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수의 노트 6


2023. 11. 16. 06:19


A Thousand Plateaus 천 개의 고원




1. Introduction: Rhizome

The two of us wrote Anti-Oedipus together. 우리 둘은 안티오이디푸스를 집필했다. Since each of us was several, there was already quite a crowd. 우리 각각이 몇몇이었을 때부터, 이미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 Here we have made use of everything that came within range, what was closest as well as farthest away. 이곳에서 우리는 가장 가깝고도 먼 것들의 범주 안에 들어온 모든 것들을 사용했다. We have assigned clever pseudonyms to prevent recognition. 우리는 명성을 피하기 위해 영리한 가명을 쓰기로 정했다. Why have we kept our own names? 우리는 왜 우리의 고유한 이름을 유지하는 것인가? Out of habit, purely out of habit. 습관적으로, 순전히 습관적으로. To make ourselves unrecognizable in turn. 차례로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만들기 위해. To render imperceptible, not ourselves, but what makes us act, feel, and think.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행동하고, 느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눈에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Also because it's nice to like everybody else, to say the sun rises, when everybody knows it's only a manner of speaking. 또한 일출을 이야기하며 모든 이들이 그것이 오로지 말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은 것이 좋기 때문이다. To reach, not the point where one no longer says I, but the point where it is no longer of any importance whether one says I. 누군가가 더이상 '나'를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나'를 말하던 그러지 않던 그것에 중요성이 더 이상 없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We are no longer ourselves. 우리는 더이상 우리 스스로가 아니다. Each will know his own. 각자는 자신의 고유함을 알 것이다. We have been aided, inspired, multiplied. 우리는 도움을 받았고, 영감을 얻었으며, 배가되었다.
A book has neither object nor subject; it is made of variously formed matters, and very different dates and speeds. 책은 대상도 아니고 주체도 아니다; 그것은 다양하게 형성된 물질들, 매우 다른 날들과 속도돌로 만들어졌다. To attribute the book to a subject is to overlook this working of matters, and the exteriority of their relations. 책을 주체에 귀속시키는 것은 이 물질들, 그리고 그들 관계의 외재성을 간과하는 것이다. It is to fabricate a beneficent God to explain geological movements. 그것은 지질학적 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유익한 신을 직조하는 것이다. In a book, as in all things, there are lines of articulation or segmentarity, strata and territories; but also lines of flight, movements of deterritorialization and destratification. 이 책에는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절속 혹은 세분화의 선들, 그리고 지층과 영토들의 선들이 있다; 그 뿐 아니라 탈영토화와 탈지층화/탈성층화의 운동, 비행의 선들이 있다. Comparative rates of flow on there lines produce phenomena of relative slowness and viscosity, or, on the contrary, of acceleration and rupture. 그 선들의 흐름의 상대적인 정도들은 상대적인 느림과 점도, 혹은 반대로 가속과 파열의 현상을 생산한다. All this, lines and measurable speeds, constitutes an assemblage. 이 모든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은 집합체/아상블라주를 구성한다. A book is an assemblage of this kind, and as such is unattributable. 책은 이러한 종류, 그리고 그러한 출처를 알 수 없는 것의 집합체/아상불라주이다. It is a multiplicity -but we don't know yet what the multiple entails when it is no longer attributed, that is, after it has been elevated to the status of a substantive. 그것은 다양성/다수성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다수인, 다양한 것이 더이상 귀속되지 않고 실체적인 지위로 상승한 후에 무엇을 수반하는지는 모른다. One side of a machinic assemblage faces the strata, which doubtless make it a kind of organism, or signifying totality, or determination attributable to a subject; it also has a side facing a body without organs, which is continually dismantling the organism, causing asignifying particles or pure intensities to pass or circulate, and attributing to itself subjects that it leaves with nothing more than a name as the trace of an intensity. 기계적인 집합체/아상블라주의 한 면은 의심할 여지 없이 조직, 혹은 기호화된 전체, 혹은 주체에 귀속가능한 규정들인 지층들과 마주한다; 그것은 또한 조직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비기호적인 조각들, 혹은 지나가거나 순환하는 순수 강도들과 같은 기관 없는 신체와 마주하는 면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자신을 강도의 자취 이상을 남기지 않는 주체에 귀속시킨다. What is the body without organs of a book? 책의 기관없는 신체는 무엇인가? There are several, depending on the nature of the lines considered their particular grade or density, and the possibility of their converging on a "plane of consistency" assuring their selection. 그것은 고려된 선들의 본성에 따라, 즉 특정한 단계나 밀도, 그리고 그들의 선별을 보장하는 "지속의 평면" 위에서 그들의 수렴 가능성에 기반하는 몇몇이다. Here, as elsewhere, the units of measure are what is essential: quantify writing.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는 측장의 단위들이 본질적이 된다: 수량화하는 글쓰기.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what a book means, as signified or signifier; we will not look for anything to understand in it.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사이에 책이 의미하는 차이는 없다; 우리는 그것 안에서 이해하려는 것을 찾지 않을 것이다. Therefore a book also has no object. 그러므로 책은 또한 대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 As an Assemblage, a book has only itself, in connection with other assemblages and in relation to other bodies without organs. 아상블라주로서, 책은 다른 아상블라주들과의 연결과 기관 없는 신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오직 자신만을 가진다. We will never ask what a book means, as signified or sigifier; we will not look for anything to understand in it. 우리는 절대로 책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 안에서 이해하려는 어떤 것도 찾지 않을 것이다. We will ask what it functions with, in connection with what other things it does or does not transmit intensities, in which other multiplicities its own are inserted and metamorphosed, and with what bodies without organs it makes its own converge. 우리는 그것이 그것의 고유한 다른 다양성들이 기입되고 변화하는 강도들을 전도하거나 전도하지 않는 사물들과의 연결 속에서,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수렴을 만들어내는 기관 없는 신체와 함께 무엇은 기능하게 하는지 물을 것이다. A book exists machine; what is the relation(also measurable) of this literary machine to a war machine, love machine, revoilutionary machine, etc. and an abstract machine that sweeps them along? 첵은 기계를 존재케한다; 무엇이 이 문학 기계를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등과 그리고 이들을 불어제치는 추상 기계와 연관(또한 가늠)시키는가? We have been overquoting literary authors. 우리는 문학 저자들을 과도하게 인용해왔다. But when one writes, the only question is which other machine the literary machine can be plugged into, must be plugged into in order to work. 그러나 누군가 쓸 때, 유일한 질문은 문학 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될 수 있는가,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 무엇에 접속되어야만 하는가? Kleist and a mad war machine, Kafka and a most extraordinary bureaucratic machine... (What if one became animal or plant through literature, which certainly does not mean literarily? Is it not first through the voice that one becomes animal?)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 기계, 카프카와 가장 기이한 관료주의적 기계... (만약 누군가가 명백하게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문학을 통해 동물이나 식물이 된다면 어떨까? 누군가 처음 동물이 되는 것은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닌가?) Literature is an assemblage. 문학은 아상블라주이다. It has nothing to do with ideology.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할 일이 없다. There is no ideology and never has been. 그것에는 이데올로기가 없고 없어 왔다.
All we talk about are multiplicities, lines, strata and segmentarities, lines of flight and intensities, machinic assemblages and their various types, bodies without organs and their construction and selection, the plane of consistency, and in each case the units of measure. 우리가 말하는 모든 것은 다수성들, 선들, 지층과 세분화들, 비행과 강도들의 선들, 기계적 아상블라주들과 그들의 다양한 유형들, 기관없는 신체들과 그들의 구성과 선별, 지속의 평면과 각각의 경우 측정의 단위들이다. Stratometers, deleometers, BwO units of density, BwO units of convergence: Not only do these constitute a quantification of writing, but they define writing as always the measure of something else. 기압계들, 각도계들, 밀도의 기관없는 신체의 단위들, 수렴의 기관없는 신체의 단위들: 그들은 글쓰기의 수량화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그들은 글쓰기를 언제나 다른 무언가에 대한 측정으로서 규정한다. Writing has nothing to do with signifying. 글쓰기는 기호작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It has to do with surveying, mapping, even realms that are yet to come. 그것은 조사, 매핑, 심지어는 아직 오지 않은 영역들까지 다뤄야 한다.
A first type of book is the root-book. 첫번째 유형의 책은 뿌리-책이다. The tree is already the image of the world, or the root the image of the world-tree.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거나 세계-나무 이미지의 뿌리이다. This is the classical book, as noble, signifying, and subjective organic interiority (the strata of the book). 이는 소설로서 기호화하고 주관적인 유기적 내재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책의 지층). The book imitates the world, as art imitates nature: by procedures specific to it that accomplish what nature cannot or can no longer do.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자연이 하지 못하거나 더이상 하지 못하는 종류에 특정하여 달성된 과정들을 통해서 말이다. The law of the book is the law of reflection, the One that becomes two. 책의 법칙은 반성의 법칙, 즉 일자가 둘이 되는 법칙이다. How could the law of the book reside in nature, when it is what presides over the very division between world and book, nature and art? 어떻게 책의 법칙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의 바로 그 분할을 주재하면서 자연 안에 거주하는가? One becomes two: whenever we encounter this formula, even stated strategically by Mao or understood in the most "dialectical" way possible, what we have before us is the most classical and well reflected, oldest, and weariest kind of thought. 하나는 둘이 된다: 우리가 이 공식을 마주할 때마다, 심지어 마오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급되거나 가능한 한 가장 "변증법적인" 방식으로 이해되면서, 우리 이전에 우리가 가지는 것은 가장 고전적이고 잘 반성되었으며 가장 오래되었고 이상한 종류의 사유이다. Nature doesn't work that way: in nature, roots are taproots with a more multiple, lateral, and circular system of ramification, rather than a dicotomous one. 자연은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들은 이분법보다 더 다수적이고 측면적이며, 가지형성의 순환적 시스템과 함께하는 곧은 뿌리이다. Thought lags behind nature. 사유는 자연에 뒤떨어진다. Even the book as a natural reality is a taproot, with its pivotal spine and surrounding leaves 심지어 자연적인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의 중심적인 척추와 이를 둘러싸는 잎사귀들과 함께하는 곧은 뿌리이다. But the book as a spiritual reality, the Tree or Root as an image, endlessly develops the law of the One that becomes two, then of the two that become four... Binary logic is the spiritual reality of the root-tree. 그러나 영혼적인 실재로서의 책, 즉 이미지로서의 나무 혹은 뿌리는, 둘이 하나의 법칙, 그리고 넷이 되는 둘의 법칙을 끝없이 전개한다... 이분법의 논리는 뿌리-나무의 영적인 실재이다. Even a discipline as "advanced" as linguistics retains the root-tree as its fundamental image, and thus remains wedded to classical reflection (for example, Chomsky and his grammatical trees, which begin at a point S and proceed by dichotomy). 언어만큼이나 "발달된" 질서조차도 뿌리-나무에서 그것의 근본적인 이미지를 유지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고전적인 반성에 결탁한 채로 머무른다(이를테면, 지점 S에서 시작하여 이분법에 의해 진행하는 촘스키와 그의 문법적인 나무들). This is as much as to say that this system of thought has never reached an understanding of multiplicity: in order to arrive at two following a spiritual method it must assume a strong principal unity. 이는 이 사유의 체계가 다수성의 이해에 도달한 적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적인 방법들을 따라 둘에 도달하기 위해 그것은 강력한 주된 통일성을 상정해야 한다. On the side of the object, it is no doubt possible, following the natural method, to go directly from One to three, four, or five, but only if there is a strong principal unity available, that of the pivotal taproot supporting the secondary roots. 대상의 측면에서, 자연적인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혹은 다섯으로 곧장 가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가능한데 이차적인 뿌리들을 지지하는 중심적인 곧은 뿌리의 강력한 주된 통일성을 가정하는 하에서 그러하다. That doesn't get us very far. 그것은 우리를 아주 멀리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The binary logic of dichotomy has simply been replaced by biunivocal relationships between successive circles. 이분법의 이항적 논리는 단순히 연속적인 순환들 사이의 이의적 관계들로 대체될 뿐이다. The pivotal taproot provides no better understanding of multiplicity than the dichotomous root. 주된 곧은 뿌리는 이분법적 뿌리와 마찬가지로 다수성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하지 못한다. One operates in the object, the other in the subject. 하나는 대상 안에서 작동하며 다른 하나는 주체에서 그러하다. Binary logic and biunivocal relationships still dominate psychoanalysis (the tree of delusion in the Freudian interpretation of Schreber's case), linguistics, structuralism, and even infromation science. 이분법적 논리와 이의적 관계들은 여전히 정신분석학(슈레버 사건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 속의 망상적 나무)과, 언어학, 구조주의, 그리고 심지어는 정보과학을 지배한다.
The radicle-system, or fascicular root, is the second figure of the book, to which our modernity pays willing allegiance. 작은 뿌리-체계, 혹은 다발형의 뿌리는 책의 두번째 형상, 즉 우리의 현대성이 자발적인 충성을 바치는 형상이다. This time, the principal root has aborted, or its tip has been destroyed; an immediate, indefinite multiplicity of secondary roots grafts onto it and undergoes a flourishing development. 이 때, 주된 뿌리는 유산되거나 그것의 끝이 파괴된다; 이차적 뿌리들의 즉각적이고 모호한 다양성은 그것 위에 이식되고 무성한 발달을 겪는다. This time, natural reality is what aborts the principal root, but the root's unity subsits, as past or yet to come, as possible. 이 때, 자연적인 실재는 주된 뿌리를 유산시키나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 가능한 것으로 존속한다. We must ask if reflexive, spiritual reality does not compensate for this state of things by demanding an even more comprehensive secret unity, or a more extensive totality. 우리는 만약 반성적이고 영적인 실재가 더 포괄적인 비밀의 통일성, 혹은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하는 이 사물들의 사태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한다. Take William Burroughs's cut-up method: the folding of one text onto another, which constitutes multiple and even adventitious roots (like a cutting), implies a supplementary dimension to that of the texts under consideration. 윌리엄 버로우의 컷업 방식을 받아들이자: 다른 것 위에 하나의 텍스트의 접힘, 다수성과 심지어 우발적인 뿌리들(자르기와 같이), 고려 하에 있는 텍스트들의 경우처럼 보충적인 차원을 내포한다. In this supplementary dimension of folding, unity continues its spiritual labor. 이 접힘의 보충적인 차원에서 통일성은 자신의 영적인 노동을 지속한다. That is why the most resolutely fragmented work can also be presented as the Total Work or Magnum Opus. 이는 가장 단호하게 파편화된 작업이 총체적인 작업 혹은 대표작으로 나타날 수 있는 이유이다. Most modern methods for making series proliferate or a multiplicity grow are perfectly valid in one direction, for example, a linear direction, whereas a unity of totalization asserts itself even more firmly in another, circular or cyclic, dimension. 계열을 증식시키거나 다수성을 성장시키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은 선형과 같은 한 방향에서는 완벽하게 유효한 반면에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 즉 원형 또는 순환의 차원에서 더욱 확고하게 주장된다. Whenever a multiplicity is taken up in a structure, its growth is offset by a reduction in its laws of combination. 다수성이 구조 안에서 받아들여질 때, 그것의 성장은 그것의 조합 법칙에의 환원에 따라 상쇄된다. The abortionists of unity are indeed angel makers, doctores angelici, because they affirm a properly angelic and superior unity. 통일성의 낙태론자들은 제대로 된 천사적이고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기 때문에 참으로 천사 제작자, 의사 엔젤리치입니다. Joyce's words, accurately described as having "multiple roots," shatter the linear unity of the word, even of language, only to posit a cyclic unity of the sentence, text, or knowledge. "여러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정확하게 묘사되는 조이스의 말은 단어, 심지어 언어의 선형적 통일성을 깨뜨리고 문장,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제시합니다. Nietzsche's aphorisms shatter the linear unity of knowledge, only to invoke the cyclic unity of the eternal return, present as the nonknown in thought. 니체의 격언은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깨뜨리고 사유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귀환의 순환적 통일성을 불러일으킵니다. This is as much as to say that the fascicular system does not really break with dualism, with the complementarity between a subject and an object, a natural reality and a spiritual reality: unity is consistently thwarted and obstructed in the object, while a new type of unity triumphs in the subject. 이것은 다발성 체계가 주체와 객체, 자연적 실재와 영적 실재 사이의 상보성을 가진 이원론과 실제로 단절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통일성은 객체에서 지속적으로 좌절되고 방해받는 반면,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은 주체에서 승리합니다. The world has lost its pivot; the subject can no longer even dichotomize, but accedes to a higher unity, of ambivalence or over determination, in an always supplementary dimension to that of its object. 세계는 구심점을 잃었고, 주체는 더 이상 양분할 수 없으며, 항상 대상에 대한 보완적인 차원에서 양가성 또는 과도한 결단력의 더 높은 통합에 도달합니다. The world has become chaos, but the book remains the image of the world: radicle-chaosmos rather than root-cosmos. 세상은 혼돈이 되었지만, 책 속에는 뿌리-코스모스가 아닌 방사형-카오스모스라는 세상의 이미지가 남아 있습니다. A strange mystification: a book all the more total for being fragmented. 이상한 신화화: 파편화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총체적인 책입니다. At any rate, what a vapid idea, the book as the image of the world. 어쨌든 책이 세상의 이미지라는 것은 참으로 허무맹랑한 생각입니다.

Peut-être ne peut-on poser la question Qu'est-ce que la philosophie? que tard, quand vient la vieillesse, et l'heure de parler concrètement. En fait, la bibliographie est très mince, C'est une question qu'on pose dans une agitation discrète, à minuit, quand on n'a plus rien à demander. Auparavant on la posait, on ne cessait pas de la poser, mais c'était trop indirect ou oblique, trop artificiel, trop abstrait, et on l'exposait, on la dominait en passant plus qu'on n'était happé par elle. On n'était pas assez sobre. On avait trop envie de faire de la philosophie, on ne se demandait pas ce qu'elle était, sauf par exercice de style; on n'avait pas atteint à ce point de non-style où l'on peut dire enfin : mais qu'est-ce que c'était, ce que j'ai fait toute ma vie? Il y a des cas où la vieillesse donne, non pas une éternelle jeunesse, mais au contraire une souveraine liberté, une nécessité pure où l'on jouit d'un moment de grâce entre la vie et la mort, et où toutes les pièces de la machine se combinent pour envoyer dans. l'avenir un trait qui traverse les âges : Le Titien, Turner, Monet. Turner vieux a acquis ou conquis le droit de mener la peinture sur un chemin désert et sans retour qui ne se distingue plus d'une dernière question. Peut-être la Vie de Rancé marque-t-elle à la fois la vieillesse de Chateaubriand et le début de la littérature moderne. Le cinéma aussi nous offre parfois ses dons du troisième âge, où Ivens par exemple mêle son rire à celui de la sorcière dans le vent déchaîné. De même en philosophie, la Critique du jugement de Kant est une œuvre de vieillesse, une œuvre déchaînée derrière laquelle ne cesseront de courir ses descendants : toutes les facultés de l'esprit franchissent leurs limites, ces mêmes limites que Kant avait si soigneusement fixées dans ses livres de maturité.
아마도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노년이 되어 구체적으로 말할 때가 되어서야 인생의 후반부에나 던질 수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더 이상 묻고 싶은 것이 없는 한밤중에 은근한 동요 속에서 던지는 질문이죠. 우리는 그 질문을 하곤 했고, 그 질문을 멈추지 않았지만, 너무 간접적이거나 비스듬하고, 너무 인위적이고, 너무 추상적이었고, 그 질문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지나치면서 그것을 노출하고 지배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냉정하지 못했습니다. 철학을 하기에 너무 열중했고, 철학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지 않았으며, 스타일의 연습으로만 생각했고, 마침내 '도대체 그게 뭐였지, 내가 평생 해온 게 뭐였지'라고 말할 수 있는 비스타일의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노년이 영원한 젊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권적인 자유, 삶과 죽음 사이의 은총의 순간을 누리고 모든 조각이 결합하여 시대를 가로 지르는 선을 미래로 보내는 순수한 필연성인 경우가 있습니다 : 티치아노, 터너, 모네. 늙은 터너는 돌아올 수 없는 황량한 길을 따라 그림을 그릴 권리를 획득하거나 정복했고, 더 이상 마지막 질문과 구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라 비 드 랑세>는 샤토브리앙의 노년기와 현대 문학의 시작을 함께 기념하는 작품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역시 때때로 우리에게 노년의 선물을 선사하는데, 예를 들어 이븐스는 <레 벤트 데셰네>에서 자신의 웃음과 마녀의 웃음을 섞어 보여줍니다.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노년의 작품이자 그의 후손들이 영원히 쫓아갈 격렬한 작품입니다. 정신의 모든 능력이 한계를 넘어서는, 칸트가 그의 성숙한 저서에서 신중하게 설정했던 것과 같은 한계를 넘어서는 작품입니다.

