지만, 실체의 본질을 자신의 유 안에서 표현하는 한에서 그렇다. 그리고 실체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실존을 함축하므로, 각각의 속성은 신의 본질과 함께 신의 영원한 실존도 표현한다. 그렇다고 해도 표현 관념에 실체의 통일성과 속성들의 다양성에 관한 모든 난점들이 집약되어 있음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속성들의 표현적 본성이 [윤리학] 1부에서 기본 테마로 등장한다.
양태도 표현적이다. "실존하는 모든 것은 신의 본성, 달리 말하면 신의 본질을 특정하고 규정된 방식으로(즉 한정된defini 방식으로)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는 두 번째 층위의 표현, 일종의 표현의 표현을 식별해야 한다. 첫 번째 층위에서 실체는 그의 속성들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각각의 속성은 어떤 본질을 표현한다. 그러나 두 번째에서, 속성들도 자신을 표현한다. 속성들은 그에게 의존하는 양태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고, 각각의 양태는 어떤 변양modification을 표현한다. 나중에 보겠지만 첫번째 층위는 실체 본질의 실제적 구성, 거의 실체 본질의 발생genealogie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두 번째 층위는 사물들의 실제적 생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실제로 신은 그의 본질이 무한하기 때문에 무한히 많은 사물들을 생산한다. 그런데 신은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갖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그 사물들을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생산하는데, 각 방식은 그것이 담겨 있는 속성들을 지시한다. 표현은 그 자체로는 생산이 아니지만, 두 번째 층위에서, 속성이 자신을 표현할 때는 생산이 된다. 역으로 생산-표현은 첫 번째 표현에 근거한다. 신은 그의 결과들 속에 자신을 표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 자기 안에 소상적 자연을 생산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통해 능산적 자연을 구성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한다.
표현 개념은 존재론만이 아니라 인식론의 영역에도 걸쳐 있다. 관념은 사유 양태이기 때문에 그것은 놀랍지 않다. "개별singulieres 사유들, 달리 말해 이 사유 저 사유는 특정하고 규정된 방식으로 신의 본성을 표현하는 양태들이다." 그러나 그렇게 인식은 일종의 표현이 된다. 사물들에 대한 인식과 신에 대한 인식의 관계는 사물들 그 자체와 신의 관계와 같다. "신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도 생각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연의 모든 존재들이 그들의 본질과 완전성에 비례해서 신 개념을 함축하고 표현하는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 안의 사물들에 대해 더 많이 인식하면 할수록, 우리가 획득하는 신에 대한 인식도 그만큼 더 크고 더 완전하리라는 것이 확실하다." 신 관념이 우리의 모든 관념들의 원천이자 원인으로서 우리의 모든 관념들 속에 자신을 표현해서, 관념들 전체는 전 자연의 질서를 정확히 재생산한다. 그리고 관념은 다시 그의 대상의 본질, 본성 혹은 완전성을 표현한다. 즉 정의 혹은 관념은 사물의 본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고 일컬어진다. 관념은 대상의 실재성 혹은 완전성을 더 많이 표현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완전하다. 따라서 정신이 "절대적으로" 형성하는 관념들은 무한성을 표현한다. 정신은 사물들을 영원의 측면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생각하지만, 정신이 신체의 본질을 영원의 측면에서 표현하는 관념을 소유하기 때문에 그렇다. 스피노자에게 적합성 개념은 관념의 그러한 표현적 성격과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소론]에서 이미 사물 외부에 머물러 있는 활동이 아니라, 반성reflexion으로, 정신 안의 사물의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인식 개념을 찾고 있었다. 그 요청은 [윤리학]에도 나타나지만, 새롭게 해석된다. 어쨌든 참된 것이 관념 안에 현존한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것도 물어야 한다. 참된 관념 안에 현존하는 것은 무엇인가? 참된 관념에서 표현되는 것은 무엇이고, 참된 관념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명석 판명 개념을 넘어서고, 적합성 이론을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이 표현 문제와 관련이 있다.
표현하다exprimer: 설명하다expliquer 혹은 전개하다developer; 내포하다impliquer 혹은 함축하다envelopper; 복합하다compliquer, 담다contenir 혹은 포함하다comprendre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주의의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표현 관념에 기댄다- 왜 주석가들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표현 관념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는가- 스피노자에게 표현 관념은 왜 정의의 대상도 증명의 대상도 아닌가- 표현과 증명
"표현하다"라는 말의 몇 가지 동의어가 있다. [소론]의 네덜란드어 텍스트는 uytdrukken-uytbeelden(표현하다)을 사용하지만, vertoonen(현시하고manifester 증명하다demontrer)을 더 선호한다. "사유하는 것은 무한히 많은 대상들에 대응하는 무한히 많은 관념들에서 표현된다." 그러나 사실 "물체 관념은 매개 없이 신을 현시한다". 그리고 "속성들은 자기 자신을 통해서 자신을 현시한다" [지성개선론]에서, 속성들은 신의 본질을 현시한다(ostendere). 그러나 동의어들이 가장 중여한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표현 관념에 수반되어 그것을 명확히 하는 상관어들이다. 그 상관어들은 explicare와 involvere이다. 그래서 정의는 피정의항의 본성을 표현한다고만 이야기되지 않고 그것을 함축하고 설명한다고도 이야기된다.*12) "각 사물에 대한 참된 정의는 정의된 사물의 본성 이외에는 아무것도 함축 혹은 표현하지 않는다Veram uniuscujusque rei definitionem nihil involvere neque exprimere praeter definitae naturam." "정의가 완전하다고 이야기되기 위해서는 사물의 내밀한 본질을 설명해야 한다Definitio, ut dicatur perfecta, debebit intimam essentiam rei explicare."*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그것을 설명하고 때로는 그것을 함축한다. 양태들은 신 개념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것을 함축하며, 따라서 그 양태들에 대응하는 관념들도 신의 영원한 본질을 함축한다.
설명하는(펼치는) 것은 전개하는 것이다. 함축하는(감싸는) 것은 내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두 항은 반대 항이 아니다. 그것들은 표현의 두 측면을 지시할 뿐이다. 한편으로 표현은 설명이다. 즉 자신을 표현하는 것의 전개, 다자에서 일자의 현시(속성들에서 실체의 현시, 그 다음으로 양태들에서 속성들의 현시)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다자의 표현은 일자를 함축한다. 일자는 그를 표현하는 것에 함축되어 있고, 극를 전개하는 것에 새겨져 있고, 그를 현시하는 모든 것에 내재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표현은 함축이다. 우리가 나중에 분석할 유한 양태들과 그들의 수동들의 층위라는 특정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들 두 항 간에 대립은 없다. 일반적으로 표현은 그것이 표현하는 것을 설명하고 전개하는 동시에 그것을 함축하고, 내포한다.
내포와 설명, 함축과 전개는 언제나 범신론이라고 비난을 받는 오랜 철학적 전통으로부터 상속된 용어들이다.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 개념들은 종합의 원리, "복합complicatio"을 지시한다. 신플라톤주의에서는 종종 복합이 일자 안에서 다자의 현존과 다자 안에서 일자의 현존을 동시에 지칭할 때가 있다. 신은 "복합하는" 자연이며, 이 자연은 신을 설명하고 내포한다. 혹은 신을 함축한다. 신은 만물을 복합하고 있지만 만물은 신을 펼치고 신을 함축한다. 이러한 개념들의 맞물림이 표현을 구성하며, 이런 의미에서 표현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 동안 진화하는 기독교적이고 유대교적인 신플라톤주의의 본질적 형식들의 한 특징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혹자는, 표현이 르네상스 시대의 사유의 기본 범주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자연은 각각의 사물에 의해 설명되고 내포되는 동시에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을 담는다. 속성들은 실체를 함축하고 설명하지만, 실체는 모든 속성들을 포함한다. 양태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속성을 함축하고 펼치지만, 속성은 해당 양태들의 본질들을 모두 담는다. 스피노자가 어떻게 표현주의 전통에 들어가는지, 어느 정도로 그 전통의 영향 아래 있는지, 어떻게 그 전통을 혁신하는지 물어야 한다.