Nous ne pouvons pas prétendre à un tel statut. Simplement l'heure est venue pour nous de demander ce que c'est que la philosophie. Et nous n'avions pas cessé de le faire précédemment, et nous avions déjà la réponse qui n'a pas varié : la philosophie est l'art de former, d'inventer, de fabriquer des concepts. Mais il ne fallait pas seulement que la réponse recueille la question, il fallait aussi qu'elle détermine une heure, une occasion, des circonstances, des paysages et des personnages, des conditions et des inconnues de la question. Il fallait pouvoir la poser « entre amis », comme une confidence ou une confiance, ou bien face à l'ennemi comme un défi, et tout à la fois atteindre à cette heure, entre chien et loup, où l'on se méfie même de l'ami. C'est l'heure où l'on dit : « C'était ça, mais je ne sais pas si je l'ai bien dit, ni si j'ai été assez convaincant ». Et l'on s'aperçoit qu'il importe peu d'avoir bien dit ou d'avoir été convaincant, puisque de toute manière c'est ça maintenant.
우리는 그런 지위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철학이 무엇인지 물어야 할 때가 왔습니다. 철학은 개념을 형성하고, 발명하고, 창조하는 예술이라는 동일한 대답을 이미 내놓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질문에 대한 대답일 뿐만 아니라 질문의 시간, 상황, 풍경, 인물, 조건, 미지의 상황까지 고려해야 했습니다. '친구 사이'에서 자신감이나 신뢰로 질문할 수도 있고, 적에게 도전으로 맞설 수도 있으며, 동시에 친구마저도 불신하는 개와 늑대 사이의 그 순간에 도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다 끝났지만 내가 제대로 말했는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말의 의미이기 때문에 내가 잘 말했는지, 설득력이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Les concepts, nous le verrons, ont besoin de personnages conceptuels qui contribuent à leur définition. Ami est un tel personnage, dont on dit même qu'il témoigne pour une origine grecque de la philosophie : les autres civilisations avaient des Sages, mais les Grecs présentent ces « amis » qui ne sont pas simplement des sages plus modestes. Ce serait les Grecs qui auraient entériné la mort du Sage, et l'auraient remplacé par les philosophes, les amis de la sagesse, ceux qui cherchent la sagesse, mais ne la possèdent pas formellement. Mais il n'y aurait pas seulement différence de degré, comme sur une échelle, entre le philosophe et le sage : le vieux sage venu d'Orient pense peut-être par Figure, tandis que le philosophe invente et pense le Concept. La sagesse a beaucoup changé. I est d'autant plus difficile de savoir ce que signifie « ami », même et surtout chez les Grecs. Ami désignerait-il une certaine intimité compétente, une sorte de goût matériel et une potentialité, comme celle du menuisier avec le bois : le bon menuisier est en puissance du bois, il est l'ami du bois? La question est importante, puisque l'ami tel qu'il apparaît dans la philosophie ne désigne plus un personnage extrinsèque, un exemple ou une circonstance empirique, mais une présence intrinsèque à la pensée, une condition de possibilité de la pensée même, une catégorie vivante, un vécu transcendantal. Avec la philosophie, les Grecs font subir un coup de force à l'ami qui n'est plus en rapport avec un autre, mais avec une Entité, une Objectité, une Essence. Ami de Platon, mais plus encore ami de la sagesse, du vrai ou du concept, Philalèthe et Théophile... Le philosophe s'y connaît en concepts, et en manque de concepts, il sait lesquels sont inviables, arbitraires ou inconsistants, ne tiennent pas un instant, lesquels au contraire sont bien faits et témoignent d'une création même inquiétante ou dangereuse.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개념에는 개념을 정의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개념적 인물이 필요합니다. 다른 문명에도 현자가 있었지만 그리스인들은 단순히 겸손한 현자가 아닌 '친구'를 소개했는데, 이 '친구'는 철학의 그리스적 기원을 증언한다고도 합니다. 현자의 죽음을 인정하고 그를 지혜의 친구인 철학자, 즉 지혜를 추구하지만 공식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로 대체한 것은 그리스인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자와 현자의 차이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것과 같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동양의 옛 현자는 형상(Figure)의 관점에서 사고하는 반면 철학자는 개념(Concept)의 관점에서 발명하고 사고합니다. 지혜는 많이 변했습니다. 이로 인해 특히 그리스인들 사이에서도 '친구'의 의미를 알기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친구'는 나무를 가진 목수와 같이 어떤 유능한 친밀감, 일종의 물질적 취향 및 잠재력을 지정합니까 : 좋은 목수는 잠재적으로 나무이며, 그는 나무의 친구입니까? 철학에 나타나는 친구는 더 이상 외적인 사람, 예 또는 경험적 상황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에 내재 된 존재, 사고 자체의 가능성의 조건, 살아있는 범주, 초월 적 경험을 지정하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한 질문입니다. 철학의 출현과 함께 그리스인들은 더 이상 타자와의 관계가 아닌 실체, 객관성, 본질과 관계하는 친구를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플라톤의 친구이자 지혜, 진리 또는 개념의 친구인 필랄레테와 테오필레스는... 철학자는 개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며, 개념이 부족할 때 어떤 개념이 실행 불가능하거나 자의적이거나 일관성이 없는지, 어떤 개념이 잠시도 함께 유지되지 않는지, 반대로 어떤 개념이 잘 만들어져 불안하거나 위험한 창조물을 증언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Que veut dire ami, quand il devient personnage conceptuel, ou condition pour l'exercice de la pensée? Ou bien amant, n'est-ce pas plutôt amant? Et l'ami ne va-t-il pas réintroduire jusque dans la pensée un rapport vital avec l'Autre qu'on avait cru exclure de la pensée pure? Ou bien encore ne s'agit-il pas de quelqu'un d'autre que l'ami ou l'amant ? Car si le philosophe est l'ami ou l'amant de la sagesse, n'est-ce pas parce qu'il y prétend, s'y efforçant en puissance plutôt que la possédant en acte? L'ami serait donc aussi le prétendant, et celui dont il se dirait l'ami, ce serait la Chose sur laquelle porterait la prétention, mais non pas le tiers, qui deviendrait au contraire un rival ? L'amitié comporterait autant de méfiance émulante à l'égard du rival que d'amoureuse tension vers l'objet du désir. Quand l'amitié se tournerait vers l'essence, les deux amis seraient comme le prétendant et le rival (mais qui les distinguerait ?). C'est sous ce premier trait que la philosophie semble une chose grecque et coïncide avec l'apport des cités : avoir formé des sociétés d'amis ou d'égaux, mais aussi bien avoir promu entre elles et en chacune des rapports de rivalité, opposant des prétendants dans tous les domaines, en amour, dans les jeux, les tribunaux, les magistratures, la politique, et jusque dans la pensée qui ne trouverait pas seulement sa condition dans l'ami, mais dans le prétendant et dans le rival (la dialectique que Platon définit par l'amphisbetesis). La rivalité des hommes libres, un athlétisme généralisé : l'agôn. C'est à l'amitié de concilier l'intégrité de l'essence et la rivalité des prétendants. N'est-ce pas une trop grande tâche ?
친구가 개념적 인물이 될 때, 또는 사고의 조건이 될 때 친구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니면 오히려 연인이 아닌가? 그리고 친구는 우리가 순수한 사유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했던 타자와의 중요한 관계를 사유에 다시 도입하지 않는가? 아니면 친구나 연인이 아닌 다른 사람인가? 만약 철학자가 지혜의 친구나 애인이라면, 그는 지혜를 행동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력에서 그것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면 그 친구는 또한 구혼자가 될 것이고, 그가 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주장이 관계하는 '그 무엇'이 될 것이지, 대신 경쟁자가 되는 제3자가 될 수는 없지 않을까? 우정에는 욕망의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긴장만큼이나 라이벌에 대한 불신을 흉내 내는 것도 포함될 것입니다. 우정이 본질로 향할 때 두 친구는 구혼자와 라이벌과 같은 존재가 됩니다(하지만 누가 구분할 수 있을까요?). 이 첫 번째 측면에서 철학은 그리스적인 것으로 보이며 도시의 기여와 일치합니다: 친구 또는 동등한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를 형성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와 각 사회 내에서 경쟁 관계를 조장하여 모든 분야, 사랑, 게임, 법정, 사법, 정치, 심지어는 사상에서도 구혼자와 라이벌을 대립시켰는데, 그 조건은 친구뿐만 아니라 구혼자와 라이벌(플라톤이 암피스베티시스로 정의한 변증법)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자유인의 경쟁, 일반화된 운동 정신: 아고온. 본질의 무결성과 구혼자의 경쟁을 조화시키는 것은 우정에 달려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일 아닌가요?

Le philosophe est l'ami du concept, il est en puissance de concept. C'est dire que la philosophie n'est pas un simple ait de former, d'inventer ou de fabriquer des concepts, car les concepts ne sont pas nécessairement des formes, des trouvailles ou des produits. La philosophie, plus rigoureusement, est la discipline qui consiste à créer des concepts. L'ami serait l'ami de ses propres créations? Ou bien est-ce l'acte du concept qui renvoie à la puissance de l'ami, dans l'unité du créateur et de son double? Créer des concepts toujours nouveaux, c'est l'objet de la philosophie. C'est parce que le concept doit être créé qu'il renvoie au philosophe comme à celui qui l'a en puissance, ou qui en a la puissance et la compétence. On ne peut pas objecter que la création se dit plutôt du sensible et des arts, tant l'art fait exister des entités spirituelles, et tant les concepts philosophiques sont aussi des « sensibilia ». A dire vrai, les sciences, les arts, les philosophies sont également créateurs, bien qu'il revienne à la philosophie seule de créer des concepts au sens strict. Les concepts ne nous attendent pas tout faits, comme des corps célestes. Il n'y a pas de ciel pour les concepts. Ils doivent être inventés, fabriqués ou plutôt créés, et ne seraient rien sans la signature de ceux qui les créent. Nietzsche a déterminé la tâche de la philosophie quand il écrivit : « Les philosophes ne doivent plus se contenter d'accepter les concepts qu'on leur donne, pour seulement les nettoyer et les faire reluire, mais il faut qu'ils commencent par les fabriquer, les créer, les poser et persuader les hommes d'y recourir. Jusqu'à présent, somme toute, chacun faisait confiance à ses concepts, comme à une dot miraculeuse venue de quelque monde également miraculeux », mais il faut remplacer la confiance par la méfiance, et c'est des concepts que le philosophe doit se méfier le plus, tant qu'il ne les a pas lui-même créés (Platon le savait bien, quoiqu'il ait enseigné le contraire...). Platon disait qu'il fallait contempler les Idées, mais il avait fallu d'abord qu'il crée le concept d'Idée. Que vaudrait un philosophe dont on pourrait dire : il n'a pas créé de concept, il n'a pas créé ses concepts?
철학자는 개념의 친구이며, 개념의 힘 안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개념은 반드시 형태, 발견 또는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철학은 단순히 개념을 형성, 발명 또는 제조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학문입니다. 친구는 자신의 창조물의 친구입니까? 아니면 창조자와 그 이중체의 일치에서 친구의 힘을 다시 언급하는 개념의 행위일까요? 철학은 끊임없이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다. 개념이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에 철학자를 권력을 가진 자, 즉 개념을 창조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진 자로 지칭하는 것이다. 예술은 정신적인 실체를 존재하게 하고, 철학적 개념도 '감각적'이기 때문에 창조는 감성과 예술에 대해 더 적절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사실 과학, 예술, 철학도 창조자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개념을 창조하는 것은 철학에만 달려 있습니다. 개념은 천체처럼 기성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개념을 위한 천국은 없습니다. 개념은 발명, 제조 또는 오히려 창조되어야 하며, 개념을 창조하는 사람들의 서명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철학의 임무를 정의했습니다. "철학자는 더 이상 주어진 개념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정리하고 빛나게 만드는 데 만족해서는 안되며, 개념을 만들고, 창조하고, 배치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하도록 설득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의 개념을 마치 기적 같은 세계에서 온 기적 같은 지참금인 것처럼 믿었지만 믿음은 불신으로 대체되어야하며 철학자가 직접 만들지 않는 한 가장 불신해야하는 것은 개념입니다 (플라톤은 이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반대를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은 우리가 이데아를 숙고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먼저 이데아라는 개념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철학자의 가치는 무엇일까요: 그는 개념을 창조하지 않았고, 자신의 개념을 창조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Nous voyons au moins ce que la philosophie n'est pas : elle n'est pas contemplation, ni réflexion, ni communication, même si elle a pu croire être tantôt l'un, tantôt l'autre, en raison de la capacité de toute discipline à engendrer ses propres illusions, et à se cacher derrière un brouillard qu'elle émet spécialement. Elle n'est pas contemplation, car les contemplations sont les choses elles-mêmes en tant que vues dans la création de leurs propres concepts. Elle n'est pas réflexion, parce que personne n'a besoin de philosophie pour réfléchir sur quoi que ce soit : on croit donner beaucoup à la philosophie en en faisant l'art de la réflexion, mais on lui retire tout, car les mathématiciens comme tels n'ont jamais attendu les philosophes pour réfléchir sur les mathématiques, ni les artistes sur la peinture ou la musique; dire qu'ils deviennent alors philosophes est une mauvaise plaisanterie, tant leur réflexion appartient à leur création respective. Et la philosophie ne trouve aucun refuge ultime dans la communication, qui ne travaille en puissance que des opinions, pour créer du « consensus » et non du concept. L'idée d'une conversation démocratique occidentale entre amis n'a jamais produit le moindre concept; elle vient peut-être des Grecs, mais ceux-ci s'en méfiaient tellement, et lui faisaient subir un si rude traitement, que le concept était plutôt comme l'oiseau soliloque ironique qui survolait le champ de bataille des opinions rivales anéanties (les hôtes ivres du banquet). La philosophie ne contemple pas, ne réfléchit pas, ne communique pas, bien qu'elle ait à créer des concepts pour ces actions ou passions. La contemplation, la réflexion, la communication ne sont pas des disciplines, mais des machines à constituer des Universaux dans toutes les disciplines. Les Universaux de contemplation, puis de réflexion, sont comme les deux illusions que la philosophie a déjà parcourues dans son rêve de dominer les autres disciplines (idéalisme objectif et idéalisme subjectif), et la philosophie ne s'honore pas davantage en se présentant comme une nouvelle Athènes et en se rabattant sur des Universaux de la communication qui fourniraient les règles d'une maîtrise imaginaire des marchés et des médias (idéalisme intersubjectif). Toute création est singulière, et le concept comme création proprement philosophique est toujours une singularité. Le premier principe de la philosophie est que les Universaux n'expliquent rien, ils doivent être eux-mêmes expliqués.
적어도 우리는 철학이 무엇이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철학이 스스로를 때로는 둘 중 하나, 때로는 다른 하나라고 믿었을지라도 모든 학문이 자신의 환상을 생성하고 특별히 방출하는 안개 뒤에 숨을 수 있는 능력 때문일지라도 철학은 숙고도, 성찰도, 소통도 아닙니다. 숙고는 자신의 개념을 창조할 때 보이는 사물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숙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성찰이 아니다, 왜냐하면 철학은 어떤 것을 성찰하기 위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학을 성찰의 예술로 만들어서 철학에 많은 것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수학자들은 철학자가 수학에 대해 성찰하기를 기다린 적이 없고, 예술가들은 그림이나 음악에 대해 성찰하기를 기다린 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철학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농담이며, 그들의 성찰은 각자의 창조물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념이 아닌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의견에 대해서만 작용할 수 있는 의사소통에서 철학의 궁극적인 피난처는 없습니다. 친구들 사이의 서양의 민주적 대화라는 개념은 그리스인들에게서 유래했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그것을 너무 의심하고 가혹하게 대했기 때문에 그 개념은 산산이 부서진 경쟁 의견의 전쟁터(연회의 술 취한 손님들) 위를 날아다니는 아이러니한 독백의 새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이러한 행동이나 열정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숙고, 성찰, 소통을 하지 않습니다. 숙고, 성찰, 소통은 학문이 아니라 모든 학문에서 보편성을 구성하기 위한 기계입니다. 숙고와 성찰의 보편은 철학이 다른 학문을 지배하려는 꿈에서 이미 겪은 두 가지 환상(객관적 이상주의와 주관적 이상주의)과 같으며, 철학은 스스로를 새로운 아테네로 제시하고 시장과 미디어의 상상의 지배를 위한 규칙을 제공하는 소통의 보편( 상호 주관적 이상주의)에 빠지는 것으로 더 이상 명예를 얻지 못한다. 모든 창조물은 특이성을 지니고 있으며, 제대로 된 철학적 창조물로서의 개념은 항상 특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철학의 첫 번째 원칙은 보편성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Se connaître soi-même - apprendre à penser - faire comme si rien n'allait de soi - s'étonner, « s'étonner que l'étant est ».... ces déterminations de la philosophie et beaucoup d'autres forment des attitudes intéressantes, quoique lassantes à la longue, mais elles ne constituent pas une occupation bien définie, une activité précise, même d'un point de vue pédagogi. que. On peut considérer comme décisive, au contraire, cette définition de la philosophie : connaissance par purs concepts. Mais il n'y a pas lieu d'opposer la connaissance par concepts, et par construction de concepts dans l'expérience possible ou l'intuition. Car, suivant le verdict nietzschéen, vous ne connaîtrez rien par concepts si vous ne les avez pas d'abord créés, c'est-à-dire construits dans une intuition qui leur est propre: un champ, un plan, un sol, qui ne se confond pas avec eux, mais qui abrite leurs germes et les personnages qui les cultivent. Le constructivisme exige que toute création soit une construction sur un plan qui lui donne une existence autonome. Créer des concepts, au moins, c'est faire quelque chose. La question de l'usage ou de l'utilité de la philosophie, ou même de sa nocivité (à qui nuit-elle?) en est modifiée.
자신을 아는 것-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것-자명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놀라움을 느끼는 것, "존재한다는 것에 놀라움을 느끼는 것" .... 철학에 대한 이러한 결정과 다른 많은 결정은 장기적으로 피곤하고, 교육적 관점에서도 잘 정의된 직업, 정확한 활동을 구성하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태도를 형성합니다. 오히려 순수한 개념을 통한 지식이라는 철학의 정의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념에 의한 지식과 가능한 경험이나 직관에 의한 개념의 구성에 반대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니체의 판단에 따르면, 개념을 먼저 만들지 않았다면, 즉 개념과 혼동되지 않고 씨앗과 씨앗을 경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밭, 계획, 토양과 같은 직관으로 개념을 구성하지 않았다면 개념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축주의는 모든 창조물이 자율적인 존재를 갖는 평면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개념을 만든다는 것은 적어도 무언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철학의 유용성이나 유용성, 심지어 그 해로움(누구에게 해를 끼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바꾸어 놓습니다.

Beaucoup de problèmes se pressent sous les yeux hallucinés d'un vieil homme qui verrait s'affronter toutes sortes de concepts philosophiques et de personnages conceptuels. Et d'abord les concepts sont et restent signés, substance d'Aristote, cogito de Descartes, monade de Leibniz, condition de Kant, puissance de Schelling, durée de Bergson... Mais aussi certains réclament un mot extraordinaire, parfois barbare ou choquant, qui doit les désigner, tandis que d'autres se contentent d'un mot courant très ordinaire qui se gonfle d'harmoniques si lointaines qu'elles risquent d'être imperceptibles à une oreille non philosophique. Certains sollicitent des archaïsmes, d'autres des néologismes, traversés d'exercices étymologiques presque fous : l'étymologie comme athlétisme proprement philosophique. Il doit y avoir dans chaque cas une étrange nécessité de ces mots et de leur choix, comme élément de style. Le baptême du concept sollicite un goût proprement philosophique qui procède avec violence ou avec insinuation, et qui constitue dans la langue une langue de la philosophie, non seulement un vocabulaire, mais une syntaxe atteignant au sublime ou à une grande beauté. Or, quoique datés, signés et baptisés, les concepts ont leur manière de ne pas mourir, et pourtant sont soumis à des contraintes de renouvellement, de remplacement, de mutation qui donnent à la philosophie une histoire et aussi une géographie agitées dont chaque moment, chaque lieu se conservent, mais dans le temps, et passent, mais en dehors du temps. Si les concepts ne cessent pas de changer, on demandera quelle unité demeure pour les philosophies? Est-ce la même chose pour les sciences, pour les arts qui ne procèdent pas par concepts? Et qu'en est-il de leur histoire respective? Si la philosophie est cette création continuée de concepts, on demandera évidemment ce qu'est un concept comme Idée philosophique, mais aussi en quoi consistent les autres Idées créatrices qui ne sont pas des concepts, qui reviennent aux sciences et aux arts, qui ont leur propre histoire et leur propre devenir, et leurs propres rapports variables entre elles et avec la philosophie. L'exclusivité de la création des concepts assure à la philosophie une fonction, mais ne lui donne aucune prééminence, aucun privilège, tant il y a d'autres façons de penser et de créer, d'autres modes d'idéation qui n'ont pas à passer par les concepts, ainsi la pensée scientifique. Et l'on reviendra toujours à la question de savoir à quoi sert cette activité de créer des concepts, telle qu'elle se différencie de l'activité scientifique ou artistique : pourquoi faut-il créer des concepts, et toujours de nouveaux concepts, sous quelle nécessité, à quel usage? Pour quoi faire ? La réponse d'après laquelle la grandeur de la philosophie serait justement de ne servir à rien est une coquetterie qui n'amuse même plus les jeunes gens. En tout cas, nous n'avons jamais eu de problème concernant la mort de la métaphysique ou le dépassement de la philosophie : ce sont d'inutiles, de pénibles radotages. On parle de la faillite des systèmes aujourd'hui, alors que c'est seulement le concept de système qui a changé. S'il y a lieu et temps de créer des concepts, l'opération qui y procède s'appellera toujours philosophie, ou ne s'en distinguerait même pas si on lui donnait un autre nom.
온갖 철학적 개념과 개념적 인물들이 서로 대립하는 것을 보는 노인의 환각적인 눈앞에는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선,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물질, 데카르트의 코기토, 라이프니츠의 모나드, 칸트의 조건, 셸링의 힘, 베르그송의 지속... 등 서명되어 있고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때로는 야만적이거나 충격적인 특수한 단어를 요구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철학적이지 않은 귀로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먼 화음으로 부풀려진 매우 평범한 일상 단어에 만족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고고학을, 어떤 이들은 신조어를 사용하여 거의 미친 듯이 어원 운동을 합니다: 순전히 철학적 운동으로서의 어원. 각각의 경우에 스타일의 요소로서 이러한 단어와 그 선택에 대한 이상한 필요성이 있어야합니다. 개념의 세례는 폭력이나 암시로 진행되는 적절한 철학적 취향을 요구하며, 그것은 어휘뿐만 아니라 숭고함이나 위대한 아름다움에 도달하는 문법을 언어 속에서 철학의 언어로 구성합니다. 이제 개념은 날짜가 매겨지고, 기호화되고, 세례를 받지만 갱신, 대체, 돌연변이의 제약을 받으면서도 죽지 않는 나름의 방식을 가지고 있어 철학에 격동의 역사와 지리를 부여하며, 매 순간과 모든 장소가 시간 속에 보존되지만 동시에 지나가고, 시간 밖에서 사라지는 지형을 형성한다. 개념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철학에는 어떤 통일성이 남을까요? 개념으로 진행되지 않는 과학과 예술도 마찬가지일까요? 그리고 각각의 역사는 어떨까요? 철학이 개념의 끊임없는 창조라면, 우리는 철학적 관념으로서의 개념이 무엇인지, 그리고 개념이 아닌 다른 창조적 관념들, 즉 과학과 예술에 속하는, 그 자체의 역사와 미래를 가진, 그리고 그 자체와 철학과의 가변적 관계를 가진 관념들이 무엇인지 분명히 물어야 할 것이다. 개념 창조의 배타성은 철학에 기능을 부여하지만 과학적 사고와 같이 개념을 거치지 않아도되는 다른 사고 및 창조 방식, 다른 관념의 방식이 있기 때문에 철학에 어떤 우월성이나 특권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과학적 또는 예술적 활동과 구별되는 개념 창조 활동의 요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왜 개념을 창조하고 항상 새로운 개념을 어떤 필요성에 따라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무슨 목적으로? 철학의 위대함이 바로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대답은 더 이상 젊은이들을 즐겁게하지 않는 속임수입니다. 어쨌든 형이상학의 죽음이나 철학을 초월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쓸모없고 지루한 헛소리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시스템의 붕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 시스템의 개념만 바뀐 것일 뿐입니다. 개념을 창조하는 시간과 장소가 있다면, 그 작업을 수행하는 것은 항상 철학이라고 불릴 것이며, 다른 이름이 주어지더라도 그것과 구별되지 않을 것입니다.