라이프니츠가 표현을 그의 기본 개념의 하나로 삼은 만큼 이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스피노자에게도 라이프니츠에게도 표현은 신학, 존재론, 그리고 인식론에 동시에 걸쳐 있다. 그것은 신에 대한 이론과 피조물들에 대한 이론과 인식에 대한 이론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데카르트주의의 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연 철학을 복원하기 위해서, 그리고 데카르트의 성과들을 근본적으로 데카르트적 세계관에 적대적인 체계에 통합하기 위해서, 이 두 철학자는 각자 독자적으로 표현 관념에 기대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반데카르트주의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이 반데카르트주의는 표현 관념에 근거한다.
표현 관념은 스피노자 체계에 대한 이해에도, 스피노자 체계와 라이프니츠의 체계와의 관계의 규정에도, 두 체계의 기원과 형성에도 모두 중요하다고 우리는 가정한다. 그렇다면 왜 가장 훌륭한 주석가들이 스피노자 철학에서 이 개념을 전혀(혹은 거의) 고려하지 않았는가? 어떤 이들은 그것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은 그것에 얼마간의 중요성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간접적 중요성이다. 그들은 표현 개념을 보다 근본적인 어떤 용어의 동의어로 보기 때문이다. 가령 그들은 표현을 "유출emanarion"에 대해 말하는 한 방식에 불과하다고 본다. 라이프니츠가 이미 그것을 시사했다. 그는 스피노자가 표현을 카발Kabbale과 동일한 의미로 해석했다고, 그리고 그것을 일종의 유츌로 환원했다고 비난했다.*18) 최근의 주석자들 중에서 E. Lasbax는 스피노자의 표현과 신플라톤주의의 유출과의 동일시를 가장 멀리 밀고 간 사람들 중 하나이다.* 혹은 그들은 표현하다를 설명하다의 동의어로 본다. 사방에서 발생 및 자기-전개 운동의 전조를 찾으려고 했던 포스트-칸트주의자들은 그것을 스피노자주의에서 발견하기 좋은 여건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설명하다"라는 용어 때문에, 스피노자가 무한에서 유한으로의 이행을 사유할 수 없었던 것처럼 실체의 실제 전개도 생각할 수 없었다는 그들의 생각을 굳히게 된다. 그들에게 스피노자의 실체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에게 스피노자의 표현은 지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들에게 속성들은 그 자체로 설명적인 지성에 의해 실체에 "귀속된" 것으로 보였다.*19) E. Erdmann이 스피노자의 속성들을 때로는 지성의 형식들로, 때로는 감성의 형식들로 해석하는 것은 헤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셸링도 그의 현시Offenbarung 철학을 만들 때 스피노자가 아니라 뵈메Boehme를 내세운다. 셸링의 표현Ausdruck관념은 스피노자도 라이프니츠도 아닌 뵈메에게서 온 것이다.
표현을 단지 지성의 설명으로 환원할 때 우리는 사상사적 오해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설명하다는 말은 사물 외부에 머무는 지성의 활동을 지칭하기는 커녕 우선 사물이 자신 안에서 그리고 그 삶 속에서 전개되는 것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설명하다explicatio-복합하다complicatio라는 전통적인 쌍은 언제나 범신론과 가까운 생기론을 나타냈다. 설명에서 출발해서는 표현을 이해할 수 없다. 스피노자의 선배들에게도 스피노자에게도 반대로 설명의 전제가 표현 관념인 것으로 보인다. 속성들이 속성들을 지각 혹은 이해하는 지성을 본질적으로 참조한다면,*20) "나는 속성을, 한 실체에 대해서 지성이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지각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우선 속성들이 실체의 본질을 표현하기 때문이고, 또 무한한 본질이 표현될 때 속성들이 신적 지성에 "표상적으로"*21) objectivement. 관념에는 두 측면이 있다. 관념은 어떤 대상에 대한 것이며, 대상과 관련 없이 그 자체로 있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과 관련하여 관념이 갖는 실재성이 realite objectif이다. 이는 objectif의 어원 "~에 대해 던져진, ~에 맞서 있는(ob-jecti)"이란 뜻과도 관련이 있다. 기존의 통상적 번역을 따라서 우리는 objectif를 "표상적"으로, 그리고 representif를 "재현적"으로 번역한다.* 나타나기 때문이다. 표현이 지성과의 관계에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지 그 역이 아니다. 유출에 대해 말하자면 스피노자에게 분유 못지 않게 유출의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은 확실하다. 정확히 말해서 중세시대에도 르네상스 시대에도 표현 및 설명 이론은 신플라톤주의로부터 강한 영감을 받은 저자들 사이에서 형성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 목표와 결과가 신플라톤주의를 근본적으로 변형하고, 이 신플라톤주의에 유출과는 완전히 다른 길들(두 가지 테마가 공존할 때 조차도)을 열어 주는 것이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유츌도 그것을 통해 표현 관념을 이해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말하겠다. 반대로 표현 관념은 신플라톤주의가 어떻게 그 본성이 바뀔 정도로 진화했는지, 특히 유출인이 어떻게 점점 더 내재인이 되어 갔는지 보여 줄 수 있다.