Nous savons pourtant que l'ami ou l'amant comme prétendant ne va pas sans rivaux. Si la philosophie a une origine grecque autant qu'on veut bien le dire, c'est parce que la cité, à la différence des empires ou des États, invente l'agôn comme règle d'une société des « amis », la communauté des hommes libres en tant que rivaux (citoyens). C'est la situation constante que décrit Platon : si chaque citoyen prétend à quelque chose, il rencontre nécessairement des rivaux, si bien qu'il faut pouvoir juger du bien-fondé des prétentions. Le menuisier prétend au bois, mais se heurte au forestier, au bûcheron, au charpentier qui disent : C'est moi, c'est moi l'ami du bois. S'il s'agit de prendre soin des hommes, il y a beaucoup de prétendants qui se présentent comme l'ami de l'homme, le paysan qui le nourrit, le tisserand qui l'habille, le médecin qui le soigne, le guerrier qui le protège". Et si, dans tous ces cas, la sélection se fait malgré tout dans un cercle quelque peu restreint, il n'en est plus de même en politique où n'importe qui peut prétendre à n'importe quoi, dans la démocratie athénienne telle que la voit Platon. D'où la nécessité pour Platon d'une remise en ordre, où l'on crée les instances grâce auxquelles juger du bien-fondé des prétentions : ce sont les Idées comme concepts philosophiques. Mais même là ne va-t-on pas rencontrer toutes sortes de prétendants pour dire : le vrai philosophe, c'est moi, c'est moi l'ami de la Sagesse ou du Bien-fondé ? La rivalité culmine avec celle du philosophe et du sophiste, qui s'arrachent les dépouilles du vieux sage, mais comment distinguer le faux ami du vrai, et le concept du simulacre ? Le simulateur et l'ami : c'est tout un théâtre platonicien qui fait proliférer les personnages conceptuels en les dotant des puissances du comique et du tragique.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요구자로서의 친구나 연인에게 라이벌이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철학이 그리스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제국이나 국가와 달리 도시는 '친구'의 사회, 즉 자유인의 공동체를 라이벌(시민)로서 규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묘사 한 끊임없는 상황입니다. 모든 시민이 무언가에 대한 주장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라이벌을 만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 할 수 있어야합니다. 목수는 나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지만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 말하는 산림청장, 나무꾼, 목수에 맞서게 됩니다. 사람을 돌보는 문제라면, 자신을 사람의 친구, 먹이를 주는 농부, 옷을 입히는 직공, 치료하는 의사, 보호하는 전사로 내세우는 요구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경우에서 선택은 다소 제한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지지만, 플라톤이 보기에 누구나 무엇이든 주장할 수 있는 정치, 즉 아테네 민주주의에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은 주장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기관을 만들어 상황을 정리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것이 바로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이데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우리는 내가 진정한 철학자다, 나는 지혜의 친구다, 또는 근거가 있는 자의 친구라고 말하는 온갖 종류의 허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옛 현자의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철학자와 소피스트의 경쟁은 절정에 달하지만, 거짓 친구와 참 친구를, 개념과 시뮬라크르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시뮬라크르와 친구 : 그것은 희극과 비극의 힘을 부여하여 개념적 인물을 확산시키는 전체 플라톤 극장입니다.

Plus près de nous, la philosophie a croisé beaucoup de nouveaux rivaux. Ce furent d'abord les sciences de l'homme, et notamment la sociologie, qui voulaient la remplacer. Mais comme la philosophie avait de plus en plus méconnu sa vocation de créer des concepts, pour se réfugier dans les Universaux, on ne savait plus très bien de quoi il était question. S'agissait-il de renoncer à toute création de concept au profit d'une stricte science de l'homme, ou bien au contraire de transformer la nature des concepts en en faisant tantôt des représentations collectives, tantôt des conceptions du monde créées par les peuples, leurs forces vitales, historiques et spirituelles ? Puis ce fut le tour de l'épistémologie, de la linguistique, ou même de la psychanalyse - et de l'analyse logique. D'épreuve en épreuve, la philosophie affronterait des rivaux de plus en plus insolents, de plus en plus calamiteux, que Platon lui-même n'aurait pas imaginés dans ses moments les plus comiques. Enfin le fond de la honte fut atteint quand l'informatique, le marketing, le design, la publicité, toutes les disciplines de la communication, s'emparèrent du mot concept lui-même, et dirent : c'est notre affaire, c'est nous les créatifs, nous sommes les concepteurs! C'est nous les amis du concept, nous le mettons dans nos ordinateurs. Information et créativité, concept et entreprise : une abondante bibliographie déjà... Le marketing a retenu l'idée d'un certain rapport entre le concept et l'événement; mais voilà que le concept est devenu l'ensemble des présentations d'un produit (historique, scientifique, artistique, sexuel, pragmatique...) et l'événement, l'exposition qui met en scène des présentations diverses et l« échange d'idées » auquel elle est censée donner lieu. Les seuls événements sont des expositions, et les seuls concepts, des produits qu'on peut vendre. Le mouvement général qui a remplacé la Critique par la promotion commerciale n'a pas manqué d'affecter la philosophie. Le simulacre, la simulation d'un paquet de nouilles est devenu le vrai concept, et le présentateur-exposant du produit, marchandise ou œuvre d'art, est devenu le philosophe, le personnage conceptuel ou l'artiste. Comment la philosophie, une vieille personne, s'alignerait-elle avec des jeunes cadres dans une course aux universaux de la communication pour déterminer une forme marchande du concept, MERZ? Certes, il est douloureux d'apprendre que « Concept » désigne une société de service et d'ingénierie informatique. Mais plus la philosophie se heurte à des rivaux impudents et niais, plus elle les rencontre en son propre sein, plus elle se sent d'entrain pour remplir la tâche, créer des concepts, qui sont des aérolithes plutôt que des marchandises. Elle a des fous rires qui emportent ses larmes. Ainsi donc la question de la philosophie est le point singulier où le concept et la création se rapportent l'un à l'autre.
가까운 예로, 철학은 많은 새로운 라이벌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인간 과학, 특히 사회학이 철학을 대체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철학이 점점 더 개념을 창조하는 소명을 포기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피신하면서 무엇이 위태로운지 더 이상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에 대한 엄격한 과학을 위해 모든 개념 창조를 포기하는 것이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반대로 개념을 때로는 집단적 표상, 때로는 민족과 그들의 생명력, 역사성, 영적 힘에 의해 창조된 세계의 개념으로 만들어 개념의 본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문제였을까요? 그런 다음 인식론, 언어학, 심지어 정신 분석과 논리적 분석의 차례였습니다. 시련과 시련을 거듭하면서 철학은 점점 더 무례하고 재앙적인 라이벌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이는 플라톤 자신이 가장 희극적인 순간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컴퓨터 과학, 마케팅, 디자인, 광고,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분야가 컨셉이라는 단어 자체를 붙잡고 "컨셉은 우리의 사업이고, 우리는 창의적인 사람이고, 우리는 디자이너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부끄러움의 깊이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컨셉의 친구이며, 컨셉을 컴퓨터에 넣습니다. 정보와 창의성, 컨셉과 비즈니스: 이미 풍부한 참고 문헌... 마케팅은 컨셉과 이벤트 사이의 특정 관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유지해 왔지만 이제 컨셉은 제품 (역사적, 과학적, 예술적, 성적, 실용적 ...)의 모든 프레젠테이션과 이벤트, 다양한 프레젠테이션을 상연하는 전시회 및 그것이 발생해야하는 '아이디어 교환'이되었습니다. 유일한 이벤트는 전시회이고 유일한 개념은 판매 할 수있는 제품입니다. 비평을 상업적 홍보로 대체 한 일반적인 움직임은 철학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국수 한 봉지의 모사 인 시뮬라크르가 실제 개념이되었고 제품, 상품 또는 예술 작품의 발표자-전시자는 철학자, 개념적 인물 또는 예술가가되었습니다. '메르츠'라는 개념의 시장성 있는 형태를 결정하기 위해 의사소통의 보편성을 놓고 경쟁하는 젊은 경영진과 노년층인 철학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물론 '콘셉트'가 컴퓨터 엔지니어링 및 서비스 회사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철학은 뻔뻔하고 어리석은 라이벌을 만나면 만날수록 상품이 아닌 운석과 같은 개념을 창조하는 일에 더 큰 보람을 느낍니다. 눈물을 씻어내는 웃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의 문제는 개념과 창조가 서로 관련되는 특이점입니다.

Les philosophes ne se sont pas suffisamment occupés de la nature du concept comme réalité philosophique. Ils ont préféré le considérer comme une connaissance ou une représentation données, qui s'expliquaient par des facultés capables de le former (abstraction, ou généralisation) ou d'en faire usage (jugement). Mais le concept n'est pas donné, il est créé, à créer; il n'est pas formé, il se pose lui-même en lui-même, auto-position. Les deux s'impliquent, puisque ce qui est véritablement créé, du vivant à l'œuvre d'art, jouit par là même d'une auto-position de soi, ou d'un caractère autopoiétique à quoi on le reconnaît. D'autant plus le concept est créé, d'autant plus il se pose. Ce qui dépend d'une libre activité créatrice, c'est aussi ce qui se pose en soi-même, indépendamment et nécessairement : le plus subjectif sera le plus objectif. Ce sont les post-kantiens qui ont porté le plus d'attention en ce sens au concept comme réalité philosophique, notamment Schelling et Hegel. Hegel a défini puissamment le concept par les Figures de sa création et les Moments de son autoposition : les figures sont devenues des appartenances du concept, parce qu'elles constituent le côté sous lequel le concept est créé par et dans la conscience, à travers la succession des esprits, tandis que les moments dressent l'autre côté suivant lequel le concept se pose lui-même et réunit les esprits dans l'absolu du Soi. Hegel montrait ainsi que le concept n'a rien à voir avec une idée générale ou abstraite, pas plus qu'avec une Sagesse incréée qui ne dépendrait pas de la philosophie même. Mais c'était au prix d'une extension indéterminée de la philosophie qui ne laissait guère subsister le mouvement indépendant des sciences et des arts, parce qu'elle reconstituait des universaux avec ses propres moments, et ne traitait plus qu'en figurants fantômes les personnages de sa propre création. Les post-kantiens tournaient autour d'une encyclopédie universelle du concept, qui renvoyait la création de celui-ci à une pure subjectivité, au lieu de se donner une tâche plus modeste, une pédagogie du concept, qui devrait analyser les conditions de création comme facteurs de moments restant singuliers. Si les trois âges du concept sont l'encyclopédie, la pédagogie et la formation professionnelle commerciale, seul le second peut nous empêcher de tomber des sommets du premier dans le désastre absolu du troisième, désastre absolu pour la pensée, quels qu'en soient bien entendu les bénéfices sociaux du point de vue du capitalisme universel.
철학자들은 철학적 실체로서의 개념의 본질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개념을 형상화(추상화 또는 일반화)하거나 활용(판단)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설명되는 주어진 지식 또는 표상으로 간주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러나 개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형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자기 스스로를 위치시키는 것, 즉 자기 포지셔닝입니다. 생명체에서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진정으로 창조된 것은 자기가 인식되는 자기생성적 특성, 즉 자기 포지셔닝을 누리기 때문에 창조와 자기 포지셔닝은 서로 상호적으로 내포되어 있습니다. 개념은 창조될수록 더 많이 포지셔닝됩니다. 자유로운 창작 활동에 의존하는 것은 또한 독립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포지셔닝하는 것이며, 가장 주관적인 것이 가장 객관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철학적 실재로서의 개념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 특히 셸링과 헤겔이었습니다. 헤겔은 개념을 창조의 형상과 자기 포지셔닝의 순간이라는 측면에서 강력하게 정의했는데, 형상은 개념이 정신의 연속을 통해 의식에 의해 그리고 의식 속에서 창조되는 측면을 구성하기 때문에 개념의 부속물이 되었고, 순간은 개념이 자신을 포지셔닝하고 자아의 절대 안에서 정신을 통합하는 다른 측면을 설정하기 때문에 개념의 부속물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헤겔은 개념이 일반적이거나 추상적인 관념이나 철학 자체에 의존하지 않는 창조되지 않은 지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철학이 자신의 순간으로 보편을 재구성하고 자신이 창조한 인물을 유령의 엑스트라로만 취급했기 때문에 과학과 예술의 독립적인 움직임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 불확실한 철학의 확장에 대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칸트 이후의 철학자들은 창조의 조건을 특이한 순간의 요인으로 분석해야 하는 개념의 교육학이라는 보다 겸손한 과제를 수행하는 대신 개념의 창조를 순수한 주관으로 돌리는 개념의 보편적 백과사전을 중심으로 움직였습니다. 개념의 세 시대가 백과사전, 교육학, 상업적 직업 훈련이라면, 두 번째 시대만이 첫 번째 시대의 높이에서 세 번째 시대의 절대적 파국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으며, 그것은 보편적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적 이익이 무엇이든 간에 사상에 대한 절대적 재앙이다.



1. What Is a Concept?

There are no simple concepts. Every concept has components and is defined by them. It therefore has a combination [chiffre*]. It is a multiplicity, although not every multiplicity is conceptual. There is no concept with only one component. Even the first concept, the one with which a philosophy "begins," has several components, because it is not obvious that philosophy must have a beginning, and if it does determine one, it must combine it with a point of view or a ground [une raison]. Not only do Descartes, Hegel, and Feuerbach not begin with the same concept, they do not have the same concept of beginning. Every concept is at least double or triple, etc. Neither is there a concept possessing every component, since this would be chaos pure and simple. Even so-called universals as ultimate concepts must escape the chaos by circumscribing a universe that explains them (contemplation, reflection, communication). Every concept has an irregular contour defined by the sum of its components, which is why, from Plato to Bergson, we find the idea of the concept being a matter of articulation, of cutting and cross-cutting. The concept is a whole because it totalizes its components, but it is a fragmentary whole. Only on this condition can it escape the mental chaos constantly threatening it, stalking it, trying to reabsorb it.
단순한 개념은 없습니다. 모든 개념에는 구성 요소가 있으며 구성 요소에 의해 규정됩니다. 따라서 개념에는 [쉬프레*]라는 조합이 있습니다. 모든 다양체가 개념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다양체입니다. 하나의 구성 요소만 있는 개념은 없습니다. 철학이 '시작' 되는 첫 번째 개념조차도 여러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철학이 반드시 시작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고, 만약 시작을 결정한다면 그것을 관점이나 근거[une raison]와 결합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 헤겔, 포이어바흐는 같은 개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작에 대한 개념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모든 개념은 적어도 이중 또는 삼중 개념입니다. 모든 구성 요소를 가진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순수하고 단순한 카오스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궁극적 개념들이라고 불리는 보편적 개념들조차도 그것들의 설명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우주(관조, 성찰, 소통) 내로 한정되어야만 카오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개념은 그 구성 요소들의 합에 의해 정의되는 불규칙한 윤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플라톤에서 베르그송에 이르기까지 개념이라는 아이디어는 분절, 자르기 및 교차의 문제입니다. 개념은 그 구성 요소들을 총체화하기 때문에 전체이지만 그것은 파편화된 전체입니다. 이 조건에서만 그것은 끊임없이 그것을 위협하고, 스토킹하고, 재 흡수하려고 시도하는 정신적 카오스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On what conditions is a concept first, not absolutely but in relation to another? For example, is another person [autrui] necessarily second in relation to a self? If so, it is to the extent that its concept is that of an other(a subject that presents itself as an object) which is special in relation to the self: they are two components. In fact, if the other person is identified with a special object, it is now only the other subject as it appears to me; and if we identify it with another subject, it is me who is the other person as I appear to that subject. All concepts are connected to problems without which they would have no meaning and which can themselves only be isolated or understood as their solution emerges. We are dealing here with a problem concerning the plurality of subjects, their relationship, and their reciprocal presentation. Of course, everything changes if we think that we discover another problem: what is the nature of the other person's position that the other subject comes to "occupy" only when it appears to me as a special object, and that I in turn come to occupy as special object when I appear to the other subject? From this point of view the other person is not anyone-neither subject nor object. There are several subjects because there is the other person, not the reverse. The other person thus requires an a priori concept from which the special object, the other subject, and the self must all derive, not the other way around. The order has changed, as has the nature of the concepts and the problems to which they are supposed to respond. We put to one side the question of the difference between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problems. However, even in philosophy, concepts are only created as a function of problems which are thought to be badly understood or badly posed (pedagogy of the concept).
어떤 조건에서 개념은 다른 개념과 관련하여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우선적인가요? 예를 들어, 다른 사람['타자']은 자아와 관련하여 필연적으로 이차적인가요? 그렇다면 타자라는 개념은 자아와의 관계에서 특수한 타인(객체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주체)이라는 개념의 범위 내에서만 가능합니다: 그들은 두 가지 구성 요소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을 그 특수한 객체와 동일시하면 그것은 단지 나에게 나타나는 다른 주체일 뿐이고, 그것을 또 다른 주체와 동일시하면 그 주체에게 나타나는 다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 모든 개념들은 그 개념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 그리고 그 해결책이 드러날 때만 분리되거나 이해될 수 있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주체의 복수성과 그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상호 표상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다른 주체가 나에게 특수한 객체로 나타날 때만 "점유" 하고, 차례로 내가 다른 주체에게 나타날 때 특수한 객체로 점유하는 이 타자의 위치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 관점에서 타자는 주체도 객체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닙니다. 주체가 여러 개 있는 것은 타자가 있기 때문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따라서 타자는 특수한 객체, 다른 주체, 자아가 모두 파생되어야 하는 선험적 개념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이 대응해야 하는 개념들과 문제들의 본성이 바뀜에 따라 그 순서도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과학적 문제와 철학적 문제의 차이에 대한 질문을 한쪽으로 치워두었습니다. 그러나 철학에서도 개념은 잘못 이해되거나 잘못 제기된 것으로 생각되는 문제의 함수로서만 만들어집니다(개념의 교육학).

Let us proceed in a summary fashion: we will consider a field of experience taken as a real world no longer in relation to a self but to a simple "there is." There is, at some moment, a calm and restful world. Suddenly a frightened face looms up that looks at something out of the field. The other person appears here as neither subject nor object but as something that is very different: a possible world, the possibility of a frightening world. This possible world is not real, or not yet, but it exists nonetheless: it is an expressed that exists only in its expression-the face, or an equivalent of the face. To begin with, the other person is this existence of a possible world. And this possible world also has a specific reality in itself, as possible: when the expressing speaks and says, "I am frightened," even if its words are untruthful, this is enough for a reality to be given to the possible as such. This is the only meaning of the "I" as linguistic index. But it is not indispensable: China is a possible world, but it takes on a reality as soon as Chinese is spoken or China is spoken about within a given field of experience. This is very different from the situation in which China is realized by becoming the field of experience itself. Here, then, is a concept of the other that presupposes no more than the determination of a sensory world as condition. On this condition the other appears as the expression of a possible. The other is a possible world as it exists in a face that expresses it and takes shape in a language that gives it a reality. In this sense it is a concept with three inseparable components: possible world, existing face, and real language or speech.
요약하자면, 우리는 현실 세계로 받아들인 경험의 영역을 더 이상 자아와의 관계가 아닌 단순한 "있다"로 간주할 것입니다. 어느 찰나 고요하고 평온한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장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는 겁에 질린 얼굴이 떠오릅니다. 여기서 타자는 주체도 객체도 아닌 매우 다른 어떤 것, 즉 가능한 세계, 무서운 세계의 가능성으로 나타납니다. 이 가능한 세계는 실재화되거나 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합니다. 그것은 얼굴, 또는 얼굴에 상응하는 등가물로서의 표현 안에서만 존재하는 표현된 것입니다. 우선 타자는 이 가능한 세계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 가능한 세계는 가능한 세계로서 그 자체로 구체적인 실재를 가지고 있습니다: 표현자가 "나는 무섭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이 진실이 아닐지라도, 이것만으로도 가능한 세계에 실재가 부여되기에는 충분합니다. 이것이 언어적 지표로서 '나'의 유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필수 불가결한 것은 아닙니다: 중국은 가능한 세계이지만, 주어진 경험의 영역에서 중국어를 말하거나 중국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실재가 됩니다. 이는 중국이 경험의 장 자체가 되어 실재화되는 상황과는 매우 다릅니다. 여기서 타자라는 개념은 감각 세계를 조건짓는 것 이상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이 조건에서 타자는 가능한 것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타자는 가능한 세계를 표현하는 얼굴로 존재하고 그것에 실재를 부여하는 언어로 형상화되기 때문에 가능한 세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분리할 수 없는 세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 개념입니다: 가능한 세계, 현존하는 얼굴, 현실의 언어 또는 말입니다.

Obviously, every concept has a history. This concept of the other person goes back to Leibniz, to his possible worlds and to the monad as expression of the world. But it is not the same problem, because in Leibniz possibles do not exist in the real world. It is also found in the modal logic of propositions. But these do not confer on possible worlds the reality that corresponds to their truth conditions (even when Wittgenstein envisages propositions of fear or pain, he does not see them as modalities that can be expressed in a position of the other person because he leaves the other person oscillating between another subject and a special object). Possible worlds have a long history. In short, we say that every concept always has a history, even though this history zigzags, though it passes, if need be, through other problems or onto different planes. In any concept there are usually bits or components that come from other concepts, which corresponded to other problems and presupposed other planes. This is inevitable because each concept carries out a new cutting-out, takes on new contours, and must be reactivated or recut.
물론 모든 개념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 타자 개념은 라이프니츠, 그의 가능한 세계, 그리고 세계의 표현으로서의 모나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에서 가능성은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명제들의 양상 논리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가능한 세계에 진리 조건에 해당하는 실재를 부여하지 않습니다(비트겐슈타인이 공포나 고통의 명제를 상정할 때조차도, 그는 타자를 다른 주체와 특수 대상 사이에서 진동하는 타자로 남겨두기 때문에 그것들을 타자의 위치에서 표현할 수 있는 양상들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세계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이 역사가 지그재그로 이어지더라도, 필요하다면 다른 문제나 다른 차원을 통과하더라도 모든 개념은 항상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개념에는 일반적으로 다른 문제에 상응하고 다른 차원을 전제로 하는 다른 개념에서 나온 조각이나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 이는 각 컨셉이 새로운 잘라내기를 수행하고 새로운 윤곽을 취하며 다시 활성화하거나 재절단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On the other hand, a concept also has a becoming that involves its relationship with concepts situated on the same plane. Here concepts link up with each other, support one another, coordinate their contours, articulate their respective problems, and belong to the same philosophy, even if they have different histories. In fact, having a finite number of components, every concept will branch off toward other concepts that are differently composed but that constitute other regions of the same plane, answer to problems that can be connected to each other, and participate in a co-creation. A concept requires not only a problem through which it recasts or replaces earlier concepts but a junction of problems where it combines with other coexisting concepts. The concept of the Other Person as expression of a possible world in a perceptual field leads us to consider the components of this field for itself in a new way. No longer being either subject of the field or object in the field, the other person will become the condition under which not only subject and object are redistributed but also figure and ground, margins and center, moving object and reference point, transitive and substantial, length and depth. The Other Person is always perceived as an other, but in its concept it is the condition of all perception, for others as for ourselves. It is the condition for our passing from one world to another. The Other Person makes the world go by, and the "I" now designates only a past world ("I was peaceful"). For example, the Other Person is enough to make any length a possible depth in space, and vice versa, so that if this concept did not function in the perceptual field, transitions and inversions would become incomprehensible, and we would always run up against things, the possible having disappeared. Or at least, philosophically, it would be necessary to find another reason for not running up against them. It is in this way that, on a determinable plane, we go from one concept to another by a kind of bridge. The creation of a concept of the Other Person with these components will entail the creation of a new concept of perceptual space, with other components to be determined (not running up against things, or not too much, will be part of these components).
반면에 개념에는 같은 차원에 위치한 개념과의 관계를 포함하는 '되기'도 있습니다. 여기서 개념들은 다른 역사들을 가지고 있더라도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지탱하며, 그들의 윤곽을 조정하고, 각각의 문제를 명료화하며, 같은 철학에 속합니다. 실제로 모든 개념은 유한한 수의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르게 구성된, 그러나 동일한 차원 내의 다른 영역을 구성하는 다른 개념을 향해 분기하고 서로 연결될 수 있는 문제들에 답하며 일종의 공동 창조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나의 개념은 이전 개념을 재조명하거나 대체하는 문제뿐만 아니라 공존하는 다른 개념과 결합되는 문제들의 접점을 필요로 합니다. 지각 장에서 가능한 세계를 표현하는 타자라는 개념은 이 장의 구성 요소들 자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고려하게 합니다. 타자는 더 이상 장의 주체나 장의 객체가 아닌 주체와 객체뿐만 아니라 형상과 배경, 여백과 중심, 운동하는 대상과 준거점, 타동사와 실사, 길이와 깊이가 재분배되는 조건이 됩니다. 타자는 항상 타자로 인식되지만, 그 개념에서 타자는 우리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것들에 대한 모든 지각의 조건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조건입니다. 타자는 세상을 지나가게 하고, '나'는 이제 과거의 세계("나는 평화로웠다")만을 지칭합니다. 예를 들어, 타자는 공간에서 모든 길이를 가능한 깊이로 만들기에 충분하며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 개념이 지각 영역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전환과 반전이 이해 될 수 없게 되고 우리는 항상 가능한 것이 사라진 사물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또는 적어도 철학적으로 그들과 맞닥뜨리지 않는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결정 가능한 차원에서 우리는 일종의 다리를 통해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이동합니다. 이러한 구성 요소를 가진 타자 개념의 창조는 다른 구성 요소를 결정해야하는 새로운 지각 공간 개념의 창조를 수반 할 것입니다 (사물에 부딪히지 않거나 너무 많이 부딪히지 않는 것이 이러한 구성 요소의 일부가 될 것입니다).