몇몇 현대 주석가들은 스피노자 철학에서 표현 관념을 직접 고찰한다. 카우프만은 표현 관념을 "스피노자 철학의 미로"를 위한 아리아드네의 실로 보지만, 그 개념을 스피노자가 사용하는 방식을 다루는 대신에 일반적인 방식으로 그 개념의 신비주의적이고 미학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다르봉은 또 다른 방식으로 표현에 매우 아름다운 페이지를 할애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이해불가능한 것이라고 선언한다. "스피노자는 실체의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단지 속성들 각각이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고 말할 뿐이다. 이 설명에 의해 사태가 명료해지기는 커녕 많은 난점만 생긴다. 먼저 표현되는 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과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르봉은 이렇게 결론 내린다. "모든 속성들은 신의 무한하고 영원한 본질을 표현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표현되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주석가의 임무는 어렵고, 스피노자주의에서 실체와 속성들의 관계라는 문제는 많은 상이한 해석을 야기한다."
확실히 이러한 주석이 나오게 되는 이유가 있다. 스피노자는 표현 관념을 정의나 증명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표현 관념은 정의 6에서 등장하지만, 정의되지도 정의에 쓰이지도 않는다. 표현 관념은 실체도 속성도 정의하지 않는다. 실체와 송성들은 이미 정의되었기(정의 3과 4) 때문이다. 표현 관념은 신을 정의하지도 않는다. 신에 대한 정의는 표현에 대한 어떤 참조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편지들과 [소론]에서 종종, 신은 그 각각이 무한한, 무한히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라고 말한다. 따라서 표현 관념은, 신이 무한히 많은 무한한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로 정의될 때, 단지 속성과 실체와 본질이 맺는 관계에 대한 규정으로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표현은 미규정의 조건에서 실체나 속성 일반과 관련되지 않는다. 실체가 절대적으로 무한할 때, 실체가 무한히 많은 속성들을 소유할 때, 그때 오직 그때만 실체는 사실 속성들로 자신을 표현하기 때문에 속성들이 본질을 표현한다고 이야기된다. 정의 3(실체 정의)과 정의 4(속성 정의)를 내세워 그로부터 곧장 실체와 신의 속성 간의 관계의 성격을 연역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신은 충분히 그 관계를 절대적인 것으로 높여서 "변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 3과 4는 명목적 정의일 뿐이다. 정의 6만이 실재적 정의이며 실체와 속성과 본질에서 무엇이 따라 나오는지를 말해준다. 그러나 "관계를 변형한다"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표현이 왜 증명의 대상도 아닌지에 대해 따져본다면 그것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정리 16*25) (역주)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무한히 많은 것이 무한히 많은 방식으로 따라 나와야 한다."*에 대해 고심하는 취른하우스에게 스피노자는 중요한 인정을 한다. "철학적 전개와 수학적 증명 간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수학자는 통상 하나의 정의에서 하나의 특성만 끌어낼 수 있다. 여러 특성들을 인식하려면 관점들을 늘리고 "정의 대상을 다른 대상들과" 관련시켜야 한다. 따라서 기하학적 방법은 관점들의 외재성과 특성들의 배분적 성질이라는 두 가지 제한을 받는다. 헤겔이 스피노자를 염두에 두고 기하학적 방법은 절대적인 것에만 합치하는 유기적 운동 혹은 자기-전개를 포괄하기에 부적격하다고 주장했을 때, 그가 말한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삼각형의 밑변을 연장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세 각의 합이 180도라는 증명을 생각해 보자. 분명 이 밑변은 저절로 자라는 식물과 같지 않다. 미변을 연장할 기하학자가 필요하고, 기하학자는 그가 평행선을 그린 삼각형의 변을 새로운 관점에서 고려해야 하고 등등. 스피노자가 이 반론들을 몰랐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취른하우스가 제기한 반론들이기 때문이다.
기하학적 방법이 [수학적 존재가 아니라] 실재적 존재들에 적용될 때, 더군다나 절대적 존재에 적용될 때, 우리는 동시에 여러 특성들을 이끌어낼 수단을 갖게 된다는 스피노자의 대답은 실망스러울지도 모른다. 아마도 우리는 스피노자가 문제되는 것을 인정한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방법에서 제기되는 매우 다른 문제들을 혼동하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묻는다. 개별적으로 도출된 특성들을 집합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수단, 그리고 정의 외부에서 취해진 관점들을 정의 대상의 내부로 위치시킬 수 있는 수단은 없는가? 그런데 [지성개선론]에서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도형들이 근접 원인에 의해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을, 혹은 발생적 정의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원은 단지 중심이라 불리는 동일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위치한 점들의 궤적이 아니라, 한 쪽 끝은 고정되어 있고 다른쪽 끝은 움직이는 선분에 의해 그려진 도형이다. 마찬가지로 구는 지름을 축으로 회전하는 반원에 의해 그려진 도형이다. 기하학에서 이 원인들이 허구적인 것은 사실이다. "임의로 꾸며내다fingo ad libitum", 헤겔도 말하고 스피노자도 말하는 것처럼 반원은 저절로 회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원인들이 단지 결과부터의 추론에 의해서만 진리를 갖는다는 점에서만, 이 원인들은 허구적이고 상상적이다. 여기서 도형들은 사고상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 원인들은 수단들, 기교들, 허구들로 제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하학자에 의해 하나하나 실제로 도출되는 특성ㄷ르이 그 원인들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허구들의 도움으로 집합적 존재를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28) "구 개념을 형성하기 위해 나는 임의로 원인의 허구를 형성한다. 즉 반원은 그 중심을 축으로 회전하며, 구는 말하자면 그 회전에 의해 생긴다. 이 관념은 틀림없이 참이며, 우리가 어떤 구도 자연에서는 결코 그런 식으로 발생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은 참된 지각이고 구 개념을 형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리고 또 그 지각은 반원이 회전한다는 것을 긍정하지만, 그 긍정은 만일 구 개념에 연결되지 않으면 거짓이 되리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절대적인 것의 경우에 더 이상 허구적인 것은 전혀 없다. 즉 원인은 더 이상 결과로부터 추론되지 않는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것'이 원인임을 긍정할 때, 우리는 반원의 회전의 경우처럼 개념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어떤 것을 긍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무한히 많은 방식들'이 '실체의 정의에서 집합적으로 도출된 특성들'과 동일시되기 위해서, '속성들'이 '실체에 대해 속성들이 취하는 실체 내적인 관점들'과 동일시되기 위해서, 허구가 필요하지 않다. 따라서 철학이 수학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철학이 수학의 통상적 한계들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기하학적 방법은 절대적인 것에 적용될 때는 난점에 부딪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사고상의 존재들에 적용되는 동안에 그것의 실행에 부담을 지웠던 난점들을 극복할 자연적 수단을 발견한다. 속성들은 실체에 대한 관점들과 같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에서 그 관점들은 더 이상 외부적이길 멈추고, 실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무한히 많은 관점들을 자신 안에 포함한다. 특성들이 정의된 사물로부터 연역되는 것처럼, 양태들도 실체로부터 연역된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에서 특성들은 무한한 집합적 존재를 획득한다. 