We started with a fairly complex example. How could we do otherwise, because there is no simple concept? Readers may start from whatever example they like. We believe that they will reach the same conclusion about the nature of the concept or the concept of concept. First, every concept relates back to other concepts, not only in its history but in its becoming or its present connections. Every concept has components that may, in turn, be grasped as concepts (so that the Other Person has the face among its components, but the Face will itself be considered as a concept with its own components). Concepts, therefore, extend to infinity and, being created, are never created from nothing. Second, what is distinctive about the concept is that it renders components inseparable within itself. Components, or what defines the consistency of the concept, its endoconsistency, are distinct, heterogeneous, and yet not separable. The point is that each partially overlaps, has a zone of neighborhood [zone de voisinage*], or a threshold of indiscernibility, with another one. For example, in the concept of the other person, the possible world does not exist outside the face that expresses it, although it is distinguished from it as expressed and expression; and the face in turn is the vicinity of the words for which it is already the megaphone. Components remain distinct, but something passes from one to the other, something that is undecidable between them. There is an area ab that belongs to both a and b, where a and b "become" indiscernible. These zones, thresholds, or becomings, this inseparability, define the internal consistency of the concept. But the concept also has an exoconsistency with other concepts, when their respective creation implies the construction of a bridge on the same plane. Zones and bridges are the joints of the concept.
우리는 상당히 복잡한 예로 시작했습니다. 간단한 개념이 없는데 달리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독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예시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개념의 본질 또는 개념에 대한 개념에 대해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첫째, 모든 개념은 그것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것의 되기 또는 현재의 연관성에서도 다른 개념들을 참조합니다. 모든 개념에는 차례로 개념들로 포착될 수 있는 구성 요소가 있습니다(따라서 타자는 그 구성 요소 중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얼굴은 그 자체로 고유한 구성 요소를 가진 개념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개념은 무한대로 확장되고, 만들어지지만 결코 무에서 생성되지 않습니다. 둘째, 개념의 특징은 그 구성 요소들이 개념 내에서 분리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구성 요소, 혹은 개념의 지속성을 정의하는 요소인 그것의 내적 지속성은 구별되고 이질적이지만 아직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요점은 각각이 부분적으로 겹치고, 다른 요소와 이웃하는 지대[존 드 보아지*], 혹은 식별 불가능한 임계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타자라는 개념에서 가능한 세계는 얼굴로부터 표현된 것과 표현으로 구별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얼굴 바깥에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얼굴은 이미 확성기 역할을 하는 말의 근방입니다. 구성 요소들은 구별되지만 그들 사이에서 결정될 수 없는 무언가가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전달됩니다. a와 b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a와 b에 모두 속하는 영역 ab가 있습니다. 이러한 지대들, 임계점들, 또는 되기들, 이러한 분리 불가능성이 개념의 내적 지속성을 정의합니다. 그러나 개념은 다른 개념들과도 외적 지속성을 가지는데, 각 개념들의 창조가 같은 차원 위에서 구축되는 다리를 암시할 때 그렇습니다. 지대들과 다리들은 개념의 관절들입니다.

Third, each concept will therefore be considered as the point of coincidence, condensation, or accumulation of its own components. The conceptual point constantly traverses its components, rising and falling within them. In this sense, each component is an intensive feature, an intensive ordinate [ordonnée intensive*], which must be understood not as general or particular but as a pure and simple singularity(“a” possible world, "a" face, "some" words) that is particularized or generalized depending upon whether it is given variable values or a constant function. But, unlike the position in science, there is neither constant nor variable in the concept, and we no more pick out a variable species for a constant genus than we do a constant species for variable individuals. In the concept there are only ordinate relationships, not relationships of comprehension or extension, and the concept's components are neither constants nor variables but pure and simple variations ordered according to their neighborhood. They are processual, modular. The concept of a bird is found not in its genus or species but in the composition of its postures, colors, and songs: something indiscernible that is not so much synesthetic as syneidetic. A concept is a heterogenesis -that is to say, an ordering of its components by zones of neighborhood. It is ordinal, an intension present in all the features that make it up. The concept is in a state of survey [survol] in relation to its components, endlessly traversing them according to an order without distance. It is immediately co-present to all its components or variations, at no distance from them, passing back and forth through them: it is a refrain, an opus with its number (chiffre).
셋째, 각 개념은 그러므로 자체 구성 요소들의 우연, 응축 또는 축적의 지점으로 간주됩니다. 개념적 지점은 끊임없이 구성 요소들을 가로지르며 그들 안에서 상승하고 하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각 구성 요소는 강도적 특징, 강도적 좌표[오르도네 인텐시브*]로서, 일반적이거나 특수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변수 값이나 상수 함수에 따라 특수화되거나 일반화되는 순수하고 단순한 특이점("하나의" 가능한 세계, "하나의" 얼굴, " 몇몇" 단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과학의 입장과 달리 개념에는 상수나 가변이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가변적인 개체에 대해 상수 종을 선택하지 않는 것처럼 상수 속을 위해 가변적인 종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개념에는 이해나 연장의 관계가 아닌 서수 관계만 존재하며, 개념의 구성 요소들은 상수나 변수가 아니라 인접한 이웃에 따라 정렬된 순수하고 단순한 변이들입니다. 그것들은 과정적이고 모듈적입니다. 새의 개념은 속이나 종이 아니라 새의 자세, 색깔, 노래의 구성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공기억적이지 않은만큼 공감각적이지 않고 식별할 수 없는 무언가입니다. 개념은 이질 발생, 즉 인접한 지대들에 따른 구성 요소들의 순서입니다. 그것은 서수이며, 그것을 이루는 모든 특징들에 나타나는 강도입니다. 이 개념은 구성 요소들과 관련하여 비행[서볼] 상태에 있으며 거리없는 순서에 따라 끝없이 그들을 횡단합니다. 그것은 모든 구성 요소들 또는 변형들에 즉각적으로 공존하며, 그것들과 아무런 거리도 두지 않고 그것들을 앞뒤로 통과합니다: 그것은 리토르넬로이며, 그 셈(쉬프레)을 가진 작품입니다.

The concept is an incorporeal, even though it is incarnated or effectuated in bodies. But, in fact, it is not mixed up with the state of affairs in which it is effectuated. It does not have spatiotemporal coordinates, only intensive ordinates. It has no energy, only intensities; it is anenergetic (energy is not intensity but rather the way in which the latter is deployed and nullified in an extensive state of affairs). The concept speaks the event, not the essence or the thing -pure Event, a hecceity, an entity: the event of the Other or of the face (when, in turn, the face is taken as concept). It is like the bird as event. The concept is defined by the inseparability of a finite number of heterogeneous components traversed by a point of absolute survey at infinite speed. Concepts are "absolute surfaces or volumes," forms whose only object is the inseparability of distinct variations. The "survey" [survol] is the state of the concept or its specific infinity, although the infinities may be larger or smaller according to the number of components, thresholds and bridges. In this sense the concept is act of thought, it is thought operating at infinite(although greater or lesser) speed.
이 개념은 비록 육체에 구현되거나 육체에 효과화 되더라도 비물체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것은 그것이 효과화되는 현상과 혼동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공간적 좌표가 없고 강도적인 직교 좌표만 있습니다. 그것은 에너지가 없고 오직 강도들만 있으며, 무에너지적입니다(에너지는 강도가 아니라 오히려 후자가 연장적인 상황 속에서 전개되고 무효화되는 방식입니다). 개념은 본질이나 사물이 아닌 사건, 즉 순수한 사건, 이것임, 독립체입니다: 타자 또는 얼굴의 사건(차례로 얼굴이 개념으로 받아들여질 때)을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건으로서의 새와 같습니다. 개념은 무한한 속도를 가진 절대적인 비행 지점에 의해 횡단되는 유한한 이질적인 구성 요소들의 분리 불가능성에 의해 정의됩니다. 개념은 "절대 표면들 또는 부피들"로, 개별적인 변이들의 분리 불가능성만을 유일한 대상으로 삼고 형상화합니다. "비행"[서볼]은 무한들이 구성 요소들, 임계점들, 그리고 다리들의 수에 따라 더 커지거나 작아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념의 상태 혹은 그것의 특정한 무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념은 사유의 행위이며, 무한한(크든 작든) 속도로 작동하는 사유입니다.

The concept is therefore both absolute and relative: it is relative to its own components, to other concepts, to the plane on which it is defined, and to the problems it is supposed to resolve; but it is absolute through the condensation it carries out, the site it occupies on the plane, and the conditions it assigns to the problem. As whole it is absolute, but insofar as it is fragmentary it is relative. It is infinite through its survey or its speed but finite through its movement that traces the contour of its components. Philosophers are always recasting and even changing their concepts: sometimes the development of a point of detail that produces a new condensation, that adds or withdraws components, is enough. Philosophers sometimes exhibit a forgetfulness that almost makes them ill. According to Jaspers, Nietzsche, "corrected his ideas himself in order to create new ones without explicitly admitting it; when his health deteriorated he forgot the conclusions he had arrived at earlier." Or, as Leibniz said, "I thought I had reached port; but ... I seemed to be cast back again into the open sea." What remains absolute, however, is the way in which the created concept is posited in itself and with others. The relativity and absoluteness of the concept are like its pedagogy and its ontology, its creation and its self-positing, its ideality and its reality -the concept is real without being actual, ideal without being abstract. The concept is defined by its consistency, its endoconsistency and exoconsistency, but it has no reference: it is self-referential; it posits itself and its object at the same time as it is created. Constructivism unites the relative and the absolute.
따라서 개념은 절대적이면서도 상대적입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의 구성 요소, 다른 개념들, 그것이 규정되는 차원, 그리고 그것이 해결하도록 기대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이지만, 그것이 수행하는 응축, 차원에서 차지하는 자리, 그리고 그것이 문제에 부여하는 조건들을 통해서는 절대적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절대적이지만 파편적인 한에서는 상대적입니다. 그것은 비행이나 속도를 통해서는 무한하지만 구성 요소들의 윤곽을 좇는 움직임을 통해서는 유한합니다. 철학자들은 항상 개념을 재구성하고 심지어 변경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구성 요소들을 추가하거나 빼는, 즉 새로운 응축을 만들어내는 세부적인 지점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철학자들은 때때로 거의 병에 걸릴 정도의 건망증을 보이기도 합니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니체는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기 위해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수정했고, 건강이 악화되자 이전에 도달한 결론을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또는 라이프니츠가 말했듯이 "나는 항구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 나는 다시 망망대해로 던져진 것 같았다"라고 말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창조된 개념이 그 자체로 그리고 다른 개념과 함께 위치하는 방식입니다. 개념의 상대성과 절대성은 개념의 교육학과 존재론, 그것의 창조와 자기 자리매김, 그것의 이상과 현실, 즉 개념은 현실화되지 않으면서 실제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으면서 이상적입니다. 개념은 그것의 지속성, 그것의 내포적 지속성 및 외포적 지속성에 의해 정의되지만, 그것은 참조 대상이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참조적이며, 그것이 창조됨과 동시에 그 자신과 대상을 자리매김합니다. 구축주의는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통합합니다.

Finally, the concept is not discursive, and philosophy is not a discursive formation, because it does not link propositions together. Confusing concept and proposition produces a belief in the existence of scientific concepts and a view of the proposition as a genuine "intension" (what the sentence expresses). Consequently, the philosophical concept usually appears only as a proposition deprived of sense. This confusion reigns in logic and explains its infantile idea of philosophy. Concepts are measured against a "philosophical" grammar that replaces them with propositions extracted from the sentences in which they appear. We are constantly trapped between alternative propositions and do not see that the concept has already passed into the excluded middle. The concept is not a proposition at all; it is not propositional, and the proposition is never an intension. Propositions are defined by their reference, which concerns not the Event but rather a relationship with a state of affairs or body and with the conditions of this relationship. Far from constituting an intension, these conditions are entirely extensional. They imply operations by which abscissas or successive linearizations are formed that force intensive ordinates into spatiotemporal and energetic coordinates, by which the sets so determined are made to correspond to each other. These successions and correspondences define discursiveness in extensive systems. The independence of variables in propositions is opposed to the inseparability of variations in the concept. Concepts, which have only consistency or intensive ordinates outside of any coordinates, freely enter into relationships of nondiscursive resonance either because the components of one become concepts with other heterogeneous components or because there is no difference of scale between them at any level. Concepts are centers of vibrations, each in itself and every one in relation to all the others. This is why they all resonate rather than cohere or correspond with each other. There is no reason why concepts should cohere. As fragmentary totalities, concepts are not even the pieces of a puzzle, for their irregular contours do not correspond to each other. They do form a wall, but it is a dry-stone wall, and everything holds together only along diverging lines. Even bridges from one concept to another are still junctions, or detours, which do not define any discursive whole. They are movable bridges. From this point of view, philosophy can be seen as being in a perpetual state of digression or digressiveness.
마지막으로, 개념은 담론적이지 않으며 철학은 명제들을 서로 연결하지 않기 때문에 담론적인 형식이 아닙니다. 개념과 명제를 혼동하는 것은 과학적 개념들의 존재에 대한 믿음과 명제를 진정한 '의도'(문장이 표현하는 것)로 보는 관점을 낳습니다. 결과적으로 철학적 개념은 대개 의미가 박탈된 명제로만 나타납니다. 이러한 혼란이 논리를 지배하고 철학에 대한 그것의 유아적인 생각을 설명합니다. 개념들은 그 개념들이 나타나는 문장들에서 추출한 명제들로 대체되는 "철학적" 문법에 따라 측정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대안 명제들 사이에 갇혀 개념이 이미 배제된 중간으로 빠져나갔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개념은 전혀 명제가 아니며, 그것은 명제적이지 않고, 명제는 결코 의도/강도가 아닙니다. 명제들은 사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또는 신체와의 관계, 그리고 이 관계의 조건과 관련된 참조를 통해 정의됩니다. 이러한 조건은 인텐션(의도/강도)를 구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전적으로 연장적인 것입니다. 그것들은 강도적인 좌표를 시공간적 좌표와 에너지 좌표로 강제하는 가로좌표 또는 연속적인 선형화가 형성되는 작업을 의미하며, 그렇게 확정된 집합끼리 서로 대응하도록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연속과 상응은 연장적인 시스템에서 담론성을 정의합니다. 명제에서 변수들의 독립성은 개념에서 변수들의 분리 불가능성과 대립됩니다. 어떤 좌표 밖에서도 지속성이나 강도적인 좌표만을 갖는 개념은 하나의 구성 요소가 다른 이질적인 구성 요소와 함께 개념이 되거나 그들 사이에는 어떤 수준에서도 규모의 차이가 없기 때문에 비담론적 공명의 관계를 자유롭게 맺습니다. 개념들은 각각 그 자체로 진동의 중심들이며, 그 자체로 다른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은 서로 일치하거나 상응하는 것이 아니라 공명합니다. 개념이 반드시 일치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파편적인 총체로서, 개념들은 불규칙한 윤곽으로 인해 서로 대응하지 않기 때문에 퍼즐의 조각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벽을 형성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마른 돌담이며 모든 것은 분기하는 선을 따라서만 함께 고정됩니다. 한 개념에서 다른 개념으로 연결되는 다리들도 여전히 교차점 또는 우회로이며 어떠한 담론적인 전체도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움직일 수 있는 다리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철학은 끊임없는 일탈 또는 탈선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The major differences between the philosophical enunciation of fragmentary concepts and the scientific enunciation of partial propositions follow from this digression. From an initial point of view, all enunciation is positional. But enunciation remains external to the proposition because the latter's object is a state of affairs as referent, and the references that constitute truth values as its conditions (even if, for their part, these conditions are internal to the object). On the other hand, positional enunciation is strictly immanent to the concept because the latter's sole object is the inseparability of the components that constitute its consistency and through which it passes back and forth. As for the other aspect, creative or signed enunciation, it is clear that scientific propositions and their correlates are just as signed or created as philosophical concepts: we speak of Pythagoras's theorem, Cartesian coordinates, Hamiltonian number, and Lagrangian function just as we speak of the Platonic Idea or Descartes's cogito and the like. But however much the use of proper names clarifies and confirms the historical nature of their link to these enunciations, these proper names are masks for other becomings and serve only as pseudonyms for more secret singular entities. In the case of propositions, proper names designate extrinsic partial observers that are scientifically definable in relation to a particular axis of reference; whereas for concepts, proper names are intrinsic conceptual personae who haunt a particular plane of consistency. It is not only proper names that are used very differently in philosophies, sciences, and arts but also syntactical elements, and especially prepositions and the conjunctions, "now," "therefore." Philosophy proceeds by sentences, but it is not always propositions that are extracted from sentences in general. At present we are relying only on a very general hypothesis: from sentences or their equivalent, philosophy extracts concepts (which must not be confused with general or abstract ideas), whereas science extracts prospects (propositions that must not be confused with judgments), and art extracts percepts and affects (which must not be confused with perceptions or feelings). In each case language is tested and used in incomparable ways-but in ways that do not define the difference between disciplines without also constituting their perpetual interbreeding.
파편적인 개념에 대한 철학적 언표와 부분적인 명제에 대한 과학적 언표 사이의 큰 차이점은 이 일탈에서 비롯됩니다. 처음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언표는 위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언표는 명제에 외재적으로 남아 있는데, 왜냐하면 후자의 대상은 참조로서의 상태이고, 참조들은 그 조건으로서 진리 값을 구성하기 때문입니다(비록 이러한 조건들이 대상의 내부에 있다고 하더라도). 반면에 위치적 언표는 철저하게 개념에 내재하는 것으로, 후자의 유일한 대상은 그것의 지속성을 구성하고 그것을 앞뒤로 통과하는 구성 요소들의 분리 불가능성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측면인 창조적 또는 기호화된 언표에 관해서는 과학적 명제들과 그 상관물이 철학적 개념과 마찬가지로 기호화되거나 창조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피타고라스의 정리, 데카르트의 좌표, 해밀턴의 수, 라그랑주의 함수 등을 말하는 것처럼 플라톤 이데아나 데카르트의 코기토 등을 말하는 것이죠. 그러나 고유명사의 사용이 이러한 언표들의 역사적인 연관성을 명확히 하고 확인시켜 주지만, 이러한 고유명사는 다른 되기들의 가면이며 더 비밀스러운 특이한 실체들에 대한 가명 역할을 할 뿐입니다. 명제들의 경우 고유명은 특정한 기준축과 관련하여 과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외재적인 부분 관찰자를 지정하는 반면, 개념의 경우 고유명은 특정한 지속의 차원을 떠도는 내재적인 개념적 페르소나입니다. 철학, 과학, 예술에서 각기 다르게 사용되는 것은 고유명사뿐만 아니라 통사적인 요소들, 특히 전치사와 접속사 "지금", "그러므로"와 같은 접속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은 문장들로 진행되지만, 문장에서 추출되는 것이 일반적으로 항상 명제인 것은 아닙니다. 현재 우리는 매우 일반적인 가설에만 의존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문장 또는 그에 상응하는 등가물들에서 개념(일반적 또는 추상적 아이디어와 혼동해서는 안 됨)을 추출하는 반면 과학은 예상들(판단과 혼동해서는 안 되는 명제들)을 추출하고 예술은 지각들과 변용태들(인식 또는 감정과 혼동해서는 안 됨)을 뽑아냅니다. 각각의 경우 언어는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테스트되고 사용되지만, 학문 간의 차이를 정의하지 않으면서도 끊임없는 교배를 구성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Example 1
To start with, the preceding analysis must be confirmed by taking the example of one of the best-known signed philosophical concepts, that of the Cartesian cogito, Descartes's l: a concept of self. This concept has three components-doubting, thinking, and being (although this does not mean that every concept must be triple). The complete statement of the concept qua multiplicity is "I think 'therefore' I am" or, more completely, "Myself who doubts, I think, I am, I am a thinking thing." According to Descartes the cogito is the always-renewed event of thought.
우선, 가장 잘 알려진 기호화된 철학적 개념 중 하나인 데카르트의 코기토, '나', 즉 자아 개념을 예로 들어 앞의 분석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 개념에는 의심, 사고, 존재라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그렇다고 해서 모든 개념이 세 가지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다중성 개념의 완전한 진술은 "나는 '그러므로' 나라고 생각한다." 또는 더 완벽하게 표현하면 "의심하는 나, 나는 생각한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입니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코기토는 끊임없이 갱신되는 사고의 사건입니다.