특성들을 하나하나 도출하는 것, 사물을 다른 대상들에 관련시켜서 반성하고 설명하는 것은 더 이상 유한한 지성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것,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특성들은 모두 함께 "무한한 지성에 들어간다". 따라서 표현은 증명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 표현은 증명을 절대적인 것 안에 가져다 놓고, 증명을 절대적으로 무한한 실체의 직접적 현시로 만든다. 증명 없이 속성들을 이해하는 것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증명은 가시적이지 않은 것의 현시이고, 자신을 현시하는 것이 그 아래로 들어가는 시선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증명은 우리가 [무언가를] 지각하는 정신의 눈이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30) "사람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신의 속성들을 인식할 필요는 없고, 오직 단순하게 증명 없이 속성들을 믿는 것만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들은 순전히 경솔하다. 비가시적인 것, 단지 사유의 대상인 것은 증명들 이외의 다른 눈에 의해서는 보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명을 갖지 않는 자는 이것들에 대해 아무것도 절대로 보지 못한다."*
1부 실체의 삼항관계
1장. 수적 구별과 실재적 구별
삼항관계로서의 표현 - 표현의 첫 번째 삼항관계: 실체, 속성, 본질
표현은 삼항관계triade로 나타난다. 우리는 실체와 속성들과 본질을 구별해야 한다. 실체는 자신을 표현하고, 속성들은 표현들이며, 본질은 표현된다. 표현 관념이 나타내는 관계에서 두 항만을 보는 한, 표현 관념은 불가지적인 것으로 머문다. 제3항의 현존과 매개를 고려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실체와 속성, 속성과 본질, 본질과 실체를 혼동한다. 실체와 속성들은 구별되지만, 각각의 속성이 하나의 특정 본질을 표현하는 한에서 그렇다. 속성과 본질은 구별되지만, 각각의 본질이 속성의 본질이 아닌 실체의 본질로서 표현되는 한에서 그렇다. 표현 개념의 독창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실존하는 한에서 본질은, 그것을 표현하는 속성 밖에서 실존하지 않지만, 본질인 한에서 그것은 실체에만 관계된다. 본질은 각각의 속성에 의해서 표현되지만, 실체 자체의 본질로서 표현된다. 무한한 본질들은 그들이 실존하는 속성들에서 구별되지만, 그들이 관계되는 실체에서는 동일시된다. 우리는 언제나 다음 세 항을 구별할 필요성에 맞닥뜰인다. 자신을 표현하는 실체, 그를 표현하는 속성, 표현되는 본질, 본질과 실체의 구별은 속성들에 의해서이지만, 실체 자체와 속성들의 구별은 본질에 의해서이다. 삼항관계의 각각의 항은 세 개의 삼단논법에서 다른 두 항과 관련해 매개항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체가 절대적으로 무한한 한에서, 표현은 실체와 합치한다convenir. 속성들 전체가 무한한 한에서, 표현은 속성들과 합치한다. 각각의 본질이 하나의 속성 속에서 무한한 한에서, 표현은 본질과 합치한다. 따라서 무한의 본성이 있다. 메를로 퐁티는 17세기 철학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장 이해하기가 어려워 보이는 것을 잘 지적한다. 적극적 무한이라는 관념, 그것은 "위대한 합리주의의 비밀", "무한에서 출발하는 순수한 사유 방식"이고, 이는 스피노자주의에서 완전한 형태로 나타난다. 이 순수함이 개념의 노동을 배제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스피노자는 적극적 무한의 역량과 현실성을 제시하기 위해, 어떤 독창적인 개념적 요소의 온갖 원천들이 필요했다. 만약 표현관념이 이 역할을 한다면, 그것은 표현 관념이 실체와 속성들의 본질이라는 이 세 항에 대응하는 어떤 구별들을 무한 속에 들여오기 때문이다. 무한에서의 구별은 어떤 유형의 것인가? 절대적인 것에, 신의 본성에 어떤 유형의 구별을 가져올 수 있는가? 그러한 것이 표현 관념에 의해 제기되는 첫 번째 문제이며, 그것이 [윤리학] 1부를 지배한다.
데카르트에서 구별의 문제 -데카르트에 따르면, 동일한 속성의 실체들이 있다: 실재적인 수적 구별들-그리고 상이한 속성의 실체들이 있다: 수적인 실재적 구별- 스피노자의 이론: 동일한 속성의 여러 실체는 없다, 수적 구별은 결코 실재적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