The concept condenses at the point I, which passes through all the components and in which I' (doubting), I" (thinking), and I"' (being) coincide. As intensive ordinates the components are arranged in zones of neighborhood or indiscernibility that produce passages from one to the other and constitute their inseparability. The first zone is between doubting and thinking (myself who doubts, I cannot doubt that I think), and the second is between thinking and being (in order to think it is necessary to be). The components are presented here as verbs, but this is not a rule. It is sufficient that there are variations. In fact, doubt includes moments that are not the species of a genus but the phases of a variation: perceptual, scientific, obsessional doubt (every concept therefore has a phase space, although not in the same way as in science). The same goes for modes of thought-feeling, imagining, having ideas and also for types of being, thing, or substance-infinite being, finite thinking being, extended being. It is noteworthy that in the last case the concept of self retains only the second phase of being and excludes the rest of the variation. But this is precisely the sign that the concept is closed as fragmentary totality with "I am a thinking thing": we can pass to other phases of being only by bridges or crossroads that lead to other concepts. Thus, "among my ideas I have the idea of infinity" is the bridge leading from the concept of self to the concept of God. This new concept has three components forming the "proofs" of the existence of God as infinite event. The third (ontological proof) assures the closure of the concept but also in turn throws out a bridge or branches off to a concept of the extended, insofar as it guarantees the objective truth value of our other clear and distinct ideas.
개념은 나(의심), 나'(생각), 나'(존재)가 일치하는 모든 구성 요소를 통과하는 지점 I에서 응축됩니다. 강도적 좌표로서 구성 요소는 이웃 또는 식별 불가능한 영역으로 배열되어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의 통로를 생성하고 분리 불가능성을 구성합니다. 첫 번째 영역은 의심과 생각(의심하는 나 자신,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사이이고, 두 번째 영역은 생각과 존재('생각하기 위해서는 존재해야 한다') 사이입니다. 여기서 구성 요소는 동사로 표시되어 있지만 이것이 규칙은 아닙니다. 여기에는 변형이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사실 의심에는 한 속의 종이 아닌 변이의 단계들, 즉 지각적, 과학적, 강박적 의심이 포함됩니다(따라서 모든 개념은 과학과 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단계들의 위상 공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의 양상들, 즉 느낌, 상상, 생각하기, 그리고 존재, 사물 또는 실체의 유형, 즉 무한한 존재, 유한한 사고 존재, 연장된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경우에 자아 개념은 존재의 두 번째 단계만 유지하고 나머지 변형을 배제한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개념이 "나는 생각하는 것" 이라는 단편적인 전체성으로 닫혀 있다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다른 개념으로 이어지는 다리나 교차로를 통해서만 존재의 다른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 생각 중에는 무한이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은 자아 개념에서 신 개념으로 이어지는 다리입니다. 이 새로운 개념은 무한한 사건으로서의 신의 존재에 대한 '증명들'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 번째(존재론적 증명)는 개념의 폐쇄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우리의 다른 명확하고 뚜렷한 관념들의 객관적 진리 값을 보장하는 한, 연장된 개념으로 가는 다리 또는 가지를 놓아줍니다.

When the question "Are there precursors of the cogito?" is asked, what is meant is "Are there concepts signed by previous philosophers that have similar or almost identical components but from which one component is lacking, or to which others have been added, so that a cogito does not crystallize since the components do not yet coincide in a self?" Everything seems ready, and yet something is missing. Perhaps the earlier concept referred to a different problem from that of the cogito (a change in problems being necessary for the Cartesian cogito to appear), or it was developed on another plane. The Cartesian plane consists in challenging any explicit objective presupposition where every concept refers to other concepts (the rational-animal man, for example). It demands only a prephilosophical understanding, that is, implicit and subjective presuppositions: everyone knows what thinking, being, and I mean (one knows by doing it, being it, or saying it). This is a very novel distinction. Such a plane requires a first concept that presupposes nothing objective. So the problem is "What is the first concept on this plane, or by beginning with what concept can truth as absolutely pure subjective certainty be determined?" Such is the cogito. The other concepts will be able to achieve objectivity, but only if they are linked by bridges to the first concept, if they respond to problems subject to the same conditions, and if they remain on the same plane. Objectivity here will assume a certainty of knowledge rather than presuppose a truth recognized as preexisting, or already there.
"코기토의 전조가 있는가?"라는 질문의 의미는 "이전 철학자들이 서명했던 개념 중 유사하거나 거의 동일한 구성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한 구성 요소가 부족하거나 다른 구성 요소가 추가되어 아직 구성 요소들이 자아에서 일치하지 않아 코기토로 결정화되지 않은 개념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지만 무언가 빠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전의 개념은 코기토의 문제와는 다른 문제(데카르트적 코기토가 나타나기 위해 필요한 문제의 변화)로 소급되거나 다른 차원에서 발전된 것일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적 차원은 모든 개념이 다른 개념(예를 들어 이성적 동물적 인간)을 지칭하는 명시적인 객관적 전제에 도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선철학적 이해, 즉 암묵적이고 주체적인 전제들, 즉 모든 사람이 생각, 존재, 그리고 나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습니다(사람은 그것을 행하고, 존재하고, 말함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새로운 구분입니다. 이러한 차원에는 객관적인 것을 전제하지 않는 첫 번째 개념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문제는 "이 차원에서 첫 번째 개념은 무엇인가, 즉 절대적으로 순수한 주관적 확실성으로서의 진리를 어떤 개념에서 출발하여 결정할 수 있는가?"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기토입니다. 다른 개념들은 동일한 조건에 따라 문제에 대응하고 동일한 차원에 머물러야만, 그것들이 첫 번째 개념과 다리처럼 연결될 때에만 객관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객관성은 이미 존재하거나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진리를 전제하기보다는 지식의 확실성을 전제로 합니다.

There is no point in wondering whether Descartes was right or wrong. Are implicit and subjective presuppositions more valid than explicit objective presuppositions? Is it necessary "to begin," and, if so, is it necessary to start from the point of view of a subjective certainty? Can thought as such be the verb of an I? There is no direct answer. Cartesian concepts can only be assessed as a function of their problems and their plane. In general, if earlier concepts were able to prepare a concept but not constitute it, it is because their problem was still trapped within other problems, and their plane did not yet possess its indispensable curvature or movements. And concepts can only be replaced by others if there are new problems and another plane relative to which (for example) "I" loses all meaning, the beginning loses all necessity, and the presuppositions lose all difference—or take on others. A concept always has the truth that falls to it as a function of the conditions of its creation. Is there one plane that is better than all the others, or problems that dominate all others? Nothing at all can be said on this point. Planes must be constructed and problems posed, just as concepts must be created. Philosophers do the best they can, but they have too much to do to know whether it is the best, or even to bother with this question. Of course, new concepts must relate to our problems, to our history, and, above all, to our becomings. But what does it mean for a concept to be of our time, or of any time? Concepts are not eternal, but does this mean they are temporal? What is the philosophical form of the problems of a particular time? If one concept is "better" than an earlier one, it is because it makes us aware of new variations and unknown resonances, it carries out unforeseen cuttings-out, it brings forth an Event that surveys [survole] us. But did the earlier concept not do this already? If one can still be a Platonist, Cartesian, or Kantian today, it is because one is justified in thinking that their concepts can be reactivated in our problems and inspire those concepts that need to be created. What is the best way to follow the great philosophers? Is it to repeat what they said or to do what they did, that is, create concepts for problems that necessarily change?
데카르트가 옳았는지 틀렸는지 궁금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암묵적이고 주체적인 전제가 명시적이고 객관적 전제보다 더 타당할까요? 과연 "시작"이 필요한가요? 그렇다면 주체적인 확실성의 관점에서 시작해야 하나요?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나(I)의 동사가 될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데카르트 개념들은 그들의 문제들과 그 차원의 함수로서만 측정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전의 개념들이 이 개념을 준비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구성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여전히 다른 문제들 안에 갇혀 있었고, 그들의 차원이 아직 필수적인 곡률이나 움직임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념들은 (예를 들어) '나'가 모든 의미를 잃고, 시작이 모든 필연성을 잃고, 전제가 모든 차이를 잃는 새로운 문제들과 상대적인 다른 차원이 있을 때만 다른 것으로 대체되거나 다른 것을 취할 수 있습니다. 개념은 항상 그 개념이 탄생한 조건의 함수로서 그 개념에 해당하는 진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보다 더 나은 하나의 차원이 있을까요, 아니면 다른 모든 차원을 지배하는 문제가 있을까요?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개념이 창조되어야 하는 것처럼 차원도 구축되어야 하고 문제도 제기되어야 합니다. 철학자들은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이 최선인지 아닌지 알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이 질문에 신경을 쓰기조차 힘듭니다. 물론 새로운 개념은 우리의 문제, 우리의 역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되기와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개념이 우리 시대, 혹은 어느 시대의 개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개념은 영원하지 않지만, 이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의미할까요? 특정 시대의 문제들의 철학적 형태는 무엇일까요? 하나의 개념이 이전의 개념보다 "더 나은" 개념이라면, 그것은 새로운 변화와 미지의 공명들을 우리에게 인식시키고, 예기치 않은 단절을 수행하며, 우리를 비행[생존]하는 사건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개념은 이미 이런 일을 하지 않았나요? 오늘날에도 플라톤주의자, 데카르트주의자, 칸트주의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개념이 우리의 문제들 속에서 다시 활성화되어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해낼 수 있는 영감을 정당화하여 생각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말한 것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한 일을 하는 것, 즉 필연적으로 변화하는 문제들에 대한 개념을 창조하는 것일까요?

For this reason philosophers have very little time for discussion. Every philosopher runs away when he or she hears someone say, "Let's discuss this." Discussions are fine for roundtable talks, but philosophy throws its numbered dice on another table. The best one can say about discussions is that they take things no farther, since the participants never talk about the same thing. Of what concern is it to philosophy that someone has such a view, and thinks this or that, if the problems at stake are not stated? And when they are stated, it is no longer a matter of discussing but rather one of creating concepts for the undiscussible problem posed. Communication always comes too early or too late, and when it comes to creating, conversation is always superfluous. Sometimes philosophy is turned into the idea of a perpetual discussion, as "communicative rationality," or as "universal democratic conversation." Nothing is less exact, and when philosophers criticize each other it is on the basis of problems and on a plane that is different from theirs and that melt down the old concepts in the way a cannon can be melted down to make new weapons. It never takes place on the same plane. To criticize is only to establish that a concept vanishes when it is thrust into a new milieu, losing some of its components, or acquiring others that transform it. But those who criticize without creating, those who are content to defend the vanished concept without being able to give it the forces it needs to return to life, are the plague of philosophy. All these debaters and communicators are inspired by resentiment. They speak only of themselves when they set empty generalizations against one another. Philosophy has a horror of discussions. It always has something else to do. Debate is unbearable to it, but not because it is too sure of itself. On the contrary, it is its uncertainties that take it down other, more solitary paths. But in Socrates was philosophy not a free discussion among friends? Is it not, as the conversation of free men, the summit of Greek sociability? In fact, Socrates constantly made all discussion impossible, both in the short form of the contest of questions and answers and in the long form of a rivalry between discourses. He turned the friend into the friend of the single concept, and the concept into the pitiless monologue that eliminates the rivals one by one.
이런 이유로 철학자들은 토론할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철학자는 누군가 "토론하자"라는 말을 들으면 도망칩니다. 토론은 원탁 회의에서는 괜찮지만 철학은 다른 테이블에 주사위를 던집니다. 토론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장점은 참가자들이 같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들이 언급되지 않았다면 누군가가 그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이것 또는 저것을 생각하는 것이 철학에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들이 언급되면 그것은 더 이상 토론의 문제가 아니라 논의할 여지가 없는 문제들에 대한 개념을 만드는 문제입니다. 소통은 항상 너무 이르거나 늦게 이루어지며, 창조에 있어서 대화는 항상 불필요한 것입니다. 때때로 철학은 "소통하는 합리성" 또는 "보편적인 민주적 대화"와 같이 끊임없는 토론의 개념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덜 정확한 것은 없으며, 철학자들이 서로를 비판할 때 그것은 그들의 문제들과 다른 차원에서, 그리고 대포를 녹여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낡은 개념을 녹여내는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결코 같은 차원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판한다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 새로운 환경으로 밀려나면서 그 구성 요소 중 일부를 잃거나 그것을 변화시키는 다른 요소를 획득할 때 사라진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창조하지 않고 비판하는 사람들, 사라진 개념이 다시 삶을 되찾는 데 필요한 힘을 부여하지 않고 그것을 옹호하는 데 만족하는 사람들은 철학의 전염병입니다. 이 모든 토론자들과 소통자들은 분노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그들은 서로에 맞서 공허한 일반화를 설정할 때만 자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철학은 토론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철학에는 항상 다른 할 일이 있습니다. 철학이 토론을 견디지 못하는 이유는 철학이 스스로를 너무 확신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불확실성 때문에 더 고독한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친구들 간의 자유로운 토론이 아니었을까요? 자유로운 사람들의 대화로서 그리스 사교성의 정점이 아닐까요? 사실 소크라테스는 질문과 답변의 짧은 시합의 형식과 담론 간의 경쟁이라는 긴 형식 모두에서 모든 토론을 끊임없이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친구를 하나의 개념의 친구로, 개념을 라이벌을 하나씩 제거하는 무자비한 독백으로 바꿨습니다.

Example 2
The Parmenides shows the extent to which Plato is master of the concept. The One has two components (being and nonbeing), phases of components (the One superior to being, equal to being, inferior to being; the One superior to nonbeing, equal to nonbeing), and zones of indiscernibility (in relation to itself, in relation to others). It is a model concept.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이 얼마나 개념의 대가인지를 보여줍니다. 일자는 두 가지 구성 요소들(존재와 비존재), 구성 요소들의 단계(존재보다 우월하고 존재와 같고 존재보다 열등한 일자; 비존재보다 우월하고 비존재와 같은 일자), 그리고 식별 불가능한 지대들(자신과 관련해서,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델 개념입니다.

But is not the One prior to every concept? This is where Plato teaches the opposite of what he does: he creates concepts but needs to set them up as representing the uncreated that precedes them. He puts time into the concept, but it is a time that must be Anterior. He constructs the concept but as something that attests to the preexistence of an objectality [objectité], in the form of a difference of time capable of measuring the distance or closeness of the concept's possible constructor. Thus, on the Platonic plane, truth is posed as presupposition, as already there. This is the Idea. In the Platonic concept of the Idea, first takes on a precise sense, very different from the meaning it will have in Descartes: it is that which objectively possesses a pure quality, or which is not something other than what it is. Only Justice is just, only Courage courageous, such are Ideas, and there is an Idea of mother if there is a mother who is not something other than a mother (who would not have been a daughter), or of hair which is not something other than hair (not silicon as well). Things, on the contrary, are understood as always being something other than what they are. At best, therefore, they only possess quality in a secondary way, they can only lay claim to quality, and only to the degree that they participate in the Idea. Thus the concept of Idea has the following components: the quality possessed or to be possessed; the Idea that possesses it first, as unparticipable; that which lays claim to the quality and can only possess it second, third, fourth; and the Idea participated in, which judges the claims-the Father, a double of the father, the daughter and the suitors, we might say. These are the intensive ordinates of the Idea: a claim will be justified only through a neighborhood, a greater or lesser proximity it "has had" in relation to the Idea, in the survey of an always necessarily anterior time. Time in this form of anteriority belongs to the concept; it is like its zone. Certainly, the cogito cannot germinate on this Greek plane, this Platonic soil. So long as the preexistence of the Idea remains (even in the Christian form of archetypes in God's understanding), the cogito could be prepared but not fully accomplished. For Descartes to create this concept, the meaning of "first" must undergo a remarkable change, take on a subjective meaning; and all difference of time between the idea and the soul that forms it as subject must be annulled (hence the importance of Descartes's point against reminiscence, in which he says that innate ideas do not exist "before" but "at the same time" as the soul). It will be necessary to arrive at an instantaneity of the concept and for God to create even truths. The claim must change qualitatively: the suitor no longer receives the daughter from the father but owes her hand only to his own chivalric prowess -to his own method. Whether Malebranche can reactivate Platonic components on an authentically Cartesian plane, and at what cost, should be analyzed from this point of view. But we only wanted to show that a concept always has components that can prevent the appearance of another concept or, on the contrary, that can themselves appear only at the cost of the disappearance of other concepts. However, a concept is never valued by reference to what it prevents: it is valued for its incomparable position and its own creation.
하지만 일자는 모든 개념에 선행하지 않나요? 여기서 플라톤은 자신이 하는 일과 정반대로 가르칩니다: 그는 개념들을 창조하지만 개념들보다 선행하는 창조되지 않은 것을 표상하는 것으로 그것들을 설정해야 합니다. 그는 개념에 시간을 투입하지만 그 시간은 반드시 '이전'이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는 개념을 구성하지만 객관성[객관성]의 선행실존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개념의 가능한 구축자와의 거리 또는 가까움을 측정할 수 있는 시간 차이의 형태로 개념을 구성합니다. 따라서 플라톤적 차원에서 진리는 이미 존재하는 것처럼 전제로서 제시됩니다. 이것이 바로 이데아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 개념에서 이데아는 데카르트에서 갖는 의미와는 매우 다른 엄밀한 의미, 즉 객관적으로 순수한 질을 지니고 있는 것, 즉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정의만이 정의롭고 용기만이 용기 있는 것처럼, 만약 어머니 이외의 것이 아닌 어머니가 있다면 어머니에 대한 이데아가 있고(딸이었던 적이 없는), 머리카락 이외의 것이 아닌 머리카락에 대한 이데아가 있습니다( 역시 실리콘이 아닌). 반대로 사물들은 항상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사물은 기껏해야 부차적인 방식으로만 질을 소유할 수 있으며, 이데아에 동참하는 한도 내에서만 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데아의 개념은 다음과 같은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유하고 있거나 소유해야 할 질; 참여 불가능한 것으로서 먼저 그것을 소유하는 이데아; 질에 대해 소유권을 주장하고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만 소유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주장을 판가름 하는 참여된 이데아 - 즉 우리는 아버지, 아버지의 이중인 딸과 구혼자들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데아의 강도적인 좌표입니다: 하나의 주장은 이웃을 통해서만, 이데아와의 관계에서 그것이 "가져왔던" 더 많거나 적은 근접성을 통해서만, 항상 필연적으로 앞선 시간의 조감 안에서 정당화될 것입니다. 이러한 선행성 형태의 시간은 개념에 속하며, 그것의 지대와 같습니다. 물론 코기토는 이 그리스적 차원, 이 플라톤적 토양에서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이데아의 선행실존이 남아 있는 한(심지어 신의 이해에서 원형이라는 기독교적 형태로도), 코기토는 준비될 수는 있지만 완전히 성취될 수는 없습니다. 데카르트가 이 개념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처음'의 의미가 현저한 변화를 거쳐 주체적 의미를 가져야 하며, 이데아와 그것을 주체로서 형성하는 영혼 사이의 모든 시간의 차이가 무효화되어야 합니다(따라서 선천적 이데아는 영혼보다 '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한다고 말하는 데카르트의 회상에 반하는 지적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그것은 개념의 순간성에 도달하고 신이 진리들까지도 창조하기 위해 필요할 것입니다. 소유에 대한 권리는 질적으로 바뀌어야합니다 : 구혼자는 더 이상 아버지로부터 딸을 받지 않고 자신의 기사도 적 능력, 즉 자신의 방법에 의해서만 그녀를 맞이해야 합니다. 말브랑슈가 진정한 데카르트적 차원에서 플라톤적 구성 요소들을 재활성화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대가는 얼마인지는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개념이 항상 다른 개념의 출현을 막을 수 있는 구성 요소들을 가지고 있거나 반대로 다른 개념들의 소멸을 대가로 스스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개념은 결코 그것이 방지하는 것을 기준으로 가치화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의 비교할 수 없는 위치와 그 자체의 창조로 인해 가치화됩니다.

Suppose a component is added to a concept: the concept will probably break up or undergo a complete change involving, perhaps, another plane -at any rate, other problems. This is what happens with the Kantian cogito. No doubt Kant constructs a "transcendental" plane that renders doubt useless and changes the nature of the presuppositions once again. But it is by virtue of this very plane that he can declare that if the "I think" is a determination that, as such, implies an undetermined existence ("I am"), we still do not know how this undetermined comes to be determinable and hence in what form it appears as determined. Kant therefore "criticizes" Descartes for having said, "I am a thinking substance," because nothing warrants such a claim of the "I." Kant demands the introduction of a new component into the cogito, the one Descartes repressed -time. For it is only in time that my undetermined existence is determinable. But I am only determined in time as a passive and phenomenal self, an always affectable, modifiable, and variable self. The cogito now presents four components: I think, and as such I am active; I have an existence; this existence is only determinable in time as a passive self; I am therefore determined as a passive self that necessarily represents its own thinking activity to itself as an Other(Autre) that affects it. This is not another subject but rather the subject who becomes an other. Is this the path of a conversion of the self to the other person? A preparation for "I is an other"? A new syntax, with other ordinates, with other zones of indiscernibility, secured first by the schema and then by the affection of self by self [soi par soi], makes the "I" and the "Self" inseparable.
어떤 개념에 하나의 구성 요소가 추가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 개념은 아마도 해체되거나 다른 차원을 포함하는 완전한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 어쨌든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칸트의 코기토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칸트는 의심을 쓸모없게 만들고 전제들의 본질을 다시 한 번 바꾸는 "초월적" 차원을 구성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차원 덕분에 그는 "나는 생각한다"가 확정되지 않은 존재("나는 있다")를 암시하는 확정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이 확정되지 않은 것이 어떻게 확정 가능하게 되는지, 따라서 어떤 형태로 확정된 것으로 나타나는지 알지 못한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칸트는 "나는 생각하는 실체"라고 말한 데카르트를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나"에 대한 그러한 주장을 보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코기토에 데카르트가 억압했던 새로운 요소, 즉 시간이라는 요소를 도입할 것을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확정되지 않은 나의 존재가 확정될 수 있는 것은 시간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수동적이고 현상에 불과한 자아, 항상 변화할 수 있고 수정 가능하며 가변적인 자아로서 시간 속에서만 확정됩니다. 코기토는 이제 네 가지 구성 요소를 제시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능동적이다; 나는 존재한다; 이 존재는 수동적 자아로서 시간 속에서만 확정 가능하다; 따라서 나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타자(Autre)로서 자신의 사고 활동을 반드시 자기 자신에게 표상시키는 수동적 자아로서 결정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타자가 되는 주체입니다. 이것이 자아가 타자로 전환되는 길일까요? "나는 타자다"를 위한 준비 과정일까요? 새로운 통사론, 다른 세로좌표들, 다른 불확정성의 지대들이 도식에 의해 먼저 확보된 다음, 자아에 의한 자아의 변용[soi par soi]에 의해 '나'와 '자아'를 분리할 수 없게 만든다.

The fact that Kant "criticizes" Descartes means only that he sets up a plane and constructs a problem that could not be occupied or completed by the Cartesian cogito. Descartes created the cogito as concept, but by expelling time as form of anteriority, so as to make it a simple mode of succession referring to continuous creation. Kant reintroduces time into the cogito, but it is a completely different time from that of Platonic anteriority. This is the creation of a concept. He makes time a component of a new cogito, but on condition of providing in turn a new concept of time: time becomes form of interiority with three components succession, but also simultaneity and permanence. This again implies a new concept of space that can no longer be defined by simple simultaneity and becomes form of exteriority. Space, time, and "I think" are three original concepts linked by bridges that are also junctions—a blast of original concepts. The history of philosophy means that we evaluate not only the historical novelty of the concepts created by a philosopher but also the power of their becoming when they pass into one another.
칸트가 데카르트를 "비판" 하는 것은 단지 그가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점유하거나 완성할 수 없는 차원을 설정하고 문제를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데카르트는 코기토를 개념으로 만들었지만, 시간을 선행성의 형태로 추방하여 계속되는 창조를 가리키는 단순한 연속의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칸트는 코기토에 시간을 다시 도입했지만, 그것은 플라톤의 선험성과는 완전히 다른 시간입니다. 이것은 개념의 창조입니다. 그는 시간을 새로운 코기토의 구성 요소로 만들지만, 새로운 시간 개념을 제공한다는 전제하에 그렇습니다: 시간은 세 가지의 구성 요소, 즉 연속성, 동시성, 영속성을 가진 내면성의 형태가 됩니다. 이것은 다시 공간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암시하는데, 공간은 더 이상 단순한 동시성으로 정의할 수 없고 외재성의 형태가 됩니다. 공간, 시간, 그리고 '생각한다' 라는 세 가지 독창적인 개념은 교차점이기도 한 다리들로 연결된, 즉 독창적인 개념들의 폭발입니다. 철학의 역사는 한 철학자가 창조한 개념의 역사적 참신성뿐만 아니라 개념이 서로를 통과할 때 생기는 힘을 평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he same pedagogical status of the concept can be found everywhere: a multiplicity, an absolute surface or volume, self-referents, made up of a certain number of inseparable intensive variations according to an order of neighborhood, and traversed by a point in a state of survey. The concept is the contour, the configuration, the constellation of an event to come. Concepts in this sense belong to philosophy by right, because it is philosophy that creates them and never stops creating them. The concept is obviously knowledge -but knowledge of itself, and what it knows is the pure event, which must not be confused with the state of affairs in which it is embodied. The task of philosophy when it creates concepts, entities, is always to extract an event from things and beings, to set up the new event from things and beings, always to give them a new event: space, time, matter, thought, the possible as events.
개념의 동일한 교육적 지위는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 다양성, 절대 표면 또는 부피, 자기 참조, 이웃 순서에 따라 분리 할 수없는 특정 수의 강도적인 변이들로 구성되고 비행 상태의 한 지점에 의해 횡단되는 것입니다. 개념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윤곽, 구성, 별자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념들은 철학에 속하며, 철학은 개념들을 창조하고 그 창조를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념은 분명히 지식이지만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이며, 그것이 아는 것은 순수한 사건이며, 그것이 체현된 상황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개념들, 실체들을 창조할 때 철학의 임무는 항상 사물과 존재로부터 사건을 추출하고, 사물과 존재로부터 새로운 사건을 설정하고, 항상 공간, 시간, 물질, 사고, 가능한 것을 사건들로 새롭게 부여하는 것입니다.

It is pointless to say that there are concepts in science. Even when science is concerned with the same "objects" it is not from the viewpoint of the concept; it is not by creating concepts. It might be said that this is just a matter of words, but it is rare for words not to involve intentions and ruses. It would be a mere matter of words if it was decided to reserve the concept for science, even if this meant finding another word to designate the business of philosophy. But usually things are done differently. The power of the concept is attributed to science, the concept being defined by the creative methods of science and measured against science. The issue is then whether there remains a possibility of philosophy forming secondary concepts that make up for their own insufficiency by a vague appeal to the "lived." Thus Gilles-Gaston Granger begins by defining the concept as a scientific proposition or function and then concedes that there may, nonetheless, be philosophical concepts that replace reference to the object by correlation to a "totality of the lived" [totalité du vécu]. But actually, either philosophy completely ignores the concept, or else it enjoys it by right and at first hand, so that there is nothing of it left for science -which, moreover, has no need of the concept and concerns itself only with states of affairs and their conditions. Science needs only propositions or functions, whereas philosophy, for its part, does not need to invoke a lived that would give only a ghostly and extrinsic life to secondary, bloodless concepts. The philosophical concept does not refer to the lived, by way of compensation, but consists, through its own creation, in setting up an event that surveys the whole of the lived no less than every state of affairs. Every concept shapes and reshapes the event in its own way. The greatness of a philosophy is measured by the nature of the events to which its concepts summon us or that it enables us to release in concepts. So the unique, exclusive bond between concepts and philosophy as a creative discipline must be tested in its finest details. The concept belongs to philosophy and only to philosophy.
과학에 개념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과학이 같은 '대상들'을 다룰 때에도 그것은 개념의 관점이 아니고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지 말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말에 의도들과 계략들이 포함되지 않는 경우는 드뭅니다. 만약 철학이라는 사업을 지칭할 다른 단어를 찾기 위해 과학에 개념을 맡기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말의 문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일은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개념의 힘은 과학으로 귀속되며, 개념은 과학의 창의적인 방법에 의해 정의되고 과학에 대항하여 측정됩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철학이 "삶"에 대한 막연한 호소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이차적 개념을 형성할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여부입니다. 따라서 질-가스통 그랭거는 개념을 과학적 명제나 기능으로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한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총체"[총체 뒤 베쿠]와의 상관관계로 대상에 대한 참조를 대체하는 철학적 개념이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철학은 이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처음부터 그것을 권리로 누리기 때문에 과학에 남겨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더 나아가 과학은 개념이 필요없고 그들의 상황과 조건에만 신경을 씁니다. 과학은 명제나 기능만을 필요로 하는 반면, 철학은 그것의 부분으로서 오직 유령적이고 외재적인 생명을 이차적이고 피가 없는 개념으로 부여하기에 삶을 불러일으킬 필요가 없습니다. 철학적 개념은 보상의 방식으로 삶에 회부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창조를 통해 모든 상황만큼이나 삶 전체를 비행하는 사건을 설정하는 것으로 구성됩니다. 모든 개념은 나름의 방식으로 사건을 형성하고 재구성합니다. 철학의 위대함은 그 개념이 우리를 소환하거나 개념들 속으로 풀어내게끔 하는 사건의 본성에 의해 측정됩니다. 따라서 창조적 학문으로서 개념들과 철학 사이의 독특하고 배타적인 유대는 가장 세밀한 부분에서 시험되어야 합니다. 개념은 철학에 속하며 철학에만 속합니다.


2. The plane of immanence

Philosophical concepts are fragmentary wholes that are not aligned with one another so that they fit together, because their edges do not match up. They are not pieces of a jigsaw puzzle but rather the outcome of throws of the dice. They resonate nonetheless, and the philosophy that creates them always introduces a powerful Whole that, while remaining open, is not fragmented: an unlimited One-All, an "Omnitudo" that includes all the concepts on one and the same plane. It is a table, a plateau, or a slice; it is a plane of consistency or, more accurately, the plane of immanence of concepts, the planomenon. Concepts and plane are strictly correlative, but nevertheless the two should not be confused. The plane of immanence is neither a concept nor the concept of all concepts. If one were to be confused with the other there would be nothing to stop concepts from forming a single one or becoming universals and losing their singularity, and the plane would also lose its openness. Philosophy is a constructivism, and constructivism has two qualitatively different complementary aspects: the creation of concepts and the laying out of a plane. Concepts are like multiple waves, rising and falling, but the plane of immanence is the single wave that rolls them up and unrolls them. The plane envelops infinite movements that pass back and forth through it, but concepts are the infinite speeds of finite movements that, in each case, pass only through their own components. From Epicurus to Spinoza (the incredible book) and from Spinoza to Michaux the problem of thought is infinite speed. But this speed requires a milieu that moves infinitely in itself -the plane, the void, the horizon. Both elasticity of the concept and fluidity of the milieu are needed.' Both are needed to make up "the slow beings" that we are.
철학적 개념은 서로의 가장자리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 파편적인 전체입니다. 그것은 직소 퍼즐의 조각이 아니라 주사위를 던져 나온 결과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공명하며, 그것들을 창조하는 철학은 항상 열려 있으면서도 파편화되지 않은 강력한 전체, 즉 모든 개념을 하나의 동일한 차원에 포함하는 '전능자', 즉 무한한 하나-전체(One-All)를 소개합니다. 그것은 테이블, 고원 또는 조각이며, 일관성의 차원 또는 더 정확하게는 개념의 내재성의 차원, 즉 차원소입니다. 개념들과 차원은 엄밀한 상관관계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내재성의 차원은 개념도 아니고 모든 개념들의 개념도 아닙니다. 만약 둘 중 하나를 다른 것과 혼동한다면 개념들이 단일한 하나를 형성하거나 보편적인 것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특이점을 잃게 될 것이며, 그 차원 또한 개방성을 잃게 될 것입니다. 철학은 구축주의이며, 구축주의는 두 가지 질적으로 다른 상호 보완적인 측면, 즉 개념들의 창조와 차원의 배치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념들은 다수의 파도와 같아서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지만, 내재성의 차원은 개념들을 말아 올리고 펼치는 하나의 파도입니다. 차원은 무한한 움직임들을 감싸며 앞뒤로 통과하지만, 개념은 유한한 움직임의 무한한 속도이며 각각의 경우에 오직 자신의 구성 요소들만 통과합니다. 에피쿠로스에서 스피노자(놀라운 책-윤리학 5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스피노자에서 미쇼에 이르기까지 사유의 문제는 무한한 속도입니다. 그러나 이 속도를 위해서는 차원, 허공, 수평선 등 그 자체로 무한히 움직이는 환경이 필요합니다. 개념의 탄력성과 환경의 유동성이 모두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느린 존재'인 우리를 구성하는 데 필요합니다.

Concepts are the archipelago or skeletal frame, a spinal column rather than a skull, whereas the plane is the breath that suffuses the separate parts. Concepts are absolute surfaces or volumes, formless and fragmentary, whereas the plane is the formless, unlimited absolute, neither surface nor volume but always fractal. Concepts are concrete assemblages, like the configurations of a machine, but the plane is the abstract machine of which these assemblages are the working parts. Concepts are events, but the plane is the horizon of events, the reservoir or reserve of purely conceptual events: not the relative horizon that functions as a limit, which changes with an observer and encloses observable states of affairs, but the absolute horizon, independent of any observer, which makes the event as concept independent of a visible state of affairs in which it is brought about. Concepts pave, occupy, or populate the plane bit by bit, whereas the plane itself is the indivisible milieu in which concepts are distributed without breaking up its continuity or integrity: they occupy it without measuring it out (the concept's combination is not a number) or are distributed without splitting it up. The plane is like a desert that concepts populate without dividing up. The only regions of the plane are concepts themselves, but the plane is all that holds them together. The plane has no other regions than the tribes populating and moving around on it. It is the plane that secures conceptual linkages with ever increasing connections, and it is concepts that secure the populating of the plane on an always renewed and variable curve.
개념들은 군도 또는 골격, 두개골이 아닌 척추인 반면 차원은 분리된 부분들에 숨을 불어넣는 숨결입니다. 개념들은 절대적인 표면들 또는 부피들이며 형태가 없고 파편적인 반면, 차원은 형태가 없고 무한한 절대이며 표면도 부피도 아니지만 항상 프랙탈입니다. 개념들은 기계의 구성과 같은 구체적인 배치물들이지만 차원은 이러한 배치물들이 부분으로서 작동하는 추상적인 기계입니다. 개념들은 사건이지만 차원은 사건들의 지평, 순수한 개념적 사건들의 저장소 또는 비축물입니다: 관찰자에 따라 변화하고 관찰 가능한 상황을 둘러싸는 한계로 기능하는 상대적 수평선이 아니라 관찰자와 무관한 절대적 수평선으로, 개념으로서의 사건이 유발되는 가시적 상황과 무관하게 만들어 줍니다. 개념들은 차원을 조금씩 포장하고, 점유하고, 채우는 반면, 차원 자체는 개념들이 그것의 연속성이나 온전성을 깨뜨리지 않고 분배되는 분할 불가능한 환경입니다: 개념들은 차원을 측정하지 않은 채로 점유하거나(개념의 조합은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을 쪼개지 않은 채로 분배됩니다. 차원은 개념들이 나누어지지 않고 채워지는 사막과 같습니다. 차원의 유일한 영역들은 개념 그 자체이지만, 차원은 개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모든 것입니다. 차원에는 그 위에 거주하고 이동하는 부족들 외에는 다른 영역이 없습니다. 끊임없이 증가하는 연결들로 개념적 연결고리들을 확보하는 것은 차원이며, 항상 갱신되고 가변적인 곡선 위에서 차원을 채우는 것은 개념입니다.

The plane of immanence is not a concept that is or can be thought but rather the image of thought, the image thought gives itself of what it means to think, to make use of thought, to find one's bearings in thought. It is not a method, since every method is concerned with concepts and presupposes such an image. Neither is it a state of knowledge on the brain and its functioning, since thought here is not related to the slow brain as to the scientifically determinable state of affairs in which, whatever its use and orientation, thought is only brought about. Nor is it opinions held about thought, about its forms, ends, and means, at a particular moment. The image of thought implies a strict division between fact and right: what pertains to thought as such must be distinguished from contingent features of the brain or historical opinions. Quid juris? -can, for example, losing one's memory or being mad belong to thought as such, or are they only contingent features of the brain that should be considered as simple facts? Are contemplating, reflecting, or communicating anything more than opinions held about thought at a particular time and in a particular civilization? The image of thought retains only what thought can claim by right. Thought demands "only" movement that can be carried to infinity. What thought claims by right, what it selects, is infinite movement or the movement of the infinite. It is this that constitutes the image of thought.
내재성의 차원은 생각하거나 생각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사유의 이미지, 즉 사유한다는 것, 사유를 활용한다는 것, 사유에서 자신의 방향을 찾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사유가 스스로 부여하는 이미지입니다. 모든 방법은 개념과 관련이 있고 그러한 이미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여기서의 사유는 그 사용과 방향이 무엇이든, 오직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과학적으로 결정 가능한 상태의 느린 뇌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뇌와 그 기능에 대한 지식의 상태도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특정 순간에 사유의 형태, 목적, 수단을 결정하는 의견들도 아닙니다. 사유의 이미지는 사실과 옳음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의미합니다. 즉, 사유와 관련된 것은 뇌의 우연한 특징이나 역사적 의견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권리의 문제? -예를 들어, 기억을 잃거나 화를 내는 것도 사유에 속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사실로 간주해야 하는 뇌의 우연적 특징일 뿐일까요? 관조, 반성, 혹은 의사소통은 특정 시대, 특정 문명에서 사유에 대해 가졌던 의견 이상의 무엇일까요? 사유의 이미지는 사유가 권리로 주장할 수 있는 것만을 유지합니다. 사유는 무한대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움직임을 요구합니다. 사유가 권리로서 주장하는 것, 그것이 선택하는 것은 무한한 운동 또는 무한의 운동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유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Movement of the infinite does not refer to spatiotemporal coordinates that define the successive positions of a moving object and the fixed reference points in relation to which these positions vary. "To orientate oneself in thought" implies neither objective reference point nor moving object that experiences itself as a subject and that, as such, strives for or needs the infinite. Movement takes in everything, and there is no place for a subject and an object that can only be concepts. It is the horizon itself that is in movement: the relative horizon recedes when the subject advances, but on the plane of immanence we are always and already on the absolute horizon. Infinite movement is defined by a coming and going, because it does not advance toward a destination without already turning back on itself, the needle also being the pole. If "turning toward" is the movement of thought toward truth, how could truth not also turn toward thought? And how could truth itself not turn away from thought when thought turns away from it? However, this is not a fusion but a reversibility, an immediate, perpetual, instantaneous exchange-a lightning flash. Infinite movement is double, and there is only a fold from one to the other. It is in this sense that thinking and being are said to be one and the same. Or rather, movement is not the image of thought without being also the substance of being. When Thales's thought leaps out, it comes back as water. When Heraclitus's thought becomes polemos, it is fire that retorts. It is a single speed on both sides: "The atom will traverse space with the speed of thought." The plane of immanence has two facets as Thought and as Nature, as Nous and as Physis. That is why there are always many infinite movements caught within each other, each folded in the others, so that the return of one instantaneously relaunches another in such a way that the plane of immanence is ceaselessly being woven, like a gigantic shuttle. To turn toward does not imply merely to turn away but to confront, to lose one's way, to move aside. Even the negative produces infinite movements: falling into error as much as avoiding the false, allowing oneself to be dominated by passions as much as overcoming them. Diverse movements of the infinite are so mixed in with each other that, far from breaking up the One-All of the plane of immanence, they constitute its variable curvature, its concavities and convexities, its fractal nature as it were. It is this fractal nature that makes the planomenon an infinite that is always different from any surface or volume determinable as a concept. Every movement passes through the whole of the plane by immediately turning back on and folding itself and also by folding other movements or allowing itself to be folded by them, giving rise to retroactions, connections, and proliferations in the fractalization of this infinitely folded up infinity (variable curvature of the plane). But if it is true that the plane of immanence is always single, being itself pure variation, then it is all the more necessary to explain why there are varied and distinct planes of immanence that, depending upon which infinite movements are retained and selected, succeed and contest each other in history. The plane is certainly not the same in the time of the Greeks, in the seventeenth century, and today (and these are still vague and general terms): there is neither the same image of thought nor the same substance of being. The plane is, therefore, the object of an infinite specification so that it seems to be a One-All only in cases specified by the selection of movement. This difficulty concerning the ultimate nature of the plane of immanence can only be resolved step by step.
무한의 움직임은 움직이는 대상의 연속적인 위치들을 규정하는 시공간적 좌표들과 그 위치들이 변화하는 고정된 기준점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유의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기준점도 아니고, 스스로를 주체로서 경험하며 무한을 추구하거나 필요로 하는 움직이는 대상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움직임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단지 개념들일 수 밖에 없는 주체와 객체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운동하는 것은 지평 그 자체입니다: 주체가 전진하면 상대적 지평은 후퇴하지만, 내재성의 차원에서 우리는 항상 그리고 이미 절대적 지평에 있습니다. 무한한 움직임은 이미 자신을 향해 돌아서지 않고는 목적지를 향해 전진하지 않기 때문에 오고 가는 것에 의해 정의되며, 따라서 바늘은 극이기도 합니다. '향함'이 진리를 향한 사유의 움직임이라면, 어떻게 진리도 사유를 향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유가 진리로부터 돌아설 때 진리 자체가 어떻게 사유로부터 돌아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융합이 아니라 가역성, 즉 즉각적이고 영속적이며 순간적인 교환, 즉 번개처럼 번쩍이는 것입니다. 무한한 움직임은 이중이며,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의 접힘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유와 존재는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움직임은 존재의 실체 없이는 사유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탈레스의 생각이 밖으로 튀어나가면 그것은 물처럼 되돌아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가 논쟁이 될 때 이에 맞서는 것은 불입니다. 양쪽 모두 하나의 속도입니다: "원자는 사유의 속도로 공간을 횡단한다." 내재성의 차원은 생각과 자연, 이성과 자연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수많은 무한한 움직임이 서로 안에서 포착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접혀서 하나의 회귀가 다른 하나를 순간적으로 다시 발사하는 방식으로 내재성의 차원은 거대한 셔틀처럼 끊임없이 직조되고 있습니다. 방향을 전환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면하고, 길을 잃고, 옆으로 비켜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정적인 것조차도 무한한 움직임을 만들어냅니다: 거짓을 피하는 것만큼이나 오류에 빠지고, 정념을 극복하는 것만큼이나 정념에 지배당하는 자신을 허용합니다. 무한의 다양한 움직임은 서로 뒤섞여서 내재성의 차원의 하나-모두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변적 곡률, 오목함과 볼록함, 프랙탈적 본성을 그대로 구성합니다. 이 프랙탈적 본성이 차원소를 개념으로 규정할 수 있는 어떤 표면이나 부피와는 항상 다른 무한한 것으로 만듭니다. 모든 움직임은 즉시 다시 회전하여 자신을 접고 다른 움직임들을 접거나 그들에 의해 접히게 함으로써 차원 전체를 통과하며, 무한히 접혀진 무한(차원의 가변 곡률)의 프랙탈화 속에서 반작용, 연결, 증식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내재성의 차원이 항상 단일하고 그 자체가 순수한 변화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떤 무한한 움직임이 유지되고 선택되는지에 따라 역사에서 서로 성공하고 경쟁하는 다양하고 구별되는 내재성의 차원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더욱 필요합니다. 차원은 그리스인 시대와 17세기, 그리고 오늘날(여전히 모호하고 일반적인 용어이지만) 동일하지 않습니다: 동일한 사유의 이미지도 동일한 존재의 실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차원은 무한한 구체화의 대상이기 때문에 운동의 선별에 의해 구체화된 경우에만 하나-전부인 것처럼 보입니다. 내재성의 차원의 궁극적 본성에 관한 이 난제는 단계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뿐입니다.

It is essential not to confuse the plane of immanence and the concepts that occupy it. Although the same elements may appear twice over, on the plane and in the concept, it will not be in the same guise, even when they are expressed in the same verbs and words. We have seen this for being, thought, and one: they enter into the concept's components and are themselves concepts, but they belong to the plane quite differently as image or substance. Conversely, truth can only be defined on the plane by a "turning toward" or by "that toward which thought turns"; but this does not provide us with a concept of truth. If error itself is an element that by right forms part of the plane, then it consists simply in taking the false for the true (falling); but it only receives a concept if we determine its components (according to Descartes, for example, the two components of a finite understanding and an infinite will). Movements or elements of the plane, therefore, will seem to be only nominal definitions in relation to concepts so long as we disregard the difference in nature between plane and concepts. But in reality, elements of the plane are diagrammatic features, whereas concepts are intensive features. The former are movements of the infinite, whereas the latter are intensive ordinates of these movements, like original sections or differential positions: finite movements in which the infinite is now only speed and each of which constitutes a surface or a volume, an irregular contour marking a halt in the degree of proliferation. The former are directions that are fractal in nature, whereas the latter are absolute dimensions, intensively defined, always fragmentary surfaces or volumes. The former are intuitions, and the latter intensions. The grandiose Leibnizian or Bergsonian perspective that every philosophy depends upon an intuition that its concepts constantly develop through slight differences of intensity is justified if intuition is thought of as the envelopment of infinite movements of thought that constantly pass through a plane of immanence. Of course, we should not conclude from this that concepts are deduced from the plane: concepts require a special construction distinct from that of the plane, which is why concepts must be created just as the plane must be set up. Intensive features are never the consequence of diagrammatic features, and intensive ordinates are not deduced from movements or directions. Their correspondence goes beyond even simple resonances and introduces instances adjunct to the creation of concepts, namely, conceptual personae.
내재성의 차원과 그것을 점유하는 개념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동일한 요소들이 차원과 개념에서 두 번 나타날 수 있지만, 동일한 동사와 단어로 표현되더라도 동일한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 사유, 하나에 대해 이를 확인했습니다: 이들은 개념의 구성 요소들로 들어가며 그들 자체가 개념들이지만, 그들이 이미지나 실체로서 차원에 속하는 것은 상당히 다릅니다. 반대로 진리는 차원 위에서 오직 "향하는 것" 또는 "생각이 향하는 것"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진리라는 개념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만약 오류 자체가 차원의 일부를 형성하는 요소라면, 그것은 단순히 참을 위해 거짓을 취하는(떨어지는) 것으로 구성되지만, 우리가 그 구성 요소(예를 들어 데카르트에 따르면 오류는 유한한 이해와 무한한 의지의 두 가지 구성 요소를 가진다)를 결정할 때만 개념을 얻게 됩니다. 따라서 차원과 개념의 본성상의 차이를 무시하는 한, 차원의 움직임이나 요소는 개념과 관련하여 명목상의 정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차원의 요소는 다이어그램적 특질들인 반면 개념은 강도적 특질들입니다. 전자는 무한의 움직임인 반면, 후자는 원근법이나 미분 위치들처럼 이러한 움직임들의 강도적인 좌표입니다: 무한은 이제 속도일 뿐이고 각각은 표면이나 부피를 구성하는 유한한 움직임, 확산의 정도가 멈추는 것을 나타내는 불규칙한 윤곽선입니다. 전자는 본성상 프랙탈적인 방향인 반면, 후자는 절대적인 차원(dimension)들이고, 강도적으로 정의되며 항상 파편적인 표면 또는 부피입니다. 전자는 직관들이고 후자는 강도/의도들입니다. 모든 철학은 직관에 의존하며 그것의 개념들은 약간의 강도의 차이를 통해 끊임없이 발전한다는 라이프니츠나 베르그송의 원대한 관점은 직관이 내재성의 평면을 끊임없이 통과하는 무한한 사유의 움직임의 포괄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으로부터 개념들이 평면으로부터 연역된다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개념들은 평면과 구별되는 특별한 구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평면이 설정되어야 하듯이 개념들도 만들어져야 합니다. 강도적 특질들은 다이어그램적 특질들의 결과물이 아니며 강도적 좌표들은 움직임이나 방향에서 연역되지 않습니다. 이들의 대응은 단순한 공명을 넘어 개념 생성에 부가적인 사례들, 즉 개념적 페르소나를 도입합니다.

If philosophy begins with the creation of concepts, then the plane of immanence must be regarded as prephilosophical. It is presupposed not in the way that one concept may refer to others but in the way that concepts themselves refer to a nonconceptual understanding. Once again, this intuitive understanding varies according to the way in which the plane is laid out. In Descartes it is a matter of a subjective understanding implicitly presupposed by the "I think" as first concept; in Plato it is the virtual image of an already-thought that doubles every actual concept. Heidegger invokes a "preontological understanding of Being," a "preconceptual" understanding that seems to imply the grasp of a substance of being in relationship with a predisposition of thought. In any event, philosophy posits as prephilosophical, or even as nonphilosophical, the power of a One-All like a moving desert that concepts come to populate. Prephilosophical does not mean something preexistent but rather something that does not exist outside philosophy, although philosophy presupposes it. These are its internal conditions. The nophilosophical is perhaps closer to the heart of philosophy than philosophy itself, and this means that philosophy cannot be content to be understood only philosophically or conceptually, but is addressed essentially to non-philosophers as well. We will see that this constant relationship with nonphilosophy has various features. According to this first feature, philosophy defined as the creation of concepts implies a distinct but inseparable presupposition. Philosophy is at once concept creation and instituting of the plane. The concept is the beginning of philosophy, but the plane is its instituting. The plane is clearly not a program, design, end, or means: it is a plane of immanence that constitutes the absolute ground of philosophy, its earth or deterritorialization, the foundation on which it creates its concepts. Both the creation of concepts and the instituting of the plane are required, like two wings or fins.
철학이 개념의 생성에서 시작한다면, 내재성의 평면은 선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개념이 다른 것들을 지칭하는 방식이 아니라 개념들 스스로가 비개념적 이해로 회부되는 방식을 전제로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러한 직관적 이해는 평면이 배치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집니다. 데카르트에서는 첫 번째 개념으로서 "나는 생각한다"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주체적 이해의 문제이고, 플라톤에서는 모든 현실화된 개념을 이중화하는 것은 이미 사유된 것의 가상 이미지입니다. 하이데거는 "존재에 대한 선존재론적 이해", 즉 사유의 성향과 관계에 있는 존재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전개념적" 이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어쨌든 철학은 개념들이 채워지는 움직이는 사막과 같은 하나-전체의 힘을 선철학적인 것으로, 또는 심지어 비철학적인 것으로 가정합니다. 선철학적인 것은 선재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이 전제하지만 철학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철학의 내적 조건입니다. 비철학적인 것은 어쩌면 철학 자체보다 철학의 핵심에 더 가깝고, 이는 철학이 철학적 또는 개념적으로만 이해되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으며 철학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본질적으로 다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비철학과의 끊임없는 관계에는 여러 가지 특질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특질에 따르면, 개념의 창조로 정의되는 철학은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전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개념의 창조이자 동시에 평면의 성립입니다. 개념은 철학의 시작이지만 평면은 그것의 설립입니다. 평면은 분명히 프로그램, 설계, 목적,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의 절대적 토대, 즉 개념을 창조하는 토대인 내재성의 평면, 즉 대지 또는 탈영토화를 구성하는 평면입니다. 개념의 창조와 평면의 확립은 두 개의 날개나 지느러미처럼 모두 필요합니다.

Thinking provokes general indifference. It is a dangerous exercise nevertheless. Indeed, it is only when the dangers become obvious that indifference ceases, but they often remain hidden and barely perceptible, inherent in the enterprise. Precisely because the plane of immanence is prephilosophical and does not immediately take effect with concepts, it implies a sort of groping experimentation and its layout resorts to measures that are not very respectable, rational, or reasonable. These measures belong to the order of dreams, of pathological processes, esoteric experiences, drunkenness, and excess. We head for the horizon, on the plane of immanence, and we return with bloodshot eyes, yet they are the eyes of the mind. Even Descartes had his dream. To think is always to follow the witch's flight. Take Michaux's plane of immanence, for example, with its infinite, wild movements and speeds. Usually these measures do not appear in the result, which must be grasped solely in itself and calmly. But then "danger" takes on another meaning: it becomes a case of obvious consequences when pure immanence provokes a strong, instinctive disapproval in public opinion, and the nature of the created concepts strengthens this disapproval. This is because one does not think without becoming something else, something that does not think -an animal, a molecule, a particle-and that comes back to thought and revives it.
생각하는 것은 전반적인 무관심을 유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위험한 일입니다. 실제로 무관심이 멈추는 것은 위험이 명백해졌을 때이지만, 위험은 대개 숨겨져 있고 거의 인식할 수 없는 상태로 조직에 내재되어 있습니다. 내재성의 평면은 선철학적이고 개념들에 즉시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일종의 더듬어 보는 실험을 의미하며, 그것의 배치는 그다지 존경할 만하거나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이지 않은 측정들에 의존합니다. 이러한 측정들은 꿈의 질서, 병리학적인 과정들, 밀교적인 경험들, 술 취함과 과잉의 질서에 속합니다. 우리는 지평선, 내재성의 평면으로 향하고 충혈된 눈으로 돌아오지만, 그 눈은 마음의 눈입니다. 데카르트에게도 꿈이 있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마녀의 비행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무한하고 거친 움직임과 속도를 가진 미쇼의 내재성의 평면을 생각해 보세요. 일반적으로 이러한 측정들은 결과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오로지 그 자체로 침착하게 파악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위험"은 또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 순수한 내재성이 여론에서 강력하고 본능적인 반감을 불러 일으키고 창조된 개념의 본성이 이러한 반감을 강화할 때 명백한 결과들의 경우가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물, 분자, 입자 등 사유하지 않는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고는 사유하지 않으며, 사유로 돌아와서 그것을 되살리기 때문입니다.

The plane of immanence is like a section of chaos and acts like a sieve. In fact, chaos is characterized less by the absence of determinations than by the infinite speed with which they take shape and vanish. This is not a movement from one determination to the other but, on the contrary, the impossibility of a connection between them, since one does not appear without the other having already disappeared, and one appears as disappearance when the other disappears as outline. Chaos is not an inert or stationary state, nor is it a chance mixture. Chaos makes chaotic and undoes every consistency in the infinite. The problem of philosophy is to acquire a consistency without losing the infinite into which thought plunges (in this respect chaos has as much a mental as a physical existence). To give consistency without losing anything of the infinite is very different from the problem of science, which seeks to provide chaos with reference points, on condition of renouncing infinite movements and speeds and of carrying out a limitation of speed first of all. Light, or the relative horizon, is primary in science. Philosophy, on the other hand, proceeds by presupposing or by instituting the plane of immanence: it is the plane's variable curves that retain the infinite movements that turn back on themselves in incessant exchange, but which also continually free other movements which are retained. The concepts can then mark out the intensive ordinates of these infinite movements, as movements which are themselves finite which form, at infinite speed, variable contours inscribed on the plane. By making a section of chaos, the plane of immanence requires a creation of concepts.
내재성의 평면은 카오스의 한 단면과 같으며 체와 같은 작용을 합니다. 사실 카오스는 한정들의 부재보다는 한정들이 형태를 취하고 사라지는 무한한 속도에 의해 특징지어집니다. 이것은 하나의 한정에서 다른 한정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 사이의 연결이 불가능함을 의미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의 한정은 다른 하나가 이미 사라지지 않고는 나타나지 않으며, 또 하나의 한정은 다른 하나가 윤곽선으로 사라질 때 사라짐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카오스는 불활성 상태나 정지된 상태가 아니며 우연적인 혼합물도 아닙니다. 카오스는 무한 속에서 혼돈을 만들고 모든 지속성을 무효화합니다. 철학의 문제는 사유가 빠져드는 무한을 잃지 않으면서 지속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이런 점에서 카오스는 물리적 실존인 만큼이나 정신적 실존입니다). 무한한 것을 잃지 않고 지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한한 움직임들과 속도들을 포기하고 속도의 제한을 우선적으로 수행하는 조건에서 혼돈에 기준점을 제공하고자 하는 과학의 문제와는 매우 다릅니다. 빛, 혹은 상대적 지평선은 과학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철학은 내재성의 평면을 전제하거나 도입함으로써 진행됩니다: 끊임없는 교환 속에서 스스로에게 회귀하는 무한한 움직임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유지되는 다른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자유롭게 하는 것은 평면의 가변적인 곡선입니다. 그런 다음 개념들은 무한한 속도로 평면에 새겨진 가변 윤곽을 형성하는 유한한 움직임으로서 이러한 무한한 움직임들의 강도적인 좌표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내재성의 평면은 카오스의 단면을 만들어냄으로써 개념의 생성을 요구합니다.

To the question "Can or must philosophy be regarded as Greek?" a first answer seemed to be that the Greek city actually appears as the new society of "friends," with all the ambiguities of that word. Jean-Pierre Vernant adds a second answer: the Greeks were the first to conceive of a strict immanence of Order to a cosmic milieu that sections chaos in the form of a plane. If we call such a plane-sieve Logos, the logos is far from being like simple "reason" (as when one says the world is rational). Reason is only a concept, and a very impoverished concept for defining the plane and the movements that pass through it. In short, the first philosophers are those who institute a plane of immanence like a sieve stretched over the chaos. In this sense they contrast with sages, who are religious personae, priests, because they conceive of the institution of an always transcendent order imposed from outside by a great despot or by one god higher than the others, inspired by Eris,* pursuing wars that go beyond any agon and hatreds that object in advance to the trials of rivalry. Whenever there is transcendence, vertical Being, imperial State in the sky or on earth, there is religion; and there is Philosophy whenever there is immanence, even if it functions as arena for the agon and rivalry (the Greek tyrants do not constitute an objection to this, because they are wholeheartedly on the side of the society of friends such as it appears in their wildest, most violent rivalries). Perhaps these two possible determinations of philosophy as Greek are profoundly linked. Only friends can set out a plane of immanence as a ground from which idols have been cleared. In Empedocles, Love lays out the plane, even if she does not return to the self without enfolding Hatred as movement that has become negative showing a subtranscendence of chaos (the volcano) and a supertranscendence of a god. It may be that the first philosophers still look like priests, or even kings. They borrow the sage's mask -and, as Nietzsche says, how could philosophy not disguise itself in its early stages? Will it ever stop having to disguise itself? If the instituting of philosophy merges with the presupposition of a prephilosophical plane, how could philosophy not profit from this by donning a mask? It remains the case that the first philosophers lay out a plane through which unlimited movements pass continually on two sides, one determinable as Physis inasmuch as it endows Being with a substance, and the other as Nous inasmuch as it gives an image to thought. It is Anaximander who distinguishes between the two sides most rigorously by combining the movement of qualities with the power of an absolute horizon, the Apeiron or the Boundless, but always on the same plane. Philosophers carry out a vast diversion of wisdom; they place it at the service of pure immanence. They replace genealogy with a geology.
"철학은 그리스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가, 아니면 반드시 그래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첫 번째 대답은 그리스 도시가 실제로 '친구'라는 단어의 모든 모호성을 지닌 새로운 사회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장 피에르 베르낭은 두 번째 대답을 덧붙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카오스를 평면의 형태 속에 구획하는 우주 환경에 엄격한 질서의 내재성을 최초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평면-체를 로고스라고 부른다면, 로고스는 단순한 '이성'과는 거리가 멉니다(세상이 이성적이라고 말할 때처럼). 이성은 단지 개념일 뿐이며, 평면과 평면을 통과하는 움직임을 정의하기에는 매우 빈약한 개념입니다. 요컨대, 최초의 철학자들은 카오스 위에 펼쳐진 체와 같은 내재성의 평면을 확립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종교적 페르소나인 사제와 대조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경쟁의 시련들에 미리 반대하여 모든 고뇌와 증오를 뛰어넘는 전쟁을 추구하면서 에리스*의 영감을 받아 위대한 독재자나 다른 신들보다 높은 한 신이 외부에서 부과하는 항상 초월적인 질서의 제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이나 땅에 초월성, 수직적 존재, 제국적 국가가 있을 때마다 종교가 있고, 고뇌와 경쟁의 장으로 기능하더라도 내재성이 있을 때마다 철학이 있습니다(그리스 폭군들은 가장 거칠고 폭력적인 경쟁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전적으로 친구들의 사회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두 가지 가능한 그리스 철학의 규정들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친구만이 우상을 제거할 수 있는 근거로서 내재성의 평면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엠페도클레스에서 사랑은 평면을 배치하는데, 비록 그녀가 카오스(화산)의 하위 초월과 신의 상위 초월을 보여주는 부정적인 운동으로서의 증오를 감싸지 않고는 자아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최초의 철학자들은 여전히 사제나 심지어 왕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현자의 가면을 빌렸는데, 니체의 말처럼 철학이 초기 단계에서 어떻게 변장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언제쯤이면 철학은 스스로를 변장할 필요가 없어질까요? 철학의 제도화가 전철학적 평면의 전제와 합쳐진다면, 철학이 가면을 쓰고서 어떻게 이로부터 이익을 얻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최초의 철학자들은 무한한 움직임들이 양면에서 끊임없이 통과하는 평면을 배치했는데, 하나는 존재에 실체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자연으로 한정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사유에 이미지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정신으로 한정될 수 있습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질들의 움직임을 절대적 지평의 힘인 아페론 혹은 무한의 힘과 결합하여 양쪽을 가장 엄격하게 구분하지만 항상 같은 평면에 놓는 사람입니다. 철학자들은 지혜의 방대한 전환을 수행하며 순수한 내재성을 위해 그것을 배치합니다. 그들은 계보를 지질학으로 대체합니다.

Example 3
Can the entire history of philosophy be presented from the viewpoint of the instituting of a plane of immanence? Physicalists, who insist on the substance of Being, would then be distinguished from noologists, who insist on the image of thought. But a risk of confusion soon arises: rather than this substance of Being or this image of thought being constituted by the plane of immanence itself, immanence will be related to something like a "dative," Matter or Mind. This becomes clear with Plato and his successors. Instead of the plane of immanence constituting the One-All, immanence is immanent "to" the One, so that another One, this time transcendent, is superimposed on the one in which immanence is extended or to which it is attributed: the neo-Platonists' formula will always be a One beyond the One. Whenever immanence is interpreted as immanent "to" something a confusion of plane and concept results, so that the concept becomes a transcendent universal and the plane becomes an attribute in the concept. When misunderstood in this way, the plane of immanence revives the transcendent again: it is a simple field of phenomena that now only possesses in a secondary way that which first of all is attributed to the transcendent unity.
철학의 전체 역사는 내재성의 평면을 설정한다는 관점에서 제시될 수 있을까요? 존재의 실체를 주장하는 물리주의자들은 사유의 이미지를 주장하는 관념론자들과 구별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곧 혼란의 위험이 발생하는데, 존재의 실체나 사유의 이미지가 내재성의 평면 자체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내재성은 물질이나 정신과 같은 "간접 목적어"와 관련될 것입니다. 이것은 플라톤과 그의 후계자들에게서 분명해집니다. 내재성의 평면이 하나-모든 것을 구성하는 대신 내재성은 유일자"에" 내재하므로, 이번에는 초월적인 또 다른 유일자가 내재성이 연장되거나 귀속되는 유일자에 겹쳐집니다: 신플라톤주의자들의 공식은 항상 유일자를 넘어서는 유일자가 될 것입니다. 내재성을 어떤 것 "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할 때마다 평면과 개념의 혼동이 발생하여 개념은 초월적 보편이 되고 평면은 개념 속의 속성이 됩니다. 이런 식으로 잘못 이해될 때 내재성의 평면은 초월적인 것을 다시 부활시킵니다: 그것은 이제 초월적인 통일성에 귀속되는 것을 이차적인 방식으로만 소유하는 단순한 현상의 장입니다.

It gets worse with Christian philosophy. The positing of immanence remains pure philosophical instituting, but at the same time it is tolerated only in very small doses; it is strictly controlled and enframed by the demands of an emanative and, above all, creative transcendence. Putting their work and sometimes their lives at risk, all philosophers must prove that the dose of immanence they inject into world and mind does not compromise the transcendence of a God to which immanence must be attributed only secondarily (Nicholas of Cusa, Eckhart, Bruno). Religious authority wants immanence to be tolerated only locally or at an intermediary level, a little like a terraced fountain where water can briefly immanate on each level but on condition that it comes from a higher source and falls lower down (transascendence and transdescendence, as Wahl said). Immanence can be said to be the burning issue of all philosophy because it takes on all the dangers that philosophy must confront, all the condemnations, persecutions, and repudiations that it undergoes. This at least persuades us that the problem of immanence is not abstract or merely theoretical. It is not immediately clear why immanence is so dangerous, but it is. It engulfs sages and gods. What singles out the philosopher is the part played by immanence or fire. Immanence is immanent only to itself and consequently captures everything, absorbs All-One, and leaves nothing remaining to which it could be immanent. In any case, whenever immanence is interpreted as immanent to Something, we can be sure that this Something reintroduces the transcendent.
이는 기독교 철학에서 더 심해집니다.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은 순수한 철학적 제도로 남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아주 적은 양으로만 용납되며, 그것은 방사적이고 무엇보다도 창조적인 초월성의 요구에 의해 엄격하게 통제되고 틀에 갇혀 있습니다. 모든 철학자들은 자신의 작업과 때로는 목숨을 걸고 세계와 정신에 주입하는 내재성의 양이 내재성을 이차적으로만 귀속시켜야 하는 신의 초월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합니다(쿠사의 니콜라스, 에크하르트, 브루노). 종교적 권위는 내재성이 국지적 또는 중개적 수준에서만 용인되기를 원하는데, 마치 계단식 분수처럼 물이 각 층에서 잠시 내재할 수 있지만 더 높은 원천에서 왔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조건(초상향성과 초하향성, Wahl이 말한 것처럼)에서만 허용됩니다. 내재성은 철학이 직면해야 하는 모든 위험, 모든 비난, 박해, 배척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철학의 뜨거운 쟁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적어도 내재성의 문제가 추상적이거나 단순한 이론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설득합니다. 내재성이 왜 그렇게 위험한지는 즉시 명확하지 않지만, 위험합니다. 그것은 현자와 신을 집어삼킵니다. 철학자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내재성 또는 불이 하는 역할입니다. 내재성은 자기 자신에게만 내재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모든 것을 포획하고, 하나-전체를 흡수하며, 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어쨌든 내재성을 무언가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할 때마다 우리는 이 무언가가 초월적인 것을 다시 도입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Beginning with Descartes, and then with Kant and Husserl, the cogito makes it possible to treat the plane of immanence as a field of consciousness. Immanence is supposed to be immanent to a pure consciousness, to a thinking subject. Kant will call this subject transcendental rather than transcendent, precisely because it is the subject of the field of immanence of all possible experience from which nothing, the external as well as the internal, escapes. Kant objects to any transcendent use of the synthesis, but he ascribes immanence to the subject of the synthesis as new, subjective unity. He may even allow himself the luxury of denouncing transcendent Ideas, so as to make them the "horizon" of the field immanent to the subject. But, in so doing, Kant discovers the modern way of saving transcendence: this is no longer the transcendence of a Something, or of a One higher than everything (contemplation), but that of a Subject to which the field of immanence is only attributed by belonging to a self that necessarily represents such a subject to itself (reflection). The Greek world that belonged to no one increasingly becomes the property of a Christian consciousness.
데카르트에서 시작하여 칸트와 후설에 이르기까지 코기토는 내재성의 평면을 의식의 영역으로 취급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내재성은 순수한 의식, 사고하는 주체에 내재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칸트는 이 주체를 초월적이라기보다는 선험적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주체가 외부와 내부의 어떤 것도 벗어날 수 없는 모든 가능한 경험의 내재성의 영역의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종합의 초월적 사용에 반대하지만, 종합의 주체에 내재성을 새롭고 주체적인 통일성으로 부여합니다. 그는 심지어 초월적 이데아를 주체에 내재하는 영역의 '지평'으로 만들기 위해 초월적 이데아를 비난하는 사치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칸트는 초월을 구원하는 근대적 방법을 발견한다: 그것은 더 이상 어떤 것, 또는 모든 것보다 높은 일자(관조)의 초월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그러한 주체를 재현하는 자아에 속함으로써만 내재성의 장이 귀속되는 주체의 초월성이다(성찰).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던 그리스 세계는 점점 더 기독교 의식의 소유물이 됩니다.

Yet one more step: when immanence becomes immanent "to" a transcendental subjectivity, it is at the heart of its own field that the hallmark or figure [chiffre] of a transcendence must appear as action now referring to another self, to another consciousness (communication). This is what happens in Husserl and many of his successors who discover in the Other or in the Flesh, the mole of the transcendent within immanence itself. Husserl conceives of immanence as that of the flux lived by subjectivity. But since all this pure and even untamed lived does not belong completely to the self that represents it to itself, something transcendent is reestablished on the horizon, in the regions of nonbelonging: first, in the form of an "immanent or primordial transcendence" of a world populated by intentional objects; second, as the privileged transcendence of an intersubjective world populated by other selves; and third, as objective transcendence of an ideal world populated by cultural formations and the human community. In this modern moment we are no longer satisfied with thinking immanence as immanent to a transcendent; we want to think transcendence within the immanent, and it is from immanence that a breach is expected. Thus, in Jaspers, the plane of immanence is given the most profound determination as "Encompassing" [Englobant], but this encompassing is no more than a reservoir for eruptions of transcendence. The Judeo-Christian word replaces the Greek logos: no longer satisfied with ascribing immanence to something, immanence itself is made to disgorge the transcendent everywhere. No longer content with handing over immanence to the transcendent, we want it to discharge it, reproduce it, and fabricate it itself. In fact this is not difficult —all that is necessary is for movement to be stopped. Transcendence enters as soon as movement of the infinite is stopped. It takes advantage of the interruption to reemerge, revive, and spring forth again. The three sorts of Universals contemplation, reflection, and communication-are like three philosophical eras —Eidetic, Critical, and Phenomenological-inseparable from the long history of an illusion. The reversal of values had to go so far -making us think that immanence is a prison (solipsism) from which the Transcendent will save us.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내재성이 선험적 주체성"에" 내재하게 될 때, 초월의 표징 또는 형상[쉬프레]이 이제 또 다른 자아, 다른 의식(소통)을 가리키는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은 그 고유한 영역의 핵심이다. 이것이 후설과 그의 많은 후계자들이 타자 또는 육체에서 내재성 자체 안에 있는 초월자의 두더지를 발견한 것입니다. 후설은 내재성을 주체성에 의해 살아 움직이는 유동성의 개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순수하고 심지어 길들여지지 않은 삶은 그것을 스스로에게 재현하는 자아에 완전히 속하지 않기 때문에, 비소속의 영역들 속에서 초월적인 무언가가 지평선에 다시 자리 잡는다: 첫째, 의도적 대상들로 채워진 세계의 '내재적 또는 원초적 초월'의 형태로, 둘째, 다른 자아들로 채워진 상호주체적 세계의 특권적 초월로, 셋째, 문화적 형상들과 인간 공동체로 채워진 이상세계의 객관적 초월로.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더 이상 내재성을 초월성에 내재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내재성 안에서 초월성을 생각하기를 원하며, 그 위반이 예상되는 것은 내재성으로부터입니다. 따라서 야스퍼스에서 내재성의 평면은 '포괄하는 것'[엥글로반트]으로 가장 심오하게 한정되지만, 이 포괄은 초월성의 분출을 위한 저장고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기독교적 단어는 그리스적 로고스를 대체합니다: 더 이상 내재성을 어떤 것에 부여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내재성 자체가 모든 곳에서 초월적인 것을 혐오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더 이상 내재성을 초월자에게 넘겨주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우리는 그것을 방출하고, 재생산하고, 스스로 제작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이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움직임을 멈추기만 하면 됩니다. 무한의 움직임이 멈추는 순간 초월성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그 중단을 이용하여 다시 나타나고, 되살아나고, 다시 솟아납니다. 관조, 성찰, 소통이라는 세 가지 보편성은 이데아, 비판, 현상학이라는 세 가지 철학의 시대들처럼 환상의 오랜 역사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내재성을 초월자가 우리를 구원해 줄 감옥(고독주의)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가치의 역전은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Sartre's presupposition of an impersonal transcendental field restores the rights of immanence. When immanence is no longer immanent to something other than itself it is possible to speak of a plane of immanence. Such a plane is, perhaps, a radical empiricism: it does not present a flux of the lived that is immanent to a subject and individualized in that which belongs to a self. It presents only events, that is, possible worlds as concepts, and other people as expressions of possible worlds or conceptual personae. The event does not relate the lived to a transcendent subject = Self but, on the contrary, is related to the immanent survey of a field without subject; the Other Person does not restore transcendence to an other self but returns every other self to the immanence of the field surveyed. Empiricism knows only events and other people and is therefore a great creator of concepts. Its force begins from the moment it defines the subject: a habitus, a habit, nothing but a habit in a field of immanence, the habit of saying I.
사르트르의 비인격적 선험적 장에 대한 전제는 내재성의 권리를 회복시킵니다. 내재성이 더 이상 그 자체 이외의 것에 내재하지 않을 때 내재성의 평면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평면은 아마도 급진적인 경험주의일 것입니다: 그것은 주체에게 내재하고 자아에 개별화되어 속하게 되는 삶의 흐름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건들, 즉 개념들로서의 가능한 세계들과 가능한 세계들 또는 개념적 페르소나들의 표현들로서의 다른 사람들만을 제시합니다. 사건은 산 자를 초월적 주체=자아와 관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주체 없는 장의 내재적 비행과 관련시키고, 타자는 다른 자아에게 초월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다른 자아를 비행된 장의 내재성으로 되돌립니다. 경험주의는 오직 사건들과 타자들만 알기 때문에 개념들의 위대한 창조자입니다. 그것의 힘은 주체를 정의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하비투스, 습관, 내재성의 장에서 다름 아닌 습관, 즉 '나'라고 말하는 습관.

Spinoza was the philosopher who knew full well that immanence was only immanent to itself and therefore that it was a plane traversed by movements of the infinite, filled with intensive ordinates. He is therefore the prince of philosophers. Perhaps he is the only philosopher never to have compromised with transcendence and to have hunted it down everywhere. In the last book of the Ethics he produced the movement of the infinite and gave infinite speeds to thought in the third kind of knowledge. There he attains incredible speeds, with such lightning compressions that one can only speak of music, of tornadoes, of wind and strings. He discovered that freedom exists only within immanence. He fulfilled philosophy because he satisfied its prephilosophical presupposition. Immanence does not refer back to the Spinozist substance and modes but, on the contrary, the Spinozist concepts of substance and modes refer back to the plane of immanence as their presupposition. This plane presents two sides to us, extension and thought, or rather its two powers, power of being and power of thinking. Spinoza is the vertigo of immanence from which so many philosophers try in vain to escape. Will we ever be mature enough for a Spinozist inspiration? It happened once with Bergson: the beginning of Matter and Memory marks out a plane that slices through the chaos -both the infinite movement of a substance that continually propagates itself, and the image of thought that everywhere continually spreads a pure consciousness by right (immanence is not immanent "to" consciousness but the other way around).
스피노자는 내재성이란 오직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무한의 움직임에 의해 횡단되는 평면이며, 강도적인 좌표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철학자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철학자들의 왕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는 초월성과 타협하지 않고 모든 곳에서 초월성을 추적한 유일한 철학자일 것입니다. 윤리학의 마지막 책에서 그는 무한의 움직임을 만들어냈고 세 번째 종류의 지식에서 생각에 무한한 속도를 부여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음악, 토네이도, 바람, 현악기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번개와 같은 압축으로 엄청난 속도를 달성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내재성 안에만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철학의 선철학적 전제를 충족시켰기 때문에 철학을 성취했습니다. 내재성은 스피노자주의의 실체와 양상들을 다시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스피노자주의의 실체와 양상 개념은 그 전제로서 내재성의 평면을 다시 가리킵니다. 이 평면은 우리에게 연장과 사유라는 두 가지 측면, 혹은 오히려 존재의 힘과 사유의 힘이라는 두 가지 힘을 제시합니다. 스피노자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헛되이 벗어나려고 애쓰는 내재성의 현기증입니다. 우리는 스피노자의 영감을 받을 만큼 충분히 성숙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베르그송과 함께 한 번 일어났습니다: 『물질과 기억』의 도입부는 끊임없이 자신을 전파하는 실체의 무한한 움직임과 모든 곳에서 순수한 의식을 끊임없이 전파하는 사유의 이미지(내재성은 의식 '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모두 카오스를 관통하는 평면을 보여줍니다.

The plane is surrounded by illusions. These are not abstract misinterpretations or just external pressures but rather thought's mirages. Can they be explained by the sluggishness of our brain, by the readymade facilitating paths [frayage] of dominant opinions, and by our not being able to tolerate infinite movements or master the infinite speeds that crush us (so that we have to stop the movement and make ourselves prisoners of the relative horizon once more)? Yet it is we ourselves who approach the plane of immanence, who are on the absolute horizon. It is indeed necessary, in part at least, that illusions arise from the plane itself, like vapors from a pond, like pre-Socratic exhalations given off by transformations of the elements that are always at work on the plane. Artaud said that "the plane of consciousness" or limitless plane of immanence -what the Indians called Ciguri- also engenders hallucinations, erroneous perceptions, bad feelings. We must draw up a list of these illusions and take their measure, just as Nietzsche, following Spinoza, listed the "four great errors." But the list is infinite. First of all there is the illusion of transcendence, which, perhaps, comes before all the others (in its double aspect of making immanence immanent to something and of rediscovering a transcendence within immanence itself); then the illusion of universals when concepts are confused with the plane. But this confusion arises as soon as immanence is posited as being immanent to something, since this something is necessarily a concept. We think the universal explains, whereas it is what must be explained, and we fall into a triple illusion -one of contemplation or reflection or communication. Then there is the illusion of the eternal when it is forgotten that concepts must be created, and then the illusion of discursiveness when propositions are confused with concepts. It would be wrong to think that all these illusions logically entail one another like propositions, but they resonate or reverberate and form a thick fog around the plane.
평면은 환상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이는 추상적인 오해들이나 외부의 압력이 아니라 사유의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그것들은 우리 두뇌의 둔함, 지배적 의견들의 기성화된 통로[마모], 그리고 무한한 움직임들을 견디지 못하거나 우리를 짓누르는 무한한 속도들을 숙달하지 못하는 것(그래서 우리는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한번 상대적 지평의 포로가 되어야 하는)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절대적인 지평선에 있는 내재성의 평면에 접근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연못의 수증기처럼, 소크라테스 이전의 날숨처럼, 평면에서 항상 작용하는 요소의 변형에 의해 발산되는 환상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평면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 실제로 필요합니다. 아르토는 "의식의 평면" 또는 무한한 내재성의 평면, 즉 인디언들이 시구르라고 부르는 평면도 환각, 잘못된 인식, 나쁜 감정을 일으킨다고 말했습니다. 스피노자에 이어 니체가 "네 가지 큰 오류"를 열거한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착각의 목록을 작성하고 그 정도를 측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목록은 무한합니다. 우선 다른 모든 착각보다 먼저 나타나는 초월성의 착각(내재성을 어떤 것에 내재화시키고 내재성 자체에서 초월성을 재발견하는 이중적 측면)이 있고, 개념들이 평면과 혼동되는 보편성의 착각이 그다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혼동은 내재성이 어떤 것에 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순간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이 어떤 것은 필연적으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설명되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보편적인 것이 설명한다고 생각하며 이에 따라 관조나 성찰 또는 소통이라는 세 가지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다음 개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영원한 것에 대한 착각과 명제들이 개념들과 혼동되는 담론성에 대한 착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착각들이 명제들처럼 논리적으로 서로를 수반한다고 생각하면 잘못이지만, 그들은 공명하거나 반향하며 평면 주위에 짙은 안개를 형성합니다.

From chaos the plane of immanence takes the determinations with which it makes its infinite movements or its diagrammatic features. Consequently, we can and must presuppose a multiplicity of planes, since no one plane could encompass all of chaos without collapsing back into it; and each retains only movements which can be folded together. The history of philosophy exhibits so many quite distinct planes not just as a result of illusions, of the variety of illusions, and not merely because each plane has its own, constantly renewed, way of restoring transcendence. More profoundly, it is because each plane has its own way of constructing immanence. Each plane carries out a selection of that which is due to thought by right, but this selection varies from one plane to another. Every plane of immanence is a One-All: it is not partial like a scientific system, or fragmentary like concepts, but distributive—it is an "each." The plane of immanence is interleaved. When comparing particular cases it is no doubt difficult to judge whether there is a single plane or several different ones: do the pre-Socratics have the same image of thought, despite the differences between Heraclitus and Parmenides? Can we speak of a plane of immanence or image of so-called classical thought that continues from Plato to Descartes? It is not just the planes that vary but the way in which they are distributed. Are there more-or-less close or distant points of view that would make it possible to group different layers over a fairly long period or, on the contrary, to separate layers on what seemed to be a common plane? Where, apart from the absolute horizon, would these points of view come from? Can we be satisfied here with a historicism, or with a generalized relativism? In all these respects, the question of the one or the multiple once again becomes the most important one, introducing itself into the plane.
내재성의 평면은 카오스로부터 무한한 움직임이나 도식적 특징을 만드는 한정을 취합니다. 결과적으로, 하나의 평면은 카오스로 다시 붕괴되지 않고 모든 카오스들을 포괄할 수 없으며, 각각의 평면은 서로 접힐 수 있는 움직임만을 보유하기 때문에 우리는 평면들의 다양체를 전제할 수 있고 또 전제해야 합니다.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많은 별개의 평면들이 나타나는 것은 단지 환영의 결과, 다양한 환영의 결과, 그리고 각 평면이 초월성을 회복하는 고유하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더 심오한 이유는 각 평면마다 내재성을 구성하는 고유한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각 평면은 사유에 따른 선별을 수행하지만, 이 선별은 각 평면마다 다릅니다. 내재성의 모든 평면은 하나-전체입니다: 과학적 체계처럼 부분적이거나 개념처럼 파편적이지 않고, "각각"이라는 분산적인 것입니다. 내재성의 평면은 중첩되어 있습니다. 특수한 경우들을 비교할 때 하나의 평면이 있는지 아니면 여러 개의 다른 평면이 있는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동일한 사유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플라톤에서 데카르트까지 이어지는 소위 고전적 사유의 내재성의 평면 또는 이미지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평면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평면이 분포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상당히 긴 기간에 걸쳐 서로 다른 층위를 그룹화하거나 반대로 공통된 평면으로 보이는 층위를 분리할 수 있는 다소 가깝거나 먼 시점이 존재할까요? 절대적인 지평선 외에 이러한 관점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역사주의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일반화된 상대주의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이 모든 측면에서 하나 또는 다중에 대한 질문은 다시 한 번 가장 중요한 질문이되어 평면에 자신을 도입합니다.

In the end, does not every great philosopher lay out a new plane of immanence, introduce a new substance of being and draw up a new image of thought, so that there could not be two great philosophers on the same plane? It is true that we cannot imagine a great philosopher of whom it could not be said that he has changed what it means to think; he has "thought differently" (as Foucault put it). When we find several philosophies in the same author, is it not because they have changed plane and once more found a new image? We cannot be unaware of Biran's complaint when he was near to death: "I feel a little too old to start the construction again." On the other hand, those who do not renew the image of thought are not philosophers but functionaries who, enjoying a ready-made thought, are not even conscious of the problem and are unaware even of the efforts of those they claim to take as their models. But how, then, can we proceed in philosophy if there are all these layers that sometimes knit together and sometimes separate? Are we not condemned to attempt to lay out our own plane, without knowing which planes it will cut across? Is this not to reconstitute a sort of chaos? That is why every plane is not only interleaved but holed, letting through the fogs that surround it, and in which the philosopher who laid it out is in danger of being the first to lose himself. That so many fogs arise is explained in two ways. Firstly, because thought cannot stop itself from interpreting immanence as immanent to something, the great Object of contemplation, the Subject of reflection, or the Other subject of communication: then transcendence is inevitably reintroduced. And if this cannot be avoided it is because it seems that each plane of immanence can only claim to be unique, to be the plane, by reconstituting the chaos it had to ward off: the choice is between transcendence and chaos.
결국 모든 위대한 철학자는 새로운 내재성의 평면을 마련하고 새로운 존재의 실체를 도입하고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를 그려냄으로써 같은 평면에 두 명의 위대한 철학자가 있을 수 없도록 만들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것의 의미를 바꾸었다고 말할 수 없는 위대한 철학자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푸코가 말했듯이). 우리가 같은 저자에게서 여러 가지 철학을 발견할 때, 그것은 그들이 평면을 바꾸고 다시 한 번 새로운 이미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죽음을 눈앞에 둔 비란의 불평을 우리는 모를 리가 없습니다: "나는 다시 구축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느낍니다." 반면에 사유의 이미지를 새롭게 하지 않는 사람들은 철학자가 아니라 기성 사상을 즐기면서 문제를 의식하지도 않고 자신이 모델로 삼는 사람들의 노력조차 알지 못하는 기능주의자들입니다. 그렇다면 때때로 함께 엮이고 때때로 분리되는 이러한 모든 층이 있다면 어떻게 철학을 진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평면을 가로지르는지도 모른 채 우리 자신의 평면을 배치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비난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일종의 카오스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닌가요? 그렇기 때문에 모든 평면은 끊어져있을뿐만 아니라 구멍이 뚫려있어 그것을 둘러싼 안개를 통과하고 그것을 배치 한 철학자가 가장 먼저 자신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안개가 생기는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유는 내재성을 관조의 대상, 성찰의 주체 또는 소통의 타자라는 위대한 대상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을 스스로 멈출 수 없기 때문에 초월성이 필연적으로 다시 도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피할 수 없다면 각 내재성의 평면은 그것이 막아야 했던 카오스를 재구성함으로써만 고유한 평면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은 초월과 카오스 중 하나입니다.

Example 4
When the plane selects what is by right due to thought, in order to make its features, intuitions, directions, or diagrammatic movements, it relegates other determinations to the status of mere facts, characteristics of states of affairs, or lived contents. And, of course, philosophy will be able to draw out concepts from these states of affairs inasmuch as it extracts the event from them. That which belongs to thought by right, that which is retained as diagrammatic feature in itself, represses other rival determinations (even if these latter are called upon to receive a concept). Thus Descartes makes error the feature or direction that expresses what is in principle negative in thought. He was not the first to do this, and "error" might be seen as one of the principal features of the classical image of thought. We know that there are many other things in this image that threaten thinking: stupidity, forgetfulness, aphasia, delirium, madness; but all these determinations will be considered as facts that in principle have only a single effect immanent in thought-error, always error. Error is the infinite movement that gathers together the whole of the negative. Can this feature be traced back to Socrates, for whom the person who is wicked (in fact) is someone who is by right "mistaken"? But, if it is true that the Thaetetus is a foundation of error, does not Plato hold in reserve the rights of other rival determinations, like the delirium of the Phaedrus, so that it seems to us that the image of thought in Plato plots many other tracks?
평면이 특질들, 직관들, 방향들 또는 다이어그램적 움직임들을 만들기 위해 사유에 근거해 정당한 것을 선별할 때, 다른 한정들은 단순한 사실들, 상황의 특징들, 또는 삶의 내용들의 지위로 밀려나게 됩니다. 물론 철학은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사건을 추출하는 것처럼 개념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사고에 당위적으로 속하는 것, 그 자체로 다이어그램적 특징으로 유지되는 것은 다른 경쟁적 한정들을 억압한다(비록 후자가 하나의 개념을 받아들이기 위해 요구되더라도). 따라서 데카르트는 오류를 사고에서 원칙적으로 부정적인 것을 표현하는 특질 또는 방향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처음은 아니었고, '오류'는 고전적 사고 이미지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이미지에 사고를 위협하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리석음, 건망증, 실어증, 섬망, 광기; 그러나 이러한 모든 한정들은 원칙적으로 생각-오류에 내재된 단 하나의 효과, 즉 항상 오류를 갖는 사실로 간주될 것입니다. 오류는 모든 부정적인 것을 하나로 모으는 무한한 움직임입니다. 이 특질은 (사실) 사악한 사람이 바로 "실수"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까? 그러나 만약 테아이테토스가 오류의 기초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의 착란과 같은 다른 라이벌 한정의 권리를 유보하여 플라톤의 사고 이미지가 다른 많은 궤도를 그리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A major change occurs, not only in concepts but in the image of thought, when ignorance and superstition replace error and prejudice in expressing what by right is the negative of thought: Fontenelle plays a major role here, and what changes at the same time is the infinite movements in which thought is lost and gained. There is an even greater change when Kant shows that thought is threatened less by error than by inevitable illusions that come from within reason, as if from an internal arctic zone where the needle of every compass goes mad. A reorientation of the whole of thought becomes necessary at the same time as it is in principle penetrated by a certain delirium. It is no longer threatened on the plane of immanence by the holes or ruts of a path that it follows but by Nordic fogs that cover everything. The meaning of the question of "finding one's bearings in thought" itself changes.
무지와 미신이 오류와 편견을 대체하여 사유의 부정적인 것을 표현할 때 개념뿐만 아니라 사유의 이미지에도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폰테넬은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동시에 변화하는 것은 사유의 상실과 획득이 이루어지는 무한한 움직임입니다. 칸트가 사유는 오류에 의해 위협 받기보다는 마치 모든 나침반의 바늘이 미쳐가는 내적 극지방처럼 이성 내부에서 오는 불가피한 환상에 의해 위협 받는다는 것을 보여줄 때 더 큰 변화가 있습니다. 사유가 어떤 망상에 의해 본질적으로 관통되면서 동시에 사유 전체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내재성의 평면에서 그것이 따르는 길의 구멍이나 진부함에 의해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덮는 북구의 안개에 의해 위협받습니다. "사유의 방향을 찾는 것"이라는 질문의 의미 자체가 달라집니다.

A feature cannot be isolated. In fact, the movement given a negative sign is itself folded within other movements with positive or ambiguous signs. In the classical image, error does not express what is by right the worst that can happen to thought, without thought being presented as "willing" truth, as orientated toward truth, as turned toward truth. It is this confidence, which is not without humor, which animates the classical image—a relationship to truth that constitutes the infinite movement of knowledge as diagrammatic feature. In contrast, in the eighteenth century, what manifests the mutation of light from "natural light" to the "Enlightened" is the substitution of belief for knowledge -that is, a new infinite movement implying another image of thought: it is no longer a matter of turning toward but rather one of following tracks, of inferring rather than grasping or being grasped. Under what conditions is inference legitimate? Under what conditions can belief be legitimate when it has become secular? This question will be answered only with the creation of the great empiricist concepts (association, relation, habit, probability, convention). But conversely, these concepts, including the concept of belief itself, presuppose diagrammatic features that make belief an infinite movement independent of religion and traversing the new plane of immanence (religious belief, on the other hand, will become a conceptualizable case, the legitimacy or illegitimacy of which can be measured in accordance with the order of the infinite). Of course, we find in Kant many of these features inherited from Hume, but again at the price of a profound mutation, on a new plane or according to another image. Each time there are great acts of daring. When the distribution of what is due to thought by right changes, what changes from one plane of immanence to another are not only the positive or negative features but also the ambiguous features that may become increasingly numerous and that are no longer restricted to folding in accordance with a vectorial opposition of movements.
하나의 특질은 고립될 수 없습니다. 사실, 부정적인 기호를 부여받은 움직임은 그 자체로 긍정적이거나 모호한 기호들을 가진 다른 움직임들 안에 접혀 있습니다. 고전적 이미지에서 오류는 사유가 '기꺼이' 진리로 재현되고, 진리를 지향하고 진리를 향해 전환되지 않고서는 사유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고전적 이미지, 즉 지식의 무한한 움직임을 다이어그램적 특질로 구성하는 진리와의 관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것은 유머가 없는 것이 아닌 바로 이러한 자신감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18세기에 '자연광'에서 '계몽광'으로 빛의 변이를 나타내는 것은 지식에 대한 믿음의 대체, 즉 사유의 또 다른 이미지를 암시하는 새로운 무한한 움직임입니다: 그것은 더 이상 방향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궤적을 따라가는 것, 파악하거나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추론하는 것의 문제입니다. 추론은 어떤 조건에서 정당한가? 어떤 조건 하에서 믿음이 세속화되었을 때 정당한 믿음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위대한 경험주의 개념들(연상, 관계, 습관, 확률, 관습)을 만들어야만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이라는 개념 자체를 포함한 이러한 개념들은 믿음을 종교로부터 독립된 무한한 운동으로 만들고 새로운 내재성의 평면을 가로지르는 다이어그램적 특징들을 전제합니다(반면에 종교적 믿음은 개념화 가능한 경우가 될 것이며, 그 정당성 또는 불법성은 무한의 질서에 따라 측정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칸트에서 흄으로부터 물려받은 이러한 많은 특징들을 발견하지만, 다시 새로운 평면에서 또는 다른 이미지에 따라 중대한 돌연변이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다. 매번 위대한 대담한 행위들이 있습니다. 정당한 사유로 여겨지는 것에 따라 분포가 변화할 때, 내재성의 한 평면에서 다른 평면으로 변화하는 것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특징들뿐만 아니라 갈수록 수가 증가하고 더 이상 운동들의 벡터적 대립에 따라 접히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 모호한 특징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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